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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조직신학개론 다니엘 밀리오리 (장경철역)
서문
1)신학의 다양성과 신학의 과제
지난 몇 십 년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대단한 격동의 시기였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강조들, 제안들, 운동들이 많이 등장하였다(예를 들어 흑인신학, 여성신학, 남미 해방신학, 과정신학, 이야기신학, 은유신학 등). 이처럼 새로운 신학적 제안들과 기획들이 다양한 것은 쉽게 혼동이나 무분별한 절충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만일 신학의 지속적인 과제들이 무시된다면 이러한 위험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저자는 이 시대에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방법론적인 쟁점들에 집착함으로 인하여 구성적이거나 체계적인 신학의 과제를 향한 ‘책임감의 포기’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신학의 작업이 신학을 준비하는 작업에 의하여 대치되어 버리는 위험이 점차로 증대하고 있다.”
2)저술 의도
이 책을 쓰는 데에 있어서 나는 고전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최근의 신학의 새로운 조류와 강조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열려있는 기독교 신학의 개론서를 제공하려고 의도하였다. 만일 이 책이 해방신학들과 고전적 신학 전통들 사이의 상호 비판적이고 상호 도움의 교류가 가능할 뿐 아니라 가치 있는 것임을 젊은 신학자들에게 보여 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이 책의 저술을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3)신학적 맥락과 신학적 작업
오늘날 신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사회적인 자리와 교회적인 맥락에 대하여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나는 개신교인이면서 북미에 사는 사람이며, 백인이면서 남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과 경험이 고정관념적인 앵글로-색슨-개신교-백인(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모습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제시된 기독교 교리의 해석이 모든 시대와 장소에 다 적합한 것처럼 가장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나의 신학적인 작업이 전 세계 기독교공동체의 신앙의 충만함의 한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기를 바란다. 또한 내가 여기서 신학의 옛 목소리와 새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거대한 합창을 들으려고 노력했다는 것과 그 경험과 상황에 있어서 나와는 다른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계속적인 대화로부터 도움 받고 교정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자신의 신학적 작업의 직접적인 맥락은 북미의 ‘주류’ 개신교 교회의 한 신학교이다. 현재와 같은 때에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개요를 쓰는 것의 위험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나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의 위험도 또한 인식하고 있다. 기독교 교리들에 대하여 체계적인 재해석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정통주의가 승리하거나 비신학적인 직업주의가 판을 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4)본 개론서의 성격
이 개론서를 쓰는 데에 있어서 신학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확신이 그 기본에 자리 잡고 있다.
i) 기독교 신학은 특정한 신앙의 공동체(a particular community of faith)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 공동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요점은 신학적 탐구가 진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학적인 탐구는 무정형적인 종교체험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고립된 개인들의 경건한 상상력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신학적인 작업은 특정한 신앙의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 탐구는 신앙과 기도와 예배의 공동체가 가지는 공동의 삶에 계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참여와 동떨어져 전개될 때 신학은 공허한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만다.
ii) 신학은 공동체의 신앙과 실천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critical reflection)이다. 신학은 신앙공동체에 의하여 지금까지 믿어져 오거나 실천된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진리를 향한 추구이다. 비판적 성찰을 향한 신학의 책임이 무시되거나 그저 치장을 위한 것으로 밀려나 버릴 때 공동체의 신앙은 반드시 피상성, 자만, 경직성 등의 위협을 받게 된다.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우리의 세계에 있어서, 신앙공동체의 교리들과 실천들에 대한 내적인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iii) 기독교공동체의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종합적인 신학적인 비전(a comprehensive theological vision)을 전개해야만 한다는 것, 즉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문화, 경험, 필요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체제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실감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를 인식하는 가운데 조직신학은 삼위일체적 용어로 하나님의 힘과 현존을 일관성있게 재해석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통제하는 하늘의 고독한 군주가 아니라 서로 자기를 내어 주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랑 가운데서 살고 행동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때에 신학은 구원의 의미를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인 맥락을 따라서 재해석하도록 도전받고 있는데 여기서 구원은 개인의 영혼이 세계로부터 구출되는 것으로 규정되기보다는 하나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다른 존재와 연대를 이루는 가운데 새롭고 심층적인 자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 시대에 있어서 그저 이론만 전개하고 공허한 말장난만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긴급한 외침들-인종적 부조리, 정치적 압제, 생태계적 파괴, 여자에 대한 착취, 핵무기 학살의 위협 등-에 직면하여 무능한 것으로 드러나기에 여러 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신학은 추상적인 사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기독교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실천에서 나오며, 그 실천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성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기독교 교리의 개요의 기초를 이루는 신학적 비전에 있어서 주요한 요소들은 새롭게 정립되는 삼위일체적 신학, 그것에 상응하는 창조 구속 완성에 대한 관계적인 이해, 그리고 신학에 대한 실천적인 방향 설정 등이다.
5)구성과 조직
마지막으로, 이 책의 구성과 조직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책의 순서는 대부분에 있어서 신학의 전통적 자리를 따르고 있으며, 그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삼위일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신학은 오랫동안 기독론을 주로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 시대에 우리를 삼위일체론적 신앙의 충만함을 되찾아야만 한다.
[주요참고도서]
칼 바르트-교회교의학 13권, 죤 칼빈-기독교 강요 2권, 폴 틸리히-조직신학 3권
제1장 신학의 과제
기독교 신학은 많은 과제를 가진다. 또한 많은 학자들의 과제에 대한 이해 뒤에는 신앙과 탐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신학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하여 탐구하는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탐구해 가는 것을 신학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계속적인 탐구로서 신학의 정신은 교조적이기 보다는 대화적이며,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전제한다.
1.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서의 신학
ⅰ) 이해를 추구하며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서의 신학
안셀름(Anselm)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즉, 신학이란 위험을 무릎 쓰고 탐구하고 과감하게 물음을 제기하는 신앙이다. 신앙이란 진리 탐구에 무관심하거나 진리 탐구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마치 진리를 완전히 소유하듯이 말하는 교만한 주장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신앙주의(fideism)와는 다른 것이다. 신앙주의는 우리가 우리의 질문과 사고를 멈추고 그저 믿기만 해야 함을 강조하는 반면에 신앙은 계속적으로 이해를 추구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ⅱ)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뿌리
신학은 우리가 아직 부분적으로만 소유한 이 진리를 성찰하고 탐구하도록 자극하는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역학으로부터 자라간다. 우리가 신학이라 부르는 이러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기본적인 뿌리가 있다.
a) 신학의 대상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주체’(subject)이기를 멈추지 않는 분이다. 살아계시고 고갈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권적인 사랑(sovereign love)으로 계시되었다. 이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으로 불리는 신비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신비는 이 세계의 창조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신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죄 용서의 신비이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부숴진 인간의 삶과 전 세계를 새롭게 변혁하시는 신비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눈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셨음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속적인 신앙의 질문들이 일어난다.
b) 신앙의 상황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탐구에 있어서 두 번째 뿌리는 신앙의 상황(situation)이다. 신앙인들은 진공 상태 안에서 살지 않는다. 변화하고 모호하며 때로는 불안정한 이 세계는 신앙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데, 어제에는 충분했던 많은 답들이 오늘에는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함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구체적인 쟁점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자주 그것에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보다 언제나 크기에(겸손), 또 우리가 신앙으로 사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외면할 수 없는 도전과 모순들을 던져 주기에 기독교 신앙은 질문을 제기하며(정직) 이해를 추구한다.”고 에드워드 쉴레벡스(Edward Schillebeeckx)는 표현하였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ⅲ) 신학적 훈련과 신앙적 삶의 인간성
신앙은 폐쇄적이거나 자만의 자세가 아니라 놀라움, 탐구, 질문의 자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 우리는 또한 신앙적 삶의 인간성(humanity)과 신학적 훈련의 인간성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온갖 종류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의 순례에 접어들 때 갑자기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순례에 접어드는 것은 오히려 많은 질문들을 강화하면서 옛 질문들을 변형시켜서 새롭고도 시급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a)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철학과의 차이점
철학자 데카르트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확실한 단 하나의 출발점은 자신의 의식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의 논리는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논리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전적으로 다르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탐구의 출발점은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모든 것의 창조주와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의 실재(reality)에 대한 눈뜸이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탐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하나님 없이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의 실존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 나는 확실성을 추구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기에 우리가 탐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첫째로 우리의 옛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그 기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흔들릴 것임을 우리는 예상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이 땅에 영원한 장소를 가지지 않는 탐구자이며 순례자이며 개척자이다. 셋째,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신앙에 걸림이 되는 권력과 부, 국가와 인종의 우상들에 질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생각하는 신앙이다.
b)신앙의 순례자로서 계속적인 탐구자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순례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계속적으로 질문을 제기할 것이며, 때로는 자신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제기하기도 할 것이다. 성경은 쉬운 답변들만 모아둔 책은 아니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성경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질문을 통해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결론
신앙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지 않을 때, 신앙은 비인간적이며 위험한 것이 된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곧 이데올로기, 미신, 광신주의, 자기도취, 그리고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신앙은 정열적으로 끈기있게 이해를 추구하든지, 아니면 시들어져서 결국 사라지고 만다.
만일 신앙이 계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적 과제는 이 질문들을 추구하며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그 질문들이 잊혀지거나 갇히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비인간화 되기 보다는 우리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용기를 잃어버릴 때 비인간화된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신학은 신앙의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할 뿐 아니라 “이 세계 가운데 인간의 삶을 계속적으로 인간화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에도 봉사한다. 신학은 정열을 요구하는 탐구인 동시에 이해를 추구하고 이해를 위해서 논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씨름하는 과정인 것이다.
1-2.신학의 문제성
1.생각하는 신앙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
기독교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오직 생각하는 것에만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과 신학이 오직 사고 안에서만 실천되고 그칠 때 그 신앙과 신학은 참으로 문제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신앙에서 추구하는 이해가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실천을 밝혀주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Ⅱ. 단순한 경건주의자들의 비판-신학의 사변성
의심할 바 없이 신학만 너무 많이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소위 학문적인 것들의 미로에 빠져 버리는 추상적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신학을 경우가 많다. 칼 바르트는 이처럼 요점이 없이 말만 끝없이 되풀이하는 신학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아모스 선지자의 표현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나는 너희의 강의와 세미나, 너희의 설교와 연설과 성서연구를 미워한다. 너희가 서로서로, 또 내 앞에서 너희의 해석학과 교의학, 윤리적이고 목회적인 지침들을 전개할 때 나는 그러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나로부터 너희의 두툼한 책들과 너희의 논문들, 너희의 신학 잡지들을 멀리하라.”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경건은 언제나 바늘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는가를 묻는 쓸모없는 신학과 하나님의 신비를 마치 수학문제 풀듯이 다루는 사변적 신학에 끊임없이 반대해왔다. 신학의 사변성에 좌절을 느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학과 그 복잡한 구분들, 그 쓸모없는 논쟁을 다 던져 버리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신학이 아니라 단순한 신앙이며, 보다 그럴듯한 논쟁이 아니라 변화된 심령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전적인 용납과 성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단순한 경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삶과 유리되고 무감각하며 지적인 유희가 되어 버린 신학에 대한 계속적인 경고로서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에도 나름대로의 위험이 있어서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에 심각한 해로움을 끼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지만 유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히 성령의 능력을 의뢰해야 하지만, 그는 또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살피도록 요구받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이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합당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수고를 게을리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대면하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성령에 호소하는 것이 진지한 성찰을 대체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곤경에 대하여 권위적이며 무비판적이고 생각 없이 내뱉어진 해답들의 묶음이 아니며, 참된 신앙은 질문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순한 경건에서 비롯된 염려는 오해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불러일으키는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대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을 단순한 환상(mere illusion)이나 경건한 도피(pious evasion)와 구분해 주는 비판적 요소로 작용한다.
Ⅲ. 실천적 신앙인들의 비판
1) 무익함
실천적인 신앙인들에 따르면 신학은 행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실천을 마비시키는 지적인 유희일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론적인 작업을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고 하지 않았는가? 신앙은 올바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올바로 생각하기만 하는 것은 ‘정통주의’라는 이단일 뿐이다. 신학은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신앙은 생명을 바쳐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역시 진실이 있다. 이 세계를 변혁하는 것과 동떨어진 신학은 참으로 문제성이 있다. 하지만 이 비판도 역시 한 면만을 본다. 만일 실천(praxis)없는 이론이 공허한 것이라면,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이 끈기 있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의 나라는 어떠한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어떤 행동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생각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행동하는 것 역시 기독교 적이지 않다.
2) 사악함
또한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신학은 힘 있는 자들의 불의한 통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며, 교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두어 현상 유지하도록 만드는 데에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에 따르면, 종교와 신학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시작이다. 하지만 종교와 신학이 이 사회를 신비적으로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러한 비판이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심판 안에 들어 있고, 또 예수의 가르침 안에도 담겨 있음을 발견한
다. 신학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를 섬기고 있으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를 계속적으로 묻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이미 문제성을 가지고 있는 신학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기독교 신학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진지함을 가지고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Ⅳ. 결론
신학이란 계속적인 탐구의 과정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서 시작되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금 현재의 파편적인 삶의 경험 사이의 괴리에서 촉발된다. 신학의 과제가 올바로 이해된다면 신학은 교회 안에서 전문적 신학자들의 작업이기만 한 것으로 오해되지 않을 것이다. 신학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이 모두 적절한 방법으로 참여하는 활동이다. 만일 신학이 잘못 사용되어져서 그것이 문제성 있게 되었고 심지어 경멸받게까지 되었다면, 신앙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은 그들이 신학적 책임을 포기함으로써 이러한 신학의 오용에 기여하지는 않았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물론 신앙과 신학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신앙과 신학적 탐구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말씀을 듣고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라면, 신학은 교회에 허락된 신앙의 언어와 실천에 대한 이차적인 성찰이다. 이러한 이차적 성찰은 여러 수준에서 일어나며 여러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파생된다.
1-3. 신학의 질문들
신학의 여러 분과들의 통일성 : 신학에는 여러 분과가 있으며, 이러한 분과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은 교회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일차적 증언으로 인정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정경들을 상세하게 연구한다.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은 기독교 신앙의 삶이 여러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표현된 많은 양식들을 연구한다.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은 철학의 자원들을 사용하여 이성과 경험의 빛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검증한다.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은 설교, 교육, 목회 상담 등 구체적인 목회의 과제들에 관심을 가진다.
조직신학의 과제 : 조직신학은 다른 신학의 도움을 받아서 기독교 신앙을 충실하게, 일관성 있게, 시대에 적절하게, 책임적으로(faithful, coherent, timely, responsible)기술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 이것은 비판적 활동인 동시에 창의적인 활동이다. 이것은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사건, 곧 삶을 자유케 하며 새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의 빛에서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계속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조직신학적 과제에 동참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관련이 있는 4가지 질문들
ⅰ) 교회의 선포와 실천은 성경에 증언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가? (참된 복음?)
신학의 모든 질문은 결국에는 이 질문의 여러 측면들이다. 기독교 복음, 곧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그 복음은 어떻게 잘못 되고 왜곡된 것과 구분될 수 있는가? 여기에 기독교공동체의 정체성이 달려 있으며, 교회의 선포와 삶의 충실성 여부가 또한 이 질문에 달려 있다.
사도바울은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다(갈1:6이하)고 주장하는 데에서 엄격하며 타협하지 않는다. 거짓복음은 파헤쳐지고 거부되어야 한다. 그 이후에도 이러한 일들이 계속 되었는데,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였으며,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루터는 공로의 구원을 주장하는 후기 중세체계에 도전하였고, 바르트는 부르주아문화에 길들여진 종교가 된 자유주의 기독교에 도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종종 신조나 신앙고백이 형성되었는데(니케아신조, 칼케돈신조,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 바르멘선언 등이 있다.), 이것들은 논쟁들 가운데 복음이 모호해지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진술한 것들이다.
우리 시대에는 자아성취를 주장하는 종파(cults)로부터 인종분리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추한 자만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복음이 난무하고 있다. 기독교 선포라 여겨지는 것들이 과연 복음을 올바로 드러내는 것인가? 기독교공동체의 책임있는 지체나 책임있는 지도자라면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공동체는 자신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복음’(롬1:1)을 올바로 듣고 이해했는가의 질문을 다시금 물어야만 한다. 공적인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러한 질문을 계속 살아 있게 해야 하며, 그 질문을 계속 던져야만 한다.
ⅱ)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진리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는가? (온전한 복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신학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곤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에 신학이 기독교 교리의 전부를 오직 하나의 원칙(또는 원칙들)으로 환원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에 반대되는 ‘체계’(system)안에 갇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이고자’(systematic)하는 신학의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는데, 물론 이것은 신학의 관심이 신앙을 부분적이고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나 하나님의 완성의 사역에 대한 기대와 분리되어서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기독교 교리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coherent) 전체를 구성하며 서로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며 하나의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를 지향하는 신앙의 표현일지라도 그것이 창조의 선함을 무시하거나, 이 세계의 악의 실재(reality)를 축소시키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독교 희망을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온전성(wholeness)과 상호연관성(coherence)을 추구하는 문제는 교회의 신약 성서적 시작의 때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성경은 그 자체가 매우 다양한 책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분명하게 기독교 증언과 섬김 안에 다양한 신학과 전통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온전한(whole) 복음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풍성한 하나됨과 온전함은 무엇인가?
교회는 언제나 풍성한 포용성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통일성으로 인하여 위협을 받아왔다. 신학은 온전한 복음을 향한 추구를 계속 진행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데, 이 온전한 복음만이 풍성한 다양성을 잃지 않고 하나 됨을 가져다주며, 개인적이며 문화적인 온전성(integrity)을 잃지 않고 공동체를 이룩하고, 정의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신학은 무엇이 참된 복음(the true gospel)인가 뿐 아니라 무엇이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인가를 또한 물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엡3:18~19)는 과연 무엇인가?
ⅲ)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살아계신 실재로서 드러내고 있는가? (오늘의 복음?)
기독교 신학은 새로운 상황 안에서 다시금 해석되어야 하되, 새로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개념과 표현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본회퍼(Bonhoeffer)의 질문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현재의 복음이란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은 처음에는 충격적으로 들릴런지 모른다. 이전의 복음과 지금의 복음이 다르며, 여기의 복음과 저기의 복음은 다른가? 물론 참으로 복음은 하나이며, 이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를 구속하기 위하여 행동하셨고, 또 지금도 성령의 능력으로 만물을 새롭게 변혁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시대와 상황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언어들(이야기와 교리와 상징들)을 재해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을 감싸고 있는 문화적 표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복음만을 위하여 충실하게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적인 신학은 이전의 문화를 다시 복고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는(constructive) 활동이다. 신학은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활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다시 표현해 내는 위험을 감수한다. 성경은 그 자체가 새로운 시대와 상황 안에서 공동체의 신앙을 역동적으로 다시 표현해 내는 것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ⅳ) 신앙공동체의 선포는 개인적, 사회적 삶 안에서 변혁하는 실천으로 나아가는가? (변혁시키는 복음?)
네 번째 질문은 구체적 상황 안에서 신앙과 제자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책임있게 구현해 내는가를 묻는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를 자유와 책임의 길로 불러낸다. 그러므로 신학의 필수적 과제는 우리의 시대와 상황 안에서 어떻게 복음이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혁하고 변혁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신앙공동체 전체의 삶과 각 지체의 결정과 행동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 동안 우리가 당연히 여겨온 개인적 삶의 모습과 제도적 구조들 가운데 복음은 어떤 것을 문제 삼고 변혁하기를 요구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우리의 신뢰와 하나님 섬김을 향한 우리의 소명이 서로 나뉘어질 수 없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용서, 화해, 자유, 새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선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통하여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실천하라는 능력과 명령을 받는다. 제임스 콘(James Cone)에 따르면, “신학적 개념은 그것이 신학적 실천으로 연결될 때, 곧 자신의 선포에 기초하여 이 세계 안에 있는 교회의 삶으로 변환될 때에만 그 의미를 가진다.” 참신앙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갈5:6).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명령을 깨우쳐 주는 가운데 다음의 질문을 제기한다 :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신실하고 구체적으로 증거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나 공동체적 차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관련이 있는 4가지 질문들에 대한 종합
이상과 같은 네 개의 중심적 질문들은 계속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 질문들에 답할 때에, 신학은 부분적으로밖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 주어진 답변들을 존중하고 그로부터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신학이 과거의 대답에만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이유도 신학은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시작하는”(바르트) 자유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자유와 용기는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이기에, 기도는 신학적 탐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동료이다.
Ⅰ-4.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방법들
신학은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신학적 방법론의 문제이다. 신학적 방법의 차이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양식과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근본적 차이를 반영한다.
신학적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가운데 중요한 요소는 그 신학이 수행되는 사회적 자리이다. 데이빗 트레이시(David Tracy)에 따르면 교회, 학교, 사회라는 서로 다른 삶의 자리가 있다. 각각의 상황에서는 서로 다른 목표와 기준이 설정되어 있다. 신학이 수행되는 각각의 사회적 자리는 그 나름의 질문을 부과하고 진리와 적합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제공하며, 그 자신의 특별한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 학문의 자리에서 신학은 변증적 방향을 지향하게 되며, 교회 안에서 신학은 교회의 선포를 명료하게 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신학은 하나님의 새로운 정의와 평화를 실제적으로 실현하는 데에 관심을 가진다. Tracy의 분석의 도움을 빌어서 우리는 21세기에 행해지는 세 가지 중요한 유형의 신학적 방법, 곧 세 가지 다른 방법의 질문제기 방법을 가려낼 수 있다.
1. 신학의 첫 번째 방법은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Christocentric theology)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학문이요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 규정하는데 교회는 신학을 통하여 자신의 선포를 유일한 규범, 곧 성경 안에서 증거 된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서 계속적으로 검증한다. 신학을 교회의 학문이라 말하는 것은 신학의 과제를 단순히 교회의 교리나 전통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란 교회와 교회의 선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질문하고 검증하는 과정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말씀은 3중적인 구조 속에 있다. 교회는 첫째 선포되는 말씀, 둘째. 기록된 말씀, 셋째 계시되어진 말씀 혹은 성육신 된 말씀을 선포하며 선포되는 말씀은 단지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단지 옛날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지금 말씀하시는현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다루어야 하는 일차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지 우리의 경험이나 상황에서 비롯되는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바르트의 방법에 대한 많은 잘못된 해석이 말하는 바와 달리 바르트는 성경의 연구와 신학적 탐구에서 우리의 질문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신학은 철학이나 사회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들과 고립되어 수행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학의 답변들 뿐 아니라 신학의 질문 역시 신학 자신의 주제와 규범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강조점인 것은 사실이다.
요약하자면 바르트의 신학적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그 말씀으로 하여금 인간과 교회에 그 선포와 삶에 있어서의 신실성의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질 것을 요구한다.
2. 신학의 두 번째 방법은 폴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방법(correlation method), 곧 변증적 신학이다. 이 방법에서는 실존적 질문이 강조되는데 실존적 질문은 철학, 문학, 예술, 과학, 그리고 사회제도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함으로 얻어진다. 이러한 질문들은 후에 기독교 선포의답변들과 상관관계를 맺게 된다. 이 방법의 목표는 인간의 문화와 계시 사이를 갈라놓기보다는 그 둘 사이에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신학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전하고자 하는영원한 진리와 인간의 문화적, 시대적상황이라는 두 가지극 사이에 서 있다. 올바른 신학은 이 두 가지 극을 충족시켜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기독교 메시지의 영원한 진리를 표현해야 하며, 다른 한편 이 표현은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타당성을 가져야 하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은 이 두 가지 극을 중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상관관계 방법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문제들내지질문들을 찾아내고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상호의존성과 독립성 사이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유연한 존재로부터 제기하는질문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주어지는대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트의 방법은 대화이기보다는 독백이다. 바르트의 방법은 계시로부터 문화와 경험으로 일방적으로 갈 뿐이지 둘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은 없다.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이 일반 문화와 인간의 경험아래 계시의 규범성을 굴복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시는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향해 말하여진 것인데, 이것은 상황의 질문들에 진지한 주의가 기울어질 때만 가능하다
Tracy는 틸리히 보다 더 분명하게 상관관계의 상호성을 주장하는데 대화 가운데 상대자가 서로 교정하고 서로를 풍성하게 해야 함을 더 강조한다. Tracy에 따르면 상호 비판적인 상관관계 방법(mutually critical correlation)에 의해서만이 문화가 던져 주는 중요한 공헌을 향해 신학의 장을 열어 둘 수가 있고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진리 주장의 이해 가능성과 신빙성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에 접근 할 수 있다.
3. 신학의 세 번째 방법은 해방신학의 실천적 방법(praxis approach)이다. 남미 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3세계의 해방 실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새로운 신학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신학에서는 실천이 먼저 등장한다. 신학의 적합한 질문들은 실천, 곧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향한 투쟁으로부터 제기된다. 프락시스라 불리는 이 실천이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될 때 새로운 방식의 성서 해석이 시작된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은참된 사랑을 보이며 행동하고 인간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는 것이다. 신학이란 후에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신학은 첫 걸음을 뒤따르는 두 번째 발걸음이다이렇게 이해 될 때 신학은 주어진 사회 질서나 교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보다는 정의를 실현하게 된다. 신학은 변혁을 향한 투쟁에 참여하는 가운데 계시의 근원에 의존함으로써 이 투쟁을 더욱 심화하고 이 투쟁의 방향을 인도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우리에게 신학적 성찰을 위한 새로운 주제를 하나 더 선사하는 것이기보다는 신학 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신학과 그 질문들은 아래로부터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는 실천으로부터,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향한 투쟁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본회퍼는 우리에게 삶과 복음을 아래로부터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구티에레즈가 잘 지적하였듯이 신학이 복음을 제1세계의 불 신앙인(nonbelievers)에게 보다 잘 이해 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느냐?, 아니면 제3세계의 잊혀지고 비인간화 된 사람(non-person)들의 상황에 대항하여 복음을 증거 하느냐에 많은 것이 달라진다.
물론 신학이 여러 과제들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고 나머지 모두를 버리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현대신학의 발전과정에서 보이듯이 계몽주의의 후예들이 던진 질문 뒤에 숨은 전제들이 도전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제기한 질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답변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신학은 너무도 오랫동안 이 땅의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 의해 제기된 질문들을 외면하여 왔다. 무엇이 참된 복음인가? 무엇이 온전한 복음인가? 무엇이 현재의 복음인가? 어떠한 구체적인 실천이 요구되는가? 신앙과 신학의 이러한 필수적 질문들은 또한아래로부터곧 억눌린 자들과의 연대라는비교될 수 없는 값진 경험의 시각으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 반 지성주의나 낭만주의로의 복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심들은 우리가 어떠한 신학을 추구하는가와 궁극적으로 연결된다. 깊은 심연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시130:1)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고전 1:23)의 선포 안에서 그 중심을 발견하는 신학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힘있는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승리주의 신학을 추구할 것인가?
내용요약 : 나는 이제까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인간 됨의 본질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본질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질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또한 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세련되게 하지만 과감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신학은 또한 성경이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합당한 노력을 기꺼이 경주하는 것이다. 신학은 또 기도와 함께 가는 탐구이다. 신학이 무시되거나 경시될 때 신앙공동체는 목표를 잃고 방황하거나 낯선 영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복음의 온전성에 대하여, 복음의 현재적 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복음의 실천적 표현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질문들이 북미 대륙의 교회, 학교, 사회의 자리에 제기될 뿐 아니라아래로부터또한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외면하거나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2장. 계시의 의미
모든 신학은 자신의 주장들이 어디에 기초하는지 신앙에 대한 지식의 근거가 무엇인지 밝혀주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며 널리 알려진 신조인 사도신경은 ‘내가(또는 우리가) 믿사오니’하는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되었을 때 이 고백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신앙의 일차적 표현들 - 찬송가, 기도, 신조 등 - 에 대한 합리적 설명의 요구)
- 우리가 가진 하나님 지식은 어디서 비롯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지는 만물에 대한 지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신학(특별히 근대신학)에서 계시론이라는 제목아래 다루어지고 있다.
1.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란 문자적으로 이전에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 또는 ‘베일을 벗는 것’을 뜻한다. 이 계시라는 용어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을 지칭할 때에 독특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모든 종류의 앎은 일종의 ‘계시’에 대한 개방성을 전제한다.
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인식하는 사람은 대상을 찾는 가운데 능동적이어야 하며 무엇인가를 받을 준비가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 앎의 대상을 우리의 선입견에 억지로 뜯어 맞추는 것이 아닌 그 대상으로 하여금 ‘말하도록’허락해야 한다. 참으로 새로운 지식이 얻어질 때, 그것은 정보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신학에서의 계시도 다른 앎의 경험들 속에서 그 유비를 찾아 볼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학에서의 계시는 훨씬 더 특정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 신학에서의 계시는 창조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의 인격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것을 지칭하며 이 계시는 한 묶음의 지식을 전달한 것을 뜻하기 보다는 한 주체가 다른 주체들에게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 주도적 역할을 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자신이 누구인가와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다. 다시 말해 계시 안에서 주어지는 지식은 어떤 사실(that)이거나 어떤 것에 관한(about) 지식이 아니라 어떤 분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of) 지식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가와 자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가운데 행동하셨다는 주장은 성서적 전통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은혜로운 계약의 역사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창17:),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신 사건, 그리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 것 등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유 또는 하나님의 숨겨짐은 결코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으며 이러한 계시의 사건 가운데서도 신비이기를 멈추지 않는 분이다.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통제의 대상이 되거나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소유물로 전락하지 않는다.(모세 - 하나님의 뒷면만을 보도록 허락됨. 엘리야 - 바람, 지진, 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닌 세미한 음성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훨씬 더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의 계약의 역사 가운데 하신 일들은 신약성경에서 폐기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확인되며 놀랍게 확장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예수의 선포, 사역, 죽음, 부활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새롭게 세워진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거룩한 사랑의 결정적 계시이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유일성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 한다 :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1:1-2),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안에 성육신 하였다.(요1:14),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압제 받는 사람들을 자유케 할 해방 자가 나타났다.(눅4:18)하지만 구약성경에서 기술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는 또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숨겨짐이다. 하나님께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린 한 겸손한 종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이 사실은 이 세상의 지혜있는 자와 힘있는 자들에게는 철저한 걸림돌이며 어리석은 일이다(고전 1:22-23)
계시의 주제가 많은 현대신학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해 왔던 반면 어떤 신학자들은 계시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 안에서는 계시의 개념이 주변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중심논지에 따르면, 계시의 개념은 신학적 관심을 구원의 문제에 돌리기보다는 현대 철학과 과학에 두드러지는 온갖 종류의 인식론적인 질문 - 우리가 주장하는 지식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가? - 에 그 주의를 돌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의가 계시의 주제에 집중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 곤경이 죄가 아니라 무지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서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되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하여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막10:17, 요3:3)
이러한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만일 계시가 하나님이 주신 지식이나 정보로 여겨진다면 그 위험은 더욱 명백해진다. 성경에 따르면,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한 묶음의 권위적인 교리에 대하여 단순히 지적인 동의를 하는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지식’이란 오히려 구원의 지식으로서 우리 삶의 의미, 온전성, 실현 등의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은 것을 요구한다고 보았다.(하나님은 오직 경건이 있고,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갈망과 연결된 곳에서만 알려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존재와 목적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계시를 객관적인 사건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 경험으로 볼 것인가. 교리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만 계시의 과정에 있어서 양쪽 측면이 모두 중요하며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계시는 특정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은혜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으로서 신앙공동체는 이것을 증언하며 해석한다. 폴틸리히는, “계시란 언제나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사건으로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상호의존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계시는 특정한 사람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를 포함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행위를 경험하고 증언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또한 포함한다.
