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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설교1) 

 

   

니버갈  (Alfred  Niebergall)

                                                    번역:  권진호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서술해  온  것처럼  루터를  단순히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의 

설교자로만  묘사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보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루터의 

사상,  설교의  본질에  대한  그의  신학을  파악한  후  루터의  설교행적을  살펴보는  것

이  중요하다.

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루터의  사상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섬

길  수도  없다.  그럼  도대체  이  하나님  말씀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과  인간들에게  계시하시되,  바로  말씀을  통해  하신다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  하

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에  속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

이며  하나님이  밝히고  지시하는  계시라는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나타낸다.  그리스

도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이것들이  가져다주는  화해와  구속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한  실재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이  나에게  구원을  주는 

통찰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리고  나에게  행하셨다

는  말씀이  나에게  전해질  때이다.  그러므로  말씀이란  나를  위해  일어난  구원을  설

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  성서,  그리고  교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

다.  이  세  가지  말씀형태가  지닌  내적인  일관성이란,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라는  동

일한  계시가  이  말씀들  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이  설교에  얼마나  타당한지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그리스도와  성서를  다루어  보자. 

1) 출처: Leiturgia. Handbuch des evangelischen Gottesdienstes, ed. Karl Ferdinand Müller

et al., vol. 2/I (Kassel: Johannes Stauda, 1955), 25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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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서

가  충분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통찰은  루터와  로마  교황권과의  격렬한  논

쟁테마가  되었는데,  여기서  루터는  교리와  신앙의  다른  규범과  근거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계시의  유일성을  단호하게  변호했다.  성서의  유

일한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권위, 

더  자세히  말하면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구약성서에도  적용된다.  엄격히  말

하면  구약만이  “[문자로  된]성서”(“그가  감싸  놓여있던  포대기와  구유”)이고,  신약

은  본래  입으로  선포되어  전달된  “말씀”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성서는  인간이  되

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을  담고  있고  예언하고 

약속하고  선포한다는  점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의  총주제(scopus 

generalis)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알려진  것처럼  루터로  하여금  성서의  특정한  부

분과  표현에  대해서  비판적인  언급을  하는  자유로운  태도를  갖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과  복음으로  계시된다.2)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율법은  오직  복음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고,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법

은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  즉  우리가  만일  율법에  순종하고  그것을  지키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율법의  가치는  율법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율법은  시민적  또는  정치적  용도(usus  civilis  seu  politicus)

면에서  볼  때는  필수불가결  하지만,  구원과  관련해서는  상대적인(제한적인)  유효성

을  갖는다.  율법은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바로  여

기에  율법이  주는  축복이  있다.  복음과  관련해서는  영적인  용법(usus  spiritualis)이 

중요하다.  이에  따르면  율법은  사람을  죄인으로  폭로하고,  독선과  자기신뢰를  깨뜨

려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준비하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복음의  첫  번째  과

제는  율법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자로  해석하고  그런  의미로  적용하는  것이다.  복음

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의  두  번째이자  결정적

인  과제는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띤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

님  사랑의  계시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체,  즉  우리

를  구속하고  화해하는  분으로  밝혀준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복음은  우리를  하

나님의  자녀로  선언한다.  율법은  하나님을  진노의  재판장으로,  복음은  하나님을  자

비로우신  아버지로  계시한다.  “복음은  문자의미  그대로  율법과  정  반대의  역할을 

한다.  율법이  요구할  때  복음은  준다.”3)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이  간단한  묘

2) 이에 대해서는 Ph. Watson, Um Gottes Gottheit, Berlin 1952, 171 이하 참조.

3) Ibid.,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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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루터가  이해하는  하나님  말씀의  변증법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루터가  서술하

듯이  모든  “복음적인  설교”의  과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율법

과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와  믿음으

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율법과  복음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말씀이  얼마나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이미  인식할  수  있다.  말씀의  창조적인  힘은  세상을  만든  것에서  보였

을  뿐만  아니라,  말씀이  말한  내용과  전달된  목적을  실제로  성취하고  이루어  낸다

는  것은  말씀의  본질에  속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가르침과  전

달일  뿐만  아니라,  말씀은  말해지면서  의도하는  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고  포함하기  때문에  이러한  창조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계시와  창조의  이러한  내적인  관계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의  비밀이

다.”4)라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  말씀,  그리고  성서와 

교회의  설교가  존재하는  관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예수  그리

스도의  아버지로서  계시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대로  말씀이  역사하

도록  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단호하고  저항할  수  없

는  힘에  대해  강조하여  언급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성취하고,  그것의  작용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중요한  관계를  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는  과제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말하고  나누어주고,  인류의  화해와  구속을  알릴뿐만  아니라  성취시킨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외적이며  성서에서  읽을  수  있고  교회의  설교에서  들을  수  있는  말씀

을  듣고  순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외에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나라들과  달리,  사실  오직  들음과  순종에  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말씀이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말씀과  성령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령은  호흡과  음

성처럼  분리될  수  없다  ...  말씀은  영적이다.”5) 루터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것이  역

사적인  의미를  가지며  역사  안에서  드러날  때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열광주의자들이  원하듯이  성령을  직접  받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인간  육신  속에 

감추어져  있듯이,  성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을  사용하여  그  속에  자신을  감추고 

4) E. Seeberg, Luthers Theologie in ihren Grundzügen, Stuttgart 21950, 136.

