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웨슬리선집종합정리 신대원.hwp
1.“인간이란 무엇인가?”
4131002 정용은
4132019 김은영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1. 아니 나는 무엇인가? 신묘막측하게 만들어진 기이한 기계이며, 어느 정도 분량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흙의 분자들이 연결되어 머리카락보다 수 천 배나 더 가느다란 무수히 많은 섬유질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섬유질은 상호 엇갈리면서 기이한 방법으로 박막을 형성하고, 이 박막은 또 기이한 방법으로 동맹들과 정맥들과 신경들과 선을 형성한다. 이 기체는 전체적으로 구석구석 항시 순환하는 여러 가지 유체를 담고 있다.
2. 이 순환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공기가 필요하다. 공기는 공기 유입의 기능을 가진 기관에 의해 체질적으로 유입되고, 이때 정기적으로 불과 결합됨으로서 물과 공기와 불을 함께 허파 안으로 흡입하게 된다. 불은 물과 공기로부터 불리 되어 피 안에 유입되어 섞인다. 유입된 불은 동물성 열을 발생시킴으로서 생명력의 불꽃을 구성하게 된다.
3. 불에 관해 조금 더 고찰하겠다. 공기로부터 끊임없이 분리되는 불을 몸에 공급하는 허파는 숨 들이마시기를 통하여 공기와 물과 불을 함께 유입시킨다. 그리고 불을 공기와 물로부터 분리시키고 각각의 공기 관들은 모두 혈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불은 피와 섞이게 되는 것이다. 공기와 물은 불과 불리 되자마자 숨을 내쉴 때 밖으로 배출된다.
4. 이 생명의 샘, 즉 이 생명력의 불이 없이는 혈액의 순환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유체의 움직임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감각이라는 것과 여하한 근육의 움직이라는 것 모두 불이 없이는 순환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심장의 힘이 3,000 파운드의 무게에 맞먹는 힘 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혈액을 동맥에 흐르도록 추진하기 위해선 100,000 파운드의 무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혈액 자체에 섞여 있는 이 정기적 불에 의해서, 그리고 혈액이 흐르는 동맥의 탄력성 있는 힘의 조력을 받아서 결과 될 수 있는 것이다.
5. 그러나 이 네 가지 요소, 흙과 물과 공기와 불의 신기한 혼합 이외의 전혀 다른 무엇을 내 자신 안에서 나는 볼 수 있다. 내 안에서 나는 생각하는 무엇을 발견한다. 사물들을 감각을 가지고 감지한 후 다음으로, 사물에 대한 내적 개념들을 형성한다. 그런 뒤, 이 사물들에 대하여 “판단한다.” 즉, 앞에 형성한 개념들이 상호간에 일치하는지 아닌지 검토한다. 그런 다음에 이것은 이 사물들에 대하여 “추론한다.” 즉,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이끌어낸다. 이것은 그 자신의 활동에 대하여 “반추한다.” 이것은 상상력과 기억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의 활동은, 특히 판단의 활동은 세분화될 수 있다.
6. 그런데 이 사고하는 원리가 내 몸의 어느 부분에 있는 지,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을까?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 사고하는 원리가 나의 손이나 발이나 다리나 팔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나의 몸통에도 자리를 잡고 있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것은 나의 머리의 어느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송과선에 있는지 아니면 뇌의 어느 부분에 있는 지 나는 결정할 수가 없다.
7. 이 내적인 원리는, ‘정욕들’ 또는 ‘정서들’이라 불리는 다른 내적 감정들 전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들을 일반적인 명명으로는 ‘의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내적인 원리의 원천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곳이 행동의 원천인 것 같다.
8. 그러면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혼은 공기이거나, 흙이거나, 물이거나, 불이거나, 아니면 이 네 가지를 모두 혼합한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네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혼합되어 있든 간에, 여전히 수동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족하다고 본다. 그 네 가지 중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배는 움직이지 않는가?’ 아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배는 그것이 떠 있는 물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은 움직이는가?’ 아니다. 공기는 모든 분자에 붙어 있는 정기적 불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 자체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움직임의 근원인 전능하신 영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영혼은 내적 원리에 의하여 모든 부분을 임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9. 영혼은 몸의 모든 움직임을 다스린다. 그러나 다음의 예외가 있다. 몸에는 생명의 지속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움직임들이 있다. 폐의 팽창과 수축, 심장의 수축과 팽창, 동맥들의 맥박 치기, 그리고 혈액의 순환이 그것이다. 이들은 나의 의하여 임의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에 필수적인 이 움직임들을 제외하고는 나는 내 몸 전체의 움직임을 지시한다. 내 의지의 단 한 번의 활동으로써 나는 나의 머리와 눈과 손과 또는 내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 ‘하늘에서 증거 하시는 세 분이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가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듯이,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서 행하는 것인가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10.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나의 몸과 구별된 무엇이다. 몸은 썩어 먼지로 화할지라도, 이 스스로 움직이는 사고하는 원리는 그의 모든 정욕들과 정서들을 다 가지고 계속 존재할 것임을 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영혼과 몸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가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하게 될 때에도 나는 다시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11. 나는 한 가지 속성을 더 스스로 의식한다. 자유라고 불리는 속성이다. 이것은 매우 자주 의지와 혼동된다. 자유는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과 상상들에까지 다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많은 예외 없이, 우리의 말들과 행동들에 일반적으로 미친다.
내가 선택하는 대로, 나의 눈을 뜨거나 아니면 감을 수 있고, 말을 하거나 침묵할 수 있고, 일어서거나 아니면 앉을 수 있고, 나의 몸을 전체를 나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비록 내 본성의 부패 때문에 나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나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조력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12. 죽음은 본래 몸으로부터 영혼의 분리이다. 그러나 이 분리가 언제 일어나는 것인지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숨이 완전히 사라졌었으나 그 생명이 회복되었던 사람들의 경우가 있고, 혈액이 중단되었을 때 심장이 다시 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몸 전체가 굳고 얼음처럼 차갑게 됐을 때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인가? 적절한 조치를 받음으로써 생명도 건강도 되찾은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사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그 분리의 순간을 말씀하실 수 있다.
13. 그러나 우리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싶고, 또 깊이 고찰해야 할 것은 인간의 목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지는 것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작 이 한 목적을 위해서인데, 그것은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의 생명이 주어지거나 지속되는 것이다.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우리를 통해 위대하신 창조주를 영원히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섬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14. 그러나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다 더 낮아 졌다. 그 안에서 피조 된 하나님의 형상도 상실했다. 그가 옛 계약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다. 더 이상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이 아니라, ‘믿어라, 그러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화목제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죄의 세력으로부터, 죄의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들어갈 것이다.
15. 이것을 기억하라!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요, 영원토록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 여하한 피조 된 좋은 것, 즉 해 아래 있는 여하한 것 안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피조된 것이 아니다. 모두 ‘헛된 그림자 안에서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는 그 유일한 목표, 즉 하나님을 향해 간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의 인도자가 되실 것이다.
2.원 죄
(Original Sin)
4132018 김 여명
4131001 이 후민
창세기 6:5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1. 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저술들은 인간의 존언성에 대한 화려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존재에게 신세지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족하며, 그 자신의 능력으로 살 수 있으며,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별로 열등하지 않은
존재처럼 묘사한다.
1.비 기독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가운데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질에 관해 말할 때 마치도 그 본질이 무죄 순결하며 완전한 것처럼 장엄하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설명들이 금세기에 특별히
성행한다.
1.이런 설명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다르게 말하는 것, 즉 몇 가지 한계에 속하는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순진무구하며 현명하며 덕스럽다고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불명예가 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은 유행에 뒤쳐지는 것이 되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런 설명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은 이렇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었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다.’, 영적으로 죽었다,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상실했다. 타락하고 죄인이 된 아담이 ‘그 자신과 같은 모양의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다른 형상의 아들을 낳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결한 것으로부터 누가 순결한 것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범죄와 죄들 가운데서 죽어있다.’
즉 그가 원래 그 안에서 피조괴었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늘에서 인간의 자녀들을 내려다 보셨을때’,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이
이 땅에 관영함을 보셨다’, 얼마나 관영했던, ‘인간의 마음의 생각 속에 모든 계획이 오직 악할뿐이요,
지속적으로 악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다. 나는 이것에 근거하여 첫째로, [노아]홍수 이전에 인간들은 어떠했나 하는 것을 보여줄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지금도
동일한가 아닌가를 탐구하겠고, 셋째로 몇가지 추론을 덧붙일 것이다.
1-1)첫째로, 나는 이 설교의 본문을 설명함으로써 홍수 전에 인간들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 주어진 설명에 전적으로 의존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던 것이고, 하나님이 잘 못 보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의 죄악이 아니다.
이 말은 인류 전체, 인간 본질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인구 가운데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가 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에 의하여 조금 후에 전반적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그 보편적 죄악의 상태에서 유일한 예외였다.
1-2)‘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의 생각 속에 모든 계획을 보셨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 인간의 내적 사람, 인간 속에 있는 영, 그의 내적 및 외적 움직임의 원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계획을 보셨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샘으로부터 물이 자연히 흘러나오듯이, 비롯되어 나오는 말과 행동, 즉 그 각각 근원이 되는 샘에 따라서 선하거나 또는 악하거나 한 모든 말과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1-3)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이 악하다는 것을 보셨다.’ 하나님의 본질에 반대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반대되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대하여 가져야 할 본질적인 관계에 대하여 반대되어 악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셨다.
1-4)그러나 이 악에 선이 섞여 있지 않았겠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 마음의 모든 계획이 오직 악할 뿐임을 보셨다’고 되어 있다.
인간의 본질은 모두 순전히 악할 뿐이었다. 인간의 본질은 [이런 상태로] 자기 자신과 철저히
일치했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본질을 가진 어떤 무엇과도 섞여 있지 않았다.
2-1)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있는 것을 아시며, 마음을 감찰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에 남겨 놓으신 전 인류에 대한 진정한 설명이다.
우선 이것은 분명하다: 성경은 사람들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2)인간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설명은 매일의 경험에 의하여 확증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이해력의 눈을 열어주시자마자 곧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처해 있었던 그 상태를 보게 된다.
그 때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특히 그들 자신이, 나면서부터 본래 ‘전적으로 헛된 존재’,
즉 어리석음과 무지, 죄와 악함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2-3)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차라리 ‘이 세상 안에서 무신론자들’이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하나님과의 사귐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로부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원하고 능렸 있는 존재의 실제를 추론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정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와
사귐은 갖지 못했다. 우리는 온 세상의 한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를 알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아들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아버지 이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사람 이외에는 아들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4)인간이 나면서부터 갖추고 나오는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여, 이 문제를 일단락 짓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는 어떤 고대의 왕에 대하여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그는 두 유아를 태어나자마자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장소로 옮겨 놓고,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하게 하고, 사람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게 하면서 성장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이 감금상태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들은 전혀 언어를 말하지
못했고, 다른 짐승들의 소리 같은 말이 아닌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들은 들짐승과 마찬가지로, 들나귀 새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2-5)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면서부터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자연적 상태 안에서 과연 누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시각의 훨씬 위에 있으며, 우리의 시각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나면서 부터 본래적으로 이것에 도달할 수가 없다.
2-6)우리는 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다.’ 이토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눈 앞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2-7)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세상 안에서 무신론자들’이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의 상채에서는 철저한 우상 숭배자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우상숭배인가? 우리는‘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의 우상들을 세워 놓았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마땅히 드려야 할 명예를 우리 자신에게 돌릴 때 우리 자신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pride)이 우상숭배다.
2-8)그러나 교만만이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그에 대하여 죄책이 있는 바의 유일한 우상숭배가 아니다. 사단은 또한 자기의지라는 형태로 우리 마음에 그 자신의 형상을 인쳐 놓았다. 사단은 하늘로부터 내쫗기기 전에, ‘나는 북방의 편에 않겠다’고 말했다. 나의 창조자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나 자신의 의지를 행하고 내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 뜻대로 했을 뿐이다’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은 사실상 마귀와 내가 합의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단과 나는 우리의 행동을 한 가지의 동일한 원리에 따라 통제하기 때문이다.
2-9)우리가 마귀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마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러나 다음 발걸음에서 우리는 사단을 뒤로하고 사단에게 그 책임이 없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로 달려 들어간다. 세상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지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것이다.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보다 더 우리에게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것이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만족을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들에게서 추구하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것이 있는가?
그들은 썩어 없어질 짐승들과 같은 수준으로 갖고 있는 욕망들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하여 마치도 무관심하고 멀미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 느껴 오고 있는 그런 욕망들에 의하여 정복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토록 경멸하면서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무지가 놀라운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오만이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감각의 즐거움을 욕망하는 것은, 순수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두 모든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것이다.
2-10) '안목의 정욕', 즉 상상의 즐거움을 욕망하는 것도 그러하다. 욕망 자체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그 목마름은 영혼 안에 계속 고정되어 있다. 아니, 이 욕망은 들어주면 줄수록, 점점더 증가한다.
2-11) 그리고 우리의 본성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세상사랑이라는 세 번째 증세는 '이생의
자랑', 즉 칭찬을 바라는 것, 사람으로부터 오는 명예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본성의 위대한 찬양자들은 이 욕망이야말로 명백히 나면서부터 본래적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기독교인이고 이교도고 간에 모두 '서로 간에 주는 명예'를 추구하고 있고, 스스로 잘한다느니 못한다느니 하며 판단하는 재판관으로서 이렇게 서로 간에 명예를 주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은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인 마음의 표징이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명예'에 만족하는 것을 비도덕적인 마음의 표징으로 간주한다.
3-1)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몇 가지 결론은 첫째로, 일정한 교리들의 체계로 이해된 범위 내에서의 기독교와 가장 세련된 다른 종교들 사이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차이점을 하나 배울 수 있다. 다른 종교들도 많은 인간들이 많은 악에 감염되어 있다고 인정하며, 심지어 그들이 그런 악으로 향하는 경향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난 선이 그 악을 압도한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인단이 '죄 가운데서 잉태되고', '죄악 가운데서 조성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 안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하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순종할 수 없는 육적인 마음'이 있으며, 이것이 영혼 전체를 감염시켜서, '그의 안에는, 그의 육신 안에는' 그의 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상태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하되', '
오로지 악할 뿐이며', '계속적으로' 악할 뿐이라고 기독교는 선언한다.
3-2)두번째로,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든지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지 간에,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이 근본적인 주제에 있어서 여전히 이교도라고하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십볼렛이라는 군호가 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래 모든 종류의 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는 모든 선을 결여하고 있는가? 그는 전적으로 타락하였는가? 그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는가? 또는, 설교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지속적으로 악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답하면, 너는 그런 만큼 기독교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너는 여전히 이교도에 지나지 않는다.
3-3)세번째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종교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그 본질은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 위대한 의사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약을 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무신론을 고치신다.
3-4)우리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있어서는, 경건이 전혀 없이
단지 외적 종교만으로도 사실 충분하다.
3-5)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종교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첫 부모의 죄로 인하여 입은 의와 진정한 거룩의 전적인 상실을 복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은 죄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다시태어 나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본래 전적으로 부패 하여있다. 은혜에 의하여 너희는 전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다시 살아났다.' '죄들가운데서 죽어 있던' 너희를 '그가 살려냈다.' 그는 너힁게 이미 생명의 원리, 즉 '너를 사랑
하사 너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신 그 분을 믿는 믿음을 주셨다.
3.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
4132040 배 진희
4132022 김 진옥
4132088 황 혜련
1. 수많은 저명한 저술가들이 일반적인 악덕의 추함과 그들 각각의 시대와 나라들에서 특히 만연하고 있었던 악덕들의 추함을 가급적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동기부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유혹들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다. 그것으로써는 단 한 가지의 비정상적인 육체적 욕망이나 정욕에 저항하지도 못하며, 그것을 극복하거나 치유하지는 더욱 못한다.
2. 바울 역시 ‘내가 행하기를 원하는 그 선을 나는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행하기를 원치 않는 악을 나는 행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비기독교인들 역시 “모든 인간 속에는 이 연약함 즉 영광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자연은 이 병을 지적은 해주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치료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3. 비기독교인들은 그 치료법을 이성에서, 철학에서 찾으려 했다. 그들은 그 치료법이 발견될 수 있는 유일한 분, 즉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했다.
4.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 자신으로부터 구하는 방식으로 하거나, 아니면 사실은 마귀들인 그런 신들로부터 덕을 구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기 위해 나타나실’ 때까지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빛도 그 정도로 희미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귀의 일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계들을 통하여 실제로 마귀의 일들을 파멸하시는 것인가? 이 세 가지 매우 중요한 점들을 우리는 그 순서에 따라 고찰하고자 한다.
Ⅰ. 1.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말하는 ‘마귀의 일들’은 죄와 죄의 열매들이다.
2. 이 ‘마귀의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시는 그 한도에 이르기까지 더 분명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창세기의 말씀으로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3. 시작부터 살펴보자면, ‘인간을 그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으로 즉, 하나님이 영이신 것같이 영으로 지으셨다는 뜻이다. 이 영에는 이해력이 부여 되었지만 피조물이기에 그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수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속임을 당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4. 그에게는 또한 의지와 자유가 부여되었다.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유로운 동작주체라는 것이다.
5. 그런데 다음의 사실을 잘 관찰하라. ‘무엇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자유’, 또는 위로부터 압도되어 무엇을 하는 그런 자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니다. 그런 자유는 ‘부자유한 자유’와 동일하다.
6. 또한 다음의 사실을 잘 관찰하라. 자유가 없는 곳에는 도덕적 선이나 악이 있을 수 없다.
7.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형상 안에서도 만드셨다. 인간은 자유로운 동작주체로서 그의 이해력의 지시를 따라서 선한 것을 항상 선택했다. 그렇게 행할 때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시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의 중단 없는 교제를 누리므로,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8. 그러나 그의 자유는 선이나 또는 악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악을 선으로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무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어떻게 해서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하는 저 중대한 질문의 난제를 해결해 준다. 악은 ‘마귀가 행한 일’이었다. 마귀는 죄의 창안자다. 마귀는 그의 자유를 오용하여 악을 피조세계 안으로 도입한 최초의 존재다.
9. 마귀가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누리는 행복을 보고 ‘크게 분을 내고’ 행복을 빼앗으려는 이 목적을 위해 이브를 속이는 수단으로 진리를 허위와 혼합했다. 그녀의 불신앙은 교만을 낳았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행복에의 길보다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의지를 낳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외적 죄로써 완결 지었다. 즉 ‘그녀는 열매를 취하여 먹었다.’
10. 그런 다음에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게 주었고, 그는 먹었다’, 그리고 ‘그 날에’, 아니 그 순간에 그는 ‘죽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영혼 안에서 소멸되었다. 영광이 그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 전체를, 즉 의와 진정한 거룩을 상실했고 몸의 죽음은 자동적으로 영원한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Ⅱ. 두 번째로 우리는 마귀의 행하는 일들을 ‘파멸’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는가’를 살펴보겠다.
1. 그는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과 놓일 때에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나타내지셨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 자신을 그의 피조물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오로지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와 이 아들에 의해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대면하여 대화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3. 에녹이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것도 마찬가지다. 모세에게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호와의 형상을 보게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보게 하신다는 뜻이다.
4.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본격적인 나타나심 즉, 동정녀 탄생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암시하는 유형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5.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제사장적 직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나이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모든 마을과 모든 도시마다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셨다’ 또한 그는 여인에게서 난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죄를 알지 않으셨으며, 나신 때부터 운명하시는 그때까지’ 그 자신의 뜻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지속적으로 행하심으로써 ‘모든 일을 선하게 행하셨다.’
6.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 자신을 봉헌물로 삼아서 온전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희생제물, 봉헌물, 이 세상 전체의 죄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돌아가셨다.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가 가지고 계셨던 영광으로 올리우심과 오순절 날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주 하나님이 저희 가운데 또는 저희들 안에 거하려 하심이다.
7. ‘주 하나님이 저희들 안에 거하려 하심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내적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내적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효과적으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을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나타내심으로써 하시는 것이다.
