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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2부  (라틴어본)

번역:  권  진호1)

 

지금까지  내적  인간과  그의  자유  및  그  토대가  되는  믿음의  의에  대

하여  말하였다.  이  믿음의  의는  율법도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율법이나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줄로  착각한다면,  이는  오

히려  믿음의  의에  해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부분,  즉  외적  인간을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믿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과  지금까지  말해진  것에  의해  마음이  상

해서,  “믿음이  모든  것을  다하고,  믿음  하나만으로  의롭게  되는데  충

분하다면,  왜  선행을  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게으

르게  앉아서  아무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며  믿음만으로  만족하자는 

말인가?”하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고자  한다.  나는  대

답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아,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철저하고도  완전히  내적이며  영적인  인간이

라면,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까지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육신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장래의  삶에서  완성될  것에  있어서  단지  시작하여 

성장할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가  이

생에서  갖는  이것을  “성령의  첫  열매”라고  불렀다.  즉,  우리는  미래

에  완전한  몫과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된다.  이것[이생]과  관련되는  것

이  무엇인가는  이  논고의  처음에  이미  명백히  말했다:  “그리스도인

은  모든  사람에게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굴복하여  있다.”  그리스도

인은  자유로운  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종인  한, 

1)  이  부분은  이미  출판된  이선희  교수의  번역에  기초하여  역자가  수정하며  번역하

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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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살펴

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적  인간은  영과  관련하여  믿음을  통하여 

충분하게  칭의되고,  그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믿음  자체와  이  부요함은  장래의  생명에  들어갈  때까지 

날마다  자라야  한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  지상  위에  가멸적인  삶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이제  행위가  시작되며,  여기서  우리는  게으르게  가

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금식과  깨어있기와  일하기와 

다른  적절한  수고들을  통하여  육신을  단련하고  육신을  영에  굴복하

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의  목적은  육신이  내적  인간과  믿음에  순종

하여  이에  일치시키기  위함이며  또한  육신을  벌하여  그  본성에  따라 

내적  인간을  방해하거나  반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적  인간

은  하나님과  일치하게  되고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

어졌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은  자신에게  이러한  좋은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

로  인하여  기뻐하며  만족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기쁨으로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을  유일한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육  안에서,  세

상을  섬기고  그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저항하는  의지를 

만난다.  믿음의  영은  이것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의  영은  그 

저항하는  의지와  싸우고  그것을  억제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이

는  바울이  로마서  7장  22-23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나의  속사람으

로서는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지체 

속에  한  다른  율법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다른  율법은  나의  마

음속에  있는  율법에  대항하며  나를  포로로  잡아  죄의  율법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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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간다.”  또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

들에게는  설교하고  나  자신은  망하지  않도록  나의  육신을  제어하고 

나를  종으로  삼는다”(고전  9:27).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이

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그들의  육을  그  탐심과  더

불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목적으

로  행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그런  잘못된  생각을  참을  수  없다.  왜

냐하면  믿음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

위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의도로  행해야  한다.  즉,  육신이  그러한  행

위를  통해  굴복되고[순종하게  되고]  모든  악한  탐심으로부터  정결하

게  되어,  육신의  눈이  오로지  악한  탐심을  몰아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믿음을  통하여  영혼은  정결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영혼은  나머지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육신이  영

혼과  마찬가지로  정결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영혼은  모든  것들

이  영혼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인

간은  자신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게으를  수  없으며,  오히려  육신을 

순종시키기  위하여  많은  선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  이  행위들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발적인  사랑으로  행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을  바라보는

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매우  열심으로  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일치

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어느  정도로,  또는  (사람들이  말하듯)  어떤  규

정에  따라  자신의  육신을  절제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즉,  육

신의  교만과  탐심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만큼만  금식하고,  깨어있고, 

노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대담하게  착

각하는  자들은  탐심을  죽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행위  그  자체에

만  관심을  두어  가능한  한  많고  대단한  일들을  행했을  경우에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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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롭고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의 

사고력을  때때로  손상시키고,  본성을  해치거나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  오직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삶과  믿음을  모르는  엄청난  어리석음이

다!

