2011년 1학기(목원대).hwp
기독교 윤리학
2011년 1학기
김 병 권 교수
목원대학교
제 1 장 : 기독교윤리학 서론
1-1 주제: 기독교윤리학에 대한 서론적 이해
Ⅰ. 기독교윤리학에 대한 어원적 이해
1. ‘윤리’의 어원적 의미
-.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생활 습속에 의해 행동을 규제받게 됨.
-. 어원적으로 볼 때, ‘윤리’는 이렇게 형성된 사회의 생활습속과 관계됨.
-. 한자어, 윤리(倫理) :
=. ‘윤(倫)’ : 사람 ‘인’(人)자 + 덩어리 ‘륜(侖)’자의 합성어. ‘사람 덩어리’ ‘무리’
=. ‘이(理)’ : 이치․이법(理法) 또는 도리 등의 뜻을 담고 있다.
-. 영어, ‘Ethics’ : 헬라어 ‘에토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 ‘에토스’는 “자연환경의 특성에 순응하고 각기 그 집단과 더불어 생활하여 온 인간이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간 방식과 습속”을 의미한다.
-. 결국 어원적으로 볼 때 ‘윤리’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첫째, 인간 모임으로서 의 사회 또는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며, 둘째, 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이치가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
2. ‘도덕’의 어원적 의미
-. 영어에서 ‘도덕’을 의미하는 ‘moral’은 라틴어 ‘모레스’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 ‘모레스’는 헬라어의 ‘에토스’와 같이 ‘사회의 습속 또는 관습’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 사전적 의미에서 ‘도덕’은 “일정한 사회 내에서 그 사회 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그리고 구성원 상호 간에서의 행위를 규제하는,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규범의 총체를 말한다.”
3. ‘윤리’ ‘도덕’ ‘윤리학’의 용어 사용
-. ‘윤리’와 ‘도덕’을 이 책에서는 큰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함.
-. ‘윤리’와 ‘윤리학’은 대체로 구별하지 않고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 영어의 ‘Ethics’는 ‘윤리’ 또는 ‘윤리학’으로 번역된다.
=. 국어사전에서도 ‘윤리학’의 준말을 ‘윤리’라고 정의한다.
4. 어원적 의미에 대한 이해에서 제기되는 질문 두 가지
1) 공동체 또는 사회 안에 ‘습속’(習俗)이나 ‘관습’(慣習)이 왜 생기는가?
-. 혼돈, 공허, 흑암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 창조의 일환.
-. 습속과 관습은 ‘사회적 질서’를 통해 인간 공동체를 영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 물론,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질서는 타락과 구속의 과정을 밟게 됨.
2) ‘습속’과 ‘관습’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는 왜, 어떻게 생기는가?
-. 사람의 공동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진단하시는 데서 확인될 수 있음.
-.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붙여주신 것이 최초 공동체임.
-.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창출해주심으로써, 창조 때 가진 인간의 공동체성을 계속 견지하게 해주심.
5. 기독교윤리학의 일반적 특성
-.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믿음 공동체 또는 교회) 안에서 형성된 습속과 관습을 공부하는 학문.
-. 믿음 공동체 또는 교회의 생성자이며 주인이신 예수는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믿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습속과 관습은 관찰이나 파악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따름과 순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 본회퍼: “기독교 윤리학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 습속과 관습의 토대이자 기준은 예수이다.
=. 예수는 구원자, 살리는 자로 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기독교윤리학의 기본적 특징은 구원의 윤리, 살림의 윤리가 되어야 함.
6. 기독교윤리학의 위와 같은 성격은 신구약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과 일치함
-. 에덴 동산 공동체에서 윤리적 규범이나 원리를 먼저 주고 삶을 영위케 하지 않으심.
-. 아브라함을 불러내고, 언약을 주실 때도 윤리적 규범이나 원리를 먼저 준 것이 아님.
-. 애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불러내실 때도, 윤리적 규범이나 원리를 먼저 준 것 아님.
-. 시내산 언약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것을 먼저 상기시키시고, 언약을 주심.
Ⅱ. 기독교 윤리학의 구성 분야 : 방법론, 성경윤리, 응용윤리.
1. 방법론 :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들어감.
-. 기독교 윤리학도 하나의 학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방법론을 갖고 있어야.
-. 수업에서 방법론과 관련하여 다룰 내용들:
=.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에 대한 이해’
=. ‘윤리적 추론의 네 가지 차원과 기독교 윤리학의 유형들’
=.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2. 성경윤리
-. 방법론이 기독교 윤리학의 틀 또는 형식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성경윤리는 기독교 윤 리학의 내용과 관계됨.
-. 기독교 윤리학이 ‘기독교’적 특성을 가지려면, 성경윤리를 기본 내용으로 삼아야 함.
-. 수업에서 성경윤리와 관련하여 다룰 내용들
=. ‘성경과 기독교 윤리,’ ‘구약윤리의 주요 내용,’ ‘신약윤리의 주요 내용.’
3. 응용윤리
-. 응용 윤리는 방법론과 성경윤리에 기초하여 윤리적 이슈를 실제로 다루는 분야.
-. 수업에서 응용윤리와 관련하여 다룰 내용들
=. 시대의 윤리적 과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추구하는 내용들.
-. 목회 윤리, 기독교 평화 윤리, 생태계 윤리, 경제 윤리 등 소 분과로 나뉘어 다루어짐.
*. 보론: 일반윤리학과 기독교윤리학의 차이점
-. 일반 윤리학은 가치판단을 위한 기준을 찾는 데 초점을 둠.
=. 그 기준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의까지도 포함해서.
=. 따라서 일반 윤리학은 ‘분리를 위한 벽’을 만드는 데 초점.
-. 일반윤리학은 “선악을 아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면, 기독교윤리학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함.
-. 기독교 윤리학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데 초점을 둠.
=. ‘분리를 위한 벽’을 허무는 데 초점.
-. 기독교윤리학은 예수님을 주로 삼고 따르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일반 윤리학은 예수조차도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를 찾는 데 초점을 둠.
=.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의’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신 예수를 판단하여 정죄함.
Ⅲ. 기독교윤리학 공부를 위한 제안
1. 학문하는 기본 자세를 견지:
“학문이란 자신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 (또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 들여), 변화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2. 정보의 양을 채우는 공부보다는 그릇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함.
3. 교수는 ‘멍석을 까는 자’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기 과제를 선정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함.
4. 교수의 말이나 책의 내용은 70-30% 정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창조적 사고를 위한 촉매제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함.
5. 정답과 정직한 답 사이에서 창조적 사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함.
6.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자세가 필요함.
7.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추상력을 키우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함.
8. 비판이나 논쟁을 위한 공부보다는 대안을 모색하는 공부가 바람직함.
1-2 주제: 기독교윤리학이 놓인 자리 검토(1)
- 21세기 초, 세상 현실 이해 -
Ⅰ. 지구촌과 한국 사회의 개괄적 현황 이해를 위한 글
1.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지구상에는 모두 63억여명이 살고 있지만 만약 이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줄여본다면 어떨까요. 100명 중 52명이 여자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이 어린이이고 70명이 어른입니다. 그 중 7명이 노인입니다. 70명이 유색인종이고 30명이 백인입니다. 61명이 아시아인이고, 13명이 아프리카인, 13명이 남․북아메리카인, 12명이 유럽인, 나머지는 남태평양 지역의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이 영양상태가 충분하지 않고, 한 사람은 아사 직전입니다. 하지만 15명은 비만 상태입니다. 6명이 모든 부(富)의 59%를 독점하고 있고 전부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를 갖고 있으며 20명은 겨우 2%를 나눠 갖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이 먹을 것을 비축하고 있고,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7명 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마을에서 한 사람이 대학을 나왔고, 두 사람이 컴퓨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한 살육과 무장 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은 20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2. 한국이 100명의 마을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4,900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을 100명이라고 생각하고, 100명이 모여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이 마을의 100명 중 19명은 아이들(15세 미만)이고 81명은 어른들(15세 이상)인데, 어른 10명은 노인(65세 이상이다)이다. 이 마을 사람 100명 중 52명이 남성이고, 48명은 여성으로 지구촌의 다른 마을에 비해 여성이 2명 적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서울에 21명, 부산에 7명, 대구와 인천에 각각 5명씩, 그리고 광주와 대전에 3명, 울산에 2명이 살고 있다. 경기에는 23명, 경남에 6명, 경북에 5명, 충남과 전남에 각각 4명이 살고, 강원과 충북, 전북에 3명이 살고 있고 가장 남쪽에 있어 따뜻한 제주에는 1명이 살고 있다. 서울과 인천, 경기의 수도권에 100명 중 거의 절반인 49명이 몰려 살고 있는데, 이 수치는 5년 전에 비해 2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평균 3명이 한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총 33가족이 살고 있다. 이 33가족 중에서 혼자서 사는 가족이 일곱집, 2명이 사는 가족이 일곱집, 3명이 사는 가족이 일곱집, 4명이 사는 가족이 아홉집, 나머지 5명 이상이 사는 가족은 세 집 정도 되어서 실제로는 4명이 사는 집이 제일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을에 있는 집이 34채로, 모든 가족이 살기에 충분하고 오히려 1채 2정도가 남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수도권에는 집이 부족하고 사람이 적은 지역에는 빈 집이 생긴다는 것이다. 특히 33가족 중 실제로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은 21가족(62명) 정도고, 12가족(38명)은 집이 없어서 남의 집에 살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집 값 문제로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많다. 33가족 중에서 한 달간 그 가족이 모두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월 100만 원 이하인 집이 다섯 집이고, 월 100-200만 원인 집이 열한 집, 월 200-300만 원인 집이 아홉 집, 월 300-400만 원인 집이 네 집, 월 400만 원 이상인 집은 네 집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게 버는 사람 10명의 재산을 합해도 마을 재산의 2퍼센트가 채 안 될 정도다. 이에 비해 가장 많이 버는 사람 10명의 재산을 다 합하면 마을 재산의 30퍼센트나 된다고 하니, 적게 버는 사람과 많이 버는 사람의 소득 차가 크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마을 사람 100명 중 3명은 소득이 거의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낸 세금을 보조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Ⅱ. 세계 질서(체제) 형성과 재편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위한 글
*. 현실 1: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카리브해 섬이었습니다. . . . . . . 이 섬에는 ‘타이노’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와 함께 왔던 당시의 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 거기에 도착했을 때 콜럼버스와 그 일행은 어쩌면 에덴동산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토록 자연이 아름답고, 또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성서 속의 낙원 에덴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물건을 별로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더위 때문에 옷도 별로 입지 않고, 거의 벌거벗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농경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뛰어난 농법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작물을 동시에 함께 심습니다. 그렇게 하면 관리를 하거나 손댈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밭에서는 일주일 중 몇 시간밖에 일하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바다로 들어가면 곧장 얻을 수 있고, 그것도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지내느냐 하면, 무엇보다 음악이 중요하였습니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시간, 악기를 가지고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이 대단히 많습니다. 혹은 이야기꾼이 모두에게 이야기를 하는 시간, 혹은 장식물을 만드는 시간, 그들은 솜씨가 대단히 뛰어나서 머리장식이라든가, 목걸이라든가, 귀걸이라든가, 다양한 것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즉, 예술활동인 것입니다.......
콜럼버스 일행은 그들을 노동자로 부려먹고 싶었지만,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할 리는 없습니다. 타이노족 사람이 본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8시간이나 10시간 동안 노동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 . . . .
(그러나) 콜럼버스는 여기에서 노예제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였습니다. 타이노족은 거의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칼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곧바로 노예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노족은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죽어갑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병으로 죽거나 또는 버티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죽어갑니다. 울화병으로 죽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을 낳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노예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노족은 백년 사이에 전멸했습니다.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노동력이 없어지니까, 아프리카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카리브해의 섬에서는 어디서든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현재, 카리브해 섬에는 원주민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흑인이거나 흑백 혼혈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스스로 이 장시간의 노동 제도를 선택했는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를 넓게 생각해보면, 관리된 10시간 또는 12시간을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일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생활방식입니다. 공장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일합니다. 재미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회사가 결정한 것이니까 하는 일입니다. 가끔 흥미로운 게 있어서 그것이 즐겁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극히 행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며, 기본적으로는 돈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현실 2 :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 어떤 한국 기업이 ‘진출’하였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이후로 신발을 만들어 팔았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 노동 운동이 성장하면서 수지가 맞지 않아 문을 닫고 새로운 가구-목재업으로 업종 전환을 했다. 처음에 이 기업은 맨발로 다니던 원주민들에게 고무신을 무료로 준다. 그들은 발이 편하고 안전해서 이 고무신을 매우 좋아한다. 시간이 흘러 고무신이 다 닳자 그들은 또 고무신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업은 ”더 이상 공짜로 줄 수 없으니 돈을 벌라“라고 한다. 돈 없이 살던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버느냐고 묻는다. 이제는 맨발로 걸으면 발이 아프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신발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업은 ”우리가 너희네 숲을 개발할 터이니 거기에 와서 일을 하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은 고무신을 사기 위하여 개발의 현장으로 노동력을 팔러 간다. 처음에는 고무신만 사서 썼지만 갈수록 많은 것을 돈을 통해 해결하게 된다. 차츰 원주민의 자립적 힘들은 사라지고 개발 이데올로기와 돈의 위력이 이 마을을 지배하게 되었다. 마침내 원주민들은 마을에서 사라졌고 남은 것은 파괴된 숲과 강이었다.
*. 현실 3 : 신발 제조회사 나이키는 자사를 ‘네트워크 회사’로 칭했다. 이는 나이키가 관리, 디자인, 영업, 홍보 분야에 8천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으나, 제조 분야는 독립적인 하청 계약자들이 고용한 약 7만 5천 명의 근로자 손에 맡겼음을 뜻한다. 외부에서 원천이 조달된 나이키의 제조 형태는 대부분 인도네시아에서 이뤄진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73달러에서 135달러 정도에 팔리는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시간당 최저 15센트의 임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고용한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약 5.6달러의 원가에 제조하는 곳이다. 노동자들은 회사 막사에서 기거한다. 노조도 없고 시간외 근무는 때로 강제적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파업이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파업을 해산하기 위하여 군대까지도 출동될 수 있다.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 운동화를 선전하고 1992년 공식으로 지불받은 2천만 달러는 그 신발을 제조한 인도네시아 공장의 연간 임금 총액보다도 많다.
*. 현실 4 : 교토 의정서는 리우 회담 5년 뒤인 1997년 12월에 채택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2008-2012년에 선진국들이 자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보다 평균 5.2% 줄이는 것이다. 교토 의정서의 수정안은 2001년 7월 23일 세계 178개국 환경장관들이 유엔 기후 회의에 모여 통과시켰다. 그런데 세계 178개국이 모인 이 회의에 미국만은 불참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 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온실 가스 감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교토 의정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 현실 5 : 이스라엘은 1980년 중반까지는 핵무기와 관련하여 ‘모호성’의 원칙을 고수했다. 즉 분명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핵무기 보유 사실을 부인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기술자로 일했던 모르데차이 바누누가 1986년 10월 5일 디모나의 주요 시설을 몰래 촬영한 사진 57장과 함께 자신의 증언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에 공개했다. 이 사진을 정밀하게 검토한 핵전문가들은 그 때 이스라엘에 이미 약 200기의 핵무기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제재를 가하지 않은기의 가 아니라, 미국은 이스라엘에 매년 20억 미국은군사원조와 7억2천만 달러국은경제원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태도걼이다“북한의 핵무기 제조 의혹”과 관련하여 1994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이 취한 태도와 비교해 보면, 국제 관계에서 형평성의 원칙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현실 6: 국제법과 관련한 한 지식인의 한탄: “국제법이란 자연계의 약육강식과도 흡사한 국가 간의 질서를 그럴 듯한 학술용어와 알쏭달쏭한 논리로 체계화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강국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집적에 다름 아닌 국제관행, 조리보다는 힘의 균형에 더 의지하는 조약, 그런 것들에서 현학과 궤변을 털어버린다면 약육강식의 법칙 외에 무엇이 더 남겠는가.”
*. 현실 7 : “그 잘 살던 나우루가 외국에 구걸하는 까닭은”
타이완(臺灣) 영자지 타이베이 타임스에 따르면 타이완 정부는 3월부터 남태평양 섬나라 나우루(Nauru)에 매일 아침식사를 무료 급식하고 있다. 나우루 전역의 유치원·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대상이다. 나우루에는 유치원이 6개, 초등학교가 2개 있다. 고교와 공무원 1000명에게는 도시락이 싼값에 공급된다. 남태평양 순방길에 올랐던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은 나우루에 들러 지속적인 경제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타이완은 2002년 중국의 달러 외교전에 패배해 나우루로부터 단교당했다. 그러다 대대적인 경제 지원을 통해 2006년 국교를 복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나우루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한때 2만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라가 어쩌다 어린이들 식사까지 외국으로부터 얻어먹는 처지가 됐을까.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섬나라 나우루는 국토 면적이 21㎢에 불과하다.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다. 인구는 2010년 현재 1만 명 정도다.
산호초로 둘러싸인 이 작은 섬에는 갈매기와 앨버트로스(신천옹)가 천지였다. 섬을 찾은 새들은 산호초와 섬 위에 수천 년 동안 똥을 쌓았다. 1888년 나우루를 찾은 독일 자본가들은 섬 전체에서 대량의 인광석을 발견했다. 인광석은 화학비료 재료로 쓰인다. 새들의 똥이 산호충과 결합해 인광석으로 변했고 나우루 전체가 인광석 노천광이 된 것이다. 이후 독일·호주·뉴질랜드·영국 자본이 나우루인들을 고용해 노천에서 인광석을 실어갔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68년 신탁통치가 종료되면서 나우루는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인광석 광산은 나우루 소유가 됐다. 나우루 정부는 외국 자본이 한 그대로 인광석을 채굴했다. 땅을 걷어내면 순도 높은 인광석이 나오니 기술도 필요없었다. 현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우루 주민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채굴장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농장은 모조리 인광석 광산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통조림을 수입해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었다. 세금도 없었다. 초등학교 공짜, 의료비 공짜, 주택도 공짜였다. 1980년대 중반 나우루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기도 했다. 한번도 외국을 나간 적 없는 사람들이 전세기를 타고 하와이와 피지와 싱가포르로 쇼핑관광을 가는가 하면 전세기로 호주 멜버른으로 날아가 럭비 경기를 구경했다. 고급 스포츠카도 수입했다.
나우루에는 일주도로가 하나 있다. 길이는 18㎞에 제한속도가 40㎞였다. 지금은 곳곳이 부서져 차량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 주민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찰 간부 한 명이 최고급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를 수입했는데 운전석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몸이 뚱뚱해 제대로 타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주민은 "심지어 1달러 지폐를 화장지로 쓴 미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1990년대 초 문제가 두 가지 터졌다. 전 주민의 90%가 비만이고 50%가 당뇨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채소와 어류 대신에 수입한 가공식품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지표면을 뒤덮었던 인광석이 고갈됐다는 사실은 더 심각했다. 정부가 부랴부랴 어업 부활을 위해 항구를 개발했다. 주민들은 거기에서 고기를 잡는 대신 해수욕을 즐겼다. 농장을 개발하려 했지만 표토(表土)가 사라진 땅에는 농사가 불가능했다.
뼈만 남은 땅에 관광산업 개발은 더 불가능했다. 낮아진 지표 때문에 나우루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수면 상승 효과의 대표적인 피해국가가 됐다. 1990년대 나우루 정부는 외국에 투자해둔 부동산을 담보로 외채를 빌려썼다. 세금 떼먹는 외국인이나 테러리스트에게 국적을 팔고 스위스식 비밀은행업도 벌였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나우루은행 자산을 동결했다. 그 해 나우루 정부는 현금 지원을 대가로 호주 난민수용소를 자기 땅에 유치했다. 2003년 인광석이 공식적으로 고갈됐다. 2005년 12월에는 국적기 에어나우루가 운항을 중단했다. 2008년에는 호주가 난민수용소를 폐쇄했다. 지구상에서 나우루를 위한 돈줄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 무렵 타이완이 나타났다. 2006년 타이완은 국교 복원을 조건으로 경제협력을 제안했다. 중국과 살벌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때라 타이완 정부는 나우루→피지→서울을 경유해 나우루 대표를 타이베이로 데려가 수교를 복원했다. 이후 타이완은 기술자들을 보내 채소 농장을 건설했다. 중단됐던 국적기 에어 나우루도 2006년 타이완 자본으로 '아워 에어라인(Our Airline)'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지난해 12월 나우루는 그루지야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구소련지역 소국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야를 승인했다. 외교가는 "그루지야를 견제하는 러시아가 나우루에 5000만달러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까지가 나우루 어린이들이 타이완으로부터 밥을 얻어먹게 된 사연이다.
Ⅲ. 한국 사회의 문화 이해를 위한 기본 개념
1. 문화: 삶의 무늬
1) 삶: 생산과 소비로서의 삶.
2) “생산의 무늬”로서의 문화 vs. “소비의 무늬”로서의 문화.
3) 건전한 문화 생활이 아니라 건전한 생활 문화가 정착돼야.
2. 현대 한국의 대중 문화: “소비의 무늬”로서의 문화가 주류.
1) 소비(문화)의 네 가지 단계: 단순성--> 다양성--> 과시성 (보복성)--> 정체성
2) 가능한 한 빨리 과시성 소비 문화에서 정체성 소비 문화로 정착돼야.
3. 현대 한국 대중 문화의 두 가지 기본틀
1) 서구 세계 편향적 문화
ㄱ. 서구 세계 지향적 가치관
ㄴ. 단절성--전통문화, 사상의 자생적 전개가 좌절
ㄷ. 모방성--대중 문화의 대량 직수입
ㄹ. 기형성--서구 세계 시각에 의한 자기 조명
2) 자본주의적 문화
ㄱ. 문화의 상품화: 상품 미학의 전개
ㄴ. 상품 미학의 발전으로서의 패션
ㄷ. 시각매체에 의한 이미지의 문화: 사회적 변화를 이미지의 변화로 대체
ㄹ. 소비의 문화: 생산의 주체에서 소비의 주체
ㅁ. 자기 상실의 문화
ㅂ. 경쟁의 강화 및 미화
1-3 주제: 기독교윤리학이 놓인 자리 검토(2)
- 21세기 초, 한국 교회의 현황 이해 -
Ⅰ.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이해
1. 한국 사회 일반 시민의 눈에 비친 교회의 신뢰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사장 우창록)이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도를 알아본 설문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한 응답자는 18.4%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10월 23~27일 닷새 동안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 1,000명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한국교회를 신뢰하는지 묻는 질문에 ‘불신한다'는 답변이 48.3%로 가장 높게 나왔고, ‘신뢰한다'는 18.4%, '신뢰도 하지 않고, 불신도 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33.3%였다. 가톨릭․불교․개신교 중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는 가톨릭 35.2%, 불교 31.1%, 개신교 18% 순으로, 개신교가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질문에도 불교 31.5, 가톨릭 29.8%, 개신교 20.6%로 답했다.
응답자들은 개신교가 신뢰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는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 일치’(42%)가 가장 높았으며, 이어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 25.8%, ‘사회봉사’ 11.9%, ‘교회 재정 사용의 투명화’ 11.5% 순으로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개신교가 신뢰를 받기 위해 해야 할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봉사 및 구제 활동’ 47.6.%로 가장 높았고 이어 ‘윤리 도덕 실천 운동’ 29.1%, ‘환경 인권등 사회운동’ 12.5%라고 대답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기윤실이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를 점검하고,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바른교회아카데미, <CBS>, <국민일보> 등과 공동 주최한 사업이다.”
2. 한국 사회 일반 시민의 눈에 비친 목사의 신뢰도:
“일반 시민은 목사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을까. 시사 전문 주간지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7월 21일에 직업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목사의 신뢰도는 33개 직업 중에서 25위(53.7%)에 그쳤다. 종교인 중에서 신부(74.6%)와 승려(64.0%)보다 낮았다.
<시사저널>은 목사의 직업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목사라는 직업에 대한 반감과 개신교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고 지적했다. 교회 세습, 호화로운 생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발언 등이 목사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또 이명박 대통령 취임 초기에 불거진 소망교회 교인들의 인사 논란과 ‘예수천당·불신지옥’으로 대변되는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선교 논리와 행태도 문제로 보았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사무총장 양세진)도 지난 해 11월 한국교회 신뢰도를 발표했다.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대답은 전체 응답자 중 18.4%에 불과해 직업 신뢰도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시사저널> 조사 결과는 한국교회와 개신교인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한다는 사실을 또다시 보여준다.
종교인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낮다는 사실도 이번 조사에서 드러났다. 종교인 중 신뢰도가 가장 높게 나온 신부도 은행원(8위), 미용사(9위)보다 낮은 11위였다. 승려도 18위에 머물렀다.
신뢰받는 직업을 1위부터 10위까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위 소방관(92.9%), 2위 간호사(89.9%), 3위 환경미화원(89.2%), 4위 직업운동선수(82.1%), 5위 의사(80.9%), 6위 한의사(79.7%), 7위 초중고 교사(79.5%), 8위 은행원(79.1%), 9위 이·미용사(77.4%), 10위 프로그래머(74.8%) 순이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을 통해 진행했다.”