최근에 계시론에 대해서 가장 빈번하게 논의된 주제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이 계시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신학에서 기술된 계시의 경험이 예술적 창작이나 과학적 탐구에서 새로운 통찰력이나 ‘근본구조의 변환’을 경험하는 것과 유사함을 지적해왔다. 그들 연구결과에 따르면, 계시를 인간의 이성이나 상상력을 대치하는 초자연적인 대용품으로 생각하는 것은 계시 이해를 왜곡 시킬 수 있다고 한다. 계시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하거나 무력화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적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간의 상상력에 새로운 비전을 가져다주며, 인간의 이성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한다.
개럿 그린(Garrett Green)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상상력을 거짓된 우상숭배의 사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새로운 모형 또는 근본구조(model or paradigm)를 제공해준다. 계시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을 보며 다르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구현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의 삶의 모형의 빛에서 전실재(the whole of reality)를 재해석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주장했던 것의 요지이기도 한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빌2:5)과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마음의 변화를 받아서 살아갈 것(롬12:2)을 권고하고 있다.
존 칼빈(John calvin)의 뛰어난 은유에 따르면 계시에 대한 성서적 증언은 마치 안경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세계, 우리자신을 철저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리차드니버(H. Richard Niebuhr)는 계시의 의미에 대하여 현대신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분석 가운데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니버는 계시의 사건을 어려운 책을 읽는 가운데 우리가 마주치는 ‘실마리 문장’에 비유하는데, “우리는 그 문장으로부터 전후를 살피는 가운데 전체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표현을 빌면, 계시는 또한 인간 또는 공동체의 ‘특별한 계기’에 비유될 수도 있는데 이 계기는 그들 삶 전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기독교 교회에서 우리가 특별한 계기로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인데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과 지혜를 본다.”고 니버는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계기로부터 우리는 우리 역사의 모든 사건을 조명해 주는 개념들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계시란 다른 모든 사건들을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러한 축이 되는 사건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다루어지는 계시의 의미는 다섯 가지 논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말을 거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시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지 우리의 힘으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매개체로 삼으신 특정한 사건과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셋째,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전인격적 응답과 받아들임을 요청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실천적 지식이다. 계시 사건의 목표는 비밀스런 교리소유가 아니라 변화된 삶을 일으키는데 있다.
넷째, 언제나 동요케 하며 충격적이기까지 한(always a disturbing, even shocking event) 사건이다. 계시는 하나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철저히 새롭게 한다. 이 사건에서 계시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숨겨짐은 결코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시되는 하나님은 자유롭고 언제나 놀라움을 일으키는 분이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죄인들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된 가운데서, 십자가의 깊숙한 감추어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이러한 은폐성과 예측 불가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하나님, 세계,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해 주는 초점(new interpretative focus)이 된다. 계시는 이해를 향한 우리의 추구를 제한하거나 편협하게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특별한 계기’의 빛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며 이러한 새로운 비전에 걸 맞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는 편협하게 만들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을 펼치는 것과 세계 안에서 인간의 삶을 변혁하는 데에 다함없는 원천을 제공해준다.
2-2일반계시와 특수계시
Ⅰ. 서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계시의 특정성이 강조된다고 해서 모든 자연 세계와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행위가 부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현존하며 역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적 증언과 자연 질서 및 보편 역사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Ⅱ.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관계
1. 일반계시의 존재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통로를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두 가지로 구분해 왔다. 창조된 세계와 인간의 양심,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 등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고, 우리의 경험이 이를 인정하고 있음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바울도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변론할 때, 아테네 사람들이 예배하고 있었던 알지 못하는 신의 정체를 증거하였다.(행 17:22 이하)
2. 일반계시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하나님께서 일반계시를 통해서 자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 복음을 전할 때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공통적인 기반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여타의 학문에서 얻어지는 지식에 대해 보다 수용적이 되게 하고,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 나오는 가르침에 대해서 개방성을 가지도록 도와준다.
반면에 우리가 일반계시에만 몰두하게 되면, 이전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했듯이 특수계시가 피상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특수계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3.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연결
1) 다양한 연결 방법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학학파들이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지어 왔다. 그 연결선상의 한쪽 끝에는 특수계시에 기초한다는 종교도 결국은 보편적으로 얻어지는 하나님 지식을 조금 다른 상징을 써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있다. 그 반대쪽 끝에는 그리스도 안의 계시만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제공해 주기에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결선상의 중간쯤에는 일반계시에서 얻어지는 것이 불충분함을 시인하면서 일반계시가 성경과 특수계시에 의해 주어지는 보다 온전한 하나님 이해를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반계시가 도덕과 종교에 넓은 기초를 놓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보는 절충적 입장이 있다.
2) 칼빈의 견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이 있음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감각’(sense of divinity)이 있으며 보편적으로 심겨진 ‘종교의 씨앗’(seed of religion)이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칼빈은 이러한 보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죄로 인하여 약화되었다고 보며, 성경에 나타난 특수계시에 비하면 불충분하고 혼동되어 있으며 모호하고 흐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창조와 인간의 양심 안에 나타난 계시의 상대적 모호성은 위험의 원천이 된다. 결국 칼빈은 로마서 1:18-23에서 나타난 사도 바울의 논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보편적인 계시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죄악된 습성은 이러한 일반적인 하나님 지식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종교는 종종 사악한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사용된다.”
칼빈이 개혁 신앙 이외의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그 종교들의 왜곡된 측면을 드러내는 데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인 반면에,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른 종교를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 그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존중이 요구된다고 보며, 다른 종교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롭고 주도적인 현존과 신실한 인간의 응답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은 그의 주장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인간의 모호하고 피상적인 종교성은 단지 무관심이나 절망으로 빠질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할 위험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제 3제국 당시의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이데올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종교와 인종분리 정책의 혼합, 미국과 그 외 나라들의 국수주의 운동에서 모호하게 이용되는 하나님과 종교적 가치 등등은 칼빈(그리고 후에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가 본질적으로 옳은 것임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일반계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지식을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경향을 계속적으로 가진다.”
4. 특수계시의 비판에 대한 반론
기독교 신앙이 성경 안에 증거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고유하고 특수한 하나님의 계시에만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편협하고 오만한 자세를 유발시킨다는 비판자들의 주장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교회 안에서 편협함과 오만함이 자주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회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실수가 특별계시의 강조 때문이라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교회의 그러한 실수는 교회가 참으로 기독교적인 것을 놓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오히려 모호하고 피상적으로 종교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서적 전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성경도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에 사용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모호한 종교성 안에 감춰진 위험이 더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비판을 위한 자원이 성경의 예언적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보다 이 모호한 종교성 안에 훨씬 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계시 경험에 있어서 자기비판을 포함하는 비판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특수계시를 그저 일반계시를 부인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아무 변형 없이 연장시켜서 완성시키는 것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특수계시는 일반계시 안에 담긴 좋은 것과 참인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어떤 원천에서 왔든지 간에 이전의 하나님 지식을 끊임없이 도전하고 수정하며 넘어서는 것이다.
Ⅲ. 결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시를 우리의 손 안에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통제 안에 두고 있는 것처럼 가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목적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 이해, 세계 이해, 그리고 우리 자신 이해에 계속적인 혁명을 가져온다.(니버)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를 구분함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것들을 지나치게 단순할 정도로 갈라놓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의 요점은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계속적인 회심과 변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과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 계시는 우리가 가지는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 자연과의 관계, 우리의 문화적 행위 등의 변화를 요구하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과 하나님과 관계하는 방식의 변혁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의 변혁을 요구한다.(니버)
2-3.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에 일차적으로 의존함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연과 역사 가운데 현존하시고 행동하시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계시의 충만함은 오직 인격적 삶 안에서 다가온다. 오직 인격을 통한 계시만이 인간이 우리들에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며, 오직 인격적인 계시만이 가장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를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시의 의미를 보다 더 분명히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상호인격적인 의사소통(interpersonal communication)의 영역을 가장 적절한 유비로서 이해한다. 바질 미첼(Basil Michell)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계시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유비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유비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유비가 계시론에서 채용되는 유일한 유비는 아니다. 사실 여러 가지의 다양한 유비들 또는 모형들이 계시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 사용되어 왔다.
첫 번째 견해 - 명제주의적 모형 : 계시는 성경의 명제나 교회의 교리의 형식으로 정확하거나 무오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 ex)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카톨릭 신학, 오늘날 개신교 근본주의 신학
두 번째 견해 - 역사주의적 모형 : 우리의 개인의 역사 또는 집단의 역사에 있어서의 전환점(turning point in our personal or corporate history)에 비유한다. 이러한 계시는 직접적으로 성경본문이나 교회의 가르침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계시는 과거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 속에서 찾아진다.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나 예수의 심판과 처형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면, 우리는 더욱 계시에 가까이 가게 된다. ex)19C ‘예수의 생애’ 신학(the 'life of jesus' theology)
세번째 견해 - 경험주의적 모형 : 계시는 새로운 통찰력이나 자기 발견의 중심적 경험(crucial experience of new insight and self - discovery)과 같다. 여기에서 계시의 자리는 성경이나 전통 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지는 해방과 갱신의 경험이다. 이러한 모형은 현대의 해방신학자들에게서 찾아진다.
이러한 모형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가장 적절한 유비로서의 ‘상호인격적인 의사소통’과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지만 강조점은 다르다. 즉, 강조점은 명제들이나 역사적 사실, 해방과 갱신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상호인격적인 지식의 사건에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강조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계시에 대한 엄격한 명제주의적 해석(propositionalist interpretation)을 거부한다. 이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제적 진리의 전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이 견해가 신앙 지식의 인격적 특성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지만, 이러한 ‘만남’의 개념은 매우 모호하며 강한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가 소홀히 다뤄지는 가운데 그 유비가 주의 깊게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이 인격적인 지식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함으로써 알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상대방에게 말을 들음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에서 무엇을 의도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에 대하여 잘못된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적 지식에 대한 이상과 같은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문제점은 이원론적인 인간이해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지식에 대한 타당성을 말하려면 이원론적인 인간이해를 버리고 우리의 정체성과 의도를 행동 가운데 드러내는 행위자라는 새로운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 인격적 계시 사이의 유비는 이원론적인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
첫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들의 행위의 지속적인 유형(persistent pattern)을 관찰함으로 우리에게 계시된다. 우리는 어떤 지속적인 행동의 유형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알아가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참된 인격이 어떠한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어떤 특징적인 행동의 유형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알아가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참된 인격이 어떠한지를 결정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도 역시 하나님께서 특정한 행위(particular actions)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격과 의도는 자연 또는 역사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기보다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구체적 사건(행동) 안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둘째, 인간의 정체성이 그의 행위의 지속적인 유형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체성이 그 행위의 유형 안에서 완전히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들의 행동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존재이다. 이것은 사람의 행동은 자의적인(arbitrary) 행동뿐만 아니라 자발성과 예측불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람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뢰하는 가운데 약속에 대하여 응답하며 사는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격적 지식의 자유, 곧 알아가는 사람과 알려지는 사람 양쪽 편 모두에서의 자유와 연관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가운데에서도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자기 내어줌이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타자에 의하여 흡수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지식에는 언제나 무엇인가 새롭고 놀라우며 예측 불가능한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역시 신실함에의 약속과 신실함에로의 부름으로 특징지어진다.
마지막으로 행위를 통하여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유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의 이야기의 중요성(the important of narrative for identifying persons)이다. 마이클 맥클레인(F. Michael Mclain)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안에서 행동하심을 통하여 자신의 성격과 목적을 드러내신다면, 이야기는 하나님의 정체성(identify)을 드러내는 적합한 형식이다.“ 이야기는 인격의 특성을 기술하는데 적합한 형식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행동의 지속적인 유형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정체성과 목적을 증언하는 가운데 이야기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과 기독교 공동체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곧 이어서 이차적으로 증언함에 있어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로서 성서의 이야기들(biblical narratives)이 증거되는 것과 교회의 선포와 행동 안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다시 증거되는 것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재미있는 이야기들(stories)이 그저 말해지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로완 윌리엄즈(Rowan Wiliams)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들을 때, 모든 좋은 이야기들은 우리를 변화시킨다.․․․․․․․․가장 진지한 이야기들은 우리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라고 말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단지 우리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운데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의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유로 초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삶에 도전을 주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삶, 새로운 사명 등을 우리에게 던져줄 때,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진정으로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2-4. 계시, 성경, 교회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계시라는 용어는 일차적으로 성경, 신조, 교리, 교회적 권위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본성과 목적에 대한 최고의 계시이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의 선포와 삶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고후5:19)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과 교회의 증언이 무시되거나 경시되는 곳에는 기독교적 의미의 계시의 의미도 역시 위협을 받는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의 세가지 형태로 나눈다.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 가운데 세 개의 동심원과 같이 서로서로 연관되어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원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예언적이며 사도적인 증언이라는 두 번째 원을 통함으로써만이 내부의 첫 번째 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성서적 증언은 다시 세 번째 원의 기초가 되는데, 이 세 번째 원은 신앙공동체의 계속적인 선포와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오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오는데. 곧 신앙공동체의 참으로 인간적인 증언, 기억, 희망, 실천 등을 통하여 온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비추어졌던 하나님의 빛은 무엇보다도 성서적 증언이라는 분광기(prism)를 통하여 전해진다.
교회가 신실함을 유지하는한, 교회는 자신의 삶과 선교에 있어서 성서적 증언의 우선성과 권위(priority and authority)를 인정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변명이나 부끄러움 없이 성서적 증언의 인간적인 성격도 또한 인정할 것이다. 성서적 증언의 기자들이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로서 분명히 그 당시의 역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계시 이해에 있어서 약점이 되기보다는 강점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발견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성경은 계시를 증거하지만, 성경이 계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비록 루터처럼 대담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심지어 칼빈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기독교 계시 이해는 성서적 증언의 역사적 우연성과 모호성(historical contingencies and ambiguities)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하는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 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언으로부터 구분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증언은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매개된다.
우리는 많은 해석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의 내용을 듣고 이해한다. 우리가 성서적 말씀을 매개해 주는 교회의 선포와 살을 건너 뛰어서 직접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계시 이해는 보다 순수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성서주의자들(bialicists)도 있는데, 만일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계시 이해는 순수해지기보다는 훨씬 더 빈곤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겨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는 종종 교회를 심판하며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계시를 왜곡시킨 것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과 삶에 오류가 있었음에 민감하면서, 교회 안에 계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는 가운데, 개신교 신학은 과거와 현재의 교회의 증언으로부터 독립하여 오직 성서적 증언 안에서만 계시를 찾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교회를 성경과 동일한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수준에 올려놓으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데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오직 성서로만’ 도 아니며, ‘성경과 교회 전통이 함께’도 아니다. 참으로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인데, 성령께서는 교회의 증언과 삶이라는 맥락(context) 안에서 성경의 증언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일으키신다.
계시, 성경,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 사이의 관계는 개신교신학, 로마 카톨릭신학, 동방 정교회신학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었는데, 이 논쟁 가운데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과 교회의 교리가 두 개의 독립된 계시의 매개체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동의해 왔다. 교회의 교리들은 성경 안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여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삶에서 상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언제나 성경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은 성경의 중심적 내용을 풀어내는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간결한 요약을 전해 준다.
계시에 대한 모든 인간의 증언이 모호성과 왜곡의 위험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계시가 수용되는 과정을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편으로, 신앙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성경의 증언을 주의 깊고 신실하게 읽고 듣는 것과 동떨어진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 의하여 매개되고 교회의 선포와 삶에 의하여 전해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의 증언 모두 자신들을 넘어서서 다른 분(another)을 가리키는데, 이분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만 결코 우리의 통제 안에는 들어오지 않는 변혁과 갱신의 실재(reality)이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그 계시의 빛에 따라서 인간의 삶을 재형성하는 것도 역시 공동체의 종교적 단체의 신념과 실천 안으로 사회화되는 과정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이 됨은 그저 전통을 받아들이고 되풀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요청한다. 성경과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매개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증거 하는 책임적인 증인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며, 그 복음을 해석하고 살아내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들을 공동체를 향한 섬김으로 인도하지만, 공동체는 결코 자신이 증언하는 계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허세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계시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것이며 신학은 우상숭배로 대치될 것이다.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며, 성경의 증언과 신앙공동체의 증언을 통하여 매개되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행위이다. 계시는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계시는 교회가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기다려야 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는 가운데, 기독교 공동체는 다음의 사실을 고백 한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님이 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았고(고후4:5),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교회에 말씀하시며 교회를 개혁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제3장 성경의 권위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모든 기독교 신학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 왔다. 중요한 질문은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삶에 있어서 일차적 권위를 가지는가 혹은 못 가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어떠한 종류의 권위를 가지는가의 문제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선포하는 자유케 하는 소식,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은혜로써 받아주신다는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성경은 자의적이고(arbitrary) 전제적인 권위로 경험되기보다는 갱신, 자유, 기쁨의 원천으로 경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사람들(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이 성서적 권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해와는 사뭇 다르다.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를 자유보다는 강제와 동일시하려 하며, 기쁨보다는 공포와 연결시키려 한다. 자유로운 연구를 억압하고 노예제도와 가부장제도등을 정당화하는 데에 성경의 권위가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가를 삶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의 주요한 과제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해방적인(liberative)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성경의 권위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것이 가지는 특정한(particular) 기능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주장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의 활동에 대한 독특하고 대치될 수 없는 증언이다. 또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하며 우리의 삶을 변혁하는 목적을 위하여 봉사한다.
1. 근대문화에서의 권위의 문제
성경의 권위의 문제는 근대 서구문화에서 경험되는 권위의 위기라는 더 넓은 범위에서 살펴질 수 있다. 계몽주의시대 이후로 권위를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자율적 이성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검증의 과정을 통하여 이전에는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자의적이고 근거 없는 것으로 거부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라.”는 칸트(Kant)의 유명한 경구가 계몽주의 정신의 표어이다. 자율적 이성과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모든 ‘권위의 집’(그것이 국가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계몽주의의 합리성의 후예로서, 우리도 역시 권위라는 개념에 대하여 강하고 지속적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모든 영역에 적용된 근대의 비판적 정신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됨의 의미와 과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근대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유아적인 의존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도전은 근대문화의 특징이 되어 왔다. 예를 들어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발달은 계몽주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이러한 근대적 비판 정신의 허세를 지적하고 거부해야 하지만, 반면에 이 비판 정신이 가져온 좋은 것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비판적 정신이 없었던 그 시대를 향한 향수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히틀러, 스탈린, 뒤발리에, 마르코 등과 같은 전제주의 국가체제에 대한 비밀스런 동조자도 아니며, 기존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거부하는 교회중심적 권위주의의 동조자도 아니다.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라는 이름 안에 나타난 근대문화의 권위에 대한 비판에는 깊은 모호성(ambiguities)이 있고 이 모호성은 마땅히 파헤쳐져야 하지만, 억압적 권위를 비판하는 계몽주의의 비판 정신을 그저 거부해 버리는 것은 기독교의 선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복음도 역시 억압과 사슬로부터의 새로운 자유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근대의 비판적 이성의 정신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이성이 전통적 권위에 문제를 제기할 때도 동의하려 하지만, 그 비판의 범위가 성경의 연구와 해석에 까지 이르게 되면 그 상황은 달라진다. 그러나 성경이라고 하여 권위에 대한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 비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여러 가지 전통적인 사고와 해석을 뒤흔들어 놓은 성서 비평학적 방법의 추구를 건너뛰어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서 연구에 비평학적 이성을 적용한 것에 나름의 문제가 있었고, 성서비평학 안에도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신학이 그 앞에 직면한 이러한 도전의 과제는 이제 그만 비평적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철저하게 비평적이 되자는 것이다.
근대의 비평적 정신이 신학에 제기한 참된 질문은 성경의 권위가 억압적인 것으로 이해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성경의 권위는 자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지성을 희생해서라도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아니면 성경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은혜에 대한 성서적 선포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 교회는 자의적 권위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독특한 자유의 소식을 그 자신의 성서적 전통 안에 담고 있음을 잊지 않았는가?
성서적 증언 안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와 동일시하는 모든 권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있다. 예수께서는 종교적 교리나 전통에 궁극적 권위를 두는 것을 거부하였고(마 5:21 이하, 막 11: 28이하), 국가에 그 권위를 두는 것도 거부하였다(막 12:13-17). 사도 바울은 죽이는 문자와 생명을 주는 영을 구분하였다. 성서우상숭배(bibliolatry)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성서적 전승은 마틴 루터에 의하여 힘 있게 계속 지속되었는데, 루터는 ‘지푸라기’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유의 선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성서본문들을 지칭하였다. 존 칼빈은 그의 성서론에서 루터처럼 대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자신의 방법으로 이점을 지적하였는데, 그는 성경의 권위를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는 것’과 분리하여 생각하기를 거부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 됨을 최종적으로 설득해 주는 것은 ‘성령의 내적인 증거’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해는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근대에 나타난 권위의 위기에 영향을 받은 동시에 무엇보다도 복음의 내적인 방향성으로부터 일차적인 도움을 받아서, 현대 신학자들은 권위주의적인 하나님 이해, 교회 이해, 그리고 성경 이해를 넘어서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에 따르면, 역사비평적인 성서 해석과 종교개혁자들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의 교리 사이에는 ‘깊은 내적인 연결’이 있는데, 그것은 두가지가 모두 거짓된 안전성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이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자아의 유일한 참된 권위라는 계몽주의 전제(이 전제는 ‘후기근대주의’<postmodern> 철학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있다.)를 문제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신학은 억압적 권위에 대한 자기 나름의 비판을 전개하는데, 이 비판은 성서론에 나타난 여러 가지 다른 권위 이해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성경 안에 증거된 복음의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권위는 강제적 힘에 의하여 작용하는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사랑의 권위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림의 특징은 권위주의적인 통치(authoritarian rule)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및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삶과 자유를 지어가는 것이다.
3-2.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접근들
1. 성서문자주의자(biblicist)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은 그 초자연적인 기원(supernatural origin)에 의하여 권위를 가진다. 이 이론은 근대성의 공격으로부터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책, 모든 장, 모든 구절, 모든 단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영감설은 성경의 초자연적 기원을 주장하는 이론이 되었다. 이러한 영감이 어떻게 전달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제안되었는데, 그 중의 한 제안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경의 단어들을 성서 기자에게 불러 주었고 성서기자는 비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감설은 두 가지 점을 공통적으로 가진다.
첫째, 영감(inspiration)은 영감됨(inspiredness)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영감됨이란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원에서 비롯되는 성경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감설의 결과로 그 주의(attention)는 성경의 중심적인 내용과 신앙을 일으키고 양육하는 데에 기여하는 성경의 역할에 주어지기보다는 성경의 기적적인 기원에 대한 주장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성경은 영감된 진술들의 닫혀 진 체계로 이해된다.
둘째, 영감은 무오함(infallibility)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기에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성경은 아주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완전하며, “교리, 사실, 계명 등 어느 것에서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운데”(Hodge), 적어도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의 원전에서는 그러하다(Warfield). 로마 카톨릭에서는 근대성이라는 물결에 대항하여 1870년에 교황무오설을 제창하는데, 개신교측에서는 여기에 상응하여 성경무오설을 제창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확신의 참된 근거는 희미해지고 말았다. 무오한 교황과 무오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 자신의 방법으로 자유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성서 문자주의자들의 이러한 성경의 권위 이해는 근대적 이성의 타율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완벽한 공격 목표를 제공해 준다. 성경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말하는 성경의 말들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문자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한 결과로 성경의 본문들은 모두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권고(딤전 2:12)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는 새롭고 포괄적인 공동체의 선포(갈 3:28)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서문자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죽음의 권위주의(deadening authoritarianism)로 바꾸어 버리게 된다.
2.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근대 역사주의 의식의 등장과 함께 소개되었다. 이제 성경은 단순히 역사적인 자료로 읽혀진다.(historical source) 이러한 접근법은 우리의 성경이해에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방법은 성경을 또 다시 포로로 만드는 새로운 길을 열어 두기도 하였다. 역사가의 일차적인 관심은 ‘무슨 사건이 참으로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데에 있고, ‘사실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증해 보이는 데에 있다.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 성서 본문이 아니라 본문 뒤에 숨어 있어서 역사가에 의하여 재구성된 ‘사실들’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성서해석으로 비롯된 심각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성서적 이야기의 잠식’(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이다. 역사주의적 접근방법은 성경으로 하여금 어떠한 한계 안에서만 말하도록 허락하는데 이 한계는 해석자가 본문으로 가져가는 역사의 성격에 대한 어떤 가정들에 의하여 설정된다.
3. 성경의 권위에 대한 또 다른 접근방법은 성경을 종교적인 고전(religious classic)으로 간주한다. 성경은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묘사되며, 성경의 권위는 문학 정통이나 문화의 영역에서 ‘고전’이 가지는 권위에 유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성경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는 것이 칭찬받을 만한 목표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법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성경이 수행하는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위대한 문학작품이 아니다. 아무리 재미있게 잘 전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야기 속의 한 인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금 이상스러우면서 인상적인 문학적 인물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성경을 그저 문학작품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성경은 성경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행하신 행위들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는 증언으로 인정된다.
4. 성경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은 사적인 경건 서적(private devotional text)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개인에게 구원의 의미를 전해 준다는 데에서 찾아진다. 스콜라 신학의 사변, 현대 역사주의의 과거 사실에 대한 집착, 문학작품의 교양적 독서를 강조하는 미학주의 등에 대항하는 가운데, 경건은 성경이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미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성경은 나에게 말하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와 자비를 확신시켜 준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선포의 소식(massage)이다. ‘나를 향한’ 성경의 소식을 읽고 듣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지만 만일 그것이 우리를 향하고 세계를 향한 성경의 의미와 분리된다면 왜곡된 강조점이다. 성경이 오직 신앙의 순례자로서 나의 경험과 싸움을 조명하는 데에만 사용된다면 거기에는 성경의 축소가 일어난다. 성경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회와 신학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 때 공적인 영역은 사적인 삶의 영역을 위하여 포기되며 신앙은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하고 만다.
3-3. 성경의 권위
3. 성경의 필요불가결성(indispensability):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함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다.
◎성경의 참된 권위는 성서문자주의의 죽이는 문자, 역사주의의 무비판적인 전제,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편협함, 미학주의의 비참여적 자세 등을 넘어서서 신앙공동체의 삶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증언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 및 모든 피조물과 연결하게 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불가결 하다.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논하는 것은 곧 성경의 능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데, 성경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및 타자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양육하는 것을 돕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a)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와 무엇보다도 예수의 삶, 죽음, 부활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독특한 증언이다.
칼 바르트에 따르면 “참된 증거는 그가 증거 하는 대상과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참된 증거는 그 대상을 우리 앞에 놓이게 한다.” 이 말은 참된 증거자는 그가 증거 하는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그 실재에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자체적으로 권위를 갖기보다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는데 이 관계는 우리를 자유케 하며 새롭게 한다.
b)그리고 성경의 증언은 단성적인 방식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폴 리꾀르가 주장하였듯이 성서적 증언의 문학적 형식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묘사될 때, 이야기의 형식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예언적 형식은 오직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축하하며 읊조리기만 하고, 정의롭게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겸손히 행하기보다는 자기도취에 빠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오만을 날카롭게 지적할 때 적절한 매개체이다. 지혜문학은 매일의 삶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해 줄 뿐 아니라 고난과 악의 경험 안에서 숨어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시해 준다.
요약하자면, 성경의 다양한 문학적 형식들은 대체될 수 없는 계시의 매개체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면서 수정해 준다. 교회는 이러한 문학적 다양성을 인위적인 통일성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증언은 대단히 풍성하며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적 증언은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서로간의 연결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대개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에서 얻어진다. 최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이야기의 주제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찰스 우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의 경전으로 전체적으로 살펴 볼 때, 거기에 이야기의 요소가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에 이르는 연대기적인 전체적 흐름이 있을 뿐 아니라 큰 단위의 이야기 형식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다른 자료들을 위한 맥락을 제공하여 그 자료들이 계속되는 이야기 가운데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든다.”
◎종합: 여기서 나의 논지는 성경의 권위가 전통적인 근거와는 다른 근거를 가지는 가운데, 전통적인 이론들에 기술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성서적 증언을 통하여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롭고 해방적인 활동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드러나며, 우리는 하나님 및 타자들과의 교제 안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인도된다. 성경은 증거자이며,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자유케 하는 은혜를 증거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할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한다. 성경은 영원히 풍성한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시며 권력을 가지고 높이 있는 자를 심판하심을 선포한다. 이러한 것이 성경의 증거인데 이것은 우리를 동요케 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행위를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변화를 물론 포함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기주의, 고립, 무감각, 죄와 죽음에 얽매인 실존의 절망감 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의 낯설고 새로운 세계’(Barth)는 삶의 사적인 영역이나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의 새론 세계는 모든 민족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다다른다. 성경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선포하는데 이 가운데서는 정의가 불의를 대치하고, 우정이 적대감을 물리치며, 서로 섬김이 지배와 억압을 폐지하고, 생명이 죽음을 이겨낸다.
3-4. 성경해석의 원칙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해방하고 화해하는 사랑에 필요 불가결한 증언을 하는 점에서 성경의 권위가 이해된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의 원칙들이 제안될 수 있다.
1) 성경은 문헌적이고 역사적 비평의 도움을 받아 해석되어야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독특한 증언은 문헌비평이 성경을 경건한 소설로 축소시키거나 역사비평이 성경을 과거에 가두는 것을 거부한다. -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성경의 해석은 그저 과거에 대한 관심이나 미적인 관심에 의해 시작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해방과 구원의 약속을 붙들기 위함인데, 이때 역사비평과 문헌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잘 듣는 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하다.
① 역사적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위의 특정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하나님께서 구체적 장소와 시간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우리가 계시의 역사적 구체성을 존중하는 한 방편이 되고, 신앙이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분별해내는 그 사건의 구체적 맥락을 보다 분명히 해준다.
② 역사적 연구는 성경의 이야기가 본문 밖의 현실들을 지칭함을 상기시켜준다. - 복음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시고 고난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면 역사적 연구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관련성과 적합성을 가지게 된다. 칼빈이 지적한 바대로 교회의 신앙이 모든 복음서 이야기의 일점일획의 정확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 부활 등의 중심적 사건들을 묘사한 복음서의 진실성에 따라 그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예수께서 참으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가난한 자를 축복하셨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는가? 등의 질문들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질문들이다.
③ 역사적 연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 역사적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역사적 구체성을 깨닫게 하고 또한 성경기자들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알려준다. 그들의 유한성을 부인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을 빼앗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기보다는 그 자유를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함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의 동역자로 만들어 간다. 우리가 예수의 참 인간성을 부인할 때 가현론자가 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성경기자들이 성령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인 꼭두각시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성경론은 가현론적 성경론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참 인간성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성경기자들의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 이전에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의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의 사고구조의 세계와 우리의 사고구조의 세계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나, 이러한 위험을 회피 할 수 없다. 그 위험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삶 속에 결정적으로 현존하시고 행동하신 사건 가운데 이미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 실재의 모호성과 상대성 안으로 들어오심을 뜻한다. 성육신이 위험과 상처받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성경적 권위에 대한 어떤 이론도 그러한 위험을 부인하거나 없애 버릴 수는 없다.