 

우리가  말한  것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

고자  한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순전하고  분에  넘치는  자비를 

근거로  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행위

는,  마치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의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의  후손들

이  행하는  행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그들의  행위에  대하

여  창세기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인간

을  낙원에  놓으시고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도록  하셨다.”  그  때  아담

은  의롭고  완전하고  죄가  없는  상태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상태였

다.  그래서  그는  낙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을  통하여  의롭게  되고 

올바르게  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도  다만  그가  게으르게  빈둥

거리지  않도록  낙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을  주신  것이다.  그가  죄

를  범하지  않았었다면,  그  일은  완전히  자유로이  행해진  행위였을 

것이고,  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을 

행해졌을  것이다.  그는  이  의를  이미  온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이  의가  우리  모두에게도  선

천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믿는  사람의  행위도  그와  같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다시  낙원에  놓

여졌고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는  의롭게  되거나  의로운  상태

로  있기  위해서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게  빈둥거

리지  않으며,  자신의  육신을  준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행위가  필요

하다.  행위는  믿는  자에게  이런  식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심만

을  목표로  하여  행해지는  자유의  행위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믿음

과  완전한  사랑을  갖도록  완전히  새로이  피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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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은  계속  성장해야  하지만,  이것도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

라,  믿음과  사랑  그  자체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거룩한  주교가  교회를  봉헌하거나,  아이들에게 

견진례를  주거나  그의  의무에  속하는  다른  일들을  행할  때,  그는  이

런  행위들을  통하여  비로소  주교로  임명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가  이전에  주교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행위  어떤  것도  유효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리석고  유치한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믿음을  통하여  이미  임명되었기 

때문에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선행을  통해서  더  거

룩하게  되거나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용은  오로지  믿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이전에  이미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의  모

든  행위는  전적으로  무효한  것이며,  참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두  명제가  타당하다: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악한  행위가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행하는  것이

다.”  이와  같이  항상  사람의  본질  또는  인격  자체가  여하한  선행에 

앞서서  먼저  선해야  하며,  선행은  선한  인격으로부터  뒤따라  나와야 

한다.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쁜  나무가  좋

은  열매를  낼  수  없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낼  수  없다.”(마 

7:18).  분명한  것은  열매가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나무

가  열매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반대로  나무가  열매

를  달고  있는  것이고,  열매가  나무에서  자라는  것이다.  열매  맺기  전

에  먼저  나무가  있어야  하며,  열매가  좋은  나무  혹은  나쁜  나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먼저  있으며  나무가  좋은  열매  혹은  나

쁜  열매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좋은  행위  혹은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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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행하기에  앞서서  먼저  사람의  인격  자체가  좋든지  나쁘든지 

한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

니라,  그들  자신이  그들의  행위를  선하거나  악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을  수공업에서도  볼  수  있다.  나쁜  집이나  좋은  집이 

나쁜  목수나  좋은  목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목수가  좋은  집

을  만들고,  나쁜  목수가  나쁜  집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현

하면  이렇다:  어떠한  행위도  그  자체가  장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인  자신이  그  장인다운  행위를  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있

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불신앙 

가운데  있는가에  따라서,  그의  행위도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불

신앙  가운데  있는가가  결정된다.  그  행위가  믿음  안에  있으면  선한 

것이고,  불신앙으로  행해졌다면  악한  것이다.  반대는  성립할  수  없

다.  즉,  행위에  따라  사람이  믿음  안에  있거나  불신앙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가  사람을  믿는  자로  만들  수  없듯이, 

그를  또한  의롭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믿음은  믿음  있는  자를  만들고  의로운  자를  만드는  것  같

이,  또한  선행을  행하게  만든다.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며, 

사람이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의로워져야  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인