Ⅲ. 1.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는지를 이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사람 안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 죄들을 나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보게 하신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이 화평은 갈피를 못 잡게 하는 모든 의심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며, 모든 고통스러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낸다. 특히 ‘우리가 일평생 노예처럼 묶여있었던 바로 그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건져낸다.
2.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 가운데 본격적인 일, 즉 교만의 뿌리를 치신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은 이제 겸손하게 된 죄인으로 하여금 범사에 있어서 ‘내가 뜻하는 대로 마시고, 주님이 뜻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할 수있게 하심으로써, 자기의지(self-will)의 뿌리를 치신다.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창조주로부터 피조물에게로 돌려놓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마음을 다시 피조물로부터 창조주에게로 돌려놓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마귀의 일들을 멸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시는 것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이생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인간 안에 있는 마귀의 일들을 전체적으로 다 파멸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이 가멸적 육체 안에 거하기 때문에 이해력의 모든 연약함을 파멸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오류와 무지는 인간에게 불가피하며 이는 인간의 교만과 유혹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4. 그 때(먼지로 돌아갈 때) 오류와 고통과 모든 신체적인 제한성들이 끝난다. 이 모든 것들은 죽음에 의하여 파멸된다. 그리고 죽음 그 자체는 인간의 ‘마지막 원수’인데, 부활시에 파멸될 것이다. 그때 이 가멸적 육체는 불멸성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이 마지막 일을 파멸하실 것이다.
5. 진정한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총애를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도 회복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모든 부분은 성경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상호 일치한다는 사실이 믿음의 유비 즉 믿음의 기준이다. 이것 이외의 다른 외적 형식, 공적 및 사적 의무규정들을 종교로 여기지 말라. 정직성, 정의, 도덕성이라 부르는 모든 것을 종교라고 생각하지 말라, 올바른 교리, 올바른 의견을 종교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말라.
6. 이 보다 덜한 무엇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로 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 합쳐 놓으신 것을 분리하지 말라. 모든 내적 거룩과 외적 거룩을 ‘사랑으로써 이루는 믿음’보다 덜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로 여기지 말라. 모든 죄의 파멸을 포함하지 않은 어떤 종교에도 만족하지 말라. 죄는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 안에서 지금 이 죄를 파멸하실 수 있으며, 또한 파멸하고자 하신다. 그가 그의 약속을 과연 지키시는지 한번 믿어보라. 그는 이미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말씀하신 것을 이행하려고 준비하고 계시지 않겠는가. 그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신뢰하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오기만 하라.’ 그러면 ‘그 분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오는 모든 자를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主, 우리의 의(義)
4132043 신 동 훈
4132089 임 채 명
예레미야 23:6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1. 지금까지 종교에 대하여 일어난 논쟁들은 끔찍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서로 협력하여 적에 대항하는 대신, 그들의 무기를 서로에게 돌려댔으며, 그들의 귀한 시간을 낭비 했으며 상처를 내고, 서로 손을 약하게 함으로써 주님의 사업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은 실족했고 곁길로 나갔다. 많은 죄인들은 종교를 멸시 했으며 경멸하는 생각을 굳혔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악을 치유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못할 것이며, 무슨 고난인들 마다할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선한 양심을 져버린다면 이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일은 달리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3. 수많은 논쟁들이 순전히 상호간의 이해의 결핍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 오해를 설득하여 확신 시키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만사에 다 능하신 그 분에게 우리의 모든 신뢰를 다 걸어야 할 것이다.
4.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깊이 들어가는 진리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구조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진리다. 이것은 교회가 그 위에 서면 서고 아니면 쓰러지는 그런 교리다.
5.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면 이 진리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리라고 기대함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서로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이견의 폭이 넓은 것처럼 보이고, 이처럼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교리도 또한 드물다. 단지 서로 견해가 다르게 보일 뿐이라고 나는 철저히 확신한다.
6. 상호간의 차이가 실제의 경험에 있다기보다는 의견에 있고, 의견에 있기보다는 표현에 있는 것이라면 이 진리에 대하여 그토록 심각하게 서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된 이유는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고 자신들의 견해에 너무 열렬하게 애착하는 것과 각자의 독특한 표현 방식에 너무 애착하는 것에있다.
Ⅰ. 그리스도의 의란 무엇인가? 신성적 의 아니면 인성적 의를 의미한다.
① 신성적의는 그의 신성적 본질에 속한다. 그는 본질에 있어 만물 위에 존재하시는 분이요,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시나,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지고하시며 영원하신 분이다. 그의 신성적 의라는 것은 그의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거룩성이다. 그의 무한한 공의와 자비와 진리가 그의 신성적 의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그와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의 신성적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논쟁할 사람은 혹시 있다 해도 극히 드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전가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적 의의 전가로 이해한다.
② 그리스도의 인성적 의는 그의 인성적 본질 안에서 그에게 속한다. 그는 인성적 본질에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다. 이 인성적 의는 내적 의와 외적 의로 나뉜다. 내적 의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과 기능에 인쳐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의 신성적 의가 인간의 영에 분여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의 신성적 의의 모사다. 이 내적 의는 신성적 순결함, 신성적 공의와 자비와 진리다. 이 내적 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경외와 순종을, 겸손과 온유와 친절함, 그리고 타락한 인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모든 거룩하고 천상적인 기질을 가장 높은 상태로 흠이나 거룩하지 않은 것과의 혼합 없는 상태로 포함한다.
③ 그리스도가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외적 의의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그의 입은 어떤 꾀도 볼 수 없었고 적절치 않은 말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며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번이라도 행치 않았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외적 의의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행동들이 다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정확히 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행하셨다. 그의 순종은 전체적으로도 완전했고, 각 부분마다 완전했다. ‘그는 모든 의를 다 이루었다.’
④ 그의 의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의는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세상에 들어온 때부터 ‘나무 위에서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 때까지, 우리를 위해 속죄를 완전히 이루신 다음에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혼이 떠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 전체를 온전히 감수하신 일을 포함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앞의 것은 그의 능동적 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 우리의 의’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서로 결합한 상태에서의 이 두 가지 의에 관련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Ⅱ. 언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인가? 그리고 전가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① 언제 전가 되는 것인가? 그들이 믿을 때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의 것이다.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는 불가분리의 관계다.
② 수천가지의 상황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할 때 서로 간에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표현의 차이는 반드시 마음의 차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③ 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의견에서도 우리와 다를 수 있지만, 동일한 값진 믿음의 동참자일 수가 있다. 명료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할 수도 있고 개념들이 명료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건전할 수 있다.
④ 로마 카톨릭 교인이 주, 우리의 의에 대해 명료하게 말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벨라민이 임종 시에 ‘당신은 성인들 가운데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외치는 말을 들었다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 것이 없다고 확인했었을까?
⑤ 어떤 의미에서 이 의가 믿는 자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인가?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엇 때문에게 아니고, 오로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에 용서되고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다.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이나 그들이 행한 무엇 때문이 아니다. ‘은혜로 인하여 너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은 것이다. 행위들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인간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오로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에 우리는 값없이 그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
⑥ 칭의에 있어서 다음의 사항들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 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칭의를 받아 마땅한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인간의 의를 막는다. 오로지 믿음에 의하여 칭의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로 칭의를 마땅히 받게 하는 공로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돌리기 위한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값없이 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우리의 몸값의 어떤 일부라도 지불할 능력이 없다.
⑦ 찬송 시집들도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된 구절들을 다 인용한다면 찬송시집들의 큰 부분을 다 베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의는 나의 아름다움이요 나의 영광스러운 옷이다. 온 세상이 불타는 가운데 나는 이것으로써 치장하고 기쁨으로 나의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⑧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이 사실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죄들을 그들에게 전가하지 않으셨다.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때문에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행하고 감수한 것 때문에, 우리의 죄들에 해당하는 처벌을 면제해주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총애의 자리로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죽은 영혼을 영적인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시는데, 이 영적 생명은 장래에 받을 영원한 생명의 약조금이다.
⑨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한다는 표현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수동적 및 능동적 순종을 포함하여 그의 의를 주시는 것인데, 그 의에 의하여 취득된 특권들과 복들과 이익들의 형태로 주신다는 의미로 본다면, 믿는 자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칭의 하는 것이요, 믿는 자 자신의 어떠한 의 때문에 칭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으로써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또는 총애를 얻어내었다. 또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으로써 우리를 위해 의를 얻어내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우리를 위한 의가 얻어졌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는 모두 우리의 칭의를 위한 공로적 원인이며,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조건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고 여겨질 수 있는 근거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얻어내었다.
⑩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진다”라고 단언한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거듭해서 단언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것을 단언한다. 즉, 믿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로 여겨진다. 즉 내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는 오로지 그리스도가 행하고 감수하신 것 때문에 용서 받으며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⑪ ‘그러나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여받아 지니는 것 또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즉, 당신의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 덕분에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하심과 받아주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를 입기 전에 우리 자신의 의의 더러운 누더기를 벗어벼려야 하지 않는가?’
⑫ ‘그러나 너는 내재적(Inherent) 의를 믿지 않는가?’ 나는 내재적 의를 믿는다. 즉, 나는 하나님이 의를 전가하신(imputed) 모든 사람에게 의를 [이식하듯이] 심으신다(implants)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의가 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성화가 되셨다’고 나는 믿는다. 즉,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칭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화하신다. 즉,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들이 그 안에서 피조된 바 그 모양을 따라, 의와 진정한 거룩으로’ 새로워진다.
⑬ ‘그러나 너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그의 의의 자리에 대신 놓는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소망 전체의 전적인 그리고 유일한 기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기초 위에 집을 세울 수 있게 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에 의한 것이다. 즉, 주님의 모든 계명 안에서 흠 없이 걸어가고자 노력한다.
⑭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누구나 그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믿는데, 이 사실을 볼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 면에서의 의가 누구에게 전가된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⑮ 그리스도의 인성 면에서의 의, 또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인성면에서의 의의 전가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 받는 전적이고도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라는 사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들, 즉 그들 교회의 원칙들에 충실한 구성원들 모두에 의해서도 부인되고 있다. 그들의 개념은 그들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미숙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마음으로 믿는다.’ 그들은 현재의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해서도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
⑯ 개혁교회들 안에서도 신비주의자들(mystics)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이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인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의견이나 표현에 있어서 명료하지 못한 모든 신비주의자들, 모든 퀘이커교도들, 모든 장로교회파 사람들, 모든 독립교회파 사람들, 그리고 모든 영국교회 사람들이 모든 기독교적 체험을 결여하고 있다고 과감히 단언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의 사상은 아무리 혼동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의 언어는 아무리 적절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며 따라서 ‘주, 우리의 의’를 아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도 많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⑰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개념이나 표현에서나 그토록 어두운 사람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고 그런 표현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나는 허베이(Hervey)씨가 한 말인 ‘우리는 어떤 특정한 표현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발아래 회개하는 범죄인들과 같이 겸손하게 하고, 헌신적인 용병들처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게 하지. 그리하면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복된 영생의 길에 있게 될 것이다.’
⑱ 더 말할 필요가, 더 말할 것이 있는가? 이 말을 견지하라: ‘그리스도의 발아래 회개하는 범죄인들과 같이 겸손해지고 헌신적인 용병들처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자들은 모두 복된 영생의 길에 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표현들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표현들을 마음과 손으로써 지지한다.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누가되었든지 간에, 표식을 해야 한다. 그는 평화의 적이요, 이스라엘의 말썽쟁이이고, 하나님의 교회의 방해자이다.
⑲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다”’라는 표현을 그의 불의를 감추는 덮개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⑳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즉,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인색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표현[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을 이처럼 가증하게 오용하지 않도록 지켜주기를 간청한다. (그들이 여러분의 음성은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은혜가 더하도록 계속 죄 가운데 거하지’ 않도록 경고하라!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들지 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라!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고 헛되이 상상함으로써, ‘거룩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주님을 볼 수 없다’하는 하나님의 존엄한 명령을 헛되게 하지 말도록 그들에게 경고하라. 만약 그들이 계속 불의한 상태로 있으면,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하라. 바로 이 유익을 목적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라는 것과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과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소리쳐 알려라.
이제 [이 결론을] 간단하고도 평이하게 적용하면
첫 번째로, 나는 이런 표현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표현들]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 표현들을 쓰는 사람들을 모두 율법폐기론자(antinomians)라고 정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당신들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도대체 왜 다 정죄하는가?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쓰는데, 그런 표현을 쓴다고 도대체 왜 그들과 당신은 싸우는가? 적어도 그들이 당신에게 마땅히 허용해야 할 그 자유를 당신도 그들에게 허용하라.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왜 표현을 가지고 화를 내는가? ‘오, 그 표현[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은 오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이 오용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그러나 오용을 제거되어야 하고, 선용은 계속되어야한다.
두 번째로, 나는 이 표현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을 좋아하는 당신들에게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고 물어보겠다.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더 원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이 싸우면서 지키고자 하는 그 의미 전부를 나는 인정한다. 즉,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나는 전적으로 인정한다.
5.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4132058 이 상모
4132082 한 기태
4132063 이 현선
마 1:15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 너희는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어라. ”
이 말씀을 통하여 ‘가까이 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신 참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너희는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고 지시하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인도한다.
1.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신 참 종교의 본질에 대해 바울은 이와 동일한 표현을 로마서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고기와 술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즐거움이다. 라고 했다.
2.하나님의 나라’는, 즉 참 종교는, ‘고기와 술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조차도 ‘율법에 대하여 열심히 있으므로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그들 자신만 지킬 뿐 아니라, 이방인들
( 또는 이교도들)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에게도 그 동일한 율법을 지키도록 열렬하게 강요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방인들에게‘너희는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제의율법 전체)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가르칠 정도였다.
3.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선언하기를, 참 종교는 제의준수에 있는 것이아니라. ‘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즐거움’에 있다고 말해준다. 즉 무엇이 되었든 외적인 것, 마음바깥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4‘참 종교’는 형식이나 제의 - 그것이 아무리 최상의 종류라 할지라도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이나 제의가 아무리 고상하고 의미심장하며 내적인 것들을 표현하다 할지라도 심지어 유대인들의 경우와 같이, 아직 그 형식과 제의가 유효하던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 자신이 지정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참 종교는 원칙적으로 결코 형식이나 제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이 모든것들보다는 무한히 더 높이 올라가며, 무한히 더 깊이 놓여있다.
형식과 제의는 제 위치에 있는 한은 좋다. 참 종교에 대하여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바
그런 범위 내에서는 좋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보조수단으로 때때로만 적용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제의와 형식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그러므로 종교의 본질은 이런 것들(형식이나 제의)과 거리가 멀며 외적 행위들에 있지 않다.
6.마음(the heart)에 대하여 살펴보자 - 종교는 올바른 교리, 즉 올바른 견해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교리라는 것은 본래 외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든 점에 있어서 올바르게 교리적일 수 있다. 소위 사도, 니케아, 아타나시우스 신조 이 세 가지 신조 모두에 동의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터키인이나 이교도와 마찬가지로 전혀 종교를 갖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종교에 대하여 문외한일 수 있기 때문이다.
7. 이 마음의 종교만이 진정으로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가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이것을 ‘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으로 세 가지개념으로 요약하였다.
첫째로:‘의’란 너는 너의 마음을 다하고, 너의 생각을 다하고, 너의 영혼을 다하고, 너의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의의 첫째가는 가장 큰 가지이다.
너의 마음을, 즉 너의 가장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다른 경쟁자 없이 오로지 하나님만이 통치하시도록 해드렸을 때,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의’의 두 번째 큰 가지는 너는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것은 지극히 따뜻한 호의를 가지고, 진지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가지고 그 이웃을 해하는 모든 악을 방지하거나 제거하려는 열렬한 염원을 가지고 그 이웃에게 이로운 모든 선을 공급하려는 열렬한 염원을 가지고 그 이웃을 포옹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너의 이웃’은 모든 사람, 모든 인간,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영혼을 의미한다.
내가 생전에 본 바가 한번 도 없었던 사람이나 얼굴을 본 바가 없거나 이름을 들어 본 바가 없는 사람,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악의적으로 오용하며 핍박하는 사람도 제외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내가 모든 종류의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변함없는 목마름을 가진 것처럼 동일한 변함없는 목마름을 가지고 이웃이 모든 종류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며 나의 영혼이나 육체를 슬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모든 것을 막고자 하는 관심을 갖는 것처럼 동일하게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를 슬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모든 막고자
하는데 힘쓰라는 것이다.
9. 바로 이러한 사랑이 ‘율법의 완수’가 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의의 총합이 될 것이다. 이 사랑이 모든 내적 의의 총합이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필연적으로‘자비의 인정과 마음의 겸손을 포함하며 ‘친절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모든
외적 의의 총합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말로나 행동으로나, ‘악을 행치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누구를 의도적으로 상처 입히거나 슬프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은
선행에 열심을 낸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자비와 선한 열매들로’충만하다.
10. 또 한 참 종교, 즉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올바른 마음은 거룩을 포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참 종교는 의일 뿐 아니라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평화인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으며,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다. 이것은‘앞으로 올 세상의 능력에 대한 초자연적 감각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바 그 세상에 대해 맛을 보는것이다. 이것은 자연인이 실로 현재의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기 때문에, 모든 의심 모든 고통스러운 불확실성을 몰아내는 그런 평화다. 그리고 이 평화는 두려움을 몰아낸다.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지옥에 대하여, 마귀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평화를 가진 자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1. 하나님의 이 평화가 영혼 안에 어디에든지 고정되었으면, 이 제 이 평화와 더불어 ‘성령 안에서 기쁨이 있다.’ 성령에 의하여, 즉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마음 안에 이루어지는 기쁨이다.우리 안에 하나님 안에서 고요하고도 겸손하게 즐거워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의 구속을 이루시고 불의로부터 용서받고 죄를 덮음 받은 자가 되어 질 수 있도 록 하신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로부터 견고한 기쁨을 불어넣으시는 분도 ‘말할 수없는 기쁨으로 기뻐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기뻐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소망의 내용은 두 가지 이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나타났고 앞으로 그 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쇠하여지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소망이다
12. 이 거룩과 행복이 하나로 결합되었을 때 그것을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고 표현하고, 때로는‘하늘나라’라고 표현한다.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은[거룩과 행복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는]하나님이 영혼 안에서 다스리시는 통치의 직접적인 열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강한 능력을 발휘하며 우리의 마음 안에 그의 왕좌를 놓으시고 좌정하시자마자 우리의 마음은 즉시로 이‘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이것이[거룩과 행복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하늘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것이(어느 정도) 영혼 안에 하늘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13. 그런데 이‘하나님의 나라’또는‘하늘나라’가 가까이에 있다‘고 하신다. 원래 이 말씀을 처음 말씀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을 함축했다. 그런데 그 때가 지금은 이미 도래해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는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하는 목소리를 청종하면, 너희는 지금 이 시간에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 .1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길은 다음과 같다.
첫재로, 회개하라. 즉, 너희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에 있는 첫 번째 회개요, 바로 죄에 대한 깨달음,
즉 자기인식이다.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원래의 의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 지나갔으며, 본성의부패로 인하여 ‘육신이’ 항상 ‘성령에 거슬린 욕망’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이 되는 육적인 마음을 통하여 성령에 거슬려 욕망하게 하는 그 본성의 부패를 아는 것. 전적으로 부패했고, 모든 기초들이다. 곁길로 나갔다고 하는 사실을 알며,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일들을 분별할 수 없다.
2. 우리의 마음의 타고난 부패성, 가장 내면적인 본질의 타고난 부패가 그러하다. 이러한 악한 뿌리로부터 불신앙이 자라나온다. 하나님, “당신은 상관하지 마시오!” 여기서 부터 독립이라는 가지가 자라나온다. 또한 교만이 자라나오며, 허영, 칭찬을 듣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 야심, 탐심, 육신의 정욕, 화, 증오, 원한, 복수심, 시기, 질투, 악한 억측들이 나온다.