5) H. Bornkamm, Das Wort Gottes bei Luther, in: Schriftenreihe der Luthergesellschaft

Nr. 7. München 193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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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낸다.  말씀은  결코  성령과  동일하지  않으며  성령을  위한  빈  껍질도  아니다.  성

령은  역사하기  위해서  도구,  중개자,  그리고  전달자가  필요한데,  성서와  교회의  설

교라는,  외적이고  혼동되기  쉽고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성령이  말씀과  함께  할  때에만  말씀은  바로  역사하고,  반대로  말씀이  구원을  일으

킨  곳에는  이런  역사를  일으키게  한  성령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성령의  역할

로서의  말씀의  작용은  오직  회중에서만  가능하다.  즉  성령이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말씀  안에서  역사할  때,  교회는  세워지고  존립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머니로서  모

든  그리스도인을  말씀으로  먹이고  지탱하고  견고하게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생각에  따라  말씀은  또한  성례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때,  이것이  (성례)

요소들을  성례로  만들게  하는  말씀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이  그  자

체의  본질적인  영향을  행사했을  때,  즉  말씀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해지고,  나에게 

선물과  약속,  그리고  그리스도왕국에  대한  소식을  실제로  중개하고  전해  줄때에야 

비로소  말씀은  이러한  성례적인  특징을  갖는다.  말씀과  성례는  형태에서  서로  구별

되지만,  그것을  통해  동일한  선물,  즉  그리스도가  전해진다.  그러나  성례전에서  말

씀의  능력이  특히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례전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유효하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선사할  때  비로소  성례전의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말씀도  다음과  같을  때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말씀이  개

인적으로  내게  말하고  나를  온통  차지하며,  그것이  말하는  선물,  즉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보존하시는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실

제로  줄때이다.  세례,  성만찬  그리고  회개라는  성례는  객관적으로  효력이  있지만, 

그것이  “나를  위해(pro  me)”  행해질  때만이  그  참된  의미를  실현하는  것처럼,  하나

님의  말씀  또한  “나를  위해”  있을  때  비로소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비록  말씀

과  성령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은혜가운데  그  자신의  말씀에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

는  방식으로라도,  말씀의  주인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보존만  한다면,  말씀의  성

례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즉  말씀이  자신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은,  말씀이  듣는  자

에게  말하고  듣는  자를  붙잡을  때,  말씀이  청중의  실존에  말을  건네고  그에게  구원

의  실재를  중개할  때,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듣는  자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고  하나님께  매이게  할  때이다.  우리가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말씀을  통해,  즉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가  그것에  순종함을  통해서이

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미  루터에게서  말씀이  갖는  연관성,  즉  말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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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말씀과  성령처럼,  말씀과  신앙도  서로  지속적인  관련성

을  갖고  있음을  루터는  자주  언급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고  읽혀지고  강해되

고  설교되는  이유는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말씀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고  영생으로  이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일깨운다.  오로지  말씀만이  믿음을  생기게  하고,  우리를  믿음으로  “유인하

고”,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산  믿음으로  유지케  한다.  또한  믿음만이  말씀을  하나

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promissio  Dei)으로,  죽음과  사망,  그리고  사단을  이

미  정복했고  지금도  승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깨닫게  한다.  이런 

점에서  말씀과  신앙은  서로  끊임없고  분리될  수  없는  상호관계에  있다.  말씀은  믿

어질  때에만  비로소  말씀이  된다.  믿음이란  말씀을  믿고  그것에  매달리고  신뢰할 

때에만이  비로소  믿음이  된다.  믿음이  말씀을  통해  시작되고  말씀이  믿음을  낳고 

자라게  하고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은,  다시금  오직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말씀

이  시대를  초월하고  과거를  현재화시키며  과거  그곳에서의  사건을  현재  여기에서의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역시  성령이  일으키는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역사에  개입하셨는데,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사도들의  설교에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영원한  것으로  현재  여기에서도  유효한  구원의  역사라

는  사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는  오늘도  여전히  해

당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고  믿음

으로만  소유할  수  있는  말씀의  창조적  능력에  속한다.  왜냐하면  말씀에  대한  믿음

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건에  참여케  하기  때문인데,  이  동시성이  구원을  나타내

고  일으킨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  시작과  목표는  하나님께는  동시적인  일이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미  그  약속의  성취를  소유하게  된다.”6)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  말씀은  또  다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말씀의  종말론적인  특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루터가  깊이  확신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삶과  고난,  그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적대자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

에  대한  복음서  말씀만이  이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터도  예수님

의  역사를  우주적-종말적인  차원의  구원역사로  본다.  예수님께  대항하는  사단의  투

쟁이  아직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사단은 

근본적으로  정복되었다.  루터는  많은  언급에서  자세히  다루기를,  사단과의  이  싸움

6) Ibid.,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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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말씀이  어떤  형태로든  선포될  때에  바로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설교

된  하나님”이라면,  설교를  통해  선포된  그리스도는  사단과의  싸움을  위한  영원한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은  말씀이  어떤  사실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나  구속력  없는  정보  이상의  것일  뿐만  아니라,  말씀은  나에게  건네는  말 

이상이며  내게  개인적으로  적용되고  나를  일깨우고  부르고  깨우치고  거룩하게  만드

는  요구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는  사단이  싸움에  패배해  도주하고,  대신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미  가까이  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루터  신학의  논쟁적인  성격이  드러난

다.  즉  말씀과  그  선포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대적자와의  강력한  종말

론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설교자와  신학자에게  중립이란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와 

신학자는  말씀과  성서를  통해  자신  스스로를  이런  투쟁에  개입해야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는  항상  죄와  죽음과  사망과  그리스

도의  승리의  전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진실된  말씀과  말씀선포의  정당

성은  다음  사실에서  증명된다.  즉  말씀은  선포되는  곳에서  항상  혼란과  다툼,  고난

과  박해를  야기한다.

      루터의  하나님  말씀론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위에서  서술된  말씀의  다양한  관

계와  성격들이  사실상  완전한  통일체(이  통일성은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개별적인  관계들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런  다양한  관점들을 

관련시키는  하나의  요점,  즉  루터의  하나님  말씀론의  중심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에서  자신을  “은폐하면서  계시하며,”  말씀의  기초이고 

내용이며,  말씀을  소유하고  완성시키는  분이다.  말씀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실제

로,  말하자면  성례적인  의미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만  말씀은  실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생각에  대해  두  번째로  중요한  질문이  생기는데,  루터에게 

말씀은  성경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서로  구분되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개의  논제가  세워질  수  있다.  즉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

의  말씀과  성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성서에  있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

르게  표현한다면  성서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성서의  외적인  말씀이  성령

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이  될  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런  이해로부터  루터에게는  성서에  대한  모순되어  보이는 

견해가  또  엿보인다.  “그리스도를  전하는”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루터는 

성서에  대해  그  시대에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대담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자유로이 

가질  수  있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을  증명하고  현실화시키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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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으로서  무엇인가를  통하지  않고  직접,  그리고  임의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외

적인  말씀과  매여  있기  때문에,  루터는  성서의  문자와  표현에,  성서의  언어에,  그리

고  평생  성서와  생생한  관계를  갖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에벨링(Gerhard  Ebelin

g)7)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에서  육화되고  말씀이  되고  영감이  된다고  옳게  말하

고  있다.  루터의  하나님  말씀론은  사실  그의  기독론,  계시론,  그리고  성령론의  맥락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교리들과  하나님  말씀론과의  관계를  유비의 

의미로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성서의  외

적인  말씀은  바로  그런  교리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b)  루터의  설교관

      하나님의  말씀(성례전  역시  마찬가지로)은  적용되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선포될  때만이  말씀의  가치가  생긴다.  이런  근거에서  루터의 

하나님  말씀론에  해당되는  진술들은  또한  그의  설교관에도  근본적으로  적용된다. 

