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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33

III.  설교학(Preaching)

    일반적으로  말해서  “설교”(Sermon),  "설교하는  것“(Preaching),  "설교

학”(Homiletics)은  서로  구분된다.  “설교”는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담화’나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적인  의미에서  교

회의  예배의  중심이  되는  형식을  갖춘  연설(formal  address)로  이해되

고  있다.  이때  Sermon은  설교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때  쓰여지는  말이

다.  그리고  “설교하는  것”이라고  할  때는  설교를  하는  행위를  두고  쓰

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차라리  말씀의  선포,  즉  복음의  내용을  선

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케리그마)에 

대한  힘있는  증거를  가르친다.  그리고  “설교학”이라  할  때는  실천신학

의  한  과목으로서  신학적  연구  과목이다.  즉  그것은  기독교의  예배를 

목적하여  모인  정규  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선포하고  교훈

하는  근본원리와  신학적  정의를  세우고  가르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1)   

    그러나  설교학을  영어로  굳이  Preaching이라고  쓴  것은  학문적인  접

근--설교학의  어원,  분류와  내용,  여러  학자들의  설교신학  비교정리  등

--을  시도하기  보다  실제적인  설교에  관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서이다.

1. 설교의 중요성과 설교의 요소들

1)  설교의  중요성

    설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복음  전달의  방법이다.  구약에서는  하나

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셨으며,  우리

는  지금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이  계

속해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셨듯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  선포를  부탁하였듯이,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가운데서 

다시  적절하게  전달해야만  한다.  바로  믿음은  들음을  통하여  오고,  들

음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역할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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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설교학

    최근의  조사에서,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영적인  능력

(25.3%),  역사의식(14.2%)  보다  말씀강해(33.4%)가  더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고,  목회의  우선  순위도  영성훈련(26.3%)보다  설교(32.4%)가  우

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2)  또  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교회를  나

오게  되는  동기중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설교말씀이라고  한다.  곧  설교

의  성패는  교회성장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성

직자와  평신도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설교가  교회

성장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란  설문에서  목회자  253명중  140명

(55.3%)이  절대적이라고  응답했고,  절대적은  아니나  중요하다가  111명

(43.9%)으로  거의  99%의  비율이고,  평신도는  293명중에서  192명

(65.5%)이  절대적이다라고  응답했고,  절대적은  아니나  중요하다가  96명

(32.8%)으로  98%가  넘게  나왔다.3)  이것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목사들이  행정적인  일,  지역사회봉사,  각종  회의, 

잡다한  방문들로  하여금  설교에  우선적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

지  못하고  있다.  분주할수록  목사는  연구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인격과  신앙과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야  한다.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훌륭한  피아니

스트가  되기  위해  피나는  훈련과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설교자는  이보다  더  혹독한  훈련과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강조한다면  설교자의  독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독

서를  많이  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상  모든  위대한  설교자는  하나같이  독서와  연구에  정열을  가진  사람들

이었으며,  이것은  오늘과  같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서  영적  감화력을 

주는  바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2)  설교의  요소

    설교는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네  가지  차원

이  있다고  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사역,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를  하는  복음적  차원(kerygma),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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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35

신하도록  이끌며,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회적  차원

(paraclesis),  기독교의  가르침을  분명히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리적  차원(homilia),  교육적인  설교로  도덕적으로  변화된  행동을  하

게  하는  도덕적  차원(didache)이  있다.  또한  본문설교,  제목설교,  강해

설교,  주석설교  등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설교

가  되었든  설교에  필요한  기본요소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성서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형성의  기본이  되는  성서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첫  번째  중요한 

과제이다.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  증언,  메시지  등을  역사적  방법에  의

해서  그  배경과  근거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오

늘  우리의  상황만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글자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큰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19세기까지  미국에서  노예제도

를  인정한  것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했다

는  것을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  이야기를  근거로  주장하였던  것

이다.  이것은  성서를  보는  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  것이다.  오늘날 

설교의  많은  문제가  성서  본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옴을  볼  때,  성

서신학의  튼튼한  기반이  신학교에서  바로  세워져야  한다.

(2)  청중에  대한  이해

    설교는  그것을  듣는  청중들의  경험과  그들의  입장을  바로  이해할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므

로  청중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청중의  관심과  고민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지식은  목회자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나온다.  목회자는  가족  심방을  통해  가족간의  상호작용과  그  가정의 

전체적인  환경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연령  분포에  대한  지식을  통

하여  설교자는  각  발달  단계에  따른  욕구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

으로  신체적,  사회적,  그리고  감정적인  욕구들은  연령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청중들의  교육적,  문화적인  배경을  알면  사용할  언어와  예화, 

논리를  선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청중들의  가족  상황은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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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설교학

교에  있어서  근본적인  정보이다.  회중들  가운데  기혼자,  미혼자,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설교들이  어머니

들이  집에서  살림을  하는  전통적인  가족  유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요즈음은  교회에서도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나  독신자,  이혼자들의  숫자

가  늘고  있는  형편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예수의  시대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활고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돈이  너

무  많아서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사람들과는  다른  문제들을  안고  살아

가고  있다.  돈이  너무  없는  것이나,  돈이  너무  많은  것은  모두  도덕적, 

영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청중들의  평균  수입이나  지역사

회의  경제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다.  청중들의  생계  유지수단에  대

하여는  얼마나  알고있는가?  설교자는  부자,  전문직업인,  지도자들과는 

친숙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의  직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직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하며  그들의  삶에  대한  관점에  심각

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가장  큰  도덕적인  유혹  중  일부는  직장에서  발생한다.  민감한  목

회자라면  직장의  작업환경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회중들의  종교사  또한  중요하다.  예수는  그릇된  종교적인  정보를  다

루셔야만  했고,  현대의  설교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세상에는  건전한 

종교와  건전하지  않은  종교들이  있다.  불건전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고치기가  더  어렵다.  예를  들면,  예수에게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밖에도  교회  밖의  공공모임에도  참여함으로  불신자들과  접촉하는 

것도  중요하다.  감옥이나  병원,  그리고  이와  유사한  기관에서  자원  봉

사를  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므로  그들에게  복음

을  전할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설교에도  큰  도움을  얻게  된다.  이

러한  직접적인  만남  이외에도,  독서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흐

름과  사람들의  관심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설교자의 

기본  요건이다.