3. 이와 같은 가지들에서 맺는 열매들이 교만에서는 언쟁, 되지 못한 호언장담, 사람의 칭찬을 구하며 받으려 하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줄 수 없는 영광을 하나님에게서 강탈하는 것이 자라나온다. 성령의 성전으로 쓰시고자 의도하신 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더럽히기가 자라나오며, 불신앙으로부터는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4. ‘죄의 값은 죽음’-시간 안에서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입이 이것을 말씀하셨다. 그 영혼은 두 번째 죽음을 죽을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지옥불의 선고 아래 놓여 있다. 이미 그렇게 운명 지어졌다. 이미 형 집행을 향해 질질 끌고 가듯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는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
5.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든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네가 정당하게 선고 받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또한 하늘의 모든 천사들의 현재 및 장래의 순종을 다 동원한다 해도 단 한가지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보상을 결코 할 수 없다.
6. 그러나 만약에 앞으로의 완벽한 순종이 과거의 죄들을 속죄할 수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이것이 너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너는 완벽한 순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얼마나 죄책이 있으며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네가 얼마나 무능한가을 깊이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그 ‘후회할 것이 없는 철저한 회개’다.
7. 내적 및 외적 죄들에 대한, 그리고 완벽한 죄책과 무능에 대해 깨달았다면, 즉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자비들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살아 온 것에 대한 마음속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슬픔, 자책하며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며, 변명할 입이 없으며, 부끄러워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한걸음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 그렇게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복음을 믿어라.’
8. ‘복음’이란 그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나타내신 계시 전체를 뜻한다.‘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다.’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9. 이것을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의 거룩 한 복음을 진실하게 믿는 모든 자를 용서하시고 무죄를 언도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어 받는다.
10. 이 믿음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뢰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사람들의 이전의 범죄들을 그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는 사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 자신을 나를 위해 주셨으며, 십자가의 피로써 하나님께 화 해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11. 우리가 믿는다면 더 이상 죽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의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며, 구원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12. 우리가 믿는다면 성령에서 나오는 모든 열매들로, 즉 한마디 거룩한 또는 천상적인, 또는 신적인 마음의 상태로 충만하다.
13. 위대하고 값진 약속들을 모두 이루어 얻을 때까지 따라가라.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마라. 지금 너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을 위해 던져라.
6. 성경적 구원의 길
4122074 권명주
4122082 양만식
“너희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 - 엡 2:8
1. 종교에 대하여 지금까지 자주 서술되어 왔지만 이렇게 서술된 종교 보다 더 복잡하고 착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하나님의 말씀에 서술된 그 본래의 모양 그대로 취하기만 이해하기 쉬우며 평이하며 간단하다. 이 종교는 하나님께 의하여 현재 상태의 인간의 약한 이해력과 좁은 소화능력에 정확하게 맞추어진 것이다. 이 종교의 목표는 구원이고, 이 구원을 이루는 수단은 믿음이다.
2. 믿음과 구원이라는 이 두 개의 작은 단어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단어에 대하여 모든 오류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각각의 단어에 대하여 정확하고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질문을 신중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1. 구원이란 무엇인가?
2. 우리가 그로써 구원받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
3. 우리는 그 믿음으로써 어떻게 구원받는 것인가?
1. 첫째로,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죽음이라는 저 편 또는 다른 세상에 있는 복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구원받았다'고 되어있는 성경 본문을 통해서 이 구원은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며 현재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통해 지금 너희가 소유하고 있는 복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은혜가 영혼 안에 처음 동터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구원이 영광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역사 전체에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가 이 구원을 그 최대범위로 확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 구원은 보통 '자연적 양심' 이라고 표현하나 보다 더 적절하게는 '선행하는 은혜'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에 의하여 영혼 안에 일어난 일 모두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즉,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자 하는 모든 소원들의 전부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이런 뉘우침들을 가능한 한 빨리 질식시키며, 한 동안 후에는 잊어버리며, 또는 기껏해야 그런 뉘우침들을 가졌던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3. 이 구원은 크게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어 있다. 칭의는 용서를 의미하는 다른 표현이며 우리의 모든 죄들에 대한 용서이며 하나님에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칭의를 우리를 위해 확보해 놓을 때 지불한 그 값은 그리스도의 피와 의이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당하신 모든 것이 바로 그 지불된 값이다. 칭의의 직접적인 효과들은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이다.
4. 그리고 우리가 칭의 받는 때와 같은 시간에 바로 그 순간에 성화가 시작된다.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났다, 위로부터 났다, 성령으로부터 났다. 관계적인 변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변화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져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외의 정욕적인 사랑을 몰아내며 다른 모든 악한 기질들을 몰아내는 것을 느낀다. 이생적이고 감각적이며 마귀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느낀다.
5. 그러므로 죄가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얼마나 쉽게 추론하겠는가!
6. 그러나 조만간에 죄가 단지 중지되어 있었던 것이고,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아 자신들이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서로 간에 명백히 상반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자신들 안에 있음을 느낀다. 즉, 육신이 영에 대립하여 욕망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전히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있을지라도, 그들 자신 안에 때로는 교만이나 자기의지를 느끼고 때로는 혈기나 불신앙을 느낀다. 그들은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또는 여럿이 자주 그들의 마음 안에서 지배하지는 않을지라도 휘젓는 것을 발견한다. 혹은 이것들이 그들을 심하게 밀쳐서 실족하게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의 도움이시다.
7.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현재의 이러한 경험을 1400년 전에 마카리우스가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는가!
서투른 자들은 은혜가 역사할 때에는 더 이상 아무 죄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반면에 사려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우리조차도 또 다시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아무 죄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만큼의 은혜를 경험했었는데, 그러나 결국에 그들이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 속에 잠복해 있던 부패성이 다시 휘저어져서, 그들은 거의 혈기를 내게 되는 일들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8. 우리가 거듭나는 시점으로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몸의 행실들 즉 우리의 악한 본성의 행실들을 죽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점점 더 죽으면, 그런 만큼 점점 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은혜에서 은혜에로 성장해 나아간다.
9. 이와 같이 하면서 우리는 완전한 성화를 기다리는데 죄들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교만, 자기의지, 혈기, 불신앙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완전이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며 이것은 죄를 배제한 사랑이며 영혼의 능력 전체를 다 동원하고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는 사랑이다. 즉, 항상 기뻐하며, 기도를 쉬지 않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이다.
2. 우리가 그로써 구원받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
1.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자명한 확신,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확실하게 설득됨이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의 초자연적 자명성, 영혼에게 나타내진 일종의 영적인 빛을 의미한다. 둘재, 그것을 초자연적으로 보는 것 또는 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는 두 가지를 다 함축한다. 따라서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이 빛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때로는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에 대하여 말한다. 성령의 우리 영혼의 눈을 열어주고 그리고 그 눈에 빛을 비추고하는 이 두 가지 역사로 인하여 우리는 자연적 '눈이 보지 못했고, 귀도 듣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계시될 그 영광을 이미 지금 보고 있다.
2. 믿음이라는 단어의 좀 더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는 믿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으며 그 자신을 나를 위해 내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이에 의하여 설득된 확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믿음에 의해서이다.
3.그런데 이 믿음은 확신이란 의미의 믿음인가? 아니면 충성이란 의미의 믿음인가? 성경은 그러한 구별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그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믿는 그는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4. 우리가 구원받는 즉 칭의받고 성화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한 것이다.
3. 우리는 그 믿음으로써 어떻게 구원받는 것인가?
1.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의하여 칭의를 받는 것이가? 이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대답한다.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이다. 아무도 믿지 않고는 칭의를 받을 수 없고 믿음만으로 칭의받기에 충분하며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칭의를 받는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라, 악을 행하기를 중단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라 이 두 가지가 다 지극히 필수적인 것이고 어느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 칭의받기를 전혀 기대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조건적으로만 필수적 :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우회적으로 필수적 :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수적인 회개의 열매
반면에 믿음은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칭의를 받기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가깝게 필수적인 유일한 조건이다.
3.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성화된다고 너는 믿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네가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로써 성화된다고 너는 믿고 따라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항상 정확히 그 반대를 모든 방법을 다 통하여 공언해 오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화된다고 나는 개인적으로나 그리고 공개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증거해오고 있다. 믿음이 칭의와 성화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이다. 믿는 자는 누구나 그가 그 이외에 다른 무엇을 가졌든지 가지지 않았든지 관계없이 믿음만이 유일하게 성화되기를 위해 충분하다. 다른 말로 해서 아무도 믿기 전에는 성화되지 않는다. 누구나 믿을 때 성화된다.
4. 그러나 칭의 이전의 회개가 있는 것처럼 칭의에 뒤따라오는 회개가 있지 않은가? 선한 행위들에 열심을 내는 것은 칭의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가 아닌가? 이 선한 행위들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약 누가 선한 행위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그는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성화되기를 즉 사랑에 있어서 완전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은혜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하는 지식안에서 전혀 자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주신 그 은혜를 그는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가 이미 받은 믿음 안에 또는 하나님의 총애 안에 계속 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믿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5.그 결론은 올바로 이해된 회개도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그렇게 불러서 타당한) 모든 선한 행위들, 즉 자비의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경건의 행위들도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성화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6. '올바로 이해된 회개'는 칭의 앞서는 회개와는 크게 다르다. 칭의 후의 회개에는 죄책도 정죄에 대한 느낌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도 있지 않고 이 회개는 하나님의 총애에 대한 어떤 의심도 또는 고통스럽게 하는 두려움도 전제하지 않는다. 이 회개를 올바로 말하면 중생한 자들 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육적인 생각에 대하여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깨달음과 뉘우침이다. 악을 향한 경향성, 구태로 되돌아가려는 우리의 마음, 성령에 거슬려서 욕망하는 육의 여전히 지속적인 경향성에 대한 깨달음과 뉘우침이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이것은 때로는 교만을 향해 욕망하며 때로는 혈기를 향해 욕망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사랑, 안락의 사랑, 명예의 사랑, 쾌락의 사랑을 향해 욕망한다. 무엇보다도 수천가지 방법으로 그리고 수천 가지 핑계 하에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불신앙을 지향하는 우리 마음속의 경향성에 대한 깨달음과 뉘우침이다.
7.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해 이렇게 깨달아 뉘우치는 것과 더불어, 우리의 삶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여전히 붙어 있는 죄에 대해 명료하게 깨달아 뉘우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가장 안심하고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교만이나 자기의지나 불신앙이나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우리의 가장 악한 죄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했던 것보다도 더 이제는 우리가 의무로서 마땅히 행하되 최선을 다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게 된다. [우리가 의무로서 마땅히 행하되 최선을 다해 행하는 일들은 그 안에 어떤 공로적인 것을 전혀 가질 수가 엇다는 것과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설 수 조차 없다는 것과 계약의 피가 아니었다면 이들 때문에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앞에 죄책을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8.이 회개에는 한 가지가 더 포함된다는 것을 경험상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능이다. 즉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 선행하시며 매 순간 동행하시는 은혜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한 가지라도 선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 한 가지도 선한 욕망을 형성할 수 없는 전적 무능, 한 마디라도 올바로 말하지 못하는 전적 무능, 한 가지 선한 행동이라도 행하지 못하는 전적 무능에 대해 깨달아 뉘우치는 것이다.
9. 그러나 성화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긍정하는 바로 그런 성행들에는 첫째로, 모든 경건의 행위들이다.
10. 둘째로, 모든 자비의 행위들이다. 이것이 완전한 성화를 위해 필수적인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성화를 기다리기 위해서 따라 가도록 지정하신 길이다.
11. 믿는 자 안에는 죄가 없다 사람이 칭의받는 순간에 모든 죄가 그 뿌리와 가지가 다 파괴되었다는 해롭지 않아 보이는 의견이 실제로는 지극히 해롭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의견은 그 회개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성화로 가는 길을 완전히 봉쇄한다. 그런데 이 회개는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12. 이런 방식으로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것에는 위험이 있을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복[완전한 구원]은 처음부터 없었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완전한 구원에 대한] 그 기대 자체가 우리를 분기시키므로, 우리 주님이 오실 때 그 분의 것을 변리와 함께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모든 재능들을 사용하도록 자극하며, 그 모든 재능들을 개선하도록 격려한다.
13. 칭의 후의 회개와 회개의 열매 모두가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이들은 믿음과 동일한 의미에서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믿음과 동일한 정도로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조건적으로만 필수적이며 우회적으로만 필수적이다. 즉, 그의 믿음이 지속되며 또한 증가되도록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 반면에 믿음은 성화를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화를 위해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가깝게 필수적인 유일한 조건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14. 그러면 우리가 그로 인하여 성화되는 즉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랑에 있어서 완전하게 되는 그 믿음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이 믿음은 하나님이 이 믿음을 성경에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확신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성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데 주 너희 하나님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온 영혼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그 때 내가 너의 마음과 네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 것이다. 라는 옛 약속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마음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할 여지가 어떻게 거기 있겠는가?
15. 둘째로, 이 믿음은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행하여 이룰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확신이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본다면 이 불가능은 이 경우에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다.
16. 셋째로, 이 믿음은 하나님은 이것을 지금 행하실 수 있으며 지금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확신이다.
17.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성화하실 수 있으며 성화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행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자명성과 확신이다.
18. 그러면 하나님은 영혼 안에서의 이 위대한 역사를 점진적으로 이루시는가 아니면 순간적으로 이루시는가?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다. 그들은 죄가 존재하기를 중단하는 특정한 순간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위대한 역사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무한히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매순간 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바 그 선한 행위들을 모두 행하면서 이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기대하라. 만약 네가 그렇게 기대했지만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라도 너는 그 기대 대문에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는 네가 걸었던 그 소망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위대한 역사는 올 것이다.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올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매일, 매시간, 매순간 구하며 기다리라. 이 시간에 이 순간에 오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만약 네가 이것을 행위로써 구한다면, 네가 성화되기 전에 너는 먼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한다. 나는 먼저 이러저러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또는 이러저러하게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너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는 이 위대한 역사를 오늘날까지 행위로써 구해오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위대한 역사를 믿음으로써 구한다면 너는 그것을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해도 된다. 그리고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한다면 그것을 지금 기대하라.
다음 세 가지 주요점들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위대한 역사를 믿음에 의하여 기대하고, 이것을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하고, 이것을 지금 기대하라!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되는 것을 너는 믿는가? 그렇다면 너의 [믿는] 원리에 충실하라. 그리고 이 복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에서 구하고 기대하라. 즉, 그리스도가 죽으셨도다 하는 것 이외에는 여전히 지불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을 변호할 만한 것으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죄인으로서 구하고 기대하라. 그것을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에서 구하고 기대한다면, 지금 그것을 기대하라. 아무 것도 더 기다리며 연기하지 말라. 그렇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준비하고 계시다. 그 분만이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그는 지금 너를 기다리고 계시다. 그는 지금 문에 계시다. 너의 가장 깊은 영혼으로 하여금 외치게 하라.
들어오소서, 들어오소서, 당신, 하늘의 손님이시여!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 떠나지 마시옵소서.
나와 같이 저녁을 드시고
이 잔치를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7.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
4122086 조미희
4122087 조옥경
빌 2:12-13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의지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면서 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 위대한 진리들-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과 도덕적 선과 악의 구별은 이교도의 세상, 모든 민족들 에게 서도 발견된다.(미6:8)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마음에 율법의 핵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증거한다.(롬2:14-15)
2. 그러나, 고대 가장 계몽된 이교도로부터 오늘날 가장 지성적인 이교도들까지도완전 무지한 두 가지 교리적 주제(핵심 진리)가 있다.
①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자신을 세상의 죄들에 대한 화목제물로 드리신)에 관한 교리
②하나님의 영(인간을 피조된 바의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에 관한 교
(골3:10)
3. 이 두 진리는 복음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딤후1:10,말4:2,눅1:78-79)
l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죽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하는 것을 알면서 오고
l 성령에 의해‘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의지(to will)하기도 하고 행하기도(to do) 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면서 오고 있다.
4. 빌2:5-6 주목!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었던 이 마음(겸손과 복종)을 네 마음에도 있게 하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본질(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심, 신성의 충만함과 지극히 높음)은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스스로 비웠다.(낮추었다. 감추었다) 그리고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되시어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진짜 사람이 되심)(빌2:7-8) 한층 더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 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모범을 보여준 다음에, 그리스도가 값 주고 사신 구원을 단단히 챙기라고 교훈한다.
I-1. 너로 하여금 의지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면서 네 안에서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l 인간 편의 공로,자랑할 여지 모두 제거
l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게 됨
2.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역사하심의 동기 (이유); 하나님 자신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
① 의지하다(to will):내적 종교 전체 의미 (내적 거룩/모든 선한 욕망)
② 행하다(to do): 외적 종교 전체 의미 (외적 거룩/모든 선한 욕망으로부터의 선한 결과)
모두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3. 원어적 의미
① 의지하다:(기질,언사, 행동, 내적 거룩이나 외적 거룩):무엇에 관련해서든지 모든 선한 욕망
② 행하다:모든 위로부터 오는 힘,즉 우리 안에서 모든 올바른 상태를 이루며 그런 다음에 우리에게 모든 선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모든 힘
4. 이 사실(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것,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시면 선한 욕망은 소멸됨)을 깨달을수록교만,자랑할 수 없다.자랑하는 자는 반드시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한다.
II-1.하나님이 네 안에서 역사 하신다면 너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이루다: 어떤 일을 철두철미 행한다.
네 자신: 행해야 하는 주체
네 자신의 구원:
l 선행하는 은혜와 더불어 시작(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최초의 소원,하나님의 뜻에 관해 알게 하는 빛이 최초로 여명처럼 비치는 것,하나님께 대해 내가 범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최초로 의미하게 일시적으로 깨닫는 것,구원.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마음으로부터 건짐 받는 의 시작 의미)
� 최선으로 순종: 양심의 가책에 복종
l 회개시키는 은혜에 의해 계속 진행됨(더 큰 정도의 자아인식, 돌 같은 마음으로부터 더 건짐 받음 초래함)
최선으로 순종: 원죄 상태의 자신 인식,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기 갈망
l 본래적인 구원 체험 은혜를 통하여 믿음에 의하여 구원 받음
(ㄱ) 칭의(은혜): 죄책으로부터 구원/구원의 즉각적 인면 죄책,
�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중생한 인간
(ㄴ) 성화(은혜):죄의 세력,죄의 뿌리로부터 구원/구원의 점진적인 면 (그리스도의 충만한분량에 이르기까지)<엡4:13>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회복
2. 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엡6:5-6)
l 잠언적 표현: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일편단심으로 따르는 마음 지금 하는 일을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있는 힘을 다형 행하라.
① 두려움으로: 모든 일을 지극히 진지한 마음으로, 그리고 모든 정성과 주의를 다 기울여서 행하라.
② 떨림으로: 모든 일을 최고로 부지런히 속도를 내서 지체 없이, 그리고 정확히 행하라.
l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니, 너희는 행할 수 있고, 또한 행해야 한다.
l 하나님에 대한 인간 편에서 겸손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설교(100%행위강조 아님)
l 믿음: 창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행위:단계마다의 믿음 있음의 증거로 필요,믿음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임
3.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을 일상사에서 행하는 일과 쉽게 비유하여 이해 하자면
지상에서 상전들을 섬길 때가져야 하는 동일한 기질 및 태도를 가지고 하늘에 계신 주인을 섬기기 위해 일하라는것임
① 최고의 진지한 정신과 모든 가능한 정성과 조심성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
② 최고로 부지런히 속도를 내서 지체 없이 그리고 정확히 주님을 섬기라.
4.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있어 성경적 단계들
l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현재의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위해 악을 행하기를 중단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라. 죄로부터 도망가라. 모든 악한 행동을 피하라. 악의 모양이라도 피하라.
l 선을 행하기를 배우라. 선행을 열심을 다해 행하라.
l 경건의 선행, (자비의 선행을 행하라. )
Ex) 가족 기도회, 은밀한 기도, 금식, 성경 연구, 성만찬,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대화, 모든 사람의 영혼과 몸에게 선을 행함
l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을 풍성하게 하라. (고전 15:58)
l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같이 십자가 지는 일(눅 9:23)
l 하나님안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준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기쁨 거부
l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라. 완전을 향해 가게 됨
III-1. 우리로 하여금 의지하게도 하며 행하게도 하시는 분이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일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l 우리가 일해야 할 필요성을 전적으로 대신하는 것이 아닌가?
l 우리가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l 하나님이 모든것을 행하신다고 인정한다면 우리가 할 일이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2.1은 혈과 육의 추론임.