루터는  설교를  공동체의  예배에서  행해지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  정확히  말한다면 

공적인  예배에서  교회력  성구를  강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즉  학생들  앞에서의  강의,  교회에서의  강해,  청

소년들의  수업,  설교와  논문의  저술에서,  또는  설교되는  곳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설교로  이해한다.  이것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루터  자신의 

설교행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

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전념하는  것이  말씀의  근본적인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룰  때,  회개와  믿음으로  부르며  교회로  이끄는  설교가  될  수  있다.  루터

가  이런  방식으로  학문적인  주석과  실천적인  말씀전달을  근본적으로  구별한다면, 

이것  또한  그가  하나님  말씀론으로부터  얻은  새로운  이해의  산물인  것이다.

      설교는  루터에  따르면  항상  (다양한  형태로)  성서에  담겨진  외적인  말씀에  대한 

강해(그리고  적용)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루터가 

따랐던  해석학적  원리에  대한  것이다.8)  루터는  성서강해에서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사중적  성서의미를  따랐다.  문자적,  역사적인  이해는  본래의  역사적인  의미를  찾으

려는  것이다;  도덕적  해석은  말씀을  독자  혹은  청중의  개인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

7) G. Ebeling, Evangelische Evangelienauslegung, München 1942, 349이하.

8)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G. Ebeling, Evangelische Evangelienausle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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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신비적  해석은  예언과  성취,  경고와  약속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고,  알레고리

적  해석은  (종종  매우  임의적이고  유연성  있게)  시간적인  간격을  없애면서  말씀을 

믿음의  교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중적  성서해석  방법이  성서의  다양한  의

도에  바르게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로  인해  성서의  통일성이  제거되며  특히 

성서의  중심적인  관심사,  즉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이  바르게  이해되는  것을 

막는  위험성이  있다.  에벨링에  따르면9) “루터는  이미  1517년에  사중적  성서의미

와  완전히  결별했고,” 1522년부터,  특히  1524  또는  1525년부터  근본적으로  성서

의  알레고리적  해석도  버렸다.  하지만  이  해석은  루터의  후기  문서들에서  여전히 

발견된다.  이것은  루터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전통에  의존하고  있

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루터가  사중적인  성서의미를  포기하고  알레고리적  해

석방법을  한정되게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이유에서이다.  즉  사중적인  성

서의미는  성서해석을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에  집중케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포기되어진  것이고,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서의  총주제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여기서  루터는  과도하게  해석학의  영향을  받는  것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성서

가  해석되어야  할  원칙은  성서  자체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중적  성서의미에서  보이는  철학적인  성서이해  대신에  기독론적  성서이해가,  율법

적  성서강해  대신에  복음적  성서강해가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올바르지 

않은  성서  해석  원칙들을  제거한  것은  종교개혁의  인식이  가져다  준  열매이다.  실

제로  “종교개혁은  해석학의  의의를  성서주석으로  발견한  것에  기초한다.  ...  하나님

은  자신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성서를  통해서  오직  믿음에게  전한다.”10)  외

적인  말씀의  이해를  위한  노력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본래  성서가  성서의  해석자

이고  번역자이다.  우리는  성령이  성서를  이해하도록  가르칠  때만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고,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와의  교제는  성서의  이해를  돕는  성령을  전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바로  설교,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서  일어나는데,  설교는 

거룩한  말씀(verbum  divinum)의  해석(explicatio)과  적용(applicatio)을  하나의  과

정으로  합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로서  찾아낼  수  있던  모든  것들

은,  설교를  통하여  생명과  실재를  얻는다.  성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나르고  전하며,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성서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계시의  말씀됨과  영의  감동을  계승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

9) Ibid., 49.

10) Ibid., 275.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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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의  실재는  설교에서  비로소  현실화된다.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

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에,  이  소식이  생생한  목소리(viva  vox)로  설

교될  때만  능력과  생명을  갖게  되고  그  본래의  의미가  실현된다.  루터는  그리스도

와  하나님의  말씀,  교회  청중  앞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고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말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서본문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서본문을  회중의  삶에  적용시키는  강해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루

터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은,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서  설교자를 

통해  청중에게  말씀하며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실

제로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에서  설교자가  입으로  전하는  말씀을  때때

로  하나님  말씀과  동일시하고,  설교자의  입을  실제로  그리스도의  입으로  간주하였

다.  “내가  듣는  설교자의  입과  말씀은  설교자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이고  설교

인바,  성령은  이러한  외적인  도구를  통하여  내적으로  믿음을  주고  거룩하게  만든

다”

(WA 45, 616, 32). 설교자는  하나님의  가면(larva  Dei)으로서  사도와  같은  지위

와  권위를  지닌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의  성례적인  성격을  보게 

된다)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  그리스도  자신이  존재하며,  그리스도  스스로  설교하며, 

하나님  스스로  그곳에서  지금  자신의  뜻과  약속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루터는  과거의  설교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높은  가치

를  설교에  부여하게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의미

에  대해  깨달은  것에  이미  근본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보충이  필

요하다.  루터는  성서의  말씀을  설교  되어진  말씀으로  이해한다.  성서가  담고  있는 

것,  즉  신약은  바로  설교인데,  이  설교는  오늘날에도  설교를  통해  계속이어  간다. 