격을  적절하고  충분하게  칭의하고  구원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라

는  사실은  온전히  명백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위해서  행

위와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

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참된  자유를  통해  그가  행하는  모든  것

을  자발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할  때  그는  자신의  유익

이나  구원을  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을  구한다.  왜

냐하면  그는  그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미  모든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구원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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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믿음을  갖지  않은  자에게도  선행은  의와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무익하다.  반대로,  악한  행위가  그를  악하게  또는  저주받게  만드

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인격,  즉  나무를  악하게  만드는  불신앙이 

악하고  저주받은  행위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선하게  되거

나  악하게  된다면,  그것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또는  불

신앙에서  오는  것이다.  이는  시락서  10장  12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죄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에  있다”,  즉  믿지  않

는  것에  있다.  그리고  바울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한

다:  “하나님께  오는  자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같은  것을  가르치신다:  “좋은  나무를  심으라.  그러면  그  열매가  좋을 

것이다.  아니면  나쁜  나무를  심으라.  그러면  그  열매가  나쁠  것이

다”(마  12:33).  이  말의  의도는  이렇다:  “좋은  열매를  갖기를  원하면, 

좋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하라.”  그러므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

는  자는  행위로  시작하지  말고,  인격을  선하게  만드는  믿음으로  시

작하라.  왜냐하면  오직  믿음만이  인격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고,  오직 

불신앙이  인격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위를  통해  사람들  앞에서  선하거나  악하게  된다는  것은  맞

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선함이나  악함이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외양과  외적인  것

에  지나지  않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속는다.  그래서  그들

은  우리가  선행을  통해서  칭의를  받는다고  감히  쓰고  가르치는  것이

다.  아무튼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으며,  나름

대로의  길을  간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도  속은,  속이는  자들이요, 

더욱  악하여지는  자들”(딤후  3:13)이요,  “스스로도  눈먼,  맹인의  길

잡이”(마  15:14)다.  그들은  많은  행위들을  행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진정한  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  관하여  디모데후서  3장  5-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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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  ... 

그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눈먼  자들과  함께  오류에  빠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

은  행위나  율법,  또는  행위에  관한  교리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

니,  행위로부터  눈을  돌려  인격을  보아야  하며,  이  인격이  어떻게  의

롭다함을  받는지를  보아야  한다.  인격은  행위와  율법을  통해서가  아

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과  믿음을  통하여  의

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행한  의의  행위  때문

이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딛  3:5)  그의  은혜의  말씀을  통하

여  우리를  믿는  자로서  구원하신(고전  1:21  참고)  지존하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근거로  선행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지,  행위에  관한  모든  가르침들을  어떤  원리에  따라서  이해해야  하

는지를  이제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행위가  의로움을  얻기  위한  수

단으로  여겨지고  지옥의  리워야단과  잘못된  생각으로  행위를  통해 

당신이  감히  의롭게  되고자  한다면,  행위는  당신을  이미  구속하는 

것이고  믿음과  더불어  자유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첨

가물을  통해  행위는  더  이상  선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저주  받아

야  할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행위들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

이고,  행위가  이룰  수  없는  칭의와  구원을  믿음을  통하여  이루고자

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신성모독적인  무례함으

로써  행위를  추구하며,  은혜가  하는  직무와  은혜가  받을  명예를  찬

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선행에  매달리며  선행을  가르친다.  우리가  선행을 

저주하는  까닭은  선행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방금  말한  그  신성모

독  때문이며,  선행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의견  때문이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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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선행은  단지  외양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사실은  선한  것이  아니

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는  것이며,  “양의  옷을  입은  노략하는 

이리들”(마  7:15)처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리워야단”,  즉  행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진정한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행위의  성자들에게서 

잘못된  생각의  파괴자인  믿음이  와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기  전까

지는  이  생각은  제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이 

잘못된  생각을  스스로  몰아내지  못한다.  아니,  인식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이런  생각을  지극히  거룩한  의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습관이  더해져  비뚤어진  본성을  더욱  강화하면  - 

신성모독적인  선행의  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  이  잘못된 

생각은  치료불능의  악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오도하여  회복불가능

의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회개와  고백과  보상에  대해  설교

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좋지만,  만약  여기에  머무른  채  믿음을  가

르치는  데까지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기만하는  악마

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로  - 

“회개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믿음의  말씀을  첨가하셨던  것이다(마  3:2;  4:17).