하나님이일하신다. 그러므로 너도 일한다. (상호 긴밀하게 연결됨)
①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므로 너는 일할 수 있다.
②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므로 너는 일해야 한다.
3.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역사하신다 |
너희는 행할 수 있다 |
믿음 |
순종 |
사람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 |
믿음에서 행위가 나온다. |
l 이유 : 여인에게서 난 모든 자, 날때부터 병자, 범죄와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음.
l 하나님이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기 전까지는 어떤 것 이라도 선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
l 하나님이 우리의 죽은 영혼을 불러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우리의 죄들로부터 걸어오기 위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함.
4.그러나 이것이 창조주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칼빈주의와 비교)
l 그 어떤 인간도 그가 성령을 꺼버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자연적 양심)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인간의 요청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l 양심이 화인맞은 소수의 사람들 외엔 양심의 빛에 거슬려 행동할 때 께름직하게 느낀다. 그리므로 어떤 누구도 은혜를 받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사용하지 않아서 죄를 짓는 것이다.
5.그러므로, 하나님에 네 안에서 역사하시는 만큼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가 있다.
l 네 안에서 네가 모든 의를 완수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3;15)
l 하나님이 먼저 너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사랑안에서 걸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l 즉,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모든 일을 나를 능력 있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할 수 있다.
6.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체험에서도 이 둘을 결합시키셨다.
l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거짓 겸손으로 의도적인 불순종과 나태의 변명
l 내가 선행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선행을 하는데 필요한 것을 공급치 않아서 이고 하나님이 시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
� 믿음을 갖지 못한 것(악한 상태)이므로 이것은 아니다.
� 그리스도가 너를 능력 있게 하심을 통하여 너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7.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행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꾼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반드시 철두철미 하게 순종하라.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온전히 끝까지 이루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즉,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중단하실것이다.
은혜의 섭리에 대한 일반적 규칙가진 자에게는 더하여 주실 것이요,주어진 은혜를 사용하지 않는 자로부터는 가졌던 것 조차 빼앗아 가실 것이다 (눅8:18)
① 우리가 우리자신을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하지 않고서는(행2:40)
② 우리 자신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취하지 않으면 (딤전6:12)
③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눅13:24)
④ 우리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않으면(눅9:23)
⑤ 보든 가능한 수단을 다 사용하여 우리자신이 받은 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벧후1:10)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8. 그러므로 형제들아,
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것을 위해 일하라.(요6:27)
②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③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선을 행함에 있어서 피곤하지 말라.(갈6:9)
④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의 일과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 안에서 계속
전진하라.(살전1:3)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8)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있어서 온전케 하사 그의 뜻을 행하게 하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너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예수그리스도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히13:20~21)
8. 거의 그리스도인
(The Almost Christian)
4132064 이 화주
옥스퍼드 聖 마리아 교회에서 옥스퍼드 대학 교수 및 學生들에게 행한 설교
[행 26:28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구나.”]
‘거의 그리스도인’ 까지 가는 사람들이 사실 많다.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나 “그리스도인이 거의 되도록 설득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다.
첫째로,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말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둘째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말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Ⅰ.1. ‘거의 그리스도인’이라 것은 첫째로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正直性(heathen honesty)’이 포함 된다. 기독교 바깥에서 말하는 정직성이라는 것은 非기독교적 철학자들의 저술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직성이 아니라, 보통 기독교 바깥의 사람들이 상호간에 상대방에게 기대하며 또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의 그런 정직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공평하지 말 것, 강도·절도로 이웃의 물건에 손대지 말 것, 가난한자를 압제하지 말 것, 착취하지 말 것, 속이거나 지나치게 값을 받지 말 것, 누구에게서든지 그의 권리를 빼앗지 말 것, 누구에게든지 어떤 빚이든지 지지 말 것.
2. 이 정직성이라는 것은 그들도 상호 간에 일종의 사랑과 조력을 기대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그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수 있다면 어떤 도움이라도 나에게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굶는 자를 먹이며, 남은 옷으로 헐벗은 자를 입히며, 내게 필요 하지 않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3. 두 번째의 것은 경건의 외양(外樣),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지라고 권하는 바 그 경건의 단지 외양을 갖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겉모양만을 갖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거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금하는 것을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축복도, 저주도 않는다. 그는 주일도 어기지 않으며, 그의 문안에 있는 객이라도 주일 어기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모든 쓸데없는 말들을 피한다: 남을 욕하는 것, 남이 없는 데서 험담하는 것, 소문을 퍼뜨리는 것, 독설을 입에 담는 것...간단히 말하여 ‘덕을 세우는데’소용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바 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모든 언사를 피한다.
4. 그는 술 취하지 아니하며, 흥청거리는 일과 탐식하는 일을 멀리한다.
가능한 모든 다툼과 언쟁을 피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큰 소리로 야단치지지도 않으며, 조소(嘲笑)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에게도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이 너에게 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 그 모든 일을 너도 그에게 행하지 말라”는 평범한 준칙을 따라 행동도 하고 말도 한다.
5. 그는 선을 행할 때, 값싸고 손쉽게 인정 베푸는 정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다하여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애쓰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일이 친구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그의 적들을 위한 것이든, 또는 악한 자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 상관없이, 수고와 고통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할 일을 찾는 대로 어떤 일이든지 힘써 행한다. 그는 근성이 악한 자들을 훈계하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흔들리는 자들을 굳세게 하며, 선한 자들을 격려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그는 잠자는 자들을 깨우기 위하여 수고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깨우신 바의 사람들은 죄와 불결을 씻도록 열려 있는 그 샘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씻고 깨끗해지도록 돕는 일에 힘쓰고 애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북돋우어 범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드높이도록 하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6. 경건의 외양을 가진 그는 또한 은혜의 수단을 활용한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한결같이
출입하며, 그것도 다음과 같은 사람들처럼 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금과 값비싼 의복으로 치장하거나 지나치게 꾸민 야한 복장을 입고 와서 ,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예의로써 상호간에 인사하거나, 건방질 정도로 쾌활한 행동거지로써 아예 경건의 능력은 물론 경건의 외양조차도 있는 체 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즉, 하나님의 집에 들어 올 때, 주변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거나 또는 지극히 맥 풀리고 무성의한 태도로 무관심을 드러내는 모든 외양을 하고 들어와서, 때로는 곧 시작할 예배 위에 축복하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경외를 느끼게 하는 그런 예배 중에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잠들기 전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몸을 기대고 있거나 한다. 또는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잠들어 계신 것으로 간주하듯이, 서로 잡담을 하거나, 예배에 완전히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경건의 외양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경건의 외양만을 가진 사람들이란 경외를 느끼게 하는 그런 예배의 순서 마다 주의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행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7. 가장이 주도하여 가족기도회를 한결같이 드리는 것, 개인기도 시간을 따로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 매일같이 행동거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 - 이런 외적인 종교를 한결같이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경건의 외양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고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진실성(sincerity)이란 것이다.
8. 진실성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위에 말한 그런 외적 행동들이 흘러나오는 바의 종교의 진정한 내적 원칙이다. 만약 이것이 속에 없다면, ‘기독교 바깥의 정직성’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어느 기독교 바깥의 에피큐리안 시인의 요구에 조차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하여, 또는 그의 이익이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악행을 멀리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선행을 한다면, 아니 모든 은혜의 수단을 다 활용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을 ‘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보다 나은 어떤 원칙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온전히 위선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9. 그러므로 진실성이라는 것은 ‘거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에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모든 일에 있어서, 즉 그의 모든 대화, 행동, 행하는 일에 있어서나 행하지 않는 일에 있어서나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진실한 생각을 갖는다.
만약,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생활 전반에 걸쳐 흐른다. 이것이 그가 선을 행할 때 악을 피할 때나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할 때나 원동력이 되는 원칙이다.
10.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듯이, 나는 수년 동안 악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깨끗한 양심을 갖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였고, 시간을 아껴 썼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다 활용하였다.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행동을 한결 같이 진실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과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써 그 모든 일들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에게 증거 하거니와 , 이렇게 하는 동안 내내 나는 ‘거의 그리스도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Ⅱ. 그러면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a Christian)이라 하는 것에는 이런 외에 무엇이 더 포함되어 있는가?
1.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우리의 마음과 감정의 전체를 사로잡는 그런 사랑이요, 우리 영혼의 모든 기능의 최대 역량을 다 동원하여 발휘하게 하는 그런 사랑이다.
실로 하나님 외에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 세상도 아니요, 이 세상의 어떤 무엇도 아니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이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교만에 대하여 죽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두 번째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누가 묻기를 ‘누가 나의 이웃이요? 라고 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모든 육체의 영의 아버지이신 그 분의 모든 자녀’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제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도 자랑도 하지 않는다. 사랑은 경솔하게나 조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 분노를 내던져 버린다. 분노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3. 앞의 두 가지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이 믿음이다. 요한은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이렇게 선언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 그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4. 회개와 사랑과 온갖 선행을 초래하지 않는 믿음은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요 마귀의 믿음’일 뿐이다. 마귀들도 우리의 신앙 고백을 믿으며, 그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마귀가 이러한 믿음이 아무리 있을지라도 마귀는 여전히 마귀일 뿐이다. 그들은 바로 진정한 기독교적 믿음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5. ‘올바르고 진정한 기독교적 믿음’이란 ‘성경과 우리 믿음의 신조들이 진리라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정죄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되었다는 확실한 신뢰와 확신을 갖는 것이다.
6.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물건을] 쓰는 것과 또 내가 쓰여 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랑,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치욕, 즉, 모든 사람들로부터 받는 조롱과 멸시와 증오를 기쁨으로 인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혜로써 허락하신바 사람이나 마귀가 가하는 악한 일들을 인내하는 사랑, 이런 사랑으로 그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이렇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단지 ‘거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외양’이 내게 있는가? 즉, 경건의 모양이 내게 있는가? 나는 악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모든 것을 다 멀리 하는가? 내 손이 찾아 행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나는 힘써 행하는가?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모두 진지하게 활용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진실한 의도와 염원으로 행하는가?
8. 나는 ‘거의 그리스도인’도 못 되는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지는 않는가? 나는 비기독교적 정직성의 기준에도 도달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가? 또는 적어도 기독교적 경건의 모양에도 도달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가? 당신 안에 진실성(sincerity), 즉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를 하나님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말과 행동, 사업, 연구, 기분전환 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고자 하는 의도조차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그래서 그런 만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영적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나 염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9.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하는 계명이 너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가?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가, 너의 원수도,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도 너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가? 그리스도가 너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가?
그리스도가 너를 사랑하셨고 너를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주셨다고 하는 것을 믿는가?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바로 너를 대적하는 문서를 도말하여 가져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것을 믿는가? 바로 네 자신이 그의 피를 통하여 구속을 얻었는가, 바로 네 자신의 죄들이 용서됨을 받았는가? 그의 영이 너의 영과 더불어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시는가?
10. “주님, 주 하나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그 주님의 이름을 반포하실 때까지 그 하나님을 부르라. 어떤 누구도 헛된 말로 너를 설득하여 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이 상을 받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있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을 기억하라 : 너도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영원토록 살아 계신 그 분을 향하여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거니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십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이다.
11. 우리 모두가 ‘거의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칭의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을 알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충만한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기를 바란다.
9장 믿음의 의
4132060 이수진
4132082 한기태
롭 10 : 5~8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임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시대의 인간과 더불어 세우신 은혜의 계약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신 행위의 계약을 대립시킨다. 그런데 바울 사도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행위계약이 하나님과 인간이 맺으신 유일한 계약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지하고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그들은 삶의 오류 가운데서 죽음을 구했다.
2. 그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의를 위한 율법의 마침이시다’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했다. 죄의 값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보다 좋은 계약을 우리를 위해 얻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무지했다.
3. 이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 보겠으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신뢰하는 어리석음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굴복하는’ 지혜를 밝혀 보겠다.
Ⅰ-1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율법 또는 행위계약은 인간이 피조될 때의 상태인 거룩과 행복 안에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거할 수 있기 위한 조건으로 준수해야 하는 모든 부분을 완전하고 결함이 없는 완벽한 순종으로써 지킬 것을 요구했다.
Ⅰ-2 이 행위계약은 인간의 모든 의, 즉 내적 의와 외적 의, 소극적인 의와 적극적 의를 모두 완수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인간은 모든 쓸데없는 말을 삼가며 모든 악한 행위를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정서와 의욕과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지켜야 할 것, 마음속에서와 모든 대화 방식에서 지속적으로 거룩할 것 등을 요구한다.
Ⅰ-3 이것이 율법의 의가 요구하는 것들이었고, 이를 행하는 자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의는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께 대한 이 전적인 순종이, 이 내적 및 외적 거룩이, 이렇게 마음과 삶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그 정도에 있어서도 완전할 것을 요구했다.
Ⅰ-4 율법의 의는 이 요구 사항들을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순종할 것이며, 마음과 삶이 모두 완전하게 거룩해야 하되, 또한 완벽하게 지속적으로 그러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면 그는 영생을 확실히 받을 것이다.
Ⅰ-5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죄인과 더불어 하나님이 지금 세우신 새 계약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그의 독생자의 공로와 중재를 통하여 주신 칭의의 조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후 곧바로 그에게 부분적으로 계시되었으며 ‘생명과 불멸성’이 과거의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에 의하여’ 지금 우리에게 나타내진 것처럼 아직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내진 것은’ 아니었다.
Ⅰ-6 은혜계약은 우리가 칭의를 받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그리고 불가결하게 필수적인 것이라 하면서 무엇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일체 없다. 오히려 그의 아들 때문에, 그리고 그 아들이 드린 화목제물 때문에, ‘행함이 없는 경건치 않은 자를 칭의하시고’ ‘그의 믿음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는’ 그 분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음에 내어준 바 되었다가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우리 죄들의 용서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올 두 번째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예수 우리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그 분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우리에게도 의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Ⅰ-7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네가 믿는 그 날에 너는 분명히 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총애로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예수를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면, 너는 결코 두 번째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요, 주님과 더불어 고난을 받고나면,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며 통치할 것이다.
Ⅰ-8 이 생명의 조건은 하나님이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분을 네 마음 안에서 믿고, 네 입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주님이요 너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너는 너의 과거의 죄들로 인한 정죄와 죄책과 처벌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고, 너의 남은 모든 날 동안에 진정한 거룩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Ⅰ-9 이런즉 행위계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총애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및 사랑과 거룩과 행복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기 위해서 그 완전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매 조항에 대한 완전하며 지속적인 순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은혜계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총애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직 믿음만을, 즉 순종하지 않은 그 인간을 하나님을 통해 칭의하시는 그 분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만을 요구한다.
Ⅰ-10 또 행위계약은 아담 및 그의 모든 후손들이 미래에 하나님이 주실 모든 복을 받기 위해 드려야 할 값을 그들 자신이 손수 지불할 것을 요구했으나, 은혜계약은 우리가 지불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빚을 탕감해 주신다. 조건은 단지 우리를 위해 대신 값을 지불하신 그 분을 우리가 믿는 것뿐이다.
Ⅰ-11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오직 믿기만 하라. 왜냐하면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 모두를 칭의하시기’ 때문이다.
Ⅱ-1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것이다’라고 말하는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를 여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이미 드러난 것이다. 그들의 첫 발걸음부터가 근본적인 오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계약이 약속하는 어떤 복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이 계약이 처음 아담에게 주어질 때의 아담의 상태에 그들이 지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출발해야 하며 행위계약이란 한번 잃어버린 하나님의 총애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총애와 생명이 영생에 이르러 완전해질 때까지 지속되고 증가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Ⅱ-2 순종 또는 의는 모든 점에 있어서 완벽하며 완전한 것이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누가 과연 이러한 순종을 실제로 행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외적 행동에 관한 계명들이라도 다 완수할 수 있단 말인가?
Ⅱ-3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는 하나님의 소극적 및 적극적 계명과 내적 및 외적 계명을 모두 순종하여 지킬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완벽하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율법의 의는 부족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율법의 의는 완벽한 순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예외 없이 모두 정죄하며, 그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 즉시로 저주를 선언한다.
Ⅱ-4 그러면 누가 ‘죄악을 감찰하시기에 지극히 엄격하신 그 재판관 앞에 설수 있겠는가? ‘어떤 육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그 법정에서 그들은 얼마나 연약한가! 우리가 모든 계명을 온 힘을 다해 지켰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우리가 어느 한 점에서라도 범죄한 것이 있으면,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는 끝난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벽할 뿐만 아니라 중단 없이 지속적인 순종을 행하지 않은 모든 자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범죄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Ⅱ-5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이 이러한 의로써 생명을 구한다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 중에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악함 가운데서 조성되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인간,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혐오스런 인간, ‘그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꿈꾸며,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로써 생명 얻기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얼마나 지각없는 일인가!
Ⅱ-6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를 신뢰하는 어리석음을 입증하는 논증들은 무엇이나 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를 입증한다.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 가는 첫 발걸음, 우리는 어떠한 우리의 의를 가지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거나 처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것,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거나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태어날 때부터 처해있는 상태가 아니겠는가?
Ⅱ-7 ‘믿음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더 나타난다.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혜의 하나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그리고 창조하신 만물의 지고하신 주님으로서 선택하고 세우신 하나님과의 화해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Ⅱ-8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을 허락하신 것은 순전히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요,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서부터 나온 것이고, 받을 자격이 없는데 베푸시는 자비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자비와 공로로 인하여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총애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이 방법을 오직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Ⅱ-9. 어떤 피조물이라도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는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피조물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는 하나님의 총애를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유일한 방법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에 순복하여 따르는 것, 순복함으로 하나님의 총애와, 하나님의 형상을 얻을 수 있다.있다.
Ⅲ-1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자는 이렇게 말하지 말라; 나는 먼저 이것을 행해야만 한다. 나는 먼저 모든 죄를 정복하고, 모든 악한 말과 행실을 끊어 버리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만 한다. 너는 아직도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지하다. 먼저 믿어라. 너의 죄들에 대한 화목제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Ⅲ-2 너는 네 마음에 ‘나는 충분히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라고 말하지 말라. 누가 자고로 하나님의 손에 받아들여짐을 마땅히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자가 있는가? 네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네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너는 결코 선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너 자신을 그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씻을 시간이다.
Ⅲ-3’ 그러나 나는 충분히 죄를 뉘우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죄에 대하여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말라. 네가 그런 줄 나는 알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자. 그 분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라. 그 분은 너를 위해 행치 않은 무엇을 더 행할 수 있었을까?
Ⅲ-4 또는 ‘나는 그리스도에게 가기 전에 무엇인가 더 행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 말라. 만약 너의 주님이 오시는 것을 지연하신다고 가정한다면, 네게 힘이 있는 한도만큼, 그리고 주님이 네게 명하신 것을 무엇이든지 행하면서 그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 적절하고 옳다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을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Ⅲ-5 너의 죄를 씻어지기 전에 먼저 진실성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너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너의 죄들을 위하여 속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오직 ‘너를 사랑하사 그 자신을 너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공로 밖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총애를 간구하는 수 밖에 없다.
Ⅲ-6 결론을 내린다. 오 인간이여, 네 자신 안에 사형선고를 받아 가지고 있다., 주님이 ‘이것을 행하라, 나의 모든 계명에 완벽하게 순종하여 행하라. 그리하면 너는 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말씀은 너에게 가까이 잇다. 죄인의 상태에서, 바로 너의 현재의 죄인의 상태에서 복음을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불의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 것이며, 너의 죄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0. 믿음에 의한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4132042 백은찬, 4132044 신재현
4132057 이번영, 4132085 황석범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주님이시오 만인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어떻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 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소망의 기초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우리는 거의 이해하지도 못 한 채로 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및 믿음의 유비의 전체와 완전히 불일치하는 견해들이다. 그러므로 이 기초 자체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그들은 그들의 잘 못 된 기초위에 더 이상 건축할 수 없으리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위대한 경건의 비밀을 참되고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네 가지로 나누어 내용을 설명하겠다.