④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러한 과거의 사건 속에 담겨진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고 선취(anticipate)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해방은 모든 피조물이 자유케 될 그 최종적인 해방을 지시하고 있다.
어떠한 사건도 그것이 잉태할 미래와 분리되어서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이러한 논지를 역사해석의 일반적 원칙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해석의 원칙은 성서해석에서는 필수적인데, 특별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필수적이다. 심오한 의미에서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해방의 이야기를 더 넓혀서 우리의 시대를 보며, 또 우리의 시대를 넘어서까지 보는 안목을 가지고 읽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과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경이 어떠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며, 성경이 어떠한 미래를 향하여 기도하기와 일하기를 원하는가를 또한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자유의 모든 의미가 초대교회에서 이미 다 실현되었다고 가장해서는 안 된다. 예) 바울이 교회에서 여자의 지위를 언급한 구절(고전 14:34)-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여자를 향하여 예수께서 보여 주었던 새로운 개방성과 우정을 묘사해 준다. 바울도 자유의 대헌장을 이렇게 작성하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이 구절을 ‘돌파구’ , 곧 자유의 새로운 시작으로 불렀다. 이러한 새로운 자유는 초대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미래를 향한 약속으로 가득차 있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 것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는 동시에 성경이 제시하는 앞으로의 방향에 민감한 가운데 읽어야 한다. 즉, 신뢰의 해석학과 의심의 해석학을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그 속에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 4:7)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해방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이해된다면, 성경에 담긴 해방과 변혁의 소식을 전하는 과정은 기계적인 반복이기보다는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원천으로 읽혀질 때 성경은 올바로 해석되고 자유의 원천으로 성경 자체를 억압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멍에와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2)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의미는 성경속의 해방의 이야기 안에서 철저하게 재규정되어야 한다. - 성경의 무대에서 주연배우는 하나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재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증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한다. 또 이스라엘 민족과의 계약 안에서 심판과 자비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한다.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죄와 비참함에 억눌린 피조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하여 신실하게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들려진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가치나 생명이 없는 이상이 아니라 창조자로서, 해방자로서, 화해자로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거쳐 시련의 여행을 할 때 함께 계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유배되었을 때 함께 고난을 당하신 고난당하는 하나님이시다.
① 성경의 하나님보다 더 강한 존재가 누구인가? -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없는 자를 있는 자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비교되는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무력을 사용하는 능력이 아닌 영의 능력이며 그 능력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십자가의 약함에서 알려지는 능력이다. 또한 그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 성경의 하나님의 자유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의 자유는 타자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유보다 훨씬 더 큰 자유이지만 하나님은 자유가운데 하나님이기를 중단함이 없이 종의 형체를 입으며 자유가운데 다른 이들을 부요케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며 자유가운데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다.
②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일원론적이지는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증언으로 읽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증언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하나님, 온 세상을 위하여 중재자가 되시는 성자하나님,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주시는 성령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이 세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의 사역에서 동역자가 되도록 부름 받으며 능력을 받는다. 하나님의 해방하는 활동에 대한 성경의 내용은 우리의 해방운동을 조성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계속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해방신학이나 해방운동에 대하여 놀라는 가운데 맹목적인 반작용을 보이는 교회는 아직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해방운동들은 강력한 유혹의 위험 아래 놓여져 있기도 하다. 그들은 특정한 집단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해방이라는 것을 그저 권력을 획득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성경이야기속의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통하여 자유함을 일으키시는데, 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바라는 하나님과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다른 분이다.
3) 성경은 그 맥락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 해석의 맥락은 모든 피조물의 정의, 자유, 평화를 향하여 열망하는 것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열려져야 하며, 그 열망을 포함해야 한다.
① 모든 성경해석은 개인적, 사회적 삶의 맥락에 의해 형성되는데 언제나 우리의 개인적 필요를 포함하거나 종종 그 필요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 포로 됨, 불안, 죄의식, 좌절, 소외, 고독, 절망, 자유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 등. 성경을 해방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개인적 맥락(context)은 결코 경시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성서해석의 맥락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영역을 결코 넘어서지 않는다.
② 성경해석의 보다 큰 맥락은 신앙인들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교회의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그 맥락에 따라서 해석한다는 것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신앙공동체와 함께 성경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신앙공동체가 정경으로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데에 규범 또는 기준으로서 성서를 받아들였음을 상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께서 성서의 증언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실 것을 확신하며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맥락에 따라서 해석한다는 것은 기독교공동체의 회상과 희망의 맥락 안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다.
③ 성경의 읽기와 해석에 있어서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더 큰 신앙공동체의 교훈과 통찰력에 자신을 열어둘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배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또 모든 신앙 공동체의 지혜와 경험이 도움을 받음으로써 성경을 그 맥락에 따라 해석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죄, 구원, 사슬, 해방 등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고 또 수정해 주기도 할 것이다. 교회의 신조나 신앙고백이 성경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니지만 신조나 신앙고백은 그 시대와 그 장소 안에서 ‘신앙의 잣대’(rule of faith)를 제공해 주는데, 교회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논쟁과 혼동의 와중에서 성경의 중심 주제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합의한 에큐메니칼 교리들은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공동체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된 기준들을 제시해 준다. 교회에서 교리는 율법적인 기능보다 해석학적인 기능을 한다. 즉, 교리들은 성경적 증언의 중심적이고 살아있는 진리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④ 성경을 그 맥락에 따라서 해석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모든 성경해석은 우리와는 다른 경험, 환경, 필요, 희망 등에서 나오는 다른 해석들에 대하여 열려있는 동시에 그 해석들에 의하여 검증받아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성서해석은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가운데 고통당하는 공동체의 성서해석에 의하여 검증되면서 동시에 더 깊어져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오랜 세월 고난의 역사를 살아왔기에 그들의 성서 해석은 지배적인 문화 안에서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간과되는 이 세계의 악과 고통의 현실에 훨씬 더 민감하다. 흑인들, 라틴 아메리카인들, 여자들과 같이 지난 세월동안 억압받은 사람들은 제 3세계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데 이들의 성서해석은 자신의 안락한 중산층 백인의 가치를 종종 성경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제 1세계의 성서해석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던져 준다. 그러므로 풍성한 맥락가운데서 성경읽기를 훈련받는다는 것은 세계의 교회와 계속적인 대화를 요구하며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오랫동안 침묵 당했던 사람들의 음성을 들으려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음성들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우리는 예언자들의 선포 안에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가운데 정의를 외치는 울부짖음의 메아리들을 듣게 될 것이다. (사 1:16-17, 렘 5:1, 암 5:23-24, 미 6:8).
⑤ 성경을 책임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며 고통당하는 경험이 필수적인 맥락을 제공해 준다는 주장은 때로 ‘가난한 자들의 해석학적 특권’(the hermeneutical privilege of the poor)이라는 구절로 표현되기도 한다. 올바로 이해될 때 이 구절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생명에 있어서, 새로운 삶에 있어서, 그리고 풍성한 삶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그러면 가난한 자들의 해석학적 특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경의 중심적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고난과 가난의 경험이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인데, 자신의 고난 및 타인의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롭고 놀라운 사역 안에서 재규정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죄인, 가난한 자, 불의의 희생자와 연대를 이루는 것을 통하여 또 사슬에 얽매인 사람들의 구속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사랑의 길을 자유 가운데 선택하는 것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성경해석의 필수적인 맥락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사랑, 희망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가나한 자들과 연대하는 가운데, 정의를 향하여 헌신하는 가운데, 그리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애타는 열망에 새로운 민감성을 회복하려는 노력 가운데서 비강제적인 성서적 증언의 권위는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순종의 자세를 발견한다.
4장 삼위일체 하나님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호하게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성경에 증언된 하나님의 구체적 행위에 근거하여 진술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의중심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에 고유한 하나님의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나님은 우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답변할 때,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계약을 증언하는 성서적 증언의 빛에서 그 답변을 찾는다.
1. 근대 신학에 있어서의 하나님 문제
1)하나님의 관한 논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로 여겨진다. 계몽주의 정신체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비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긍정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포이에르바하(Feuerbach)는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감추어진 잠재력의 투사일 뿐이기에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신을 빈곤하게 만든다.”고 말하였고 프로이트(Freud)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필요가 전능한 부모에 의하여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유아적 환상이라고 보았다.
2)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악의 사건들을 보면서 역사속에서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잔인한 흑인노예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가? 제 2차 세계대전 가운데 6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학살된 참상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확신에 타당성을 주기도 한다.
3)하나님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철학적 논의에 있어서도 계속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과정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상호적이며 설득적인 관계로 묘사하기 보다는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관계로 묘사한다. 전통적 하나님 이해에 가장 강력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여성신학의 비판이다. 여성 신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적 하나님 이해와 그 표상은 지배의 관계를 조장하는 가부장적 태도 및 그 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가부장 중심제란 “종속과 착취를 가져오는 남성 중심의 계층 체계”를 의미한다. 샐리 맥훼그(Sallie McFague)는 가부장 중심주의와 그것을 정당화 하는 신학에 대한 여성신학의 비판을 간단히 말하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힘의 문제로 보았다.
4)우리는 모든 종교적 믿음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면서 시작할 것인가? 인간의 공통적 경험과 소위 말하는 보편적인 원리들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완전하며, 전능하며, 지혜롭고, 선하며,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접근방법을 취한다면 하나님 이해를 향한 접근방법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두드러지고 오랜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가 이와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하나님의 실재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함에 있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사전 지식과 표현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이고 미분화된 관념들을 무 비판적으로 채용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관념들을 규범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일반적이고 불분명한 방식으로 말하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특정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주님으로 고백하는데, 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은혜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세계 안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이다. 이렇게 특정한 계시와 구속의 역사에 근거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을 새로운 삶의 원천이며 중보자이며 능력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을 성서적 전통과 고전적 신학 전통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요약하자면 삼위일체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가 가장 적합한 표상과 개념을 사용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 시도로서 언제나 부적절한 면을 가지고 있다. 올바로 이해될 때 삼위일체론은 어떤 비밀스럽고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선포에 적합하며 일치하는 하나님 이해일 뿐이다. 삼위일체론은 하늘에서 떨어진 교리도 아니며, 십계명과 같이 돌판에 새겨진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복음의 선포에 대하여 성찰했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으로서 이 사랑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나타나고 성령의 능력안에서 지금도 이 세계를 변혁하는 가운데 역사한다. 삼위일체론은 교회가 복음에서 선포되고 기독교 신앙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은헤의 신비에 대하여보다 연관성있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의 산물이다.
2.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뿌리
삼위일체론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몇 개의 ‘증거 본문들’(예를 들어 마28:19)에서 발견되기보다는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와 행위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철저하게 삼위일체적 유형을 사용하는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1)성경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임을 강조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에 대한 이러한 신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신 6:4, 막 12:29-30). 반면에, 하나님의 실재(reality)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안에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적으로는 ‘성부’라고 불려지는 분으로부터 오며, ‘성자’라고 불려지는 분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 세계를 향하여 인간적으로 시행되고, ‘성령’이라고 불려지는 분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임재하는 역동적인 실재가 된다. 위르겐 몰트만의 말을 빌면, 복음의 이야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천지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2)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부르는데 그것은 이러한 표현이 성서적 증언과 일치하며, 그 증언에 바탕을 둔 교회의 경험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God over us)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이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다. 또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며, 은혜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며,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고후 13:14)이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이 세 분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나 구분된(one yet differentiated) 하나님의 사랑이 구분되는 가운데 인격적으로 표현된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오심을 전하는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내포하고 있다(롬 5:1-5, 8:9-11).
3)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제멋대로 사변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은 언제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그 근거와 한계를 찾아야 한다. ①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경륜적 삼위일체란 구원의 ‘경륜’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구분된 행위자가 됨을 뜻하는 표현이다. ② 내재적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나타나는 영원한 인격의 구분(the eternal distinctions of persons)을 뜻하는 표현이다. 복음서 이야기에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활동하시는데, 곧 해방하며 화해하는 사랑의 원천(source)과 매개자(medium)와 효과적 약속(effective promise)으로서 역사하신다.
4)삼위일체론이 하나님에 대한 순전히 사변적인 존재론으로 바뀔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남김없이 주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다 파악한 것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계시한 것이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고백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임의적인 사변을 전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의 구분되는 인격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사랑의 이 같은 구조는 하나님 자신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존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인 삶 안에 서로 자신을 내어 주는 행위가 있고 서로 나누어 주는 ‘사랑의 공동체’(Augustine)가 있는데, 바로 이 존재가 성경에서 증언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먼저 사변적으로 영원 가운데 있는 삼위일체를 상정하고, 그 후에 계시와 기독교 경험 안에서 그 증거를 찾지 않는다. 올바른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성경 안에 증언되고 교회의 시초에서부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경험된 계시와 구원의 역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한다. 오직 이러한 기초 위에서만 신앙과 신학은 삼위일체적 교제가 하나님이 세계와 가지는 관계에 적용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존재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고백한다. 삼위일체론적 신학의 논리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분된 사랑(경륜적 삼위일체)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존재의 심층에 있는 삼중적 사랑의 궁극적 기반(내재적 삼위일체)에까지 다다른다.
4 - 3. 고전적 삼위일체론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등장
초대교회 이후 수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회는 삼위일체에 대한 명시적 교리를 확정하였다. 그 발전에 있어서 두 개의 이정표는 니케아회의(Councils of Nicea : A.D. 325)와 콘스탄티노플회의(Councils of Constantinople : A.D. 381)인데 여기에서 확정된 고전적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은 ‘본성은 하나이며, 세 인격으로 구분된다’(mia ousia, tres hypostases ; one in essence, distinguished in three person)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됨과 삼중적 자기 구분(unity and threefold self-differentiation)을 진술하는 이 신조의 소극적 의미는 종속록, 양태론, 그리고 삼신론에 반대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에 반대되는 종속론, 양태론, 삼신론
종속론(subordinationism)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들은 신성(divinity)의 서로 다른 서열을 기술하는 것이다. 즉, 영원한 성부이신 한분의 위대한 하나님이 있으며, 성자와 성령은 뛰어난 피조물이거나 성부보다는 열등한 신들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와 성령이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 아니라 뛰어난 피조물이나 열등한 신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될 수 있으며 성령이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이 될 수 있는가?
양태론(modalism)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하나님의 가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함께한 예수의 사역,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등이 겉모습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보여 주는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즉,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외적인 가면에 불과하여 하나님의 참된 정체성이 계속해서 숨겨져 있다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어떻게 분명히 믿을 수 있겠는가?
삼신론(tritheism)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집합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세 분의 개별적이고 분리된 신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견해는 구약성경에서 명하고 예수께서 가르친 그 명령, 곧 하나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신뢰와 충성과 예배의 대상이 세 분의 다른 하나님들(Gods)일 수 있는가?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특징
주의 깊게 만들어진 고전적 삼위일체론은 이상과 같은 종속론, 양태론, 삼신론의 오해로부터 기독교적 삼위일체 이해를 보호할 것을 의도한 것이다. 그러면 ‘본성은 하나이며 세 인격으로 구분된다’라는 이 기술적인(technical) 개념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하나님의 변혁하는 성령의 부으심(outpouring)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다시 묘사하고자 한다. 가난한 자와 친구가 되고 죄인을 용서한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사악하고 마성적인 측면이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자유가운데 자신을 내어 주며, 타자를 긍정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권력에의 의지(will-to-power)가 아니라 힘과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공동체에의 의지(will-to-community)이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주고받으며 나누는 사랑에 있고, 타자에게 생명을 주며, 공동체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궁극적 힘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divine power)과 인간의 힘(human power)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뒤집어 놓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스림은 무력의 통치이기보다는 주권적인 사랑의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묘사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참된 힘과 인간의 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누어 주며, 타자를 돌아보고,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사랑이다. 바로 이건이 삼위일체론의 ‘심층의 문법’(depth grammar)인데, 바로 이것이 모든 ‘표면의 문법’(surface grammar)의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가 복음의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부적절한 이름과 표상들의 뿌리에 놓여져 있다.
4-4. 왜곡된 하나님 이해들
삼위일체론을 외면하면 하나님에 대해 왜곡하게 되어 여러 종류의 단일신론(unitarianism)이 등장한다.
1. 그 첫 번째 왜곡으로 삼위일체의 첫째위격, 곧 창조주 단일신론(unitarianism of the Creator)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인식되며 때로는 어떤 특정한 종족이나 민족의 ‘창조주’로서 인식되는데, 미국의 시민종교가 대부분 그렇다. 하나님은 미국의 운명을 섭리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하면 죄의 자각이 거의 없으며, 그에 따라 용서, 회개, 삶의 변화가 거의 요구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나라의 민족 종교에서도 나타나며, 모호한 유신론에서도 나타난다.
2. 두 번째 왜곡은 삼위일체의 둘째위격, 곧 구속주 단일신론(unitarianism of the Redeemer)의 형태를 가진다. 여기서는 예수만이 신뢰와 충성의 대상이 되며, 예수는 복음서에서 선포되는 예수이기보다는 어떤 종파의 창시자 정도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해에서는 예수를 숭배하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 사이에 별 관련이 찾아지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나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것일 뿐이다.
3. 세 번째 왜곡은 삼위일체의 셋째위격, 곧 성령 단일신론(unitarianism of the Spirit)이다. 여기에서는 성령의 체험과 은사가 거의 모든 것이 되며 성령 단일신론자들에게서는 자신에게 임하는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인지 검증하려는 노력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최근에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영적 갱신운동이 많이 일어나며, 신학에서도 성령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들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것을 전통주의나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이전의 기독교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그저 강렬한 종교적 체험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영을 분별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4-5. 삼위일체론의 의미의 재진술.
▶전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를 표현하고,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가 사라질 때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론의 표면을 보기보다 그 심층의 문법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서론
하나님을 기술하는 언어는 부적합성과 상대성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속성은 불완전함이고 인간의 도구인 언어 역시 그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언어적 표현을 항상 고찰하여, 새로운 우리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노력의 산물도 그런 도전에서 벗어날 특권을 가지지 않는다.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들도 그러하다. 고대 교회의 권위든지, 존경스런 초대 교부의 정의든지 하는 모든 것은 인간성의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리는 그 표현을 비판할 수 있고, 재평가할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언어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성서적 전통 안에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서는 그런 표현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영적인 삶이나 신학적 감수성의 풍부함을 위해 이전까지 별로 사용되지 않은 하나님의 표상(imagery)을 발굴하여 삼위일체의 보다 깊은 의미를 제시해야만 한다.
-새로운 삼위일체의 이해: 여성신학의 도전, 남성 위주의 하나님 표상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현재 교회는 어떠한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 중 의미 있는 것, 세 가지가 있다.
①우리의 신학적 언어를 비인격적인 은유들에 제한시키는 방법
policeman을 police라고 바꾸듯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
②성령을 여성으로 묘사하는 방법.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아들이라는 남성적 개념에 대비되는 성령의 여성화.
③남성적 표상과 여성적 표상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필수적이라는 의견.
의견 ①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는데, 우선 성경에 나온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묘사들을 모두 삭제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이런 의미 있는 은유들까지 배제하여 하나님을 어떤 분이 아니다. 어떤 것으로 묘사한다면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더 빈곤해질 것이다.
의견 ②,③은 타당한 해결책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성경은 우선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男, 마 6:6-9, Father in Heaven)와 어머니(女, 마 23:37, as a Hen gather her chicks)의 개념을 동시에 보여 준다. 성경이 가부장적 한계를 가진 현실에서 써졌지만 이런 풍성한 은유를 가진 것은 성경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 은유의 풍성함은 긍정되어야 할 것이고, 그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다른 표상들을 찾으려는 노력은 긍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대치, 파괴가 아닌 보완하는 것임을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이다.(여성학이 인류학으로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새로운 표현을 찾는 것과 더불어 기존에 우리가 가진 모든 표상들에서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를 넘어서서 복음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말할 때, 그것을 우리의 문화적이고 가족적인 역사에 의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증언 한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신실한 사랑의 역사에 의해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시도(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표상을 찾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론의 심층문법(depth grammar)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층문법은 “자유 가운데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 주며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렇듯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운데 이 세계를 지으셨고 이 세계와 관계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 세 개의 해석적 문장을 덧붙여 삼위일체론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본론-세 개의 해석적 문장
“①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영원 전부터 관계 가운데 있는 인격적 삶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②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심을 진술하는 것이다.
③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임을 말하는 것이다.”
①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영원 전부터 관계 가운데 있는 인격적 삶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마 16:16)’으로 묘사한다.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실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실재(Reality)이다. 그리고 그런 인격이시기에 살아 있는 관계 속으로 필연적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세계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비로소 생명을 얻고, 사랑하기 시작하시며, 인격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 이전의 존재 속에는 이미 이런 운동과, 생명과 인격적 관계, 사랑의 주고받음이 존재한다. 태초에 계신 삼위일체가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인격들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인격의 자유와 개별화가 강조되고, 개인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는 실존주의로 대표되는 근대 철학적 인격의 이해의 문제점과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세 존재 양식’이라고 말하고, 라흐너(Rahner)는 ‘셋의 구분되는 존재방식’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격이란 개념을 포기하기보다는 근대적 의미의 인격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것이다. 인격적 실존을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고립된 자아의식으로 보는 근대적 인격 이해의 문제를 지적하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이 고립되고 고립된 자아들(selves)이 아닌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있는 자신의 정체성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인격은 타자와 철저히 분리되는 ‘자기안에 갇힌 주체(self-enclosed subjects)’가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격’은 관계적인 실재(reality)로서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 공유된 의식(shared consciousness), 신실한 관계, 서로 주고받는 사랑 등으로 규정된다.
신약성경이 신실한 성부, 종이 된 성자,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구분되는 존재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신약성경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풍요하고 역동적인 삶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는 산술적인 하나(oneness)가 아니라 구분과 타자성(otherness)이 존재한다.
이런 타자성이 바로 인격적 관계의 전제이며 사랑의 사건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의 내적인 역동성 안에 타자성을 만들어 내며 그것을 포함하신다. 그리고 이런 관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삶은 서로 다른 피조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창조하심으로 외적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서 이런 사랑의 타자성을 잃어버리고, 자연세계를 정복하려 하고, 남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며, 타민족의 문화, 종족, 성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지배를 정당화하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로 보지 않고 군주론적(monarchical) 하나님 오해를 가진 것이다.
②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심을 진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삶은 사회적이다. 그것은 피조물들 가운데 포용적인 공동체를 건설하시는 원천이 되며 동시에 힘이 된다. 삼위일체의 신학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묘사하는 데 ‘심리학적 유비(psychological analogy)’와 ‘사회적 유비(social analogy)’를 사용해 왔다. 간단히 그 내용을 말하면 전자는 “기억과 이해와 의지”라는 인간의 내적 심리 현상에 근거한 유비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을 이해하는데 공동체의 경험을 가장 좋은 실마리로 간주하는 유비로,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대표적 표현이 있다. 서방교회는 전자를, 동방교회는 후자를 더 선호해 왔다.
두 유비 모두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밀리오리를 포함한 오늘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회적 유비에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유비는 하나님의 사회성(sociality)을 증거하여, 성경의 하나님이 공동체를 세우며 유지하시는 분이라 표현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고독 가운데 홀로 존재하시는 최고의 일자(monad)가 아니라 계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유대교의 계약적 율법주의, E.P. Sanders), 피조물과 함께 하시고 그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고전적인 삼위일체 신학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세 인격은 서로간의 깊은 관계성 안에서만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 'perichoresis'라는 용어가 표현하듯 세 인격은 서로 안에 거하고, 서로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환대한다.
다른 은유로 표현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사이의 사람의 춤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삶은 복음의 빛 아래서 삼위일체적 환대와 삼위일체적 사랑의 춤이라는 아름다운 은유로 묘사된다. 이것은 우리의 공동체적 삶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인데 우정의 경험, 서로 보살피는 가족의 관계, 그리고 자유롭고 동등한 인격 사이의 포용적인 공동체 등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이렇게 말한다. “인격들 사이의 교제로서 이해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평등한 형제, 자매의 사회를 위한 기초를 놓는다. 그렇게 될 때 대화와 합의는 세상과 교회 안에서 함께 사는 삶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은 이제 기독교 사회윤리의 바탕이 된다.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정의롭고 자유로운 가운데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하는 기독교의 희망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는 모든 전체주의를 거부하며, 공동의 복지를 위협하는 모든 우상주의적 개인주의를 또한 거부한다. 삼위일체에 따르면 ‘사랑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차별의 벽을 넘어서서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원천이 된다.
‘삼위일체의 심층문법이 올바로 이해될 때 삼위일체 신학은 하나님 및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구속된 삶에 대하여 심오하게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인 견해를 제공한다.’
③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임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 이야기는 하나님을 죄와 죽음을 이기는 공감하는 사랑의 힘(the power of compassionate love)으로 규정한다. 공감이란 함께 고통하는 것이다. 성서적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피조물과 함께, 또 피조물을 위하여 고난당한다. 무엇보다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계의 구원을 위한 고난과 소외와 죽음의 길을 가신다. 이런 하나님의 이해가 부적절하게나마 삼위일체론에는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서 영원히 사랑하시되, 자신이 내키는 대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곳까지 이르도록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시간성(temporality), 학대, 고난, 죽음의 깊은 곳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서로 자신을 내어 주며 끊임없이 사랑하는 살아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결정적으로 계시되며, 그것은 인간이 우정, 공감, 희생적 사랑, 포용적 공동체 등을 이루는 데에 그 원천과 힘이 된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서 및 신약성서의 증언과 일치하고,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고난 받으시는 사랑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는 병든 자를 향한 예수의 연민, 가난한 자를 향한 예수의 유대, 예수의 비유, 그리고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서 이야기하고 일치한다. 더 나아가 구원의 의미를 재규정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을 자유케 하고 새 공동체를 창조하는 가운데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라면,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이런 아가페적 삶의 방식을 나누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구원 가운데 모든 피조물과 연대하는 가운데 희망을 가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롬 8:18-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구원의 이해는 ‘삶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우리의 불충분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며, 정의와 자유를 위한 삶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미지근한 자세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공감하는 가운데 승리하는 지속적인 사랑의 역사라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읽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통해 창조 이전의 삼위일체를 이끌어내는 과거지향적 삼위일체론만을 이야기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의 완성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 삼위일체론을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최종적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이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케 되며 하나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all in all, 고전 15:28)’이 되셔서 찬양받을 때에만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교리적 개념 규정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칭송, 찬양, 경배로 마무리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4-6. 하나님의 속성
이제까지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과 관계없이 또는 복음의 하나님을 요약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별 관련 없이 다루어지고 논쟁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이 공감하며 고난당하는 가운데 승리하는 사랑이라는 고백과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 고난불가성(impassibity), 무감각성(apathy) 등과 같은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변적 진술의 두 가지를 종합하기 위하여 신학은 여러모로 노력해 왔다.
⋆어거스틴 : 하나님은 이세상의 고난에 대해 참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안셀름 :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연민이나 공감을 겸하지 않는다.
⋆칼빈 : 성경이 하나님의 공감(compassion)에 대하여 말할 때, 성경은 우리의 유한한 이 해를 감안하여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관한 복음서 증언 : 하나님의 불변성도 고난불가 성이라는 고대의 철 학적 전제를 신학적 논의로부터 벗겨 내지 못하였다.
칼빈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은 고통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조화해 보려고 애써 보았다.
신학자들은 예수의 인간성은 고통을 당하지만 예수의 신성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중세 이후의 로마 카톨릭 신학은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개의 분리된 묶음으로 나누어서 다루는 경향을 가졌다. : 첫째 속성은 하나님의 절대적 또는 비공유적 속성(absolute or in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불리는 가운데 단순성, 불변성, 영원성, 무소부재성, 자존성을 다루었고, 둘째 속성은 하나님의 상대적 또는 공유적 속성(relative or 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불리는 가운데 거룩, 사랑, 자비, 정의, 인내, 지혜 등을 다루었다.
첫째 묶음의 속성은 부정의 방법, 곧 유한한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둘째 묶음의 속성은 탁월성의 방법의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피조물에 있는 뛰어난 속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 안에 실현된 완전한 속성을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구분은 성서적 시각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뿐더러 하나님을 표상하고 윤리적 지침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적 이야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힘의 시각에서 무감각성, 불변성, 전능성과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을 재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학은 주어진 현실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파스칼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철학자와 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선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요3:16) 하나님의 무감각성을 논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행동하며 고난당하시고, 말씀하시며 들으시고,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불변성을 논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함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성을 폭군적인 힘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전능성, 불변성, 무감각성, 무감각성 등을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구체적이며 특정하게 하나님을 서술 했다기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서술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속성들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복음의 하나님, 곧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고난을 함께 나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고난이 무력함의 표시가 아니라 능력의 표시이며 그가 공감의 사랑을 통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스콜라 전통에 대항하여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론을 재규정하기 위하여 힘써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삼위일체와 관계없이 다루는 것을 거부하고, 삼위일체론을 그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적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려고 하였다. 삼위일체적인 맥락에서 살펴질 때, 하나님의 속성은 상호제한하며 규정하는 것으로 함께 다루어지며, 그 존재가 자유 가운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속성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은 곧 산술적(oneness)인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통일성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꾸준함은 죽은 불변성이 아니라 운동과 변화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성격과 목적의 역동적인 항상성(dynamic constancy)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힘은 무조건적인 전능성이 아니라 약한 가운데 지극히 강한 사랑의 주권성(sovereignty of love)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우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는 은혜롭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지성은 사소하게 ‘뭐든지 다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이다.
4-7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Ⅰ.서론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이중예정론, 곧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한 교리만큼 오해되고 왜곡되었으며 수많은 논쟁과 불안을 초래했던 교리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은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될 때 선택론은 하나님을 자의적인 폭군이자 인간 자유의 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좋은 소식이기보다는 (칼빈 자신의 말을 빌자면)무시무시한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는 놀라운 것이지만 무시무시하지는 않다. 성경에서 선택(election)이란 자유 가운데 이스라엘을 계약의 동반자로 택하셨고, 자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및 이방인과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음을 의미하며, 바로 이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의 하나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성서적 주제는 하나님을 향한 칭송(doxological)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칭송하려는 선택론의 의도는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하여 불분명해졌다.
① 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는가 (를 설명하려는 욕구) ▶ 어거스틴
②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가운데 섭리로써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의 논리적 귀결을 엄격하게 추적하기를 원하는 결심 ▶ 아퀴나스
③ 하나님의 자비가 선택된 자의 구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의가 버림받은 자의 저주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는 주장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러나 삼위일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선택론은 영원 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사시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타자를 그 공동체 안으로(창조, 화해, 구속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 포함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Ⅱ. 그러므로 삼위일체적인 선택론은 다음의 진술들을 포함한다.
1. 선택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은 사람들에 의하여 (신성(divinity)에 대하여) 마음대로 상상된 속성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상응하는 속성이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동반자로 택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택도 자유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과 상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이 되고자 한 하나님의 결정인데, 곧 자신을 향하여(ad intra) , 뿐만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ad extra) 관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되고자 결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성령의 선물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롬 5:20)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도를 드러내 주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기초이며 출발점이다.
2.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인데, 이 사랑을 우리는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나눈다.
하나님의 선택이 이러한 기초 위에 세워질 때 선택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기에 우리에게는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 있고,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선택의 주체가 자유 가운데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며(갈 5:13) 자유의 영을 받았기에(고후 3:17),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자유로운 섬김을 원하며, 하나님 및 타자와 함께 교제의 새로운 삶 속에 기쁨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4), 교회로 하여금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기에(마 28: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에 대하여 미리 한계를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3. 선택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에 있다.