말씀,  즉  성서에  담겨진  말씀은  입으로  선포될  때만이  살아있고  창조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된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된  소식으로  계속 

전달되어질  때에만,  그  의미를  충족시킨다.  오직  설교를  통해서  과거의  성서말씀은 

믿음을  생기게  하며  청중을  거룩한  공동체(communio  sanctorum)에로  참여케  하는 

현재의  말씀이  된다.  “설교자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의  육화이다.”11)

      루터는  이런  매우  대담한  사상을  어떻게  오용과  오해로부터  지켜냈는가?  근본적

으로  이에  대한  보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처

럼)  본성상  오용과  오해와  혼동에  늘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과  설

11) H. Bornkamm, op. cit.,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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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동일시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근거들은  존재한다.  루터는  우선적으로  성서의 

총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죄와  죽음과  사단에  대한  승리에  대

한  소식을  전하는  설교만이  현재에  유효하며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고  인간의  구

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총주제를  소홀히  하거나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설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효할  수  없다.  설교의  결정적인  표

지가  되는  것은  설교의  기독론적인  토대와  의도이다.  설교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율법과  복음을  앞에서  말한  의미로  선포하는  한,  그리스도는  몸소  함께  하고,  설교

자들의  말들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된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

가  실제로  설교에  적용된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말씀에  약속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외적인  말씀(그것이  성

서의  문자로  된  말씀이든  설교의  구술로  된  말씀이든간에)의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 

설교를  필요로  한다.  성령은  설교자의  입을  통해,  설교자의  말과  목소리를  통해  역

사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령의  도구이며  수단이다.  성령과  말씀의  창조적이며  구

원을  가져다주는  관계가  오늘날  청중  앞에서  설교에  충분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설

교가  부여된  사명을  다하고  약속된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은  설교를 

통해  당시의  사건을  현재에  유효한  구원의  사건으로  바꾼다(하나님의  계시에  전반

적으로  부합되는  삼위일체의  특징에  상응하게).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서만  실제

로  설교가  성립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령이  설교에서  역사  하는  것

을  완벽히  보증하지  못한다.

      루터에  따르면  설교의  첫  번째  목표는  믿음으로  유도하고  자극하고,  믿음을  갖

게  하고  굳건하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규정된  말씀과  믿음의  상호관계는  실제로 

설교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믿음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설교  말씀에서  중요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오직  믿음만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

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믿음이  실제로  힘을  갖고  있다면  설교가  필요치  않

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도달하고,  믿음이  성장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끊임없이  설교되어져야  한다.  설교를  듣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믿음

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  설교,  즉  (루터가  자주  매우  분명하게 

강조하기를)  입으로  전해진  설교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고 

청중의  믿음을  불붙이거나  새롭게  하는,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이

다.  물론  루터는  교회의  구성요소에  말씀  외에  성례전을  포함시킨다.  슈말칼드  신조

에  따르면  이것들  외에  사죄의  능력,  상호간의  대화(mutuum  colloquium),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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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위로  (consolatio  fratrum)가  복음의  네  번째  형태를  이룬다.12)  그러나  이

런  모든  표지들에서  (이것들이  적용의  형태에서는  서로  구별될지라도)  중요한  것은 

동일한  사실,  즉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인  것이다.  여기서  루터의  교회개념을 

다룰  수는  없다.  단지  여기서는  다루어진  설교의  역사와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하게  되어야  한다.  교회의  역사가운데에서  루터보다,  설교,  즉  모인  청

중  앞에서  입으로  전해진  설교가  교회의  기초가  되고  교회의  유일한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이해한  적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곳  세상에서 

유일한  사명,  즉  신앙인과  불신앙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과제를  이렇게  정하는  전제에  해당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설교자의 

입을  통해  말하며  설교를  통해  현존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총주제를  선포하는 

설교만이  교회의  기초를  쌓는  설교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말한바  있는  종말론적-우주적인  차원이  설교에도  특별히  적용된다.  놀라울 

정도로  자주  루터에게서  매우  대담스러운  표현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설교에

서  그리스도는  청중에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식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당시에  시작된  그리스도와  사탄과의  싸움이  지금  여기에서  계속  실행되어진다는  것

이다.13)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가  이미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였지만,  최후의  승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미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 

볼  때  설교의  핵심적인  사항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모든  설교는  그리스도가  적그

리스도와  벌이는  싸움에  사용되는  도구이며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선

포되는  곳에서는  항상  사단의  폭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싸움이  계속  이어진

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실제로  듣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싸움과  승리에 

생생하게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설교에  적용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이  올바른  방식으로  선포됨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도  싸움이  일어나야  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결단케  하고  분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은  소란 

없이  설교되어  질수  없다”

(WA TR 5, 577, 20 Nr. 6287). 설교를  통해  싸움과  박

해가  일어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복음적인  설교의  정당성을  증

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현세의”  싸움은  루터에  따르면  다시

12)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Göttingener Ausgabe

1930, 449, 6이하.

13)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비로소 최근에 주목된 관련성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고려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이 언급되어야 한다. WA 10II, 167, 20이하; 18, 626이하; 18,
635; 18, 710, 8이하; 18, 712; 18, 782, 12이하; 19, 159, 1이하; 19, 322, 19; 30II, 621, 14이
하; 36, 182, 16이하; 37, 318, 4이하; 40I, 537, 31이하. WA TR 4, 121, 20이하 Nr. 4081.
또한 다음을 참조. WA 4, 706, 29이하; 15, 451, 38이하; 27, 287, 6이하; 49, 175, 13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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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큰  종말론적인  투쟁의  한  부분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에서  행

해지는  설교는  사실  “그리스도의  전투”14)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그리스도는  설교자

의  약한  인간의  말을  통해  적대자에  대한  전투를  시작하고  이어나간다.  루터에  따

르면  그리스도는  설교를  통해  구원에  대해  가르치고  알려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실

제로  전달해  주며,  이를  통해  설교청중을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며  그리스

도의  나라로  옮겨놓기  때문에,  설교는  실제의  구원사건인  것이다.