Ⅰ. 칭의론 전체의 일반적인 토대는 무엇인가?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 자신의 영원성의 형상’, 즉 하나님의 부패하지 않는 상이 되도록 창조하셨으므로 그는 하나님이 순결하신 것처럼 죄의 흔적이 한 점도 없이 순결하였다. 그는 ‘주 그의 하나님을 그의 온 마음과 그의 모든 생각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였다.
2. 하나님은 이 율법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셨고 인간이 생령이 되는 순간부터 그의 시련이 끝나는 시점까지 중단 없이 순종하도록 요구하셨다. 인간은 이 부여된 임무에 온전히 일치하는 상태에 있었고 모든 선한 언사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율법에 미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3. 하나님은 이 전체적인 사랑의 율법에 실천적인 율법 한 가지만을 더 첨가하여 “너는 동산 중앙에 자라고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지니라”. 그리고 여기에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형벌을 첨가하셨다.
4. 낙원에서 아무 값없이, 공로 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간은 거룩하였고 행복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알았고, 사랑하였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렸다.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은 이러한 사랑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리지만 만약 그가 불순종한다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됨을 “그 날에 너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보여주셨다.
5. 하지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령하신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정죄되었다. 그의 영혼은 죽게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죽음이 그의 육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죄 안에서 죽어있는 인간은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즉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그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파멸되는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달려갔다.
6.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죽은 상태가 되었다. 부패되며 가멸적인 육체 안에 거하면서, 영원한 사망의 선고 아래 존재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르게 되었다.
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그때에 온 인류는 이런 상태에 있었다. 때가 이르매 그 독생자는 인간이 되셨고, 인류 전체의 두 번째 공통 어버이요 대표자가 되셨다. 그는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며, 우리 모두의 불의함을 그 자신이 주님으로서 짊어지셨다. 그는 그 자신을 한 번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나와 온 인류를 구속하셨다. 온전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제물을 드리며 온 세상의 죄들에 대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다.
8.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를 인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칭의에 이르게 하셨다. 그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일과 고통당하신 일로 우리가 지은 죄들에 상응하는 처벌을 면제해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서와 같은 영적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9. 우리 모두의 아버지요 대표자인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총애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진노의 자녀’가 되어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르렀지만’ 우리 모두의 대변자인 두 번째 아담이 이루신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인하여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새 언약을 주심으로 온 세상과 화해하셨고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의롭다 칭하심을 받는 것이다’
Ⅱ. 칭의란 무엇인가?
1. 의롭다 칭하심을 받는 자가 실제로 올바르게 되고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은 성화라고 하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일회적으로 행하시는 일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2. 칭의는 고소, 특히 사단의 고소로부터 우리를 풀어내는 것이라는 널리 유행하는 관념은 성경의 어떤 명백한 본문으로부터도 증명할 수가 없다.
3. 또한 칭의는 율법이 우리를 대적하여 제기한 고소로부터 우리를 풀어내는 것이라는 견해도 어떤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증명하기보다는 그냥 당연시 여기는 편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고, 그래서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상태에 있었으나, 하나님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가하지 않으신다.
4.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실제 상태와는 반대로 판단하신다든지, 우리의 실제 상태보다 더 좋은 상태로 평가하신다든지, 또는 우리가 불의한데 의롭다고 믿어주신다든지 하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진리와 일치한다. 하나님이 이해력을 주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제를 선입견 없이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나 칭의에 대한 그러한 견해는 이성에도 성경에도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5. 칭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평이한 성경적 견해는 용서, 즉 죄들을 간과하심이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 또는 용서함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미래 어느 때엔가 정죄하기 위해 죄를 그에게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그의 죄들을 이유로 현재의 세상에서든 또는 앞으로 올 세상에서든 그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인에게 그가 당해야 마땅한 고통을 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그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열납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죄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며, 우리의 평안을 위하여 우리를 지켜 주신다.
Ⅲ. 칭의받은 그들은 누구인가?
1. 그렇다면 의롭다 칭하심을 받는 그들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어떤 종류가 됐던, 어떤 정도가 됐던간에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서 ‘경건치 않은 자들’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즉, 의롭다고 칭하시는 사람들이다.
2. ‘사람은 의롭다 칭하심을 받기 전에 먼저 성화되어야 한다. 즉 거룩해야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죄인이라는 관념 하에 용서받는다 하면, 그는 성자가 아니요,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신다면 그는 경건한 자가 아니요, 불경건한 자인 것이다. 거룩한 자들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자들인 것이다.
3. 그렇다면 선한 목자는 이미 구출된 자들만을 찾으시고 구출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그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것이다. 그는 잃은 자들을 찾아서 모든 종류의 그리고 모든 정도의 죄인들을 죄에 대한 책임,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신다.
4. ‘병든 자’인 이 사람들이, 달리 말하여 ‘ 그 죄짐이 견딜 수 없는’ 이 사람들이 바로 ‘의사를 필요로 하는’ 그들이다.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 용서를 필요로 하는 그들, 이미 정죄받은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칭하시는’ 그 분을 찾는 것이다. 즉 칭의 전에는 선한 것은 없고 악한 것만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들, 이들이 바로 ‘경건치 않으며, 일한 것이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기 전까지는 그는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5. 만약에 누가 반대하기를, ‘아니다. 사람이 의롭다 칭하심을 받기 전에 굶주린 자를 먹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 선행이다’라고 한다면 그런일들은 의롭다 칭하심을 받기 전에라도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모든 참된 의미의 ‘선행’은 ‘칭의에 뒤따라 오는 것이고 그것들은 ’참된 살아있는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좋은것이요 열납되는 것’이다.
6. 사람이 의롭다 칭하심을 받기 이전에 행한 행위는 어떠한 것이라도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가 선행일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자비안에서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생산해내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원하시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Ⅳ. 무엇으로써 그들은 칭의를 받는 것인가?
1. 완전히 ‘경건치 않은 자’, 그때까지 ‘일하지 않은 자’가 의롭다고 칭하심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인한 것인가? 오로지 한 가지, 바로 믿음(faith)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義[(의) 또는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인하여 믿음을 통하여 화목제물(propitiation)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요,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2. 일반적인 의미의 믿음(faith in general)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즉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또는 영적인 것이든 우리의 육체적인 감관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elengchos, 즉 자명성 또는 설득됨(‘evidence’ or ‘conviction’)이다.
그런데 의롭다 칭하심을 받게 하는 믿음(justifying faith)은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시면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증거 또는 확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죄들을 위하여 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확신(a sure trust and confidence)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3.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들을 이미 용서하셨으며 또한 용서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확신이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의 공로 때문에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으로 받아주셨다는 확실한 신뢰와 확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변덕스럽고 망설이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주저하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이러한 믿음이 칭의의 방법 또는 조건이라고 단언한다. 이가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 이 믿음이 없이는 칭의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 이외에 달리 그의 공로에 참여함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다.
5. 믿음은 칭의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유일하게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것이 두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일한 것이 없는’, ‘경건치 않은 자’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바로 그 순간에 ‘믿음은 그에게 義(의)로 여겨진다.’ 그는 이 義(의) 이전에는 전혀 義(의)가 없었다. 소극적인 의미의 義(의), 즉 무죄함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그 순간에 믿음이 그에게 義(의)로 여겨진다.
6.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없이는 어떤 누구도 의롭다 칭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일하다는 것이요, 용서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이것이 직접적으로, 불가결하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유일한 조건이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믿음 이외에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칭의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믿음 이외에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칭의하심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7.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열납하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죄인이 열납하심을 얻는 조건을 정하는 것은 원하는 자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달리는 자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 단지 ‘자비를 보이시는 하나님’, 즉 그 자신의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과 우리의 공로없이 베푸시는 선하심이 아니였다면 어떤 누구도 열납하지 않으셨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8. 그러나 하나님께서 칭의의 조건을 이렇게 정하신 이유 한 가지를 겸손하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네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은 ‘사람에게서 교만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 오는 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오직 전적으로 죄인으로서 오는 것이다. 그의 ‘입은 막혔고’ 그는 완전히 ‘하나님 앞에 죄책을 진 자로서’ 섰을 때 예수를 이러한 그의 죄들을 위한 완전하고도 유일한 화목제물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이런 의미의 믿음으로써]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9. 나는 당신에게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보라고 권고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십니다. 스스로 지옥에나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바로 그 분의 영광 앞으로 나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요 일한 것이 없는 자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영광 앞으로 나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어서 빨리 나아오시오. 주 예수를 믿으시오. 당신이,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 화해가 되었습니다.
11.믿음의 의한 구원
4112065 이 용우
서론
1.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미 부여하신 모든 복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아낌없이 주시는 마음, 즉 총애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 값없이 주는 은혜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지속되고 있는 바, 그것이 곧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요 호흡이요, 만물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든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든지 우리가 행하는 것이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업적으로 당연히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죄인인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의 업적으로 속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결국 그 자신이 행한 업적도 하나님이 행하여 이루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형상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義)도 행한 업적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은혜 위에 은혜’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를 신중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I.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하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1. 첫째, 그 믿음은 단순히 이교도의 믿음과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도덕적인 덕과 정의와 자비와 진실을 추구할 수 있음을 믿도록 요구하신다.
2. 둘째, 그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다른 것이다. 물론, 마귀도 하나님이 은혜롭고 벌주시는 정의로운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것을 믿고(알고) 있다. 또한, 마귀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하나님의 말씀인줄로)을 믿으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는 것과 ‘모든 대적 자들을 그의 발아래 밟으실 것이다’는 것을 믿고 떤다.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믿음은 신앙을 지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셋째, 그 믿음은 예수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사도들이 가졌던 그러한 믿음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믿었고,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믿음 없는 세대”와 “겨자씨 한 알만만큼도 믿음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바로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이다. 이러한 믿음은 이교도의 믿음이나 마귀의 믿음과 구별된다. 이 믿음은 단순히 사변적이며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된] 상태이다.
5. 이 믿음은 사도들이 예수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가졌던 믿음과도 구별된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필요불가결성과 공로를 인정하며, 부활의 능력을 인정한다. 또한 주님의 죽음이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값을 치르고 건져내는 유일한 방법이며, 주님의 부활이 우리 모두를 생명과 불멸성으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리하여,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바로 나의 죄가 용서되었고 따라서 바로 내가 하나님께 화해되어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는 확신이다.
II. 이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두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이다.
1. 무엇 보다 먼저, 이 구원은 현재적 구원이다. 즉, 실제로 얻어지는 것이요, 믿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얻어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한 것이다.
2. 이 구원은 죄로 부터의 구원이며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이다. 즉, 원죄, 자범죄, 현재의 죄, 육신의 죄, 영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 부터도 구원을 받는 것이다.
3. 첫째, 그들은 모든 과거의 죄에 대한 책임(죄책 = the guilt of all past sin)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단지 죄를 알게 될 뿐이고, 어느 육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자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과거의 죄들을 간과하심으로써 그의 의를 나타내심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4. 이렇게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므로 그들은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노예로서 주인에 대하여 갖는 모든 형태의 두려움, 즉 고문당할 것에 대한, 형벌 받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5. 둘째, 이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의 세력(the power of sin)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6.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죄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습관적인 죄(habitual sin)로 인하여 죄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적인 죄(willful sin)로 인하여 죄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죄된 욕망(sinful desire)으로 인하여 죄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행위나 말이나 생각에 있어서 인간적인 한계성에 근거한 결함들 자체는 그가 범죄하는 것이 아니다.
7. 이것이 바로 믿음을 통하여 얻는, 지상 위에서 얻는 구원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에 의한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흔히 ‘칭의’(justification)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칭의가 그리스도의 속죄공로(the atonement of Christ)가 지금 그를 믿는 죄인에게 실제로 적용되어 그 죄인이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에 형성됨으로써 그 죄인이 죄의 세력(the power of sin)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믿음에 의하여 ‘칭의 받은’ 또는 ‘구원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던 새 생명으로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것이다.
III. 이에 대하여 흔히 제기되는 반대의견들
1. 믿음으로만 구원 즉 칭의 받는다고 설교하는 것은 거룩할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할 필요도 없다고 설교하는 것이라는 반대의견이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거룩이나 선행과 분리된 그런 종류의 믿음을 말한다면 반대의견이 옳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선행과 모든 거룩을 필연적으로 낳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나 보다 넓은 범위에서 고찰한다면 이렇다.
첫째, 믿음을 설교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오히려 명백히 율법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둘째,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세우는 것이다.’ 첫째로는 율법의 전체 범위와 영적인 의미를 보여줌으로써, 둘째로는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의가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생명력 있는 길로 부름으로써 우리가 오히려 율법을 세우는 것이다.
3. ‘그러나 이런 믿음을 설교하는 것은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하고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법으로니라” 만약 사람이 그의 행위들로써 칭의를 받는다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한 것이 없이, 경건치 아니 한 자를 칭의하시는 그 분을 빋는 사람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행하신 것에 대한 상을 우리에게 주시는 바,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4.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이런 식으로 값없이 믿음으로만 구원 또는 칭의 바든 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짓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사실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용서하심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때에 그들도 역시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지워달라고 소리쳐 부르짖게 될 것이다.
5. 이 하나의 동일한 진리[즉,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하나의 정반대의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사람이 그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다 가지고도 그것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하고 좌절하게 한다.’ 옳은 말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와 공로와 의로써 구원받겠다는 것에 대하여 실망하고 좌절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반드시 이런 의미로 실망과 좌절에 도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자신의 공로를 완전히 포기하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이것은 [즉, 이런 의미의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은] 기분 나쁜 [즉, 위로도 되지 않고 기쁨도 주지 못하는] 교리다 [라고 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오히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교리가 자포자기한 죄인들, 자택하는 죄인들에게는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교리요, 위로가 가득한 교리인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뭐라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라고?! 삭개오에게도?! 강도 같은 세리에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그 더러운 창녀에게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도, 나 같은 사람도, 자비를 바랄 수 있겠구나!’ 지금까지 어떤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괴로움으로 시달려 온 당신도 자비를 바랄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뿌리치지 않으신다.
7.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교리로서 설교하지 말 것이며, 또는 적어도 구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렇다면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설교의 기초이며, 곧 첫 번째로 중요한 말씀으로 설교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너희는 가서 복음을 만민에게 설교하라’는 것이다. 만약 누가 이 말씀을 왜곡하여 그 결과로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면,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만 한다.
8. 이 시대에 특별히 “너희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를 견지하는 것이 이 시대만큼 더 시기 절절한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혹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이 교리밖에 없다.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는 그 오류들의 근본을 쳐부수는 것이다.
둘째, 나라를 홍수처럼 뒤덮고 있는 부도덕을 저지할 수 있는 것도 이 교리 이외에는 없다.
셋째,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삼고’ ‘자기들의 사신 주님을 공공연히 부인하는’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이 교리 이외에는 없다.
9. 이런 이유 때문에, ‘믿음에 의한 구원’이 세상에 선포될 때마다,
그 적대자가 사납게 날 뛰는 것이다.
이 교리를 처음으로 설교했던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지상과 지옥을 선동했던 것이며,
마틴 루터가 이 교리를 부활시키고자 했을 때, 겁을 주어서 못하게 하고, 모든 거짓말과 비방의 기술을 동원한 것이다.
적대자가 이렇게 방해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강한 무장장사가 손에 갈대를 들고 그를 대적하여 나오는 한 어린아이에게 넘어뜨려져 밟힘을 당한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이와 같이 주님은 약한데서 온전해 지며, 비록 당신이 젖먹이처럼 무력하고 약할지라도, 그 장사가 네 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너를 구원하신 그 위대하신 장군 아래서 행진하여 나갈 것이다. 너의 모든 적들을 다 섬멸하고, 죽음이 승리에게 삼킨 바 될 때까지 이기도 또 이기며 전진할 것이다.
12. 신생(新生)-The New
4132061 이 정재
요 3:7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
1. 기독교 영역 전체에 있어서 정말로 근본적인 교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칭의의 교리(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와 신생의 교리(the doctrine of the new birth)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저 위대한 행위(that great work which God does for us)에 관한 것이고, 신생의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서’행하시는 저 위대한 행위(that great work which God does in us)이다. 시간의 순서에 있어서 이 둘은 선후가 없지만, 사고의 순서에서는 칭의가 신생 앞에 온다.
2. 이렇게 중요한 근본적 교리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이 중요성을 확신한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해 광범위한 글을 남겼다. 하지만 그들의 글들은 충분히 명료하지 못하고, 깊이와 정확성도 부족하다. 신생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은 다음의 세 가지에 분명한 대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1) 우리는 왜 거듭나야만 하는가? (2) 우리는 어떻게 거듭 나는가? (3) 무엇을 위해 우리는 거듭나야만 하는 것인가?
I. 1. 첫째로, 우리는 왜 거듭나야만 하는가? 이것은 신생교리의 기초로 이 세상의 창조만큼이나 깊이 놓여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성경구절에 그 기초가 놓여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적 형상을 따라, 즉 자신의 불멸성을 따라 우리를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와 여러 정서를 부여받은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또 정치적 형상을 따라 이 낮은 세상의 통치자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 형상, ‘의와 진정한 거룩’인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인간은 창조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고, 이것이 인간의 기질과 생각,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를 ‘매우 좋다’라고 선언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2. 그러나 인간은 불변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설수도 있고, 타락 할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인간에게 알려주셨고, 타락하지 말도록 엄중한 경고를 주셨다. 그럼에도 인간은 ‘존귀한 가운데’ 머물지 못했다. 먹지 말라고 명하신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과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서 스스로를 통치하기 원하며,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행복을 찾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그 날에 죽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육체는 영혼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으로 분리될 때 죽는 것이다. 그는 그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생명 대신에 이제 노예로서 두려움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주님의 면전을 피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상실했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존립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불행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하지 않게 되었다. 죽어서 썩어지는 짐승의 형상인 감각적 욕망과 야망으로 빠져버렸다.
3. 만약 누군가 이 죽음을 단순한 몸의 죽음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그 날 이후 90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 죽음, 즉 하나님의 생명의 상실과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로 이해해야만 한다.
4.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죽었다(고전 15:22). 아담의 허리에서 나온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 하나님의 생명, 형상, ‘의와 진정한 거룩’(엡 4:24)이 결여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 대신에 마귀의 형상을 지닌 감각적 욕심과 욕망 안에서 짐승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생의 근거다. 즉, 우리의 본질의 전적 부패가 신생의 근거다. 때문에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Ⅱ. 1. 그렇다면 신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2. 중생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상세하고 철학적인 설명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불어간다’ 그렇지만 이것은 지혜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어떻게 일어나고 떨어지는지 그 정확한 방식을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성령으로 난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어떻게 성령이 이것을 영혼 안에서 역사하여 일어나게 하는지는 가장 현명한 자라도 설명할 수 없다.
3. 그러나 신생의 본질에 대하여 평이한 성경적 설명을 줄 수 는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은 주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성인 이방인이 유대교에 합류하기 원할 때 할례를 베풀기 전에 먼저 세례를 베푸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그가 세례를 받고 나면 그는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니고데모도 이 표현을 이해했을 것이지만 주님께서 이 표현을 더 강한 의미로 사용하신 연유로 그는 주님에게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물론 육으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우리는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날 수 있다. 이는 자연적 출생과 매우 비슷하다.
4.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태속에 있을 때 그는 어떤 지식도 이해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는 비록 생명이 있지만 우리는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제 그가 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비로소 그는 그의 감각기관들을 사용하여 대상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숨 쉬며 산다. 영적으로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기 전의 자연적 상태에서는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한다. 그의 다른 영적인 감각들도 모두 닫힌 상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있으나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해의 눈이 열렸고(엡 1:18), 하나님의 영광의 빛(고후 4:6)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사랑을 보게 된다. 죄들이 용서되었다(마 9:2)는 것과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 8:11)는 하나님의 내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제 인간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그분(시 94:10)이 계시하시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신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그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은혜들을 내적으로 감지한다. 평화(빌 4:7)와 영광으로 가득찬(벧전 1:8)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 하나님의 사랑(롬 5:5)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적 감감들이 훈련받아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감각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내적 나라에 대한 모든 지식에 있어서 매일 자라난다. 이제 비로소 그는 살아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던(골 3:3) 그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영에 숨을 불어 넣으시고, 그의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숨을 쉰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정도’(엡 4: 13)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
5. 신생의 본질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영혼을 죄의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 하나님이 영혼 안에 역사하여 일으키시는 위대한 변화다. 한마디로, 지상적이고 육적이며 마귀적인(약 3:15)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 마음(빌 2:5)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의 신생의 본질로 ‘성령으로 난 자’는 누구나 이렇다(요 3:8).