 

그러므로  한  가지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두  가지  말씀을  모두 

설교해야  한다.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듯이”(마 

13:52),  율법의  음성과  은혜의  말씀  두  가지를  다  설교해야  한다.  율

법의  음성이  들리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고  자

신의  죄들을  인식하게  하여,  뉘우치며  삶의  태도를  개선하는  쪽으로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냐하면  여기에  머무는  것은  마치  상처를  내고  매주지  않고,  다치게

하고  고쳐주지  않고,  죽이고  다시  살리지  않고,  지옥으로  끌어내리고 

다시  끌어올리지  않고,  낮추고  다시  높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말씀과  용서를  약속하는  말씀도  설교해야  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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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말씀 

없이는  율법의  행위와  뉘우침과  회개,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헛되

이  행해지며  가르쳐지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회개와  은혜를  설교하는  이들이  몇몇  남아있다.  그

러나  그들은  회개와  은혜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배우도록  하고자 

하는  목적과  생각  없이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을  설교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은혜는  하나

님의  약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는  로마서  10장  17절의  말씀과 

같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나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위협과  두려움에  의하여  낮

아지고  자기인식을  하게  된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에  의해  위로를  받고  높여지게  된다.  그래서  시편  30편  5절의  말씀

이  이렇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

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행위  및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몸에  행하

는  행위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이웃에

게  행하는  행위들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죽

을  몸에  사는  동안  자신에게  무엇을  행하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

이  아니라,  이  지상  위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자신의  몸을  복종시

킴으로  그만큼  더  올바르고  자유하게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14장  7-8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무도  자기를  위

해서  살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는  주를  위해  살고,  죽는  자는  주를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상의  삶에서  이웃에  대하여  아무  행위 

없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들과  함

께  말하고,  행동하고,  교제하는  일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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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도가  사람  같이  되어서  삶의  방식에  따라서도  사람  같이  나타나

셨다”(빌  2:7-8)는  말씀과  바룩  3장  38절에  써있는  것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다니셨다”는  말씀과  같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런  행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신의  의와  구원을 

위해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오로지  염두해야  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생각은,  그가  행하는  행위

는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유익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이웃

의  어려움과  유익  외에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곤경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  우리는  일하라고  명령

했기  때문이다(엡  4:28).  여기서  그는  ‘우리  자신을  먹이기  위해서’라

고도  말할  수  있었지만,  ‘곤경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라

고  말했다.  그렇다,  육신에  속하는  것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기독교

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고  잘  지내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일할  수  있고,  어떤  일을  추구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를  섬겨야하며  우

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바,  서로  열심히  챙겨주고,  서로  무거운  짐을 

져주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게  된다(갈  6:2).  보라,  이

것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삶이다.  여기에  진정으로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갈  5:6)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다:  그리스도인

은  스스로  이미  믿음의  충만함과  부요함으로  넘치도록  채워져  있기 

때문에,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매우  자유로운  종의  일을  기꺼이  행

하여,  대가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  얼마나  부요한지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  가르

쳐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훈이  있고,  사

랑의  위로가  있고,  영의  교제가  있다면,  이제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

게  하여,  너희가  한  마음이  되고,  동일한  사랑을  갖고,  뜻을  같이  하

고,  서로  의견이  같으며,  어떤  일도  경쟁심이나  헛된  명예심으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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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라.  오히려  겸손함으로  서로를  나  보다  높이  보며,  누구나  자신

의  것을  챙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것을  챙겨주라(빌  2:1ff).”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의  규칙으로  정하였음을  명백

히  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모든  행위

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넘치도록  부

요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다른  행위들과  인생  전체는  자발적인  기

쁨을  가지고  그의  이웃을  섬기고  선을  행하기  위한  여분의  몫이다. 