3. 목사를 자살하게 하는 현실:
“최근에 가슴 아픈 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욕이 앞섰던 한 젊은 목사가 춘천의 작은 교회에서 좌절하고 철원지역으로 교회를 옮긴 뒤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고 만 이야깁니다. 또 하나는 도시 지하 개척교회 목회자가 해도해도 교인수가 늘지 않자 처자식을 놔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깁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부족한 개인의 목회소명을 탓해야 할까요? 작은 시련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나무래야 할까요? 누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걸까요? 개인적 한계를 꼬집기보다 성직자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죽여야만 했던 그 상황이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왜 죽었을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들은 얘기를 종합해 미루어보면, 두 번째 경우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돈이었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었습니다. 가난에도 처할 줄 알아야 하는 성직자가 오히려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할 성직자가 돈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었습니다.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할라치면 지하에서 시작하더라도 수천만원이 듭니다. 자기 돈이 없으면 이곳저곳 빌려야 하고 그것도 없으면 은행이든 어디든 빌려야겠지요. 교회 문을 연다고 어디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나요? 3년이 가도 5년이 가도 처자식 2-3명 놓고 예배드리기 일수구요, 우연히 찾은 새 신자도 썰렁한 분위기 탓에 곧 발길을 끊기 일숩니다. 교인이 없으니 월세 독촉은 어찌 넘기고 처자식은 어떻게 먹여 살리겠습니까? 근심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죠. 교회 성장시킨다고 이것저것 다 해밨지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점차 소명이니 의욕이니 하는 것들조차 생각하기 귀찮아지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요. 우울증에 빠지는 날이 많아지고 잠 못이루는 밤도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삶의 존재가 너무 초라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죠. ...... 그리고 자살을 한 겁니다. 처자식을 어디 보낸 뒤 깨끗하게 목욕하고 목을 멘 것입니다.
누가 빚을 내서라도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나요? 가게를 차리듯 돈이 있어야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이 싫습니다. 교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에서 기를 쓰고 개척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정상적인 교회개척 현장에 목사 초년생들을 떠밀어내는 교계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목회자가 알아서 교회 차리고(?) 알아서 살라고 방치하기엔 교회와 성직자의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 아닌가요?
목회자가 궁핍한 삶에 못이겨 소명마저 다 팽개치도록 왜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나요? 멋진 교회당을 순식간에 헐고 으리으리한 새 교회당을 짓는 교회들이 많아도 여전히 월세 전기료를 못내 문을 닫는 가난한 교회들이 더 많다는 현실이 속상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자처하는 청빈이 아니라 너무나 궁핍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미자립 개척교회의 실상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아니 대다수의 미자립 개척교회 목사들이
월세와 생활비, 교회운영비 등등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근심 걱정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또 왜 이렇게 목사는 많은 건지...... 아무 대책 없이 신학생들을 모집하고 아무 대책 없이 목사들을 마구 배출하고 아무 대책 없이 사회로 내몰아 알아서 살라고 배짱 튕기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교단과 신학교 관계자들이 미워집니다. 목회자 수급계획은 있기나 한 건가요?
그저 눈에 보이는 등록금, 늘어나는 목회자 수에만 혈안이 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들여다보지도 않는 신학교와 교단, 조그마한 돈이라도, 최저생계비 정도만이라도 지원해주지 못하는 교단, 과연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목회자가 죽어가는 교회 바로 옆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헌금을 가지고 수억원어치의 이벤트 행사를 갖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돈이 지지리도 없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돈이 넘쳐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걸까요? 그렇게 인식하는 세태...... 개척교회 목회자는 두번 죽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빈익빈부익부 현실은 상대적 좌절감을 더 크게 만들 뿐입니다. 나누지 않는 단절이, 나만 아는 이기적 배부름이 사람들을, 그것도 성직자까지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정말 별 것도 아닌...... 남들한테는 넘치는...... 그 돈 때문에 목사가 자살을 했습니다.”(‘나이영의 크리스천 세상’: CBS에서)
4. 종교학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현실
1) 종교학에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누는 분기점
-. 그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를 위한 자기 욕망의 부인이 있는가?
-. 자기 욕망의 강화를 위해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것은 하등종교.
2)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 성직자가 증가함.
- 고려 시대의 불교가 타락했을 때 온 고려 땅이 스님 천지
=. 티벳 라마 불교가 타락했을 때 티벳 전 남자의 70퍼센트가 승려.
-. 성직자가 증가할 수 있는 이유
=. 자기 부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기 쉬움.
=. 성직자가 ‘좋은 직업’이 되기 때문임.
-.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직자가 차고 넘침.
=. 한국의 모든 교파 신학생들 숫자의 총합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신학생 숫자보다 많다는 통계도 있음.
=. 홍수가 나서 사방이 물난리를 겪을 때, 마실 물이 없듯이, 신학생과 목사는 많은데 교인들은 믿을 만한 목사가 없다고 불평.
3)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 종교 기관이 급증함
-. 그 종교의 사제가 급증했기 때문에 그 사제들이 먹고 살기 위해 종교 기관이 증가.
=. 유럽교회는 교인이 없지만, 교회가 문을 닫지 않음: 성직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 한국 교회 수는 계속 증가해 왔음.
=. 교인수는 침체되더라도 교회는 많아짐.
=. 목회자가 급증한 만큼 교회는 늘어나게 됨.
-. 캐나다와 미국 서부 지역에 교회를 맡지 않은 무임 한국 목사님이 2,500명.
=. 교회는 계속 분열되어 나감.
4)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세 번째 현상: 신앙의 기복주의화.
-. 신앙의 기복주의화는 내 목적의 성취를 위해 나의 소유나 달란트로 신을 달래는 것.
=.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바꾸는 것인데, 기복주의화된 신앙은 나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하여 하나님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는 것.
-. 그 종교의 사제와 기관이 먹고 살고 운영되는 데 필요한 재정이 신자들에게서 나옴.
=. 따라서 신자들이 떨어져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신자들 입맛에 맞게 진리를 왜곡.
=. 유럽에서 중세에 무사가 많이 배출된 동네일수록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이 부적처럼 많이 간직되고 있음.
-. 한국 교회는 사회 정의나 진리 및 진실을 관철하는 삶보다는 교인들의 기복에 초점.
=. 전 국민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나라에서 부패와 악은 심화되고 있음.
5)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네 번째 현상: 종교가 이해집단화 됨.
-. 세상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기들의 이해를 관철해나감.
-. 한국 보수교단의 이해집단화 현상.
=. 이승만 정권 이후부터 군사 정권 시기까지 보수교단은 정치적 우파로서 압력단체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행함.
Ⅱ. 윤리적 문제를 노출시킨 한국 교회의 토양 이해
A. 교회의 ‘하드웨어’ 측면에서
1. 성장 정체와 수평 이동
1) 90년대 이후 정체 또는 감소 현상: 91년 대비 94년 -0.4%
2) 수평이동에서 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 : 중소형 교회가 자립 기반을 잃음
3) “잠재적 신자”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 : 교회에 호감 가진 사람수가 줄어듦.
4) “예비 목회자”(신학생)는 계속 나옴.
-. 그러나 목회지는 실제로 포화상태.
2. 극소수 교회의 대형화와 개교회주의
1)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23개가 한국 교회:
-그러나 23 교회 모두는 당대 한국적 상황에서 정치적/사상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표 방하는 교회였다. 진보적 성향의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한 경우는 없다.
2) 급성장한 교회가 일종의 모델 교회화 되는 상황.
-. 목회 윤리나 가치관에 대한 반성의 여지가 없음. 부흥만 하면 된다는 식의 목회 가 치관이 팽배.
-. 성경적이고 건전한 목회 전형을 창조적-주체적으로 모색하지 않고, 유행 모델에 천 편일률적으로 휩쓸림.
-. 교회 성장 및 성숙과 관련하여 자기 크기와 속도를 관리할 줄 모름.
3) 교단 또는 지방회 사업의 실제적 유명무실.
3. “맥처치” (McChurch)화 현상 : 중산층 교회 지향화 현상.
1)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 떠도는 신자들
2) 교회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나 백화점처럼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듯한 현상:
3) 기독교적 사교 클럽화 현상
4) 교회 다니지 않는 신자가 많다(전체 개신교인 중 11.7%)
B. 교회의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1. 몸체 키우기에 적합한 교회 조직
1)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비민주화
2) 유기적 역동성을 상실한 조직: 권위의 집중화
3) 전시체제--영적 전쟁(?)--식 교회 운영
2. 과시적 교회 운영
1) 영성의 상품화 현상
-. 교계 유행을 매우 분주하게 따라 다님.
-. 미국 편향적 교회 영성: 특히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에서 많이 볼 수 있음
-. 영성의 천박성 및 획일성: 자기 빛깔과 지역 빛깔, 심지어 교단 빛깔도 상실함
-. 사귐보다는 행사, 특히 이벤트성 행사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이게 됨.
-. 목사가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경향성: ‘스타 목사’(?)의 탄생.
=. ‘스타 목사’보다는 ‘등대지기’ 같은 목사가 필요함: 등대로서의 교회.
2) 교회의 상품화 현상
-. 교회가 매매되는 문제
-. 교회의 세습화 문제
3. 자기 교회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성경공부
1) 담임 목사의 소신과 성경의 권위 사이에서 오는 갈등의 문제
2) 담임 목사의 목회적 소신과 개교회의 전통(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오는 갈등의 문제
3) 개인의 신앙적 확신과 목사의 소신 또는 교회의 전통 사이에서 오는 갈등의 문제.
*. 이 세 가지 갈등을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성경의 권위를 최고에 두고, 교회, 목사, 평신도 등 모두가 그 권위 아래서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선언적으로는 성경말씀을 최고 권위에 두지만, 실제적으로는 담임 목사의 교회 운영지침에 대한 의견이나 설교(또는 말)가 더 큰 권위를 가짐.
4. 교회의 물적 기초에 대한 무관심
1) 헌금에 대한 참된 교육 부재--교회가 영적으로 (?) 돈 세탁하는 곳처럼 오해됨
2) 정직한 헌금(십일조)은 액수의 문제라기보다는 버는 과정의 문제: 이 점이 제대로 지 켜진다면, 오늘과 같은 교회 외적 모습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5. 훈련의 경시
1) 교회 사이의 ‘교인 모시기를 위한 과다 경쟁’(?)으로 훈련이 유명무실
2) ‘값싼 은혜’를 유포함
3) 훈련과 은혜, 훈련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무관심
제 2 장 : 기독교 윤리학 방법론
2-1 주제 :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 이해
Ⅰ. 주제 도입을 위한 질문
1.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자신이 겪었던 윤리적 갈등의 내용 한 가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갈등이 어떤 관계 구도에서 나왔는지를 되새겨 보라.
2. 대학을 졸업한 후 보험회사--그 회사의 사훈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이다--에 막 취직한 어떤 기독교인에게 첫 번째로 주어진 일거리가 작년 일년 동안 그 회사의 영업 실적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의 직장 상사가 그 일을 맡기면서, 세무서 보고용 보고서와 회사 보관용 보고서, 그리고 피보험자 설득용 보고서에 대한 자료를 따로 주면서 세 가지 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다면 그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Ⅱ.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
1. 기독교인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
1) 기독교인이란?
-.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 후 기독교 공동 체(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에 거하고 있는 사람.
-. 따라서 기독교인은 예수, 교회, 그리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2) 기독교인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
-. 기독교인은 개별 인격체로서 예수께 인격적으로 헌신한 사람.
=. 기독교인은 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신구약 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임
=.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직접적 명령을 자신이 순종해야 할 행위 규범으로 받아들임
=. 예수의 행동이나 됨됨이를 본받고 따라야 할 규범으로 받아들임.
-. 기독교인은 지역 교회(믿음 공동체)에 속해 있다.
=. ‘속해 있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기독교인이란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신 앙 관습과 그것에서 나오는 생활 에토스들을 따르겠다고 헌약한 사람들이라는 의미 를 담고 있기 때문.
-. 기독교인은 또한 세상에 거하고 있다.
=. ‘거하고 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속해 있다’는 것보다 그 구성원에게 작용하는 구 속력이 적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
3)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
-. 기독교인의 삶은 일차적으로 예수에게서 나온 윤리(예수의 윤리)에 의해,
-. 그리고 믿음 공동체인 교회에서 나온 윤리(교회의 윤리)에 의해,
-. 마지막으로 세상이 부과하는 윤리(세상의 윤리)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님
세 상
교 회
그리스도인
2.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의 발생 경로
1) 예수의 윤리와 자신의 됨됨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 기독교인됨 자체에 내재된 윤리적 갈등
-. 성화의 과정에 있는--칭의와 영화 사이에 사는--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
=. 예수께서 기독교인에게 행하라고 직접 명령하신 것이나 예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을, 기독교인 자신의 한계와 부패성 때문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2) 예수의 윤리와 교회의 윤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 불완전한 현실 교회에서 기인됨.
-.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는 예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사항 을 교회가 교인에게 요구할 수도 있으며, 교회의 행정, 비전, 운영 등이 성경의 지침 과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
=. ‘기독교인됨’과 ‘교인됨’ 사이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
3) 교회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 기독교인은 교회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세상에 거하고 있다.
-. 세상에 거하면서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물적 요소들을 충족시킴.
=. 이러한 존재조건 때문에 세상이 요구하는 윤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 없음.
-. 교회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보다 상대적으로 성경에 좀더 충실하다.
=. 교회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의미.
-. ‘교인 됨’과 ‘시민 됨’ 사이에서 겪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음.
4) 예수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주님이시다.
=. 그러나 세상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세상의 윤리가 성경의 윤리 또는 예 수의 윤리와 상충하는 경우가 발생.
-. 이 갈등은 ‘기독교인 됨’과 ‘시민 됨’ 사이에서 겪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음.
*.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관계 유형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첫째와 넷째 관계 유형에서 오는 갈등, 즉 칭의와 영화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예수의 윤리와 세상의 윤리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최근 교회 문제가 자주 불거져 나오면서 둘째 관계 유형에서 오는 갈등 즉 예수의 윤리와 교회의 윤리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 새로운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셋째 관계 유형에서 오는 갈등은 그 성격상 넷째 관계 유형에서 오는 갈등과 중첩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일 성수 문제’나 최근에 자주 거론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Ⅲ. 규범, 상황, 인격의 관계에서 조명해 본 윤리적 갈등
앞절에서 언급한, “기독교인이 겪는 윤리적 갈등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규범, 상황, 인격(행위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통해서 좀더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대체로 윤리적 행위 결정 또는 윤리적 판단을 하는 데 고려해야 할 기본 요소에 속한다. 앞의 2강에서 우리는 기독교 윤리학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로 ‘세상,’ ‘기독교 공동체(교회),’ ‘신자,’ 그리고 ‘도리와 규범’을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세상과 교회는 앞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리와 규범을 산출하는 터전이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윤리적 행위 결정 시에 ‘상황’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1. 규범과 상황 사이에서 오는 갈등
1) 명시적 규범과 실제적 규범
-. 명시적 규범은 객관적으로 명시된 규범.
=. 교과서적 규범, 언어로 표시된 규범.
-. 실제적 규범은 실생활에서 통용되는 규범.
=.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정지해야 하는 것은 명시적 규범이지만, 실제 운전하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무조건 ‘일단 정지’라는 명시적 규범을 지키면 욕먹음.
-. 실제적 규범이 추상화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명시적 규범이 확립됨.
=. 추상화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명시적 규범과 실제적 규범 사이에 간극이 생김.
2) 규범과 상황 사이의 갈등은 명시적 규범과 실제적 규범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
-. 실제적 규범이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하기 위해 추상화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상황’의 특수성이 배제됨.
-. 세상의 ‘실제적 규범’과 ‘상황’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갈등은 없음.
=. 실제적 규범은 상황을 내면화하면서 생겨난 것이기에.
-. 규범과 상황 사이의 갈등은 엄밀하게 말하면, ‘명시적 규범’과 ‘상황’ 사이의 갈등임.
3) 기독교인에게 작용하는 ‘명시적 규범’의 세 가지 근원
-. 첫째, 성경 말씀
=. 성경에서 명령형으로 주어진 말씀.
=.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행동과 삶의 모범.
-. 둘째, 교회에서 형성된 규범
=.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규범.
=. 교회 전통에서 기인하는 교회 규범: 교회의 신앙생활 관습에서 오는 것.
-. 셋째, 세상에서 형성된 규범.
=. 도덕 교과서, 법률 등.
2. 규범과 인격(행위 주체자) 사이에서 오는 갈등
-. 내가 지켜야 할 규범의 당위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 규범이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 규범을 지키도록 나를 추동하는 힘은 어떻게 얻어지나?
-. 이 세 가지는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의 실존적 성격에서 오는 것임.
Ⅳ. 보충 학습을 위한 추천 문헌
1. 조셉 플레처. 「새로운 도덕: 상황윤리」. 이희숙 역. 서울: 종로서적, 1989. 3-24쪽; 저자는 상황윤리학의 대표자이다. 그의 상황윤리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1장 즉 3-24쪽 에서 그가 기존의 윤리학에 대해 문제 제기한 내용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2. 라이놀드 니이버. 「기독교 윤리학」. 노진준 역. 서울: 은성, 1991. 97-127쪽; 인간 및 집단 의 한계(타락) 속에서 윤리적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인의 딜레마를 ‘불가능한 윤리 적 이상의 당위성’이라는 제목 아래 설명하고 있다.
2-2 주제 : 윤리적 추론의 네 가지 차원과
기독교 윤리학의 네 가지 접근법
Ⅰ. 주제 도입을 위한 질문
1. 한국인이 모두 기독교인이 된다면, 한국은 자동적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는가?
2. 자신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하거나 어떤 상황에 직면하여 행위 결정을 해야 할 때 어떤 원리나 방법을 선택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원리나 방법을 일관성 있게 당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Ⅱ. 윤리적 추론에 작용하는 네 가지 차원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윤리적 판단을 하거나 행위 결정을 할 때, 그 과정을 깊이 통찰해 보면 대체로 네 가지 차원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각적 반응의 차원, 계명의 차원, 원리의 차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본적 확신의 차원이 그것이다.
1. 즉각적 반응의 차원.
-. 이성적 추론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
-. 일반인들뿐 아니라 윤리학자들까지도 이 차원에서 윤리적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음.
=. 예: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끼어 드는 운전자를 만났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런, 나쁜 사람!”이라고 윤리적 판단을 함.
-.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반응한 것.
-. 즉각적 반응 차원은 일관성과 보편성을 필요로 하지 않음.
=. 즉 갑작스럽게 끼어 들기 한 차를 보면서, 항상 내가 “이런, 나쁜 사람!”이라고 윤리 적 판단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 간혹 내 기분이 아주 좋을 때는 “얼마나 바빴으면 저럴까?”라고 생각하면서 포용성 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 또한 내가 “이런, 나쁜 사람!”이라고 반응했으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경 우를 당하면 동일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2. 계명 또는 규범 활용의 차원.
-. 계명은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
-. 계명이 참된 계명이 되려면 적용의 일관성과 보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 신호등의 빨간 불에서는 서야 한다는 계명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적용돼야.
=.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3. 원리 적용의 차원.
-. 원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행위 결 정이나 윤리 판단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음.
-. 그러나 원리는 계명이나 법을 지탱해주기도 하고 교정해 주기도 함.
=. 그런 의미에서 원리는 계명이나 법보다 포괄적이다.
-. 원리를 적용하는 데는 일관성과 보편성이 있어야 하지만, 행위의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번째 차원의 계명과 다르다.
=.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빨리 구하기 위해서 응급차나 소방차가 신호등을 무 시하고 질주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차의 운전자는 “신호등의 빨간 불에서는 서야 한다”는 계명을 어겼다. 그러나 신호등의 계명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 운전자는 원리를 어긴 것은 아니다.
-. 원리와 계명은 배타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원리는 계명의 협소함이나 제한성을 보완해 주고, 행위자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제공해 준다.
4. 윤리 행위자의 기본적(신앙적) 확신 적용의 차원.
-. 기본적 확신은 세계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음.
-. 세 번째 차원에 해당하는 요소인 ‘원리’는 이 네 번째 차원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
=. “신호등의 계명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왜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줌.
=. 이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거나,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답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답은 그 개인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음.
Ⅲ. 기독교 윤리학의 네 가지 접근법
위에서 살펴본 윤리적 추론의 네 가지 차원은 기독교 윤리학의 유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네 가지 차원 중 어느 차원에 중요성을 두느냐에 따라 기독교 윤리학의 접근법은 ‘상황 중심 접근법,’ ‘계명 중심 접근법,’ ‘원리 중심 접근법,’ ‘기본적 확신 중심 접근법’으로 나누어진다. 기독교 윤리학의 전개 과정을 좀 거칠지만 이해의 편리를 위해 정형화해 보자면, 계명 중심 접근법에 대한 비판에서 상황 중심 접근법이 나왔고, 계명 중심 접근법과 상황중심 접근법 논쟁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원리 중심 접근법이 제시되었으며, 원리 중심 접근법에 내장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제를 안고 기본적 확신 중심 접근법이 모색되었다.
1. 계명 중심 접근법
-. 윤리적 추론의 두 번째 차원인 계명(법)에 중점을 두고 윤리적 판단을 전개함.
-. 계명 또는 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됨.
=. ‘복음주의 율법주의자’: 윤리적 삶의 기초로서 성경에서 발견되는 법에 가장 우선 적으로 의존하는 기독교인. ‘복음주의 율법주의자’라고도 불림.(스탠리 그랜츠)
=. 그 성향의 입장을 보이는 윤리 방법론을 “기독교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율을 제시한다고 계속 상기시”키면서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성경이 갖는 절대적 위치를 강조하기 때문에 복음주의 기독교 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접근법으로 받아들여진다.
-. 이 접근법의 한계 네 가지.
=. 첫째, 이 접근법은 성경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세밀한 윤리 적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일관성 있는 답변을 주지 못함.
=. 둘째, 이 접근법은 윤리적 문제가 일어난 상황의 특수성--시대적 특수성 및 장소 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법 또는 계명에 모든 상황을 획일적으로 종속시켜 버릴 수 있다.
=. 셋째, 어떤 상황에서 서로 상충하는 계명이 적용될 수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접근법은 일관성 있는 답을 주지 못한다.
=. 넷째, 인간을 계명 앞에서 타율적 존재로 전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계명만 확 정되면, 인간은 마치 로봇처럼 그 계명에 그대로 순종해야한다(또는 순종할 수 있 다)는 전제 속에서만 계명주의 접근법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2. 상황 중심 접근법
-. 첫 번째 차원인 ‘즉각적 반응의 차원’과 관계되는 방법이다.
-. 윤리적인 것이란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 직접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함.
-. ‘율법주의 접근법’이 보인 한계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음.
=.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는 이 접근법의 대표적인 인물.
-. 상황 중심 접근법의 한계
=. 성경의 모든 계명을 ‘사랑’ 한 가지에 귀착시킨다.
3. 원리 중심 접근법
-. 세 번째 차원인 원리에 중점을 두고 윤리적 판단을 전개하는 방법.
-. 원리 중심 접근법은 계명 중심 접근법의 한계를 일정 부분 극복함
=. 윤리적 문제에 직면한 인간에게 윤리적 판단을 위해 적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 해 주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줌.
-. 상황 중심 접근법의 한계도 어느 정도 극복한다.
=. 즉 인간이 직면한 상황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에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상황 중심 접근법이 범하기 쉬운 윤리 판단에 있어서의 무규범적 인위성을 극복하게 해줌.
-. 원리중심 접근법의 선결 과제
=. 성경에서 구체적 명령으로 주어진 것까지도 원리로 환원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 구체적 명령을 지키지 않기 위해 포괄적 원리 속에 숨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 =. 두 개의 다른 원리들이 충돌할 때 어느 원리를 채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
4. 기본적 확신 중심 접근법
-. ‘원리’나 ‘계명’보다 ‘기본적 확신’이 더 중요하다고 봄.
=. 기본적 확신이 성경을 보는 눈을 결정하기에.
=. 성속이원론적 확신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일이고 소설책보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라는 안목에서 세상일을 볼 수밖에 없음.
-. 개인의 기본적 확신을 형성하는 데 ‘공동체의 맥락’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 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봄.
-. ‘맥락 중심 윤리학’(Contextual Ethics)와 ‘내러티브 윤리학’(Narrative Ethics)이 대표.
-. 믿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공통적 삶의 형태’를 발견하는 데서 기독교 윤리학이 시작된다고 봄.(맥클랜든)
=. 그 공통적 삶의 형태를 지지해주는 공통적이고 공적인 가르침을 계속 연구하는 것 이 기독교 윤리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 기본적 확신 중심 접근법의 선결 과제
=. 신앙적 확신의 내용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일관성 있고 설득력 있게 윤리 적 판별 기준을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
=. 기독교적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윤리 지침을 어떻게 수긍하도록 하느냐, 하는 문제.
Ⅳ. 목적론적 사고와 의무론적 사고 틀 안에서 이해해 본 네 가지 접근법
1. 목적론적 사고와 의무론적 사고
-. 목적론적(Teleological) 사고는, 옳고 그름은 ‘궁극적 목적’(telos)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 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봄.