Ⅲ. 1. 세 번째 질문인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 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로 신생은 거룩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거룩은 단순히 외적 종교가 아니다. 외적 의무들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해도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복음이 말하는 거룩은 마음에 도장을 찍듯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이외의 것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 전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에 대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지속적인 사랑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며 ‘우리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오래 참음’(골 3:12)으로 충만케 하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행동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마음의 형상에 있어서 새로워지기 전에는 이러한 거룩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거룩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시작될 수 없다.
2. 거룩이 없이는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다. 신생은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때때로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죽은 후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기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의 덕망과 도덕, 교회에 출석하고 성례에 참석하는 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근거가 된다. 그들은 ‘내가 내 이웃사람들이 한 것 같이 안 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지 못한 그들의 이웃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행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유황불 붙는 못’(계 19:20)에 함께 누워있게 될 것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누구도 거룩할 수 없다.
3. 같은 이유로, 거듭나지 않고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조차 행복할 수 없다. 거룩하지 않은 기질들, 즉 악한 마음과 증오와 시기와 질투, 복수심만이 마음에 지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정열과 희망조차도 마음을 병들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열망은 모두 ‘우리를 많은 근심으로 찔러 꿰뚫는’(딤전 6:10) 수가 많다. 그러므로 어떤 영혼에든 이들이 지배하는 한은 그 영혼 안에서 행복이란 있을 수가 없다.
Ⅳ. 1. 마지막은 위의 관찰로부터 따라 나오는 몇 가지 명제들이다. 첫째로, 세례가 곧 신생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같다. 하지만 어떤 교파에 의해서도, 그것이 영국 국교회이든지 또는 비국교파 교회이든지 간에, 이 의견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비국교파 교회의 판단은 그들의 『대교리문답』에 명백히 선언되어 있다. 즉, 세례는 영적으로 거듭난 것을 상징하고 보증하기 위한 것으로(대교리 문답 163, 165.) 사실 자체인 중생과 구별되어 언급되고 있다. 『교회 교리문답』에서도 세례의 외적인 부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 물이지만, 사실 자체인 내적 부분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의에로의 신생이라고 명료하게 선언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례는 신생이 아니라는 사실 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하나는 몸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의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일어난 변화다.
2. 둘째는 신생이 세례에 항상 동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물로써 태어났다고’(요 3:5)고 할지라도 ‘성령으로써 태어나지’(요 3:6, 8)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유아세례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세례 받은 성인들이 세례 받기 전에 마귀의 자녀들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지속적으로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아 볼 수 있는데(마 12:33),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하는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8:41).
3. 위의 관찰로 알 수 있는 세 번째 점은 신생은 성화와 동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생은 성화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다. 신생은 성화의 문, 즉 입구다. 우리가 거듭 났을 때, 우리의 성화, 즉 내적 및 외적 거룩이 시작된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성장한다’(엡 4:15). 아이는 여인으로부터 짧은 시간에 태어나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점진적으로 서서히 성장한다. 동일한 관계가 우리의 신생과 성화 사이에도 있다.
4. 위에서 관찰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이 하나 더 있다. 한 사람이 의도적인 죄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에게 ‘너는 거듭나야만 한다’라는 말 이외에 무슨 말도 해줄 수 없다. 어떤 열광적 사람은 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제 와서 거듭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자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다(요 3:3). 그렇다면 누가 무자비한 것인가? 그 열광적 사람은 거듭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은 그 한 영혼을 저주받도록 넘겨주는 것이다. 그 알량한 자비 덕분에 한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지속적인 죄를 범하는 그 죄인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세례 받을 때 이미 거듭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웨슬리) 대답한다. 첫째로, 거짓말을 변명하여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아래 없다. 차라리 세례 받은 것을 인정하지 말라. 그것이 너의 죄책을 얼마나 더 가중하겠는가? 세례를 받은 이후로 그 오랜 시간동안 마귀에게 네 자신을 드려오고 있는가? 그렇게 하면서 너는 네가 한 때 하나님께 속해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삼는단 말인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더 이상 자랑하지 말라.
나는 두 번째로 대답한다. 너는 이미 너의 세례를 부인했다. 너는 세례를 받을 때 마귀와 모든 마귀의 일들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다시 마귀에게 자리를 내줄 때마다 그것은 너의 세례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세 번째로 대답한다. 너는 세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상관없이 거듭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네가 내적으로 거룩할 수가 없다. 그것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조차 행복할 수 없다. 너는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자의적인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네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선을 실제로 다 행했다고 할지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거듭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죄 많고 오염된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 네가 ‘나는 교회출석과 성례 받는 일을 빠뜨리지 않고 지킨다’고 말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너를 지옥으로부터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도 신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네가 이 내적인 역사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드리라 :
“주님, 지금까지 주신 모든 축복들에 이것을 더하여 주옵소서: 나를 “거듭나게” 해주옵소서. 주님께서 기뻐 거부하시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다 거부하시옵소서. 그러나 이것만은 거부하지 마시옵소서 : 나를 “위로부터 나게” 해주시옵소서……그것이 명예든지, 재물이든지, 친구들이든지, 건강이든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것만은 주시옵소서: “성령으로부터 나는 것”을 주시옵소서……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썩어지지 않는 씨로부터(벧전 1:23) 태어나게 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매일같이 “은혜 안에서 우리 주님이시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안에서 자라게(벧후 3:18) 해주시옵소서!”
13. 신생에 의한 표징들(The Marks of the New Birth)
4132084 허일성
4122071간닥산자담바
요 3:8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1.‘성령으로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또는 ‘양자의 영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이런 특권들이, ">坪�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보통세계에 덧붙여지는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권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자 한다. 신생이란 무엇인가?
2. 성경이 신생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때, 신생의 정의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인 만큼, 나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생의 표징들을 가장 평이하고도 명백하게 밝혀보겠다.
Ⅰ.1 실생의 표징들 가운데 첫 번째는 믿음이다. 그래서 성 바울은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말한다.
Ⅰ.2 그러나 여기서 사도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각으로나 또는 사변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다. ‘믿을만한 어떤 것이나 또는 믿을만한 모든 것에 대하여 믿을만하다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Ⅰ.3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모두 죽은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것을 가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그런 살아 있는 참된 기독교적 믿음은 동의, 즉 이해력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행하여 이루어진 상태다. 그 상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나의 죄들이 용서되었고, 내가 하나님께 화해되어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확신이다.’우리가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하는 바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모든 교리조항들을 믿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진실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Ⅰ.4 우리가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할 때의 이 믿음의 열매는죄를 이기는 능력이다.모든 종류의 외적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즉,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을 이기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그런 방식으로 적용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피가 ‘양심을 죽은 행위들로부터 깨끗하게’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내적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모든 거룩하지 않은 욕망과 기질로부터 ‘마음을 정화하기’때문이다.
Ⅰ.5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 값진 특권에 대하여 특히 외적 죄를 이기는 능력에 대하여 강하게 강조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죄를 범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옳다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는 누구나 습관적으로 죄짓는 것을 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이런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나는 성경에서 그런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말은 성경에 써있지 않다. 하나님은 평이하고도 명백하게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만 말씀하셨다.
Ⅰ.6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짓지 않는다 죄짓는 자마다 그 분을 보지 못했고, 그 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의를 행하는 자는 그가 의로우신 것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시작부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고,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난다.’ 이 명백한 표징으로써 그들은 서로 구별된다. 요한일서 5장의 말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 자신을 지킨다. 그래서 악한 자가 그를 건들리지 않는다.’
Ⅰ.7 이 살아 있는 믿음의 또 다른 열매는 평화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므로’, 즉 우리의 모든 죄들이 도말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 그들이 편안하든지 고통 가운데 있든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부요하든지 궁핍하든지,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만족하기를 배웠다. 아니,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파란곡절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믿음으로써 굳세게 서있는 것이다.’
Ⅱ.1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의 두 번째 성경적 표징은 소망이다. 그래서 성 베드로는 그 때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풍성하신 자비를 따라 우리를 다시 낳으심으로,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다.’ 즉 생동감 있는 또는 살아 있는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은 소망도 있기 때문이다. 죽은 소망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자와 인간으로부터 온 소망을 의미한다. 이 죽은 소망은 교만의 산물인 만큼,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이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를 부르신 분이 거룩한 것 같이, 거룩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형제들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계신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Ⅱ.2 이 소망은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앝이,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첫째로 우리가 ‘일편단심과 거룩한 진실성 안에서’ 걸어가고 있다고 우리 자신의 영 또는 양심이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자녀면 상속자고, 그것도 하나님의 상속자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일한 상속자라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과 더불어’ 또는 우리 영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Ⅱ.3 하나님의 영이 증거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녀이면 상속자고, 그것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일한 상속자’라고 하는 내용이고, ‘만약 우리가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면’,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누구 안에서 이렇게 증거하시는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이렇게 증거하신다. 사도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또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을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영으로써 우리는 아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성령 자신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Ⅱ.4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라는 표현과 ‘우리’라는 표현이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 점은 자세히 관찰해 볼만하다. 즉,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 영으로써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들은 너희가 가진 아들로서의 그 자격 덕분에, 우리가 그 영으로써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바의 바로 그 동일한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이다. 우리와 너희가 한 주님을 가진 것 같이, 우리는 한 성령을 가졌다. 우리가 한 믿음을 가진 것 같이, 우리는 또한 한 소망을 가졌다. 우리와 너희는 한 ‘약속의 성령’, 즉 너희와 우리의 상속물의 보증이신 한 ‘약속의 성령’으로써 인치심을 받았다. 바로 그 성령께서 너희의 영과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Ⅱ.5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 때 ‘너희 마음은 즐거워할 것이다’ 그렇다, ‘너의 기쁨은 충만할 것이다.’‘그리고 그 기쁨을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지금 속죄를 받았고’, ‘그를 인하여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다시 나와 살아 있는 소망을 갖게 하신’ 너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켜주심을 받는다. 지금은 때를 따라 필요한 경우에 당분간 여러 가지 유혹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 소망 안에서 크게 즐거워한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시는 그 때에는 오히려 칭찬과 존귀와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 분 안에서 너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영광으로 충만한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Ⅲ.1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의 세 번째 성경적 표징은, 그리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이것은 사랑이다. 즉,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들의 기쁨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기쁨이요, ‘그들의 방패요, 그들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그들의 영혼의 열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다. ‘하나님의 듯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다.’‘그들의 입이 기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안, 그들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만족한다.’
Ⅲ.2 이런 의미에서 또한 ‘내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으로부터 출생된 분을 사랑한다.’ 그의 영은 하나님 그의 구원자 안에서 즐거워한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한다.’ 그는 ‘한 영’이듯이 ‘주와 합하여졌다.’ 그의 영혼은 그 분에게 매달렸고, 그 분을 ‘만인 가운데 으뜸이요’, 온전히 사랑스러운분으로 선택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은 나의 것이요, 나는 그 분의 것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을 그는 알고, 느낀다. ‘당신은 사람들의 자녀들 보다 더 아름답고, 당신의 입술은 은혜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영원히 기름 부었기 때문입니다.’
Ⅲ.3 하나님에 대한 이 사랑의 필연적인 열매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각 영혼 모두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의 적들도 제외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를 멸시하며 핍박하는’ 사람들도 제외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우리 주님은 이 사랑을 훨씬 더 강하게 표현하셨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사도는 올바르게 추론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된다..’
Ⅲ.4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즉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에서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 나머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징표 또는 증거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한번 우리 마음에 부어지기만 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압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Ⅲ.5 그 다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두 번째 열매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분에 대한 보편적인 복종이요, 그 분의 뜻에 대한 일치다. 하나님의 모든 내적 및 외적 계명들에 대한 복종이다. 마음과 삶 양면 모두에 있어서의 복종이요, 모든 기질과 모든 대화의 방식에 있어서의 복종이다.
여기에 가장 명백히 포함되어 있는 기질 가운데 하나는 ‘모든 선행에 대한 열심’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가능한 종류의 선행을 행하고자 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이다. ‘그들을 위해서 쓰며 쓰임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보답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다만 의로운 자들의 부활 시에 보상받을 것을 기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스고 쓰임 받고 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Ⅳ.1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문의해 본다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모두’ 그러하다. 그것이 바로 ‘자책할 것이 없는 양심의 증거’를 가질 뿐만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영이 너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것’을 갖는 방식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소망한다는 것이다. 이 소망으로 부터 ‘그를 통하여 너희가 속죄를 얻은 바의 그 분 안에서 항상 기뻐함’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너희로서는 어느 피조물이든지 결코 그런 사랑으로는 사랑해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랑으로서 너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너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Ⅳ.2 그러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하는 너희라는 사람들을 과연 누구인가? 이 말씀들을 자세히 들은 너희들은 각자가 이 시간에 네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또는 아닌가 하는 것을 사실대로 느끼며 알 수 있다. 지금 네가 어떠하냐 하는 것이다. 양자의 영이 지금 네 마음 안에 있는가? 네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라. 네가 물과 성령으로 났었는지를 나는 묻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가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성전인가를 묻는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의 할례로써 할례 받았다’고 하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그리고 영광의 영이 지금 네 위에 임하여 계신가? 그렇지 않다면, ‘너의 할례는 무할례가 된 것이다.’
Ⅳ.3 내 마음 속으로, ‘나는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말하지 말라. 세례받은 대식가들과 술 취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례 받은 거짓말쟁이들과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례받은 욕쟁이들과 신성모독적 말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례받은 호색가들과 도둑들과 착취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네 생각은 어떤가? 이런 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인가? 진실로 나는 네게 말하거니와, 네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지금 말한 그런 속성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갖고 있는 자라면, ‘너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서 난 자요, 너의 아비의 일들을 너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너에게 나는 네가 새우이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그 주님의 이름으로 불러, 주님이 그 당시에 너처럼 세례받고 악하게 산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겠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하겠느냐?’
Ⅳ.4 너희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실로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하겠느냐! 왜냐하면 너희는 지금 범죄하는 것들과 죄들 가운데 죽어있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때 거듭나는 것 이외에 달리 거듭나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희는 모두 저주 아래 놓고 도장을 찍는 것이요, 너희를 이제 아무 도움도 소용없고 희망도 없는 형태로 지옥에 넘겨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그런 죄인들, 아말렉인들은 잘라버려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진멸되어 마땅하다.’ 아니다 나도 너도, 나의 받을 바도 너의 받을 바도, 그리고 그들이 받을 바도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있지 않은 것도 오직 자비, 아무 공로 없이 값없이 받는 자비다.
‘인간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것을 너는 모르는가? ‘이 세상과 사귀는 것은 하나님과의 원수관계라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라.
Ⅳ.5 ‘진실로, 진실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너희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너희는 세례 시에 그듭났다는 꺾어진 갈대에 더 이상 의지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징들이 무엇인지 이미 들었다. 그 표징들을 너희의 영혼 안에 갖고 있지 않은 너희는 모두, 세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상관없이, 그 표징들을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반드시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세례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나, 지금 마귀의 자녀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능력’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받을 수도 있다. 그들이 상실한 그 것, 즉 ‘그들의 마음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양자의 영’을 다시 받을 수도 있다.
Ⅳ.6 아멘, 주 예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다시 찾고자 마음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양자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주님의 이름을 믿는 능력을 다시 갖게 하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피 안에 구속, 즉 죄들의 용서’를 갖고 있다는 것과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대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느끼도록 주님의 이름을 믿는 능력을 그들로 하여금 다시 갖게 하시옵소서, 그들로 하여금 지금 ‘거듭나서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하시고, 그래서 ‘주님이 성결하신 것처럼 그들 자신을 성결하게 하도록’ 하시옵소서. 그리고 ‘그들이 이제 아들인고로’, 사랑의 그리고 영광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여 있게 하시고, 그 성령이 그들을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깨끗이 씻기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을 완전하게 하도록’ 그들을 가르치게 하옵소서.
14.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
(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
4122008 김성혁
4112009 권오배
요일 3:9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
1. 칭의 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두 가지 선물은 모두 믿는 자 누구에게나 동일한 한 순간에 주어진다.
2. 칭의는 단지 관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신생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칭의 하실 때는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거듭 낳으실 때는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외적인 관계를 바꿔 놓는 것이다. 그러나 신생에 의해서는 우리의 지극히 내적인 영혼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 둘은 시간의 관점에서는 상호 결합되어 있으나, 본질 면에 있어서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칭의와 중생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관찰하지 못하고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논한 많은 사람들이 사고에 있어서 지극히 큰 혼란을 피하지 못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그런가를 보이고자 할 때
4.이것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라는 표현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 그는 ‘범죄 하지 않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Ⅰ.1.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라는 표현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라는 표현은 어떤 외적인 변화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굉장한 내적인 변화, 즉 성령의 활동에 의해 영혼 안에 이루어지는 어떤 변화, 우리의 존재방식이 전체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이 위대한 변화를 겪었을 때, ‘거듭 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 출생의 상황과 영적인 출생의 상황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적 출생의 상황을 생각해 보는 것이 영적이 출생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3.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이는 숨을 쉬며 존재하지만 그는 그 공기를 느끼지는 못한다. 만약 듣기는 듣는다면 아주 조금 들을 뿐이다. 청각기관이 아직 닫혀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가시적인 세상과 거의 교통이 없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개념도, 생각도 없다.
4.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아이는 세상과 매우 가까이 있다. 이세상은 그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물질 세상과 교통할 수 있는 그 감각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와 물질세상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베일이 쳐져있어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다.
5. 그러나 그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방으로부터 그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를 느낀다. 모든 감각들이 동원되어 대상들을 감지한다. 그리고 영혼은 이 입구들을 통하여 이 가시적인 세상과 교통하면서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갈수록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
6. 하느님으로부터 난 삶의 경우도 이와 같다. 비록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그 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하나님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내적 의식이 없다. 하나님은 위로부터 지속적으로 그를 부르고 계시지만 그는 듣지 못하고 그의 귀는 닫혀있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의 일들도 보지 못하고 이해력의 눈이 닫혀있고 완전한 어둠에 싸여 그의 영혼 전체를 덮고 있다. 어느 정도 조그만 시작 징후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영적인 대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관들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분별하지 못한다.
7. 그는 불가시적 세계의 한 가운데 있다. 흔히 표현하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다른 세상’은 사방에 있다. 단지 자연인으로서는 이 ‘다른 세상’을 분별할 수 없다. 영적 감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8.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면, 성령으로부터 나면 그의 존재방식은 달라진다.
그의 영혼 전체는 이제 하나님을 감지한다. 하나님의 영 또는 숨이 이 새로 태어난 영혼에 즉시로 불어넣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바로 그 숨이다. 이 숨은 지속적로 믿음으로써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사랑과 기도와 찬양과 감사드림으로써 돌려드려진다. 이 새로운 종류의 영적 호흡으로써 영적 생명은 유지될 뿐 아니라, 매일매일 성장한다. 그리하여 영적 힘과 영적 움직임과 영적 감각도 함께 성장한다. 영혼의 모든 감각들이 깨어났고 영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 할 수 있다.
9. 그의 이해력의 눈은 열려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 그 분의 능력의 지극히 큰 것과 죄인인 그에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들’을 명료하게 본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얼굴의 빛 안에서 거한다.
10. 그의 귀는 이제 열렸다. 그는 하늘의 부르심을 들으며 순종한다. 그의 영적 감각들은 이제 깨어나 불가시적 세계와 명료하게 교통한다. 그의 마음에 들어올 수도 없었고 따라서 깨달아질 수도 없었던 일들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이 알아 간다. 전에 있던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던 베일이 제거됨으로써, 성령으로부터 난 자는 ‘사랑 안에 거하므로,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그의 안에 거하신다.’