      설교에  이러한  높은  가치가  부여된다면,  설교직이  루터에게서  아주  특별한  의미

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설교직의  수행을  위해  어떤  전제  조건들이  필

요한지,  설교행적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로부터  어떤  결론들을  끌어낼  수  있

는지에  대해  루터는  자주  언급했다.  루터는  목회자와  설교자들의  적은  교육배경과 

저속한  품행들에  대해  관례적인  불평을  털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설교에  대한  이

러한  이례적인  높은  평가로  말미암아,  루터에게  중요한  사항은  설교자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설교)업무를  준비하도록  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교황제도로부터 

나온  모든  사제들을  설교라는  새로운  업무에  익숙케  하고,  동시에  미래의  설교자 

세대에게는  이  업무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자격을  갖는다.  그러므

로  이에  대한  능력은  특별한  행위에  의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

구도  설교가  요구하는  많은  책임을  고려하면서  스스로  설교직을  떠맡아서는  안  되

고,  오직  설교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  설교직을  맡아야  한다.  이  소명은  무엇보다도 

바른  질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정식으로  부

름을  받은자(rite  vocatus)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설

교자의  소명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성취하시는  행위이다.  루터

는  미래의  설교자들에게  특별히  엄격한  요구를  한다.  가장  중요한  첫째  되는  요구

는  성서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성서와의  끊임없는  교제이다.  이를  위해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습득을  포함하는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루터가  설교직을 

위해  최고의  예비적인  자질로  보는  것은  과거에  학교선생으로  활동한  사람인데,  왜

냐하면  이  사람은  일해  왔던  식대로  복음을  단순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교

하는  능력을  가장  빨리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직을  준비하기  위해서  “정직

한  삶”이  성서연구만큼  필요하다.  루터는  설교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개념에  직면

하여  설교자들에게  많은  요구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루터는  설

14) V. Vajta, Die Theologie des Gottesdienstes bei Luther, Göttingen 1952, 141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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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을  왕  같은  직위라고  지치지  않고  찬양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은  설교직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설교직을  통해  가련한  영혼들과  타락한  무리들과  헤매는  백성

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위대한  약속이  설교직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

에  루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설교직이란  어렵고  위험한  직책이라는  사실

이다.  왜냐하면  비록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협력자이며  하나님의  천사이고  선한  의

지와  자신의  직책에  대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모든  신분들로부터  예외  없

이  하찮게  평가되고,  더구나  무시  받고  싸우고  박해를  받기  때문이다.  다시금  설교

자가  자신의  사명을  진지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은,  루터에  따르면  위

로하는  설교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박해를  받든  아니든,  시련을  겪든  아니든  간

에  상관없이  책망하는  설교를  하는  것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루터에  의하면  시련을 

통해서만  성서의  외적인  말씀이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련은  설교직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에  속해있다.  왜냐하

면  설교직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전달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설교자는  투사로서 

종말론적인  싸움에서  설교를  통해  사단에게  대항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을  벌여

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자주  경고하기를  복음의  설교자는  박해

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또

한  자신의  품행과  타인을  위한  기도를  통해  영향을  미친다.  루터는  방심하고  게으

르고  마지못해  하는  설교자들을  매우  엄격히  비판한다(관례적인  불평과  비판).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그들에게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도록  충고한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기본원칙은  비록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저속한  품행을  저질러도,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

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주관성은  다음과  같은  결정

적인  사실에  대하여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리에  대한  소식을  통해  인간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고  승리하기  위해서  항상  인간

의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복음을  순수하게  설교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너

무나  적다고  루터가  불평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루터의  예배  개념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와  예배의  관계를  서로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예배를  전통보다  근본적으로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음에서  모인  회중의  예배, 

미사를  다룰  때,  이러한  조건  또한  명심해야  한다.  루터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예배를  설교라고  축소해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루터는  알려진  바와  같이  몇

몇  조건하에서  주일예배와  평일예배의  구성을  위해  일련의  조언을  제시했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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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루터에게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이제부터  교회에서  설교  없

는  예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생각을  1523년과  1526년에  쓴 

예배개혁에  대한  글에서  강조하여  전개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예배로  모여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에  달려있

다  ...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번성하고  지금까지  행해진  것처럼  고함치고  시끄러

운  것이  되지  않도록  모든  것들이  진행되는데  있다.  말씀  이외에  모든  것은  중지되

고,  말씀보다  더  잘  추구되어야  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리스도인들  가운

데서  번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서는  가리쳐  주기  때문이다”(WA  12,37,26이하: 

“교회예배의  규칙에  대하여”).  예배의  순서는  개별적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라도, 

예배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부분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  있다.

      어떻게  루터는  이런  생각에  도달했는가? 

      여기서  우선  로마  가톨릭의  예배와  대조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

의  미사가  루터의  눈에는  임의로  선택된  예배,  율법행위,  인간의  행위,  우상과  사단

숭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미사의  순서나  의도는  성서의  기준을  통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예배가  다시  우상숭배나  인간의  행위로  잘못 

변질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설교가  예배의  중

심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예배의  본질적이고 

긍정적의  의미를  구성한다.  루터는  우선적으로  청소년들과  단순한  사람들을  가르치

고,  때때로  청소년들과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를  친숙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설

교가  필요하다고  자주  언급했다.  그러므로  예배와  설교에  대한  루터의  생각에  이러

한  교육적-교리문답적인  경향이  있음을  반박할  수는  없다.  베인톤(R.  Bainton)은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교회는  기도와  찬양의  집일뿐만  아니라  교실이기도  하

다”15)라고  하였다.  이  관찰은  옳게  보이지만,  우리는  루터가  설교의  본질로  간주한 

것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루터의  확신은  그리스도  스

스로가  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에게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

는  예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설교의  말씀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가  교회의  예배의  구조에서  설교에  그렇게  큰  비중을  부여

한  것은  예배를  인간의  행위와  혼동하는  것을  막거나  “가련하고  무지한  민중에게” 

바른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설교를  통해, 

그리고  말씀의  설교에서  현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

시고  우리와  행하실  때에만이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행동에  적절한 

15) Roland H. Bainton, Hier stehe ich. Das Leben Martin Luthers. Göttingen 1952,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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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을  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또한  직무와  이웃을  섬기는  일로  답할  수  있도록  하

기  위해서이다)  정당하게  예배로  불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설

교와  성만찬을  대립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례전처럼  설교와 

성만찬은  동일한  선물,  즉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

른  두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와  거기에서  죄인의  칭의에  대한  동일한  복음이  알

려지고  주어지는  것처럼,  미사예배의  두  부분,  설교와  성만찬에서  주님  자신은  함께 

하시며  믿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고  분배해  주신다.  또한  바이타(V.  Vajta)의  말처럼 