=. 어떤 행위 그 자체 안에는 선악의 판별 기준 또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지 않음.
=. ‘결과론적 사고’: 궁극적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낳는 행위이면 옳다고 보는 방법
-. 의무론적(Deontological) 사고는,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데온’(deon)에서.
=. 선악의 기준 또는 내용이 그 행위 자체 안에 있다고 여기고 그 행위를 실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봄.
=. 결과보다는 과정 또는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둠.
2. 살인하는 것이 왜 나쁜가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에 근거한 답변 유형들
-. 상황 중심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선을 낳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함.
-. 계명 중심적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을 깨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선을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 에 해서는 안 된다고 답함.
-. 원리 중심적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은 인간 생명의 존귀함과 인권에 대한 존경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붕괴시켜 무정 부적 상태나 독재 상태와 같은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함.
-. 신학적 기본 확신 중심적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은 인간 생명을 위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 다고 답함.
3. 살인하는 것은 왜 나쁜가에 대한 의무론적 사고에 근거한 답변 유형들
-. 상황 중심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은 옳은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함.
-. 계명 중심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출애굽기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답함.
-. 원리 중심적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은 인간 생명이 성스럽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포괄적 원리를 파괴하기 때문에 해 서는 안 된다고 답함.
-. 신학적 기본 확신 중심적 접근법을 사용한 사람의 경우
=. 살인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성품에 부합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함.
Ⅴ. 보충 학습을 위한 추천 문헌
1. 스텐리 그랜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신원하 역. 서울: IVP, 2001. 25-68쪽; 서구 철학의 전통 안에서 윤리적 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윤리학 논의에서 사용되는 개념과 용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2. 박봉배. “그리스도인과 윤리.” 고범서 외. 「기독교 윤리학 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7-34쪽;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에 대한 설명에 덧붙여 책임적 윤리를 소개한 후, ‘윤리의 세 가지 요건’으로 규범, 도덕적 자아, 공동체를 제시하면서 윤리학의 흐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2-3 주제 :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Ⅰ. 주제 도입을 위한 질문
1. 미국의 어떤 한적한 도시에 처음 간 갑돌이는 경이감에 사로 잡혔다. 신호등이 없고 --경찰도 물론 없는--일단 정지 간판만 있는 사거리에서, 각 차들이 십자 모양으로 한 차씩 순서대로 질서 있게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차의 꼬리를 물고’ 가는 차가 한 차도 없었다. 그가 한국에서 운전할 때는, 사거리에 대기해 있다가 일단 앞차가 길만 뚫으면 그 차를 바짝 좇아가면서 사거리를 통과하는 것이 일상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4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갑돌이 역시 그런 방법으로 운전하고 살았다. 그러던 그가 한국에 귀국한 후에는, ‘앞차의 꼬리를 물고’ 사거리 통과하는 운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갑돌이가 한국에서와 미국에서 서로 다른 운전 태도를 보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2. 가야할 길(규범)과 갈 수 있는 길(가능성)과 선 자리(입장) 중 사람의 발걸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Ⅱ.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전개 방향
사상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변화․발전한다. 따라서 모든 사상은 어떠한 전통에서 나와서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다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사상의 형태를 취한 기독교 윤리학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이 강의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에 대한 개략적 이해를 시도하려고 한다.
1. 현대 기독교 윤리학 전개 방향의 특징 여섯 가지
1)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있다.
-.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었음.
-. 20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경향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 최근의 기독교 윤리학자 중 이런 구분을 사용하는 학자가 거의 없음.
=. 첫째 이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규범이나 삶의 지침들이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여 제시하지 않기 때문.
=. 둘째 이유: 일반 학문에서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구분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
2) 현대 기독교 윤리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만 초점을 두지 않음.
-. 윤리적 행위 결정 방법을 논하는 학문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함.
=.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적이냐”라는 데 초점을 둘 경우, 그 윤 리학은 매우 협소한 윤리학이 된다.
=. 그 상황에 적합한 답을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설혹 답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것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 현대 기독교 윤리학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일하시는 것, 즉 지금 이곳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
=.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의 목적을, 선악을 판별하는 데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운 역사에 동참하는 것에 두는 학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3) ‘윤리적 행위’보다는 ‘됨됨이 형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 ‘행위 윤리학’에서 ‘존재 윤리학’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으로 전환되고 있음.
=. 이것이 현대 기독교 윤리학이 실천을 경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
=. 오히려 과거보다 현대 기독교 윤리학에서 실천을 더 중요시 여긴다.
-. 행위 윤리학과 다른 점은, 됨됨이와 분리된 채 강조되는 윤리적 실천에 대해서 반성 하면서, 됨됨이에 기초한 실천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4) 공동체를 중요시 여긴다.
-. ‘존재 윤리학’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
-. 행위자의 됨됨이가 형성되는 모판으로서 공동체가 갖는 중요성을 발견하였기 때문.
5)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이야기(내러티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일차적으로는 성경의 내러티브가 갖는 기독교 윤리학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 성경의 내러티브가 믿음 공동체들 안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내러티 브에 의해 믿음 공동체의 구성원인 기독교인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관 심을 갖는다.
6) 위와 같은 다섯 가지 흐름의 자연스런 귀결로, ‘예방 윤리학’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
-.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의학에서 ‘치료 의학’보다 ‘예방 의학’을 중요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
-. 어떤 윤리적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규범이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규범이 그 사람의 행위를 결정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가야 할 길(규범)과 갈 수 있는 길(가능성)과 선 자리(입장) 중에서 사람의 발걸음에 결정 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야할 길이기보다는 선 자리이기 때문이다.
Ⅲ. 대표적 현대 기독교 윤리학자들에 대한 특징적 이해
앞에서 제시했던 여섯 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이 절에서는 20세기 대표적 기독교 윤리학자 여섯 명의 윤리학적 특징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취할 기본 관점은 첫째,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윤리학적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 그들은 ‘성경이 제시한 윤리적 삶의 초점’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다.
1.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를 추구하는 윤리학 : 월터 라우센부쉬
20세기 기독교 윤리학의 초기 특징은 양면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19세기 말의 신학이 보인 한계를 어느 정도 내장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나타났다. 즉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한계를 내장하는 측면), 실천 윤리에서의 개인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전통을 받아들였으며, 복음의 사회적 성격을 새롭게 부각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전통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h, 1861-1918)의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이다.
독일 경건주의와 보수적인 침례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라우센부쉬는, 1885년 로체스터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에서 목회하면서 개인주의적 경건주의 신앙 전통과 사회적 부조리 사이의 간극을 체험한다. 또한 1886년 「진보와 가난」의 저자 헨리 조지의 글들을 접하면서 사회적 악의 심각성을 알게된다. 이어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를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의 결정으로 그는 1907년에 「기독교와 사회복음」을, 1912년에 「사회질서의 기독교화」를, 1916년에 「예수의 사회원리」를, 1917년에 「사회 복음의 신학」을 출판한다.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는 어느 시대나 개인적 삶뿐 아니라 사회적 삶에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원리가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라우센부쉬에 따르면, 사회악을 제거하고 사회적 조화를 이룩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에 내장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이다. 이 낙관주의 때문에,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가 인간의 죄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재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의 역사 초월성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가 하나님 나라 개념을 매개로 하여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를 추구하면서, 첫째, ‘저급한 미신’이나 ‘천상의 구원’을 가르치며 부조리와 악에 안주해 왔던 전통적 교회를 비판하고, 둘째, 복음이 갖는 사회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윤리학 : 칼 바르트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에 내재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론은 1914년 8월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사회 구조나 제도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에서 경시했던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이 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이다. 그는 “인간의 유한성을 전제하지 않고서 시도되는 모든 종교적 노력은 그것이 경건주의든, 신비주의든, 혹은 사회 복음주의 운동이든 그 자체로서 한계”가 있다고 본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선’ 사이에는 엄격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윤리적 선을 발견하거나 그것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바르트는 원천 봉쇄한다. “선의 근거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선을 행할 길을 찾는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야 하고,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이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행위는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 판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서 출발한다. 바르트의 윤리학을 “하나님의 명령의 윤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명령을 중요시했다고 해서, 앞장에서 언급했던 ‘계명 중심적 사고’를 한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떤 인위적이고 객관적인 틀 속에 고정시킬 수 있는 ‘법칙’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롭고 구체적인 뜻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뜻을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은 것이다.
3. 인간의 죄성과 사회 권력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강조하는 윤리학 : 라인홀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바르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사회 복음주의의 윤리를 비판한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기초한 사회 복음주의를 그것의 신학적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버는 그것의 인간론적 측면에서 비판하면서, ‘기독교 현실주의’로 불리는 자신의 기독교 윤리를 정립한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사회 복음주의를 비판하였다면,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면서 사회 복음주의를 비판하였다.
니버는 사회 복음주의가 죄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인간 상황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때문에 사회 복음주의는 인간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였으며, 사회 경제적 및 사회 정치적 악을 과소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진단한다. 사회 복음주의가 사회악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면서 오직 인간의 개인적 노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오류와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니버가 1932년에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버는 개인의 죄성보다 사회의 죄성이 훨씬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인간은 개인적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이나 사회는 인간 개인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도덕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도덕적 호소’가 설득력을 가질 때가 있지만, 집단화된 세력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 따라서 니버는 집단화된 세력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세력에 걸맞는 ‘대항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힘의 균형’에 의해서만 집단은 어느 정도 도덕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 복음주의가 제시한 윤리는 이 점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고 니버는 진단한다.
니버는 또한 성경의 아가페적 사랑이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서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순수한 사랑의 감동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집단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버는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의 최대치를 ‘사랑’이 아니라 ‘정의’라고 말한다. 니버는, 정통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이 점을 간과하고 사랑의 법을 무조건 정치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비판한다.
4. 세상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윤리학 : 디트리히 본회퍼
기독교 역사에서 이원론적 사고는 뿌리가 깊다. 기본적으로 일원론적 사유 체계를 가진 히브리적 사고가 헬라 문화에 뿌리를 내리면서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유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성속 이원론’과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이원론’은 신학적 사유 속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 신앙 정서에서도 다양한 옷을 입고 계속 나타나곤 했다.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기독교 윤리학자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화해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루터주의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루터는 세계 현실을 그리스도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로 나누어 놓고 복음의 적용 영역을 사적이며 개인적인, 그리고 내면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루터의 이런 이원론에 따르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기대하고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본회퍼는 루터주의의 이러한 세계 이해를 비판하면서, 세상이라는 죄의 현실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실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현실’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의 현실 밖에 존재하는 현실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화해되지 않고 평화 속에 있지 않는 현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것을 이루었다.” 본회퍼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실’이 기독교 윤리학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이고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와 세계가 화해한 사건, 하나님에 의해서 현실의 인간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하여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본회퍼 윤리학은 그 방향성과 지향점을 갖게 된다. 즉 이 세계와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가, 하는 것이 본회퍼 윤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회퍼는, 이 세계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형성자’인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적 원칙을 이 세상에 적용하여 세상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역사”함을 통해서 이 세계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윤리학이나 그의 기독교적 제자도가 “하나님 은혜에의 동참”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공동체와 책임적 자아를 강조하는 윤리학 : 리차드 니버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 1894-1962)는 라인홀드 니버의 동생이다. 그는 형 니버처럼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방법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리차드 니버는 윤리학적 사고의 기존 패턴 두 가지, 즉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뛰어 넘는 책임적 윤리를 제창한다.
책임적 윤리는 니버의 인간 이해와 궤를 같이 한다. 목적론적 윤리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인간’(man-the-maker)에 기초하였고, 의무론적 윤리는 ‘시민인 인간’(man-the-citizen)에 기초하였다면, 책임적 윤리는 ‘응답하는 인간’(man-the-answerer) 또는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에 기초하였다. 니버는 인간을 ‘스스로 행위하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응답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 행위는 목적이나 의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사실과 더불어 비롯하는 것이라고 니버는 주장한다.
인간을 응답하는 존재로 보았을 때 당연히 중요한 것은 ‘무엇에 응답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우리의 목표인가?’ ‘무엇이 근본적인 율법[의무]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행해야 할 적절한 반응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라고 니버는 주장한다. 여기서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과 상통한다. 이 질문은 다름 아닌 ‘하나님 뜻’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리차드 니버는 기독교 윤리학의 규범을 불변적인 ‘하나님의 명령’에서 가변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책임적 윤리에서 ‘책임’은 네 가지 요소 즉 응답, 해석, 책무 그리고 사회적 유대로 이루어진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충분히 배려됨으로써, 우리에게 과해진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반응하는 행동이 책임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책임적 윤리의 이 네 가지 요소를 통해 우리는 니버 윤리학에서 ‘해석학’과 ‘공동체’ 그리고 ‘인격’이 중요시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6. ‘책임’보다는 ‘순종’을, ‘기독교 현실주의’보다는 ‘성경적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윤리학: 존 하워드 요더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는 20세기 후반 기독교윤리학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학자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중반 미국 기독교윤리학계를 풍미했던 학자가 니버 형제(라인홀드 니버와 리차드 니버)였다면, 그들이 주도하는 흐름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기독교윤리학 방법론에 새로운 물꼬를 연 사람이 요더였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나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 같은 학자들이 요더 밑에서 학위논문을 썼으며, 제임스 맥클랜든(James McClendon, Jr.)은 자기 학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요더를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요더의 기독교윤리학 방법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은 그가 1972년에 발간한 「예수의 정치학」이다. 이 책은 1994년에 2판이 나왔는데, 2판에서는 초판의 본문 내용은 그대로 두고, 각 장별 해당 주제에 대해 초판 발행 후 20년 동안 어떠한 학문적 논의가 진행되어 왔는지를 ‘후기’에 덧붙여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IVP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요더는 기독교의 주류 윤리학은 “예수가 규범이 아니다”는 암묵의 전제 위에서 전개되었다고 진단한 후, 예수 밖에서 다른 규범을 찾는 방법이 갖는 문제점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그 자체는 사회 윤리적 행동으로서 현실에 대한 적실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적실성’은 현실에 대한 타당한 계산에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종점에서 확인된 어린 양의 궁극적 승리에서 확보되는 적실성이다. 즉, 요더 윤리학에서 ‘현실주의’는 궁극적 역사의 완성인 ‘어린 양의 승리’에 부합되는 태도와 삶이 참된 현실에 부응하는 데 기초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를 ‘예수의 윤리’ ‘메시아적 윤리’ ‘복종의 윤리’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7. 믿음 공동체 삶의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윤리학 : 제임스 맥클랜든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철학의 한 분과로 인식되어 왔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윤리학은 조직 신학에 속한 한 분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발생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삶이 이론에 앞선다. 즉 삶이 먼저 있고, 그 삶에 대한 반성과 추상화를 통해 이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 점을 기독교 윤리학에 적용한 사람이 제임스 맥클랜든(James Wm. McClendon, Jr.)이다.
맥클랜든은 연대기적으로 볼 때, 윤리학이 기독교 교리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는 윤리학과 교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있는 공동생활의 형태를 발견함으로써 시작한다. . . . 이것이 윤리학이다. 우리는 그 공동생활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공통적이고 공적인 가르침을 계속 연구한다. . . . 이것이 교리이다.” 말하자면 윤리학은 믿음 공동체의 공동생활 형태와 관계되고, 기독교 교리는 그 공동생활을 지지해주는 방향에서 정립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모든 믿음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독특한 믿음과 공유된 신념을 갖고 있는데, 그것들이 그 공동체 속에 사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형성하게 된다. 그는 이 독특한 믿음과 공유된 신념이 이야기 형태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 이야기를 탐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맥클랜든은 이 이야기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한다. 등장 인물(자연적 질서를 따르는, 몸을 가진 개인), 사회적 무대, 그리고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기독교인의 삼중의 존재 조건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즉 기독교인은 자연적 질서와 유기적 관계를 갖는 존재이며, 사회적 존재이고. 종말론적 영역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이 삼중의 존재 조건과 관련시켜 기독교 윤리학의 영역을 ‘몸의 윤리,’ ‘사회 윤리,’ 그리고 ‘부활의 윤리’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의 기독교 윤리학을 우리가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는 몸의 윤리를 경시하였고, 개신교 개인주의는 사회 윤리를 경시하였으며, 카톨릭의 율법주의는 새롭게 개혁하는 부활의 윤리를 경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맥클랜든은 지적한다.
맥클랜든의 ‘이야기 윤리학’은 성경이 제시한 이야기 또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의 당위성이 확보될 수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성경이 제시한 삶의 이야기가 갖는 세 가지 요소를 통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의 삶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몸의 윤리),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삶(사회 윤리), 그리고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에 부합하는 삶(부활의 윤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보충 학습을 위한 추천 문헌
1. 스텐리 그랜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신원하 역. 서울: IVP, 2001. 195-204쪽;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를 위한 윤리, 초월의 윤리, 기독교적 규범으로서 사랑을 강조하는 윤리, 제자도의 윤리, 해방의 윤리, 성품의 윤리, 복음주의자와 윤리.
2. 박충구. 「기독교윤리사 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알브레히트 리츨, 에른스트 트뢸치, 월터 라우쉔부쉬,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학을 소개한 후, 현대 기독교 페미니스트 윤리를 다룬다.
3. 손규태. “기독교 윤리학의 회고와 전망.” 「세계의 신학」. 45집 (1999 겨울): 32-55; 위의 두 권의 책이 현대 기독교 윤리학자 중심으로 윤리학의 동향을 설명하였다면, 이 논문은 현대 기독교 윤리학이 생성되는 사회 윤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하여 윤리학의 흐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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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론 : 상황에 초점을 둔 윤리학의 기본 내용
1) 일반적 특징
-. 규범에 초점을 둔 기윤학 방법론이 윤리적 실천의 장인 상황을 지나치게 배제한 것 에 대한 비판에서 나옴.
-. 규범 중심적 윤리학의 약점인 ‘적절성’을 보완하고자 함.
-. 계율적 성격을 갖는 규범 대신에 ‘사랑’을 강조.
=. 사랑은 구체적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행위자에게 그 상황에 적합한 독자적 결단 곧 상황적 결단을 가능하게 한다고 봄.
-. ‘존재의 윤리’ 즉 됨됨이를 위한 윤리보다 ‘행동의 윤리’에 초점을 맞춰 논의됨.
2) A. T. Robinson의 경우
-. 1963년 출판된 [신에게 솔직히]의 제 6장 ‘The New Morality'에서 종래의 규범 윤리 학적 전통을 전면적으로 비판.
-. 기독교 윤리학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법’이지 ‘계율적 법’은 아니라고.
-. 계율적 법은 상황 내적 존재인 타인에 대해 책임적 개방성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사 랑의 법’은 가능하다고 봄.
-. 결국, 아무런 도덕적 규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지시만을 받는 ‘상 황적 결단’을 강조함.
=. “사랑은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면서도 철저한 책임성의 윤리를 가능케 한다.”
3) Joseph Fletcher의 경우
-. 1966년 [상황윤리: 신 도덕]를 펴내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
-. 기독교 윤리학의 방법론을 크게 ‘율법주의 윤리’ ‘도덕 폐기론적 윤리’ ‘상황윤리’ 등 으로 나눈 후, 상황윤리의 적절성을 설파함.
-. 여러 가지 극단적 상황을 예를 들면서 상황윤리의 타당성을 강조.
-. 사랑과 상황으로 윤리적 결정이 가능하다고 봄.
=. 그의 아가페 강조는 ‘행동 아가페주의’(act agapism)라 할 수 있다.
-. 행동에 있어서 상황적 적절성과 상황적 적합성이 중요시 됨.
4) 문제점
-. 삶에서 규범이 갖는 적절성을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경시함.
=. 로빈슨이든 플레처든 처음에 규범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기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다 보니 그 논리적 귀결로 규범이 갖는 타당성조 차도 지나칠 정도로 경시됨.
=. 정상적 상황에서 ‘규범’은 사회 유지 기능이 있다.
-. 상황에 대한 왜소한 이해: 고립된 결단 수행의 순간만을 상황으로 이해.
*. 상황의 세 가지 유형: 1) 정상적 상황. 2) 한계적 상황: 파괴적 위기 상황. 3) 급 격하게 변화하는 상황: 창조적 위기 상황
-. 당장 직면하고 있는 상황의 요구에 대한 개인적 책임은 강조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 는 사회 또는 공동체 전체의 책임은 경시함.
제 3 장 : 성경윤리
3-1 주제 : 성경과 기독교 윤리
기독교 윤리가 ‘기독교’라는 정체성을 가지려면, 그 윤리의 근거를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 윤리를 공부하는 사람이 성경을 다룰 때, 최소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해두어야 한다. 첫째는 성경의 권위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오직 성경만으로 기독교 윤리학이 정립될 수 있다고 보는가?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들과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둘째는 성경 해석과 관계되는 문제이다. 성경 해석의 원칙을 어디서 찾는가? 그 원칙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번 강의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다음 강의부터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성경윤리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Ⅰ. 주제 도입을 위한 질문
1.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든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서 그대로-- 또는 그것을 적용하여--따라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따라야 할 행동과 따르지 말아야 할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2.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경고하셨다(눅 14:33). 당신은 이 경고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Ⅱ. 기독교 윤리와 성경의 권위 문제
성경을 배제한 채 기독교 윤리학을 정립할 순 없다. 모든 기독교 윤리학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전개할 때 성경적 근거를 갖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을 허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한다면 무엇을 허용하는가, 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1. 로마 가톨릭의 경우:
-. 성경 이외에도 교회 전통을 중요시 여김.
=. 교회 전통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영감을 받으면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 고대 희랍 철학이나 현대 과학적 성취 등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보인다.
=. 하나님이 성경뿐 아니라 창조 질서의 영역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믿기에.
2.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 “오직 성경으로만”을 강조한다.
=. 개신교 믿음 공동체의 공통점이면서 동시에 로마 카톨릭과의 차이점임.
-. 개신교도 성경 이외에 ‘부차적’으로 인정하는 권위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
=. 요한 웨슬레가 시작한 감리교회에서는 성경을 중심에 두면서 전통, 이성 그리고 경 험을 수용하는 방법
=. 고전적 경건주의자들은 기도 같은 영적 수련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과의 만남’.
=. 퀘이커 교도들은 직접적 종교 체험.
=. 오순절 계통이나 은사 중심적 신앙단체들은 자기 초월적 신앙 경험
을 수용하고 그것들을 중요시 여기는 방법을 취한다.
-. ‘명시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에 둔다고 해서 믿음 공동체 안에서 성경의 권위가 ‘실제로’ 우선하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논의되어야 함.
=. 성경적 내용보다는 공동체 안에 형성된 신앙 풍토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음.
=. 교리적 가르침보다는 믿음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에 사적으로 주고받는 말이나 분위 기에 의해 신앙과 생활의 기초를 더 많이 배움.
=. 따라서 직접적 종교체험이나 자기 초월적 신앙 경험을 강조하는 믿음 공동체의 경 우, 명시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최고에 둔다고 말하더라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 는 기독교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경보다는 체험이나 경험을 우선시 하는 오류를 범 할 수 있다.
3.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열린 자세를 취해야.
-. ‘맹목적 성경주의자’가 갖는 한계.
=. 적실성의 문제와 외식의 문제.
=. 배타적이고 독선적 태도의 문제.
-. 성경을 최고 권위에 두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성, 신앙적 경험, 공동체의 풍 토 등을 수용할 수 있어야.
Ⅲ. 성경 해석과 예수님의 모범
1. 예수님의 모범이 성경해석에 주는 두 가지 의미
-. 예수님의 삶과 행적과 성품과 가르침을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기본 코드로 봐야.
=. 신자는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 존재이기에.
=. 예수님을 자기 삶의 전 영역에서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
=. 이런 의미에서 성경 윤리는 예수 윤리에서 시작됨.
-. 예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을 성경해석의 지침으로 삼아야.
2. 예수님의 구약 해석 방법의 네 가지 특징
-. 첫째, 율법을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으로 해석.
=. 출애굽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었듯이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으로 봄.
=. 구약의 율법들은 억압적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심.(마 22: 34-40)
=. 우리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먼저 임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 둘째, 예언자적 관점에서 구약을 이해하면서, 종교적 의식보다는 도덕적 측면에 초점.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 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라는 서기관의 말을 극찬하심.(막 12:33-34)
-. 셋째, 예언자적 관점의 ‘의’를 강조함.
=. 예언자에게 있어서 참된 의는 그 시대 가장 약한 자들에게 베푸는 사랑, 자비, 정의 의 행동을 의미함.
=. 예수님 당시 종교 풍토에서 통용되던 ‘의’의 개념은 ‘예언자적 의’보다는 ‘종교 의식적 순결’에 초점이 맞춰졌음.
=.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 심.(마 5:20)
-. 넷째, 마음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킴.
=. 당시 외면적 의에 관심을 갖는 것을 탓하면서 마음의 순결성을 강조.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심.(막 7:18-23)
=. 물론, 이것이 ‘내면적 종교성’을 강조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됨.
=.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다해 순종할 것을 강조.
Ⅳ. 기독교 윤리학을 위한 성경 해석 지침
1. 강화체(훈령적 진술)와 설화체(묘사적 진술)로 이해해 본 성경 말씀
-. 설화체: 설화체는 쉽게 말해 이야기 형태의 글이다.