(3)  해석에  대한  이해(본문과  오늘의  상황연결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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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37

    성서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를  해석하여  적

용하는  것으로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  작업이  없이  성서만 

강해한다든지,  아니면  오늘  시대만  분석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설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해석을  위한  훈련으로는  1부에서  언급한  방법

론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성서를  현대에  맞게  해석하

느냐  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본문과  상황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설교를  한  예로  언급하자

면,  그것은  항상  귀납적이었다.  즉  그는  청중들에게  정해진  진리를  받

아들이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사고과정  속으로  넣으려고 

노력하셨다.  대부분의  서구  설교는  헬라의  설득적  방법에서  유래되었

고  성격상  연역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전제나  진리를  진술하고, 

그  다음에  진리를  증명하거나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일상생

활의  친근한  경험으로  시작하여,  청중들이  그  경험을  스스로  분석하도

록  하고,  그  다음에  행동의  대안들을  제시하고,  선택의  결과들을  묘사

하거나  암시한다.  이때  그는  청중들이  쉽게  자기  자신들을  동일시  할 

수  있는  인물들과  구성으로  이야기들을  이용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다

시  설교에서  재발견되어지고  있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2. 오늘날 바람직한 설교의 형태들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청중의  변화는  청중이  설교를  통하여  선포

되고  있는  본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이다.  정보를  많이  제공

받거나  논리적으로  설득  당했을  때  보다,  자신이  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청중은  변화의  강한  동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설교  후, 

청중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진지하게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주로  어떤  경우에  그렇게  하는지를  살펴보라.  논리가  뛰

어난  설교에  대하여  그들은  대개  “설교가  산뜻하다”고  말하지  “은혜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설교에  정보와  지식이  넘쳐날  때  그들은  대

개  “설교가  깊이가  있다”라고  말하지  “은혜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표현이  정당한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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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설교학

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행

동으로  변화의  반응을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은혜  받았다”고  말할 

때라는  것이다.

    그  동안의  설교  형식이나  스타일은  마치  대학교수의  강의처럼  분석

적,  논리적,  지성적  측면에  집중하여  왼쪽  뇌를  주요  상대로  설교를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TV와  함께  자라난  오늘의  세대에서는  설

교가  그들의  삶과  연관성이  없고  흥미롭지  못하면  지루함을  쉬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정서,  감정,  상상,  직관,  통찰력을  중요시

하는  설교  스타일을  개발하여  오른쪽  뇌에도  설교를  행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오늘날  바람직한  설교의  형태에  대하여  계지영 

목사의  “뉴미디어와  미래의  설교”의  도움을  받아  제시해  보고자  한다.4)

1)  성서적인  설교

    멀티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향한  설교는  무엇보다  성서적

이어야  한다.  회중은  감각적  필요만을  충족하려고  하지만  설교자는  그

들의  영혼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까지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메시지는  본문에  의거한  성서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성서말

씀에서  나오는  깊은  생수만이  즐거움을  받으려고  하는  회중의  진정한 

필요와  목마름을  영원히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충분히  연

구하기도  전에  “이  본문이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적용의  문

제에  관심을  보인다면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본문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정확히  들어야  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2)  이야기와  상상력,  은유가  풍부한  설교5)

    최근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왼쪽  두뇌는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를  추구하는  기능을  행하며  수학자나  물리학자,  변호사와  엔지니어

들은  대개  왼쪽  두뇌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오른쪽  두뇌는  상상력, 

통찰력,  묵상하는  기능을  행하는데  예술가,  문학가,  미술가,  시인  및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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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39

우들은  오른쪽  두뇌가  발달되었다고  한다.  오른쪽  두뇌와  왼쪽  두뇌를 

잘  활용하고  발달시키며  그  기능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전인적인  인

간이  된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래의  세대에게  전할  설교는  추상

적인  신학개념,  대지와  명제도  분명해야  하지만  이야기와  상상력,  또 

은유가  풍부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6)

    그  동안  이야기(story)는  설교의  대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하

여,  아니면  설교를  흥미롭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만  여겨져  왔

다.  설교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해  온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바뀌어져야  한다.  최근의  설교학자들은  스

토리를  설교의  명제  및  대지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아야만  한다고  말

한다.  프레드  크레독  교수는  예화나  스토리는  설교의  대지를  설명하거

나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  자체가  설교의  대지라고  말하고  있다.   

스토리는  설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설교의  목적이  회중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회중은  설교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나  주제나  명제가  아무리 

올바르고  최선의  것이라  해도  마음으로는  인정하나  그들의  삶은  변화

되지  않는다.  즉  설교를  듣는  회중은  이론적인  지식이나  설명만으로 

삶이  변화되지  않고,  스토리가  그들의  심층을  건드렸을  때  새로운  세계

를  보게  되며  시야가  열리므로  삶이  변화되고  행동하는  동기가  유발되

는  것이다.7)  이것은  오늘날  소위  포스트모던,  즉  이성과  합리성을  위주

로  하던  모던을  뛰어넘는  방식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격의  구

성요소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을  타취함으로써  인

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생한  이미지들은  추상적이고  형체  없는  종교적인  명제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복잡한  삶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지탱시켜  준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연회,  방,  음악,  춤,  나팔,  식탁의  빵부스러기,  빚,  잃

어버린  양,  낙타와  바늘구멍,  품삯과  노동,  배고픔과  헐벗음  등의  이야

기  혹은  비유를  통한  설교는  당시  청중들의  경험을  자극하는  친숙한 

감각적  이미지들이었다.  이런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사용할  때  청중들

은  변화되었던  것이다.8)  오늘날  설교는  설교자나  회중  모두가  아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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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설교학

도  기대하지  않는  일상적이고  지루한  것이  많다.  그들은  무엇이  이야

기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적절한  메시지를  들으려고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설교  시간에  단순히 

참여하는  것만으로  축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어찌  보면  세속적인  듯이 

보이는  예수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간  것은  듣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생한  이

야기가  오늘  현대인을  위한  설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9)

    그래서  최근의  설교학계의  경향은  지금까지의  합리적이고  석의적인 

형태의  강해설교로부터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스토리가  풍부한  설교양

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즉  최근의  설교학계의  경향은  설교에서의  상상

력(Imagination)과  이미지의  역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미국에서  나오고  있는  설교학  책들의  이

름만을  열거해  보아도  이런  흐름을  뚜렷이  알  수  있는데,  「상상력을  동

반한  설교와  가르침」(Preaching  &  Teaching  with  Imagination)10),  「

이야기를  설교하기」(Telling  the  Story:  Variety  and  Imagination  in 

Preaching)11),  「이야기식  설교」(Storytelling:  Imagination  and  Fait

h)12),  「마음의  상상력:  설교의  새로운  이해」(Imagination  of  th  Heart: 

New  Understanding  in  Preaching)13)  등의  책들이  대표적이다.