 

이러한  예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들어  말한다:  “너희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런  마음을  가져라.  그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계셨지만,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도둑질로  여기지 

않으셨고,  그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  그리고  사람과  같

이  되셨고  행동  면에서  사람과  같이  보이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

종하셨다”(빌  2:5ff).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  “종의  형상”,  “행동”, 

“사람과  같이”라는  사도  바울의  표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들을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인  본질을  의미한다고  본  자들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해서  사도  바울의  이  지극히  유용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

록  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리

스도께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계셨고,  모든  좋은  것에 

있어  넘치도록  부요하셨다.  의롭게  되고  구원받으시기  위해  행위를 

하실  필요가  없었으며  고통  역시  당하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왜냐하

면  그는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변함없이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랑하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다.  또한  그는  마땅히 

그렇게  하실수도  있지만,  우리에  대한  어떤  권세도  자기  것으로  여

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반대로  다른  사람들과  닮기  위해  애써  노동

하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  삶의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  하나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으셨다.  마치  그는  이  모든  것을  필요한  것처

럼,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갖지  않은  것처럼  행하셨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다.  즉,  우리를  섬기고,  종의  형

상  가운데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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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믿음을  통

하여  완전히  충만하여  다른  무엇이  필요치  않으셨던  것과  같이,  믿

음을  통하여  소유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에  만족해야  한다.  단,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이  믿음을  완전해질  때까지  자라게  하는  점만

을  제외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의  생명과  의와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

은  그리스도가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수여하여  그를  유

지하고  호감이  가도록  한다[구원하고  용납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위에서  말했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하지만 

[모든  행위를  할  필요가  없지만],  그는  이  자유를  다시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과  같이  되어야하고  외적인  모습에

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이웃을  섬기고  돌보고  그에게  행하되,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는  것

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바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이웃에게  행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  가치  없

고  저주받은  인간인  나에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공

로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순전히  자발적인  자비로  말미암아  의

와  구원의  모든  부요함을  주셨다.  그래서  다음  사실을  신뢰하는  믿

음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즉,  지극히  귀중한  것으

로  나를  넘치도록  채워주신  그런  아버지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기꺼이  바라시는  모든  것을  자유하고  즐겁고  진심을  다해  자발적인 

열심으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

신을  나에게  내어주신  것같이,  나도  내  이웃에게  일종의  그리스도로

서  나  자신을  줄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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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생에  사

는  동안  내가  보기에  이웃이  필요로  하고  좋아하고  구원받는  것  이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이렇게  믿음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주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

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기꺼이  섬기고자하

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자유한  마음이  흘러  나와,  [이웃이]  감사하

든  감사하지  않든,  칭찬하든  책망하든,  자신에게  유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이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는  또한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감

사하든  또는  감사하지  않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완전

히  자유롭고  기꺼이  그  자신과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  그가  감사하

지  않는  자들에게  이것을  허비한  것이  될지,  혹은  보상받게  될지  관

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께서도  모든  자들에게  모든 

것을  부요하게,  완전히  값없이  나누어주시며,  “선한  자들과  악한  자

들  위에  그의  해를  떠오르게  하심으로”(마5:45)  행하시기  때문이다. 