선택은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을 지으셔서,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유 가운데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섬기며 이웃과 연대하도록 만드신다. 그러므로 선택론은 신론안에서 그 자리를 가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론과 기독교공동체의 소명론에서도 다루어져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함께 간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많은 전통적 이중예정론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두 개의 평행선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성서적 증언에서 볼 때, 선택과 버림은 균형을 이루며 평행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위하여 작용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분리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버림의 예정을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와 나란히 두어서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니며 믿음은 결코 순종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은혜와 심판, 선택과 버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전개되는 로마서 9~11장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롬 9:18)과,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을 심판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최종적인 것은 아님(롬 11:32)을 가르치고 있다.
칼빈은 선택의 교리를 성도들이 하나님 및 이웃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확신을 주는 교리로서 제시하기보다는 그저 호기심을 만족하려 하여 자만하거나 두려워하는 자세로 선택론을 간주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후기 칼빈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결정(decrees)에 관한 추상적 자리에 두지 아니하고 신앙의 삶의 맥락에 위치시킨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로 보고자 했음을 보여 준다.
칼 바르트의 선택론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선택된 분(the elected)인 동시에 버림받은 분(the sum of gospel)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과 버림받음을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계약의 동반자로 선택하시며, 어떠한 필요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 가운데 은혜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기로 결정하신다.
Ⅲ. 결론
선택론이 삼위일체의 맥락 가운데 재정립될 때 선택의 의미와 목표는 분명하게 되며, 선택론의 내용은 ①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을 버림받게 하는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소식이 아니다. ② 선택의 신비는 창세 전부터 타자와 함께 하나님 자신의 삶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영화로운 은혜를 찬양하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신비이다.
제5장 선한 창조
1. 기독교 신앙과 생태학적 위기
** 전체 내용에 대한 신학적 고찰 **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지으신 다음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다. 그러나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인간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 때문에 땅까지도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인간은 종신 토록 이러한 땅을 갈아엎고 땀이 흘러야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되었다. 4장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고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계속 죄를 짓는데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시고 마침내 노아 홍수 사건을 통해 인간은 물론 피조 된 모든 생물까지도 멸하신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서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이와 같이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과 자연은 필연적인 관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WHITE의 “생태파괴의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 는 지적은 성경과 어긋나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고 하신 뜻은 위와 같이 인간과 자연과의 필연적이며 아름다운 조화의 관계성을 말씀하심이지 현 세계의 추세처럼 인간의 물질 문명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말미암은 기계 문명과 공업화를 위해 산천을 파괴하고 지구의 숨구멍인 땅을 포장하여 땅은 숨도 쉴 수 없고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여 물 부족을 낳게 되었다. 이 때문에 땅속의 미생물과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땅 위의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태계에 치명적인 악 역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모두 기독교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성경을 왜곡한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연의 파괴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할 때 바라만 보고 관망만 하며 아무런 제재나 계몽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잘 다스려 보존해야 할 사명을 다 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해 기독교는 자기 성찰을 해야하며 앞으로의 해결을 위한 어떤 대책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Summery **
1> 생태학적 위기의 발생 원인의 출발점
만물의 창조의 교리가 기독교 신학에서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인간의 창조에 집중되어 있었다. 알랜루이스(alan Lewis)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중심 인물이 되는 구원 사역에 무대 보조자 정도로만 여겨졌다.
2> 생태학적 위기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 의식 고취
최근에 교회와 사회가 세계적인 생태학적 위기에 눈을 뜨기 시작함에 따라 창조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의 이동이 일어났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환경에 대한 손상은 이미 심각한 정도를 넘어 섰으며 어떤 경우에는 회복불가능의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보팔(Bhopal), 3마일 섬, 체르노빌(Chernobil) 등의 환경 오염 보고가 전해지고 있고 이러한 생태학적 위기의 범위와 중대함은 기독교 창조론을 재정립해야 할 과제가 얼마나 시급한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한 부분은 교회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첫 부분에 대한 강력하고 포괄적인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
3>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 여부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전통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근대 세계의 자연 환경에 대하여 착취적인 자세를 가지게 된 그 진짜 원천이 바로 기독교 전통과 성경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가르침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피조물을 “정복”하라는 위임을 받았다는 주장이야말로 서구 문명이 자연 환경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착취한 것에 대하여 종교적인 정당화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욕심에 따라 자연을 파괴하고서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한다는 미명 아래 정당화하였다. 그러므로 역사가 화이트(Lynn White)는 기독교가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하여 ‘거대한 죄의식의 짐’을 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화이트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 고교의 윤리교과서에 실리고 있어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하며 기독교에 치명적인 악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기독교의 신학적 성찰
기독교 신학 전통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순전히 방어적으로만 대응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여 주듯이 육신과 물리적 세계에 대한 부정적이고 정복적인 자세가 많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 성경 안에서도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여성신학자들은 남성이 여성 위에 올라서는 위계질서와 인간이 자연 위에 올라서는 위계질서의 연결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배-복종적인 자세는 이 땅을 ‘다스리라’(창1:26)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그 성서적 맥락에서 벗어나서 결국은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바뀌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환경을 착취한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공범인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하며 기독교 신학도 자기 비판을 해야 한다.
5> White의 잘못된 성서 해석에 대한 재해석
화이트의 주장은 성서적 가르침과 기독교의 고전적 창조론 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니라 풍자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은 창조, 화해,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을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로 기술하고 있다. 창세 때 하나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 ‘심히 좋았더라.(창1:31)로 말씀하신다. 창조이야기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릴 위임이 부여되었다고 말할 때 이는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로운 은혜와 계약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성경구절들 가운데 하나님이 민족들과 자연세계에 대하여 복수하는 가운데 무죄한 사람들을 살육하도록 요구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힘과 목적에 대한 중심적인 실마리를 발견하지 않는다. 예수의 선포는 예수의 삶과 죽음 가운데 시행된 하나님의 주권을 지배와 종속으로 보는 모든 견해를 뒤집어 놓는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성서적인 선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창조에 대하여 존중과 사랑으로 돌봄을 펼치라는 요구이다. 이는 이기적인 자기 만족보다는 현명한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라는 부름이며 착취가 아니라 피조물 전체의 복지를 위한 지도력을 행사하라는 부름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증언의 본래의 뜻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어떠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보호하도록 위임받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귀히 보시며 모든 것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며 인간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는 성서적 진술 때문이다. (시19:1) 그렇다면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이 기독교 창조론 에 있어서 그저 보조적인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구속의 전과정에 신비하게 함께 얽혀 있으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 가운데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은 고난과 희망 가운데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의 조건 안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소외시키며 괴롭히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자유케 될 날을 기다리며 신음하듯이 자연세계도 역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자연세계를 구속의 약속과 희망 가운데 포함시키는데 이는 홍수 후에 노아에게 주어진 무지개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창9장)에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 안에는 미래의 구속에 대한 여러 비전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변화되고 부활한 몸(고전15장)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이 조화와 기쁨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갈 참 평화의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6> 결 론
성서적 증언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연세계의 피조물들과 함께 동료 피조물로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정복의 명령을 빙자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자연을 착취하는 일을 더 이상 합리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연세계에 대한 거만하고 착취적인 삶의 자세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비판자들의 비판 안에는 물론 왜곡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기독교 선포와 실천에 있어서 새로운 생태학적 의식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그저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THE END -
제 5장 2절. 창조론의 주제들
기독교창조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비추어서 전개되어야 하며, 밀접하게 연관
된 다른 주제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1.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a) 하나님을 창조자로 부르고 세계의 모든 것을 피조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otherness), 초월성, 주권을 긍정함을 뜻하는 것이다. 고전적 기독교 창조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다. 여기서 ‘무’란 세계 창조의 재료가 되는 어떤 원시적 물질을 뜻하지 않으며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됨을 뜻한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b) 하나님을 창조자로 신앙 고백하는 것은 자유롭고 초월하는 하나님이 관대하며 타자를 환대하는(generous and welcoming)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강제에 의하여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며, 선물인 동시에 혜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격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이 타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이 다른 존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교제 가운데 거하도록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c)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신의 본성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창조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창조는 ‘필연적일’ 수 있다. 창조는 그 본성이 사랑인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하나님은 이미 창조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내놓으며 타자를 긍정하고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사랑(the self-communication, other-affirming, community-forming love)을 드러내 보이시는데,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실재를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희생적 죽음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어 나타난다.
d)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라고 불려 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divine kenosis)이라는 은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하나님의 아들(빌2:5-6)에게만 주로 사용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행위도 이미 하나님의 자기 비움, 자기 겸손(self-humiliation),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이다. 왜냐하면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생명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독립된 실존을 가지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절
정에 다다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kenosis)은 세계의 창조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2. 창조론의 두 번째 주제는 세계 전체와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저한 의존이란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우리가 피조물임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유한하며, 우연적이며(contingent), 철저히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a)‘비존재의 충격’(the shock of nonbeing) - 철저한 우연성(contingency)의 깨달음과 우리가 생명의 수혜자(recipients)임에 대한 자각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에 의하여 비존재의 충격으로 불려져 왔다. 우리는 창조자의 기쁘신 뜻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피조물로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실존은 언제나 위태로움 가운데 있게 되고 삶의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의 피조물됨을 고백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시들었다가 사라져버리는 들의 풀(사40:6)과 같이, 우리는 비존재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다. 프리드리히 쉴라이에르마허는 이것을 ‘절대적’ 의존‘(absolute dependence)의 보편적 감정이라고 하였으며,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우리의 ’피조물 감정‘(creature feeling) 이라고 불렀다.
b)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고 있음에 대한 자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만 얻는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창조되며 또한 구원받는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리고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루터가 “우리는 모두 거지이다.” 칼빈이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세가지 신앙-미래의 삶에 대한 의존으로서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현재의 삶의 의존으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창조와 보존에 대한 의존으로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결합한 것 모두 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다.
c)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의존은 올바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은 모든 우상에 대한 노예적 의존으로부터의 철저한 해방을 뜻한다. 창조자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공동체를 지어가기를 원하시는 은혜와 해방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3. 창조론의 세 번째 주제는 그 우연성, 유한성, 한계성 가운데서도 창조는 선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은 그 모든 한계와 유한성 가운데서도 선하다. 창조의 선함을 강조하는 성서적 진술은 때로는 너무 쉽게 삶의 파편성(brokenness)과 악의 실재를 모호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바뀔 수도 있다. 창조의 신앙고백이 이 세계의 타락된 현실을 기초로 한 다음의 신앙고백과 분리되어 살펴질 때 변질된다: 죄, 화해의 역사,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파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희망.
창조가 선하다는 주장의 의미
1) 창조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형이상학적 이원론(meta physical dualism)을 배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일부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2) 창조가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세계가 우리 자신의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과학기술적 삶의 방식 뒤에 숨어 있는 거만한 전제는 기독교 창조론을 인간중심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3)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세계가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조가 낙관적인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의 유한성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칼 바르트가 표현했듯이 선한 창조에는 ‘그늘진 구석(shadow side)’이 있다.
4) 창조가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하는 이 세계가 ‘타락한’ 세계이며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질병과 파멸과 압제의 권세는 창조자의 의도의 일부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영역이나 집단적인 영역에서 표현되는 악의 세력의 원인(the cause)이 아니라 그 반대자(the opponent)이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창조의 선함을 고백하는 것은 처음에 창조된 이 세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계속되는 하나님의 값비싼 사랑 가운데서 이 세계가 더 가치를 지니는 것을 또한 지칭하는 것이다.
4. 창조론의 네 번째 주제는 모든 피조물의 공존(coexistence)과 상호의존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루터의 주장처럼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됨(creaturehood)이란 고독한 실존이기보다는 철저한 공존이며 상호의존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지어지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이 함께 지어진 것은 창조이야기의 놓칠 수 없는 주제이다.
칼 바르트는 공존을 인간성의 기본적 형식(basic form)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및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또 우리의 본질적 관계성, 곧 공존 안에 있는 실존이 인간의 삶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동물뿐 아니라 흙, 태양, 물 등이 만들어 내는 모든 형태의 삶과 함께 존재한다. 서로가 철저하게 상호의존하고 있는 공동체 안의 실존을 나타내는 이 세계의 구조는 삼위일체의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반사하는 것이다.
5. 창조론의 다섯 번째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창조된 세계는 역동적인 가운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는 계속되며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창조주가 의도하는 목적과 세계가 가진 목적은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추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진술이지 경험의 관찰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확증하신 그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의 결정적 실마리로 삼는다면, 우리는 창조가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말씀을 향하여 창조하신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말씀이며,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창조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가 그곳을 지향하는 목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합하여 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안에 결정적으로 계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나라라고 불리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궁극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자유와 평화와 잔치의 시대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창세기의 첫번째 창조이야기에서 창조자가 안식일의 휴식과 기쁨 안에서 그 목표에 다다르듯이, 새로운 창조의 역사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및 다른 피조물과 함께 완전하고 충만하게 누릴 그 축하와 잔치 안에서 그 목표를 발견한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에 따르면, 새 창조의 해방의 목표는 사슬로부터의 ‘외적인’ 자유인 동시에 하나님 및 다른 피조물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함께 누릴 삶의 평화와 기쁨을 향한 ‘내적인’ 자유이다.
우리가 세계의 창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행위의 맥락 안에서 살필 때, 우리는 창조를 과거에 끝난 그 무엇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아직도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는 것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가 열려져 있는 그 미래는 모든 창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오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의 마지막 영광에 함께 참여함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이것을 중세의 신학적 원리는 바꾸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거나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준비시킨다.”
5-3.창조의 모형들(models)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주요한 가능성들은 크게 유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등으로 불려져 있다. 여기서 유신론이란 하나님이 이 세계의 초월적창조자라는 신앙을 뜻하고, 범신론이란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양식의 하나라는 신앙을 뜻하며, 범재신론이란 세계와 하나님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입장 중 어느 것도 삼위일체적 하나님과 창조 이해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창조이해에 있어서 다른 모형과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어떤 유비, 은유, 모형이라도 하나님에 대해 사용 될 때는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염두 해야 한다. 샐리 맥훼그의 말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은유적이다. 왜냐하면 은유는 ‘이다’와 ‘아니다’를 동시에 말하기 때문이다.
조지헨드리는 기독교신학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를 말할 때 쓰이는 모형과 유비를 정리해 주고 있다. 각 모형과 유비는 어느 정도 성서적인 지지를 받으며, 동시에 인간의 공통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1. 첫 번째 유비는 출산(generation)이다. 인간이 생명을 낳는 것을 우리는 보통 출산이라고 한다. 성경은 출산에 대한 은유 등을 제한하여 사용한다. 예언자들과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나타 낼 때, 이 은유는 성적인 출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과 부모의 돌봄을 지시하고 있다.
2. 두 번째 유비는 건축 또는 조성(fabrication or formation)이다. 건축의 유비는 하나님을 건축자로 묘사할 때(시127:1), 조성의 유비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나(렘 18,롬 9:21)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묘사 할 때(창2:7) 나타난다. 이 유비들은 창조자 하나님의 의도성과 목적성을 잘 표현하는 반면에 무엇인가 주어진 물질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무로부터’ 창조의 독특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에 비인격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3. 세 번째 유비는 유출(emanation)인데, 이것은 샘에서 물이 나오거나 태양과 불에서 빛과 열이 나온다는 의미에 ‘나오는 것’을 뜻한다. 이 유비에서 창조는 하나님의 충만함의 분출(overflowing)이며, 하나님의 풍성함과 풍요함에 그 원천을 가지고 있으나 반면에 창조가 비인격적 과정인 동시에 자발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4. 네 번째 유비는 정신/몸(mind/body)의 관계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기술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정신/몸의 유비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친밀성과 상호성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그러난 이 유비는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은혜롭고 자유로우며 등등하지 않은 관계를 잘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
5. 마지막으로 예술적 표현(artistic expression), 예술적 활동(play)의 유비이다. 우리는 창조를 흔히 하나님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경험하는 작업 또는 일은 반복적이고 유쾌하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창조를 하나님의 ‘ 예술적 활동’ 곧 궁극적 원천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있는 예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지어진다. 말씀으로 세계가 창조되고(창1장), 하나님의 영이 운행함으로 피조물이 생명을 얻게 된다(시 104:30).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의 행위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일어나며, 활동과 예술적 표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적 활동의 유비의 특성은 첫째, 참된 예술적 활동은 언제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이다.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적 표현이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 모든 예술적 행위에는 자유로운 제한이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그 매체의 특성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제한
이 요청된다. 셋째, 예술가가 자신을 표현 할 때, 그들은 자신의 형상이 찍혀진 것을 만들지만, 동시에 자신과는 참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예술품은 종종 그 자신의 삶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일단 만들어지면 작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술가는 재료를 필요로 하지만, 예술적 행위의 결과는 거기에 사용된 재료와 다른 질서를 가지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저 주어진 재료들을 재결합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다.’
창조를 예술적 표현으로 간주하는 모형은 삼위일체적 신학에는 특히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멀리 있는 창조자로 기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부적절하다. 반면에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는 가운데 범재신론적으로 보면서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나 하나님에 대한 세계의 타자성이나 자유를 적절히 묘사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적 표현의 모형은 매력적인데 그것은 이 모양이 예술가와 예술적 작품 사이의 창의적 자유의 요소와 친밀성의 요소를 결합해 주기 때문이다.
창조론에서 예술적 활동의 은유를 깊이 다루지 못했던 것은 현대세계에 나타나는 신학과 예술 사이의 불행한 괴리 때문이고 몰트만이 지적했듯이, 안식일(휴식)의 의미를 외면했기 때문 일수도 있다. 창조의 완성과 면류관으로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예술적 행위의 차원을 상기시켜 주며, 또한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해준다.
5-4. 창조론과 현대 과학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현대 과학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가운데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는 과학과 신학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개의 ‘언어 경기’(Language game:비트겐슈타인)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바르트는 이에 대해 진공 청소기의 소리를 피아노의 소리와 비교하려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를 어느 하나의 언어체계로 환원시키려 하기보다는 각각의 독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언어체계 중 오직 하나의 언어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며 거만한 주장일 뿐이다.
둘째, 하지만 우리는 과학과 신학의 두 개의 언어가 전적으로 다르거나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자연 과학을 설명하는 무오한 교과서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편에서 과학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고 역으로, 진화론과 명시적인 무신론을 결합하여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신앙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갈릴레오, 윌버포스와 헉슬리 사이의 논쟁, 스콥스 재판, 그리고 최근의 ‘창조 과학’ 운동 등이 양편에서 과학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얼마나 크고 많은 혼동과 다툼이 있어 왔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진화론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가지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과학으로 인하여 우리가 가졌던 이전의 생각들을 아무리 수정할지라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중요한 주장은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환원주의와 신학에 있어서의 제국주의는 모두 피해져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안에는 다양한 수준이 있는데, 각 수준은 그 자신의 용어 가운데서 이해될 수 있으며 동시에 보다 상위차원의 새로운 이해에 열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의 진실성을 입증하거나 반증한다는 주장을 편치지 않고도 과학적 세계 이해와 신학적 세계 이해 사이에 서로 일치되는 면을 연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 과학과 신앙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많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의 점증하는 합의점이 되어 가고 있다. 스탠리 재키(Stanley L. Jaki)는 현대 과학이 관찰된 것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것들이 본질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이 우연적 존재이며, 우주는 하나의 연관된 전체라는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현대 과학을 가능케 만든 이러한 가정들이 기독교 창조론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반대면에서 살펴본다면, 기독교 신앙과 신학 역시 현대 생물학적 연과와 과학적 우주론으로부터 배워야 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양자 사이의 대화에 진보를 가져다 주는 것들은 양편이 각자 개방성을 가지는 것이다: 과학은 자신의 연구 안에 있는 신비의 차원에 대해 개방성을 가져야 하며, 신앙과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라는 편협한 이론틀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의도적 행위에 대한 비전에 대해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신학적 인간학은 새로운 하나님 중심주의에 의하여 인도를 받아야 하며, 과거에 집착하는 창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창조를 포괄하는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창조론의 인도를 또한 받아야 한다.
우리가 오늘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과학 사이의 케케묵은 싸움을 접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자연신학(a natural theology)이 아닌 자연의 신학(a theology of nature)이 중요함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과학자들과 그들의 연구 결과와 신학자들과 그들의 신앙의 비전 사이의 전적인 분리나 상호무관심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서로가 함께 토의하고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의하여 상호 연관되도록 창조된 세계의 복합적이며 연약한 아름다움(complex and fragile beauty)을 더욱 새롭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으로 요구된다.
사족 : 진화론만을 공식적으로 교육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는 비록 그것이 사소하고 케케묵은 것일지라도 진화론만이 너무나 당연한 진실인양 세뇌 당했고 여전히 가능성과 열려진 사고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닫혀진 교육 안에서 세뇌 되어가는 차세대를 생각해 볼 때 다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며, 이를 위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 하는 우리나라 창조과학교육을 외치며 노력하는 분들께 잠시나마 감사의 박수를 쳐봅니다.
* 참조 *
윌버포스와 헉슬리 사이의 논쟁 - 윌버포스 대학교에서 진화론자 헉슬리와 옥스퍼드의 감독인 창조론자 윌버포스 주교 사이의 공개토론
스콥스재판 - 20세기 초 미국 중등교육의 급속한 팽창에 힘입어 진화론은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에 보급되며 이에 위협을 느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반진화론 운동을 일으킨다. 세 번이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던 William Jennings Bryan이 이 운동을 이끌며 급기야 테네시(1925), 미시시피(1926), 아컨소(1928)주에서 진화론교육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반진화론법이 통과된다. 테네시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직후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이후 ACLU로 약칭)은 이 법의 실효성을 시험할 것을 선언하고 나서고 이에 협조하기로 한 John Thomas Scopes라는 교사가 진화론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테네시주가 즉각 스콥스를 고발하고 ACLU가 맞서 변호하는 희대의 재판이 1925년 7월 데이튼이라는 소도시에서 열리고 결국 스콥스측이 100달러 벌금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이 논쟁은 일단락된다.
6-1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신비
1) 문제성의 제기
우리는 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규정하였으며 신학적인 과제의 한 측면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비추어서 하나님, 우리자신, 세계를 이해할 때 온전성(wholeness)과 상호 연관성(coherence)을 추구하는 것임을 지적 하였다. 하지만 상호 연관성을 향한 우리의 추구는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을 가장하여 우리의 신앙과 삶의 실재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리는 이념 체계를 건설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지식이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처해 있는 상황이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든 신학은 ‘파편적인 생각(broken thought)’이다(신학의 파편성- 바르트). 세계 안에서의 악의 실재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긍정하려할 때 보다 더 강하게 우리에게 신학의 파편성을 깨닫게 하는 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의 섭리와 그 정의
그리스도인은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적 돌보심을 믿고 고백한다. 창조자인 하나님은 피조물을 붙들고, 축복하는 가운데 그 목표로 인도하신다. 또한 성서의 고백에서도 계속적인 돌보심이 나타난다.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는 섭리에 대한 정의가 나타나는데, 섭리란 “전능하시고 언제나 함께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천지와 모든 피조물들을 붙드시며, 잎과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과 식수, 건강과 병, 풍부와 가난 등의 모든 것들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도록 하는 가운데 이 세계를 다스린다.”
3) 악의 실재와 질문들: 신정론(theodicy)
하나님의 섭리적 행사는 악의 실재와 그 세력에 의하여 가장 심각하게 검증되어 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한 창조를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악은 환상도 아니고 단지 겉모양만도 아니며 세계에서 점차로 사라져 가는 힘도 아니다. 악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는 모든 이론은 20세기의 파괴적인 전쟁, 인종의 살해,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등을 경험하면서 그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악의 실재가 설명으로써 사라지지 아니하고 신문지상이나 암(cancer)병동에서, ‘현대 역사의 잔인한 사실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부딪혀 올 때, 우리는 신학의 신정론(theodicy)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무시무시한 악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계속해서 긍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한 분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많은 악이 존재하는가?
4) 악의 두 가지의 형태 및 문제제기
악은 두 가지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ⅰ) ‘자연적인 악(natural evil)’은 질병, 사고 지진, 화재, 홍수 등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부상과 고난을 지칭한다. 즉 인간이 자연의 손에 의하여 경험하게 되는 고난이나 악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의 경험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는 상처가능성(vulnerability), 유한성, 죽음의 필연성(mortality)등의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진 자연 질서의 일부이며, ‘다른 피조물들과 같은 자연 질서의 법칙 아래에 놓여 있다.’라는 사고의 부재인 것이다. 유한의 피조물이라는 것은 고통, 질병, 슬픔, 실패, 무능력 등의 가능성을 포함하며, 노년과 궁극적 죽음의 확실성을 또한 포함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성과 악을 주의 깊게 구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자연 질서 안에서 엄청난 형태의 고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고난은 어리석으며 너무 지나칠 뿐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 줄, 선에 비교 한다고 할지라도 보상되지 않는 것이다.(ex,어린아이의 죽음) 더 나아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비극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 과정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다.(ex, 새끼 거북이, 자연속의 여러 가지 악의 충격적인 잔인함, 무시무시한 낭비, 명백한 무질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돌봄에 대해서 회의하게 만든다.)
(ⅱ) ‘도덕적인 악(moral evil)'이란 인간의 죄나 잘못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세계에 저질러지는 고난이나 악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유럽의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대학살한 것을 들을 수 가 있으며 그 나치 주의자들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백만의 무죄한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인종살해의 극치에 달하는 이 행위 뒤에 숨은 유일한 동기는 오직 증오였으며, 이것은 이 사건을 철저히 악마적인 성격의 사건으로 만든다. 무죄하게 고난을 당하는 경험 안에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신학적 차원이 있다. “ 고난은 어느 순간 동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부재 또는 죽음의 경험은 엄청난 악의 경험과 밀접히 연관 되어 있다.
엄청남(tremendum)이 드러내는 것은 ‘악은 실제로 존재하고 막강한 것이며, 그것은 저항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무게 아래서 짓눌리는 사람들은 조만간에 시편 기자의 질문처럼(“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시편 13:1) 아니면 예수님의 처절한 질문처럼(“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15:34) 던져져야만 한다.’
2. 신학적 전통에서의 섭리와 악
고전적 섭리론에 기초한 신학자들은 섭리를 하나님이 세계를 지탱하며, 모든 사건을 다스리고, 그 최종적 목표를 향해 역사의 방향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들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인 악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어거스틴과 칼빈의 섭리론을 통해 살펴보자.
i)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개인과 세계 역사 안에 나타난다. 그는 「고백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과 교회를 향한 발길로 인도하셨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목적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과 행위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고백한다. 또「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술하면서 여러 악한 사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님의 목적인 선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ii) 칼빈의 섭리론은 세상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세밀하고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훨씬 더 강하게 긍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운명론과는 동일시하지 않았다. 칼빈은 모든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1원인으로 간주해야하지만, 제2원인에도 그에 걸맞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위험을 미리 내다보고 분별력을 사용하도록 이성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다른 고전적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돌리는 입장과, 피조물의 행위에 자율성을 허락함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진리로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 가지의 유익을 주고 있다.
첫째 모든 역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겸손히 받아들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 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우리가 번성할 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게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는 불안과 염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 섭리론의 틀 안에서는, “신정론”의 질문에 대하여 적어도 세 가지로 답변할 수 있다.
1. 신정론은 하나님의 측량불가능성(incomprehensibility)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그렇게 많은 악이 있는지? 왜 악은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인내한다(욥38-41장). 악에 대한 이러한 응답은 상당한 정도의 성서적 지지를 받고 있다. 하나님의 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으며, 때로 엄청난 고난을 대처하는 데에 있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침묵이 훨씬 더 적절한 응답이라는 것에 동의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응답에 있어서 문제점은 이러한 응답이 모든 질문을 다 억누르려 하며 모든 고난에 대하여 그저 무조건 순응하는 자세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반면에 욥기에서 우리는 욥이 반항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고난과 악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정의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 신정론은 역경의 경험을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judgment)으로 해석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징계(punishment)로 해석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그들이 받아야 할 몫의 심판이나, 연단을 받도록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심판이나 연단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해 줄 성경의 부분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비유와, 실로암의 탑이 무너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주장하는 신정론은 너무도 쉽게 피해자를 정죄하며, 가해자를 잊어버리는 것에 있어서 특히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와 인간의 무분별하고 죄악 적인 행동의 댓가로 고난을 자초하지만, 심판의 신정론은 죄와 고난의 관계를 너무도 단순화시켜서 파악한다. 자연적인 악 또는 인간의 불의로 인하여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난의 짐에 죄의식이 짐을 더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신정론은 이 지상의 고난을 하나님의 교육(divine pedagogy)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신정론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려놓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고난을 영적인 성장의 기회로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바울의 말이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택하는 고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난과 변화되어야만 하는 환경에서 비롯된 고난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를 믿는 신앙은 죄없이 당하는 고난을 이기게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할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윤리적 순응주의나 이생에 대한 경멸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또한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배워야 한다(히5:8). 하지만 모든 고난이 다 좋은 것이라는 일반적인 진리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또 피해자들의 외침이 이러한 방식으로 억압되어서는 안 되며, 압제받는 자의 고난을 정당화하는 신정론은 현실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가운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결론 : 전통적인 신정론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많은 신앙인들을 위로하였고 지탱해 주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논하고 악의 실재에 응답하는 데에 있어서 복음서 이야기보다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20세기 후반에 펼쳐지는 모든 신정론은 ‘현대 역사의 잔인한 사실들’에 의하여 검증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서적 증언에 의하여 또한 검증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하나님 이해를 재정립하게 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통적인 섭리론에서 종종 당연시되어온 생각들, 곧 하나님은 전능하며 모든 사건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divine omnipotence and omnicausality)는 생각을 다시 살펴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6-3.섭리와 악의 문제에 대한 재고찰
20세기에 들어서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피조물의 자유를 모두 존중하는 방향으로 섭리론을 재정립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1.바르트의 전통적 섭리론 이해
칼바르트 역시 전통적 섭리론이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상정함으로써 비극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행위는 칼빈주의가 가르치고 있듯이’주권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 신학이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섭리론에 적용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전통적 섭리론은 ‘사악한 하나님’(sinister deity)의 선포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모든 문제의 철저한 재고찰’을 요청한다. 기독교 섭리론은 첫째,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에 대한 추상적인 주장들로부터 연역되는 논리적 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기독교 섭리론은 참으로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의 빛에서 정립되어야 하는데, 우리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시는 분이며, 공동체 안에서 사시는 분이며,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선택하신 분이다.
2.바르트의 섭리론
바르트는 전통적 신학의 범주들을 사용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세가지로 규정하는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conservation), 동행(concurus), 통치(gubernat ion)를 포함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하심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각 측면을 재규정한다.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자신의 신실성과 은혜를 드러내신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2.1 하나님의 보존
이것은 전능성을 임의대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약의 동반자로 선택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표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존의 행위는 섬기는 행위이며, 피조물에 대한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이고, 피조물이 은혜의 계약 가운데 참여하도록 능력을 주며 지탱해 준다. 여기서 하나님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비인격적이거나 기계적인 ‘제1원인’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로 계시하신 그분이다.
2.2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의 활력과 자유를 행사하도록 허락하는 가운데 피조물과 동행하신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폭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자유로운 행위를 존중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유한한 자율(finite autonomy)을 존중하는 가운데 다스리며 결국 또 다스리는데(rule and overrule),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삶에 일치하며 걸맞는 방법’이다.