3)  교육적인  설교

    과거에는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순서로  가정, 

교회,  학교,  미디어(구미적  상황을  볼  때)를  들었다.  그러나  20세기  후

반에는  미디어,  가정,  학교,  그리고  교회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에서  예

배드리는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관  역시  세속적인  매스미디어  특히  TV

에  의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관

은  내가  어떤  스토리를  나의  스토리로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된다.14)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으로  하여금  복음의  스토리를  그들의  스토리로 

소유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며,  설교자는  교육적인  설교를  통해 

회중에게  도덕적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현대인들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에게  교육적인  설교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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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41

청중과의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면서  교육적인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는 

더욱  더  효과적인  전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적인  설교란  원리만을  제시하는  이론적인  설교를  의미하지  않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설교이다.   

청중은  말씀이  그들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활화될  수  있는가

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복음의  진리를  증명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복음을  삶에  적용하며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어야  한다.  청중은  “예수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기

를  원한다.15)  돈  브라우닝은,  위의  방법론에서  보여주듯,  이것(윤리적 

가르침)이야말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4)  대화체  설교

    회중을  책망하고  꾸짖고  대결하는  형태의  설교는  현대인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전통적인  설교  스타일은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치게  제스

처가  많은  웅변조의  설교였지만,  오늘날  어필할  수  있는  설교는  설교자

가  마치  청중의  옆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말하듯  대화하는  설교이다.   

이것은  일반  교육에서도  ‘눈높이’를  강조하며  같은  수준에서  대화할  수 

있는  교육이  바람직하다는  열린  교육과  맥을  같이  한다.  가식이  있어 

보이는  웅변조의  설교보다는  대화체의  설교가  더욱  설득력을  얻어  가

는  현실이다.

5)  희망을  심어주는  긍정적인  설교

    현대인들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며  그들

의  자긍심도  많은  상처를  받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

버리고  실망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소망이  깃든  복음의  메시지를  목말

라  한다.  이들에게  설교자는  죄의식을  불어넣기보다는  복음  안에서  자

유롭고  충만한  삶의  비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간음의  죄를  정죄하기  보다는  결혼  생활에서  부부가  신실하고  성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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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설교학

게  살아갈  때  얻는  기쁨과  만족,  행복을  말해주는  긍정적인  설교가  바

람직하다.  죄인이라고  책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맛보며  그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은혜  안

에  살아가는  삶의  감격을  말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더그  머란  목

사는  “회중에게  무엇을  왜  행하지  않냐고  책망하지  말라.  오히려  자기

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그들은  행

동하게  되고  그들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라고  말했다.16)  이것은  인간

에  대해  지나친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오늘  시대의  흐

름에서  중요한  방법이  되고  있다.

6)  설교자의  체험에서  나오는  설교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설교자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을  억제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의  설교학에서는  죤  클레이풀(John  Claypool)  목사처

럼  ‘고백적  설교’(confessional  preaching)가  장려되고  있다.  쉘러(L.  E. 

Schaller)에  따르면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않는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  내용에는  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으나,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고(깨닫고)  그  체험을  확신과 

설득력을  가지고  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에는  설교의  내용이  중요

했지만,  앞으로의  설교에서는  내용만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성품,  그

들의  진실된  복음의  체험(깨달음)이  중요시되고  있다.  청중은  설교자가 

전달하는  말씀대로  설교자  자신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궁금해하

고  알기를  원한다.  청중과  동떨어진  거룩한  사람이  아니고  그도  청중

처럼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씨름하고  의심하고  고뇌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그의  인간성을  보여줄  때  회중은  크게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17)

7)  극적인  효과가  있는  설교

    플라그네츠(George  Plagnez)에  따르면,  좋은  설교는  귀와  눈과  감정

을  자극해야  하며  열정과  유머와  느낌이  담겨  있어야  청중에게  극적인 

경험을  준다고  말한다.  좋은  설교란  이야기를  통해  삶의  아픔,  고뇌,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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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43

망을  말하며,  복음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위로와  기쁨을  전하는  설교

이다.18)

    설교가  극적인  효과를  가지고  전달되도록  하기  위하여  설교자가  강

단에서  앞으로  나와  설교하는  것도  가끔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너무  높고  크다.  강단이  작아야만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21세기를  지향하는  교회의  강단은  작아져야  하며  설교자가  원고  없이 

강단  주변을  오고  가며  설교할  때  더욱  더  극적인  효과가  있게  된다.   

또한  극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하여  설교자는  원고에서  자유로워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원고를  써서  읽으며  대화하지  않

는다.  설교자가  대화체  설교를  원하는  현대인을  향하여  원고로부터  해

방되어  설교할  때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된다. 