=. 등장 인물이 일으키는 사건을 해석하는 식의 글.
=. 역사적 전례나 경험을 다룸.
=. 묘사적 진술 형태.
-. 강화체: 자신의 사상이나 아이디어를 논술해나가는 스타일의 글
=. 교리적․윤리적 진술을 다룸.
=. 훈령적 진술이 분명하게 드러남.
-. 예수님을 정점으로 삼아 세분화한 훈령적 진술과 묘사적 진술
=. 예수님의 훈령적 진술, 예수님에 대한 묘사적 진술, 성경의 훈령적 진술, 성경의 묘 사적 진술.
2. 기독교 윤리학을 위한 성경해석 지침
1) 예수님의 훈령적 진술은 그 자체로서 기독교인에게 계명이 됨.
-. 기독교인은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임.
-. 단, 훈령적 진술에 담긴 문화적 요소와 초문화적 요소는 구별할 필요가 있음.
=. 우리는 초문화적 요소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순종해야 하지만, 당대의 문화적 요 소에 대해서는 다른 구절과 참조해서 지혜로운 해석이 필요함.
-. 예: 내 제자가 되려면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훈령. 눅 14:33.
=.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계실 때는 그대로 따라야 함.
=. 지금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 따라서 자신이 있는 곳에서 예수를 좇 을 수 있음.
+. 따라서 현재는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모 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야 함. 그러나 여차하면, 실제로 다 버려야 함. 주님을 내 마음의 왕좌에.
2) 예수님께 대한 묘사적 진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음.
-. 첫째, 묘사적 진술 내용이 예수님의 훈령적 진술 내용과 일치할 때는 계명의 성격.
=. 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진술은 예수께 대한 묘사적 진술이다(눅 23:34).
=. 마 18:22에 나오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의 훈령적 진술과 일치.
=. 따라서 눅 23:34절의 내용은 계명적 차원과 관계시켜 해석될 수 있다.
-. 둘째,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때는 원리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사건에 대한 묘사적 진술에 부응하는 훈령적 진술은 없음.
=. 따라서 이 묘사적 진술을 가지고, 우리도 예수처럼 물 위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해 서는 안 된다. 이럴 경우에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적 확신 차원과 연계 시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함.
3)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명령 외에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많은 훈령적 진술은 기독교인에게 그대로 계명으로 작용한다.
-. 단 이 훈령적 진술과 예수의 훈령적 진술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음
=. 이럴 경우, 예수의 훈령적 진술은 계명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출애굽기의 훈령적 진술은 원리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함.
=. 예: 출 21:23-25절에는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 . . 갚을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신다(마 5:44). 즉 모세 시대의 동벌법은, 보복이 확대재생산 되는 것을 막고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점에서, ‘계시의 점진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공동체를 보존하고 약한 자를 사랑하는 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예수께 대한 묘사적 진술 외의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묘사적 진술은 그 자체로 계명화하거나 규범화해서는 안 됨.
-. 그 묘사적 진술들이 예수의 훈령적 진술 및 성경의 훈령적 진술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면, 그 훈령적 진술에 맞게 규범화될 수 있다.
-. 또한 그 묘사적 진술이 예수께 대한 묘사적 진술과 연계성이 있으면 그것에 맞게 규범화해도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성경의 묘사적 진술들은 주로 신앙적 기본 확신 차원과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가 있다.
=. 신앙적 기본 확신 중에서 특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라는 것과 연계 가능.
=. 성경의 묘사적 진술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확신과 연결됨으로써, 성경 이야기(내러티브)가 갖는 규범적 성격 또는 믿음 공동체에 대한 형성적 성격을 내장할 수 있게 된다.
Ⅴ. 성경 윤리의 큰 주제 두 가지
기독교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더불어 올바르게’를 추구한다. 여기서 ‘더불어’는 ‘믿음 공동체성’과 관계되고, ‘올바르게’는 ‘하나님의 거룩성’ 및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된다. 즉 ‘더불어’는 일차적으로 ‘믿음 공동체와 더불어’이고, ‘올바르게’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르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더불어 올바르게’는 자기 폐쇄적이 아니라,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 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갖는다.
1. 하나님 은혜의 우선성
-. ‘하나님 은혜의 우선성’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지만--에서 주도권을 잡 는 분은 하나님이심.
=.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하신 모든 일은 인간의 처지에서 보면 은혜이다.
-. 기독교 윤리적 삶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하나님 은혜를 앞질러 갈 수 없음.
=. 하나님 은혜에 동참하거나 뒤따라가는 삶만이 가능할 뿐이다.
=. 이러한 삶만이 ‘올바른 삶’이다. 올바름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도덕적 원리’나 ‘도덕적 가치’를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상정 안함.
=. 기독교 윤리학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보다 하나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더 중 요하게 여기는 근거를 여기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 또한, 하나님 은혜에 동참한다는 것은,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윤리적으 로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되기보다는(‘치료 윤리학’과 관계되기보다는),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기 전에 지금․이곳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은혜에 어떻게 동참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예방 윤리학’과 관계된다.
2. ‘믿음 공동체의 거룩성’ 역시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주제 중 하나임.
-.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권면을 지속적 으로 받아왔음(레 11:44-45, 19:2, 20:7).
-.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 믿음 공동체 역할을 대신함.
=.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정의 뒤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야 한다는 당 위성이 전제되어 있다.
-. ‘믿음 공동체의 거룩성’은, 신자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데 모판 역할을 하는 믿음 공동체 와 관계됨.
3. ‘세상을 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됨 역시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주제임.
-. 아브라함과의 언약: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 “국제적 복을 가진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언약.
-. “이스라엘의 실존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그리고 동시에 인류의 복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
=. “너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신 4:6)
=. 이스라엘은 그 출발에서부터 열국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모델이 되도록, 하나님이 인류 전체 사회가 작동하기를 고대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전시물이 되도록 의도됨.
-. 이스라엘에 대한 위와 같은 의도는 신약에 오면 ‘교회’로 대체됨.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Ⅵ. 보충 학습을 위한 추천 문헌
1. 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유승원 역. 서울: IVP, 2002: 327-479쪽; 신약학 교수인 리처드 헤이스는 다섯 명의 현대 기독교 윤리학자 즉 라인홀드 니버, 칼 바르트, 존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우어와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가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검토한 후, 자신의 방법을 제시한다.
2. T. B. 매스턴. 「성서윤리」. 고재식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미국 남침례교단의 기독교 윤리학자였던 저자는 이 책에서 신구약 성경(외경, 위경, 사해사본까지 포함하여) 전반에 걸쳐 흐르는 중심적인 윤리 사상을 소개한다.
3. 최봉기. “성서윤리: 신앙고백적 공동체의 윤리적 특징.” 「복음과 실천」. 19집 (1996): 496-528; 성경은 교리나 신조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전제 아래 성서 윤리를 소개한다. 이 논문의 내용은 아래 책에서 확대․심화되어 있다: 최봉기. 「한계선상의 윤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0. 75-226쪽.
제 3-2 주제 : 구약 윤리
제 3-2-1 주제 : 창조 기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1. 일반적 특징
1) 하나님 은혜에 기초한 피조물:
-. 있음(존재), 됨됨이(성격), 그리고 각 피조물과의 관계(관계망)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서 나옴.
2)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존재, 성격, 그리고 관계망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웠다.
3) 생존 및 생활의 추동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옴.
-. 살아있음, 세대 계승, 상호보완적 작동성 등이 하나님께 기원을 둠.
2.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1)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하나님의 초월성, 인간의 제한성을 인정하는 관계
-. 질문이 필요없는 관계: 인간이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않음.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관계.
=. 신비성 또는 초월성의 영역을 ‘합리성’의 영역으로 만들지 않음.
=.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관계.
2) 대화와 사귐의 관계: 하나님이 이니시어티브를 잡음
-. 비록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지만, 대화와 사귐이 가능한 관계
*. 참조: 천지창조의 모습은 성경의 두 부분에서 나타난다. 창 1:1-2:3절과, 2: 4-25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 두 부분에서 묘사된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에게 다른 이미지로 부각된다. 1:1-2:3절까지의 내용에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초월자이시며 전능자이신 --우리 인간과는 격이 달라 함께 하지 않으시며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2:4-25절까지에서 묘사된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의 삶에 관여하시며, 이 땅에 내려오셔서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대화하시고, 피조물의 복지를 염려하시는 자애로우신 분이시다. 이처럼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듯한 하나님 성품은 인간적 시각에서 보자면 서로 모순되어 두 개의 다른 신(神)을 성경이 상정한 것 같지만, 실제는 한 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 두 성품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에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이 세상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무심한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쉽고, 사랑의 하나님에만 강조를 두고 성경의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그룹)을 위한 수호신 정도로 격하시키기 쉽다. 성경은 이 두 가지 경향성을 모두 경고하고 있다.
3. 인간과 인간의 관계: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1) 하나님이 주도하는 관계:
-. 최초의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시점에서 인간(아담)이 한 일은 한 개도 없다.
=.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분은 하나님.
=. 돕는 배필을 짓기로 결정한 분도 하나님.
=. 여자를 만든 분도 하나님.
2) 자신을 줌으로써 타인을 살리고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관계
-.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듦
=. 이 기사는 아담이 하와에 대해 권리를 갖는 데 대한 전거로 이용되기보다는 아담 이 하와를 위한 의무에 대한 전거로 이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 하와가 아담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발적--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희생을 통해 하와가 생겨난 것이다.
=. 타인을 위한 인간의 자발적 희생 =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희생.
-. 아담은 하와로 인해 더욱 풍요롭게 됨.
=. 돕는 배필을 얻음.
=. 독립적 존재가 ‘관계적 존재’로 바뀜으로써 매우 풍요로운 존재가 됨.
3) 너와 나를 분립적 존재가 아니라 공동 운명체로 여김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4. 자신과의 관계
1) 엄밀하게 보자면, 창조 기사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해주는 단서는 찾기 힘들다.
2) 다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유 추가 가능하다.
-. 삼위가 한 분으로 조화․통일을 이루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한 인간의 내면적․실천적 통일성 및 조화성과 관련하여 생각 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 인간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지․정․의가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
=. 인식․실천․됨됨이가 인격체 안에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
-. 그리고 이러한 조화와 통일이 외부에 대해 파괴적이거나 현상유지적으로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작용된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반영.
5. 인간과 자연 세계와의 관계
1) 자연 환경 의존적 존재로 창조됨
-. 자연 세계를 다 창조하신 후, 마지막 날 인간을 창조.
-.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짐
-. 온 지면의 채소, 나무 등에게 식량을 의존해야 함 (창 1:29)
2)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연 세계를 돌볼 책임을 짐.
-. 자연 세계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묘사한 창 1:26, 28절은 이 점을 전제로 하여 해 석되어야 한다.
-. 따라서 인간은 자연 세계를 자기 만족을 위한 약탈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창조의도가 잘 작동되도록 지키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제 3-2-2 주제 : 타락 기사의 윤리적 의미
-- 창 2 : 17, 3:1-24 --
1. 선악을 아는 지식을 금하시는 하나님.
1) 선악을 아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것
-.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지 못하게 금지됨(창 2:17)
2)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됨’(창 3:5, 3:22절 상)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 하나님과 동격(하나님과 같이)으로 창조되 지는 않았다.
2.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이 타락.
1)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 앎으로써, 하나님, 세상, 자연, 다른 사람과 하나될 수 있게 창 조됨.
2)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알게 됨.
-. 그 결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됨 : 하나님과의 분열이 발생.
-. 선악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의 분열이 일어났음을 보여 줌.
3)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자기 기원’에서만 가능.
-.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성에서 선악을 아심.
=. 하나님 너머의 선악이 있는 것이 아님.
-. 인간은 오직 자기 중심성에서만 선악을 알 수 있음.
=. “선악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선악의 근원, 영원한 구원과 선택의 근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함.”
-. 따라서 선악을 아는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중심성에서 자기 중심성 으로 변질됨.
-.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밖에 없기 때 문에 선악은 하나님의 선악이 아니라, 인간의 선악임.
3. 선악을 아는 지식을 취득한 결과
1)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됨: 근원에서의 분리.
-.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 : 하나님에게서 숨으려 함.
2) 자기 자신과 분리됨
-. 자기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수치를 느낌.
-. 벗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님. 벗은 것을 부끄럽게 보는 ‘눈’이 문제.
3)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서 분리됨.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던 입에서, “저 여자 때문”이라는 말 이 나옴 : 책임 전가.
-. 사모하고 다스리는 관계로 변질(창 3:16절)
4)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분리됨.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음”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임”
5)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치장과 가면을 쓰게 됨.
-.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함”
4. 선악을 아는 지식과 기독교 윤리학의 관계
1) 일반 윤리학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추구.
-.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주제임.
2) 성경의 타락 기사는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제시.
-.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을 확보하는 것이 기윤학의 목적이 될 수 없음.
-. 일반 윤리학의 목적을 근본에서 뒤집는 것임.
5. 타락 기사에 내장된 기독교윤리학적 함의
1) 범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임.
-.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는 것은 ‘사회적 규약’이나 ‘본성적-보편적 도덕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임.
2)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은 모든 주변 환경이 풍족하고 좋았을 때임.
-. 범죄에 대한 사회 결정론적인 입장을 기독교는 수용할 수 없음.
=. 그렇다고 해서 사회구조적 측면을 간과해도 된다는 것은 아님(추후 논의가 필요)
=. 사회를 변화시키면 인간이 변할 것이라는 낙관주의는 문제.
3)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음.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은 아담에게 주어짐.(창 2:15절)
=. 하와는 아직 생겨나기 전임.
-. 뱀이 유혹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임.(창 3:1)
=. 하와는 아담에게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금지 계명을 들었을 것임.
=. 하와는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고 왜곡하면서 유혹에 넘어감.
-.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아담을 찾아 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심.
=. 말씀을 직접 맡은 자의 책임.
*. 참조 1 : 선악을 아는 지식과 바리새파 사람들
-. 선악을 아는 지식을 확보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들.
-. 선악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의 전형.
=. 그러나 그들이 상정한 선악의 기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 섬.
=. 인간이 만든 선악의 기준이 예수님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됨.
-. 삶의 모든 순간이 선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투쟁의 상황이라고 이해.
=. 원치 않았더라도 자신들이 만든 선악의 기준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둠으로써 ‘선악의 기준’을 우상시하게 됨.
*. 참조 2 : 인간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선을 악하게 보는 예(마 20:1-16)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
=. 인간이 자신의 ‘의’ 개념으로 예수님의 선을 판단하는 경우를 보여줌.
=. 핵심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음.
=. 인간의 선과 하나님의 선이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을 잘 보여줌.
-.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이유는 먼저 된 자가 자기 의 개념으로 예수님의 선 또는 의를 판단하려 들었기 때문.
=. 천국은 인간의 의 개념을 갖고 있는 한 들어가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줌.
*. 참조 3: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경우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님이 사탄의 광야 유혹에 직면하지만 극복하신 경우와 대비해 볼 수 있음.
제 3-2-3 주제 : 아브라함 선택 기사의 윤리적 의미
1. 하나님 은혜의 우선성(창 12:1-4)
1)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심 :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먼저 찾아오심.
-.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름.
-. 성경에는 내․외적으로 아브람에게 어떤 미덕이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음.
=.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었을 뿐임.
2) 하나님 선택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아브람은 새로운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게 됨.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 아브라함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하나님께 순종과 직결됨.
-. 아브람에게 무슨 특별한 미덕이나 의가 있었던 것이 아님.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 두 가지(창 18:18-19):
-. 첫째, 강대한 나라가 되어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려고.(18절)
=. 강대한 나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은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임.
-. 둘째,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19절)
=.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일구시는 ‘강대한 나라’의 내적 특성을 보여줌: 세상적 의미에서 강대한 나라와는 대비될 수 있는 모습임.
=. ‘강대한 나라’의 본질은 ‘무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속성’과 관계됨.
4)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는 말씀은 구별된 윤리 공동체가 아브라함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 하나님의 선택은 이러한 방향에서의 의무, 책임이 있음을 보여줌.
-.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드러난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교회의 사명과도 관계됨.
=. 교회가 구별된 윤리 공동체로 자신을 빚어가야 함을 의미.
=. 이것이 결여된 ‘교회 사업’은 본질을 잃은 사업이 되기 쉬움.
-. “하나님의 목적은 의로운 개인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소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의와 평화와 정의와 사랑이라는 속성을 구현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있음.”
=. 이러한 목적이 아브라함의 선택 기사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계속 됨.
2. 아브라함 기사에 나타난 순종과 ‘윤리’의 관계(창 22:1-19)
1)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대한 일반적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
-. 이 질문은 ‘생명 존중’이라는 ‘윤리’를 ‘하나님’보다 상위에 두는 데서 나온 것임.
2) 태초에 ‘윤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셨음
-. 인간은 ‘윤리’에 순종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창조된 것임.
3) ‘윤리’를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윤리’ 를 지키게 됨.(9-12절)
-. ‘자기 의,’ ‘집단의 의,’ ‘국가의 의’보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중요함.
-. 창 18:19절: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3. 하나님의 은혜와 삶의 포용성
1)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 및 믿음 공동체의 기원.
-.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창시자로 그려짐.
-.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믿음 족속’--믿음 공동체의 시조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
=.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갈 3:7)
=. 아브라함은 믿는 우리 모두의 선조임.
2)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삶의 포용성을 갖추어야 함.
-.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심. (창 12: 4)
-. 아브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 ‘복의 근원’의 역할을 해야 함.
-. ‘배타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치함.
제 3-2-4 주제 : 요셉과 ‘원수를 위한 윤리’
- 요셉의 ‘원수 사랑’ 윤리 -
1.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장중에서 이해함(창 45:4-7절)
-.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판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진 않음.(4절)
=.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면, 무골호인식 ‘좋은 사람’이 될 뿐임.
-. 형들의 행위 넘어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이해.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5절 하)
=.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의 기초가 됨.
-.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줌.(5절 상)
=.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 자기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원수인 형들에게 선언함.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8절)
2. 원수의 강퍅한 마음을 이해하고 수용함.(창 50:15-17절)
-.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이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없는 말을 꾸밈.
=. 창 45장에서 요셉의 용서를 받은 형들은 무려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요셉의 보복 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참조, 창 47:28절: 야곱이 애굽에 온 지 17년이 되어 죽음)
=.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마음이 더욱 강퍅해지기 쉬움.
=. 맞은 사람은 발 펴고 잘 수 있지만, 때린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속담과 유사.
-.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울고, 형들을 다시 위로하고 안심시킴(17절 하, 19절 상)
=. 요셉이 형들의 마음 상태를 측은히 여겼음을 알 수 있음.
3.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삶.(창 50:19절)
-.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2)
=.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신 32:35, 롬 12:19, 히 10:30절)
-.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지만, 그들의 죄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하지는 않았음.
=. 형들은 요셉에게는 용서를 구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음.
=.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요셉의 ‘종들’이라고 선언.(18절)
*.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이다.”
4. 악을 선으로 갚음.(창 50:21절)
-.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 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
=. 악한 세상에 ‘나의 악’을 하나 더 보태는 것.
제 3-2-5 주제 : 출애굽 기사의 윤리적 의미
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1) 하나님 은혜의 우선성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애굽의 억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을 구원해 내시기로 결정을 하심(출 2: 23-25절).
=.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행동하시도록 만든 뚜렷한 계기는 압제받는 자들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 하나님은 보셨고, 들으셨고, 그들을 아끼셔서 행동에 들어가심.(출 3:7-8)
-. 이러한 하나님 은혜의 개입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한 충실성의 결과이기도 함
=. ‘아브라함 선택 기사’ 참조.
2) 구원의 은혜와 심판
-.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 은혜의 행위는 압제자인 애굽에 대해서는 의로운 심판의 행위로 나타남.
=. 사랑과 정의, 구원과 심판의 관계와 관련하여 출애굽 기사는 중요한 통찰력을 줌.
-. ‘불의에 대한 부르짖음’은 ‘체아카’이고, 그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정의는 ‘체다카’임.
3)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원체험이 됨.
-. 이스라엘 사회 형성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할 것”을 자주 명령하심.
-. 세상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모델’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믿음 공동체가 될 것을 요구받음.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2)
=. 출애굽은 시내산 언약과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음.
-. 하나님께서 은혜로 역사하신 출애굽(하나님과의 수직적 측면)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그 정신을 살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책임(구성원 사이의 수평적 측면)으로 주어짐.
=.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징책을 받을 때는 대부분 수평적 측면이 결여된 것에 기인함.
2.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 : 공동체 중심적 전망
1) 출애굽은 개별적 존재의 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해방 성격이 크다.
-. 이스라엘 백성 중 몇몇 특권층만의 출애굽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신분적 차이나 경제적 차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건강한 자나 병든 자 모두가 출애굽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 가축도 함께 가져 갈 수 있었음(출 12:30-32)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 등적 관계를 내재화하는 것이 필요.
2)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이 중요
-. ‘--로부터 구원(살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에로의 구원(살림)’이다.
-. 출애굽의 역사에는 가나안 땅에서의 삶이 전제되어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구원(살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나안에서 의 참된 삶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 보론 1: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에 맞춰 역사하시는 하나님 은혜(출 23:29-30).
-. 객관적 조건의 성숙(29절):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 주체적 역량의 성숙(30절):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 보론 2: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에 대한 도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민 12:1-16절)
-. 핵심 쟁점: 이 사건을 근거로 오늘날 ‘주의 종’(목사)의 잘못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주장해도 되는가?
=.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시비를 하면서, 아론과 미리암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간 것이 문제가 아닌가?
=. 모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오늘날로 치자면, ‘정경’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해야.
*. 보론 3: 능력 있는 자의 특징으로 제시된 조건 세 가지(출 18:21)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진실한 자, 불의의 이익을 미워하는 자.
=.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능력 있는 자’라고 칭함 받는 자와는 큰 차이가 있음.
제 3-2-6 주제 : 율법과 사법 체계에 나타난 윤리적 의미
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의 의미
1. 율법은 법률 이상의 의미를 가짐
-. 구약 성경 처음 다섯 권을 의미하는 ‘토라’는 ‘안내,’ ‘교훈’을 의미함.
=. 법률 제정 혹은 법률이라는 의미에서의 ‘법’이 아님.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활 교본.
-. “‘토라’는 많은 실타래로 짜 놓은 값진 양탄자다.”
=. 노래와 시, 여행기, 족보, 축복문, 지리상의 표기, 인구 조사 목록, 부고 등 여러 종류의 글과 더불어 법규가 들어 있음.
-. 이 강의에서는 시내산 법규를 중심으로 하되, 구약의 다른 법규들도 참조.
2. 주요 법률 단락들
1) 십계명: 출 20:2-17, 신 5:6-21.
2) 언약서: 출 20:22-23:33.
-. 십계명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법규 단락에 주어진 명칭.
-.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절)
3) 레위기: 거의 전체가 법규와 규례로 이루어짐.
-. 시내산 언약이라는 구체적 배경과 그 언약 이전의 모든 상황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4) 신명기에 수집되어 있는 법규 모음
-. 언약 갱신 문서의 형태를 띠고 있음(신 29:1)
=. 시내산에서 비준되었던 언약을 갱신.
-. 출애굽 2세대를 위한 언약 갱신.
3. 여러 가지 종류의 율법
1) 형법:
-.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근본적으로 어기는 행위는 민족 전체의 안녕에 대한 위협.
=.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그들의 존재 이유이기에.
-. 언약 관계를 거스르는 행위에 대한 규제를 언급한 것이 형법의 성격을 가짐.
2) 판례법:
-. “만일 ...... 일 때”라는 말로 시작하여 기술된 처벌 규정이 판례법.
-. 이스라엘 민법의 성격을 가짐.
3) 가족법:
-.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가정이 하나의 주요한 재판정 역할을 담당함.
4) 제의법:
-. 희생 제사법, 성력 법규(sacred calendar laws) 등.
5) 상징적 법규:
-. 이스라엘의 상징적 우주를 표현해주고 있는 법규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등.
Ⅱ. 율법에 나타난 윤리적 가치 척도
1. 하나님 우선성
-. 율법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
=.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임.
=.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2. 재산보다 생명을 우위에 둠
-. 성경에서 생명과 재산이 동등하게 비교된 적이 없음.
-. 재산에 해를 끼친 것 때문에 죽음으로 처벌할 수 없음.
=. 나단이 다윗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비유를 하자, 다윗은 “죽어 마땅한 자”라고 그 부자를 정죄하지만, 실제로 다윗이 선고할 수 있는 벌은 네 배를 갚도록 하였을 뿐임(삼하 12:1-6)
=.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범죄는, 통산적인 도적질이 아니라, 전쟁 때 요구되었던 언약적 요구인 이교도들의 ‘오염된’ 것들에 대한 ‘금지령’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었음.
-.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을 후리는 일(유괴, 납치)은 사형죄(출 21:16. 신 24:7)
=. 사람의 목숨을 훔치는 일은 재산을 훔치는 일과는 다른 것이기에.
-. 생명을 돈으로 잴 수는 없었음(민 35:31-34)
=. 구약에서 유일한 예외는 황소의 뿔에 사람이 받혀 죽었을 때 희생자 가족이 동의할 경우, 생명에 대한 속전이 가능함(출 21:28-32)
=. 고대 근동 법전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많은 중죄가 벌금으로 대체될 수 있었음.