2.3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은 피조물을 그 목표로 인도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통치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써 통치하신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유의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하여 다스린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시며 창조와 구속 가운데 은혜로운 주님이었듯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서도 역시 은혜로운 주님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지배와 통제의 논리’에 기초한 섭리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선입견을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춘다.
3. 악
바르트에 있어서 악이란 ‘무’(nothingness)의 이상스런 세력인데, ‘무’란 창조의 행위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생겨난 것도 아니며 하나님에 필적하는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무의 세력은 엄청나며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무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다.
“무의 세력은 하나님과 관계성 속에서는 가능한 한 가장 낮게 평가되어야 하며, 우리와의 관계성 속에서는 가능한 한 가장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의 ‘무’의 교리가 형이상항적 사변에 빠진 것이라고 간주하며 비판한다. 그들에 의하면 바르트는 때로 악의 실재와 하나님에 의한 악의 정복을 초월적인 갈등으로 묘사하는 듯하기에, 악에 얽매여 있는 절망적인 노예로서의 인간의 모습만을 가지고 된다는 것이다. 만약 악이 오직 하나님만이 정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간 고난의 원천들을 파헤치고 그것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르트에 있어서,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활일지라도 신자들로 하여금 악과 고난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힘을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할 것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에 대한 비판을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악에 대한 투쟁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밝혀 주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 섭리론과 악의 고난의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에서 인내와 저항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
제6장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신비
4. 최근의 신정론
칼 바르트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이 전통적 섭리론과 악의 이해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에 동의하면서 섭리론과 신정론을 재정립하는 과제를 향하여 여러 가지 다른 제안들을 내놓았다. 최근의 신정론과 그에 상응하는 섭리론을 살펴볼 때, 그 윤곽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저항적 신정론(Protest theodicy)
이 입장은 존 로스(John Roth)가 붙인 이름이며 리챠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 아더 코헨 (Arthur Cohen)등이 대표자로 여겨질 수 있다. 이 신정론은 성경을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전적인 선함을 문제 삼는 경향을 가진다. 역사 안에는 너무도 많은 비극, 불의, 살상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하나님에 대해 정직해야 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너무도 식상한 표현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야곱의 전승 안에서, "주여, 언제까지니이까?"를 외쳤던 시편 기자의 전승 안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한 욥의 전승 안에서, 십자가에서 버림 받는 외침을 외쳤던 예수의 전승 안에서 보이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항하여 저항해야 하며, 하나님이 비록 계약의 약속을 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에게 그러한 약속들을 상기시켜야 한다. 신앙이 직면하는 그 실재는 우리의 신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함으로 하나님의 편이 되도록'요구하고 있다.
이 저항적 신정론은 옛 신앙인들이라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을 질문을 던지는 정직성을 가지고 있고, 비록 하나님이 더 이상 신실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신실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저항적 신정론을 통해 저항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응답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2. 과정적 신정론(Process theodicy)
과정 신정론의 대표자로는 존 콥(John Cobb), 데이빗 그리핀(David Griffin), 마조리 수호키(Marjorie Suchocki)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과정형이상학의 시각으로부터 악의 문제를 접근한다.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선함에 대해 타협하기를 거부하면서, 문제의 해결책이 하나님의 힘을 철저히 제한하는 곳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정 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힘은 본질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 하나님의 힘은 강제적이기보다는 설득적이다. 설득은 타자의 자유를 범하지 않으며 타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완고한 물체를 잘 설득하는 가운데 창조한다. 이 세계는 다양한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존재는 자기 자신의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힘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렇게 가진 적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다 대학살 예방, 고속도로의 차가 아이를 치어 죽이는 것, 인간의 몸 안에 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하나님도 간접적으로 악에 대해 책임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커다란 선의 가능성 뿐 아니라 거대한 악의 가능성도 열어 두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선을 의도하시며, 아름다움과 비극이 함께 얽혀 있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의 고난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과정적 신정론은 현대 신정론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며 일관성있는 신정론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과정적 신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형이상학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무로부터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으며, 고난과 악에 대해 종말에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에 대한 성경적 희망을 강하게 소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과정적 신정론은 성경적 증언으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신정론이기도 하다.
3. 인격 형성의 신정론(Person-making theodicy)
이 신정론은 현대 신정론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신정론으로 존 힉(Jone Hick)이 대표적이다. 힉은 악이 죄의 결과로 여겨지는 어거스틴 유형의 신정론과 반면에, 악의 가능성과 경험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자유롭고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가도록 돕는 조건이라는 이레네우스 유형의 신정론을 구분한다.
인간의 삶에 부여된 자유와 성장의 잠재력은 물론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을 분별하는 참된 선택과 힘든 경험을 통하여 배워 나가는 가능성 없이 참된 인격이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힉에 따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꼭두각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을 향해 자라가는 가운데 자유롭게 성장의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힉은 과정신학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힘을 제한시켜서 사랑으로만 역사하도록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이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세계들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인간이 사랑 가운데 하나님이 의도한 삶의 충만함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힉의 주장은 그가 전개하는 신정론이 지극히 사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격 형성의 신정론이 사회적-윤리적 차원을 완전히 결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역에 있어서 약점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고난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에는 강조점이 두어져 있으나, 없어질 수 있고 없어져야 할 고난에 대해 저항하는 것에는 별로 강조점이 두어져 있지 않다. 물론 성경 안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고난을 통하여 배우고, 자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더 나아가서 교회공동체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개인들과 단체들이 가장 어려운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였음을 힘있게 증거해왔다.
그러나,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에, 그것이 영적인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되는 사건이라는 설명을 포함한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난과 악의 사건들이 있음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인격형성의 신정론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엄청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신정론임을 알 수 있게 된다.
4. 해방의 신정론(Liberation theodicy)
해방신학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신정론의 문제에 부딪혀 왔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의 고난의 현실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데, 이 사실은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해방하는 가운데 세계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해방신학의 주장에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콘(James Cone)은 이러한 신정론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그는 신정론의 문제에 대해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이나 하나님의 선함 가운데 하나를 약화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는 성경 안에 악의 신비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과 응답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응답이 고난받는 종의 주제 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임을 발견한다. 하지만 콘은 이러한 전승을 고난 가운데 피동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에 인간이 용기있게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흑인의 종교적 전승은 그 초점을 악의 기원의 문제에 두지 않으며, 불의의 피해자들이 그 지배자들에게 굴복할 것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 전승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악에 대항한 투쟁을 보는 신앙의 전승이며,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의 약속을 보는 신앙의 전승이다. 하나님은 힘없는 자들에게 힘을 허락하셔서 자유를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투쟁하도록 만드시는데,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자유가 그들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다.
악에 직면하여 피동성을 강조한 전통적 신정론과 비교해 볼 때, 해방의 신정론의 중요한 진리는 명백해진다. 해방의 신정론이 일방적으로 너무 한쪽만을 강조하고 있다면, 전통적 신정론 역시 너무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 왔다.
제 6장 5.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고난 Ⅰ.서론 이 세계 가운데 악이 지속적으로 그 세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우리가 솔직히 인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책임적으로 말할 수 있을 까? 라는 질문을 가질 때 고난의 현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다루려는 기독교적 접근은 명백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고난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 1)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세계와 가지는 관계의 풍성함과 다양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각 피조물의 본성에 적합한 방법으로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함께 행하는 자(co-agent)와 함께 고난당하는 자(co-sufferer)로서 피조물들과 함께 거한다. 2)종속론과 양태론은 하나님이 갈등, 고난,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앙은 사랑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가 세계를 향해 다다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피조물 가운데 숨어있는 악의 파괴성은 하나님의 위세에 의하여 극복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운데 대가를 치루는 역사(costly history)에 의해서만 극복되는데, 이러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고난을 참으로 경험하면서 극복한다. 3)본회퍼(Bonhoeffer)는 인용구절에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무력함과 고난으로 인도한다.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신을 내어 주며 승리하는 사랑이 세계의 창조주로부터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 세계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4)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십자가의 사건과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이해사이의 관련을 강조하는데 십자가의 사건 가운데 일어나는 것은 오직 삼위일체적 용어로만 파악된다고 본다. 몰트만은 세계의 모든 고난은 성자의 수난과 성부의 슬픔과 성령의 위로 안에 다 감싸지는데 여기서 성령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 만물을 새롭게 됨을 위하여 기도하고 힘쓰도록 돕는다. 이에 대해 일부 비판자들은 몰트만이 하나님 안에서 고난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신정론을 일종의 이념체계(ideology)로 만든다고 하나 여기서 몰트만이 갖는 분명한 의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난에 대한 강조점을 하나님의 악에 대한 종말론적인 승리에 대한 희망과 결부시키면서 동시에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희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5)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실재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가 하나님을 맹목적인 전능자로 간주하는 이교적인 (pagan)견해를 가지기 보다는 예수의 사역과 십자가의 부활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의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통제의 논리'(logic of control)를 승리감에 도취된 채 강조하는 데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세계의 창조자와 구속자와 완성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논리‘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은 그저 무조건적인 전능이기보다는 고난당하며 자유케 하고 화해케 하는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섭리론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1. 창조자이자 섭리자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이 유지되고 고양되는 곳에서 역사할 뿐 아니라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그 성취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저항하고 심판하는 곳에서도 또한 역사한다. 1)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차적인 전투자이시다. 이 사실은 불의와 폭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출애굽 이야기, 율법의 선포, 그리고 예언자의 파송과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선포와 사역에서 묘사된다. 2)전통적 신학은 섭리에 대한 신앙을 일방적으로 인내에 연결시켰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을 하나님이 정해준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하였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론을 조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존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역사할 뿐 아니라 악에 대하여 우리가 인내하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저항함을 통하여 또한 역사한다. 그리스도인이 악을 악으로 저항하려고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악은 저항되어야 하는 것이다.(롬12:21) 2. 구속자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의 경험의 최고 상태나 최저 상태에서 모두 역사하는데, 피조물이 강하고 활동적일 때뿐 아니라 피조물이 약하고 피동적일 때에도 역시 역사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여 선을 이룬다’(롬8:28)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신실한 분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1)기독교 섭리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명의 보존과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 속에서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활동과 고난가운데에서 피조물과 함께 또한 밀접하게 동행하시므로 피조물이 홀로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럼에도 전통적 신학에서 하나님의 동행이 하나님의 함께 고난 받음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간과되어 왔던 것이다. 2)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과 함께 통곡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시139:8음부 깊은 곳에서도 함께 하시며, 마9:36예수는 갈 바 몰라 헤매이는 군중들을 보고 연민을 품는 분으로 또한 병든 자를 고쳐주었으며 죄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3)하나님이 피조물의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이며, 고난의 심연 가운데 예상치 못한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고난의 경험 가운데 공감하시는 하나님(the compassionate God)이 함께하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이다. 4)하나님이 희생자들과 함께 연대를 형성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인 위로가 아니라 삶을 새롭게 하는 긍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악의 처절한 현실 가운데 희생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은 심판인 동시에 은혜이다. 그것은 모든 무감각성과 비인간성을 향한 심판이며 고난당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은혜이다.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기독교 섭리론의 표지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을 제자로의 삶으로 부르는 부름의 적절한 표현이다. 3. 성화자(the sanctifier)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만물을 새롭게 하며 변혁하는 가운데 모든 곳에서 역사한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삶의 사건과 역사의 모든 사건 가운데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함께 죽음보다 강한 희생적 사랑의 능력으로 자유와 죄와 고난의 세계를 다스리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통치(gubernation)의 방식이다. 오직 성령의 은사인 사랑(고전 13장)만이 부숴진 세계를 변혁할 수 있고 이 세계에 치유와 새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질병과 파멸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싸워 이겨낼 수 있으며 또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움직이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확증된 새로운 삶의 약속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러한 사랑만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실망과 죽음에 대항하여 절망하지 않는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죽음, 분리, 절망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희망이 분출되?! ? 곳 어디에나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Ⅲ. 결론 섭리와 악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남는다. 우리의 성찰은 ‘악의 문제’에 대하여 이론적 해결을 위하여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신앙에 근거하여 섭리론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의 한 서론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성서적 증언이 악의 기원에 대하여 사변을 전개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 가운데 악의 세력에 저항하는 데에 훨씬 더 큰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지적인 것이기보다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참된 과제는 신앙의 전승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심으로부터 해석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다시한번 인간의 삶을 변혁하는 힘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여 선을 이룬다’(롬8:28)고백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고 고백하는 것은 상아탑의 신학자에 의하여 가장 잘 이해된다기보다는 참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가장 잘 이해된다. 악은 아직도 다! 정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안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악속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
7장-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
들어가는 말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에게도 신비(mystery)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문명화되어 있는 동시에 야만적이며,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동시에 살인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의 최고봉인 동시에 창조를 위협하는 위험스런 존재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다음의 세 가지 명제를 통하여 영광인 동시에 공포가 되는 인간 정체성의 신비를 표현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2) 우리는 우리의 창조된 존재를 부인하고 왜곡시킨 죄인이다.
3)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놀랍게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부활에 약속된 생명의 최종적 변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충격 가운데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의 참 인간성을 알 수 없다.
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해석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새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라고 되어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 대한 여러 가지 매우 다양한 방식의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1) 신인동형론적 해석 : 육체적 유사성
인간이 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육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창3:8이하)
<반론> 구약성경은 이러한 육체적 유사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출20:4). 신약성경에서도 예수가 육체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곳이 아니고 예수의 목적과 행동이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과 상응한다는 점에서 닮음을 강조하고 있다.
2) 사고하는 능력에서의 해석 : 지성론적 해석
인간의 이성이 이 세계를 창조한 신적인 로고스의 반영인 동시에 그 로고스에 참여한다. 라고 생각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고전적 학자들의 견해이다.
<반론>기독교 인간학을 지성 중심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되며, 인간됨의 본질이 육체적 삶을 초월하는 추상적인 사고과정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인간 존재의 감성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을 경시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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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땅을 다스릴 지배권을 받은 것으로 해석 : 지배론적 해석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힘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반론> 모든 관계를 위계서열로 해석하는 세계관을 초래한다. 지배권은 하나님 자신이 그러하듯이 타자에 대한 존경과 돌봄을 의미하는 것이지 타자를 지배하고 조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4)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해석
니이버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은 자유롭고, 스스로 결정 할 수 있으며,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로 묘사해 왔는데, 이러한 자유로운 창조의 행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 행위를 반영하고,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반론>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있으나 현대 문화가 자유를 단지 다른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만 보거나 심지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해석에 심각한 한계가 있음이 발견된다.
5) 관계론적 해석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 및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많은 20세기 신학자들과 저자도 동의하는 해석이다. 창1:27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구절을 통해서 인간됨이란 자유롭고 그리고 기꺼이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이 관계 안에서 인간의 삶은 남자와 여자의 공존 가운데 그 대표적 형태가 발견된다. 이 관계의 삶은 영원 가운데 고독한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 공동체 안에서 사시는 하나님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능력이나 소유, 자산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을 초월하는 삶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초월적 삶 가운데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불리는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와 관계를 맺으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관계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삶을 반사하는 관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과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tis)으로 해석하도록 인도함을 받는다. 성육신한 주님이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과 깊은 연대함 가운데 살았듯이, 또 영원한 하나님의 삶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사랑의 삼위일체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듯이, 인간도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반사하도록 지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증언은 복음서이야기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질 때 더 깊은 의미를 얻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의도하시는 바가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 모습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고후4:4, 골1:15)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만나는 인간 삶의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기독교적으로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은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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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창조된 인간
이제 우리는 하나님 및 다른 존재와의 관계속에 있는 인간의 삶의 구조를 창조된 인간, 타락한 인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인간이라는 세가지 제목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 세가지 항목에서 인간의 삶을 기독교 신앙의 시각에서 조명할 것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삶을 살펴봄에 있어서 다음의 세가지 내용이 중요하다.
1.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말씀을 걸어주신 인간이며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는 천사주의와 자연주의의 양극단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사주의란 인간의 삶을 육체와는 분리되는 정신만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의미하며 유물주의나 자연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전적으로 예측가능한 것으로 보는 가운데 자유의지나 영혼, 하나님과의 관계등과 같이 관찰되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인간이해의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철학적 인간학자들이나 문화 인류학자들은 한극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마침내 그들 나름대로 인간의 독특성을 ‘자기 초월성’과 ‘세계 개방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자기 초월과 세계 개방성‘은 인간의 독특한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현대 인간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내용을 요약하는 개념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인간에게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초월의 자유 또는 세계에 대한 개방성은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이기 보다는 유한하며 조건적이다.말하자면 인간의 존재는 육체적이다. 게다가 인간의 삶은 사회적으로 및 역사적으로 소속되어 있다. 이 두가지에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육신안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있다는 것이 인간의 삶에 반드시 부정적인 경계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환경들은 우리가 가진 유한하지만 참된 자유에 선행되어지는 조건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외부지향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경험하는 그 대상에 의하여 이끌려지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 밖으로 주의를 향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우리의 ‘외부지향성’과 우리의 유한하지만 참 된 자유는 다음의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 곧 우리는 이 육신을 가지고 역사 가운데 속해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말을 걸어주시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구성된 인간에게 말을 걸어주시되, 전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모든 성서적 증언이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복음서 이야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대화적 모습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본다. 예수의 전존재와 전사역은 그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유로운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저 메아리나 기계적인 반사가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 기쁨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이 자신의 참 된 정체성을 다른 사람 및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살아감에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철학, 인간학, 심리학 등의 학문들은 인간의 실존이 개인적 실존이 아니라 공동체적 실존임을 강조한다.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참여 사이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는 인간이 되며 또 인간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가운데 살고, 다른 존재들에 대해 응답하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지혜가 아프리카 속담에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오직 네가 인간이기에 나도 또한 인간이다.” 우리가 창조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주의깊게 읽을 때, 만물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가 묘사됨에 있어서 상호연결됨의 주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짐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서적 증언에 따를 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될 때 고독한 존재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존재로서의 우리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며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졌으며, 교제 가운데 서로 신뢰하고 서로의 자유를 존경하면서 관계 속에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의 성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데에 신학적 맥락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신학을 정립하는데에 있어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신학자로 칼바르트를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세 가지 근복적인 명제 : 첫째는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남자 또는 여자로 지 음받았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긍정하도록 부름받는다. 둘째는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지음받았는데, 서로 같은 동시에 다른 타자와의 상호관계 가운데서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부름받는다. 셋째는 인간은 분명하고 되돌려질 수 없는 질서 안에서 남자와 여자로서 함께 살아간다.
◇바르트의 주장에 대한 문제 야기 : 바르트의 주장은 남자와 여자로서의 차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경고함으로써 보충되어야 한다. 바르트의 두 번째 주장도 오해를 피할 수 있도록 보충되어야 할 필요를 가지는데, 그것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결혼한 사람들에 비해서 관계의 삶을 적게 누리도록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르트의 주장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가운데 되돌릴 수 없는 질서가 있다고 주장한 세 번째이다. 이러한 질서를 묘사하는 모든 단어는 그것이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조장할 ‘위험한’ 단어임을 바르트는 인정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 안에 되돌릴 수 없는 질서가 있다고 말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바르트의 입장과는 다르게 전개되는데, 그속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언급함에 있어서 위계서열, 우월함과 열등함, 위와 아래, 첫째와 둘째 등과 같은 표현이 없다. 이것에 관하여 말한 래티 러셀에 의하면 인간이 ‘동역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 서로 함께 말하며 듣고 살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남자와 여자의 관계사이에 있는 질서는 위계 서열적 질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질서(갈 3:28, 엡 5:21)이다. 성경은 다만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삼위일체적 유비를 사용해서 표현한다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는 순환적 관계로서 서로 함께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삶의 관계이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타자를 위한 인간이며 다른 사람들과 깊은 연대가운데 살아간 사람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됨을 뜻하는데, 이 하나님은 영원한 삼위일체의 사랑안에서 타자를 향한 공간을 만들어 주며 참으로 풍성하고도 다양한 공동체를 세워가는 분이다.
3.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운동이다 : 인간은 찾으며 탐구하며 기대하는 존재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은 특정한 욕구나 분명한 대상에 의하여 야기될 때만 충동이나 본능을 가지는 것에 반하여, 인간은 거의 제한이 없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향한 갈구가 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한 철저한 개방성을 가진 채로 창조되어 있기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추구하며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를 넘어서는 삶의 충만함을 갈구한다. 새로운 자유를 향하는 ‘앞을 향한 부름’이 전창조의 삶에 특별히 인간의 삶에서 역사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이러한 역동성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징표이다.
ⅰ)창조이야기에서는 피조물의 자유의 이러한 역동성에 대해서 단지 실마리만 보여지는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임무 또는 소명을 허락한다. 인간은 이 땅을 다스릴 소명을 받는데, 이것은 이 세계를 향한 책임적인 청지기직을 받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동역자가 됨을 뜻한다.
ⅱ)성서에 나온 예언자들의 증언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가운데 이 세계 안에서 보다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계를 만들어 갈 수도 있고, 심판과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구약성서의 메시야적 전승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 때를 기대하면서 그 삶을 살아가야 한다.
또한 ⅲ)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완성될 삶을 향한 인간의 이러한 기대를 더욱 깊게 해준다. 그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왔음을 대담하게 보여주는 예언적 행위를 펼침으로써,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함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와 그 미래 안에서 풍성하게 완성될 삶을 향한 인간의 기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방향을 설정하게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창조된 자유는 삼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의 책임,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개방성이다. 이들 구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창조된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통하여 일깨워지고, 우리와 서로 다른 존재들과 공존함으로써 더욱 확장되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날을 향하여 방향지워져 있다.
7-3.타락한 인간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적 인간학은 파괴성, 무질서, 소외, 야수성, 압제 등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의 다음 과제는 죄로 인하여 인간의 삶이 창조된 구조에서 어떤 상황으로 파괴되었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적 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죄란 우리와의 ‘다른’존재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 관계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전적인 타자인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부인하고, 우리의 동료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특히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와는 철저히 ‘다른’ 사람들 곧 불의의 희생자들, 소위 ‘찌꺼기 인간’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이런 관점에서 죄란 ‘다른 것에 대하여 관용하지 못하는 것의 깊이’이다. 창조된 인간에 대하여 기술할 때도 그러하였듯이,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 살펴볼 때도 우리의 일차적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1.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자유롭게 응답하는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죄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성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은혜에 반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초대에 아니라고 답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단지 도덕 계율에 위반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죄의 깊이를 오해하는 것이다. 죄란 무엇보다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이 죄의 본질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는,
1)능동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우상숭배 - 흔히 교만의 죄라고 불린다. 이것은 자아의 한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함을 거부하는 죄이다.
2)수동적이며 타자 중심적인 우상숭배 -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부정하면서 다른 피조물로 하여금 우리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 죄는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자유, 성숙, 책임감으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으로부터 돌려놓는다는 점에 있어서 교만의 죄 못지 않게 심각한 죄이다.
2.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인간과의 관련성 속에 죄를 살필 때도 역시 죄의 이중적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1)지배 - 인종차별적이며 국수적인 정신의 죄악됨을 인지하고 있고, 대학살이나 인종살해, 전쟁, 다른 피조물의 말살 등의 방법등을 통하여 나타난다.
2)굴종 - 곧 무기력에의 도피, 아무런 질문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머무는 것, 자기 학대, 스스로 보잘 것 없게 여김, 소심함, 주도적인 삶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삶의 자유와 성숙은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는 곳에서 파괴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배에 굴종하는 곳에서도 파괴되고 만다. 이러한 죄의 이중적 구조에서 보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화해된 인간의 삶은 타자를 잔인하게 지배하려는 죄에 의하여 손상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남이 하기를 원하는 대로 맹종하는 피동적 삶의 자세에 의해서도 손상된다는 것이다.
3.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열려있음을 의미한다면, 죄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인간의 최종적 삶의 목표를 거부하는것이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인간의 개방성을 손상시키는 실체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교만과 태만, 지배와 굴종에 유비되는 두 가지 형태의 죄에 주목해야 한다.
1)포기의 죄 - 여기서 포기란 인간 역사의 마성적 힘에 무조건 굴복하고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무엇인가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회의하고 냉소적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2)허세의 죄 - 하나님 없이, 또는 하나님의 이름만 업고서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려고 폭력과 수단과 노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허세와 폭력의 자세 안에는 두 가지가 숨어 있는데, 하나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인간의 선함을 무한히 전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및 내면적으로 절망하는 것인데, 어느 방법을 취하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 미래로부터 우리를 차단하게 되는 것이다.
4.전통적인 신학적 인간학은 죄의 기원에 관한 골치아픈 문제를 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들여왔다. 성경에 기술된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인간의 ‘타락’이야기는 죄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묘사라기 보다는 창조의 선함과 죄의 보편성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이다. 성경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동경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죄의 실재를 기술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증거하는데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12이하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논하는 데에서 보이듯이, 성경은 죄와 구속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 기원을 향하여 방향지워져 있기 보다는 종말론적으로 방향지워져 있다.
죄의 기원과 본질의 문제는 역설적인 표현에 의존하지 않고는 올바로 다뤄지기가 어렵다. 중요한 여러 역설들 가운데 다음의 몇 가지로 살펴보자.
1)죄는 보편적인 조건인 동시에 스스로 선택된 행동으로서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2)죄는 인간의 모든 행위 가운데 숨어 있는데, 이것은 악으로 정죄되는 것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선이라고 칭송받는 것 안에도 있다. 죄는 선을 행한다고 가장하는 가운데에도 교묘하게, 악마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죄는 개인의 부패와 타락인 동시에 삶의 공적이며 집단적 구조 안에서도 힘있게 작용한다. 성서는 악이 포괄적으로 다스리고 있고 옛 ‘아담’의 죄와 소외에 모든 인간이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역설적 표현들이 죄의 기원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지만, 이 진술들은 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이론적 시도보다 죄의 실재를 보다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7-4.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인간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새로운 자유의 시작인데, 이것은 죄의 사슬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하나님 및 다른 존재들과 동역함을 향한 자유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은 예수의 새로운 인간성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왜곡되지 않은 관계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완전하게 실현한 분이다. 또한 그는 타자들 위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깊은 유대 가운데 살면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죄인들, 낯선 자들, 가난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불구자들과 함께 하였다. 또한 예수는 새로운 인간성의 위대한 개척자(히12:2)로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가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철저하게 열려진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예수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매개해 준다.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철저히 연대하는 가운데 우리의 왕으로서 예수는 우리를 새로운 정의의 삶으로 인도하며, 우리와 멀어졌던 ‘타자’(Other)와 함께 동반자의 삶을 살도록 돕는다. 우리의 삶에 침투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대범하게 선포하는 가운데 최고의 예언자로서 예수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미래의 길을 향해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 안에 현존한 새로운 인간성 안에 믿음, 희망, 사랑을 가지고 참여함을 뜻 한다 1. 믿음: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자유(하나님신뢰 자유로운 응답) 하나님의 형상으론 창조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기 높임과 자기 부정의 죄로 손상된다면,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자유롭게 맡기는 행위로서 모든 우상숭배의 종결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자기라는 우상의 숭배이건 자기를 대신하여 타자라는 우상의 숭배이건 간에 우상숭배를 끝내는 것이다. 신앙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경쟁하지 않는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며 인간으로 서게 도우시며, 인간을 성숙함과 책임감의 삶으로 부르신다.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려는 충동으로부터 해방되며, 주변의 역사와 문화의 유인하는 손짓하는 무비판적으로 끌려 다님으로써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욕망으로부터도 해방된다. 2. 사랑: 타자와 함께하는 자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돕는 관계 가운데 사는 삶을 의미한다면, 창조된 인간 삶의 구조가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증오함으로 파괴되고 권력을 향한 욕망과 굴종의 자세로 인하여 손상된다면,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성령에 의하여 일깨워진 새로운 방식의 인간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 사랑은 강력한 가운데 자유롭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 사랑은 희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주어진 상황의 압력에 그저 피동적으로 굴복하거나 파괴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랑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행위이다. 성서적 증언에 따르면, 사랑이란 해야 하는 의무이기보다는 우리가 받은 새로운 자유를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이전에는 언제나 우리는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우리가 다른 이들과 유대를 간직할 때 참으로 인간적이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높임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깊고도 값비싼 유대(solidarity)안에서 살아간다. 3. 희망: 약속된 하나님의 이해를 향한 자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구를 의미하고, 이 갈구가 절망과 허세(despair and presumption)의 죄에 의하여 부정되거나 왜곡된다면, 희망이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자유인데, 이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성취 될 것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신앙과 사랑이 그러하듯이 희망도 역시 우리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희망은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을 통하여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능력이다. 희망은 우정과 평화를 향한 참된 가능성을 분별하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기독교 희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힘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유토피아적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 희망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현재의 상황이 변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질병과 죽음이 인간의 최종 운명에 있어서 마지막 날이 아닌 것을 믿으며,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임을 고대하는 가운데 사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희망은 결코 교만 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므로 믿음, 사랑, 희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진 새로운 인간의 자유를 여러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이들과의 연대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
제 8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주제의 결정적 기초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하나님 창조 인간 죄와 악에 대하여 다룰 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결정적 실마리로 간주하며, 그 이후 성령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와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하여 다룰 때 역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과 행위에 대한 성서적 증언이 우리의 기초와 기준이 될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 신학적 성찰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그 중심을 둘 때에만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론이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부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든 교리를 비추어 주는 중심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1 그리스도론에 있어서의 문제들
예수는 누구인가? 어떻게 그가 우리를 돕는가?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 두 질문이 전통적으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서 다루어진 질문들이다.
모든 시대에서 교회가 예수는 주이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 이 고백의 의미와 진실성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론이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적인 신앙고백의 이해에 관한 문제.
니케아 신조 -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칼케돈 신조 - 예수 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며 참인간’으로서 그 인격 안에서 두 본성(homoousios)을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나뉨 없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연합하여 가지고 있다.
- 이러한 고전적 그리스도론적 표현들은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신앙의 경험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들린다. 게다가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실재를 놓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 신학자들조차도 고전적인 그리스도론은 그저 반복되어서는 안 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도전.
이 도전은 역사의식의 등장과 관계가 있고,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복음서에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19세기 신학자들은 역사 비평적인 방법을 교회의 교리와 신약성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껍데기 속에 감추어진 ‘진짜 예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하지만 역사비평가들이 역사의 우물을 들여다보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본 것은 결국 자신들의 얼굴이 수면에 반사된 것만을 보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보다 정교하고 다듬어진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시도되었다. 복음서가 신앙과 선포에 기초한 자료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예수의 전기를 재구성 할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된 가운데, 많은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철저하게 회의적 자세를 가지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한 회의적 자세는 쉽게 가현설의 입장에 빠지든지 아니면 예수를 곧바로 교회의 삶 및 가르침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입장에 빠지게 된다. 신약성서 학자들 사이의 일반적 합의 가운데 중요한 점은 예수의 선포의 중심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시행했는데, 가난 한자를 축복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죄인들에게 용서와 친교를 전해 준 데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신약성서 안에서의 다양한 예수 상과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이 문제는 신약성서 안에 예수의 상이 매우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연관되며,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와 서양 문화의 역사 가운데 예수에 대해 수많은 해석들이 있어 왔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의 다원성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다. 우리는 과거의 교회보다 더 풍성한 예수 이해를 가지게 된 축복이 있지만 이것은 구원의 풍성함을 더 깊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우리 시대와 상황을 향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할 자유와 책임을 일깨워 준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묘사는 한스 킹이 지적한 대로 ‘어떤 그리스도가 참된 그리스도인가?’ 하는 시급하며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신약 성경 자체가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양한 그리스도론은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무엇이나 다 받아들이는 상대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대주의는 결국 기독교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고 그리스도 안의 참 신앙과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구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특정성(particularity)의 걸림돌”의 문제
이러한 문제는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면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언제나 도전이 되어 왔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대부분의 듣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23). 이러한 십자가의 걸림돌 이외에도 다른 특정성의 걸림돌들이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론의 문제로 다가온다.