3. 설교와 목회적 돌봄

    교회의  목회적  돌봄은  심리학과  심리요법적  통찰력의  현명한  사용으

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루이저  박사가 

말한  대로  교회가  오랜  세기를  걸쳐서  축척하고  검증해온  목회적  자원

들  즉  그들의  전문적인  유산을  많은  목사들이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믿는다.19)  그러므로  목회적  돌봄

은  현대심리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일대일  개인상담의  차원을  넘어서 

교회가  간직해온  풍부한  목회적  자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어

야한다고  본다.20)

    따라서  목회적  돌봄을  위해  사용되었던  교회의  전통적  자원의  하나

인  설교를  통해  오늘날  어떻게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룰  수  있는

지를  조명해  보고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관심을  두

는  것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동시에  또한  부

차적으로  이  과정에서  성도들에  대한  돌봄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면

서,  이를  효과적으로  설교라는  자원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하

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오늘  상황에서  심리학적  통

찰력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설교를  통해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감당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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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설교학

수  있는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설교에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즉  복음적,  목회적,  교리적,  그리고  도

덕적  차원이  있다.  시대마다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처럼  설교는  목회적 

차원에서도  그  역할을  감당해  왔던  것을  보게  된다.  설교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요,  하나님의  위로와  신학적  주제와  가르침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한

다.  설교의  중심이  죄책감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성도의  심리적 

치유이거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파라클레시스  등에  머문다

고  하면  그것은  바른  설교가  아닐  것이다.  설교의  중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책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설교를  통하여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

고  하나님이  그의  죄책감을  씻으시고  그의  상처를  고치시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급격히  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쉽게  상처를  입고  살

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먼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도시화된  산업사회,  병든  사회구조  속에

서  각종의  가정문제,  인간  소외문제로  상처입고  고난  당하는  자들,  슬

픔에  잠긴  자들을  위하여  목회상담에서  하듯이  이런  교인들의  심층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더욱  효과

적인  치유의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모든  사람은  심리적  문제들을  경험해왔고,  그리

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정확한  명제적  진리(삼

위일체하나님,  기독교적  세계관,  예수에  대한  질문  등)를  선포한다고 

오늘날  성도들이  경험하는  불안,  외로움,  죄책감,  분노,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고민에  접근해야하고  그들의  정서적  문제와  내적  갈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21)  이런  맥락에서,  송길원  교수의  “교인은 

십일조를  잘하고  교회봉사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

은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고  정신적  장애도  뛰어넘는  내적  힘을  지녀야

한다.  교회는  이런  것들을  가르칠  사명이  있고,  설교는  이런  교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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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45

상황을  상담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  말씀  속에서  치유를  경험하도록 

도울  수  있다”22)  라는  언급은  목회적  돌봄을  위한  설교의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설교를  통해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루려면  인간  심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소

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설교는  아무런  반응도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상담이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문제의  원인이  무

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한  다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를  강구하는  것

이  그  임무인  것처럼,  돌봄적  설교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파악하

고  난  후  말씀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병

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의  뿌리를  구체적으로  알고  말씀으로  대처하는 

설교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상식이  없는  상태에서  진

리만  전하면  된다는  식의  설교는  치유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설교의  지적인  측면이나  신학적  바탕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적인  면

에  의해서는  인격변화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23)  인간의  마음은  자신

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을  만날  때  쉽게  열린다.  설교자가  자신의  이

야기를  대신해  줄  때,  즉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설교

를  듣는  청중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느끼게  된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설교자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해  줄  때  서서히 

불안과  갈등에서  벗어나면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받아주지  못하고  열등감으로  미워하던  마음도  자신을  받

아주는  설교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되며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다.24)  반면에  설교가  질책과  죄책감,  그리고  공포를  조장하

게되면  청중은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고,  심리적  장애는  신체적 

이상까지  초래할  수  있다.25)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이  복음전파의  목적이다.  구원

의  원래  의미는  치유이다.  인간이  영과  정신과  신체와  그리고  인간관

계가  뒤틀려  있을  때  설교는  이를  바로  잡아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건강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일이다.26)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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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설교학

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와  신체적  질병의  상호관계를  목회자가  어

느  정도  이해하고  설교를  통해  치유해갈  수  있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

어날  것이다.  청중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마음의  구조를  아는  것은  치

유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중요하다.

    이렇듯  효과적인  목회적  설교를  위해서는  회중들의  삶의  필요를  파

악해야만  한다.  설교자가  교인들의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저들의  고뇌

와  마음을  읽는  것은  상담에  있어서  필수적인  경청하는  일과  같은  것

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자기들의  문제에  대해  심리학적인  해답만을  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부터의  해답을  기대한다.  말씀을  소홀

히  하고  인간  마음의  진단과  처방에만  치중한다면  좋은  설교는  아니다.   

이것은  프루이저의  말처럼,  최근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전

문상담자를  주위에  두고도  목사를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상처  입은  사람들이  심리학

자나  전문상담자의  도움을  넘어서는  영적인  도움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27)  그러므로  회중의  삶을  관찰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그 

해결의  원리들을  성경에서  찾아내어  그들의  삶에  섬세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상담에서  중요시하는  시각조정이다.28)    이

렇듯  설교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면  목

회적  돌봄이  잘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목회적  설교를  하게될  때,  회중  속에는  문제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섞여  있으므로  어떤  이에게는  예방적

인  측면에서,  다른  이에게는  치료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  그

리고  오늘  현대인에게  중요시되는  자기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

는  상황에서  부담  없는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29)  또  한편  오늘날  상

담이  장기  치료의  형태를  갖고있는데  반해,  설교는  단기  치료의  형태로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다.  이렇듯  설교는  이제까지  상담에게  빼앗겼

던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30)

    이와  같이  목회적  설교는  교리적  설교와는  달리  인간의  삶의  경험에

서  출발한다.31)  어떤  외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정직하고  명료하게  분석하고  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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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47

줌으로  해서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과  자기  발견과  회개의  결단으로 

인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모습을  반영함으로  그  안에서  응답해  가는  삶이  되야 

하는  데,  이때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신을  보며,  용서와  치

유와  성장은  일어나게  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  강단을 

통하여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설교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왔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왔다.  그러나  한국도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세속가치에  영

향을  받아  가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단지  옛  신앙전

통  유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깊은  필요에  대해  연구하는  심

리학의  도움을  받아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룰  수  있도록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전통과  세속  가치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오늘

의  한국  크리스챤을  돌보아야  할  목회자들이,  이제는  복음선포의  설교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끄는  설교가  강조되어야  할  상황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  대한  효과적인  돌봄을  시도하는  것

이  필요함을  느끼면서  하나의  시도로서  여기에  필자의  설교  “성숙한 

삶을  향하여”를  실어보고자  한다.  이  설교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었지

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우리  스스로  한  번  바람직한  설교를 

머리에  그리면서  직접  평가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4. 설교사례: 성숙한 삶을 향하여

(본문:  살전  5:14-15)

    꿈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이상과  현실  속에서  늘  갈등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옛날  고등학교시절  생물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선생님의  한마디  “그렇탸!”는  잊혀지지가  않

는다.  수업시간에  “염색체는  이렇게  분열됩니다...”  한참  열정적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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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설교학

명하고는  끝날  때  꼭  한마디  합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봤간디?   