3. 사람에 대한 처벌은 당대 근동 법전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인도주의적임.
-. 태형일 경우, 죄의 정도에 따라 때리되, 사십 대를 넘지 못하게 제한함.
=. 유죄가 확정된 위반자라 할지라도 기본적 인권과 존엄성을 보장하려는 의도.
-. 이스라엘 법에는 어떠한 형태의 투옥도 규정되어 있지 않음.
=. 물론, 후대 왕정시대에서는 투옥이 하나의 특징이 되었지만, 초기 율법에는 없었음.
=. 강제 노역을 하게 된 종은 자유롭게 결혼 생활과 가족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절기와 축제에 동참하고, 마을 사람들과 정상적 생활 교제가 가능.
-. 구약의 율법에서는 피해를 당한 측의 사회 계급과 서열에 따른 형벌의 차등이 없음.
=. 외국인과 이주민을 포함해서 모든 사회 집단이 법 앞에 평등함(출 12:49, 레 19:34, 민 15:16).
-. 대리처벌을 원칙적으로 금함(신 24:16)
=.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이 죽임을 당할 것”
4. 강자의 법적 권리나 권한보다 약자의 형편을 우선시함.
-. 그 주인의 권리 주장보다 도망한 종의 형편을 우선시함(신 23:15-16)
=. 도망한 종을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일을 금하고, 도피처를 찾을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명령함.
-. 전쟁의 추악함이 만연한 와중에서도 관례적인 강자(남성, 승리한 병사, 남편)의 권리보다 약자(여성, 외국인, 포로)의 곤란한 형편을 더 중시함(신 21:10-14).
=. 승리한 병사는 패전국의 여자를 취할 수 있지만, 반드시 법적 아내로만 취해야 함.
=. 강간이나 종으로 삼는 일은 배제됨.
=. 여자 포로를 정식 아내로 삼기로 했을지라도, 그 패전국의 여성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을 고려하여, 한 달이 지나서야 정상적인 성적 관계를 행사하게 제한함.
-. 채권자의 법적인 권리보다 채무자의 형편을 중요시함(신 24:6, 10-13).
=. 채권자는 채무자에게서 밥을 짓는 도구(가사용 맷돌)를 담보물로 잡을 수 없음.
=. 채권자는 채무자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안 되며, 집 바깥에서 기다리면서 채무자가 담보물로 제공할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함.
=. 겉옷을 담보물로 받았을 때 채권자는 해가 질 때에 그 옷을 채무자에게 반드시 가져다 주어야 함.
-. 땅 주인의 법적 재산권에 앞서는 땅 없는 자의 형편(신 24:19-22)
=. 밭에서 곡식을 벨 때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그것을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 감람나무 과실을 떨 때나 포도원의 포도를 딸 때,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는 것.
Ⅲ.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1.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계명의 길을 여심
-.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필요를 먼저 아시고 계명의 길 여심.
-.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로부터 지키기 위한 배려(출 20:20절)
2. 하나님 은혜의 행위에 입각한 계명
-.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로 행하셨 는지를 먼저 재확인시키신다: 애굽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하였는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였는지를 말씀하심(출 19: 4).
-. 십계명은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 라는 말로 시작됨.(출 20:2)
-. 이러한 표현은 십계명에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압축된 표현으로 무려 네 번이 나 반복되어 나타남.
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배려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할 수 있음.
-.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의 길에 참여하는 것도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 참 여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 들은 자발적으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선언한다.(출 19: 8)
-.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권면적 강제성 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 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지키기로 자발적으로 작정하였다.
4. 내용적으로 볼 때, 1-3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바로 잡은 후,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옴. 역순이 아니다.
-. 초월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오용될 경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 거나, 새긴 우상을 만듦 (출 20: 3-6)
=.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만들 수 없다. 인간 이 신의 대용물(우상)을 만들 수도 없다.
=.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임:
=.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듦: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23)
=. 여로보암이 두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도, ‘자기를 위해서’였다. 즉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르호보암으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여--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마음을 자기에게 붙잡아두기 위하여--금송아지를 만든 후, “이 백성의 마음을 자에서 인도하여 올린백성의의 신들”이라고 하고, 베델과 단에 하나씩 `올린왕상 12:25-29)
-. 인간과 세상 일에 관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성품이 오용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 (출 20: 7)
=.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이용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Ⅳ. 십계명에 나타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는 공동체성 강화
1. 노동의 의무(또는 권리)가 보장됨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되”(출 20: 9)
-. 타락 후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통한 자기 성취 또는 자기 실현의 길을 허락하심.
=. 이것은 의무이면서 동시에 권리이다.
-. 오늘날처럼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자가 남발되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에 이 점을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2. 휴식의 권리 보장
-. “제 칠일은 ... 아무 일도 하지 말라.”(10절)
-. 모든 사람과 가축에게 이 휴식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들이나 딸, 남종, 여종, 객, 육축이 포함됨.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휴식 배려
-. 이 점은 오늘날처럼 생산력 향상이 최고의 가치인 양 여겨지는 사회 풍조 속에서 사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적 메시지를 준다.
=. 밤을 빼앗긴 현대인. 생산주기를 줄이기 위해 가축(닭)에게 밤을 빼앗는 현대인.
3. 가정의 소중함 유지․보존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12, 14절)
4. 인간 생명의 존중
-. “살인하지 말라”(13절)
5. 인간관계의 신뢰성 유지․보존
-. “거짓 증거하지 말라.”(16절)
-. 계명에 사용된 ‘너’라는 개념이 집단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계명에는 사회의 허위 구조적 성격에 대한 금지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미지 조작, ‘언론 플레이’ 등이 포함.
6. 소유권 보장
-.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15, 17절)
Ⅴ. 율법 준수와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
1. 율법 준수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
-.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구원해주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임.
=. 시내산의 율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임.
-. 따라서 “구약은 율법,” “신약은 은혜”를 강조한다는 식의 통설은 재고될 필요가 있음.
=. 구약의 율법도 하나님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함.
2.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먼저 이해해야 함.
-. 하나님은 열방에게 복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 창 12:1-3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
=. 이스라엘 실존 자체에 보편적인 목적이 있었음.
-. 땅의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의 도” 즉 율법을 주심(창 16:19).
3. 이스라엘은 하나님 은혜의 주도권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열방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기대’ 속에서 율법을 수여받고 지키며 살아야 함.
-. 출 19:1-6절은 출애굽과 율법 수여 및 언약 체결의 중심점에서 하신 말씀.
=. 하나님 은혜의 주도권: “내가 어떻게 행하였음을 보았느니라”(4절).
=. 미래의 전망: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절).
-. 신 4:5-8절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대로 살아 열방을 ‘선도’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줌.
=.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와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6절).
4.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억’과 선택받은 백성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 성취에 대한 ‘기대’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의미였다면, 신약시대 이후부터는 교회의 존재 의미가 됨.
-.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교회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함.
=. 율법이든 말씀이든 그것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특성을 견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
*. 보론: 속죄제와 속건제에 담긴 윤리적 의미
-. 구약 제사법 중 속죄를 위한 제사 중 속건제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음.
-. 속건제가 속죄제와 분명하게 다른 점 하나는 보상의 개념이 있다는 것.(레 5:16, 6:5)
=. 자신이 잘못한 내용에 1/5을 보태어 갚아야 함.
=.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그 피해자에게 갚아야 함.
-. 속건제의 형식적 측면은 신약에서 사라졌지만, 그 내용적 의미는 유지되고 있다.
=. 삭개오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구원이 오늘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심.(눅 19:8-9)
-. 사죄와 관련하여 “수직적 측면”은 강조하면서, “수평적 측면”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음.
=. 하나님 앞에서의 사죄(속죄제 성격)는 강조하지만, 피해자에게 자발적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것(속건제 성격)은 경시함으로써 “값싼 제자도”를 유포함.
제 3-2-7 주제 : 가나안 진입 및 정착 기사의 윤리적 의미
I.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관계
1.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일을 하심.
-. 기본적으로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다. (삼상 17: 47)
-. 전쟁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을 요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강조하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를 위하여 싸우겠다.”(출 14:13-15), 내가 ...... 너희에게 붙였다.” (수 6: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그들을 끊으리니......”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 23: 20-31).
=. 여리고 성 진입 전쟁을 하기 직전,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옴. 여호수아는 굴복(수5:13-14)
2.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됨
-.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 에 들어가지 못함(민 20:12, 27:4, 신 32:51)
-. 가나안 땅 진입의 첫 관문이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먼저 ‘성결’을 요구함 (수 3:5)
-. 최초의 진입 전쟁인 여리고성 전투를 하기 전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에게 ‘거룩한 땅’에 대해 인식시킴.(수 5:15)
-. 아간의 범죄로 최초의 패배를 맛보자, 그 해결책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심(수 7:13)
3.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동체 안의 존재로 다룸.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개별적-분립적 개인으로 취급하시기보다는 공동체 안의 존재로 다루심. 따라서 공동체의 거룩성을 창출한다는 큰 구도 안에서 개인을 다루심. 그 결과 분립적 개인을 우주의 전체인양 생각하는 현대적 개인주의 사고방식 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구약에 나타나기도 한다.
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 거룩한 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정립
1. 이스라엘 백성의 대외적 관계
-. 진멸할 것을 요구: 사람뿐 아니라 물건까지도.
-. 진멸의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염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
=. 출 23:33절: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 이방족속 제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이 목적임.
=. 그 만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거룩함을 중요시 여김
-. 이러한 진멸의 요구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근거가 될 순 없다.
2. 이스라엘 백성의 내부적 관계
-. 광야생활 때 맺은 계약법전의 실행을 그대로 요구받음.
=. 거룩한 공동체성 강화를 지향하는 관계: 2-4강 내용 참조.
-. 거룩한 공동체성을 위해 내부 범죄(자)를 진멸할 것을 요구하심
=. 아간의 비극을 참조하라.(수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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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하나님의 “가나안 진입 전쟁”과 예수님의 십자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가나안 진입 전쟁”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I
구약의 가나안 진입 전쟁 기사를 진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여보내시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먼저 거하고 있던 사람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거나 숙청하셔도 (또는 죽이거나 숙청하라고 명령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동일한 질문이 출애굽 기사와 관련하여서도 제기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애굽의 죄없는 백성들의 장자를 그렇게 살해하셔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글은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여기서 나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완벽한 답을 줄 형편이 못된다. 다만 이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충실히 논의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적 장(場)을 마련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II
구약에 나타나는 “가나안 진입 전쟁”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가나안 진입 전쟁”은 “언약 백성” 즉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와 같이 세상의 죄악된 인간들을 다 없애기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은 신화에 나오는 전쟁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의 신”과 같은 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게 긴 세월 동안 “너희 자손들에게 주마”라고 거듭해서 약속해 주셨던 땅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위한 땅이 하필이면 가나안 땅이어야만 하느냐,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지 않는 땅을 주시면 안 되나” 하는 질문은-- 일리는 있지만--큰 설득력은 없는 질문이다.
셋째, 가나안 진입 전쟁의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삼상 17: 4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앞서서 행하시는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이 요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은혜에의 동참,” “믿음의 실천,” “순종” 등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전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적들을 쳐부시는 전쟁을 하자”라는 구호는, 전쟁을 시작하려는 세력 (또는 집단, 국가)의 대중 기만 정책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나, 20세기에 ‘자유주의 (또는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진입 전쟁을 수행하신 것은 아니다. 세상에 본이 될 “거룩한 대안 공동체”를 수립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뿐이다. 즉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을 반영할 “거룩한 대안 공동체”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는 언제라도 이스라엘을 진멸하실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자, 이스라엘을 들어 가나안 거류민을 진멸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진멸시키셨다.
다섯째, 가나안 진입 전쟁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함과 병행하여 이해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이 두려워 떨 만한 위력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가나안 진입 전쟁에서 이스라엘로 승리케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한 위력적인 능력을 통해 수립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거룩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불순종과 부패의 길을 가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의 손에 붙이신다. 그러나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이제 새로운 방법 즉 “하나님의 약함”을 통해 계속된다. 가나안 진입 전쟁 등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 대안 공동체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워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의 약함”을 통해 “교회”를 세상을 위한 대안 공동체로 세우시려는 새로운 방법으로 수행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약함”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 너와 세상을 구원해 보라는 유혹 및 조롱을 끊임없이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다. 예수님 이후 하나님의 역사는 이 세상에서 “약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길을 따르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 역시 “약함”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의 스타일을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 “믿음의 길” 등을 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가나안 진입 전쟁”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의 적”을 무찌르려는 방법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예수님의 “약함을 통한 사랑의 실천”은, 사회 속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저항 (사랑의 실천)”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결코 “무골호인”과 같은 삶을 사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악과 위선에 대해 신랄하게 질책하시고 저항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을지언정 무력을 사용하시지는 않으셨다.
일곱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 은혜의 역사”에 제대로 동참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다가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약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 은혜의 역사”에 제대로 동참하지 못하고, “교회를 위한 교회”로 명목만 유지하고 지낸다면, 교회 역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적 특권 의식을 허용치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배타적 특권 의식을 질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III
이상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가나안 진입 전쟁 |
예수님의 십자가 |
|
하나님의 의도 |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수립 |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수립 |
사용된 방법 |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 |
하나님의 약함을 통해 |
공동체의 실제적 형태 |
이스라엘 공동체 |
교회 |
공동체에 대한 요구 |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거룩성 |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거룩성 |
공동체의 반응 태도 |
불순종: 하나님의 거룩성을 반영하는, 하나님 중심적 “대안 공동체”로 있기보다는 “다른 나라와 같이” 왕권 중심의 권력 공동체로 변질됨 |
현재 진행중: 1. 불순종의 모습: 하나님의 약함을 따르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강함”을 자신이나 교회 자체를 위해 이용하려고 함. 결국 성공 지향적 신앙으로 변질됨 2. 순종의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름. 대내적으로는 “교회가 교회되게”하기위해 노력함.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함. |
결과 |
멸망-->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계획이 교회로 옮겨짐 |
현재 진행중 |
제 3-2-8 주제 : 초기 이스라엘 믿음 공동체 비전의 윤리적 함의
Ⅰ. 이스라엘 공동체 비전의 기본 성격.
1.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태동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집단적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호칭할 때, ‘너’라고 나온 것은 이스라엘 집단에 대한 ‘대표 단수’의 성격을 갖는다.
=.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 10: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 이스라엘 공동체의 집단적 성격(풍토, 작풍)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성격을 나타내야 함.
=.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집단의 풍토가 판단의 근거가 됨.
-.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열방을 위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목적임.
=.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함으로써 열방을 복되게 함.
=. 하나님의 제사장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한 선생과 모델과 중보자.
2. 이스라엘 공동체의 풍토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그 공동체 안에 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 뜻에 부합하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함.
-.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법률 제도 등에 그 성격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게 됨.
Ⅱ. 경제 제도의 윤리적 함의
1. 경제생활과 관련한 세 가지 기본적인 책임
1) “열심히”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해야 할 책임 (창 3: 17-18; 출 20: 9, 11절)
2) 휴식해야 할 책임 (출 20: 10-11; 신 5: 14-15절)
3)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
ㄱ. 신 15: 7-8, 10-11: 가난한 자에게 쓸 것을 주고, 마음을 강퍅케 마라;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펴라.
ㄴ. 레 19: 9-10: 곡물을 벨 때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마라.
ㄷ. 신 24: 19-21: 객과 고아와 과부를 염두에 둔 추수.
ㄹ. 출 23: 10-11: 칠 년째는 땅을 갈지 말고 묵여 두어 가난한 자와 들짐승으로 먹게.
ㅁ. 신 14: 28-29: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 객, 고아, 과부로 배불리 먹게 하라.
*. 보론 1: 현대인과 휴식의 문제
1. 일 중독자의 위험성
2. 자본의 이익 재창출 (순환)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노동 강화의 문제와 휴식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 필요.
*. 보론 2: 구약의 빈민구제법에 담긴 윤리적 의미
1. 생필품을 채워주어야 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기본 의무.
-. 삶의 일상성에서 실천해야 할 것: “손을 펴라.” “이삭을 남겨두라.”
-. 계획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
2. 시혜(施惠)자의 교만을 경계하는 방법으로.
-.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를 명령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냄.
=.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신 24:18, 22)
-. 이삭을 남겨두거나, 잊고 온 곡식 묶음을 그대로 두면, 수혜자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가져갈 수 있음. 또한 시혜자는 누가 자기 밭에 남겨둔 것을 가져 갔는지 알 수 없음.
=. 신약에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과 같은 방법임.
3. 수혜(受惠)자의 자립성을 키우는 방법으로.
-. 오늘 필요한 분량만 가져가도록 제한함.(신 23:24-25)
-. 당장 궁핍한 것은 채우되, 남의 것을 가지고 내일을 살려고 하지는 못하게 함.
-. 최소의 필요를 채우면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해야 함을 보여줌.
-. 길갈에서 그곳 소출을 먹게 되었을 때 만나가 그치는 것도 같은 의미.
2. 만나의 경제학 (출 16장 참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그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최초로 주신 것이 “만나”이다. 이 만나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제생활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 원형을 알 수 있다.
만나를 공급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나가서 취해오면 된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은혜 (만나 공급)에 동참 (나가서 거둠)하는 삶이다. 만나의 분배원칙은 “양(量)의 동등성”이나 “취하는 능력이나 노력에 따른 성과급적 평등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필요의 충족”이 만나 분배 원칙의 핵심이다. 그 결과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18절) 또한 만나를 거두기 위해 아침에 장막 밖에 나가 일한 사람이나 장막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나 만나를 먹는 권리는 똑같이 갖는다(16절). 하나님께서는 만나의 축적(蓄積)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만나를 40년간 허락하신 것이다. 요즘 경제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절대 생산량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필요에 따른 분배”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가 하는 데 있다. 만나의 축적을 불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위해서만은 만나를 하루 축적할 수 있게 하셨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휴식”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심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 이르러 그 땅의 소출을 먹기 시작할 때 만나 공급이 끊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귀중한 통찰력을 준다.(수 5:10-12) 즉 자신들이 노력해서 식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베품(만나)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고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적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만나의 경제학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3. 희년의 경제학: 정의로운 경제생활을 위한 사회 구조적-제도적 보완
1) 당시 사회에서 땅은 가장 근본적인 생산수단임.
2)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음 (레 25: 23): 생산 수단의 사유화가 원칙적으로 제한됨.
3) 땅 사용권의 평등한 분배 (민 26: 52-56)
ㄱ. 필요에 따른 분배: 사람의 수에 따라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함.
ㄴ. 분배 과정에서의 평등: 제비를 뽑아 분배.
4) 생산수단에 대한 부분적 사유 재산 제도는 인정하지만, 세습적 사유 재산 제도는 인정 되지 않음 (레 25: 23-28)
ㄱ. 땅을 사고 팔 수는 있다.
ㄴ. 어려워서 땅을 판 사람은 가능한 한 자기 힘으로 돈을 되돌려 주고 찾도록 해야 함.
ㄷ. 설사 땅을 판 사람이 되물릴 여유가 없더라도, 50년 되는 해에는 땅을 산 사람은 돌 려 주어야 한다 (영구적 또는 세습적 사유 재산 제도 금지)
ㄹ. 이러한 제도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 약한 자를 배려한 제도임.
Ⅲ. 정치 제도의 윤리적 함의
1. 정치와 평등 사회
1)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직위나 계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형제” 라고 부르는 장면을 많이 보여준다.
ㄱ. 모세와 종된 히브리인들 사이 (출 2: 11)
ㄴ. 재판장과 피고 사이 (신 1: 16; 신 19: 18-19)
ㄷ. 제사장과 일반인 (민 18: 6-7)
ㄹ. 일반인과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사이 (신 15: 7, 9, 11절)
2) 약한 자와 가난한 자 편을 드는 사회: 위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세 가지 기본적인 책임 중 제 3 항 참조.
3) 이스라엘은 순수한 단일 인종 사회라기보다는 다인종 사회였는데, 인종 차별에 근거한 권력투쟁이 없었다.
-. 요셉이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낳은 혼혈아들임.(창 41:50)
-.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할 때, 수많은 잡족이 함께 나옴으로써 이스라엘 국가의 다인종적 성격은 한층 더 강화됨.(출 12:38)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부족,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 국가로 부르심.(겔 16:3)
2. 정치의 지향점: 지도자를 위한 백성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지도자 체제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지도자 자신의 영광이나 권세를 위해 세운 것이 아니다.
-.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임.
=. 지도자는 이 주인공을 위한 조연일 뿐임.
=. 모세 (출 3: 7-10): 내 백성의 우고에서 건지기 위하여.
=. 여호수아 (수 1: 1-6):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어가기 위해.
=. 사사들 (삿 2: 16, 18):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략하는 자들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 성경을 읽을 때 영웅사관을 조심해야 함.
2) 지도자에게 더욱 엄격한 도덕성과 거룩함을 요구함:
민수기 20: 1-13절의 내용을 보면,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한 항의는 오늘날 로 치자면 최저 생계 보장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들의 항의는 모세와 아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행동일 수도 있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이들의 항의에 대해 처음엔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않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간다. 하나 님에게서 상황타개를 위한 방법을 들은 후,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에게 노기 띤 말 (“패 역한 너희여”)과 태도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침)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과 태도에 내포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신다. 첫째,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고,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 결과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모세와 아론에게 이 렇게 엄격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위 “배은망덕한 행동”에 대해서 는 아무런 언급 (비난)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의 믿음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 영하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지도자는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특권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많이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다루신다는 사실이다.
3) 왕권이 제한 됨.
-. 첫째, 왕에게는 입법권이 없었다.
=. 왕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통치해야 했음.
=. 하나님의 율법을 벗어났을 때는 선지자들의 가차없는 비판을 받아야 했음.
-. 둘째, 왕에 대한 신격화가 없었음.
=. 왕은 “형제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왕은 그 마음이 형제 위에 교만하면 안 됨.(신 17:15, 20)
-. 셋째, 이방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왕의 소유권이 엄격하게 제한됨.(신 17:16-17)
=. 군사력, 아내, 은금 등을 많이 두면 안 됨.
4) 이스라엘 왕이 ‘목자’로 비유된 것의 실천적 의미
-. 목자는 매우 책임이 중하고 몹시 힘든 일을 해야 했지만, 사회적 신분은 상대적으로 낮았음.
=. 이스라엘 왕을 목자로 비유하여 부른 이유는, 왕권의 영광이 아니라 왕직의 의무를 일깨워주는 강력한 도구임.
-. 겔 34:2-4절: “자기만 먹은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아니하며, 쫒기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3. 정치 권세의 위치
1) 모든 권세는 여호와의 것.
-. 신약에서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천명하는 것처럼, 구약에서도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것임을 전제로 함.
=. 어떤 권세도 하나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고, 하나님이 따져 묻는 대상임.
=. 왕정 시대에 예언자의 역할이 이 점을 잘 보여줌.
-. 권세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사람이나 특정 자리를 하나님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됨.
2) 정치 권세는 백성으로부터 오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옴.
-. 백성들이 왕을 원하지만, 왕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 그럼에도 백성의 역할은 중요함.
=. 백성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은 중요함.
-. 다윗 왕조에서 백성들이 왕을 폐하고 세우는 모습도 성경은 보여줌.
=. 무리가 유다 여왕 아달랴를 폐함(왕하 11:17-20)
=.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 왕으로 삼으니”(왕하 14:19)
-. 구약 맥락에서 볼 때, 왕에게 신적 권한이 없듯이, 다수결에도 신적 권한이 없다.
=.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권력의 분할과 분산을 구약도 지지하고 있다고 추론 가능.
=. 한 개인이나 집단이 하나님의 총체적 권세를 독점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에.
3) 정치 권세의 모델은 섬김.
-. 히 3:5: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 왕상 12:7: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 보론: 능력 있는 지도자의 특징(출 18:21-22)
-.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 둘째, 진실한 자.
-. 셋째,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
제 3-2-9 주제 : 왕권 중심 공동체로의 전환에 나타난 윤리적 함의
Ⅰ. 왕권 중심 공동체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1. 세 가지 경우
* 경우 1 :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삿 8:22-23) :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나아와,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기드온의 전쟁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것을 기드온이 구원했다는 식으로 오해했다. 그 오해에 바탕해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또한 이때까지 이스라엘에는 세습적 통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의 손자에게까지 통치권을 제시한 것은 다분히 이웃 나라의 왕권체제를 염두에 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
* 경우 2 :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었을 때 요담의 반응 (삿 9:7-15) :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의 아들 중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 칠십 명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이 소식을 듣고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은--아비멜렉에게서 도망가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나무 비유를 들어 아비멜렉을 조롱한다. 그 비유에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의 태도는, 자기들 세계에서는 통치하고 통치받는 체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점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하나님 백성의 정치 군사 지도자 (하나님의 종)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필요에 따라 세워지고 그 상황이 끝나면 평민으로 돌아가는--그들의 영원한 통치자인-- 하나님의 일시적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왕은 필요에 부응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상시적 통치자가 되기 때문에,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과 어그러진다.