-여성 신학자들은 가부장적인 신학이 복음의 참된 걸림돌을 예수가 남성임이 존재론적 필연임을 강조하는 거짓 걸림돌로 대치하였다고 주장하며, 흑인 신학자들(제 3세계 신학자들)은 대개 백인이며 부유한, 소위 제 1세계의 교회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에게 사역하였던 예수의 걸림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를 질문한다. 세계 종교들 사이의 새로운 이해와 협조에 관심을 가진 다른 신학자들(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론적인 제국주의라는 거짓 걸림돌을 제하여 버리고 ‘배타적이지 않으며’ ‘자신을 중심 규범으로 여기지 않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8-2.그리스도론의 원칙들
위에서 열거한 기독론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교리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그 안내자로 제시한다.
1.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지식이다.(구원론적인 차원)
이 지식은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지식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단지 예수에 관한 앎이 아니라, 예수를 신뢰하고 기꺼이 따르는 것을 의미 한다. 성경과 교회의 선포에서 예수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것’, ‘많은 사람을 위한 것’, ‘모두를 위한 것’임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성경과 교회가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에 용서와 해방과 화해와 새 삶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나타나셨으며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은혜 가운데 활동 하셨다는 것이다.
2. 예수그리스도는 진공 가운데 있는 것처럼 이해될 수 없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우주 안에서 하나님이 펴시는 목적과 행동의 맥락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역사적, 우주적 맥락)
신약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으신 그 언약의 성취를 선포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와 희망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보다 포괄적으로 살펴질 때,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로고스의 결정적 구현으로 이해되는데 그 로고스는 은혜와 심판 가운데 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삶 안에 침투해 있다. 기독론이 나를 포함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구원과 교회 중심적 자세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배타적이지 않은 기독론이 성서적 증언 자체로부터 요청된다.
3. 예수의 인격의 교리와 사역에 관한 교리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그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에 의해 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격도 그의 행위와 관계없이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하나로 붙드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즉 그의 선포, 사역, 수난, 십자가 부활을 전함으로써 얻어 진다.
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이해와 신앙 고백은 특정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특정한 필요와 열망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필요와 열망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다.
한분의 그리스도는 고갈 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며, 인간의 모든 경험과 필요를 그 자신에게로 끌어안으신다. 새로운 상황은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분은 모든 시간과 자리에서 주님과 구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 상황에서 신약성서와의 연속성 위에서 각각의 경험, 필요, 희망과의 대화 가운데서 적절하고 적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5.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신조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크신 분이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성찰을 넘어서는 분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오셨고 또 여기 계신 분일 뿐 아니라 이제 또 오실 분이다.(계1:4) 어떠한 기독론도 그리스도 신비의 넓이와 깊이를 다 파헤쳤다고 주장 할 수 없다. 전교회의 기독론적인 신조들이 전통에 있어서 이정표가 되며 우리의 진지함과 주의와 관심을 받을 가치가 충분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절대적이지는 않다.
칼 라너가 말했듯이 교회의 신조는 우리의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최종적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지, 어떤 특정한 신학체계나 기독론적인 공식이 아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정한 기독론을 절대화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8-3.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고전적 서술들
기독론적 신앙고백의 가장 초기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막 8:29)와 “예수는 주님이다”(고전 12:3)라는 진술로 표현되며 이 때는 예수가 참인간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고 구원의 사역에서 특수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지적된다. 하지만 나는 고전적 기독론의 전통 가운데 드러나는 문제점을 살펴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참하나님이며 참인간’으로 규정하는 칼 케돈 신조의 의도를 따라 재규정해보겠다.
1. 예수는 참인간이다. 신약성경이 예수의 전기를 위한 자료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는 않으나, 예수가 구체적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소외된 것과 적대적인 것(이것이 죄의 본질이다)에 있어서만 우리 인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예수가 모든 것을 다 알았던 분이 아닌 인간과 같은 유한성과 한계를 경험한 존재를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인정한다면 우리를 당황케 하는 가현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가현설에 따르면 예수의 인간성은 오직 ‘겉모양’뿐이었다. 예수의 참인간성에 대한 어떤 제한이나 거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구원론적 중요성 때문이다. ‘그가 그 몸에 담당하지 않은 것을 그는 치유하지 않았다’ 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유명한 구절에서 표현된 내용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 분이 우리 인간의 유한성, 비참함, 버림받음의 깊은 곳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분이 하셨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사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 복음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는 소동케 하는 혁명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고, 하나님의 이름에 힘입어 놀라운 자유 가운데 행동하였다. 당시 예수의 선포와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한계라고 여겨진 것을 침범하였고 종교적 전통의 수호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였고, 병든 자를 고쳤으며, 여자의 친구가 되었고, 죄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었다.
예수는 참인간이지만 그의 인간성은 새로운 인간성이다.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와 죄인과 억눌린 자와 함께 한 그의 연대는 독특하며 충격적이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철저하게 자유로운 인간이었으며, 이웃과의 교제와 이웃을 향한 섬김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우리는 여성신학자들이 제기한 기독론의 진지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예수가 특정한 성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보편적 구원자가 되는데 방해가 될까? 교회 안에서 참인간성의 규범이 되는 분이 남성임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 억눌림은 자주 지속되어져 왔다. 많은 여성신학자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은 예수의 참인간성이 그의 남성됨에 근거한다고 보지 않으며, 예수의 참인간성은 그의 충격적인 사랑, 예언자적 비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그의 놀랍고도 포괄적 자유에 근거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되는 데 있어서 남성됨이 존재론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로 주장하거나, 예수가 남성이었기에 여성은 목회사역에 안수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서이야기에 나타난 예수의 인간성을 철저히 왜곡하는 행위이다. 예수의 참인성의 신학적 중요성은 그의 남성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놀랍고도 포괄적인 사랑에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예수의 삶과 죽음은 영원히 자기를 내어주며, 타자를 긍정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빛나는 표현이 된다.
2. 예수는 참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참하나님이시다. 1) 고전적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주저없이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의 증언에 충실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 이 진술이 참으로 의미하는 것은 예수가 하신 일과 당한 고통은 곧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불의한 세상에서 한 무죄한 사람의 순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을 자신의 존재로 끌어안으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 죽음을 이기신 것이다. 이는 한 고독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다. 2)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고 고통당하시며 승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성 안에 현존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그 용어가 아무리 낯설지라도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며 참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주장한다. 이는 구원론적으로도 중요하다. 어떠한 인간도 인간으로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면 예수는 구원자와 주님일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참인간됨과 참하나님됨의 그 어느것도 포기할 수 없다. 3) 그런데 만일 예수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인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 이해와 ‘주님’ 이해는 철저히 다르게 재규정되어야 한다.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기에 복음서 이야기에 나타난 구체적인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한다. 복음서는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했던(빌 2:5) 한 종의 행위와 고통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발견한다.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내어주신 한 겸손한 종의 행위와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예수의 참하나님이심과 그의 참주님이심을 새롭게 규정한다.
3. 예수가 참인간이며 참하나님이라는 진술은 예수의 인격 안에 있는 하나됨의 신비를 지시한다. 고전적 기독론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이 한 사람 안에서 ‘혼동없이, 변화없이, 나뉨없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 실체에 있어서 연합되어 있다. 마치 두 개의 판자를 접착제로 붙여둔 것과 같이 다른 두 개의 물체를 임의적으로 결합시켜 둔 인상을 준다는 비판이 있어왔지만 여기서 우리가 고정된 ‘본성들’의 연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주체의 관계성 가운데 있음을 말한다면 이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날드 베일리는 자신의 책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에서 주장하기를,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인격적 연합이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기독교 경험을 통해서 유추하여 그것의 실재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는 배타적이지 않다. 베일리가 말하는 은혜의 역설은 하나님의 행위의 선재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은혜가 인격을 형성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차원을 또한 강조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자기비움의 하나됨’에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비움(kenosis)이란 빌립보서 2:5이하의 기독론적 찬미에서 나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룰 때 강조되었던 이는 자기를 내어주고 남을 용납하며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 본성 그 자체임을 말해준다. 서로 교제 가운데 있는 삶은 하나님의 실재를 감소하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규정하는 표현이다. ‘성령’의 하나되는 사랑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로 교통과 교환이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신성과 참인성의 결합의 근거인 동시에 그 원형이다. 성육신되신 주님 가운데 나타난 하나됨이 베일리가 말한 ‘은혜의 역설’로, 또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의 경험 가운데 희미한 유비가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과 신조에 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독특한 것이며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있는 영원한 사랑의 교통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8-4.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 해석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모두 그의 해방과 화해의 사역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지만, 서양 신학의 속죄론에서는 십자가가 그 중심이 되어 왔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속죄론이 교회 전체의 동의를 받지는 못했으나, 몇몇의 속죄론은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해 왔다.
1.우주적 갈등론 혹은 승리자 그리스도론(Christ the Victor)
이 속죄론은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군사적 은유(골2:15)을 발전시킨다.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과 이 세상의 악의 세력 간의 극적인 전쟁이다. 성육신된 주님 안에는 신성이 깊이 숨겨져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가면 뒤에 숨어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권세들과 전쟁을 벌인다.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러한 권세를 결정적으로 무찌르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한다. 이 속죄론은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실재와 세력을 강조한 점에서 도움이 되며, 하나님의 승리가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과 그 승리의 확신을 심어 주는 데에서 올바르지만, 그 한계도 분명하다. 특별히 그 장면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를 잘못 인도할 수 있다. 예수의 인성을 단지 악의 세력을 속이기 위한 술수로만 축소시키는 점, 신자들을 우주적 전쟁에서 단지 방관자로 만드는 점, 그리고 역사와 우리의 삶 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악과 죄의 세력의 지속성을 부인하는 점에서 이 속죄론의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2.안셀름의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이것은 인간이 구속되는 방법으로 대속적 고통을 강조한 성경구절(사53장, 갈3:13)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속죄론은 안셀름의 Cur Deus Homo?(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그 고전적 진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안셀름의 성찰은 그 당시 법과 보상, 혹은 사회적 의무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영주와 농노의 사이의 관계로 이해된다. 어떤 종류의 불순종이건 그 행동은 영주를 모독하는 것이고 그 보상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보상할 수 있는 만족은 무한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이러한 만족을 제공해야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이 만족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을 통해 그 만족이 이루어졌고, 정의는 회복되었으며 하나님의 영예는 되찾아졌다. 그 결과 죄인들은 용서받는다. 이 속죄론은 우주적 갈등론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보다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 속죄론은 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며 구속을 얻기 위하여 치룬 커다란 희생을 표현해 준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표현된 만족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이 속죄론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과 모순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속죄론은 신약성경의 법률적 은유를 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충돌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안셀름의 속죄론은 용서의 행위를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은혜는 만족이 주어져야만 주어지는 조건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조건적 은혜가 은혜인가? 신약성경에 따르면 화해가 필요한 대상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대상이기 보다는 화해의 주체이시다. 또한 이 속죄론은 대체물과 대표자를 적절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물의 세계는 대체 가능한 사물의 세계이다. 그러나 대표는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대표자는 임시적으로 우리를 대신 하지만 우리에게서 그 의무마저 가져가지는 않는다.
3.자유주의적 이론, 도덕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
도덕감화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엄청나게 부어 주심으로 우리가 경이와 감사 가운데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화해를 이루신다고 말한다. 도덕 감화설의 장점은 하나님의 사랑의 무조건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응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 있다. 이 속죄론의 주관적 측면이 주로 부각되기는 하지만 이 속죄론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의 계시가 가진 객관적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더 객관적 방향으로 더 발전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인간의 죄악 된 세계를 빛으로 비추어 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 세계에서 악의 능력과 그 집요함을 과소평가하며, 예수를 단지 하나의 좋은 모범으로만 간주한다.
위에 기술된 속죄론과 그 속죄론이 기초한 성경의 은유들은 사실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의 표상이나 하나의 이론만을 절대화하게 될 때, 신약성경이 가지는 풍성한 선포는 사라지게 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의미를 수세기 동안 묵상했던 풍성함 역시 상실된다. 위의 속죄론들은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1.존 칼빈 - 삼중직
그리스도으 삼중직에 대한 칼빈의 교리는 우리의 속죄론 이해를 보다 열려 있고 포괄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행동하셨다고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이 삼중직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희생적 죽음과 그의 왕적 통치를 모두 포함한다. 예언자로써의 그리스도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제사장으로써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사랑과 순종의 제사를 드린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다스림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약속하신다.
2.칼바르트 - 정교한 화해론
칼 바르트는 그의 정교한 화해론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을 고전적 두 본성론(신성과 인성)과 두 상태론(낮아짐과 높아짐)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결합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가 얻어진다. ‘종이신 주님’(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성은 우리의 제사장으로 겸손하게 행하시는 교만의 죄로부터 구속한다.) ‘주님이신 종’(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인성은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왕적 동반자로 높여지는 가운데, 우리를 태만의 죄에서 구속한다.) ‘참된 증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은 그 자신의 예언적 능력을 행사함으로 우리로부터 거짓됨의 죄를 몰아낸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대한 칼빈과 바르트의 신학은 신약성경 증언의 다양한 은유들을 포괄적으로 처리하고 고전적 신학의 상호보완적 주제들을 잘 다루는 점에 있어서 매우 풍성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풍성한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1).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환원시키려 하기보다는 속죄함에 대한 신약성경의 은유들의 풍성함과 고전적 표현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2).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전복음서 이야기, 곧 그의 사역, 가르침,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3).속죄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에 기초하는 가운데 동시에 인간의 응답을 요청한다. 적절한 속죄론은 이 두 가지 요소에 적합한 중요성을 부과한다. (4).하나님의 은혜는 심판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심판은 은혜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속죄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5).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속죄의 사역은 개인과 사회, 전 우주에 모두 그 중요성을 가진다.
8-5 해방의 기독론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소브리노, 보브, 세군도 해방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시고 계신다.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보다는 ‘아래로부터’를 더 선호한다. 즉 삼위일체 교리와 영원한 성육신의 교리보다는 예수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역을 기독론에서 더 중시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 버림받고 약한 자들을 즉 사회 소외 계층과 함께 하셨던 분이다. 율법사들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고 로마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셨던 분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해방신학자들은 구원의 보편성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세상이 이들을 부당하게 소외시켰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행위에 우선을 두었다고 함으로써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유대를 가집을 말하는 것은 포괄성의 표현이지 하나님의 베타성의 표현이 아니다.
2. 죄와 구원은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동시에 가진다.
해방의 기독론은 구원의 정치적 관점을 개인적인 면보다 더욱 강조한다. 왜냐하면 개인적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근대서양문화의 이원론에 의한 부산물에 불과하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정의와 은혜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죄와 불의에는 공동체적 구조가 있다. 예수는 단지 죄악 된 개인뿐만 아니라 죄악 된 삶의 구조도 문제 삼았다. 구원은 고립된 영혼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는 삶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였다.
3. 기독론이 억압의 상황에서 비인간화하는 이데올로기와 신앙은 구분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것만으로 정치적 중요성을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열심당원들과 동일시하여 혁명적 행위를 기독교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정치적인 면은 하나님에 대한 우상숭배적인 생각을 폭로하는 가운데 그것이 비인간적인 삶의 구조와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을 또한 예언적으로 폭로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은 십자가에 대한 해석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십자가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참을 것을 나타낼 때가 많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가급적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을 요구하심을 가르쳐주는 사건이 아니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십자가는 억눌림을 당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동행의 약속이며 불의한 고난에 대한 저항의 표시이다. 부활 역시 변혁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포괄적인 변혁과 하나님의 공의의 보편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4. 기독론은 기독교인의 실천(PRAXIS)과 분리 될 수 없이 연결 되어 있다.
소브리노는 “우리가 삶에서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예수의 역사적 관심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들 가운데 예수의 역사적 관심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룸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를 알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즉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고통당하며 부당한 대접을 받는 자들의 편에 설때에 그리스도를 알며 십자가와 부활을 참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6. 폭력과 십자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의 사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성서는 그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존재했고, 그의 생애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성서의 기자들은 십자가 사건이 기독교에 있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그 폭력의 책임을 타인에게나 또는 우리 자신에게,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사건의 진상을 가려왔다. 이를 이해하는데 저자는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도움을 받고 있다. (뒷면 참조)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대해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이러한 폭력의 구조적 틀 안에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5월의 광주를 상각해보라. 그들이 우리 사회의 희생양이 아닌가. 여기에 대해 오번 신학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월터 윙크(Walter Wink)는 “폭력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며, 현대 세계의 영성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나아가 미국이 숭배하는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이름의 종교이며, 이 종교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약속을 주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적 체제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지라르의 주장처럼 폭력은 인류의 시작과 그 기원을 같이 하며, 사회적 구조의 보존을 위해 희생양 제도로 반복된다. 이는 폭력이 악순환하게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폭력은 악순환하며, 오늘날의 세계는 다만 이 순환 고리 안에 그대로 있는 것뿐이다.
이러한 폭력적 세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오셨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가 이러한 폭력적 구조들의 뿌리를 흔들기 시작했을 때, 예수의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폭력적 구조에 대항한 예수의 죽음은 왜 우리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행동일까. 그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1. 지라르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의 구조가 어떠한가를 폭로한다. 무고한 이의 죽음의 장면을 통해 우리는 희생양의 신화로 위장된 폭력적 세계의 진상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의 죽음은 폭력의 희생자인 우리와의 밀접한 유대 혹은 연대이며, 또한 폭력의 조장자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전해 준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죽음이 수동적인 것이므로 우리도 희생의 현장에서 고난 앞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라르가 지적한대로 예수는 그의 처형을 주도하는 권세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동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을 통한 진상의 폭로라는 비폭력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적극적인 방법으로의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는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이 깨어지고, 유대와 용서의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게 된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폭력의 세계 한 가운데 새로운 인간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안에서 이해할 때,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비폭력적 사랑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예수를 죽인 것은 마치 민들레 씨앗들을 불어 없앰으로써 민들레를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태양을 깨뜨려서 수백만의 빛의 조각들로 만드는 것과 같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희생양 이론과 십자가 사건 |
지라르는 폭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흉내 내는 투쟁의 기제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폭력이란 농업 문명 이전의 인간 사회, 즉 최초의 시작으로부터 존재해왔으며, 이는 점점 더 상승하는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고 지적한다. 그가 믿기로 이런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사회들은 대리 희생자를 마지막으로 죽임으로써 더 이상 살인하지 않도록 하는 기제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택되는 대리 희생자는 그의 죽음을 위해 누구도 보복하려고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므로 그의 죽음은 폭력과 살인의 순환적 고리를 깨뜨리게 되고, 그 자신은 죽음의 대가로 때때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의식에 신들과 종교, 신화의 기원이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즉 신화와 종교는 희생물을 죽이는 사회적 의식의 어두운 그늘을 은폐하려고, 그것이 거룩한 필요성이라고 선언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희생양의 기제를 특징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가지게 된다. 1) 흉내 내는 욕망 인간은 사회 속에서 무엇이 쟁취할만한 좋은 것인가를 흉내 내면서 배운다. 2) 흉내 내는 경쟁자 흉내 내는 욕망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흉내 내어지는 사람은 “나처럼 되라. 이 목표물을 귀하게 여겨라.”라고 말하다가, 어느새 흉내 내는 사람이 그것을 잡으려고 하면 “나처럼 되지 말라. 그것은 내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망은 갈등을 야기 시킨다. 3) 구별의 위기 이러한 갈등은 결국 사회적 위계질서들을 무너뜨리려는 행동으로 발전되고, 사회는 붕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4) 필요한 희생자 사회는 붕괴를 면하기 위해 희생양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외국인, 공산주의자, 마녀, 동성애자 등의 희생양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그(그녀)의 죽음을 통해 사회는 위기를 넘기게 되고, 희생양에 죄에 대한 꾸며진 이야기는 사건의 진상과는 상관없이 유지된다. 5) 희생양을 신성하게 만들기 이러한 죽음을 맞이한 희생양은 때때로 특별한 영예를 부여받거나, 심지어는 신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6) 희생의 반복 이러한 희생의 반복으로 사회적 구성은 보존된다. 지라르의 주장에 의하면, 종교는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평안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화된 폭력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복음이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대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성서가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성서는 십자가 사건이 권세들에 의해 내려진 정의에 대한 전적인 오심이며, 비진리의 완벽한 예증이요,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폭로하고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은 철저한 비합리 속에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당사자인 예수는 독특한 자세를 유지하는데, 그는 긍정적으로 처형에 동의하지도 않고, 부정적으로 권세들을 흉내 내어 폭력적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희생양 기제의 전모를 온 세상이 다 볼 수 있게 폭로하신 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필요로 하셨다는 의도를 혼동하여 이 계시의 참 의미를 희석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처음 몇 세기 동안 권세들과 폭력적 지배체제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과 더불어, 교회는 이제 제국을 보호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즉 지라르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도가 철저히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
8-7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 (궁극성:틸리히)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독특하고 결정적인 현존으로 간주하는 그리스도의 전적인 헌신을 ‘그리스도의 최종성’(the finality of christ)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문화와 종교의 다원화가 점차적으로 개방적이며 대화의 정신을 요구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다른 신앙을 연관해 보려는 몇 가지 시도를 해왔다. 각각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현존을 나름대로 ‘최종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1. 배타적 입장(exclusivist way)은 다른 신앙은 거짓이며 오직 기독교의 신앙만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앙과의 개방적이며 대화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계시’를 배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배타적 입장에서의 최종성은 폐쇄성을 의미한다. 이 입장의 문제점은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공식으로 환원 할 수 없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리스도에 참으로 헌신하는 것에는 우리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진리에 대한 개방성이 포함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증거하는 손길은 많은 곳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삶을 비추고 있는 빛(요 1:9) 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선포와 가르침에 속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방법은 기독교 신앙과 다른 신앙과의 관계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론적 견해(developmentalist view)의 따르면 인간의 모든 신앙은 그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안에서 계시의 최종성은 계속 상승하는 일련의 점들 가운데 최고점으로 이해한다. 문제점은 19세기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를 바탕으로 종교는 서로 다른 축에 기초하므로 각각의 종교는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각 종교는 그 내부로부터 살펴야지 그저 기독교 신앙을 위한 준비단계로 살펴질 수 없다. 그래서 세계종교들과의 관계를 점진적 진화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과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이 비록 결정적으로(최종적으로) 계시되기는 하였으나 그 은혜와 심판이 피조물과 모든 인간의 경험안에 ‘초월적으로’(transcendentally)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초월적 견해(transcendentalist view)는 칼 라너(Karl Rahner)에 의해서 잘 표현된다. 이것은 비록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 선포를 거부하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를 접할 수 있다.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anonoymous christian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입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정교한 형태의 신학적 제국주의라고 비판 받아 왔다. (ex. 익명의 불교인)
4. 대화적(dialogical)입장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은 각각의 신앙적 헌신을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열려진 대화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틸리히, 큉, 몰트만)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역동적 유형론(dynamic thpology)은 신앙인들이 다른 종교와 대화 가운데 자신의 전통 속에 숨겨진 잠재적인 차원을 재발견함으로서 모두가 풍성해질 수 있다. 한스 큉(Hans Kung)은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의길’임을 주장하면서 모두가 거짓과 참의 혼합된 형태임을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은 대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특성과 충만함을 발견하게 된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사랑안에 있는 삶의 한 구체적 표현으로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창조 안에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분임을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면 그들은 폐쇄적이며 자신을 닫아 놓으려 할 수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최종성은 우리가 소유한 그 무엇이기 보다는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5. 다섯 번째 길은 개별적 종교의 특정한 성격들은 철저하게 상대화하여 그들 가운데 ‘하나님 중심적인’(theocentric)핵심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존 힉 (Jhon Hick)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기독교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으려는 교리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만이 중심에 계심을 자각하고, 우리의 종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종교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을 깨닫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힉은 최고의 존재가 참으로 실재하며 선한 존재라는 것을 모든 종교의 본질적 핵심이라고 간주한다. 힉의 이러한 접근은 모든 역사적 종교 뒤에 숨어 있는 자연종교 또는 보편종교를 찾으려 시도했던 계몽주의 합리주의를 연상시킨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기독론이 걸어가야 할 길은 한쪽 극단적인 배타주의에서부터 극단적인 상대주의사이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을 자신들이 현재 모든 진리를 소유한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이 말하는 어떤 기독론 보다 더 크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안의 신앙을 지나치게 방어적 신앙이기보다는 기대하는 신앙이어야 하며 오직 뒤만 바라보는 신앙이기보다는 앞을 바라보는 신앙이어야 한다.
9.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만일 교회의 신조가 창조주와 화해자 하나님에 대한 두 조항의 신앙고백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며 멀리 떨어져 있고 희미한 하나님에 대해서만 고백하는 모양이 될 것이다.
사도신경의 세 번째 조항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over us)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for us) 계시며, 우리 안에서(in us) 일하시는 분임을 고백한다. 여기에는 성경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화해, 변혁의 사역에 참여하는가? 어떤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행위 안에 참여하도록 돕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이 되는 새로운 자세, 실천, 관계는 어떠한 모습인가? 인간의 역사와 전피조물의 역사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함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1.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
기독론이나 성경의 권위에 관한 교리들에 비하여 볼 때 성령론은 거의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 교회의 신조들이 성령에 대해 무관심을 보인 것보다 더 문제성이 있는 것은 제도 교회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강조한 많은 운동들에 반대해 온 것이다. (2C의 몬타누스 운동, 12C의 왈덴파의 운동, 16C의 급진적 개혁자들의 운동, 현재의 기독교 기초공공체운동 등)
성령론에 대한 경시로 인해 신론과 성서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연질서의 중요성과 인간 문화의 가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이해하고 교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 완성을 희망하는 등에 있어서 많은 왜곡됨이 빚어졌다. 성령의 사역이 잊혀지거나 억압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 계급적이고 강제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은 그리스도 일원론으로 변질되고, 성령의 권위는 타율적 권위로 변질되며, 교회는 지배와 다스림만이 있는 경직된 권력구조로 생각되어지고, 성례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은 새롭게 다시 부각되었으며 이러한 발전을 가져온 데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공헌하였다.
① 광범위한 문화적 시각에서 볼 때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비인간화되고 관료화된 현대 사회와 교회에 대한 저항 : 이것은 형식이 활력을 지배하고, 제도가 그 목적을 외면하고, 외적인 권위가 자유로운 합의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②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보다 깊은 신앙에 대한 목마름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필요성의 인식으로, 사랑과 우정의 경험을 향한 바램으로,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개인적, 사회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을 향한 갈구 등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 현대의 문화제도들과 세속 철학이 현대인들의 개인적, 문화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기쁨을 향한 갈구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영성을 향한 추구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③ 현대의식에 팽배해 있는 역사에 대한 거리감과 차갑게 느껴지는 객관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 :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신학 역시 역사적 거리를 강조하고 객관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실재를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그 변혁의 능력에 실제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객관적 구원의 사역에 대한 언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④ 사회적, 정치적 개혁운동에 참여해 온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들, 또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지쳐 버린’ 경험 : 영적인 삶을 무시해왔던 사회운동가들이 이제는 정의, 평화, 자유를 향한 투쟁을 끝까지 지속하기 위해서 역동적 영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⑤ 세계 교회 안에 나타나는 새로운 사건이나 경향들 : 오순절 교회의 급속한 팽창, 서구 교회의 성령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동방정교의 영향력 확대, 남미와 세계 여러 곳에서의 기독교 기초공동체 등장 등.
⑥ 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 구약성경의 성령이해에 대한 특징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선택된 종들에게 주어져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압제 받을 때 그들이 이 땅에서 정의를 회복하도록 사명과 능력을 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성령강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공관복음에서의 예수의 삶과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하여 능력을 부여받는 것으로 기술된다. 누가복음을 시작하는 마리마의 잉태, 사도행전을 사하는 오순절 사건들 역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바울은 성령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로서 해석하여(롬 8:23), 요한에 따르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제자들을 진리의 충만함으로 인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이다. (요 14:26)
오랫동안 기독론에 초점을 두어 온 서구신학의 주의가 이제는 성령론의 방향으로 돌려질 것인가? 20C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주창한 대가중의 한 사람인 칼 바르트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2. 성령 신학의 대략적 모습
1. 성령=삼위일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은 그 영원한 존재가 사랑의 역동적 교제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부와 성자와성령 사이의 생명과 사랑이 서로 나누어지는 행위 가운데 있다. 그러나 세 인격이 분리되고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밀하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안에 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성령은 삼위일체를 하나로 묶는 ‘사랑’이며,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를 만드는 ‘능력’이다.
성령과 성부, 성자 사이의 관계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쟁점이다. 성령의 개념, 속성, 지위에 대한 논점은 신약성경의 본문들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본문은 성부와 성자에 비해 성령의 신성과 인격에 대해 훨씬 적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조에 포함된 교회의 합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만일 성령이 성부, 성자와 함께 삶의 해방과 변혁의 주체자라면, 성령은 인격적이며 신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적 삼위일체 신학에서는 성자와 성령의 ‘사명’(missions)과 ‘유출’(processions)을 구분하고 있다. 동방교회나 서방교회 모두 ‘사명’은 세계의 창조, 화해, 구속 가운데 성부와 성령의 활동을 지칭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유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서방교회- 6세기에 니케아 신조의 본문에 ‘또한 아들로부터(filioque)’ 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 성령은 아버지와 ‘또한 아들로부터’ 유출된다는 것이다. 서방신학은 filioque 교리가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만일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된다면 교회는 여러 가지 영적인 운동들에 대해 책임있게 분별할 수 없게 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자연신학의 위협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동방교회 - 동방교회에 따르면 filioque 교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근원으로서의 성부의 독특성을 만들며 모든 창조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강조하기보다는 오직 성육신된 말씀이 명시적으로 선포되고 고백되는 곳에만 성령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오랜 논증을 해결하는데 약간의 진보가 있을 수 있는 합의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나 서로 주장하는 모형들은 모두가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모든 형태의 관계를 다 포착할 수 없다.
둘째, 삼위일체의 ‘유출의 모형’ 이외에도 모든 피조물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와 종말의 영광 안으로 끌어들이는 ‘종말론적 모형(eschatoloical model)’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와 그의 사역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성령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다.
ex) 성령으로 잉태됨(마1:20),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여 위에 머무름(요1:32),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성령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분(눅4:18), 성령은 예수의 마음을 알게 하는 분(고전2:16),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분(롬5:5),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분(롬8:11), 제자와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 분(롬8:14)
2. 성령의 사역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여러 차원에서 많은 것을 기술하고 있다.
1) 다시 드러냄
성령은 그리스도를 신자들에게 다시 임재하도록(re present)만든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하나 되게 하며, 그 때 거기에 있었던 사건을 오늘 여기의 사건으로 만든다. 곧, 그리스도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 된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혜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라고 지적한다.
2) 새로운 삶의 창조
요한신학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의 중생을 가져오는 분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으로서, 하나님과 이웃과 하나 되어 사는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 할 수 있는 힘과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받는다.
3) 자유케 함(liberative)
성령은 불의에 저항하는 힘을 주시며 사람들을 자유케 한다.(고후3:17)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질적으로 자유케 하는 사역이라면 성령의 사역은 그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교제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도록 자유를 주시고, 또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역사하신다.