그렇탸.”  그러니  의심이  안들  수  있습니까?  그래  저녁에  집에  오면  선

생님이  설명한  것을  참고서  갖다놓고  매일  확인합니다.  적어도  2,3주 

계속했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도  틀리지  않는  너무나  정확

한  설명이었다.  그후로  내심  존경하게  되었는데,  또  한편  속으로는  이

왕이면  분명하게  얘기하지  왜  “그렇탸”해서  헷갈리게  하는지  불만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음을  종종  봅니다.  하

나님이  우주  창조하시고  사람도  만드시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  하셨댜. 

나도  잘  몰라.  내가  봤간디?  그렇탸.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을  산댜.   

근데  나도  잘  몰라.  내가  가봤나?  그렇탸.  그러니  신앙에  힘이  없어

요.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나님이  계

실지  모르니  만일의  경우  후에  큰  손해  안  볼  정도로만  적당히  나오고 

적당히  봉사하고.

    사실  그럴  수도  있다.  인생  7,80을  살아도  삶이  무엇인지  다  모르는

데,  죽음이후에  대해  혹은  인생은  이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오늘  현대인의  특징은  신념이  없이  다양한  생각만을  갖고  있는  것이라

고  누가  얘기했듯이,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많은  지식은  갖

고  있으나  오히려  신념이  없고  가치혼돈-이것인지  저것인지  어떤  것이 

참  바른  길인지  모르는-가운데  사는  것이  현대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

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생각  속에서  신

앙의  갈등을  겪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여기  젊은이들이  있는데)  또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갈등을  많이  겪는 

것을  봅니다.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버린  젊은이가  자기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이  오델리오에게  사랑

을  고백하듯. 

“사랑하는  그대여  저  밤하늘의  별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의심해도  좋소

  태양이  우리를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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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49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다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허지만  결코  이것만은  의심하지  마오.  내  그대  사랑한다는  것을.“

  Doubt  Thou  the  stars  are  fire

  Doubt  that  the  sun  doth  move   

  Doubt  all  the  truth  to  be  lier   

  But  never  doubt  I  love.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미안해.  우리는  아직  공부해야  할  때이잖아..”

라면  어떻합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지는  것  같지만  자살할 

수는  없고.  그저  가슴을  치면서,  “그래  그렇잖아도  내가  먼저  노-  할려

고  그랬는데  먼저  얘기해줘서  고맙다.”  그렇다고  아픈  가슴이  풀리나

요?  인생의  선배들--로미오와  줄리엣.  단테와  베아뜨리체.  이수일과  심

순애,  이도령과  춘향이,  갑돌이와  갑순이--이  다  겪어온  고민이지만  사

랑의  갈등이  젊은  시절  가슴아프게  한다.

    물론  결혼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늘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고  굳게굳게  약속

했지만.  20대  젊은  부부.  여자가  말합니다.  “여보  오늘  분위기  있는  레

스토랑에서  외식할까?”  그때  남자  “아니  미쳤어?  난  구수한  된장찌개

에  밥  말아먹고  싶어서  결혼  했다구”  사랑이  다  뭡니까?  냉전  분위기

가  고조되는  거죠.  30대.  힘든  세상에서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대화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요.  그러다  보니  갈등이  또  생기고.  40대.  이제  아

이들도  성장하고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갑니다.  그러던  어

느  날  여자는  거울  앞의  자신을  보면서  “아  이제까지  내가  무엇을  위

해  살았나.  내  인생은  어디에  있나?”  그러다가  옆집  돌이  엄마하고  비

교해보니  속이  막  상해요.  이러다가  너무도  많은  주부들이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때  잘못  나가면  잃었던  그  어떤  사랑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래  우스개  소리로  “강남  사는  주부  치고  애인  없는  여자  없다”

는  말도  한참  유행어처럼  돌았던  것을  기억한다.  남자들도  그래요.  이

제까지  정신없이  생존을  위해  바쁘게만  살아왔는데  조금  여유가  생기

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사를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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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설교학

서  뭔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은  없을까?  그러다가  운동이나  등산  글

쓰기  어학공부  또는  사회교육원의  좋은  프로그램등  건전한  취미를  살

리면  좋은데  잘못하면  술집으로,  도박으로  또는  자꾸  다른  여자  쳐다보

다가  인생의  심한  곤경에  빠지는  사람도  보게된다.  그래  인생의  뭔가 

새로움을  찾아  방황하는  때이다  해서  40대를  제  2의  사춘기라고  합니

다.  우연의  일치인지  다윗이  바람난  때도  40대였어요.  어쨌든  이런  일

로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  50대.  50넘어서  60바라보게  되면  이제  싸울 

기운도  없어요.  “그래  참지  뭐...  같이  나이  먹어가면서  서로  측은하기

도  하고..”  어지간하면  참는  게  습관이  됩니다.  그런데  60대되면  이제 

자식들  때문에  또  싸우게  됩니다.  “며느리가  그  정도면  되잖아요”“아

냐,  안돼!  그래도...”  인생  길에  갈등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래  어떤  부부는  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일보(97.2.21)에  나온  95년  통계  보니  하루  평균  190쌍이  이혼, 

결혼은  초혼,  재혼  합해  하루  1121쌍.  쉽게  말해  하루  6쌍이  결혼하

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또  새로운  사실은  50대  이

후노인들의  이혼이  꾸준히  증가해서  지금은  천명당  6.6건이라고  합니

다.  과거에  “이혼은  무조건  안된다”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오늘날  하

나님의  뜻과  이  사회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  철저히  나  개인  위주의 

판단으로  너무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분위기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

키고  있습니다.             