* 경우 3 :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삼상 8장)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국가 모델보다는 이웃 나라들의 국가 체제를 흉내내고 싶어했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면서 제시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내적 이유로, 사무엘이 늙고 그의 후계자로 나선 아들들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외적 이유로, 주변 국가들이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둘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을 더 잘 반영한다. 만약, 내적 이유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면 굳이 왕을 요구할 필요 없이, 당신의 아들들이 올바로 치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징계하라고 부탁하면서, 이스라엘의 내부 개혁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은, 8:19-20절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열방과 같이 되는 것”에 있다. 이들이 상정한 국가 모델은 대내적으로는 지배-복종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대외적으로는 침략과 자기 확장을 추진하는 (“왕이 우리 앞에 나아가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 국가체제이다. 이들은 결국, 내적으로는 평등하고 외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하나님의 공동체 이상을 버리고, “강철의 국가”를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2. 왕권 체제를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기
1) 야망의 확장을 위하여
-.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드온이 미드온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그에게 왕이 되어 달라 고 부탁.
-. 백성들 앞에 나가서 백성들을 위해 싸워줄 왕을 요구.(삼상 8:20)
2) 곤경에서의 탈출을 위하여
-. 사무엘이 늙고 그의 아들들이 무능하고 부패했을 때, 그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 백성들 앞에 나가서 백성들을 위해 싸워줄 왕을 요구.
3. 왕권 체제 요구에 담긴 의미
1) 평등 관계가 불평등 관계 즉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변질
-. 왕이 백성들을 다스리고, 백성들은 왕의 종이 됨(삼상 8:18, 20)
2) 공동체 체제를 하나님 중심의 자생적 체제로 형성시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웃 나 라를 모델로 하여 모방함.(삼상 8:20)
-.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3)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함(삼상 8:7)
-. “그들이 너(사무엘)를 버린 것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
Ⅱ. 성전과 궁전: 그 역설적 관계
1. 성전과 궁전의 원론적 관계
-. 원론적으로 볼 때,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궁전은 왕을 위한 것.
-. 하나님 중심적 사회라면, 궁전보다 성전에 무게 중심이 더 있어야 함.
-. 또한 성전이 기준이 되어 궁전을 고려하여야 함.
2. 성전 건축을 시도하는 다윗의 동기 (삼하 7:1-9)
-. 자신의 거처를 하나님의 거처에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처를 기준으로 하여 하나 님의 거처를 바꾸려는 시도.
=. 이러한 동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을 좋다고 평가하심: 대하 6:7-9절: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하시더니”
-.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는 것이지 다윗의 행위(성전 건축 등) 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다.
=.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이지, 다윗의 행위와는 전 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심.(삼하 7:8-9)
3. 솔론몬의 성전 건축과 궁전 건축
-. 솔로몬은 성전건축에 7년, 궁전건축에 13년의 기간을 보냄.(왕상 6:37-7:1)
=. 자신의 재위 기간의 절반을 건축 사업으로 보냄.
-. 이러한 건축 사업은, 억압적 수단에 의하여 당대에 왕권을 강화시키기는 데 기여하지 만, 백성들을 피폐케 한다.(왕상 12:4 참조)
-. 그러나 성전 건축이 솔로몬에게 어떤 특권을 주지 않음.
=. 왕상 6:12절: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 왕상 9:4-9절: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쳤을 때 솔로몬에게 경고하신 말씀: “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비교, 대하 7:19-20)
*. 보론: 성막 제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 첫째, 성막 제조는 하나님에게서 기인.
-. 둘째, 성막의 규모와 구성물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시함.(출 25-27장; 출 25:40)
=. 인간적 욕망이 들어갈 여지가 없음.
-. 셋째, 강제적으로 예물을 내게 하지 않았음: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 25:2)
=. 예물을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 자체가 고귀한 것임을 암시해 줌.
-. 넷째, 예물을 그만 가져오게 명령할 정도임.(출 36:5-6)
=. 백성들이 예물을 자원하여 많이 가져왔다는 측면이 부각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 안에서 절제하였기 때문.
=. 무한한 건축 의지에 얽매일 경우, 결코 ‘예물이 남는 일’은 없게 됨.
Ⅲ. 왕권 강화의 부정적 결과--솔로몬의 경우 : 삶과 종교의 분리
1. 왕권을 제한하시는 하나님 (신 17:16-20) :
왕 중심 사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체제가 아니다.(삼상 8:7절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왕을 요구할 것을 상정하여 사전에 왕권을 제한하신다. 즉 말, 아내, 그리고 은금을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말은 당시에 군사력 증강을 위해 필요한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아내를 많이 갖는 것은 왕권의 유지 강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자신의 왕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 따라서 아내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지지기반 및 세력을 넓힌다는 의미가 있다. 은과 금의 소유를 제한한 것은, 왕의 개인 재산을 제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금지 사항은 사실 당시 사회에서 왕이 당연하게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왕이 절대군주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금지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금지 조항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것도 말씀하신다. 즉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고, 백성들과 평등관계를 늘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왕권의 강화와 확장--그 이중적 모습 :
1) 왕이 된 솔로몬은 왕권을 강화 확장하기 위해서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법을 그대로 따랐으며, 왕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린다. 정략적 결혼을 통하여 얻은 아내 및 후궁이 천 명이 넘으며(왕상 11:1-3), 엄청난 병력(왕상 4:26, 10:28-29, 대하 1:14-17)과 개인 재산(왕상 10:14-23)을 소유한다. 왕으로서의 솔로몬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왕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금지시키셨기 때문에, 그는 왕권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삶을 산 것이다.
2) 반면에 종교적 측면과 관련하여서 솔로몬은 괄목할 만한 모범을 보인다. 즉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극진한 칭찬을 받았으며(왕상 3:5-13), 꽤 많은 성경이 솔로몬에 의해서 쓰일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하였다(왕상 4:32). 성전 건축도 솔로몬에 의해 완성되었다.
3)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모범은, 그가 취한 이방 아내들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의 말년에 종교적 부패로 변질된다. 이로 볼 때, 한 개인의 신앙(또는 종교)이 일상적 삶 속에서--솔로몬의 경우, 왕권 사용과 관련하여--뿌리를 내려 그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을 때, 결국에는 신앙이 일상적 삶에 영향을 받아 변질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의 경우, 그의 신앙이 왕권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법으로 왕권을 사용하다가, 그것에 의해 그의 신앙이 변질된 것이다.
3. 강화된 왕권사회의 결말:
솔로몬의 화려한 궁정생활과 현란한 자기 성취는 사실 일반 백성들의 고역(苦役)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백성들은 그 고역에서 좀 해방시켜 줄 것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간청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더욱 강철의 권력을 휘두를 것을 천명한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고 만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애굽에서의 종된 삶--> 출애굽의 해방--> 가나안 초기 평등국가(지파 동맹체)--> 왕권의 요구--> 일극 중심의 왕권 사회가 형성되고, 백성들은 종으로 전락함--> 국가의 분열.
제 3-2-10 주제 : 예언서 윤리
Ⅰ. 성경과 예언자
1. “예언자”(나비)의 뜻
-. 예언자의 개념과 기능은 오랜 기간 동안 발전되어 왔음.
-.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을 의미.
=. 아론은 모세의 예언자(출 7:1)
=.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하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
-. 일반적으로 구약의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허용해주신 ‘왕권’이 하나님 역할을 하려는 것에 대한 제한하는 역할을 함.
=. 국가나 왕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드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함.
2. 예언자의 과제 및 특징
-.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령.
=. 항상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
-. 사회 개혁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목적.
=. 예언자들의 준거는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의 선한 뜻)이 아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당대 사회 흐름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짐.
=. 사회적 악의 현상에 눈과 마음을 뺏기지 않고 본질을 짚어낼 수 있었음.
=. 그리하여 예언자들이 사회 개혁자들은 아니었지만, 후대 세계 역사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사회 개혁을 추진한 정치 세력이었다.(W.F. Albright)
-. “불가능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 아무리 자신이 회개를 촉구해도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을 잘 알지만--하나님의 진 노가 이 백성에게 임할 것을 알지만--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말씀 전파.
Ⅱ. 예언서 윤리의 일반적 특징
1.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
-. 예언자들이 악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실.
=. 특히 죄악의 구조적 성격, 공적 성격, 답습적 성격을 많이 질타.
=. 다른 사람들이 전혀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죄악에 대해서도 예언자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임.
-.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에 대한 심판을 전하는 것으로만 임무를 마치 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회복을 전하는 것으로 예 언을 마무리 짓는다.
=.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 상반 된 정념(情念)이 예언서의 전체에 늘 깔려있다.
-. 하나님의 진노와 나의 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함.
=.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추동되었지, 악에 대한 자기의 진노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님.
-.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 역시 구분할 수 있어야 함.
=.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
=. 자기 사랑에 추동된 사람은 결국에는 ‘자기식의 사랑’ 시행의 오류에 빠짐.
2. 하나님의 선도 또는 은혜에 동참할 것을 강조
-. 예언자는 자신의 정의감이나 사명감에서 자신의 예언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설득과 강요에 떼밀려 역사의 한복판으로 나오게 됨.
-. 예언서 메시지의 주된 초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선도 또는 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3. 공동체성 회복을 중요시 함.
-. 예언서 메시지는 개인의 운명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관계된다.
=. 개인에 대해 말할 경우는 그 개인이 공동체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그러 하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예언은 점쟁이의 그것과 본질적 차이가 있다.
-. 예언서 전체에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념이 깊게 깔 려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몰락을 예언할 때에도 그 사랑을 밑에 깔고 주어진다.
-. 약한 자 편들기를 통해 강한 자 바로 세우기를 추구함: 그 결과 참된 공동체성이 확보 될 수 있음.
4. 사회의 주류 세력에 대해서는 회개를 촉구하면서 새로운 전형에 희망을 둠
-. “남은 자(스아리트)”에게 희망을 둠
=. 파괴에서의 구원을 ‘남은 자’에게서 찾음 (사 4:2-6)
=. 이 남은 자는 그 사회의 비주류 또는 소외자들
-. 예언서에서는 그 사회의 주류에게서 희망의 싹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은 회개 해야 한다고 강조.
=. 특히 왕의 만행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하는 유일한 자가 예언자.
-. 예언서는 위기적 상황에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되 내일을 위한 믿음의 새싹을 준비하라 고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예언서에는 ‘위기 속 예방’의 성격이 내재되어 있다.
5. 다양한 규범들이나 가치, 명령들을 내포하고 있음
-. 예언서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정념이 역동적으로 혼재해 있다.
=. 악에 대한 분노와 악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융합.
-. 참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지침들.
-. 거룩의 중요성.
-. 약한 자 편들기.
-. 공직제도를 올바르게 잡는 것.
6.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강조
-. 위의 항목 5에서 언급한 규범이나 가치, 명령들은 모두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 로 요구됨.
-. 다가올 미래에 대한 추상적 성격의 예언은 현실의 죄악에 대한 구체적 언급 속에서 구 체적 실천의 중요성을 담지하고 있다.
=. 예언서를 읽을 때 이 점을 유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7. 과정과 목표(결과)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중요시 함
-. 예언자는 나타난 현실 그 자체에 눈멀지 않는다.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경책.
=. 사회의 본질은 대체로 결과보다는 과정과 관계 깊다. 결과는 과정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
-. 그리하여 예언자는 사회가 그런 대로 잘 되어 갈 때도 비통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 고, 참상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게 된다.
8. 종교적 의식보다 정의로운 삶을 중요시 함
-.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 하나니 . . .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암 5:21-24)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 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 보론: 개혁 또는 변혁의 과제 앞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1. 간고(艱苦)성: 개혁이나 변혁은 매우 힘든 과제.
-. 자신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을 개혁하는 데도 매우 힘드는데, 집단이나 사회의 잘못을 개혁 또는 변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2. 장구(長久)성: 개혁이나 변혁은 한 판 승부가 아님.
-. 긴 시간이 걸림.
-. 개혁이나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장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개혁이나 변혁 추구를 자기 야망이나 자기 과시와 결탁시키기 쉬움.
3. 굴곡성(유연성): 역사의 변화는 직선으로 나가지 않음.
-.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되 고도의 유연성을 담지해야.
Ⅲ. 개별 예언자(서)들의 특징적 강조점
1. 나단
-.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를 취한 다윗 왕을 질책
=. 나단이 다윗 왕에게 질책하러 간 것은 자신의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 내셨기에 간 것.(삼하 12:1)
=.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여호와)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9)
-. 다윗은 나단의 질책을 듣고 참된 회개를 함:
=.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 나단이 다윗 왕을 질책한 사실은 왕권을 견제하는 예언자 전통의 선구자임을 보여줌.
2. 엘리야
-. 이세벨의 음모로 나봇은 죽음을 당하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자 아합 왕에게 나타나 질책을 함.
=. 이 때도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아합 왕에게 나감(왕상 21:18)
=.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비난(왕상 21:20)
-. 엘리야는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사엘을 시리아의 왕으로 기름 부음
=. 이 사실은 예언자들이 단순히 폐쇄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만 관심 갖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나 라에도 관심 갖는 하나님.
3.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 길르앗 라못을 치고자 하는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간절한 바람 및 이에 찬성하는 사백 선지자들의 일치된 예언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홀로 올바르게 전 함.(왕상 22장)
-. 거짓 예언자들의 흐름에 정면에서 반대하는 참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줌.
4. 아모스
-. 이스라엘이 외견상으로는 가장 번창하고 가장 강했던 시대인 여로보암 2세 통치기에 활동함.
-.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러한 외형적 성취에 마음 뺏기지 않고 죄악의 본질을 꿰뚫어봄.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강조함.
=.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 에게 보응하리라”(암 3:2)
-.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특권’에 집착하지 말고, 선과 공의를 행하라고 권면.(암 5:14-15)
=.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암 5:24)
5. 호세아
-.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나 그래도 지속되는 하나님 사랑(헤세드)으로 이스라엘을 권면.
=. ‘헤세드’는 어떠한 조건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은총을 의미.
-. 하나님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삼고 예언함.
=.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은 하나님. 고멜로 인해 상처받은 호세아.
-. 사랑의 징계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호 1:10-2:1; 11:9)
6. 이사야
-.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강조.
=.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강하게 체험(사 6:1-9)
=.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묘사된 부분이 30여회 나옴.
=. ‘거룩’은 ‘공평’ 및 ‘정의’와 밀접한 관계를 보임(사 5:16)
-. ‘평화의 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평화를 강조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 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4)
=. 오실 메시야를 ‘평강의 왕’으로 묘사 (사 9:6-7)
7. 미가
-.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에 바탕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
-. 이것이 예언서 윤리 내용의 진수라고 여겨짐
8. 스바냐
-. ‘여호와의 날’의 도래를 말하면서 유다를 징책
=. 세 가지 대표적 죄: 하나님을 반역한 죄, 내적인 부패, 사람을 참혹하게 억압한 죄.
=. 심판의 대상: 관리들, 재판관들, 주류 종교인들.
-. 바른 삶을 통해 여호와의 분노에서 피하라고 제안
=. “너희는 여호와를 찾아라. 하나님의 법대로 살다가 고생하는 이 땅 모든 백성들아 바 로 살도록 힘써라.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써라. 그리하면 야훼께서 크게 노하시는 날 너희만은 화를 면하리라.”(습 2:3, 공동번역)
9. 나훔
-. 이방 나라 즉 니느웨를 경책함.
=.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에도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보여줌.
-. 하나님의 은총은 심판에서 또는 심판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줌.
10. 하박국
-. 왜 갈대아인과 같은 악한 민족을 그들보다 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 로 사용하시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해결책 제시.
=.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11. 예레미야
-. ‘새계약’을 제시함 (렘 31:31-34)
=. ‘새계약’은 ‘마음’에 주어짐.
=. 이것이 ‘인격 종교’의 초석으로 불리기도 함(J. Philip Hy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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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론: 성경적 예언에 대한 고찰
1. 예언에 대한 두 가지 왜곡
1) 개인의 미래를 지적하는 것을 예언으로: 보수적-‘성령 운동자’에게서 자주 나타남.
2) 대사회적 악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예언으로: 진보적 교단 교회.
2. 성경적 예언의 두 가지 측면
1) 예언자는 하나님의 언약에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전통주의자임.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현실’로 부각된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확신’을 갖고 사는 자.
3. 성경적 흐름에서 강조된 사항
1) 민 11:26-29: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함”
2) 욜 2:28: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
3) 행 2: 11절: 성령의 임함.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 ‘하나님의 큰 일’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즉 예언을 의미.
4) 예언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
4. 참조: 거짓 예언(자)의 문제점을 언급한 예언서 구절들:
-. 렘 14:14, 23:25-26, 32, 27:10, 14-15, 29:9, 21, 23, 31.
-. 겔 13장 전체, 22:28.
제 3-3 강 : 신약성서 윤리
3-3-1 주제: 예수 윤리 서론
1. 예수의 길을 예비한 자들이 밝힌 예수 사역의 특징
-. 침례 요한의 경우: 눅 3:4-6절
=. 골짜기는 메워짐, 산이 평평해짐, 굽은 것은 곧아짐, 험한 길은 평탄해짐.
=. 이 네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
-. 마리아의 경우: 눅 1:49-53
=.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림,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심.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심,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심.
2. 예수 사역의 핵심 주제: 하나님 나라
1) 세상 나라와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가 지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다른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
=. 도피주의나 현실도피 사상은 하나님 나라 사상과 전혀 상관 없음.
-.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진 운동 경기장과 같다.
=. 두 개의 사다리가 서로 거꾸로 놓인 것: 하나는 상방지향, 다른 하나는 하방지향.
-.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현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 오늘에 적용 가능.
=. 하나님 나라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매우 큰 권위를 가짐.
*. 복음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모든 윤리 문제에 대해 요리책 같은 메뉴 구성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님.
=. 그러나 인생에서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한 답을 제시.
2) 하나님 나라의 정의
-.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려움. 많은 의미가 숨어 있어서.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스림, 혹은 통치를 나타냄.
=.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지배, 권위 그리고 권력을 나타냄.
-. 하나님 나라는 아주 역동적이어서 항상 되어가고, 퍼져 나가고, 자라감.
=.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행위를 의미함.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행위를 가리킴.
-.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 두는 모든 곳, 모든 시간에 나타남.
-. ‘나라’라는 개념에는 집단적인 질서의 개념이 들어 있음.
=. 즉 개인의 마음만을 의미할 수 없음.
-.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임.
=. 구성권, 시민권, 충성, 그리고 신분 개념이 포함됨.
-. 하나님 나라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
=. 개인은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도 있고, 조롱할 수도 있다.
=. 하나님 나라는 임의집단(aggregate)이 아니라 의식집단(collectivity)임.
=. 그들의 ‘마음’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다스림에 드린 사람들의 네트워크.
=.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다스릴 때 그 나라가 실현된다.
=. 하나님의 다스림은 왕과 시민을 함께 엮어줌으로써 관계의 망을 형성함.
-.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함.
=.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마지막이고도 분명한 말씀.
=.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어조로 전해짐.
=.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오래된 관습과 가치, 관념을 깨는 새로운 질서라고 말씀하심.
=. 우리는 사회의 가치와 신념과 규칙들을 우리 마음 속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 대안을 생각하지 않음.
3. 예수의 윤리를 회피하는 핑계들
1) 현실주의적 핑계 : 예수 윤리는 그 당시 문화에만 적합한 것이다.
-. 예수 당시와 현대 상황은 너무 차이가 크다.
=.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은 순진한 목자들과 여린 농부들에게나 맞는 것.
=. 오늘날처럼 세계화된 상황에서는 적용 불가.
-. 예수의 윤리를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순진’ 아닌가?
-. 답변: 외형적으로는 규모나 형식 등에서 분명히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예수 당시나 오늘날이나 너무나 유사하다.
=. 민족주의, 경제적 억압, 탐욕, 폭력, 권력의 남용, 교만한 개인주의 등.
=. 예수께서 특정한 한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사셨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적합성이 있음
2) 예수 윤리는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기에 잘못이라는 핑계.
-. 예수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 마 10:23; 눅 9:27.
=. 그렇기에 예수는 철저하게 살 수 있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다고.
-. 두 번째 주장: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사역 중에 이미 임했다고 주장.
=. 눅 10:9; 눅 11:20;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
=. 이 관점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완성된다는 사실은 경시.
-. 세 번째 주장: 세대주의적 관점: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재림 때 이루어진다고.
=. 그래서 지금은 예수의 윤리를 제대로 살아낼 수 없다고. 적용하기에는 무리라고.
-. 답변 :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 구약의 소망, 예수의 사역으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오순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능력, 십수 세기에 걸쳐 많은 신자들의 삶에 드러난 견고함, 미래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미래의 실현’ 개념.
3) 예수의 윤리를 영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것.
-. 예수의 사회적 가르침을 영적으로 해석하도록 함.
-.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나누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의 위험성.
=. 우리는 예수의 구속의 죽음에 놀라고 감사하기는 하지만, 그분이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함.
-. “사회적이지 않은 모든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회적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 성육신하시면서 영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해 사회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심(히 1:2)
=. 성육신의 가장 뛰어난 점은 영적인 세계와 사회적인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났다는 데 있음.
=. 본회퍼의 주장도 동일: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와 하나님이 화해가 됨.
-. 복음은 사회적 실재와 영적인 실재를 하나로 융합하는 복음임.
4) 예수의 윤리를 인격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것.
-. 모든 개인적 행동이나 생각도 사회적으로 학습되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개인적이지 않다.
=. 아이디어와 감정도 사회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음.
-. 예수의 윤리는 개인 윤리나 성품 윤리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 답변: 사회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 개인의 거의 모든 행동은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다.
3-3-2 주제: 광야 시험 대처에 나타난 윤리적 의미
- 마 4:1-11절 -
Ⅰ. 광야 시험의 일반적 성격
1.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음”(눅 4:1-2)
-. 예수 사역에서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줌.
-. 예수를 따른다고 할 때, 우리가 기본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암시.
-. 성령에 이끌려 산다고 해서 유혹이 없다는 생각의 잘못을 보여줌.
2. 마귀는 단지 이때뿐만이 아니라, 예수 사역에서 계속적으로 비슷한 시험을 함.
-.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13절).
-.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님: 유혹과 시련의 연속성을 암시해 줌.
-. 십자가의 길을 막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막 8:33)
3. 예수는 세 가지 유형의 유혹을 받음
-. 이 유혹은 예수님이 시작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
=. ‘빵’의 유혹: 경제 문제.
=. ‘성전’ 꼭대기의 유혹: 종교 문제
=. ‘높은 산’에서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의 유혹: 정치 문제
-. 이 세 가지를 해결함으로써 마귀는 자신의 방법으로 예수가 세상에서 메시아 역할을 하도록 유혹한 것임.
=.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극복했다는 것은 마귀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메시아 역할을 하시겠다는 의미임.
Ⅱ.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과 예수님의 거부에 담긴 윤리적 의미
1. 돌로 떡을 만들라는 제안의 실제적 의미
-. 돌로 빵을 만들라는 유혹은 개인적인 굶주림을 해소하는 것 이상을 포함.
=. 갈릴리로 돌아가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군중들을 먹이도록 유혹하는 것.
-. 잘못된 구조에 대한 변화 없이 필요한 빵만 주라는 유혹.
=. 고통 없이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 종교 지도자들은 계속 우상 숭배하게 하고, 부자나 권세자들은 계속 탐욕스럽게 살게 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만 주어라.
=. 경제적인 불의, 성전의 운영, 로마에 의한 점령 등을 비판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에게 빵이나 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살게 하라는 유혹.
-. 하나님 나라를 물질적 복지만이 채워지는 것으로 제한하는 유혹.
=. 예수는 군중들을 잘 먹이기만 하면 그들이 예수를 붙잡아 강제로 왕이 되게 할 것을 알고 있었음(요 6:15).
=. 빵은 대중을 파고들기에 참으로 좋은 것임.
=. 사단의 이런 유혹의 변태 중 하나는 선거 때 돈봉투 주는 것.
2. 그 제안을 거부하신 예수님 태도의 윤리적 의미
-. 예수님의 대안은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가짐.
=. 기적적인 방법으로 빵을 먹이는 것은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 기적적으로 빵을 제공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들은 다시 굶주리게 됨.
=. 기적적인 방법으로 빵을 먹이는 것으로 참된 제자를 만들 수 없다(요 6:26).
=.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에(막 6:34, 8:2)
-.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빵을 해결책으로 제시.
=.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사회 즉 하나님 나라의 임재 선포와 관계됨.
=. 경제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려할 때 참된 해결책을 얻게 됨을 보여줌.
-. 예수는 돌을 빵으로 만듦으로써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각내시는 방법으로 메시아적 정체성을 드러냈다.
=.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장
=. 빵을 떼어 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말함. 눅 22:19.
=.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빵을 떼실 때 예수를 알아보게 됨. 눅 24:30-31.
-.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빵을 받아들인 부자들은 물질적인 빵을 자유롭게 나누게 됨.
=. 바로 이 방법을 통해 굶주린 자들을 먹이려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
=. 예수로 인해 감동을 받아 가진 자들이 수탈을 멈추고 넉넉하게 나눠주는 것.
=. 회심한 삭개오의 경우.