예배의  두  부분은  “기념(기억)”의  실현이란  점에서  내적으로  통일성을  이룬다고  간

주될  수  있고,16)  이로써  우리는  (미사예배가  지니는  기념적인  요소에서)  예배가  설

교  및  성만찬식과  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는  출발점을  만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의  기념이  예배의  진행가운데  실제로  생생하게  재현되는  한,  그리스도의  기념은  미

사예배의  두  부분에서  실제로  성취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설

교가  미사예배(로마  가톨릭의  예배의식은  아니다)를  해석한다고  때때로  말한다.17)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소식이  설교와  성만찬의  형태로  선포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푯말이  사단의  나라  앞으로  옮겨지기만  한다면,  예배의  규칙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

      설교를  예배에  편입시키는18)  개별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루터에게  적용

되는  예배의  두  가지  기본형태,  즉  기도시간들(horae  canonicae)과  미사예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루터에  따르면  모든  예배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교인들이  같이  모이

면,  하나님  말씀이  설교되어야  한다.  루터는  “미사의  규정(Formula  Missae)”이라는 

책에서  매일의  기도시간들을  위해  연속적인  낭독(lectio  continua)을  통해  성서를 

교리문답적으로  강해하는  것을  추천한다.  즉  아침기도를  위해서  역사서,  저녁기도를 

위해서는  구약의  선지서를  추천하고,  또는  아침기도를  위해서  구약,  저녁기도를  위

해서는  신약을  추천하였지만,  구속력  있는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1526년에  쓰인 

“독일  미사”는  상세한  제안을  담고  있다.  주일날에  드리는  세번의  예배(5시  또는  6

16) V. Vajta, op. cit., 152이하.

17) WA 6, 231, 16; 6, 526, 1.

18) 예배의 진행가운데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루터는 일정치 않았다. “미사의 규정”

에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관례였듯이 설교를 예배의 도입송(Introitus)앞에 위
치시켰다. 여기에서 설교는 “사막에서 외치는 소리(vox clamans in deserto)”의 사명, 즉
믿음을 갖으라고 호소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WA 12, 211, 8-9). 루터는 설교에 “여
기서 근본적으로 선교의 역할”이 있다고 여긴다 (P. Brunner, Der Gottesdienst an
Sonn- und Feiertagen, Untersuchungen zur Kirchenangende I, 1, Gütersloh 1949, 60).
그러나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사도신경(Credo)다음에도 설교는 가능하다; 루터는 이 위
치를 “독일 미사”서도 추천한다. WA 19, 9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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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아침기도;  8시  또는  9시의  예배;  오후의  저녁기도)를  위해서  루터는  서신서와 

복음서와  구약의  교회력  성구의  강해를  제안한다.  이때  루터에  따르면  전승된  교회

력  성구  규칙이나  연속낭독을  설교의  본문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  루터는  제안하

기를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교리문답서의  다섯  조항에  대해,  수요일에는  마태복음에 

대하여,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서신서에  대해서,  토요일  아침  또는  저녁에는  요한복

음에  대하여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비텐베르크에서의  실

제가  되었다.19)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번성하도록  낭독과  설교가  충분히  행해졌

다.” 

c)  설교자  루터의  활동

      루터는  슈타우피츠(Staupitz)의  강요에  마지못해  1511(또는  1512)년부터  수도원

에서  규칙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떠맡았다.  루터는  처음에는  수도원의  식당과  오래

되고  붕괴위험이  있는  기도실에서  설교했고,  그  후  시의회의  요청으로  병이  든  시

교구  목사  하인츠(Simon  Heinz)를  대신하여  비텐베르크의  교구  교회에서  설교했다. 

부겐하겐(Bugenhagen)이  목사직을  맡은  후에도  빈번히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

기  때문에,  루터는  그를  대신해서  매우  자주,  가끔은  몇  달,  몇  년  동안  설교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처음에  설교를  거부했던  저항은  내적인  필연성과  참된  욕구가  되

었다.  루터의  설교,  설교에  대한  준비  그리고  설교  행적은  종교개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비텐베르크에서  설교자로서의  활동과  관련해

서  나온  것이다.  루터는  평균적으로  매주  두  번  내지  세  번,  때로는  네  번  설교하였

다.  대부분  루터는  주일에는  복음을  강해하였다.  축제일에는  루터에게  더  많은  요구

가  있었다.  이  경우에  루터는  자주  하루에  여러  번  설교를  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에도  루터는  설교직을  수행하였는데,  비상시에는  자신의  집에서  설교하기도  했

다.

      30년  이상  지속된  설교자로서의  활동으로부터  우리는  2000편이상의  루터  설교

를  갖고  있다.20)  여기서  거의  예외  없이  중요한  것은  매우  신중하게  작성되고  “루

터가  실제  전한  말의  많은  부분”(G.  Ebeling)을  재현해  주고  있는  필사본들인데,  전

19) “종교개혁자들은 비텐베르크에서 설교를 통하여 종교적인 가르침에 대한 커다란 켐페인

을 벌였다”(R. H. Bainton, op. cit., 300). 여기에 루터 자신도 큰 참여를 하였다.

20)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G. Ebeling, op. cit., 14이하를 참조, 특히 “루터의 보존된 설

교들에 대한 개관(Üersicht über die erhaltenen Predigten Lu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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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  증언들에  따르면  루터는  분명  매우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한  시간  동안이나 

설교했다.  설교모음집(Postille.  혹은  성경강해집)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루터  이전에  있던  책들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설교자들을  위한  도움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가정에서  낭독을  위한  것이다.  루

터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은  단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서  씌여진  교회설교

모음집(Kirchenpostille)의  한  부분인데,  이것은  강림절과  성탄절과  현현절  절기를 

포함하고  1525년  사순절기간의  설교들을  담고  있다.  반면  “여름의  절기부분”은  다

른  사람의  손으로  수정되고  편집되었고,  1540년과  1544년에  새로  보충된  개정본이 

나왔다.  가정설교모음집(Hauspostille)은  루터가  1532년부터  1534년까지  자신의 

집에서  행한  설교의  필사본을  포함하고  있다.