또  돈이  없어서..  건강  때문에,  너무  빨리  흘러가는  세월  때문에,  때론 

재능이나  신체적인  문제로  고민할  수도  있다.  “내  엄지발가락은  왜이리 

이상하게  생겼을까”  이러한  갈등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때로는 

내안에서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상과  현실.  본질과  실존  사이에서의  갈등!  요즘  많은  철

학,  문학의  글들  또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모

습을  깊이  있게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잘못하면  우린  여기

에  푹빠져  이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

은  소극적인  인간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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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51

    성서는  인간의  참모습은  이런  갈등  속에서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갈등을  통하여  더욱  성숙해지고  참  나의  모습

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개인  갈등뿐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갈등은  그  일을  통

하여  한  집안을  구출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보듯  예루살렘의  큰 

박해가  오히려  성도들을  유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게  해서  복음

이  널리  전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갈등을  성숙의  디딤돌로  바

꾸시는  것을  봅니다. 

    그럼  어떻게  이  갈등을  괴로움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해지

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먼저  주님이  죄와  허물이  많은  나를 

받아  주셨듯이  나  스스로도  이런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입니다.  여기가  모든  것

의  출발점입니다.

    제  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중2  때  한  번은  주일  낮  학생예배때 

특송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서  드디어  주

일아침  150여명의  학생들  앞에  섰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시  168장으

로  “죄짐맡은  우리구주”라는  찬송이었는데,  피아노  첫음이  내가  집에서 

혼자  준비한  것과  너무  틀리는  것  아닙니까?  결국  1절도  못  끝내고  들

어왔는데  그때의  창피함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그때  더욱이  좋아하던 

여학생  앞에서.  몇  주일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은  제  심정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나  배운  것이  있다.  내  자신을,  나의  경험을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게  생각하지  말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에  있어

서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왜  노래를  파바로티만

큼,  여자라면  조수미처럼  못할까.  왜  내  부인은  황신혜처럼  생기지  못

했을까.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나?  내가  왜..”라고  생각하며  자신

을  미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건  내가  아니야  할  필요가  없다

는  것을  배웠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

가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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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설교학

찌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

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

이  사랑하라”  오늘날  많은  문제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음”에

서  옵니다.  정신적  질병.  우울증  그리고  수많은  신체적  질병도  나를  미

워함에서  영향받는다는  것은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

이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하나님  안에서  늘  느끼며  살

아야  합니다.  미국  시민인권운동의  기수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추

모회에서  어느  흑인  여가수가  가슴을  뭉클하게  부르던  노래를  저는  잊

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가사는  다  잊었지만  계속  반복되던  한마디 

“I'm  somebody".  우린  노예도  아닙니다.  무가치한자가  아닙니다.  우린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릴  사랑합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

오.  키엘케골은  “비교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는데  비교는  잘못하

면  우리를  비하시키고  이것이  남을  향할  때는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

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

십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칭의가  무엇입니까?  의롭다고  칭하는  것  아

닙니까?  즉  나는  죄인  그대로  인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겁니

다.  마치  만원  짜리  지폐의  사실가치는  10원(?)이나  만원이라고  인정하

고  사용하듯.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런  우리를  가리켜  “의인이면서  동

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까

지  우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결코  훌륭해

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정을  받을만한  공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아준  이  귀한  나를  내가  왜  뭐가  조금  부족하다

고  용서를  못하고  미워하고  열등감으로  살아갑니까?  내  모습을  그대

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음은  성숙한  삶을  향한  첫  걸음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조금씩  자라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원받는  순간 

사람은  아직  아이와  같고  신앙  안에서  점점  자라야  하듯  즉  감리교  신

학  용어로  성화  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기초--나를  받아드리

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위에서  점점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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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53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  크리스챤의  성숙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나를  죄인임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듯,  나 

자신  참  나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

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허나  만일  여기서  나사랑(self-love)에서  멈춘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될  것입니다.  요한  15:12-17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숨까지  내어주기까지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믿음  안에서  너희도  받아주고  사랑하라는  것입

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내가  나의  부

족함을  받아주듯  이웃의  부족한  약점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약한  자를 

보며  “넌  왜  그래?  라고  내  입장에서  기준을  정해놓고  비판만  하지  말

고  그  약한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같이  자라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진정  성숙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김치찌개  못한다

고  맨날  불평하고  구박해보세요.  그러다가는  라면도  못  얻어먹습니다.   

아이들  수준은  생각  않고  이웃집  아이하고만  비교하며  “넌  왜  그  모양

이냐”  하면서  자식의  있는  모습그대로  받아주지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

끄러워하면,  결국  아이들  가슴에  멍이  들고  성격형성에도  부정적  영향

을  주게됩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서로가  부족함을  탓하고 

불평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같이  자라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길  걸어가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

은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

랑할  누군가  있다는  것.  이것은  삶의  행복이고  진정  내  삶을  의미  있

고  성숙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간곡히  권면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니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말고  “종말이여  오라”가  아니고,  또는  종말이  곧 

오니  모든  것  포기하고  산으로  갑시다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의  오심

을  기다리면서도  주안에서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우리의  약한  이

웃을  붙들어  주자는  권면을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걸어야할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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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설교학

스챤의  자세임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종말이  다가왔다고  느껴질  만큼  세상이  악해지고,  물질주

의와  잘못된  자본주의/  개인주의  의식이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잃게 

하며  서로가  외로워지는  그래  우리를  절망하기  쉽도록  만드는  이  시대

에  우리  크리스챤의  바른  삶의  지침이  또한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  돌봄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불만만  갖는다면  그나마  이 

세상은  정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오늘의  이  말씀을  드립니다.

“규모  없는  자  (게으르고  바르게  행치  못하는  자)를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를  안위하고.  불행한  여러  가지  일들,  순간의  잘못,  실패  따위로 

실망한  자를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고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주며.  육

체적  영적으로  병들고  쇠약해져서  제  발로  서지  못하는  사람을  붙들어

서  의지하고  서게  해주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며.  자기를  반

대하고  괴롭히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거나  적대하지  말고  용

서하고  마태5장,  로마서12장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해결할  때까지  오래 

참으며  악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고  선으로,  사랑으로  대하라” 

    어떤  조건에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언제나  선행으로  대하야  하

는데  이것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취할  태도요,  크리스챤의 

길이라는  권면입니다.