Ⅲ.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과 예수님의 거부에 담긴 윤리적 의미
1.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의 실제적 의미
-. 거룩한 성전 근처에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수를 편드는 것을 당대 종교지도자들이 본다면,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에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지게 됨.
=. 메시아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유혹.
-.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인정한다면, 대중들도 곧 예수를 인정하게 될 것임.
-. 성전 뜰에 기적적 방법으로 내려앉는다면, 예수는 단숨에 메시아가 될 것임.
=. 유대 신앙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라는 유혹.
-. 예수는 극적인 자기 과시에 대한 유혹을 거절함.
=. 메시아의 비밀을 지킴.
=. 자신의 정체를 서서히 드러냄: 조급한 자기 과시욕을 보이지 않으심.
=. 특별한 징조를 통하여 박수 갈채를 받음으로써 사람을 끌려는 시도를 안 함.
-. 영적 요행심리.
=. 성전 뜰에 뛰어내린다면, 예수는 당시 종교 사회에서 단숨에 메시아로 인정받게 됨.
-. 방법과 목적의 문제
=. 메시아가 되어야 하지만, 그 인정받는 방법은 기적적 방법보다는 바닥에서부터.
-. 예수님 사역에서의 ‘시간적 측면’
=. 기적적인 방법으로 메시아임을 인증받으면, 효과적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됨.
=. 시간을 단축: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음.
2. 그 제안을 거부하신 예수님 태도의 윤리적 의미
-. 기성 종교(유대교)에 흡수되기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대안을 염두에 두심.
=.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고 추대받는다는 것은 그 종교 틀에 흡수되는 것.
-. 예수는 제도화된 종교의 중심에 자리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제도화된 종교의 뿌리를 뒤집으려하심.
=.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 그러나 예수는 기존 종교를 완전히 부인한 것이 아님:
=. 기존 종교에 대해 선택적 긍정과 선택적 부정을 함.
=. 예수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심. 토라를 중요시하심.
=. 고침 받은 나환자에게 전통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함.
=. 성전에 낼 돈을 위해 고기를 잡으라고 함.
=. 율법과 진정한 히브리 신앙의 좋은 점들을 지지함.
=. 그러면서도 잘못된 것의 급소 중 급소는 정확하게 짚으심.
-. 당대의 수단과 방법들 중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함.
=.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침: 수단과 방법.
=. 성전세를 낼 돈을 위해 고기를 잡으라고 가르침.
-. 내용과 목적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함.
=. 성전이나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게 되고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게 함.
=. 성전보다 더 큰 이로써 예수님.
=. 모든 번제보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더 중시함.
Ⅳ. 산꼭대기에서 세상 권세를 주겠다는 유혹과 예수님의 거부에 담긴 윤리적 의미
1. 세상 권력 유혹의 기본 성격: 세상의 강제력을 이용하라는 유혹
-. 높은 산꼭대기에 데려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라는 유혹.
=.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겸손한 종’의 역할과 대비됨.
-. ‘산꼭대기’는 신적 권력을 상징함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신 것은 산 위에서. 출 24장
=. 예수는 산 위에서 설교하면서 새로운 권세를 설명. 마 5장
=. 제자들은 산 위에서 부르심을 받음. 눅 6:1-13
=.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출발점은 감람산. 마 21:1.
=. 부활하신 예수는 감람산 위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심.(행 1:8, 12.)
-. 예수가 받았던 정치적 유혹의 성격 몇 가지.
=. 유대 애국자의 반열에 참여하라는 의미.
=. 적대 국가였던 로마의 지배를 뒤흔들어 놓자는 유혹.
=. 폭력의 통치 방식을 받아들이라는 유혹.
2. 마귀의 유혹을 극복한 예수의 윤리적 의미
-. 정치 권력의 개념들 즉 강제력, 폭력, 유혈의 사용을 거부함을 의미.
=. 예수님은 권력 대신 섬김, 영광 대신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기를 원하심.
-.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웅은 전사와 왕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종임.
-. 힘이나 권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속적인 힘으로 일하는 것의 중요성.
제 3-3-3 주제 :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윤리적-실천적 함의
Ⅰ. 성육신의 실천적 의미
1) 위로부터 아래로: 특권의 자발적 양도:
-.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낮은 계층에 속하심.
-. “입장의 동일함”: 중산층 윤리의식의 문제점
-. “선 자리”의 중요성 암시: 모순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세우는 삶: “기독교적 귀족” 또는 “교회의 귀족화” 경향성이 갖는 문제점.
* 모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발생하여 표출된 죄의 다 양한 양상들.
-. 구경꾼이나 교훈자의 입장이 아니라, 참여자의 입장: 주도권을 쥐고 변화 유도
2) 육체적, 사회적 요소의 중요성: "A Body Soul in Community" (John Stott)
-. 육체적 필요가 매우 중요하게 윤리적 요소에 편입됨: 최저 생계권과 관련됨.
-.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교정해줌.
-. 성육신은 특정한 사회 역사 속에서 발생: “구체성”과 “지역성”의 의미 회복
-.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의 분리불가성.
3) 시간적 질서에 따른 정상적--일상적--삶의 고귀성을 확인시켜 줌.
-. 예수님은 30년 동안의 정상적 성장 과정을 거쳤다: 정상적 성장 과정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임.
-. 예수님의 능력을 빙자한 영적 요행심리나 업적주의에 대한 엄한 경고가 내재됨.
-. “도로의 문화”보다는 “길의 문화”가 중요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줌: 목적 중심적 삶보 다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삶의 전형을 볼 수 있음.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빨리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사용하 여, 바로 성인이 되시고 팔레스틴 지역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 하시는 “능력의 방법,” “효과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 셨다.
4) 자발적으로 검소한 삶을 영위
-.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
-.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나 예수님의 운동을 위해 바치는 것과 동일시 한 적이 거의 없음. 가난한 자, 약한 자,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 로 말씀하심.
Ⅱ.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
1)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 선택: “선 자리” (성육신)와 “선택하는 길” (십자가)의 일치
-. 모순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세우고, 그것에 부합하는 삶을 순간 순간 선택.
-. 소위 “성공 지향적 삶”에 대한 자발적 포기: 그러나 금욕주의적 또는 고행주의적 입 장에서의 포기가 아니다. 참된 살림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에 십자가 택함.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권능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었지만, 십자가에서는 “무력하게 핍박받는 하 나님”으로 묘사됨.
-. 그러나 이것이 퇴폐주의적 “비극미(悲劇美)”의 전거가 되어서는 안 됨.
2) 눈 앞의 효과성에 매몰되지 않는 삶: 이 땅에서의 승리와 패배 사이의 역설 이해.
-. 패배를 통한 승리 또는 패배 안에 있는 승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함.
-. “효과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복종 (순종)의 윤리학”--John Yoder.
3) 비폭력적 저항의 마지막 수단으로서 십자가 선택
-. 십자가를 지게 된 사회적 원인은 예수님의 비타협적 저항: 당시 종교 귀족들의 종교 적 전횡에 저항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 문제가 됨).
-. 폭력적 저항을 원하는 민중들의 요구에 비타협적 저항: 민중들은 그래서 막판에 예 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함 (저항의 방법 즉 비폭력적 방법이 문제가 됨).
Ⅲ. 부활의 실천적 의미
1)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춘 실천의 핵심 요소
-. 하나님의 역사 개입 인정: 인간적 노력의 한계와 그 노력에 내포되기 쉬운 낙관주의 에 대한 견제: 완성은 하나님의 일, 우리는 순종.
-. 과학주의적 실천 논리(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에 입각한 지침들 에 대한 일정한 거리--독립적 거리--를 유지하며 실천할 수 있게 함: 실천의 독립성 견지가 가능
2) 윤리적 실천에 대한 통전성 확보의 근거: 육적, 사회적, 영적 측면을 두루 아우름
3) 참된 승리가 보장된 실천을 가능케 함: 부활은 예수님 승리의 확증.
4) 교회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심.
-.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대 사회 지도자들인 헤롯, 빌라도, 사두개인, 바리새인 등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미약하고 비겁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요 20: 19-25)
-.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서 참된 새 싹을 봄.
-. 효과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런 나타나심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빌라도나 헤롯 또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서, “봐라. 내가 부활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겠느냐? 빨리 나한테 사과하고,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다’라는 방을 전국에 붙여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명령을 내려라.”라고 하셨더라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심.
Ⅳ. 예수님 삶과 행동의 윤리적 특징
1.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만 초점을 두지 않았다:
1) 요 3:16-21: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심.
-. 예수님의 ‘정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으로서의 ‘정의’라기보다는 변혁적 정의, 회복적 정의, 창조적 정의의 성격을 갖는다.
-. 이러한 예수님의 정의에 대한 반대 개념은 ‘응보적 정의’인데, ‘정의’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인과응보적 실천 윤리를 위한 도구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 대체로 이 ‘응보적 정의’를 예수의 정의로 오해하는 데서 기인된다.
2) 그래서 죄 용서를 매우 강조하심: “일흔 번씩 일곱 번”
2. 하나님의 선도(先導) 또는 은혜에 참여하는 성격:
1) 요 5:17-23: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나님의 일에 동참.
2) 요 6:38: 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왔다.
3) 주도권을 쥐고 행하심:
-. 성육신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자발적 주도권을 가지고 개입하심을 보여줌.
-. 바리새인들과 죄인들, 여자들에게 접근할 때도 먼저 행동을 취하셨다. 그들이 찾아오 기를 기다리면서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 아니었다.
-. “먼저 가서”를 화해의 법칙에서 많이 강조.
-. 용서에 있어서도 먼저 하심: 십자가에서의 용서.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어떻게 이웃을 만드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치심 (눅 10:25-37)--이웃 사랑의 당위성 인정. 그러나, 이웃에 대한 카테고리를 임의로 정함으로써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 이웃이란 상관적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어느 사람의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이면 사랑하겠다”는 사고방식을 깨트리고, “구체적-실천적으로 사랑을 펼쳐서 이웃이 되라”고 가르치심. (원수 사랑을 가르치신, 마 5:44-48 참조)
3. 사후적 치료 (또는 권선징악)나, 사건 발생 당시 바람직한 결단을 위한 모색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예방적 측면을 강조한다:
1) 현상유지적 태도가 아니라, 변화 창출적 태도를 취하심.
-.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변화창출적 태도 때문: “세상을 악하다고 진단하고 새로운 방안을 제시” (요 7:7).
-.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변화 창출적 태도 때문: 기득권의 악에 대한 저항
2) 비폭력적 저항 자세를 견지함: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 예수님은 “폭력적 저항”을 선호하는 유대 민중들과 “비폭력-무저항”을 선호하는 유대 및 로마 지배층의 중간에서 외로운 길을 걸으셨다. 그 결과 유대 민중들로부터도, 유대 지배층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 베드로가 대제사장 시종의 귀를 베니까 베드로를 책망 (마 26:47-56 외)
4. 공동체성 회복을 중요시함
1) 약한 자 편들기--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심. 어른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할 것 강조. 간음한 여인 건져줌. 과부의 헌금 칭송.
-.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 . .” (마 18:6).
2) 성육신, 십자가, 부활 후 행동 등에서 예수님은 ‘약하 자’의 외형을 지니셨음.
3) 잘못된 장벽이나 전통의 굴레를 깨뜨림--바리새인들과 어울리심.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동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요 4:27).
3)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사회구조적 측면의 변화의 필요성을 암시 해주는 단서는 많이 있다.
-.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강조.
-. 은밀한 중에 선을 행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부의 온전한 분배를 위한 제도적
치를 구비하는 것 (납세는 개인적 의를 보이지 않고 사회의 어려운 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방법: 분배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구조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즉 독점적 사유나 축적이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모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결과 모인 모든 무리가 충분히 먹고 열두 광주리 남길 수 있었다(마 14:15-21 외).
4) 부활 후, 교회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 개인적 실천의 한계성 인정
-. 자발적 공동체로서 대안 사회 모색
-. 교회의 권위를 높이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죄 사함의 권세”를 주심 (요 20: 19-25)
-. 부활 후, 교회 공동체 창출: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삶은 계속 됨: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그들 중에 있겠다.”
-. 공동체의 미래 포용성: 자기 당대에 무언가 성취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교회의 교회됨)를 이룩함으로써 주님의 뜻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취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5. 다양한 규범들이나 가치, 명령 등을 수용함:
1) 인권의 존중: 세리의 인권. 여인, 아이, 병자, 소자, 죄인 등을 존중
2) 공동체 (사회) 참여권: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나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이스라엘 공동 체에 재편입 시키기 위해).
3) 육체적 필요와 생명을 존중: 병자를 고쳐줌. 최저 생활권 충족을 강조--“해와 비를 주 시는 하나님.”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빵은 중요. 오병이어의 사건. 예수 님의 기적은 대부분 최저 생활권 보장과 관계됨.
4) 죄 용서를 강조.
6.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강조한다:
1) 예수님은 어떤 추상적 윤리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실제로 행동하셨다. 이 점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그래서 산산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들이 모두 놀랐다 (마 7:28-29)
-. 바리새인에 대한 비판은 마 23:1-36 참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실천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만 부과함. 실천은 친구를 만들지만, 실천없는 이론은 친구도 적으로 만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실천할 때는 기껏해야 남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비판하심.
-. 바리새인들은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론)로써 또 다른 짐을 부과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정체성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심.
2) 구체적 실천 가능한 요구를 하심.
-. 산상수훈의 열네 가지 명령 내용: 산상수훈 강의 참조.
-. “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마 11:28-30)
3) 예수님은 늘 구체적 현장에서 구체적 사건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구체 적으로 응답하셨다. 추상적 이론을 가르치지 않으심.
7. 과정과 목표, 수단과 결과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중요시 함
1)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핵심적 사항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궁극적 완성 (성취, 목적, 결과 등)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의 여러 국면과 그 실천적 내용은 그 궁극적 완성에 이르는 다양한 단계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작은 완성이 된다.
성육신------------>공생애------------>십자가------------>부활
* 성육신은 공생애에 이르는 과정: 공생애는 성육신의 한 목적이 됨
* 공생애는 십자가에 이르는 과정: 십자가는 공생애의 한 목적이 됨
* 십가가는 부활에 이르는 과정: 부활은 십자가의 한 목적이 됨
2) 예수님께서 “비폭력적 저항”을 가르치신 것은, “선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루어야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
3) “선한 수단”이 눈앞에 “선한 성공”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다. 선한 과정이 일시적으로는 “선한 실패”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한 시대라는 크기의 자로 재면, 실패라 할 수 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선한 성공”이다.
-. 호흡이 긴 삶이 되어야. 조급한 성취욕이나 성급한 결과 추구욕은 예수님의 삶과는 무관.
-. 내 생애에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아니었다. 다음 세대까지 자 신의 삶 안에 포용할 수 있어야.
** 이상의 내용들 외에 살림의 길의 일반적 특징과 관련될 수 있는 예수님의 사역의 원리는 더욱 많이 있다. 다만, 여기서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각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지식 축적을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 3-3-4 주제 :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 윤리의 특징
I. 산상수훈의 중요성
1.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덩치가 큰 부분.
2.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산상 수훈을 이용.
3. 산상수훈은 신약 성경 중에서 초대교회가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본문.
Ⅱ. 산상 수훈에 대한 곡해(曲解)의 유형들
1. 중세 가톨릭의 두 단계론에 기초한 이해: 성직자는 높은 신앙의 단계에 살기 때문에 산상수훈에 복종해야 하지만, 낮은 신앙단계에 사는 평신도는 의무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
* 비판: 산상수훈에서는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사람” 두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 할 뿐이다.
2. 루터교의 두 영역론에 기초한 이해: 산상수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태도나, 개인적 관계, 또는 교회 안에서의 관계만을 위한 것이지, 집단 사이의 관계나 외적 행동을 위한 것은 아니다.
* 비판: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후,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에 대 해 말씀하셨지, 개인적 관계에서 또는 내면적 문제에서만 실천하고 국제문제나 집단 관계에서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3. 세대주의자의 이해: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지금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 즉 우리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
* 비판: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중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라”고 하지 않으심.
4. “통속적 은혜주의자”의 이해: 산상수훈은 행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 산상수훈은 우리가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은혜가 필요함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
5. 곡해(曲解)된 산상수훈 이해 구도(構圖): 이원론적 구도
전통적인 윤리적 가르침 |
예수님의 따르기 힘든 높은 이상 |
1. 살인치 말라 |
화조차 내지 말라 |
2. 간음치 말라 |
음욕을 품지 말라 |
6. 산상수훈의 올바른 이해 구도: 세 부분으로 구성된 14조의 가르침
전래되고 있는 윤리적 가르침 |
악순환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진단 |
“살림”을 위한 구체적 실천 내용들 |
1. 살인하지 말라 |
계속 화를 품고 있거나,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다 보면 살인하게 됨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 |
2. 간음하지 말라 |
음욕을 품고 여자를 계속해서 보다 보면 실제로 간음하게 되기 쉽다 |
유혹의 원인을 제거하라 (참조, 막 9: 43 이하) |
3. 이혼한 자에게는 이혼증서를 주라 |
이혼을 하는 것은 너로 간음에 빠지게 만든다 |
(가서, 화해하고 결합하라) |
4. 헛 맹세를 하지 마라 |
맹세는 너를 악이나 심판에 빠지게 만든다 |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참조, 약 5: 12) |
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의 문제점 |
왼 뺨을 돌려 대라.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십리를 동행하라. 구하는 자에게 주라. |
6.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세리나 이방인이 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소외가 악순환됨 |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하라. |
7. 구제할 때 |
외식하는 자처럼 나팔을 불며 구제하는 것의 문제점 |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
8. 기도할 때 |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것의 문제점 |
은밀히 기도하라 |
9. 중언부언하는 기도 |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생각할 때의 문제점 |
주기도문의 본을 따르라 |
10. 금식할 때 |
외식하는 자처럼 슬픈 기색을 하며 하는 금식의 문제점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
11.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눅 12: 33절 이하. 그것들을 팔아, 구제하라) |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함. 마음이 분산되고 눈이 어두워짐 |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너희 온 몸을 밝게 하라. |
12.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한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
먹고 마실 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
13. 비판하지 말라 |
동일한 비판으로 비판당할 것이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
14.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 |
그것들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를 찢어 상가게 할 것이다 |
기도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구하라 |
*“악순환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진단”과 “‘살림’을 위한 구체적 실천 내용들”이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에 해당된다. “전래되고 있는 윤리적 가르침”에서는 헬라어의 서술형이나 가정법 동사가, “악순환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진단”에서는 “행위 계속”을 나타내는 분사나 부정사가, “살림을 위한 실천 내용들”에서는 명령형이나 명령형으로 사용된 미래시제가 사용됨.
Ⅲ. 산상수훈의 개략적 특성
1. 산상수훈 내용 전개의 특성
1) 예수 가르침의 첫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천국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임 (마 4:23)
-.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관계됨.
=. 천국의 복음은 공동체 회복의 복음과 연결됨.
2) 마 5:1-12: 팔복의 내용은 천국 백성의 됨됨이를 설명해줌.
-. 참된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는 사람의 됨됨이(특성)가 어떠한지를 보여줌.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시연하고 지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서 귀하게 여겨지고, 발언권이 강한가를 살펴보면 됨.
-.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함.
3) 마 5:13-16절: 천국 백성이 세상과 맺는 관계 방식을 설명해줌.
-. 교회의 세상을 위한 실천의 첫째 과제가 무엇인지 보여줌.
-.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
-.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는 것임을 보여줌.
=. 즉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줌.
4) 마 5:17-20절: 산상수훈은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것임을 설명해줌.
-.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5) 마 5:21-7:29절의 내용은 공동체성 회복 또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자나 교회의 행동(실천)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줌.
-. 팔복의 내용이 공동체 회복을 위한 신자 또는 교회의 품성(됨됨이, Being)과 관계된다면, 이 내용은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실천 또는 행동 특성(Doing)과 관계됨.
2.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심(5:1, 7:29)
-. 무리가 예수님을 좇아오니까, 산에 올라가서 말씀하신 것임.
-. 7:29절에는 산상수훈을 들었던 사람들을 ‘무리’라고 표현함.
=. 소위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한 것이 아님.
-.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산상수훈을 읽고 배울 필요가 있음.
=. 교회는 성도들에게 산산수훈을 가르칠 책임이 있음.
3. 산상수훈은 듣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무게 있고 권위 있게 들렸음(7:28-29)
-.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음.
-. 서기관 가르침의 특징(마 23:3-4, 13절)
=. 말은 잘 하되 자신은 실천하지 않음.
=. 듣는 사람에게 말로 부담만 줄 뿐 함께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음.
-.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정체성 및 예수님의 실천에 기초한 가르침임.
=. 됨됨이 및 실천에 기초한 말은 항상 권위가 있기 마련.
4.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임(7:24-27절)
-. 듣고 행한 사람은 자기 삶의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자.
=. 듣고 행하는 사람은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이룬 사람.
=. “학이불사측망”(學而不思則罔)의 오류나 “사이불학측태”(思而不學則殆)의 오류를 벗 어난 사람임.
=. 경험적 지식에서 오는 확고함이 있되, 늘 배우는(듣는) 자세가 있기 때문에 ‘열린 경 험주의’의 건강함이 있다.
-. 듣되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삶의 기초를 모래 위에 세운 자.
=. 실천에서 오는 경험적 확고함이 없기 때문에 사소한 어려움 앞에서 쉽게 무너짐.
=. 듣되 행하지 않는 방법 또는 이유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곡해와 관련됨.
-. 지혜로운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판별은 그 사람이 비바람에 직면했을 때 드러남
=. 일이 잘 되어 갈 때나 큰 어려움이 없을 때는 차이가 나지 않음.
Ⅳ. 팔복 이해(마 5:3-12절)
1. 팔복의 구성․해석․적용 방식
-. 각 절마다 복이 있는 자의 특성이 앞부분에 나오고, 복의 이유 또는 내용이 뒷부분에 나옴.
=. 팔복을 이야기할 때 원문에 따르면 각 구절의 후반부에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가 붙어 있어서 그러한 자가 왜 복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 ‘복이 있는 자’의 특성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자면 별로 매력이 없는 자의 특성임.
=. ‘복의 내용’ 역시 인간적 성정 또는 세상적 기준에서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못됨.
=. 따라서 팔복에서 제시된 내용 그 자체를 진정한 복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중요.
-. ‘복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 또는 교회의 특징적 풍토로 이해될 수 있음.
=.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보여줌.
=. 따라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당연히 이 특징적 풍토를 가꾸어 나가도록 해야 함.
-. 팔복을 적용할 때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에 동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
=. ‘복 있는 자’의 특성 8가지를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삼고 적용해야 함.
=. 교회 식구 모두가 자신의 교회에서 복의 8가지 내용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교회 풍토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각도에서 자기 교회를 반성해 볼 수 있음.
=.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사회(세상)에서는 그러한 풍토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주인이신 교회에서는 부족하지만 그러한 풍토가 형성되어 가야하며, 교우들은 교회에서 그러한 풍토의 참 맛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천국의 시식처’가 되어야 함.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이”임.
=. ‘프토코스’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하게 파산한, 절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됨.
=. ‘프토코스’는 거지 나사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됨.(눅 16:20, 21)
=. 재산이 두 렙돈 밖에 없는 과부를 묘사하는 데도 ‘프토코스’가 사용됨(막 12:42, 43)
=. 길과 시장에서 방랑하다가 왕의 잔치 자리에 얼떨결에 초청되어 온 할 일 없는 자들에게도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됨(눅 14:21)
=. 야고보가 부자의 영광과 사치를 간난한 자의 비참함과 궁핍함과 비교시킬 때 ‘프토코스’라는 단어를 사용함(약 2:2, 3)
-. 헬라어 ‘프토코이’는 히브리어 ‘아니’에 해당함.
=. 히브리어 ‘아니’는 “이 땅위에서 아무런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그리고 모든 면에 있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가난하고 겸손하며 신실한 사람”을 지칭함.
=. “이 곤고한 자(‘아니’)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시 35:10; 40:17; 72:2)
-. “심령이 가난한 자”의 의미:
=. 완전하게 자신의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의미함.
=. 이런 이유로, 가난한 자에 대한 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 것으로 이해됨.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천국 즉 ‘하늘 나라’는 마가나 누가가 표현한 ‘하나님 나라’와 같은 것임.
=.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전형적 이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표현되었는데, 이로 볼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됨.
=.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러나 아직” 상태에서 저희 것임.
-. 본문에 대한 의역: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의존할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겸허하게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 ‘애통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펜세오”인데, 히브리어 “히트아벨”에서 유래된 말.
=. 매우 비통해하는 것과 관계됨.
=. 죽은 사람을 위해 애곡할 때 사용되는 단어.
-. ‘가난한 자’에 대한 설명이 ‘객관적 상태’와 관계된다면, ‘애통하는 자’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정서적 상태’ 또는 ‘주관적 태도’와 관계가 있다.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심히 비통해하는 것을 의미.
-. 애통의 세 가지 이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애통(참조: 고후 7:10)
=. 첫째,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
*.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둘째, 세상이나 다른 신자들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
*. 시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 셋째, 악한 자가 부당하게 자신을 핍박하기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
*. 시 42:9; 43:2: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해 할 때, 죄 때문에 세상에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오는 애통은 소극적인 것임.