      본문선택에서  월등하게  지배적인  것은  개별적인  교회력  성구와  본문,  즉  복음서 

본문에  대한  설교들이다;  이것은  루터가  무엇보다도  주일아침에는  흔히  복음서를 

설교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루터는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하긴  했지

만  복음서  구절을  선호하면서  전래된  교회력  성구의  체계를  고집했다.  루터는  단지 

작은  범위  안에서만  본문을  자유로이  선택했다.  루터는  교회력  성구의  반복을  교육

적인  차원에서  유익한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경우에는  루터는  연속(강해)설교를  했

다;  루터는  구약에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을,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5-7장, 

11-15장,  18-24장,  27-28장,  누가복음  15장  이하,  요한복음  1-4장,  6-8장, 

16-20장을  연속적으로  설교했다  (성경공부의  방식으로).  많은  수의  설교가  성경본

문  없이  행해졌는데,  이  설교들은  주로  교리문답(십계명,  세례  그리고  성만찬)이나 

결혼문제와  같은  시급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설교들(Sermones)”

과  종교개혁의  관심사를  광범위하게  전파한  경건서적들이  자주  나왔으며  따로  출판

되었다.

      형태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학적인  전통에  따르면,  루터는  처음  10년간  행한  설

교에서  기교적인  구조와  이에  맞는  목차를  정하는데  힘을  썼고,  주제설교에  우선을 

두었다.  1520년경부터  루터는  이러한  경향과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에벨링의 

관찰에  따르면  루터는  점차로  설교의  “서론부분”을  포기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루터는  직접  본문을  가지고  시작하고,  바로  이전의  설교

와  결부시키고,  청중으로  하여금  강해되는  교회력  성구에  친숙하도록  하고,  이  구절

들의  신학적인  의미를  숙고하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루터는  또한  때때로 

설교를  시작할  때,  처음에  성경구절의  내용이나  의도를  언급하거나  성구의  목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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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연관성에  관심을  갖게  한다.  교회력과의  관련이나  본문을  듣도록  경고하는  것들

이  설교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서  성경구절이나  설교의  목차에  대한 

언급은  매우  줄어든다.  여기에서  이미  루터의  설교방법의  특징이  보인다.  모든  전통

적인  규칙들에  반하여  루터는  가능한  한  빨리  본문을  다룬다.  왜냐하면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눈부신  수사학의  전개가  아니라,  모든  영예가  주어지는  것은  오직  성

경본문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설교의  목적,  즉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

해  자신의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루터의  설교들은  계속적으

로  거의  예외  없이  성서해설의  형태를  띤다.  루터는  비록  큰  자율성을  자주  보이지

만,  성서본문을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따라간다.  이런  방법은  연속설교뿐만  아니라 

주일  교회력  성구에  대한  설교에도  적용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때때로  자세히  언급

되는  목차도  있다.  그러면서  순수한  주제설교는  거의  줄어든다.  반면에  뒤따르는  강

해가  성서해설의  형태를  띤다고  할지라도,  주제들이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때때로 

두  가지  또는  더  많은  본문들이  한  설교에서  (당연히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수난역

사에  대한  설교에서)  다루어지거나  특정한  부록21)이  첨가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

해야  할  사실은  특히  교황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설교들에  담겨있는 

논쟁적인  묘사들이다;  이것들은  항상  존재하거나  새로  나타나는  교리와  삶에  대한 

오류들에  대해  교회에  가르칠  필요성  때문이며,  또한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상황  때문이다.  루터의  확신에  따르면  설교는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와  싸우

는  장소인데,  적그리스도는  그릇된  교사의  형태로  나타나며  적대자는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금  자신의  지배에  놓으려고  시도한다.  설교의  결론부분도 

서론처럼  단순하다.  가장  빈번히  볼  수  있는  방식은  다시  한  번  설교의  중심생각을 

정리하거나,  결론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설교를  실생활에  적용(applicatio)하면서  끝

내는  것이다.  반대로  전통적인  결론형태인  소원기도나  타인을  위한  기도를  요구하

는  것은  드물게  나타난다.  또한  루터는  설교를  갑자기,  경우에  따라  다음  설교에서 

계속  다룰  것을  알리면서  끝맺는다.  루터의  설교에는  또한  오늘날  우리가  광고라고 

부르는  것이  자주  포함된다;  설교에서  이  광고로  전환되는  부분을  항상  쉽게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항이  되는  것은  교인생활의  상세한  것

들,  교회규칙들,  그리고  교인들의  교육인데,  이러한  것들을  루터는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주  다루었다.

      설교에서  루터는  이미  초기에  알려진  설교수단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수사학적인  의도에서  선택된  것  같지는  않다.  루터는  성경과  친숙한  관계를  갖으며 

21) G. Ebeling, op. cit.,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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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고  교회의  삶에  매우  익숙하였기  때문에,  이런  수단들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대화체와  극화의  형태가  고려되어져야  한다.  성경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거나  설교자와  청중,  또는  설교자와  그  대적자사이의  가상적인  대화의  형태

로  나타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설교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단지  루터

가  깨달은  설교의  뜻과  일치한다.  루터의  설교가  보여주는  매우  생생한  방식은  의

심할  바  없이  다음과  같은  사실과  관련이  있다.  모든  설교는  예외  없이  싸움에  속

하는데,  이  싸움을  루터는  자신의  적대자  교황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과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  싸움은  말하자면  우주적-종말적인  고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설교에  현재성,  즉  현재를  위한  의미를  부여한다.  루터는  당연히  복음

선포(Kerygma)를  직접적으로  비텐베르크교회  교인들의  삶으로  옮기고  변형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그의  간단하고,  힘차고,  종종  거친  언어

가  한  몫을  한다.22)  성경의  케리그마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구체화하는데  모든  것이 

달려있다.  이  목적에  기여하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많은  속담23)과  관용구의  사용과,  청중에게  이해를  쉽게  하는  어원론적인  설명들이

다.  루터는  역사적인  일화들,  특히  전설들(“꾸며낸  얘기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반면에,  비유들과  예화들,  또한  자신의  삶에서  온  경험들을  자주  사용했다.  노래구

절과  인용구들(여기서  교회교부들  중  특히  어거스틴의  인용구)이  성경구절을  해석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교에서는  성경구절들이  셀  수  없을  정

도로  많이  인용되거나  시사되었다(이것은  루터의  “점점  증가되는  성경에  대한  의존

성”24)에  대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루터의  확신에  따르면  성경은  스스로의  해석자

라는  사실과  교회력  성구에  대한  모든  설교는  성서전체의  총주제를  반영해야  한다

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서  행한  설교는,  분명  비텐베르크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25)  이것도  케리그마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기여한다.  많은  설

교들은  공공연한  피해를  넌지시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언급하기도  한다. 