Ⅱ.1.이제 두 번째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인지 탐구할 일이 남았다.
위에서 서술한 그런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영의 은혜로운 영향을 계속 받아들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다시 내어놓는 자는 죄를 그러는 동안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씨가 그의 안에 계속 있는 한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없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죄’라는 말은 율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되는 어떤 계명을 자의적으로 실제로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영과 감사의 영 안에 거하는 한,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죄를 범할 수도 없다, 그가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쏟아 놓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어떤 것을 자의적으로 어길 수가 없다.
3.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죄를, 그것도 명백한 외적인 죄를 얼마든지 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죄를 범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다.
4. 다윗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였다. 또 그는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고 기도하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쏟아 놓았다. 그리고 또한 찬양과 감사도 부요하게 드렸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죄를 범했다. 그것도 간음과 살인이라는 무서운 죄를 범했다.
5. 사도들에 의해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칭을 얻은 그 사람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바울 사도와 동행하며 그의 동역자가 되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던 바나바도 사도 바울과 심하게 말다툼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바울과 같이 일하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 즉, 성령이 그를 직접적인 방법으로 바울에게 합류하게 하셨던 것이지만, 그는 바울을 떠났던 것이다.
6. 이 두 가지 경우보다 더 놀랄만한 예로 바울은 말한다. ‘나는 베드로를 그의 면전에서 항의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야고보로부터 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이들과 식사했던 이유는 어떤 인간도 속되다거나 깨끗지 않다고 하지 말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남은 유대인들도 식사하지 않은 척 했고 바나바도 역시 그런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에 의해서 범해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죄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의 공언,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공언, 이 공언을 명백한 문자적의미로 취할 경우 이 공언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7. 나는 대답한다. :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그 자신을 지킨다면’(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자신을 지키지 않는다면(믿음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는 그에게 충분하였던 하나님의 그 은혜에 의하여 그 자신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단계를 따라 범죄 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첫째로, 소극적인 내적 죄로 들어간다. 즉, 그의 안에 이미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흔들어 일깨우지 않았다.’ ‘깨어 기도하기를 하지 않았다.’ ‘위에서 그 분의 부르심의 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나가지’ 않았다. 그런 다음 적극적인 내적 죄로 들어간다. 즉, 그의 마음 속 에서 악으로 기울어진다. 어떤 악한 욕망이나 기질에게 길을 내준다.
그런 다음에 그의 믿음을 상실한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시야에서 상실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실한다. 그러면 이제 그는 약해지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어서 심지어 외적인 죄를 범할 수 있게 된다.
8. 이것을 한 인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모든 악의 씨앗인 그 본성의 부패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가 옥상에서 산보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시야에 밧세바가 들어 왔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는 유혹을 느꼈다.
그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이 잘못을 깨닫게 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는 경고하시는 음성을 들었고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그 생각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그 유혹이 그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의 영은 더럽혀졌다.
하나님의 음성이, 갈수록 약하게 들려왔으나, 여전히 속삭였다.:‘죄가 너의 문 앞에 엎드려있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그의 본성이 은혜를 이기고 그의 영혼 안에 정욕이 불길을 놓을 때까지 그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의 눈이 이제 닫혀 하나님이 그의 시야에서 안 보이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모두 중단되었다. 이렇게 되어 그는 고의로 외적인 죄를 범했다.
9. 여기서 우리는 은혜로부터 죄로 발전해 명백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단계별로 진행된다. (1)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속에 사랑하며 이기는 믿음의 신적인 씨앗이 남아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신을 지키며, 그래서 죄를 범할 수 없다. (2) 유혹이 일어난다. (3) 하나님의 영이 죄가 가까이 있고 더 많이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신다. (4) 그는 어느 정도 그 유혹에 길을 내어준다. 그러면 그 유혹은 그를 더 즐겁게 하기 시작한다. (5) 성령이 슬퍼하신다. 그의 믿음은 약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식어간다. (6) 성령이 그를 더 신랄하게 책망하신다. (7) 그는 하나님의 고통스럽게 하는 음성에 등을 돌리고, 유혹자의 달콤한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8) 악한 욕망이 그의 영혼 안에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9) 이제 그는 외적 죄를 지을 수 있다. 주님의 세력이 그를 떠났기 때문이다.
10. 사도 베드로는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와서 있었을 때는’ ‘할례당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하는 유혹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 보다 이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유혹이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다. 죄가 가까이 있다고 성령이 그를 경고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정도 죄에 양보했다. 그의 믿음과 사랑이 그런 만큼 약해졌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책망하셨다. 그러나 오히려 노예적인 두려움에 자신을 내줌으로 그는 성령을 소멸했다. 그는 외적 죄를 범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그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그은 모든 종류의 죄를 얼마든지 탐욕스럽게 범할 수 있다.
Ⅲ.1. 지금까지의 고찰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마음이 진실한 많은 사람들을 자주 혼란스럽게 해오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논쟁할 여지가 없이 분명한 대답을 줄 수가 있다. 즉 믿음이 먼저 상실되고 죄를 범하는 것인가? 아니면 먼저 죄를 범하면 믿음을 상실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는 죄를 범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상실하는 것인가?
나는 대답 한다 : 어떤 죄는, 적어도 태만의 죄는, 반드시 믿음의 상실 보다 앞선다, 어떤 내적인 죄들도 믿음의 상실 보다 앞선다.
둘째, 믿는 자의 영혼 안에 있는, 믿는 자의 영혼이 본래적으로는 그 안에 존립 하는 바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 안에 무엇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지속적인 불어넣음을 포함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영혼 안에 숨을 불어넣으시고 영혼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쉬는 것이다.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하심이 마음에 나타내지고, 믿음에 의하여 받아 들여 지는 것이다.
셋째,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영혼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혼에게 행하시기를 지속하지 않는 다는 것은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가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우리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시며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신다.
4.마지막으로 우리는 저 위대한 사도의 가르침을 배웁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하라’죄를 죽음이나 지옥보다 더 두려워합시다. 열심 있는 두려움을 가집시다 ‘서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언제든지 내적 죄 속으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항상 깨어 감사하라. 네가 쉬지 않고 기도하도록,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든지 네 마음을 그 분 앞에 솔직히 쏟아 놓도록 깨어 감시하라. 이와 같이 네가 항상 믿고 항상 사랑하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15. 믿는 자 안에 있는 죄에 관하여
(On Sin in Believers)
〔1763.3.28〕
4132038 배 경규
4122011 김 주성
4132069 정 원혁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Ⅰ.1.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안에 죄가 있다는 말인가? “그를 믿는 자” 안에 죄가 ‘남아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 안에 어떤 죄든지 있는가, 아니면 그들은 죄로부터 완전히 건짐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극히 중요하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의 현재와 행복과 미래의 행복 양자에 직접 관련된다.
2. 초대교회와 고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문서를 남긴 그리스도인들 전체는 한 목소리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강하며 주님의 능력 안에 있게 되기까지는’, ‘정사들과 능력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뿐 아니라, ‘육과 혈에 대항하여’, 즉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뿐 아니라, ‘육과 혈에 대항하여’, 즉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씨름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교회는 초대교회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그리스어로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육의 정욕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을 지라도,... 이 육의 정욕은 그 자체로서는 죄의 본질을 갖고 있다.
4. 모든 다른 교회들도 동일하게 증언한다. 믿는 자 안에 마음의 부패를 묘사하는데, 믿는 자가 그 본성의 부패를 지배한다는 점은 거의 인정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본성의 부패에 매여 있다고 말하는것 같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의 차이점을 거의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5. 의도는 좋았으나 그 반대의 극단적인 입장의 사람들(고 친첸도르프 백작의 지도하에 있던 사람들)이 ‘모든 진정한 믿는 자들은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적인죄와 내적인 죄의 존재로부터도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죄의 존재는 그들 안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는 본성의 부패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한다.
6. 그 독일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그들의 입장을 말하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들 중 많은 이가 그 주장을 명백히 포기하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안에서도 지배하지는 못하지만(not reign), 여전히 남아있다(still remain)는 사실을 인정했다.
7. 그러나 그 독일 사람들의 먼저 입장을 받아들인 그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그 입장을 버리도록 설득하는 데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Ⅱ.1.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며 ‘진리를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 알기를 원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문제를 냉철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상고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적 실제적 변화인 ‘중생한 사람’, 관계의 변화인 ‘칭의 받은 사람’, 중생과 칭의가 일어나는 방법인 ‘믿는 사람’이란 단어들은 ‘믿는’ 자는 누구나 ‘칭의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되는 것이므로, 이 세 단어는 결국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2. 여기서 ‘죄’라는 것은 내적인 죄를 의미하는 뜻으로 쓴다. 즉, 여하한 죄된 기질, 정욕 또는 정서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과 반대되는 여하한 성향을 의미한다.
3. 질문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하느냐 하는 외적인 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로부터 난 자’라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며 이 명제를 진지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은 일치한다.
칭의 받은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은 칭의 받는 순간에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인가? 그의 마음 안에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은혜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한, 그 후로도 계속 그런 것인가?
4. 칭의 받은 사람의 상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늘나라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의 몸 자체가 ‘성령의 성전’이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피조되었다.’ 그는 씻겨졌다. 그는 거룩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믿음으로 성결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칭의 받은 그 순간부터 외적인 죄나 내적인 죄나 모두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Ⅲ.1. 그렇다면 그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어 그의 마음 안에 아무 죄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심지어 믿는 자 안에서도 ‘육신’이, 즉 악한 본성이, ‘성령’에 대항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단언하고 있다. 즉, 중생한 자들 안에도 두 원리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것이다.
2. 바울이 고린도의 믿는 자들에게, 즉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에게, 말할 때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바울은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라고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신에 소한 자’라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는 말을 동일한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인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육신에 속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3. 사실, 믿는 자들 안에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원리가 -즉, 자연과 은혜, 육신과 성령 -있다는 이 중대한 명제는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 아니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다. 성경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지시들과 교훈들은 이 명제 위에 서 있다. 이들은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써 이 옳지 못한 기질과 행동들과 싸워 이기라고 지속적으로 권고를 받고 있다.
4. 우리 주님이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도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신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실제적인 죄였다. 그래서 그는 이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그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말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5. 버가모 교회의 천사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명백히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라고 권고를 받고 있다. 그리고 사데 교회 천사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 이런 자 안에도 남아 있는 ‘믿음의 불꽃을 굳게 붙들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6.사도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권고할 때, 그는 그 믿는 자들이 아직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부터 깨끗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한 것이라고 너는 대답하려는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7.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는 죄가 없다. 즉 육신적인 마음이 없고, 믿음을 버리고 다시 타락하려는 기질이 없다’는 입장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에도 어긋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 즉 교만, 자기의지, 불신앙을 매일 같이 느끼며, 또한 그들의 모든 말하고 행하는 것, 심지어 그들의 최선의 선행과 가장 거룩한 선행에도 들러붙어 있는 죄를 매일 같이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안다. 그들은 죄가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며 영광의 소망이시라는 사실’, 이 두 가지를 똑같이 확신한다.
8. ‘그러나 그리스도가 죄가 있는 바로 그 마음 안에 같이 계실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반박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같이 계실 수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는 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통치하실 수 없다. 또한 어떤 죄라도 허용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는 거주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믿는 자라면 예외 없이 그의 마음 안에 계시며 거주하신다.
9. ‘믿는자들 안에는 죄가 없다’는 반대 이론은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는 아주 새로운 이론이라는 것을 위에서 우리는 보았다. 어떤 교리가 되었든지 새로운 교리는 그릇된 교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오는(old) 종교가 유일하게 진리(true) 종교이기 때문이다.
10. 누가 ‘나는 오늘 분노를 느꼈다’고 말할 때, ‘그렇다면 당신은 믿음이 없소’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또 누가 ‘당신이 나에게 조언하는 내용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그 조언내용에 대하여 지극히 거역한다’고 말할 때, ‘그렇다면 너는 불신자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밑에 있다’라고 말해줘야 한단 말인가?!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만약 그가 나의 말을 사실로 믿는다면, 그의 영혼은 슬퍼하며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완전히 파멸될 것이다. 그가 ‘크게 상으로 보상받을 그 담대함(=확신)을 내어버릴 것이므로 그의 영혼은 파멸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방패를 내어 버렸으니, 그는 무장을 해제한 채 그의 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그들의 한 가운데 서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칭의를 받는 그 순간부터 믿는 자 안에는 죄가 없다‘는 주장을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로는 그 주장은 성경의 전체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그 주장은 전적으로 새로운 이론이요, 마지막으로 그 주장은 자동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바, 하나님이 슬프게 하시지 않는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뿐만 아니라, 영원한 파멸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Ⅳ.1. 그러나 이 주장을 힘써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요 논증들을 공정하게 들어보자. 첫째로, 믿는 자 안에는 죄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입증하려고 한다. 그런데,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온전히 악하다면, “성령에서 난 것은 영이요” 온전히 선하다.
둘째로, 그의 영혼은 성령의 성전이면서 동시에 거룩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반대 의견을 가능한 한 강하게 표현했다. 이제 이 논증을 부분마다 차례로 검토하기로 하자.
(1) ‘“성령으로부터 난 자는 영이다”, 그리고 온전히 선하다.’ 나는 이 성경본문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 본문에 대한 해설은 인정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영적인 사람 일지라도, 그는 완전히 영적인 사람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육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다”라고 한다.
(2) ‘그러나 한 사람이 깨끗하며, 성화되었으며, 거룩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깨끗하지 않으며, 성화되지 않았으며, 거룩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니 그는 실제로 동시에 그럴 수가 있다.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그들이 새로운 마음과 옛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시에 이 둘을 가졌던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진정으로 새로워진 바로 그 시각에, 그러나 아직 완전하게 새로워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령의 성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정도는, 육적이었던 것, 즉 거룩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 가지로 분명하다.
2. ‘그러나 이 문제를 문제 삼을 수 없게 만드는 성경구절이 하나 더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 것들은 지나갔다. 보라,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되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옛 피조물일 수는 없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 피조물이며 동시에 옛 피조물일 수가 있다. 그는 부분적으로 새로워졌을 수가 있다. 그것들이 새로운 상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온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슬프고 부끄럽게도 아직도 옛 사람의 잔여물들, 즉 그의 예전의 기질들과 정서들의 너무도 분명한 흔적들을 느낀다. 이것이 그의 지체 속의 법인데, 그가 ‘깨어 기도하는’ 한은, 이것이 그를 압도 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마음의 법에 대항하여 자주 싸우는 것을 느낀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는 모두 거룩하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거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죄가 지배하지는 않지만, 남아있다. 장성한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온전한 거룩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어린아이에게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얼마나 모르는 사람인가!
4. ‘그러나 믿는 자들은 “성령을 따라 걸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 따라서 그들은 죄에 대한 책임과 죄의 세력, 즉 한 마디로, 죄의 존재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이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한 책임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 존재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그 자신 안에 거하심 ‘성령을 따라 걸어갈’ 수도 있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육이 성령에 대항하여 욕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자들도 여전히 육신이 성령에 대항하여 욕망하는 것을 느낀다.’는 말에서부터 그리스도가 그들로 하여금 저항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는 바의 그 마귀나 또는 죄와 더불어 그리스도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은 도출되지 않는다.
6.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러운 것은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박할 것이다. ‘성령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거룩하며 더럽지 않다. 물론 그들 안에 다른 원리가 있는 것을 느끼며, ‘이들은 서로 간에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7.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 화해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것’인 본성의 부패가 우리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육신은 ‘더 이상 우리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육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육신은 여전히 그 본질에 있어서 성령에 거슬려 욕망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것이다.
8.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는 교회가 거룩하며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아직은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없었다.
9. 칭의를 받은 사람은 모두 칭의 받는 그 순간에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발견한다고 반박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의심한다. ‘만약 그들이 칭의 받는 순간에 그 후로 계속해서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10. ‘죄가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어떤 종류로도 또 어느 정도로도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모든 경험과 모든 성경과 모든 상식에 절대적으로 어긋난다. 모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다. 이것은 사랑의 율법에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분노는 성령에 거슬려 욕망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만 번의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죄책이나 죄의 세력은 없으나 죄는 있는 것이다.
11. 그러나 믿는 자 안에 죄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무섭고도 용기를 잃게 하는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어떤 세력과의 싸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죄가 우리 안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그 죄가 우리의 힘을 점유한다는 것을 내포하지 않는다. 이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그를 십자가에 다른 사람들의 힘을 점유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또한 ‘죄가 우리의 마음을 강탈하고 계속 그 강탈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죄는 점점 약해져 가고, 반면에 믿는자는 점점 힘이 강해지며, 계속 정복해 나가면서, 완전한 정복을 위해 계속 전진한다.
12. 자신 안에 죄를 가진 자는 죄에게 노예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이 죄에게 계속 노예인 상태에 있으면서 칭의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 받은 어떤 사람도 죄에게 노예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칭의 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죄가 적어도 한 동안만이라도 남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죄가 믿는 자 안에 남아있다면, 그렇다면 그는 죄 있는 인간이다. 그는 어떻게 불신자들과 구별되며,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가?’라고 반박할 것이다.
이것도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교만하고 자기의지를 따른다. 그러나 그는 불신자들이 교만하다거나 자기의지를 따른다거나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즉 교만이나 자기의지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로 교만하다거나 자기의지를 따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그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된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그는 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걸어가고’, 중생한 자는 ‘성령을 따라 걸어간다.’
‘그러나 어떻게 불신앙이 믿는 자 안에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불신앙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의 결여를 의미하거나 또는 믿음의 약함을 의미한다. 전자의 의미에서 불신앙은 믿는 자 안에 없다. 후자의 의미에서의 불신앙은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들 안에 있다. 믿음이 약하다는 의미에서의 불신앙이 섞여있다. 믿는 자 안에도 적은 믿음과 많은 불신앙이 있을 수 있다.
13. ‘그러나 죄가 믿는 자 안에 남아있으며, 사람이 그의 마음 안에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총애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이 교리는 분명히 사람들로 하여금 죄 안에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경향이 있다.’라고 반박할 것이다. 사람은 죄를 느낄지라도 하나님의 총애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죄에게 양보하고 길을 내준다면, 하나님의 총애 안에 있을 수 없다.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총애를 상실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에게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총애를 상실하게 한다.
Ⅴ.1. 모든 사람 안에는, 심지어 그가 칭의를 받은 후에도, 두 가지의 상호 대립하는 원리가 있다. 이것이 자연과 은혜이며, 바울은 이것을 ‘육신’과 ‘영’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들도 성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부분적으로만 성화된 것이다. 그들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어느 정도 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정도는 육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며, 많은 경우에 악을 향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며, 선한 것에 대하여 머뭇거리며 마음 내켜하지 않는 태도를 발견한다. 이 사실에 반대하는 교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교리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들어 본 바가 없는 교리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그 순간에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되고, 성화되지만,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완전하게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육신, 즉 악한 본성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성령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한다. 그런 만큼 더 많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데’ 모든 열심을 다 사용하자. ‘깨어 기도하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자.’ 우리가 이 악한 날에 능히 견디며,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는, 능히 설 수 있기 위함이다.
16. 믿는 자들의 회개
(The Repentance of Believes)
4011001 강영준
4122003 권소현
4122010 김정권
“회개의 헬라어는 (μετανόια)다.”
1.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길로 들어서면서 기독교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다.
2. 회개는 우리가 완전히 죄인이고 죄책이 있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여기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며,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보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받기에 앞서서 있는 것이 회개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 즉 ‘의와 화평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을 받게 되는 그 믿음이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야하는 과정에서 단계마다 요구되는 것이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달릴 수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계속 은혜 안에 거하며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Ⅰ. 첫째로 우리는 「칭의 이후의 단계에서」 어떤 의미로 회개해야 하는가?
1. 회개는 흔히 죄로부터 거룩에로의 내적 변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요. 죄책을 가졌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인 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알 때, 우리가 처음에 예수의 피에서 구속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처음에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바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에 세워졌을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우리의 죄들은 모두 단지 덮어진 것이 아니라, 파멸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칭의를 받을 때, 모든 죄가 파멸되었으며,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아무 죄(罪)가 없고 칭의의 순간부터 믿는 자의 마음은 완전히 깨끗하다고 진지하게 믿으며 진정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다’라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면에서 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죄는 지배(reign)하지는 않지만 남아있다(remain).