4) 공동체적인 사역
성령께서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결합하는 사랑과 우정의 끈이듯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고 우리 사이의 교제를 가져오는 능력이다. 성령은 이전에는 뛰어넘을 수 없었던 장벽이 있는 곳에 공동체를 창조하신다.(갈3:20)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되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개체로서 살지 않는다.
5) 약속과 기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역사는 성령이 ‘첫 열매’(롬8:23), 또는 하나님이 불러일으키는 미래의 ‘선수금’과 ‘보증’(고후1:22,5:5)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의 능력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고 모든 창조 가운데 정의와 평화가 실현될 것을 희망하고 고대하게 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든다. 성령은 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살아 있게 하는 가운데 새로운 비전(vision)을 꿈꾸게 한다.
6) 성령의 은사
성경은 많은 은사가 있음과 각양 은사가 다 존중되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는 영적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 기뻐하는 가운데 우리가 서를 필요로 함을 알아야 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은사는 방언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가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의 은사(특히 사랑의 은사)이다. 성령 안에 사는 삶의 일차적 기준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은사는 참된 은사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 성령의 참된 은사는 공동체를 세워주며 공동의 선을 위해 공헌하는 것이지, 몇몇 소수의 야심만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7)성령의 여성적인 표상
희랍어에서 ‘영’(pneuma)은 중성이고, 라틴어에서 ‘영’(spiritus)은 남성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영’(ruach)은 여성명사이다. 신약성경이 성령의 사역을 양육하고 돕는 사역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과 니고데모와 대화할 때 예수께서 성령의 사역을 어머니의 사역에 비교하신 것이다.(요3:5~6)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대응하여 성령은 여성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레네우스를 따라스 콤블린(Jose comblin)은 말씀과 성령이 동등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양 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성령의 어머니됨을 강조하는 신학이 발달되었다면 이제까지 하나님과 능력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표상이 지나치게 남성적이었던 불균형이 바로잡아질 수 있었으리라고 콤블린은 주장한다.
하지만 ‘영’(spirit)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성(gender)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표상과 은유를 우상화하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spirit)이라 불리는 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강조해 준다.
“하나님은 독특하게 인격적인 분이어서 우리가 남성 또는 여성적인 표현을 쓸 수 있으나, 그러한 모든 표현을 뛰어넘는 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서로 완전히 사랑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계신 분이다.”
9-3. 그리스도인의 삶 : 칭의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삶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변화되는 역동적인 과정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칭의에서 시작되며, 성화로 이어지고, 소명에서 그 목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옛 삶의 방식에 죽으면서 새 삶의 방식으로 부활하는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성의 충만함을 계속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첫 출발인 칭의는 하나님의 죄 용서의 사건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롬 3:23~28)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드러난 이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유 가운데, 아무 조건 없이, 우리의 공로 없이(free, unconditional, and unmerited)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용납) 칭의는 ‘무죄로 놓아줌’ 또는 ‘바르게 만듦’의 뜻을 가진 법률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가 거저 주어진 은혜와 용서의 행위로 인하여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은 전적인 은혜이며(sola gratia : 오직 은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오직 믿음과 신뢰로만 얻어질 수 있다(sola fide : 오직 믿음)
이 칭의의 교리를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we are justified by faith)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의롭다하시는 행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우리의 믿음의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시기는 하지만 우리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we are justified by grace through faith)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셨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뢰하는 적합한 응답일 뿐이다.
이 칭의의 교리는 루터신학의 정수라 불려 왔지만 모든 기독교 교리를 이 하나의 진리로 축소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면 이 교리를 구시대적 가르침으로 여기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 칭의의 교리는 오늘날에도 엄청난 의미와 적합성(relevance)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애써 하는 것은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또한 우리의 경쟁사회에서 용납 받으려 하는 욕구와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우상숭배에 근접하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예를 들어보면 미국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져있는 마약의 중독적 복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약중독의 원인은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타인의 긍정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 크게 작용한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구조와 사회관계들의 몰인정함 폭로해준다. 또 다른 예로 우리의 소비 중심적 생활방식을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일종의 중독현상이다. 현대사회는 광고 전략을 통하여 우리의 가상적 필요를 자극시켜 물질을 쌓아놓음으로 자기 정체성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혹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칭의의 교리는 현대사회에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틸리히는 “당신은 용납받았습니다.”(You are accepted)라는 설교에서 “당신이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용납하십시오. 당신보다 더 큰 능력에 의해서 당신은 용납받았습니다.”라고 함으로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칭의의 교리를 인상적으로 잘 묘사했다. 또한 북미대륙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흑인들의 투쟁을 했던 마틴 루터 킹, 제시 잭슨, 랜 보삭과 같은 웅변적 설교가들에 의해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들이다.”(we are somebodies)라는 칭의론에 대한 보다 힘 있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때로는 우리조차도 우리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며 구속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와 책임의 근거가 된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소설 〈자줏빛 색깔〉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가지 않거나 찬송을 부르지 않거나 헌금을 내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셕(Shug)은 말했다. 또 놀라는 그의 친구 실리(Celie)에게 “실리야,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내가 그 모든 것을 의무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그것을 기쁨으로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이렇게 은혜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성경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이 시대에 적합성이 없기보다는 이 시대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때 역사의 지배자들은 두려움에 떨 밖에 없는 것이다.
9-4 그리스도인의 삶 : 성화(Sanctification)
ⅰ)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라면, 성화는 기독교 사랑 안에서 성장의 과정을 밟아 가는 것이다. 성화라는 단어는 ‘거룩하게 만든다’는 뜻인데, 여기서 거룩함은 도덕적인 완전이나 종교적으로 저 세상을 지향하는 것, 혹은 소위 ‘도덕적 다수’라고 불리는 바리새인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감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닮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자유롭게 자기를 내어 주며 남을 돌아보는 사랑인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아가페라고 부른다.
ⅱ)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인 반면에 성화는 전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되듯이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ⅲ) 성장(growth)도 유기적이며 기계적인 발달단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참된 운동(real movement)이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언제나 예측가능하거나 잘 짜여진 단계를 따라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사랑과 희망에 있어서 자라간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표지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성숙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어져 가며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데, 그 일차적 증언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성숙해 가는 것은 성경을 마술적인 해답서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대한 일차적인 증언으로서 성경에 다가가는 것이다.
성경의 증언을 성숙한 자세로 듣는 것은 모든 종류의 성서적 증언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다. 또 그것은 나와 매우 다른 상황에서 성경을 읽는 기독교공동체의 새롭고 놀라운 해석을 향해서도 우리 자신을 열어두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하고 억눌림 당하는 형제, 자매들의 성서해석은 우리가 익숙해 온 성서해석을 정정해 주거나 심화시켜 줄 것이다.
위와 같이 성숙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성서의 증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실천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상황에서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숙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삶을 변혁시켜 나가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2.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두 번째 표지는 기도에 있어서 성숙해 가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강함 가운데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초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인데, 우리는 그 응답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한다. 기도 가운데 성숙해 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정직한 가운데 자신을 열어 두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환난 중에는 도움을 청하며, 심지어는 그분께 부르짖는 가운데 호소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성령과의 교제 안에서 부여받은 새로운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성숙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 가운데서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같지 않음을 기꺼이 배우는 것이다. 기도는 또 인간 행동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모두에 하나님의 먼저 도우시며 유지해 주시는 은혜(the prevenient and sustaining grace of God)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서 세 번째 표지는 자유 안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넘쳐나기에(고후 3:17), 자유가 있는 것에 성령이 계신 것을 우리는 안다. 성령은 옛 사슬을 그대로 두거나 새 멍에를 매게 하기보다는 모든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갉아먹고 낙타도 삼키려 하는 모든 율법주의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이 있으나, 이 법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법이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유를 행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는 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섬김과 이웃 섬김을 향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복음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지만 복음이 인간의 삶 안으로 침투할 때, 복음은 모호하고 문제성 많은 모습을 폭로하므로 우리의 안팎에 있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우리 사회가 조장하는 불의와 비인간성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돌아서는 자유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새로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가 점점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섬김은 값비싼 것이기에 고난 받음은 성화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고난은 고난 그 자체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과는 다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자유함 가운데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4.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서 네 번째 표지는 연대함 가운데 성숙해 가는 것(maturing in solidarity)이다.
여기서 연대란 다른 피조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되 특히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새로운 연대의 정신은 회개를 전제하는데 이 회개, 곧 마음을 새롭게 함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만 주의를 집중하던 것을 멈추고 점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보다 민감해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구체적이고 정기적인 실천이어야 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하는 가운데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간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란 서로 다른 공동체를 향한 개방성을 요구하며, 또 보다 포용적인 공동체를 추구한다. 교회의 구성과 사역의 모습은 세속적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인종적, 성적 구분에만 그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낯선 자들, 버림받은 자들, 심지어 적들까지도 포함하여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가를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연대 안에서 성숙해 가는 것은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과의 연대도 역시 포함하는 것이다. 연대를 이루며 성장하는 것에는 언제나 그 대가가 따르는데 첫째로는 자기중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우리가 이러한 연대를 실천할 때 이것을 축복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반대와 박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언제나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장하는 것의 마지막 표지는 감사와 기쁨의 삶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삶은 피상적인 낙관주의나 인위적인 흥분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감사와 기쁨의 삶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기도와 성례전 가운데 새로운 우정과 기쁨의 봉사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부터 나오는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으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궁극적으로 악과 죄와 죽음에 대항하여 승리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서 말할 때 강조했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은혜 가운데 성장해 가는 하나의 징표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면서 싸우는 이 삶 속에서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자라간다. 우리가 값비싼 제자도의 삶을 기꺼이 살아가는 동시에 감사드리고 찬양하며 기쁨의 삶을 보일 때, 그것은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제 9 장 5. 그리스도인의 삶 : 소명
Ⅰ. 서론 : 소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름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참여케 하기 위해 일꾼을 부르시는 것도 소명이라고 일컫는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본론 : 성서의 핵심적 주제( 선택과 소명)
1. 성서의 증언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명을 주시며, 예언자들은 부르시고, 나사렛 예수를 파송하시며 예수의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신다. 성경은 이 세계의 창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선택되었음(엡 1:4)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선택과 소명은 거의 잊혀진 주제이거나 난해한 주제로 여겨진다.
2. 하나님의 선택은 특권을 위한 부름이 아니라 섬김을 향한 부름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순종함으로 감당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른다(요 4:34, 15:16).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과제가 부여될 때, 새로운 존엄성과 목표가 함께 부여된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곧 책임을 포함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나 값싼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값비싼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고 또한 사명을 받았다.
3. 그리스도인의 소명 :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단순히 생계를 위하여 직업을 가지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 부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타자(others)를 향한 운동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완성될 미래를 향한 운동이다. 즉, 기독교 사명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고 성령의 활동 안에서 역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Ⅲ.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살아가기에 창조적 희망 안에서 살아간다. 이는 행해져야 할 일이 있으며, 선포되어야 할 소식이 있고, 펼쳐져야 할 섬김이 있으며, 극복되어야 할 적대감이 있고, 시정되어야 할 불의가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그 약속을 궁극적으로 성취할 것을 믿고 희망가운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정의, 자유, 평화의 새로운 공동체가 올 것을 모든 피조물과 함께 준비하는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10-1. 교회의 문제
오늘날 교회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개인주의로 인하여 생기는 교회에 대한 오해와 적대감
오늘 우리의 문화적 신화와 표상들은 자수성가(Self-made)하고 독립적인 개인을 강조한다. 상호의존적인 것보다는 독립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적 편견인데, 이러한 편견은 기독교 신앙과 삶에도 현재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공동체의 중요성이 전혀 강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수성가한 유형의 사람들이 속하려 하는 단체는 ‘자발적 사회’ 다시 말해 그것이 자신의 필요와 목표에 유용할 경우에만 소속되어 머물러 있으려 하는 모임일 뿐이다. 이러한 증상은 백인중심의 북미대륙의 기독교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교회를 이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아예 솔직하게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자아중심의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삶에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개인주의에서 우정과 공동체를 향한 깊은 갈구는 삶의 깊은 심층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2. 종교와 신앙의 사유화
현대문화에서는 종교적 신앙과 삶이 개인주의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유화된 모양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가정이나 여가, 개인적 성숙, 종교의 문제는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와 신앙의 사유화는 교회의 선포와 사명을 보다 광범위한 삶의 문제와 투쟁에서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여겨질 때, 그것은 사적인 개인이나 동질적인 작은 집단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일 뿐이다.
3. 관료적 조직에 순응하는 교회
관료제의 특징은 그것이 익명성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과 어떤 고정된 규칙에 집착한다는 것, 권위의 위계서열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관료들의 조직이 된다는 것 등이다. 현대 관료제 아래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기계들 사이의 교통으로 바뀌어져 간다. 다른 모든 기관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역시 관료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 교회는 본질을 망각하고, 이익을 남기려 하는 경제적 단체들의 조직구조와 경영기술을 모방하려고 애쓰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관료제의 압력에 무릎을 꿇을 때, 교회는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세계 안에서의 고유한 사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4. 신앙과 실제적 실천 사이의 괴리
니체(Nietzsche)는 이렇게 말한다. “나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자를 믿게 하려면 그들은 더 나은 노래를 불러야 하며, 그(즉, 구원자)의 제자들은 더 구원된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선포되는 것과 실천되는 것 사이에 분명한 괴리가 있기에, 교회라 불리는 모임에 관한 언어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리며 승리감에 도취된 것으로 들린다. 교회는 하나이다(교회는 오히려 수 없이 많은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당파들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가?) 교회는 거룩하다(교회는 오히려 늘 실수하고 죄짓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교회는 보편적이다(교회가 오히려 더 편협하며 자기의 이익만 챙긴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가?) 교회는 사도적이다(교회는 오히려 사도들보다 스스로를 더 높게 올려놓고 있지는 않은가?)
조셉 하루투니안(Joseph Haroutunian)이 말한 바대로, 이러한 지적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곤란하게 하는데, 그것은 실재(reality)의 교회가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초대교회가 가난하고 약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실재에 대하여 묘사했던 말들은 신빙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 교회에 대한 그러한 묘사들은 왜소한 가운데 주변인으로 몰리고, 박해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지탱해 줄 목적을 가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에 대해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묘사한다면 그 말들은 거짓된 것으로 바뀌고 만다. 그 묘사는 단지 치장만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우리는 당황해 하거나 분노한다. 교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어려움을 직감한 교회 지도자들은 20세기의 에큐메니칼 교회의 표어를 “교회로 교회되게 하라!”(John Mackay)로 정하기도 하였다.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전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된 백성으로 살고 행하게 하라.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실재와 실천(social reality and praxis)이 결여된 온갖 종류의 형이상학적 자화자찬을 벗어버리라는 부름인 것이다.
개인주의화되고, 사유화되었으며(privatized), 관료적이고, 치장에 급급한 형태의 기독교에 결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전적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상징에 표현되어 있는 삶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참된 이해이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 받아 주는 사랑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데 그분은 홀로 있기보다는 계약 가운데 동역자를 가지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또 해방자이며 화해자인 하나님을 믿는데,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자유를 주시는 가운데 하나님뿐 아니라 이웃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또 성령 하나님을 믿는데, 그분은 자유 안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능력이 되셔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앞당겨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인 공동체로 이해하고 구원할 때,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대한 요청은 ‘현대적이기를 바라는 욕구’에서 나오기보다는 교회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복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모든 신앙고백의 깊은 사회적 의미를 잃어버린 데서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신앙과 실천을 하나로 묶지 못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정직하게 시인할 때, 우리는 교회의 신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성령께서 이 세계 가운데 역사 하시는 그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나뉨의 장벽을 허물고 ‘새로운 인간’(엡 2:15)을 빚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 신비는 교회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 하나님은 자기와 다른 존재에 생명을 주고 생명과 능력을 나눠주며 서로 주고받는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분이다. 교회는 모든 사유주의(privatism), 계급주의(classism), 인종차별주의(racism), 성차별주의(sexism)을 넘어서서 관계와 유대와 우정 안에 사는 새로운 인간의 삶을 시작하도록 부름 받는다.
10-3. 현재의 교회모형들에 대한 비판
【문제제기】
표상과 상징(images and symbols) 은 보다 직접적인 신앙의 언어인 반면에, 모형(models)은 우리가 복잡한 실재(reality)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채용하는 이론적 구성물을 지칭한다. 애버리 덜레스(Avery Dulles)는 다음과 같은 교회의 모형을 제시한다.(제도로서의 교회, 신비적 연합으로서의 교회, 성례전으로서의 교회, 전달자로서의 교회, 종으로서의 교회)
이러한 덜레스의 범주들을 사용하면서 밀레오리는 교회상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온 교회모형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교회의 모형들 : 덜레스의 범주와 밀레오리의 방법】
1. 교회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모형 가운데 하나는 구원의 제도(institution of salvattion)로서 교회를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권위를 부여받은 조직과 성직자와 절차와 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분명한 형태와 조직을 가진다. 교회가 제도적 구조를 가지는 것은 교회가 인간적 기관임을 나타내 준다.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안에는 어떤 종류의 구조와 질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낭만주의적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연합한 가운데 교회를 제도로서 파악하려는 견해는 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었으며, 교회의 목적을 값비싼 섬김에 두기보다는 제도로서 존속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는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교회에서의 전형적인 질서는 다수의 의사를 대표하는 형태를 따르기보다는 위계서열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게다가 힘은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여겨지는 몇몇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소수가 침묵하고 있는 연약한 다수의 신자들을 다스린다. 제도를 유지하고, 할 수 있다면 그 힘을 더 확장하려는 모습이 교회의 특징적 정신자세(mentality)이다. 이상과 같은 형태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습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은 개신교교회도 역시 제도적 교회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의 영향 아래서 위계서열이 공동체보다 더 강조되며, 생존의 논리가 섬김의 정신을 대치한다. 로마 가톨릭의 제도주의가 교회의 위계서열적으로 동일시했다면, 개신교 제도주의는 자기 나름의 조직과 정통주의 여부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교회를 제도적으로 동일시하였다.
제도화되어 버린 교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가톨릭교회 안의 자유주의자나 고전적 개신교 원천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남미 대륙의 해방신학으로부터 나온다. 해방신학자들의 눈에 비친 제도주의적 교회는 너무도 자주 전체주의 국가나 착취적인 기업과 비슷한 형태로 그 힘을 행사한다. 보프(Leonardo Boff)는 제도적 교회를 기업에 비유하여 소수의 엘리트가 자본(성례전)을 장악하고 다수를 소비자로 만들어 버린 모습으로 묘사한다. 교회도 권력을 잡고 남용하려는 유혹에 면역되어 있지는 못하기에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에 의해서, 또 복음이 요구하는 그 희생적인 섬김에 의해서 도전받고 변화받아야 한다.
2. 교회의 두 번째 모형에 따르면 교회는 성령의 친밀한 공동체로 묘사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공식적인 기관이기보다는 그 구성원들이 성령의 생동적인 체험을 나누는 친밀한 집단이다. 이렇게 이해된 교회의 중요 과제는 영적인 경험을 더 개발하며 상호간의 인간관계를 더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 교회론은 보다 인격적인 교회이해를 강조하며 모든 신앙인에게 부여된 성령의 은사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 중의 하나로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을 들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영적인 치유와 새롭게 됨을 체험을 특히 강조한다. 이러한 체험을 가진 신자들은 보통 보다 친밀하고 협조적인 집단을 형성한다.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제도교회가 제공해 주지 못하는 보다 인간적이고 평등한 삶의 경험을 맛보게 해준다. 물론 그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아픔과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사역은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의 사역의 많은 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아픈 자들을 치유하는 데에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막 1:32-34)
하지만 이러한 모형의 교회이해에는 또한 약점도 있다. 기독교공동체를 오늘날 유행하는 심리치료적 종교모임이나 감수성 훈련모임 정도로 이해함으로써 교회를 그저 만남의 장소로만 이해하게 될 때 이러한 교회의 이해의 문제들은 보다 분명해진다. 단지 친밀함만을 강조하는 공동체에서 참으로 무엇이 기독교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단지 영적인 것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유대를 체험하는 것이 반드시 기독교 신앙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영성과 친밀성만을 추구하는 모임을 교회가 모방하는 것은 무감각하고 관료적인 사회와 그 비인간화한 삶에 대하여 안식처만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변혁되어야 할 이 사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비판하기보다는 그 사회에서 도피하고 마는 것이다. 교회가 은사와 능력이 나누어지는 성령의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따르면, 성령의 새로운 인도를 받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인간과 세계를 모두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 것이다.
3. 세 번째 모형은 교회를 구원의 성례전(sacrament of salvation)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모형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신학에서 점차적으로 두드러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에 따르면, 교회는 그 예배와 증거와 섬김에 있어서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임재하는 징조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례전적인 삶에 주목하는 가운데 특히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성만찬에 의하여 양육되고 새롭게 되는 공동체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모든 인간에게 확장된다. 이러한 성례전적 모형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제도적 교회모형과 신비적 교회모형에서 분리되어 있는 교회생활의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을 결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식을 중시하는 가운데 교회 중심주의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령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의례 가운데 역사한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로 신앙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를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남미대륙의 해방신학자들에 있어서 성례전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라는 실천(praxis)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교회적으로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성례전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는 삶의 해방을 선포하는데, 이 삶의 해방은 내적인 구조와 사회적 실천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4. 교회의 네 번째 모형은 교회를 복음의 전달자(herald of good news)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이해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모든 만민을 회개와 새 삶에로 부르는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구원자이며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나 개인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문제는 모두가 복음선포의 사명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 모형을 평가함에 있어서 먼저 복음의 선포가 신앙공동체의 첫 번째 과제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편협하게 규정되어 왔다. 이런 모형의 교회이해가 다른 모형을 배타적으로 밀어내고 자신만을 고집하게 될 때, 교회는 말씀선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문화에 대하여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 바리새적인 자세에 빠지게 된다. 그때 교회는 오직 말하기만 하고 듣지는 않게 된다. 복음전달자로의 교회가 지배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자신들이 줄 것이 있을 뿐 아니라 받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모형의 교회이해에는 섬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때로 복음의 선포에 집착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에 대한 관심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다.
5. 다섯째 모형은 교회를 종된 주님의 종으로 규정한다(섬김의 모형:diaconal model). 이 모형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 종된 공동체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교회는 해방, 정의, 평화를 위한 투쟁 가운데 있는 세계를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교회는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돕고 섬기는 가운데 인간 삶의 세속적 문제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교회를 타자를 위한 공동체로 이해하면서 스스로를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종으로서 이해하는 이 모형은 현대 신학의 교회론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이 모형은 여러 가지 갈등 가운데서 교회의 화해의 사명을 강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교회로 하여금 눌린 자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도록 부르는 데에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종의 모형으로 교회를 규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이 모형은 다른 모형에서 많이 발견되는 영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사이의 분리, 복음전파를 향한 관심과 정의를 향한 투쟁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게 한다. 본회퍼와 마찬가지로 칼 바르트도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시므로, 교회도 역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적 특성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존재에 부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이 모형에도 위험적인 요소가 있다. 섬김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여성에게 복종적인 자세를 의미해 왔다. 그리하여 섬김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자유와 우정(요15:15)을 의미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의미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나님 섬김과 이웃 섬김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굴종이나 자기 부정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섬김을 강조하는 가운데 교회는 이 섬김의 근거와 목표가 되는 분을 잊음으로써 교회가 그저 사회활동을 위한 기관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위험이 있다. 정치적 변화를 향한 노력을 하나님의 나라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위험이 또한 언제나 우리안에 있다. 자기비판과 개혁을 향한 개방성이 상실될 때 이러한 위험은 언제나 함께 따라온다. 사회적 활동에 대한 강조는 또 인간의 삶이 자유케 되어야 하는 다른 영역의 사슬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다양한 해방적 관심을 서로 분리하여 적대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론】교회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어떤 역사적 형태의 교회나 특정한 교회론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 시선을 그리스도에 집중시킬 때, 교회는 교회적 삶을 끊임없이 개혁하고 갱신하게 만드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게 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회중심주의에 빠지는 위험은 다른 모형들의 단점을 버리고 오직 장점만을 가진 최고, 최선의 모형을 만들려고하는 우리의 노력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교회론은 자신의 교회론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 증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줄 책임을 가진다. 또 그 교회론은 자신이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들은 이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자유케 하고 화해케 하는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이해를 따르면서, 밀레오리는 교회론이 삼위일체론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삼위일체적 교회론은 그 기본적 실마리를 다음의 사실로부터 찾는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고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적 진술은 하나님이 밖으로 향하는 넘쳐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적인 하나님이며,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한다.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성은 공동체적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화해한 목적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보다 깊은 교제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다. 교회는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 안에서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계 안에서 지어지고 세계로 보내어진 공동체이다. 교회가 자신의 존재와 선교에 충실할 때, 교회는 하나님이 가진 다양성 안의 하나된(unity in diversity)에 상응하는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낼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의 특징이 되는 타자를 향한 포용적인 사랑을 보여 줄 것이다.
10. 새로운 공동체
4. 교회의 고적적 표지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며 오직 그 나라의 증거인 동시에 예기적(anticipatory) 실현일 뿐이기에, 교회의 삶이 여러 가지 역동적인 긴장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긴장의 요소들이 서로 교정해 주며 서로 풍성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결합되지 않고 서로 분열될 때, 이 요소들은 서로 적대적이며 결국에는 교회의 온전성(integrity)을 위협하고 파괴하게 하는 양 극단이 되고 만다.
■ 은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질서와 구조를 가진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것은 파괴적인 것으로서 잘못된 것: 교회 안에서의 직제(order)는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영구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위계서열적으로가 아니라 상호교류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의 직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개혁될 수 있어야 한다.
■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사회활동을 하는 교회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파괴적인 것으로서 잘못된 것: 예배와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봉사 또는 행동과 대립적인 것으로 놓여져서는 안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말씀의 교회와 성례전의 교회를 또 대립적인 것으로 놓는 것은 파괴적인 것으로서 잘못된 것: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개혁교회는 말씀의 교회이지? 좋은 가톨릭교회는 성례전의 교회이지 말씀의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이분법적 발상이다.
■ 포괄적인 교회(inclusive church)와 편드는 교회(partisan church)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파괴적인 것으로서 잘못된 것: 우리는 교회의 포괄성(inclusivness)을 잘못 해석하여 정의와 평화와 같은 중심적인 주제에서 올바른 편을 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란 용어는 모든 종류의 갈등을 피하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용기를 결여한 값싼 단어가 되고 만다. 반면에 교회의 당파성(prtisanship)은 언제나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의도를 가져야 한다. 만일 교회의 보편성(universality)이 특정성(particularity)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교회가 특정한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헌신하는 것은 곧 보편성을 의도하는 것이다.
교회의 고적적인 ‘표지들’(marks)을 올바로 재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도 교회적 삶의 역동적인 긴장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이다. 즉 이것은 참된 교회의 본질적 특성 또는 표지라고 흔히 불려진다.
1. 교회의 하나됨(unity)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의 하나됨은 일차적으로 구조, 직제, 교리, 교회의 사역 등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교회의 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값비싼 사랑 안에 교회가 부분적으로, 잠정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얻어진다. 즉 교회의 하나됨은 타자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찾는 사랑의 하나됨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근거한 교회의 하나됨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이루는 교제를 풍성하게 축하하는 것이다. 천지 창조자로서, 화해자로서, 거룩하게 하는 성령으로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가운데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 하나됨은 결코 질식하게 만드는 획일성이 아니다. 이것은 분화되고 풍성한 하나됨으로써 신앙에 의하여 고백되고, 희망 안에서 기다려지며 현재에는 부분적으로만 경험된다. 하나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의 길 가운데 있는(in via) 존재이다.
2. 교회의 거룩함(holiness)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거룩함이란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자랑하는 바리새적인 분리적 자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자신 안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그 근거를 두는데, 신자들은 그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하여 은혜에 의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성화의 길에 놓여져 있다. 비록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 받아 주시며 사랑하시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이며 정의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가 용기있게 불의를 비판하며,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연대하며,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 우정과 힘을 나누는 데에서 찾아진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지 교회의 삶에 대한 경험적 묘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미래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고 있는 인간 삶의 새로운 모습의 징표(signals)로, 즉 교회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품성과 연단을 갖춘 사람들이 형성되어 자기 중심적이고 소비적인 사회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저항하며 보다 단순한 삶의 양식을 추구하고자 타자의 필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자들을 향해 그렇게 한다.
3.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편성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언제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믿어지는 것’(Vincent of Lerins)이다. 교회는 세계 모든 곳에 현존하며 역사의 모든 때에 존재한다. 반면에 문제는 보편성이 너무도 자주 특정한 문화와 역사의 위편에 자리잡은 일종의 추상적 보편성으로 이해된다는 것과 그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중립적 태도나 방관자적인 태도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보편성의 의미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의미에서 보편적이기 위하여 교회는 편을 들어야 한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우선적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 교회는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면도 강조 될 필요가 있는데, 즉 교회의 편드는 행동이 그 의도에 있어서 보편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당파성(partisanship)이기보다는 분열적이며 파괴적인 당파의식(party spirit)일 뿐이다.
4. 교회의 사도성(apostolicity)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의 사도성이란 교회가 어떤 외적이거나 기계적인 의미에서 사도적 계승의 사슬을 잇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사도성은 안수를 받은 성직자에게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 부름받았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 교회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교회의 사도성은 교회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함을 의미한다. 복음에 충성함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의 사도적 계승은 교회가 선포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는 것에서도 그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그 모습은 교회가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을 결정해야 하고, 교회가 세계 안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모든 면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즉 사도적 교회는 복음에 대한 자신의 신실성을 드러내되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는 약함과 가난함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결론] 니케아 신조가 규정한 교회의 표지들이 모든 기독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참된 표지를 다른 방법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은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교회의 하나됨,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의 근거인가? 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선포와 들음, 그리고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이다. 칼빈과 루터는 다음의 사실에 동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들려지며,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시행하신 대로 집행되면, 의심할 바 없이 그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 개혁자들의 이 같은 견해는 자신의 종교개혁운동 안에 있었던 분열적 경향을 막는 데에, 그리고 그들의 종교개혁이 니케아 신조의 교회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항하는 데에 필수적이고도 적절한 견해였다. 사실상 이상의 두 종류의 교회의 표지는 서로 보완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두 종류의 교회의 표지가 참으로 적절한가에 대하여 다시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 시대 이후로 교회론의 한 원칙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어디에 계신가? 마태복음 25:31 이하에 명시된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 아픈 자들, 그리고 갇혀 있는 자들 가운데 계신다. 이 땅의 버림받은 자들을 돕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단지 귀의 교회(복음이 올바로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만도 아니고, 단지 눈의 교회(믿는 자들이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곳)만도 아니다. 참된 교회는 밖으로 펼쳐진 돕는 손의 교회이다.
11-2. 성례전이란 무엇인가?
1. briefing: 성례전이란 형체 없고 추상적이며 비가시적인 말씀이 가시적이며 입체적인 동 시에 동적인 면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러한 성례전은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화 체설로 까지 확대 해석하여 예배의식으로서 매우 중요시 여겨졌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 는 성경말씀과 접목시킴으로서 살아 계신 성령의 실제적인 역사를 의식했다고 볼 수 있 다. 양편 모두 좀더 발전된 형태로 성례전이 실제적인 성도의 삶과 윤리의 영역과의 연관 성을 갖게 되면서 이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주님과 성도의 만남으 로서 진행되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본다.