종종  루터는  설교를  통해  호되게  꾸짖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그의  영향력에도  불구

22) 비교. 히브리서 3장 1절: “극렬하고 격한 말들로 그리스도를 설교해서는 안 된다. 그리

스도는 오직 평화롭고 신중하게 설교될 수 있다 . .”  E. Vogelsang, Luthers
Hebräerbriefvorlesung von 1517/18, Lerlin-Leipzig 1930, 44.

23) “위대한 언어의 대가들은 단순한 수단들을 좋아한다. 루터의 단순한 수단에는 무엇보다

도 속담이 포함된다. 어떤 독일의 문필가도 그렇게 천재적으로 속담을 다룬 적이 없다.”  

K. A. Meissinger, Der katholische Luther, München 1952, 242. 루터에 의해 사용되었

거나 새로 만들어진 속담만 짐작컨대 무려 3000개 이상이 된다.

24) Ibid., 82.

25) 참조. H. Werdermann, Luthers Wittenberger Gemeinde, Gütersloh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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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얼마나  적은  변화가  (회중에게)  일어났는가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루터

가  설교가운데  특별히  언급하는  청중은  우선  가장(家長)들과  신학생들이다.  집과  가

정에서의  관계들,  시행정적,  정치적  관계,  그리고  고리대금과  사치,  걸인들의  불법, 

음주벽과  순결치  않음,  미신과  잘못된  교리에  대한  투쟁  등이  설교에서  자주  암시

되어진다.  또  얼마나  루터가  교인들과  동고동락  했는가를  엿보게  한다.  이  점에  루

터의  설교방식인  일종의  교육적인  특징이  보인다.  루터의  노력은  의심할  바  없이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해서이다.  즉  결코  본이  되는  교회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오류들과  연약함으로  가득찬  작은  도시의  교회처럼  보이는  비텐베르크  교회의 

교인들을,  믿음과  삶  측면에서  교황의  노예로부터  복음의  자유로의  큰  변화를  의식

하는  교인들로  양육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지는  의심스러울  수 

있다;  루터의  많은  씁쓸한  비난이  이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키려는  모든  교육적인  노력은  성서본문을  주석하고자한  노력의 

(실제로  바람직하고  필연적인)  열매로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의  본문을 

현재에도  역사하고  요구하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게  하는  것만이  중요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설교방식의  특성을  묘사할  때  단지  “교육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은  결코  충분치  않다.  오히려  설교를  바르게  보는  것은  설교에  대해서  성서본문

해석과  청중에의  적용에  해당되는  “주목할  만한  대립”26)에  관해  말할  때이다.  여기

서  대립이란  바로  성서의  본문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청중들에게 

불가피하게  말을  걸어야  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루터의 

설교방식인  대립은  그리스도와  적대자  사이의  종말론적인  싸움이  루터의  설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

이  되게  하고  이것을  통해  사단의  힘에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저항을  대립시키는  설

교의  이런  목적들  앞에서,  다른  모든  의도들,  심지어  방법에  대한  문제들은  (이것들

은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차적인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루터  설교의  특징으로서  자주  칭찬받는  대중성과  명료함,  그리고  루터설교에서  실

제로  볼  수  있고  종종  비난받기도  하는  “압도하는  정돈되지  않음”  등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설교의  목적을  위해서는  종종  앞에서  언급한바있는  루터의  설교행위의 

재능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성서에  대한  애착,  모든  방법에  대한  단념,  그리고 

고차원적이고  화려한  사고의  단계뿐만  아니라  설교를  부적절한  소재나  영역으로  확

대시키는  것을  포기하는  그런  “단순한  설교자”의  방식,  이것들이  격정적이지  않은 

26) F. Gogarten, Martin Luther. Predigten, Jena 1927,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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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본문과  교회에  대한  루터의  주권적이며  겸손한  애착

을  드러나게  한다.  루터의  설교가  갖는  이러한  구체성의  깊은  근거는  다음의  사실

에  있다:  “루터의  설교는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사단,  하나님의  천사들,  그리고  그

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실제로  고려하고  있다.”27)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에는  설

교되어서는  안  된다  (Nihil  nisi  Christus  praedicandus.  WA  16,113,7-8)”는  명제

는  해석학적인  원칙이거나  케리그마에  집중하는  설교학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 

되는  명령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은  설교를  통하여  현존하고  세상에서  활동

할  여지를  얻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교가  그때  그곳에서  시작된  구원의  사건을  지

금  이곳에서  계속  일어나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루터는  스스로  자신의  설교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

으로부터  설교자가  설교단을  오를  때  갖는  떨림과  두려움,  설교가  끝난  후  느끼는 

전반적인  불만족스러움을  알고  있다.  그가  설교  준비  없이  설교를  강요받게  되는 

악몽  또한  그에게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의  부담  때문에  루터는  실

질적인  초안을  한  번도  작성할  수가  없었고,  기껏해야  몇몇  핵심단어들을  종이에 

적는  일이  전부였다.  루터는  소위  탁상담화에서  자신의  설교준비  방법과  설교의  두

려움과  어려움에  대해,  때때로  그가  집례  하는  예배에  이따금  얼마나  적은  수가  참

여했는지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루터는  설교학에  관련해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탁상담화에서  그것에  대한  언급들이  충분히  발견된다.  이

것들  모두는  설교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들을  통해  교회에  말씀하시고  바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는  기본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이런  인식을  깨닫는다면  설교에서의  단순함과  간결함,  그리고  설교자의 

믿음직스러운  행동을  위한  루터의  다른  제안들은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위탁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가라,  즉  오직  설교하라.  그것을  누가 

듣게  될  것인지는  염려치마라.  그것은  내게  맡겨라.  세상은  너희들에게  거역할  것이

다.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라.  분명  너희들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너희들

은  설교하라  그리고  나에게  맡겨라”

(WA 10I2, 51, 3이하).

27) G. Ebeling, op. cit.,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