3. 왜냐하면 모든 죄가 다 사라졌다고 상상했던 그가 조만간에 여전히 교만(pride)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4. 그의 마음속에 자기의지(self-sill)를 느낀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의지를 느낀다.
5. 교만과 자기의지도 우상숭배의 일종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the love of the world)이라고 한다. 믿는 자들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지속적으로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욕(lust)이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행복을 찾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보다는 세상 즐거움을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6. 만약 그가 매순간 그 자신을 지키지 않는다면 ‘안목의 정욕’은 영혼을 공격할 것이다.
7. 심지어 ‘이생의 자랑’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성요한은 ‘명예심’ 이것은 ‘사람에게서부터 오는 명예’를 바라고 기뻐하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는 것(fear of dispraise) 이다. 이것과 거의 연합된 것은 악한 치욕감(evil shame)이다. 이것은 마땅히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뿌리가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8.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 같이 우리는 질투하는 일들(Jealousies)과 분개심(resentment), 복수심(revenge)이 자주 되지 않는가?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데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가?
9. 탐욕(covetousness)은 ‘만악의 뿌리’라고 하는 ‘돈에 대한 사랑’이든지 또는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또는 재물의 증가를 욕심내는 것이든지 간에 다 탐욕이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이래로 어떤 탐욕도 갖지 않았다’ 말하곤 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 하나님이신 그 분을 제외하고는 탐욕을 갖지 않고 태어난 유일분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는 교만과 자기의지와 분노와 함께 탐욕도 역시 칭의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remain).
10. 칭의를 받은 사람들 속에서 어느 정도 ‘육적인 믿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밝은 빛이 없다면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부패의 뿌리다. 우리들 마음에 남아있는 이 모든 죄들을 깨달아 회개하는 것이 바로 칭의 받은 자들에게 속하는 회개다.
11. 죄가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죄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로 달라 붙어있다(cleaves). 무정한 대화(uncharitable conversation), 자리에 없는 사람을 험담하기, 소문을 퍼뜨리며 다니기, 남에 대하여 악평하고 다니기 이 모든 것은 다 죄로 가득 찬 발이다. 무익한 대화(unprofitable conversation)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마 12:36) 이기 때문이다.
12. 지속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이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항상 그들의 입을 조심하며, 입술의 문을 지켜야 한다. 만약 그들이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눈으로 시작한다면 계속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지속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죄를 책망할 때 사람에게 화가 나는 감정이나 냉담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죄가 달라붙어있는가? 이것에 대하여 확실히 깨닫는 것이 칭의 받는 사람들에게 속하는 회개의 또 다른 한 가지이다.
13. 만약 그들의 양심이 철저히 깨어있다고 할 경우에 얼마나 많은 죄가 그들의 행동들에도 달라붙어 있는 것(cleaving to their actions)을 보게 되는가? 그들의 자비(mercy)의 행위들, 경건(piety)의 행위라고 하는 것들 안에도 마찬가지의 혼합이 있지 않는가? 그들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에 그 말씀이 구원이 되기는커녕 저주가 되지 않을까? 그들의 가장 악한 죄들을 부끄러워했던 것보다도 더 현재 그들이 마땅히 드려야 하는 가장 선한 것들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14. 또 얼마나 많은 태만의 죄들(sins of omission)로 그들은 고발되어 마땅한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적들에게 낯선 사람들에게 형제들에게 등. 선을 행해야 함을 알고도 행치 않는 수 천 개의 경우들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태만의 죄들을 저질렀으며 그로 인하여 죄책이 있지 않는가?
15. 태만 이외에도 그들 자신 안에서 내적인 부족함들(inward defects)을 수도 없이 발견하지 않았는가? 욥처럼 ‘나는 미천하오니’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며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라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다.
16. 그들의 죄책(guiltiness)에 대한 깨달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속하는 회개의 또 하나님의 기지이다. 그들은 믿기 전보다 더 낫게 하나님의 엄격한 의(the strict Justice of God)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 엄격한 의는 그들의 죄의 상태를 이유로 여전히 죽음에 처한 마땅한(worthy of death) 자로 선언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했을 것이다.
17. 그들의 완전히 무력함(utter helplessness)을 깨달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이 회개의 또 다른 가지다. 그들은 칭의를 받기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들 자신으로부터는 선한 생각 하나라도 생각해낼 수 없고, 선한 의욕, 선한 말, 선한 행위를 하나라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는 여전히 어떤 종류가 되었든 어느 정도가 되던지 간에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즉 선을 행하거나 악을 저항하는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18. 심지어 중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남아있는 교만과 자기의지와 세상 사랑과 분노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자 하는 일반적인 경향성을 제기할 수 없는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불구하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달라 붙어있는 악을 제거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태만의 죄들을 피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의미하며 우리가 자인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부족한 점들, 특히 하나님과 이웃사람에 대한 사랑과 다른 올바른 기질들의 결핍을 스스로 메울 수 없는 무능을 의미한다.
19. 누가 이 말에 불만 있다면 칭의를 받는 사람은 이런 죄들을 마음과 생활에서부터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실험을 해보라. 교만, 자기의지, 타고난 죄, 이미 받는 은혜로써 좇아낼 수 있는지 한 번 해보라. 그의 말과 행동, 어떤 형태로든지 말이 섞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할 수 있는지, 무정한 대화와 무익한 대화를 피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 안에 여전히 볼 수없는 수많은 부족한 점들을 메울 수 있는지 해보라. 그가 실험을 오래하면 할수록 이 모든 점에서 그의 완전한 무능한 더 깊이 깨달아 확신하게 될 것이다.
20. 우리가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지라도 그리고 외적 죄와 내적 죄를 모두 저항하여 정복할지라도 그리고 매일같이 우리의 적들을 약화시킬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내어 쫓을 수는 없다. 칭의 때 받은 은혜를 모두 가지고도 우리는 그들을 뿌리 채 뽑아 버릴 수는 없다. 만약 두 번째 변화(second change)가 없다면 만약 하나님의 점진적인 역사 이외에 다른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죄를 가득 찬 채로 있어도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다.
Ⅱ. 1. 우리는 칭의 받은 후에 이런 의미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전에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다.
2. 아버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준비하신 위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오는 모든 자를 끝까지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네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모든 죄로부터 너를 구원할 수 있다. 그는 너의 모든 말과 행동에 달라 붙어있는 모든 죄로부터 너를 구원할 수 있다. 그는 태만의 죄들로부터 너를 구원할 수가 있으며 네 안에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여 줄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시오 이간이신 이 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 참으로 진리다.
3. 그분이 ‘나를 깨끗하게’ 하시기를 기꺼이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너희를 오늘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라. 그는 너희를 지금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가 ‘너는 깨끗해져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믿기만 하라.
4. 그의 피로써 너를 모든 정죄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칭의 받은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내안에 거하는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으며 깨끗하지 못한 걸들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그 모든 죄책으로부터 그 처벌받아 마땅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5. 바로 이 믿음으로써 우리는 매순간마다 우리 위에 임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낀다. 이 능력 없이는 우리의 모든 현재의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 순간 마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때 그를 믿는 자들을 모든 행함에 있어서 앞서 가지면서 인도하시며, 지속적인 도우심으로써 그들을 인도하신다. 모든 계획들과 그분 안에서 시작되며, 진행되며, 끝나게 된다.
6. 이와 같이 회개의 믿음은 정확하게 상호 응답한다. 회개로써 우리의 말과 행동들에 달라붙어 있는 죄를 느끼며, 우리 스스로는 회개로써 우리의 말들과 행동들에 달라 붙어있는 죄를 느끼며, 우리 스스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깨닫는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자비를 받을 뿐만 아니라 곤핍할 때마다 도우시는 은혜를 받는다. 회개는 ‘그분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라고 말한다.
17. 그리스도인의 완전
4132001 강민주
4122038 윤해영
4122083 이국선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완전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많은 모험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완전 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지며 또 이 말을 사용하기를 포기하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 되든지 설교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면 듣고자 하는 사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인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선언하기를 회피하지 않을 때’,‘바로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피로부터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표현을 잘 표현하고 잘 설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완전하다 하며 완전하지 않다는 일견 모순되는 듯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거해 주기 위해 이 두 가지 사항들에 집중해야 한다.
먼저 첫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은가? 와 둘째로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가? 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 먼저 그리스도인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현세에 있어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본질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행하시는 섭리 가운데 많은 부분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인간들은 실수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의 실수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에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부대 상황에 대하여 실수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인간 어느 누구도 전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무오할 수 없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세 번째 로 인간은 한계점들로부터 자유로을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는 내적 및 외적 불완전한 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한계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한계임은 분명하고 인간은 이 한계에서부터 자유로을 수 없다.
또 인간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을수 없다. 유혹에 빠져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육체 안에 계시는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나 실수나 인간의 한계나 유혹으로부터 예외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은 거룩을 의미하는 하나의 다른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나 거룩이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하는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완전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며 거룩한 사람은 성경적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절대적 완전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 해야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것인가? 여기서 전제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생명과정의 단계와 마찬가지로 나누어 져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일서에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어린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 또 아버지들 이라고 칭하며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아버지라고 칭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의 정도까지 성숙한 완전한 사람들 이라는 의미를 가지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이들 조차도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은 죄 가운데 있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가 없다. 이들은 이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의 종이 되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외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듯이, 그가 전에 죄를 짓던 것처럼은 죄를 짓지 않는 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칭찬 받은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하며 살고 있고 또한 불가피하게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들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인들에게서 난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있어 본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장하는 하늘나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속하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 중 세례요한 보다 큰 자는 없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더 크나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여기에서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 온 그 날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들을 가져가기 위해’ 나타나시기 까지는 선을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다. 이것은 율법 아래서 되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더 이상은 종들이 아니고 아들들이 되었다. 율법 아래있던 사람들의 경우와 상관 없이. 복음이 주어진 이후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는 것을 우리는 긍정할 수 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7장 38절 이하에서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라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말씀을 쓴 다음에, 곧 이어서 첨가하기를, ‘이는 그를 믿을 자들이 그 후에 받게 될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으신 까닭에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이 성령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복음을 설교하도록 그의 모든 사도들을 내보내실 때 그들에게 그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더러운 영을 제압하고 내어쫓는 능력,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 심지어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 그렇게 된 것 같이, 성령의 성화시키시는 은혜 안에서 성령이 주어지는 일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죄를 이기는 승리 그 이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죄로부터의 이 위대한 구원은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시기 전에는 주어지지 않았었다고 하는 사실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 와서야 죄에서의 해방이 이뤄지는 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나타난 것같이 그는 이러한 교훈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너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생활태도에 있어서 거룩하라.’
이런 것을 충분히 살펴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 유대적 시대 하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해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코 척도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0:13에 나타나듯 누구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유혹을 받는 일이란 없다. 죄의 유혹에서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죄의 옹호자들(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요새들 가운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의 말씀이 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러한 주장들을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로 그 가시라는 것이 바울이 죄를 짓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는 볼 수가 없고, 더구나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놓이게 했다고는 결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대의 교부들은 그 가시라는 것이 육체의 고통이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이 의견에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이 정확히 일치한다. 즉, 그는 ‘나를 때리거나 치거나 시달리게 하는 육체의 가시... 나의 힘은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졌다’라고 했다.
넷째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적인 죄나 외적인 죄일 가능성은 없다. 즉, 그것은 교만이나 혈기나 정욕의 외적 표현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교만이나 혈기나 정욕의 내적 동요일 가능성도 없다.
마지막으로 그 가시는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전 ‘14년 이상’ 동안 그에게 있었는데, 이 편지는 그가 그의 생애를 마치기 수 년 전에 썼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그리므로 그는 이 편지를 쓴 이후에도 그의 생애 가운데 긴 여정을 가면서 많은 싸울을 싸우며, 많은 승리를 거두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은사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는 데 있어서 큰 발전을 보았던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고찰해 보건대 바울의 이 경우는 우리가 논하는 문제[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와 전혀 관계가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요한의 주장과도 결코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의 “많은 일들에 있어서 우리는 과실을 범한다”라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견에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이 ‘우리’라는 단어의 9절에서의 용법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 저주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입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어떤 사람의 입이 그런다는 뜻도 아니다.
둘째 본문의 바로 앞의 구절에서 이 본문과 명백히 연관하여 말하기를 ‘나의 형제들아, 우리가 많은 일들에 있어서 모두 과실을 범하니, 우리가 [선생이나 교사들이 되면] 더 큰 정죄를 받을 것을 아는 바, 많이 선생들이 되고 교사들이 되려 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부터도 사도 야고보가 ‘우리’라는 말에 사도 자신이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이 구절 자체가 ‘우리는 모두 과실을 범한다’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 관해 말한 것일 수가 없고 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말한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 하나의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는데 바로 요한의 선언이다. 한 곳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데 또 다른 한 곳에서는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쩌라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면 깨끗이 사라진다. 첫째로 10절이 절의 뜻을 확정하고 있다. 8절의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의 뜻은 10절의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있다.
둘째로 현재 고찰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전에 죄를 범한 적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며, 이 구절들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지금 죄를 짓는다든지 죄를 범한다든지 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셋째로 9절이 8절과 10절을 다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다른 성경 기자들과 일치될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도 잘 일치하여 일관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모든 주장들을 모아서 한 눈에 본다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둘째로, ‘나는 죄를 범한 적이 없고, 나는 깨끗하게 해야 할 죄가 없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를 죄들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준비하고 계신다.’ 넷째로, ‘내가 이런 것을 너희에게 쓰는 이유는 너희가 죄짓지 않도록 하려함이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게 되거나 죄를 짓게 되었다면’ 그는 죄 안에서 계속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변호사,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가르침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전체 기초에 일치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확정짓는다. ‘그리스도인은 죄짓지 않을 그 만큼 완전하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오직 ‘주님 안에서 강한’ 자들, 그래서 ’악한 자들을 극복한‘ 자들의 특권이다. 첫째로, 그들은 악한 또는 죄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 그러나 악에 관한 생각들이 항상 악한 생각들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복된 주님도, 마귀가 ’네가 만일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을 때, 마귀가 말한 이 악한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하셨거나 이해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악한 생각이나 죄된 생각을 갖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실로 여하한 악한 또는 죄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으셨다. 주님이 악한 또는 죄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그러면 ‘그의 선생과 같은’ 종에게 있어서 악한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더 이상 악하지 않다면, 악한 생각들은 그 마음으로부터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모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낸다. 부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행복한 특권을 갖는 다는 것을 성 바울도 그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우리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능력인 바, 이것은 요새들을 무너뜨리고, 생각들을 내던져 넘어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거역하여 그 자신을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내던져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순종케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실로 악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이, 악한 기질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제자는 그의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자는 누구나 그의 선생과 같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의 바로 앞에서 기독교의 가장 숭고한 가르침들 가운데 몇 가지를 베풀어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라. 너희를 증오하는 들에게 선을 행하라. 한 쪽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 대라.’ 주님은 이 말씀들을 이 세상이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곧 첨가하시기를, ‘눈먼자가 눈 먼자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 다음 절 누가복음 6장 40절에서 주님은 이러한 ‘현명한 바보들’ 도처에서 우리에게 제기하는 두 가지 중대한 반대의견을 제거하신다. 그 두 가지 반대의견은 이렇다. ‘이 가르침들은 너무 어려워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요, 또는 ‘이 가르침들은 너무 높아서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까지를 받았거니와,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만 해도 되니, 이에 족한 마음을 갖고 불평하지 말라. ‘’완전한 자는 누구나 그의 선생과 같게 될 것이다‘라는 나의 약속을 내가 이룰 것임을 의심하지 말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 이 건짐받은 상태는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표현되었다. 부정적으로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은 나의 악한 본성, 즉 죄의 몸이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모든 것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뜻이다.
참된 믿는 자들 안에 살아 계신 그 분은 ‘그들의 마음을 믿음에 의하여 정화하셨다’. 그래서 ‘자기 안에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 그는 자기의지 또는 욕망으로부터 깨끗하다. 그리고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노여움으로부터 깨끗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유하고 유순하며 인내하며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노여움‘라고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모든 노여움이 다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노여움은 노여워함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대하여 슬퍼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때 죄에 대하여 노여워하셨던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 죄인들에 대하여 슬퍼하셨던 것이다. 완전한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그런 방식으로 화를 내라. 그러나 네 자신은 죄를 범하지 말라.‘ 반드시 그 범죄자에 대하여는 사랑과 가슴 아픈 연민을 느껴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신다. 외적인 죄들로부터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죄들로부터도 구원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맞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의 죄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기 전에는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니다.’ 사도요한은 여기서 이론의 여지없이 그 자신과 다른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관하여 그는 그들이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이후에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그들의 선생님과 같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도요한은 여기서도 ‘이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죄인도 칭의에만 관련해서 그렇다든가 또는 우리의 죄책을 깨끗하게 씼어내는 것에 관련해서만 그렇다고 말하지 말라. 첫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명료하게 구분해 놓은 것을 뒤섞어 혼동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장 강한 의미로 행위에 의한 칭의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하게 하는 것이 모든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 분이 빛가운데 계신것 같이,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다’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이 아니다. 즉 칭의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주님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신 것이다. 모세를 통해서는 ‘나는 너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 것이며, 너의 씨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 것이다. 그리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너희의 마음과 너희의 영혼을 다 하여 사랑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고, 다윗을 통해서는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외치게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그리고 지극히 괄목할만하게는 에스겔을 통해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너희의 우상들로부터 내가 너희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마음을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새로운 영을 내가 너희안에 넣어줄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나의 규례들 안에서 걸어가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는 나의 법령들을 지킬 것이고, 그것들을 행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는 또한 너희를 모든 너희의 불의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모든 너희의 범죄들로부터 깨끗하게 했을 때는, 주 내가 무너진 곳들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과 주 나는 말했으면 그것을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을 이방인들도 알게 될 것이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우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복음안에서 우리에게 확증하신 그 예언적 말씀을 갖고 있으므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완전하게 하자.’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높은 소명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전진하자.’
Ⅲ. 1.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칭의를 받을 때 전적으로(wholly) 성화되었다는, 우리의 마음이 그 때 모든 죄로부터 씻어졌다고 하는 의견이 쉽게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외적 죄의 지배(the dominion of outward sin) 그리고 내적 죄의 세력(the power of inward sin)이 더 이상 따르거나 끌려 다닐 필요가 없을 만큼 꺾여 진 것도 사실이다. 이때 내적 죄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결코 아니다. 즉 교만과 자기의지와 분노와 세상사랑, 이것들의 뿌리가 이때 마음으로부터 뽑혀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육적인 생각과 마음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2. 우리 마음은 완전히 정죄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은 채로 우리의 마음 안에 남아있다. 바로 칭의의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완전히 변화된 것인가? 완전히 전환된 것인가?
3. 두 번째로 우리가 칭의 이전에 그 속죄를 피를 필요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 받은 후에도 그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런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4. 세 번째로 완전한 무능력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진정으로 의지하고 살도록 가르쳐주며,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에게 주신 은혜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그분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침몰할 때 비로소 그분의 전능의 은혜가 그분에게 ‘대적하여 자기를 높이는 모든 것들’을 파멸하시고 모든 기질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된다.’
결론
목사님들은 십일조의 씨앗을 심어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씨앗을 심어서 새싹이 나와서 자랄 때 주위의 잡풀, 돌 고루기와 거름과 농약과 물과 햇볕을 주지 않으면 새싹이 자리지 못하고 죽는다. 바로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회개이다. 자기의 회개, 반성, 고백, 통회, 자복, 성찰, 거듭남이 없으면 새싹이 자라나지 못하며 다음 단계인 칭의 - 성화 - 그리스도의 완전(영화)의 단계를 들어가지 못한다. 새싹이 잘 자랄 때(회개), 꽃이 필 때(칭의 단계) - 열매 맺을 때(성화 단계) - (열매를 수확할 때) - 그리스도의 완전(영화 단계)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