    요즘  세상  나혼자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내  혼자  시간  쓰기도  바쁜

데...  내  생각만  하기도  복잡한데  어떻게  남까지  관심을...  더구나  어떻

게  남을  위해  어려움까지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남

을  위해  살면서도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4절에  너희를  부르

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합니다.   

    그래요  우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고  또  이  사

랑  때문에  기꺼이  우리  자신  헌신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

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어려워  보이는  일도  감당할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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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55

    교회  나가자고  전도할  때  사람들한테  가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  나  돈이  없어  못나가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십일조.  각종

감사헌금.  절기  때마다  헌금.  교회모임때마다  헌금...  부자가  아니라 

경제적  부담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난  게을러서  못 

가요”  정말  교회  다니는  사람처럼  부지런한  사람  없을  거에요.  주일

낮,  밤,  수요일,  금요속회,  매일  새벽기도회,  또  웬  모임은  그리  많은

지.  사실  그래요.  그렇찮아도  피곤하고  힘든  세상인데  얼마나  교회생

활  하기가  바쁩니까?  모든  에배참석.  교인의  의무.  특히  온전한  십일

조  생활해야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물가는  비싸고.  쓸곳은  많고.  그

런데  10만원  1/10이면  만원이고,  100만원이면  10만원,  1000만원이면 

100만원..큰돈입니다.  언젠가는  어느  성도님을  심방  가서  왜  저녁예배 

안나오냐고  하니까  그  분  대답  “첫사랑  봐야죠”  그래요.  그렇지만  우

리는  할  일이  많아도  또  TV재미있는  것  있어도  교회와야  됩니다. 

그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권면해서  은혜  안에  자라게  할  책임도 

우리에겐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어떻게  다  감당합니까?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

이  어디에서  옵니까?  교회의  제도에서?  아니면  목사님의  간곡한  권면이 

있어서?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

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더나가  이웃도  받아주고  사랑하고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교회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노래  못하는  저도  스스로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십니다.  급격한  산업화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하며  개인적으로

도  우린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심방  하다  보면  많은  가정들이  나름대

로  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부부갈등,  자녀문제.  교회는 

어떻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목사  사모님이  옷을  잘  입으면  “사모님은 

너무  사치해”,  못  입으면  “사모님은  언제  좀  세련될라나”흠이  많습니

다.    “우리  교회는  서로  인사도  안하고  너무  차가워.  우리  교회는  어려

운  사람을  안  돌봐.  우리  교회는  찬송을  크게  안  불러.  김집사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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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설교학

왜  그래?”  이렇게  저렇게  교회  안에도  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또  어떻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국가가  유지되려면  군

과  경제  신뢰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리더쉽이  상실되

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가장  중요한  정부에  대한  신뢰,  서로간의  신뢰

를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대를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부족함을  수치스러워하고  절망하지  맙시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주며  주님  안에서  완전을  향해  자라도록  노력합

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갈등을  성숙의  디딤돌로  만들어  주시며  우리 

개인뿐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힘을  주실  것을  믿

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성령은  불,  뜨거운  마음,  순수한  마음인데  이것이   

꺼지면  안됩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고--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요  권면,   

은사이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멸시치  말고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나쁜  것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좋은  것 

취하는데도  결단  필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당시  성행하던  우상숭배,  성도덕혼란.     

잔인한  경기  등을  영향받지  않게  멀리하고  본받지  말라는  경고

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살기를  권하는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  온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기도한다.  성숙하고  바르

고  깨끗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

되기를  원하노라.”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가  참으로  귀한  존재임을  날마

다  느끼며  부족함에도  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나가  이웃을  돌보고  같이  자라는  성숙한  삶을 

살므로,  이  시대의  빛이  되고  주님  오실  때에  바르게  살았다고  칭찬  받

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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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57

주(End  Note)

1)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110.

2)  박철수,  “독서에서  얻는  메시지”,  그말씀」,통권  28호,  1994.  11,,90.

3)  홍순우,  “A  Analysis  of  Korea  Evangelical  Church  Preaching  Relative 

to  Church  Growth",  Fuller  Theological  Seminary,  박사학위논문,  1982,  68.

4)  계지영,  “뉴미디어와  미래의  설교,”  「실천신학논단」(서울:  대한기독교서
회,1995)  169-75.

5)  오늘날  이미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설교의  시도에  대한  글들이  「목회와 
신학」(1998.6)  별책부록인  “그말씀”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6)  Jim  Somerville,  "Preaching  to  the  Right  Brain,"  Preaching  (Jan-Feb, 
1995)  36-39.  John  Skyes,  "Preaching  to  the  Left  Brain,"  Preaching 

(Jan-Feb,  1995)  40-43.

7)  Paul  Scott  Wilson,  Imagination  of  the  Heart  (Nashville:  Abingdon 

Press,  1988)  14-48.

8)  Raymond  Bailey,  「설교자  예수」,  이명희역  (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학 
1996)  62.

9)  간결하고도  구체적인  언어와  이미지  사용에  관해서,  George  R.  Fitzgerald, 

A  Practical  Guide  to  Preaching  (New  York:  Ramsey,1980)  6장을  보라.

10)  이  책은  1994년에  Warren  W.  Wiersbe에  의해  발간된  책으로  1997년에 
요단출판사에  의해  「상상이  담긴  설교」와  「이미지에  담긴  설교」라는  두  권
으로  번역이  되었다.

11)  Richard  A.  Jensen,  Telling  the  Story:  Variety  and  Imagination  in 

Preaching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0).

12)  William  J.  Bausch,  Storytelling:  Imagination  and  Faith  (Mystic: 

Twenty-Third  Publications,  1993).

13)  Paul  Scott  Wilson,  Imagination  of  the  Heart:  New  Understanding  in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88).

14)  Stanley  Hauerwas,  The  Peaceable  Kingdom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1983).

15)  Thimothy  Wright,  A  Community  of  Joy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92.

16)  Doug  Murran,  The  Baby  Boomerang  (Ventura:  Regal  Books,  1990) 

2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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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설교학

17)  Lyle  E.  Schaller,  The  Seven  Day  a  Week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98.