아들도  그와  마찬가지인데,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부요하게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로지  기꺼이  응낙하는  기쁨으로 

행하고  인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명백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값진  선물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때,  우리는  즉시  바

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부어

지게  된다”(롬  5:5).  이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자유로우며  즐겁고  모

든  일에  능하고  적극적이며,  모든  곤경을  극복하는  승리자며,  이웃을 

섬기는  종인  동시에  만물의  주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

게  주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헛되이  태어

나신  것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신대로  행하기에  그리스도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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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맛보거나  느낄  수  없다.  우리의  이웃이  곤경에  처해  있고  넘치는  우

리의  소유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곤경  중

에  있었고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했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값없이  도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의  몸과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값없이  도와야  하며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일종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는  서로에게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

도이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부요함과  영광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졌

으며,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죄와  죽음과  지옥의  주인이며, 

또한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고  복종하며  유익하게  한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날  온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으

며,  설교되지도  추구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

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렇게 

불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안에  부재하시지  않고  거하시는  그

리스도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불린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

를  믿고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행하신  것

처럼  이웃에게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인간의  교리

를  근거로  오로지  공로와  보상과  우리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도록  가

르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세보다  더  엄격한  행위감독관

[행위로  내모는  교사]으로  만들어버렸다. 

   

복된  동정녀  마리아가  자신을  이러한  믿음의  뛰어난  예로  보여주었

다.  누가복음  2장  22절에  써  있듯이,  그녀는  모세의  율법(레  12장)에 

따라  다른  모든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다.  물론 

마리아는  율법을  따라  자신을  정결하게  할  의무나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유한  사랑으로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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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복종했고,  그래서  다른  여인들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을  모

욕하거나  멸시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로서  자유롭고  값없이 

행한  것이다.  우리의  행위도  이런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즉,  의롭

다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앞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행위를  자유하고  기쁨으로  행해

야  한다.

 

그리고  바울도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는데(행  16:3), 

그  이유는  그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할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

라,  믿음의  자유를  아직  이해할  수  없었던  믿음이  약한  유대인들을 

모욕하거나  멸시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믿음이  약한 

유대인들이  믿음의  자유를  무시하며  할례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때,  바울은  이에  저항하며  디도의  할례를  허락

하지  않았다(갈  2:3).  왜냐하면  그는  믿음이  약한  어떤  사람도  모욕

하거나  멸시하고자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의  뜻에  때때로  복종했듯

이,  그는  다른  경우에  있어서  믿음의  자유가  완고한  율법옹호자들[의

의  냉혹한  광신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거나  멸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약한  자들은  한동안  보호해주고,  완고한 

자들에게는  항상  저항하면서,  모두를  믿음의  자유로  돌이키기  위하

여  중도의  길을  걸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노력을  해야  한다.즉,  로

마서  14장  1절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

은  수용해야  하나,  완강히  행위를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감하

게  저항해야  한다.  이들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더  상세히  말할  것이

다. 

 

그리스도도  마태복음  17장에서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성전세를 

내라고  요구했을  때,  베드로  사도와  말씀하시되,  왕의  자녀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고,  이에  베드로는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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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올라오는  첫  번째  물고기를  잡아  그  입을  열어보

라.  거기에  있는  동전을  취하여  나와  너를  위하여  주어라”(마 

17:24ff)  라고  명령하셨다.  이  예는  우리의  주제에  아주  적합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자신과  자기의  제자들을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자요,  왕의  자녀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다.  그리스도에게  이  행위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것

이  아니었듯이,  그의  모든  다른  행위들과  그의  제자들의  행위들은 

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행위들은  모두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에  오는  것이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

여  그리고  모범으로  자유로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3장  1절  이하와  디도서  3장  1절에서  가르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권력에  복종하며  어떤  선한  일도 

기꺼이  행하겠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을  통하

여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믿음

으로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영의 

자유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권력자들을  섬기기  위함이며  자발적인 

사랑  안에서  그들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구제기관과  수

도원과  사제들의  행위들도  마땅히  이러한  종류의  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직업과  신분에  따라  행

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을  복종시키

고  또한  육신의  훈육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고  그

들의  뜻에  따라  자발적인  사랑으로  행하는데,  그렇게  행할  때  특별

히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다든지  공로를  쌓는다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어리석게  신뢰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오로지  믿음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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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교황과  주교들과  수도원들과  교회들과 