2. summary
2.1. 성례전의 정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가 은혜를 매개하는 필수적이 수단이다. 성례전에 대한 정의는 어거스틴과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에서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시행하신 거룩한 예전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새 계약이 봉해지며 적용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이 눈에 보이게 증표로 나타났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약속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로 단면적이며 문자적이다.
2.2. 성례전의 변천: 종교개혁교회는 성례전의 숫자를 둘 또는 셋으로 축소하였는데 세례와 주의 성찬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성례전으로 여겨졌다.
첫째, 말씀과 성례전은 분리될 수 없다.
둘째, 말씀과 성례전에서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신실한 응답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두 가지 강조점은 성례전의 성격과 그 효력을 마술적(롬 카톨릭의 화체설)으 로 보려는 견해를 저지하였다.
2.3. 성례전 해석의 전통적인 유형
2.3.1. 첫 번째 해석의 유형
성례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초대교회로부터 중요한 두 가지의 경향은 첫째는 성례전 안에서, 그리고 (1)성례전을 통해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객관적 실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2)성례전이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의식으로서 올바로 집행되고 아무런 방해물이 없을 때 은혜와 구원이 성례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말한다. 이는 심지어 ‘불멸의 약’으로 보았던 이그나시우스(Ignatius)와, 도나투스 초종자들에 대항하여 성례전의 유효함이 사제의 자격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어거스틴 역시도 (1),(2)를 지지했다.
2.3.2. 두 번째 해석의 유형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일종의 극적인 징표(dramatic signs)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효력이 없고 오직 신앙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때 그 효력을 가진다. 즉 우리가 회개하며,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가 충성된 자가 될 것을 서약한다. 성례전의 목적은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 또는 경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다 객관적인 견해의 위험은 이 입장이 신앙적 응답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순전히 객관적으로만 살펴질 때 성례전에 의하여 매개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비인격화되며 물질적이 된다. 반면에 보다 주관적인 견해의 위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약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2.4. 성례전 해석의 현대적인 추세
전통적인 성례전의논쟁으로 야기된 곤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한가지로서 그리스도를 성례전의 중심적 내용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성례전의 신학을 보다 삼위일체적으로 전개하는 노력이 있다. 그리하여 칼 바르트(K. Barth), 칼 라너(K. Rahner), 에드워드 쉴레벡스(Edwards Schillebeeckx) 등은 예수 그리스도가 원초적 성례전이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결정적인 만남, 구원의 만남이 일어난다. 성례전을 이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다시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세상적인 형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은혜가 인격적인 임재로서 인간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은혜가 인격적인 임재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포되어진 말씀과 시행된 성례라는 구체적이고 세상 적인 것의 매개를 통하여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신다”라고 해석한다.
2.5. 결 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성례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그 의견이 점차로 좁혀져 가는데 즉 (1)말씀과 성례전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2)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에 있어서 삼위일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해석을 전개한다. (3) 전 창조의 세계를 하나의 성례전적인 세계로 보는 새로운 이해와 관련하여 성례전을 해석한다. (4) 성례전,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세 영역 등 이와 같은 모든 요소가 서로 연관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Ⅵ-3. 세례의 의미
신학대학원 40302007 김 연 희
기독교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입교하는 성례이다. 세례는 자신의 삶을 통해 계속 지속될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사람이 물에 잠기거나 세례받는 사람 위에 뿌려진다.
1. 세례의 근거
세례를 시행하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세례는 예수의 명령에 기초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그 자신이 세례를 받으신 예수의 행위에 기초하기도 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받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순종함으로 응답하면서 그의 소명을 시작한다. 이 세례의 행위를 통해 예수는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과 연대관계에 들어간다. 결국 그의 수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값비싼 사랑과 섬김의 삶이 예수의 세례받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받음은 예수께서 이 세상의 죄인과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를 이루는 것과 예수가 그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세례의 사건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의 사건에 참여하는 첫 시작을 의미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옛 삶의 방식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의 방식을 향해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그들의 전삶은 신앙의 여정이 되며, 그 여정 가운데서 세례에서 얻은 새로운 정체성을 더 충만하게 실현해 간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사랑안에 참여하게 된다.
2.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세례의 의미
신약성경은 세례의 의미를 여러 가지 풍성한 표상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표상들은 모두 다 중요하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한다.
1)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통해 옛 삶에 대하여 죄가 행사했던 능력이 부숴진다. 물로부터 다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기초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6:3-4)
2) 세례는 죄에 얼룩진 삶으로부터 씻겨짐으로 묘사된다. 물이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듯이, 하나님의 용서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낸다.(고전 6:11) 그리스도에 의해 용서받고 깨끗케 된 사람들은 세례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으며 새로운 삶의 윤리를 실천하게 된다.
3) 세례는 성령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과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는 것으로 묘사된다.(요 3:5, 행 2:38)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세례와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4) 세례는 연합(Incorporation)의 표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서로서로 하나가 되고,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과 하나가 된다. 세례를 통하여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개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새로운 사회의 시민(엡 2:19)이 된다. 이 새로운 사회 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인의 구분이 없어지며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어진다.(갈 3:28)
5) 세례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받음으로써 다가올 추수의 ‘첫 열매’(롬 8:23)로서 성령을 받으며,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을 고대하며 정의와 평화가 완전히 실현될 것을 희망하며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연대를 이룬다.
3. 유아세례의 문제
만약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삶, 죄로부터 씻겨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받음, 하나님의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을 바라는 가운데 믿음의 여정을 시작함 등을 의미한다면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침례교의 전통에서는 유아세례를 주는 것에 대하여 여러 세기 동안 반대해 왔다. 더욱 최근에는 개혁교회의 전통 안에서 칼 바르트도 그러한 반대를 제기하였다.
1) 바르트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
①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유아세례가 사도시대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으나,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해 보면 유아세례는 오직 사도시대 이후에 들어가서야 교회에서 시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②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출생에 의하여 반쯤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해로운 선입관을 넣어줄 수 있다. 그리하여 은혜는 값싼 것이 되며, 복음은 거의 강제적이거나 반강제적인 방법에 의하여 전해진다.
③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지는 유아세례가 자유롭고 책임적인 기독교 제자도로서의 세례의 의미를 모호한게 한다. 세례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행위(성령세례)가 있으며, 후에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위(물세례)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선물이 있으며 후에 인간의 응답이 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며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만약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책임적이며 기쁨에 찬 응답의 행위라면, 유아세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세례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한다.
2) 바르트의 반대에 대한 반론
① 성서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약의 약속이 신자와 그의 자녀들에게도 주어진 것(행 2:39), 사도시대에도 때로는 전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은 것(행 16:33)이다. 하지만 유아세례가 신약성서시대의 교회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 곧바로 유아세례의 타당성과 연결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②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유아세례가 여러 가지로 잘못 사용되었다는 바르트의 두 번째 주장을 우리는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거의 모든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의식을 향해서도 던져질 수 있다. 어떤 교리나 의식이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어진 것은 그것의 시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지 반드시 그것의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유아세례를 신학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가? 유아세례와 어른 세례 모두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청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로서 세례를 받든, 어른으로서 세례를 받건 간에 우리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가운데 하신 일을 증거하는 데에 우리의 신앙은 이 사실에 그 기초를 둔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세례는 그 의미에 있어서 상호 배타적이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이다. 어른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이며 자유롭고 책임적인 응답적 측면을 더 잘 부각해 준다. 어른세례는 명시적이고 공적인 고백과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인격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른세례만이 배타적으로 시행된다면, 그것은 신앙을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에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선행하는 인간의 행위로 볼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어른세례는 거짓된 개인주의를 조장하여 신앙과 기독교 제자도에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가는 과정에서 강조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다. 즉, 공동체는 신앙의 삶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올바로 양육할 책임을 공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지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주도권을 선언한다. 유아세례는 인간에게 아직 아무 능력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을 잘 드러내 준다. 칼 라너가 지적했듯이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사랑하심을 선언한다. 유아세례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가 사랑 가운데 이 아이를 도와서 신앙 가운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라가게 할 책임이 있음을 또한 표현해 준다. 유아세례는 또 세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과정의 시작이라는 것과 이 자라감의 과정은 그것을 돕는 신앙의 공동체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③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유아세례가 제자도의 삶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응답의 측면을 왜곡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시행이 값싼 은혜를 베푸는 것과는 다른 것임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위임하는’(commissioning) 예전이 유아세례와 세례받는 사람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응답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와 신앙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문제는 단지 시간의 문제이다. 세례받는 사람의 편에서 볼 때 신앙의 응답은 세례의 사건과 동시에 일어나거나 곧바로 일어나야만 하는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강제적이 아니라 인간에게 시간의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세례받는 어린이에게 성숙해져 가는 시간을 허락하고 그가 스스로 설 수 있어서 후에 그의 삶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는 제자도의 부르심에 자유롭고 기쁘게 응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내에 의지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 과정에는 유아의 세례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은 부모의 신앙이며 공동체의 신앙인데, 이 신앙 안에서 어린이는 세례를 받는다.
④ 성령께서 유아 안에서 역사하시는가? 제프리 브로밀리는 이 질문에 긍적적으로 답변하는데, 성령은 부모, 보호자, 교사, 친구들을 통하여 유아들과 어린이들의 삶 속에서 역사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역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를 통하여 왜 성령께서 역사할 수 없겠는가? 성령의 사역이 성, 인종, 계층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듯이 나이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안는다.
3) 유아세례의 문제에 대한 결론
① 유아세례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아세례는 허용될 수 있다. 그리고 유아세례가 허용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다음의 질문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유아세례를 마술적인 값싼 은혜의 한 형태로 시행하는가, 아니면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세례받는 아이들의 부모와 공동체가 자녀들을 주님의 사랑과 훈계 안에서 양육할 책임을 가짐을 명확히 깨닫는 가운데 유아세례를 시행하는가?
② 올바로 시행될 대 유아세례는 창조와 구원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의 징표가 된다. 우리가 신뢰와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 응답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유아세례는 힘있게 나타내 준다. 또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선물인 것을 선포한다.
③ 또한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인간의 유대의 징표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은 그 어느 단계에도 하나님이나 상대방으로부터 떨어진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회적 차원을 가지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의 변화뿐 아니라 가족이나 공동체와 같은 우리 삶 전체의 변혁을 의도하기에 유아세례의 시행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며 의미있는 행위이다.
④ 유아세례는 신앙공동체가 특별히 세례받는 아이의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계약의 책임을 가짐을 보여준다. 유아세례가 올바른 가운데 진지하게 시행된다면, 아이들의 부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아이들을 신앙의 삶 가운데 돌아보고 양육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세례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표상(Image)에 대한 문제
세례의 신학에 있어서 특별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례를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남성 중심 언어를 피하기 위하여 전통적 삼위일체의 이름 이외의 다른 아림을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에 관하여 배타적으로 남성적인 표상만을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조장할 수 있기에 도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표현은 그렇게 쉽게 내팽개쳐질 수는 없다. 창조자, 구속자, 보존자 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단순히 기능적인 용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우리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한 어떤 종류의 대안도 허락하지 않는 예전적 근본주의도 피해야 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어떤 마술적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의 사귐을 형성하시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을 오직 은혜에만 기초한 새로운 인간의 공동체 안으로 부르신다. 브라이언 우렌은 찬송과 기도와 예전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진지한 신학적 작업, 보다 창의적인 상상력, 그리고 보다 책임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교회는 고전적 삼위일체의 표상들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삼위일체의 표상들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
11-4주의 성찬의 의미
4012038 오중석
주의 성찬의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고린도 전서 11:23이하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그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주의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탱되는 성례전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장하고 양육되는 성례전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생명과 사랑을 나눠주심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과 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에 능력을 주시며 이 세계 안에서 섬김의 삶을 살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주의 성찬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회상하게 하며 세계의 창조와 보전 가운데 부어진 하나님의 모든 선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신앙의 공동체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단지 기억이 아니며 떡을 떼고 먹는 것을 통하여 포도주를 붓고 마시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며 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의 사역이 완성될 것을 열렬히 고대하며 동역자로 일하고 있다.
주의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광범위하고 날카로운 논쟁이 있어 왔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신학적 진술들이 절대적이기보다 잠정적인 것과 교회 안에 있는 교제의 실재가 언제나 신학적 이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주의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보도록 하자!!
①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 입장(화체설-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
- 이 견해는 떡과 포도주의 요소를 이루는 실체(Substance)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뀌어 지고, 요소를 이루는 외적 형태들은 그대로 남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인 개념과 구분을 전제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해석이 마술적 해석에 가깝다고 하지만 원래 이 화체설의 의도는 성만찬의 마술적 해석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카톨릭 신학에서 화체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제안되고 있는데 실체의 변화가 아닌 의미의 변화나 목적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의 요점은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맥락 및 사용과 분리되어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맥락과 사용의 변화는 의미와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 견해가 아직 카톨릭의 공식적 가르침으로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요소들의 변화에 대하여 여러 교회들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② 루터교의 공재설(Doctrin of consubstantiation)
- 루터는 카톨릭의 화체설을 부인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설은 매우 객관적이며 실재를 강조하는 교리이다.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의 요소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 현존한다고 말하며 루터의 교리는 단지 영적으로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심지어 자격 없이 성찬을 먹는 자들까지 와도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③ 칼빈주의적 전통 또는 개혁교회 전통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신앙으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그와 연결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의 성만찬 행위에 현존하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과 관계없이 고립된 그 떡과 포도주의 요소들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육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현존하신다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우리의 신앙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오직 가현적으로나 오직 관념으로서만 그리스도께서 현존함을 말하지 않는다. 칼빈에 따르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현존하심을 믿음으로 받는 것 사이에는 성령께서 실현시키는 상응성이 있다. 칼빈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성례전은 단 한치의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④ 기념설(memorialist Doctrine)
-이는 주의 성찬의 집행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난, 죽음, 부활 가운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신 것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성례전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술함에 있어서 생생한 ‘기억’이 ‘참된현존’의 언어를 대신하게 된다.
*주의 성찬을 해석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이 있다.
첫째, 일차적으로 주의 성찬을 희생으로 보는 것과 둘째, 일차적으로 주의 성찬을 만찬으로 보는 것이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주의 성찬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찬미와 감사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의 성찬을 희생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주의 성찬은 본질적으로 만찬인데 성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나누는 만찬으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유와 화해의 사역이 완성될 종말에 있을 커다란 메시야적 잔치를 미리 여기서 맛보게 하신다. 주의 성찬은 하나님에 은혜에 의하여 인간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는지를 또한 보여준다. 주의 성찬의 의미는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죄인들,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눈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의 성찬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자유케 되고 화해된 새로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보증한다. 모든 사람이 이 식탁에 초대된다. 특별히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자가 초대되는데 이렇게 해석이 될 때 오늘 이 세계에 있어서 기독교윤리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이해하는 데에 심오한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제12장 기독교 희망
(조직신학개론)
기독교 신앙은 기대하는 신앙이다. 바로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역이 완성될 것을 애타게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과 신조에서 이 표현을 살피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마 6:10)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생’(사도신경),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을 희망하면서 그것이 올 것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 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희망’(sp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희망을 떠나서는 모든 기독교 교리는 왜곡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에서 뿐 아니라 제일 처음에서도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다가오는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향해 방향 지워져 있다.
1. 핵무기 시대에서의 희망의 위기
성경은 희망의 책이다. 아부라함과 사라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희망을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다. 신약성경도 역시 기대의 영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는 말씀과 행위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선포한다. 하지만 교회가 팽창하고 그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며 마침내는 콘스탄틴 황제 때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것에 대한 희망과 이 세계의 변혁에 대한 희망이 점차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났다. 바로 교회적인 승리감에 도취되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이 사라져 갔다.
1)시대적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면;
1.계몽주의-20세기 초: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묵시적 희망을 무지와 두려움의 산물로서 간주하며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인간역사의 진보를 믿는 자유주의적 진보론이다. 거기에 기독교 희망을 이성의 한계 안으로 축소시키는 데에 기독교 신학은 상당한 정도로 순응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도덕적 진보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을 향한 권고의 말로 이해되었다.
*바르트: 기독교 교의학 뒷부분에 자리잡은 하나의 보잘 것 없고 전혀 도전이 되지 않는 한 장이 되었다고 말함.
*성서적 종말론에 대한 변화의 이해에 영향을 준 사건들: 두 번의 세계대전, 유태인 대학살, 핵무기의 발달, 생태학적 재앙, 사회적 소요와 혁명적 운동들 등.
2.근대 시대: 마르크스주의 유토피아 사상의 대두, 바로 인간에게 성서적 희망을 세속적으로 투쟁적인 방향으로 바꾼 희망을 제공했다.
*에른스트 블로호: 「희망의 원리」에서 신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전개, 인간의 경험과 문화는 모든 소외를 뛰어넘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열정적인 희망에 의해 움직여진다.
*블로호: 희망의 철학은 성경 안에 나타난 혁명적이고 묵시적인 희망을 올바로 물려받은 것이다. 여기서 블로호의 관심은 성서적 희망을 비신화하여 그것을 이 부르주아 세계에 더 잘 맞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데 있지 않고, 성경 안의 위험스런 기억과 종말론적인 장면 안에 담겨진 사회 비판과 예언적 비전을 풀어놓는 데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약속만 하고 줄 수 없었던 그 삶의 완성을 향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3.핵무기 시대: 교회 안에서 대두되는 근본주의적 묵시주의자들의 주장 안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희망의 위기. 이들은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며 어둡고 음침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할 린제이 이다.
*린제이의 기독교 희망: 린제이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바탕으로 더욱 커가고 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고 성경에 예언된 무시무시한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시간표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려고 한다.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기본 시간으로 설정하고 종국에는 ‘휴거’를 통해서 구출받아 파괴의 이 세상으로부터 건져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형태의 묵시주의 문제는 무엇인가?
①성경의 자의적 조작, 린제이는 성경본문을 역사적 맥락에서 끄집어내어 자신의 틀에 꿰어 맞춤으로 써 성경을 가지고 자의적인 묵시주의 게임을 하고 있다.
②린제이의 묵시적 시간표는 결정론적 입장이다.
③이들이 종국에 바라는 희망은 휴거이다.
④린제이의 해석에는 ‘십자가의 신학’이 결여되어 있다.
4.신학적 그리스도인의 기대: 우리는 현대종말론 논쟁에 있어서 네 가지의 갈등을 말할 수 있다.
①미래적 종말론(슈바이처)과 실현된 종말론(도드)사이의 갈등, 신약성서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하는 실재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미래에 있는가?
②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종말론과 사회적, 집단적 종말론 사이의 갈등.
③역사적(근대 서구신학)과 우주적 종말론(동방교회신학, 과정신학) 사이의 갈등.
④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음 맞추는 종말론(신정통주의)과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종말론(사회복 음주의, 최근의 실천신학) 사이의 갈등.
결론: 현대에서 만나는 여러 갈등들은 성서적 종말론에 대한 일방적 해석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성취와 공동체적인 성취를 다 끌어안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와 우주적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게 한다. 이 핵무기 시대의 절망적 상황과 거짓 희망들 가운데서 기독교 희망은 그 모든 풍성함을 다 표현해야 한다.
12-2. 기독교 희망을 해석하는 원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시며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그 사랑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증오를 이길 것을, 하나님의 정의가 불의를 이길 것을, 하나님의 자유가 모든 사슬을 풀어 줄 것을, 하나님과의 공동체가 모든 분리를 이겨낼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의 권세를 이길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이 세계가 현재 겪고 있는 고뇌를 모르고 그 고뇌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값싼 낙관주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세계는 죽음이 최종적인 말로 보인다. 우리의 삶과 역사와 자연 안에서 작용하는 죽음은 생물학적인 단절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구원받은 생명의 성취를 위협하는 부정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의 능력이다. 병과 소외, 불의, 억압, 전쟁, 그 밖의 많은 악들이 ‘우리가 이 삶 가운데 죽음 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죽음과 무덤의 실재를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로서의 생명의 의미와 하나님의 은혜로써 주어지는 부활의 기쁜 희망의 의미를 참으로 깨닫기 시작할 수 있다.
기독교 희망의 여러 가지 차원들
① 개인적 차원
죄와 악의 죽음의 가운데 기독교 희망은 여러 가지 차원 중 하나가 개인적 삶의 완성에 대한 희망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의 초점을 희망의 정치적 차원으로 옮긴 뒤에 개 인의 죽음과 관련한 희망의 문제는 주변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칼 라너를 비롯한 몇몇 가톨릭 신학자들은 죽음의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여기서 각 사람의 죽음은 신뢰와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아래 자신을 내어 주는 마지막 기회로 그려진다. 우리 가 이러한 죽음의 신학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지 신학은 개인의 죽음의 문제와 삶 의 완성에 대한 희망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 조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으며,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과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 새로운 사람의 시작을 경험한다면, 개인적 삶의 완성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 희망의 중심부분이 된다.
② 공동체적 차원
하지만 기독교 희망은 개인적 삶의 완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 희망은 개인적 성취 와 공동체적 완성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안의 사람의 변혁을 위해 일하고 또 희망한다. 개개인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 친구와 이웃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은혜 가운데 우리가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벗어날 때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변혁 없이는 우리의 구원이 얻 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만일 우리의 희망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다면 그 희망은 고립되어 있는 개인의 구원을 향한 희망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향한 희망이 어야 한다.
③ 우주적 차원
기독교 희망은 또한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 희망은 창조 전체를 포괄한다. 우리 가 고대하는 완성은 우리가 삶과 죽음 가운데 연결되어 있는 하늘과 땅의 변화와 갱신을 떠나서는 발견될 수 없다.
이러한 차원의 최후의 승리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성경과 신앙 고백의 종말론적 상징의 의미를 다시 서술하려는 모든 노력을 인도해야 한다. 오늘날의 기독교 종말론에서 아직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볼 때, 기독교 희망을 해석하기 위한 기본적 해석학적 원리를 수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1. 기독교 희망의 언어는 한계에까지 확장된 언어이며, 상징과 형상에서 매우 풍성한 언어이다. 우리는 미래에 관하여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아는 것처럼 가장해서는 안 된다. 희망을 나타내는 상징적 언어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나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 부활한 육체,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형상과 은유와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2. 기독교 희망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인데, 이 영광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부활에 계시되어 있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 희망의 하나님은 창조주, 구속주, 완성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피조물과 생명을 나누고 사랑의 공동체를 창조하여 서로를 풍성하게 만드는 가운데 서로 다름의 요소를 잃지 않고 모두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생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3. 기독교 종말론적 상징들은 이원론적으로 해석되지 말아야 하며, 삶의 모든 차원에서 완성과 온전함을 향한 열망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기독교 희망의 해석에 있어서 모든 해로운 이원론을 넘어서야 한다: 영적인 것과, 물적인 것, 개인적 완성과 공동체적인 성취, 인간을 위한 희망과 모든 창조를 향한 희망,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구현되는 가운데 그 완성을 발견한다.
4. 올바로 해석될 때, 기독교의 종말론적 상징들은 모든 역사적이고 문화적 업적들을 상대화한다. 기독교 희망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현재는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유토피아사상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 희망은 현재의 불의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절대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분명히 대항해야 한다. 유토피아적 희망은 인간 안에서 모든 고통을 없애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며 역사를 종결짓는 자원과 능력을 발견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희망의 신학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완성이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임을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희망은 현상유지에 대해 비판할 뿐 아니라 진보의 계획과 혁명적 전략을 절대화하려는 어떤 노력에 대해서도 비판을 던진다.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상징은 그러므로 전적인 혁명, 계속되는 혁명의 상징이다.
5. 기독교 희망과 그 충성한 상징들은 인간의 창조적인 행동을 유도하고 낳는다. 올바로 이해될 때 기독교 희망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고, 인간과 사회로 하여금 “이 세계 가운데 인간의 삶을 계속적으로 인간적으로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게 한다. 이 점은 이전에 언급된 기독교 희망과 종말론의 비판적이고 상대화시키는 기능과 모순되는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과 사람이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자만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물론 종말에 대한 기독교 상징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한다. 이러한 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한 그 과제를 위해 보내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사역 가운데 인간의 상상력과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3. 기독교 희망의 고전적 상징들
전통적으로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과 인간 역사의 완성에 대한 네 묶음의 상징들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첫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 희망이 여러 가지 사물들(그것들이 아무리 가치있는 것일지라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어떤 분에 대한 희망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생존하는 것에 대해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참여할 것을 희망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에 대한 맹목적인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그 분은 그 예기적인(proleptic) 오심이 이미 우리 안에 최종적 오심에 대한 희망에 불을 붙이신 바로 그분이다.
셋째, 다시 오시는 주님의 이러한 현존의 경험은 모두가 파편적이며 임시적이다. 구원사역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으며 진행중이다.
2.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기독교 희망의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묵시적 상징이다. 부활을 희망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포괄성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가진다.
첫째, 부활의 상징은 영혼과 육체의 두 측면을 포괄한다. 영원불멸에 대한 믿음은 인간 생명 안에 본질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가정하는데, 이 부분은 영혼이 임시로 거하는 썩어지고 사라질 육체와는 분리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하나님의 선물로 희망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육체없는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존재에 새 생명을 주기를 원하신다.
둘째, 부활의 희망은 나를 위한 희망 또는 인간만을 위한 희망이 아니라, 온 우주를 향한 희망을 꿈꾼다.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되고 변혁된 세계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희망을 가진다.
셋째, 부활에 대한 포괄적 희망이 이미 죽은 자뿐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방법은 포괄적 공동체 안에서 시작하고 또 끝난다.
3. 기독교 종말론에 있어서 최후의 심판의 상징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복수심 때문에 심판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둘째, 하나님은 참으로 ‘소명하시는 불’(히12:28-29)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은 사랑하시는 심판의 불이고, 심판하시는 사랑의 불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불이다.
셋째, 최후의 심판 상징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세 가지 강조점
①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들의 죄는 드러나서 정죄를 받지만 우리의 죄는 그저 용서받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②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의 심판주가 되실 것이다. ③지금이나 그 때나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곧 자기를 내어 주시며 남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4. 영원한 생명(천국)의 약속과 영원한 죽음(지옥)의 가능성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을 나타내는 상징, 곧 천국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운데 있는 영원한 생명을 지시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해석될 때, 그 다스림은 개인적 삶과 공동체안의 삶의 완성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영생에 대한 성서적 형상들은 매우 공동체적이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에 계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삶은 고갈 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여 우리에게 결코 지루함을 느끼도록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계속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충만함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반면에, 지옥이란 다른 존재들과 유리되고 다른 존재를 무시하는 가운데 자신만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자신 안에만 집중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무서운 탈진과 지루함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넘쳐서 결국은 가장 완악한 피조물까지도 구원받을 것인가? 바르트가 제안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긴장을 이론적으로 풀려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거나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구원을 이루시도록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2-4. 종말론과 윤리
기독교 희망의 상징들(영광가운데 그리스도의 오심,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영생의 약속, 그리고 영원한 죽음의 경고)은 모두가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심오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기독교 희망과 윤리 사이의 연결을 잃어버렸기에 이 연결을 되찾는 것은 우리 시대에서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와 변혁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제자도의 삶에서만 기독교 희망의 참된 뜻을 얻을 수 있다. 종말론은 윤리를 불러일으키고, 윤리는 종말론을 필요로 하는 기독교 희망과 기독교 제자도 사이의 변증법적 과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1.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신음하는 피조물과 연대하도록 힘을 주며 만물의 갱신을 향한 투쟁을 지속하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바라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바라며, 하나님의 부활의 약속을 바라는 진정한 기독교 희망은 신자들로 하여금 고통당하는 인간과 신음하는 피조물과 연대하도록 힘을 준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기독교 희망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삶에로 인도한다.
기독교 희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귀중히 여기며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셨으며, 이 세계와 계속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한다. 몰트만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안에서 고통당하며 그것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계와 갈등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모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침투해 오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 가운데 하나는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과의 연대감을 더욱 넓고 깊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유케 된 우리는 우리편을 향한 편협한 희망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희망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우주를 향한 희망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서 지금 현재 있는 우주뿐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파괴하지 않을 때 존재하게 될 모든 미래의 우주까지도 포괄하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현재 세대뿐 아니라 이전과 이후의 모든 세대를 다 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기독교 희망의 비전과 상징들이 단지 유용하기 때문에 지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자유케 하며 화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에 신실하시다는 그 진리가 성서적 희망의 비전에 의해 표현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후 거의 2천 년이 지나간 가운데 세계는 여전히 많은 사슬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바라며 신음하고 있다. 민족들과 나라들을 갈라놓는 많은 장벽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핵무기, 화학무기, 생물학 무기 등이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있으며,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넓혀져만 간다. 또한 지구 곳곳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성행하고 있으며 환경 오염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인종과 성, 문화 사이의 새로운 연대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며, 모든 피조물과 공동운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우리의 희망 가운데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제한되지 않는 연대를 이루도록 부름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사랑하시는 분이며, 공동체 가운데 사시는 분이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삶 안에 참여함으로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 생명이 펼쳐지고, 악과 죽음과 파괴의 세력이 극복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투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는 것의 의미를 배운다.
만약 기독교 희망이 연대를 향한 새로운 정신을 북돋운다면, 값비싼 제자도의 삶은 우리에게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만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제자도를 실천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은혜를 희망함의 의미를 배운다. 이러한 제자도의 실천은 복음을 선포하고 다른 이들과 용서, 평화, 화해, 해방, 희망을 나누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러한 실천은 또 남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의 사도적 축복을 전해 주는 것을 포함한다. 교회는 기다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또한 행동한다. 기독교 희망은 도피적 희망이 아니라 창조적 희망이다. 이 희망은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앞서서 실현하는 것을 돕는다.
하나님의 통치의 이러한 앞선 징조들이 질병과 고통을 이기는 모든 승리와 정의 및 평화를 가져오는 모든 승리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계를 완전하게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순례하는 사람들이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바라는 ‘본향’이 있고, ‘더 나은 나라’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선포하면서 상상력과 힘을 다해서 많은 ‘작은 희망들’의 실현을 위해 애써야 하며, 우리 가족과 공동체와 나라와 국제사회에서 더 큰 정의와 더 큰 평화와, 더 큰 연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을 때 우리는 이 지구를 위해서 가장 충실할 수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 작업을 무용하다고 포기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섬김과 값비싼 제자도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할 정도로 이 세상에는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고, 파멸과 죽음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희망은 우리를 붙들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무관심과 자포자기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또 하나님이 물주시고 열매맺으실 희망과 새 삶의 씨앗을 뿌리도록 부름받고 있다.
기독교 희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대를 가짐으로써, 또 예수께서 담당하신 그 고난받은 자들과 함께 걸어감으로써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함을 깨달을 수 있다. 오직 갈보리와 우리에게 그곳에서 고통당하신 분을 연상케 해주는 이 세계의 많은 장소에서만, 우리는 회개하기를 배우기 시작하며 사랑하기와 희망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기독교 희망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이들을 위한 정의, 자유, 평화의 삶을 향하여 투쟁하며 노력하는 것,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완성되도록 갈구하는 것,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음을 확신하며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새로운 이유를 계속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하나님의 의와 자유와 평화로 가득찬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희망한다.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나라들을 치유하실 것과, 모든 곡하는 것과 죽음이 사라질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영생이 있을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볼 것을 희망할 뿐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할 것을 희망한다. 기독교 희망은 우리가 감히 받을 자격도 없고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놀라운 완성을 향한 희망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의 공동체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에 대한 희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 희망, 사랑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끝나는 것이 적합하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