18)  Wright,  앞의  책,  105-106.

19)  Paul  W.  Pruyser,  "The  Use  &  Neglect  of  Pastoral  Resources,"  Pastoral 

Psychology  (Vol.23,  September,  1972)  7,  9.

20)  현대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개인상담에  치우치고  있는  오늘날  목회적  돌
봄의  흐름을  여기서는  교회의  자원을  소홀히  한다는  측면에서만  비판하지
만,  많은  학자들은  신학적  뿌리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심리학적  성향의  목
회상담  자체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면,  Don  Browning은  프로이
드나  로저스의  심리학에서  “가치중립”  “비지시적  상담”“권위주의의  없앰”등
이  내담자를  수용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  배후에  있는  철
학의  문제점--윤리의  결핍--을  지적한다.  이런  상담방법은  오히려  가치관
의  혼란으로  정신적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Don  Browning, 

Religious  Ethics  and  Pastor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1)  이것이  클렙쉬와  재클의  영적,  종교적  문제에  대한  관심만을  보여주는 
목회적  돌봄에서,  최근에  전인목회를  위해  세속적  관심까지  돌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다.

22)  송길원,  「쉼표가  있는  삶:  미래목회의  대안,  상담설교」(서울:  두란노,  1995)  19.

23)  교인들의  만성적  죄책감,  심한  상처와  억울함에  의한  적개심과  사무친 
한,  사랑  결핍과  열등의식,  정서적  불안감,  파괴된  가족관계(부부파탄,  자녀
탈선,  고부갈등  등)  등의  문제는  인지변화의  목표보다  감정의  공감과  수용
을  통한  정동적  변화를  목표로  접근할  때  효율적인  전인적  변화가  가능하
다.  이것은  이성으로만  판단하려는  modernity(현대성)를  넘어서서  post-modern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24)  이것은  주로  Rogers의  상담이론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이다.  참고  Thomas 
Oden,  「케리그마와  상담」,  이기춘역.  이  책에는  바르트의  정통주의  신학  입장

과  로저스의  심리학의  대화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25)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기  보다  오히려  억압하게  될  때  병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심리학(특히  정신분석학)이  지적하는  대표적인  권위주
의의  폐해이다.  예를  들면,  목회상담의  입장에서  볼  때  우울증의  원인의  대
부분은  분노심을  내면화(internalization)시켰을  때  일어난다고  본다.  분노심
의  지나친  억압작용은  마음의  침체  현상과  아울러  우울증을  낳게  한다.  억
제된  분노심은  개인에  따라  화병을  낳게  하기도  한다.  이  화병증상은  분노
심의  신체화  현상인  것이다.
    현대  목회현장에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분노심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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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신학  개론    159

것으로만  교훈하고  있어서  우리  신앙인들이  분노심을  적절히  처리하는  방
법을  배우지  못하는  사례가  많지  않나  염려된다.  설교를  통해  분노심을  적
절히  처리하는  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를  통해  인
간이  느낄  수  있는  7정을  주셨다(그중  하나가  노(怒)의  정을  뜻한다).  그러
므로  분노심  자체는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한다.  우리가 
느끼는  분노심을  어떻게  죄를  짓지  않으면서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  이에  대한  교훈이  예를  들면  엡4:26에서  볼  수  있다.  심상권,  “설교와  목

회상담,”  「그말씀」,  28

,  (1994.  11)  161.

26)  오든은  “좋은  전인적인  돌봄은  육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Oden,  Pastoral  Theology,  198.  그러나  클라인
벨은  더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  차원--인간의  마음을  붇돋아  주는  일,  인간
의  몸의  생기를  회복시키는  일,  다른  사람과의  친밀  관계를  갱신하고  강화
하는  일,  자연과  생물권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일,  개인  생활에서  가장  중요
한  조직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성장,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일들이  전인적인  목회적  돌봄을  이루기  위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Howard  Clinebell,  박근원역,  牧會相談新論  (서울:  한국장로교출판

사,  1994)  56.

27)  Pruyser,  "The  Use  &  Neglect  of  Pastoral  Resources,"  7.

28)  상담에서  내담자의  말에  공감하고  스스로  문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
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담자가  패배적  시각이나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는(권위주의적  도전을  피하고  내담자의  한계  내에서)  시각을  조정 
주는  것이  필요하다.  오성춘, 

목회상담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276.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이나  윤리가  제시되어야  하는  데,  오
성춘  교수는  대부분의  목회학  분야  학자들(Hoffman,  Clinebell  등)처럼,  전
통적인  교회  윤리를  오늘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그
러나  Don  Browning은  오늘날  윤리는  전통과  세속문화사이의  비판적  대화
를  통해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  Browning,  Religious 

Ethics  and  Pastoral  Care.

29)  오늘날  전화상담이  활발한  이유중의  하나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
다.  현실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비밀을  알고있는  상담자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폭로에  대한  두려움,  또  이런  상황에서  오는  적개심  등을 
갖고있음을  느끼므로  이런  측면에서  설교는  익명적  상담역할을  한다.

30)    치유목회적  설교로  유명했던  뉴욕  Riverside  교회의  Harry  Emerson 
Fosdick목사는  “나의  설교는  그  자체가  청중을  상대로  하는  집단상담이다.   
사실  모든  설교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과  깊이  만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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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설교학

야하고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진  사람들의  문제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어야

한다.”  정태기,  “상담설교의  가능성과  전망,”  「그말씀」,  28  (1994,  11)  135.

31)  비평적  성서  연구의  결과로  성서  중심의  설교가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
면서부터(혹은  그  반대로,  성서  비평학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삶속에서  일어나는  주제들을  갖고  하는  목회돌봄적  스타일의  설교가  강조
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더욱  도운  것은  20세기  전반  목
회  심리학의  발달이었다.  그러나  목회적  돌봄의  설교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
은  궁극적으로  성도  개인들이  설교단에서의  가장  큰  관심이었기  때문이었
다.  대표적  인물로는  Riverside  교회  목사이었던  Harry  Emerson  Fosdick을 
들  수  있다.  Rodney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