영주들과  시의원들이  제시하는  수없이  많은  계명들과  규정들에  안심

하고  자신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일부  어리석은  목

자들은  이런  계명들과  규정들을  교회의  계명들이라  부르면서  (이것

은  단지  교회의  계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에도)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금식하고  기도하고,  사람들이  명하는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의롭다함이나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하

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황과  주교와  이  공동체와  저  행정관,  또

는  나의  이웃에게  복종하면서  그들을  위한  본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며  겪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서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셨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나를  위

하여  행하시고  당하신  것과  같다:  그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셨지

만,  나를  위하여  율법에  복종하셨다.  독재자들이  폭력을  사용하고  불

의를  행하며  요구하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  아닌  한, 

우리에게  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행위들과  율법들에  대한  확실

한  판단과  신뢰할만한  구별을  얻어낼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눈멀고 

어리석은  목자이고,  누가  참되고  좋은  목자인지  알  수  있다.  즉,  어

떤  행위든지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거나  또는  (이웃이  하나님께  거역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이웃을  섬기는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

라면,  그것은  선한  행위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도  아니다.  그러

므로  나는  오늘날  진정한  기독교의  구제기관들,  수도원들,  제단들, 

미사들의  수가  매우  적거나  혹은  전무하다는  사실을  크게  염려한다. 

또한  금식이나  특정한  성자에게  드리는  특별  기도도  마찬가지다.  나

는  다음과  같은  것을  우려한다:  이  모든  행위들을  통하여  우리의  죄

들이  속죄되고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면,  이  행위들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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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소멸된다.  이런  불행은  그

리스도인의  믿음과  자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많은  목자들이  이러한  무지를  의도적으로 

더욱  부채질하며  믿음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는바,  백성들을  칭찬하

면서  면죄부로써  바람을  불어  넣지만,  믿음은  전혀  가르치지  않으면

서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을  내도록  선동하며  몰아간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조언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이  기도나  금

식  혹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교회에  무언가를  기부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을  통해  세상에서의  유익이나  영원한  유익을  얻으려는  목적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  목적이  여러분의  믿음에  부당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직  그  자체만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준다.  그러므로  오로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행위

나  고난을  통해  훈련되어  믿음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는  것을  값없이  주고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어라.  그래

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재물을  통하여  번성하며  형편이  나

아지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진정으로  선하게  되고  그리스

도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통하여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고,  그  믿음  때문에  당신이  넘치게  가졌으므로,  당신의 

선행이  여러분의  선행이  육신을  제어하기에  넘쳐날  정도라  한들,  그

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서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이웃을  수용하며  그  이웃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받아들이시고  마치  그  분이  우리 

자신인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사셨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로부터  그 

모든  좋은  것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왔고  지금도  흘러  들어오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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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찬가지로  그  모든  좋은  것이  우리로부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의  죄들을  덮고  이 

죄들에  대해  은혜를  간구하기  위해,  나의  믿음과  의가  하나님  앞에 

세워져야  한다.  이  죄들을  내  자신이  짊어져야  하고,  이  죄들을  마치 

내  것인  것처럼  극복하기  위해  노예처럼  힘쓰고  애쓸  의무가  우리에

게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요,  그리스도인  삶의  진정한  규범이다.  이

런  사랑과  규범이  진실하고  순수한  곳에,  진실하고  순수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사랑에  관

하여  말할  때,  사랑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

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

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자기  자신을  넘어  올리워져 

하나님께로  인도되며,  사랑을  통해  다시  자기  자신  아래로  내려가 

이웃에게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하나님과  하나

님  사랑  안에  머문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말

씀하신  것과  같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후로  너희는  하늘

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

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당신이  보다시피  이 

자유는  영적이고  참된  자유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죄와  율

법과  계명들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이는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9절

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의로운  자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자유는  마치  하늘이  땅보다  뛰어난  것처럼,  다른  모든  외적인  자

유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자유를 

깨닫고  그  자유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시를  기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