=.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 자신 삶의 핵심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는 데서 오는 애통이어야 함.
=. 애통이 잘못되면, 자기 중심적 애통으로 전락하기 쉬움: 자기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기 쉽다.
-. 세상이나 다른 신자들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죄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입게 될 것이 걱정에서 오는 애통은 소극적인 것임.
=. 그들이 또는 그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애통해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람들도 참된 삶을 상실한 채 산다는 것을 애통해해야 함.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 가지 의미
=. 첫째,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얻는 데서 오는 위로.
=. 둘째, 하나님 나라 시민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가기 시작하는 손길을 알게 되는 데서 오는 위로.
=. 셋째,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짐으로써, 부당한 압제가 없어지게 됨.
-. 세 가지 의미의 위로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
=.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 이 위로도 “이미 그러나 아직”의 틀 안에서 주어지는 것임.
4.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는 헬라어 ‘프라오스’를 히브리어 ‘아나브’를 번역한 것임.
=. 이 두 단어들은 ‘온유’라고만 번역되지 않고, ‘겸비’ ‘겸손’ 등으로도 번역됨.
=. 구약에서 ‘아나브’는 “사랑과 순종하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 어떠한 일이든지 분개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하나님의 방법이 항상 최선의 길인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됨.”
=. 헬라어 ‘프라오스’는 “길들여지고 집에서 길러지는, 그래서 다루기 쉽게 된 동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힘의 부드러움”이다. 따라서 ‘프라오스’한 사람은 연약함, 무관심, 공포, 나태나 비굴에서 유래된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거인의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거인처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부드러움”이다. 엄격하고 철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덕목이 ‘프라오스’ 즉 온유이다.
=. 결국, ‘온유’의 의미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사람의 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의 모범.
=. 참된 온유는, 첫째 부당하게 핍박하는 자와 둘째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안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자”가 온유한 자.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의 발전론적 의미 세 단계.
=. 첫째 단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땅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창 15:7)
=. 둘째 단계: 유대 메시아니즘에 근거한 땅 즉 지상에서 메시아 왕국이 건설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받게 되는 ‘땅’을 의미.
=. 셋째 단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서 지분을 받게 된다는 것.
=. 온유한 자의 복으로 땅을 받는다는 본문은 셋째 단계와 관계됨.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수네’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체데크’와 관계됨.
=. ‘디카이오수네’는 ‘습관’이나 ‘풍습’을 나타내는 ‘디케’라는 말에서 전화된 것임.
=. ‘체데크’와 ‘디카이오수네’는 심판의 의미 즉 인간의 죄를 벌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 사회적 사용례에서 ‘정의’는 대체로 긍정적 측면(사회적 가치의 분배와 관련된 측면)과 부정적 측면(범한 죄에 대한 형벌과 관련된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체데크’나 ‘디카이오수네’는 주로 긍정적 측면과 관련하여 사용됨.
=. ‘체데크’가 선물, 풍성함, 관대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
=. 바울은 하나님의 ‘디카이오수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며,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창조적인 정의’를 의미함.
=.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할 때 바울이 주로 사용한 용어는 ‘디카이오수네’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뜻하는 하나님의 ‘오르게’이다.
-. 결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를 말하는 것임.
=.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를 갈구하며, 그 의를 따라 사는 자의 복을 말함.
-.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충족된다는 의미.
=.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 사회적 약자 등에게 필요한 것들이 충족된다는 의미.
6.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긍휼’을 칭하는 헬라어 “엘레오스”는 ‘은혜’를 칭하는 “카리스”와는 다르다.
=. “카리스”는 죄와 범죄와 관련되어, 죄에 대한 용서가 ‘은혜’를 의미함.
=. “엘레오스”는 죄의 결과인 고통과 비참함과 고난과 관련되어, ‘위안’을 의미함.
=. “카리스”는 깨끗케 하고 원상으로 복구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엘레오스”는 치료하고, 고치고, 도움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춤.
-. 우리는 하나님의 ‘카리스’에 의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엘레오스’에 의해 죄의 결과로부터 치료를 받고 고침을 받는다.
=. 하나님께로부터 ‘카리스’와 ‘엘레오스’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와 긍휼에 대한 반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엘레오스’를 베풀게 되면,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 이 점은 마 18:21-35절에 나오는 악한 종의 비유에서 반증된다. 33절에 “불쌍히 여김”에 해당하는 단어는 “엘레에스”의 파생어임.
=.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서, 그 나라 안에 거하는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오는 긍휼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긍휼도 계속 받게 된다.
7.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청결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사로스”임.
=. “카사로스”의 의미는 순결함,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함.
=. 구약에서 “카사로스”는 주로 제의적, 의식적 준수와 관련하여 사용됨.
=. 예수님은 “마음”이 “카사로스”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심.
=. 마음에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고, 순수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심.
-. ‘마음’은 헬라어로는 “카르디아” 히브리어로는 “레브” 또는 “레바브”로 표현되는데, 일차적으로는 신체 기관인 심장을 표시함.
=. 그것이 전의(轉義)되어서 우리 마음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표시하는 말로 쓰임.
=. 잠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레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성경은 마음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함.
=. 삼상 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참고: 롬 2:11, 엡 6:9, 골 3:25, 약 2:1, 신 10:17; 16:9, 욥 34:19, 왕상 8:39, 대상 28:9, 렘 11:20; 20:12)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불순한 동기나 이중의 동기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에 따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
=.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함.
=.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
=. 시 24: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8.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화평’의 헬라어는 “에이레네”인데,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으로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음.
=. 첫째, 완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행복의 상태를 의미(평화의 내용을 암시해줌)
=. 둘째, 올바른 관계를 의미함(평화의 범주를 암시해줌)
-.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는 의미.
=.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를 의미함.
=.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평화애호가”와는 다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어려움, 불쾌감, 인기하락, 고통 등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함. 즉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평화를 얻어내는 사람임.
-. 평화를 일구는 영역 1: 자신 자신과의 관계
=. “자신의 영혼 가운데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전쟁을 진정시키고.” “자기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복종시키며, 자기들의 육체적 욕망을 길들이는 것”을 의미함.
-. 평화를 일구는 영역 2: 이웃과의 관계
=. 이웃과의 관계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불화를 평화의 관계로 일구는 일을 의미함.
-. 평화를 일구는 영역 3: 하나님과의 관계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도피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화해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참된 평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함.
-.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임.
=. 하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골 1:20; 롬 15:13; 16:20, 빌 4:9, 고후 13:11, 딤전 5:23, 히13:20-21)
=.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임.
=.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천둥 또는 폭풍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고,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잘 위로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9. 의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의 복
-. 의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지향점이 분명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의미함.
=. ‘의’와 ‘그리스도’를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음.
=. 나의 부족함이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 지향하는 방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역풍이 있기 마련임을 보여줌.
-.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 자기 확인이 가능하기에.
=. 자신이 천국에 속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기에.
=.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기에.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절)
=. 거짓 선지자(거짓 신자)와 참 선지자(참 신자)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남.
V. 산상수훈 해석 예제
1. 마 5:21-26: 가서 화목하라.
1) “노하는 자마다” (22절): 단순히 일시적 불쾌감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간 분노의 감정을 가진 자를 의미함 (Clarence Jordan).
2) 따라서 감정의 찌꺼기가 조금 남은 사람에게 항상 가서 화해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감정적 결벽주의가 갖는 위험성).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이기주의.
2. 마 5:27-30: 간음의 원인을 제거하라.
1)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절): 이 구절은 여자를 보고 절대로 음욕을 품어서는 (또는 성욕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명령형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들이 자주 범하는 현실을 진단한 것이다. 즉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본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이미 간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실제적-육체적 간음으로까지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 경향성이다.
2) “네 오른눈 (오른손) . . . 빼어버리라” (29-30절): 간음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명령형. 예수님의 이 교훈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문화에서 남자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게되는 것의 일차적 책임은 여자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경우 참조: 간음은 쌍방죄인데 간음하다 잡힌 남자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의 책임을 지적함.
3. 마 5:31-32: 이혼하려 하지 말고 먼저 화해의 노력을 시도하라.
1)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31절, 참조 신 24:1): 모세의 율법
(1) 모세의 율법 이전: 남자가 단순히 나는 저 여자와 이혼하였다고 말만 하면 자기 여자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나중에 다시 마음을 바꾸어 “저 여자는 내 여자다. 너 우리집에 다시 들어와 살아야 해” 하면, 여자는 아무 반대도 하지 못하고 다시 전 남자의 아내 역할을 해야 한다.
(2) 모세 율법의 의미: 이혼 증서를 여자에게 줌으로써, 그 여자는 이전 남자에게서 온전하게 해방될 수 있었다. 다시 오라 하더라도 안 갈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해 줌.
2)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32절): 간음에 대한 남자의 책임 강조.
3) 이 가르침에서만 명령형적 교훈이 빠졌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화해의 노력을 하라고 명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참조, 고전 7:10-11;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주시라--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4. 마 5:33-37: 진실만 말하라
5. 마 5:38-42: 악한 상황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창출하기 위해 “비폭력적 저항” 방법을 택하라.
1)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38절): 동벌법으로 보복적 폭력의 상승작용을 막는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미가 있다.
2)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39절): 헬라어 원문을 옮기면, “메 안티스테나이 토 포네로”이다. 여기서 “대적하다”(공동번역에는 “앙갚음하다,” 표준새번역에는 “맞선다”로 번역되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안티스테나이’이다. 이 단어는 ‘-에 맞서서’를 의미하는 ‘안티(anti)’와 ‘폭력적 민란,’ ‘군사적 소요,’ ‘반란’을 의미하는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동사이다. ‘히스테미’의 명사형 ‘스타시스’는 막 15:7절, 눅 23:19, 25절에서는 ‘민란’으로 번역되었고, 행 19:40절에서는 ‘소요사건’으로 번역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메 안티스테나이 토 포네로’는 “악한 자에게 폭력적으로(또는 악한 방법으로) 대항하지 마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바울서신에서의 강조와도 일치한다. 바울은 “누구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다 (롬 12:17, 19; 참조, 살전 5:15).
3) “왼 편도 돌려 대며” (39절): 유대 사회의 관습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의 오른 뺨을 때렸다면 (오른 손등으로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는 행위), 그 행위는 당신에게 비인간적 모욕을 가한 것이다. 이 때 당신이 왼 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평등한 인간 으로서 당신의 존엄성을 비폭력적으로 주장하고 지키는 행위가 된다.
4)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 (40절): 출 22:25-27, 신 24:10-13, 암 2:8에 따르면, 겉옷을 전당물로 잡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 (물건)을 꾸어준 채권자는 “해가 지기 전에 그것을 그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겉옷은 밤에 잘 때 그가 덮고 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40절은, 돈을 꾸어준 부자가 채무자의 속옷을 전당물로 취하기 위해 송사하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있는 것이라고는 속옷과 겉옷뿐일 때 채권자인 부자는 겉옷을 전당물로 잡고자 송사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일 밤 그는 그것을 그에게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겉옷 대신에 속옷을 전당물로 잡으려고 송사하는 것이다. 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최저 필요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의 원래 취지를 교묘히 피해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부자가 이렇게 할 경우, 겉옷까지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매우 적극적-그러면서도 비폭력적 저항의 방법이다. 법정에 서서 부자에게 속옷을 주고 나서 겉옷까지 줘 버린다는 것은 그가 여러사람이 있는 데서 맨몸으로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채무자는 채권자의 탐욕과 잔인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게 된다.
5) “십리를 동행하라” (42절): 로마인들은 피식민지 국민들에게 오리까지는 자신들의 짐을 지고 자신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할 합법적 권리를 갖고 있었다 {전쟁 시 임의 동원법 같은 것: 참고,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 (마 27:32)}.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십리를 가라고 하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로마 군인을 감격시키며 설득하기 위해; 둘째, 과도한 노역을 시킨 죄로 로마 군인이 곤경에 처하도록 하려고.
6) “구하는 자에게 주라. . . 거절치 마라” (42절): 당시 사회에서 구걸하는 것이나 빌리는 행위는 요즘 사회에서 말하자면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것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자와 약한 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6. 마 5:43-48: 원수를 포용하고 사랑하라: 원수의 타당한 이익을 이해하고 보장해 주라.
1) “원수를 미워하라” (43절): 이것은 율법에 없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웃 사랑의 교훈에 덧붙인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가르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잘 미워한다).
2)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공평하게 주시는 하나님 (45절): 아무리 악한 자라도, 원수라도 인간의 기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영웅적 희생 콤플렉스를 조심해야).
3)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8절): 완전함 (Perfect)로 오해 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와 해를 주시는 하나님처럼 “포용적”이 되라는 의미다. 동일한 의미가 눅 6:36절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표현된다.
7. 마 6:1-6; 16-18: 하나님 존전에서 은밀히 의를 행하라.
1) 구제, 기도, 금식할 때 은밀하게 하라고 하심.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구제, 기도, 금식을 계속하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 의 평가에만 관심을 집중하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비현실적 가르침이 될 것이다(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우 실제적 가르침을 주신다. 즉 은밀한 곳에서 행한다면 사람들에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8. 마 7:1-5: 자기 비판력을 키우고, 회개할 줄 알아라.
1) “비판하지 말라” (1절): 윤리적 판단을 하지 말라거나 비판적 사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 역할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엄혹한 윤리적 판단과 냉철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면서, 동시에 자비, 겸손, 그리고 인내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9. 마 7: 6-12: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기도하라).
1)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6절): 유대교의 이해에 따르면, 개와 돼지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이 구절 해석에서 문제의 핵심은, “거룩한 것”과 “너희 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그것을 “복음”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전체 맥락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상명령에서 예수님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가르침의 핵심은 “너희 신뢰를 악한 이방인 (로마) 권력에 두지 말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시는 하나님께 두라”는 데 있다. 로마 권력(개나 돼지)에 우리의 신뢰를 두면 (거룩한 것 진주 등을 갖다 바치면서 아부하면), 로마인들이 그것을 (너희 신뢰를)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한다고 예수님은 6절 하반절에서 진단하고 있다. 실제로 사두개인들과 야심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 관리들에 의탁함으로써 명예와 부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면서, 로마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애썼다. 이것은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나타났다. 즉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고, 로마인들은 그들을 이용만 해 먹고, 결국에는 그들을 짓밟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경고는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을 때 일어났다.
10. 마 7:21-27: 행함을 강조하셨지, 성취나 완성을 명령하지 않으셨다(효과성의 윤리가 아니라, 복종의 윤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 대해서 강조하셨지, 하나님의 뜻을 완성짓는 자”를 강조하시지 않으셨다.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원하셨지, “듣고 이루어 내는 자”를 원하지 않으셨다.
제 3-3-5 주제 : 바울 서신에 나타난 윤리적-실천적 특징
I. 바울에 있어서 “윤리적 삶”의 대용어(代用語)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롬 12:1 이하; 14:17이하; 엡 5:10)
2)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엡 5:17; 6:7; 골 4:12)
3) “영을 좇아 행하는 삶”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 (롬 8:1-14; 고전 3:1이하; 갈 5:16-26; 6:7 이하; 엡 4:30)
4)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고전 11:1)
5)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 (롬 6:1-14; 엡 2:10)
6) “믿음 안에서 사는 삶” (갈 2:20하)
* 결국 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 관되는 삶이다.
Ⅱ. 바울 서신에 나타난 윤리적 가르침의 길 특징들
1.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만 초점을 두지 않았다.
1) 고전 9: 19-23: 바울의 모든 (윤리적) 행동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얻고자(구원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유대인, 율법 아래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약한 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됨.
-.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라는 바울의 19절 고백은 ‘존재론적 강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는 오늘날 세태에 많은 교훈을 준다. 자발적으로 종 된다는 것은 관계론적 입장에 들어선다는 의미를 내포.
-. 그리스도 안에서 고도의 유연성; 다양성 인정; 용납 정신--여기서 용납은 죄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을 포용하는 것.
-. 그러나 복음을 타협하거나, 자기 합리화의 방패가 아님: 모든 사람을 살려내려 함.
=. 이런 태도는 “복음에 참예하는” 태도
2) 참조, 바울은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소위 “무골호인”적 정신을 가지라고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건전한 판단과 그에 따른 교회의 징계권이 필요함을 언급한다 (롬 5:9-13;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판단과 징계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이 항목의 제목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선도(先導) 또는 은혜에 참여하는 성격 (은혜의 우선성)
1) 윤리적 권면의 바닥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있다
-.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 “그러므로”는 롬 11:35-36을 받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 대가로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님(참조, 롬 12: 3)
2)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3) 윤리적 행동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임 을 강조함 (롬 3 - 6: 갈 2-3장)
-. 엡 2:8-1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4) 고전 15: 8-11: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남, 그 결과로 바울은 참된 삶을 살게 됨: 첫째, 자기 모멸감이나 비하증에서 벗어남 (하나님 역사하심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음); 둘째, 누구보다 수고함; 셋째, 자신의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게 됨.
-. 여기서 바울의 수고는 하나님의 뜻 한가운데 자신을 세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수고는 자기 개인의 축복이나 성공 등을 얻기 위한 것과는 관계가 멀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에 서는 생활태도와 관계 깊다.(은혜-수고-은혜의 패턴)
5) 구체적 행동을 언급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 . . 하라”는 패 턴의 말씀이 많다.(엡 4:32; 5:1-2; 골 3:13)
3. 예방적 측면을 강조한다
1) 엡 4: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 .”
2) 윤리적 실천의 상호 관계성 (상호 보완성)을 강조함: 한 쪽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조한 윤리적 가르침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예방적 조치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실천 자의 개인적 한계성 + 수혜자의 악용 가능성 때문.
-. 롬 12: 10;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 ”
-. 롬 12: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 . ”
-. 엡 4:32; 골 3:13;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
-. 골 3:9; 서로 거짓말을 마라.
-. 살전 5:11;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3) 롬 12장의 경우, 대부분의 윤리적 교훈이 예방적 측면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 에 공동체성 강화 (회복)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 하나님의 은혜 강조 (롬 11:35-12:1; 3); 자기 의(義) 및 배타성 배제-->갈등 소지 배제
-. 은사의 온전한 사용 (3-8절); 서로 도움 (공동체성 강화) + 자기 계발 (개인적 신체 건강한 사회 (공동체) 형성에 필수적--> 비도덕적 행위 예방 가능
-. “서로” 사랑의 실천 (9-12); 비록 믿음의 이름으로 시행되긴 하더라도, 계속되는 “일방적 희생 (사랑)”은 공동체 내에 잠재적 불만의 원인이 되기 쉽다.
-. 최저 생계 보장 (13절); 최저 생계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도덕성이 유지되기 어렵다.
-. 입장의 동일함 (15-16절); 상대적 박탈감 또는 소외감을 제거; 공동체성 강화에 필수적 요소;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치료되지 않는 한, 범죄 예방은 힘들다.
-. 악한 방법으로의 보복 금지 (14, 17-21절); 오히려, 화해를 위한 솔선수범 강조.
4. 공동체성 회복을 중요시함
1) 윤리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개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줌.
-. 고전 6:9이하: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
-. 갈 5:19-21: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
-. 살전 3: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 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2) “덕을 세우는 행위”를 강조--공동체성의 내부적 강화 (엡 4:29하)
-. 롬 14:19;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씀”
-. 롬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
-. 고전 14:3-12; 은사의 운용 원리: 교회의 덕 세우기 위해.
-. 살전 5:11; “피차 덕을 세우기를. . . .”
3) 평화에 대한 강조: 개인주의적-내면적 평화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를 지 칭하는 경우가 많음.
-. 대표적 경우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롬 12:18; 모든 사람으로 평화.)
4) 롬 12 장의 내용 참조 (“예방적 측면” 중 3항을 참조)
5) 바울 서신에서 “새사람”은 많은 경우,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새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두 그룹--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이 된 교회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공동체가 매우 주요한 테마라 는 사실을 보여준다. (엡 2: 11-22; 고전 12: 12-13, 엡 1: 22-23)
5. 다양한 규범들이나 가치, 명령 등을 수용함
-.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믿음 안에서의 평화
-. 사랑의 강조
-. 공동체의 강화; 위의 4항 참조.
-. 골 3: 12-15: 거룩,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 평강.
6.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강조
1)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은 늘 구체적 현장에서 구체적 사안에 충실한 내용이다.
-. 각 교회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 지침 전달; “너희에게 이런 문제가 있나니. . . ”
2) 목회서신의 다양한 권면 내용들.
7. 과정과 목표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중요시함: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 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 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 아가노라.” (빌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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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은혜(교리)에 대한 교훈’과 ‘행함(삶)과 관련된 교훈’ 비교
책 명 |
은혜(교리)에 대한 교훈 |
행함(삶)과 관련된 교훈 |
기 타 (인사) |
로마서 |
1:8-11:36 |
12:1-15:13 |
1:1-17; 15:14-16:27 |
고린도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10-16:9 |
1:1-9; 16:10-24 |
고리도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3-13:10 |
1:1-2; 13:11-14 |
갈라디아서 |
1:6-5:12 |
5:13-6:10 |
1:1-5; 6:11-18 |
에베소서 |
1:3-3:21 |
4:1-6:20 |
1:1-2; 6:21-24 |
빌립보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3-4:20 |
1:1-2; 4:21-23 |
골로새서 |
1:9-2:23 |
3:1-4:6 |
1:1-8; 4:7-18 |
데살로니가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2-5:24 |
1:1; 5:25-28 |
데살로니가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3-3:15 |
1:1-2; 3:16-18 |
디모데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3-6:19 |
1:1-2; 6:20-21 |
디모데후서 |
(은혜의 복음을 전제함) |
1:3-4:8 |
1:1-2; 4:9-22 |
디도서 |
3:4-7 |
1:5-3:3, 8-11 |
1:1-4; 3:12-15 |
*.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 서신서에는 신자의 행함 및 구체적 삶과 관련된 교훈이 은혜나 믿음에 대한 교리적 설명보다 결코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바울 서신을 근거로 해서 은혜나 믿음만 강조하고 올바른 행동과 구체적 삶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려는 식의 가르침이나 사고방식은 건전하게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 4 장 : 결론 - 더 나은 기독교 윤리학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제안
기독교 윤리학 공부는 이 강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기독교 윤리학을 만들어 가며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 있어서는 필수적 조건이다. 다음은 각자가 자신의 기독교 윤리학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지침들이다. |
1. 성경에 정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1) 사실적 내용 (지식)
2) 성경을 보는 실천적 관점의 일관성 견지
2. 통전적 사고 방식을 가지자.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전적 사고 방식이 필수적이다.
3. 열린 자세를 견지하자.
1) 자기 방어적이 되기보다는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
2) 타학문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통찰력, 세부적 진실 등).
3) 타인의 영적 경험에 대한 열린 자세.
4.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자.
1) 피상적 관찰에서 본질 파악으로 나갈 수 있어야--원인과 결과를 혼돈하지 말아야.
2) 비를 먼저 보기보다는 우산을 먼저 보는 우리의 나태에 대한 반성.
5. 관계의 변화를 통해 상황의 변화를 추구하는 실천적 습관을 들이자.
관계의 변화가 배제된 상황의 변화는 표피적 변화일 경우가 많다.
6. 거대 담론의 틀 안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되, 늘 삶의 작은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과 반 성을 통해 얻은 지혜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거대 담론의 틀에 내용을 채워 나가자.
1) 나무를 보고 숲을 못 보는 오류.
2) 숲은 보되 나무를 못 보는 오류.
7. 자기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주체적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자.
1) 자신의 개인적 장점과 단점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해: 영적-육체적-사회적 자아 이해.
2) 자신이 선 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
ㄱ. 현재의 자신의 상황: 신학생의 현주소 이해.
-. 교회에서의 자기 위상. 장래 진로. 변화하는 사회를 대비하는 신학수업. 학문 적 기초 소양의 강화 문제. 대안 목회상 정립의 필요. 정체성 정립의 문제. 신학적/목회적 전문화의 과제.
ㄴ. 자신이 선 자리의 토양이 되는 한국적 문화에 대한 일반적 이해.
8. 선(인)/악(인)에 대한 판단이나 효과성 여부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와 그 속에 거하는 사람들을 살려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자.
“판단은 어렵다. 그러나 나와 너를 동시에 구해내는 방법은 훨씬 더 어렵다.”
9.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고민하고 모색하는 습관을 키우자.
1) “낯선 거리에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말자.”
2) “모든 참된 변화는 본질에 있어서 공동체적이다:” 자기의(自己義)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공동체적 실천 속에서 녹아지도록 하자.
10. 사고는 실험적 또는 진보적으로 하되, 실천 방법 또는 과정에 내장된 도덕적 내용에 대 해서는 우직할 정도로 보수적 실천을 하자.
1) 참된 실천의 생명력과 영속성은 건강한 도덕성에서 나온다.
2) 엄혹한 도덕성에 뿌리박지 못한 “선진적 사고,” “발빠른 이론 전개,” “입빠른 비판성” 등은 지식인의 수치.
11. “성육신의 제자도”를 체현하자.
위의 열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기독교 윤리학을 모색하며,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 서 주님을 따르려는 삶은 성육신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