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록
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Pastoral Approach to the Death and Dying)
I . 시대에 따른 예배순서
실천 신학 개론 273
Ⅰ.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Pastoral Approach to the Death and Dying)
I. 들어가는 말
죽음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생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러한 죽음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기피하고 죽
음에 대해서는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는데, 이것은 생을 향한 인간의 본
성과 죽음 앞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안, 공포, 그리고 그것에 대
한 방어 본능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생각
을 떨쳐 버림으로써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런
태도는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없게 한다. 왜냐 하면,
죽음을 배제한 인간의 삶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정말로 모든 것의 끝일까? 아니면, 오히려 이것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며, 우리의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
까?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많은 종교들에게
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세계내 존재로서 “죽
음을 향한 존재”이며 그 죽음은 무(無)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이 알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
하여 인간의 허무성을 진술했다.2) 그러나 많은 종교들은 이 죽음의 허
무성을 극복하고자 죽음의 본질을 탐구해 보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
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기도 하였다.3) 또 한편 현대 심리학에서
는 죽음 그 본질에 대한 질문보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 죽음을 어떻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냐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4)
이러한 다양한 이해가 만나지는 현실 속에서, 본인은 신학자와 목회
자로서 기독교의 죽음에 관한 접근 방법을 논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며,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 죽음은 생명의 한 과
정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바
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오히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
274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을 적극적인 자세에서 그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인간은 보다 의
미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
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죽음에 대한 이해를 성서와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규명해보고5),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감정의
혼란을 겪고있는 이들에게 이런 기독교적 죽음이해를 가지고 어떻게
목회적으로 효과적인 적용을 할 수 있을지를 논해 보고자 한다.
2. 성서에 나타난 다양한 죽음 이해
기독교에서의 죽음 이해는 그 우선되는 기반이 성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적 죽음 이해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
면 구약 안에서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나타나고, 이것은 또한 신
약에 나타나는 여러 모양의 죽음 이해와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약성서에서의 죽음 이해
1) 초기 구약시대의 죽음 이해
구약의 초기에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였으며
(창2:16-17), 생명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일반적 확신이 있
었다.6)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죽음은 무관계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죽음은
하나님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칠 수 없는 무자비한 영역이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7)
그러나 또 한편,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피조물에
게 정해진 한계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죽음은 각 사람에게 닥치는
문제이며 또한 인류의 공통된 숙명인 동시에 온 세상이 가야할 길이다
(왕상 2:2, 삼하14:4). 인간은 모두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땅에 쏟아져
서 다시 모을 수 없는 물과 같으며(삼하14:14),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
는 존재로 만들어 졌으며(창3:19,20), 인생은 한갓 그림자요 하나의 숨
실천 신학 개론 275
결, 허무일 따름(욥14:1-12)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온 세상의
길을 떠난다”(수23:14) 등에서 보듯 죽음을 어떠한 특별한 해석이 없이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특별한 경우--일찍 찾아오거나 질병 등으로 인한 비
참한 죽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본래적으로
악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아브
라함이 백발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만족하게 산 다음에 죽었으며, 자기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있었다(창25:8)”는 것이나, 또 “때가 되면
곡식이 영글어 타작 마당으로 가듯이”(욥5:26) 같은 표현으로 성숙한
상태로써의 무덤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8)
이와 같이, 초기 구약시대에는 비록 죽음이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말
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
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창2:17, 3:19)9), 대체로 죽음
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간의 지상 생활이 끝난 후에 개인
의 사후 생활이나 개인적 생명이 계속된다는 단계의 인식에까지는 미
치지 못하고 있다.
2) 후기 구약시대의 죽음 이해
시간이 지나면서(B.C. 6C 포로기 이후부터10)) 구약 성서에는 스올
(sheol, 음부) 사상이 나타난다.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되는 곳으
로, 구약에서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사상이 되고 있다. 이곳은
“전적으로 힘이 없고, 약하게 되고, 도움의 손길이 없는 그림자 같은
상태”(사14:10),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는 곳”(전9:10), “다
시 되돌아 올라오지 못하는 곳”(욥7:9), “하나님도 찬양할 수 없는 곳”
(시6:5, 30:9)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면 영육통일
체로서의 인간의 생명체는 곧 생기를 잃게 되고 산 자의 땅에서 누리
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올 개념의 대두와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
해는 폭이 넓어진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이 사람 사는 곳만을 다스린다
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힘이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관여하신
276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기원전 2-3세기까지 계속된다.11)
그런데 죽음에 대한 놀랄만한 사고 즉 “죽은 자들의 부활” 사상이 기
원전 2세기경에 생겨난다. 이것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리
던 시리아의 헬라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마카비 형제를
중심으로 한 반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정의로운 야웨 하나님이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하며, 그 보상은 생물학적인 죽음 너머의 세계와 부활로 나타
나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12)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이미 묵시문학에서부터 조금
씩 드러남을 볼 수 있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
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는 사람도 있으리
라”(단12:2)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전후로 죽은 자의 부활을
은유적으로 혹은 빗대어 거론한 성경 구절들이 없지 않으나(사26:19,
시16:10, 17:15, 신32:39 등), 문제는 죽음 후의 부활 및 그 사후의 심판
과 그 때에 있을 일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는 점에서 이 다니엘서
12장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13) 이러한 부활 사상은 그 다음 시대
인 신약성서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리해 본다면, 처음에는 죽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다가, 시간이 흐
르면서 죽은 자들은 비록 살아 생동하는 인간으로서는 죽었으나, 하나
님 관계에 있어서는 무화(無化)된 것이 아니고 항상 살아 있다는 생각
을 가졌고, 그 후에 의롭게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운명에 관계
된 신정론(Theodicy)의 관점에서 사후생명에 대한 관심을 점차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죽음 이해
신약성서에서의 죽음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떼어놓
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죽음의 원인은 죄라고 하지만,
구약과 달리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은 극복되야하는 것이며 또
한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천 신학 개론 277
1) 공관복음에서의 죽음 이해
예수의 삶과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물론 편집자적인 관점은 있었겠
지만) 마태, 마가, 누가에게서는 죽음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을 찾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초기 자료를 사용했고 죽음에 대해서
언급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14)
그렇지만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첫째로 예수는 인간의 죽음이 반
드시 인간의 개인적인 죄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실로암 성전이 무너질 때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
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눅13:4), 죽은 나
사로를 살려내면서 그 역시 그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잠시 자는 것이라고 말했다(요11:4).
둘째로, 예수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게 된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마8:11). 또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 했고, 악인이 고통받는
곳을 ‘하데스’라고 했다.15)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던 사두개인들과의 논
쟁에서 일곱 번 결혼한 여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 상태가 틀려진다
(마22:23-33)고 말하면서 부활사상을 옹호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성서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핵심적인 사상
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
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는 말에 잘 나타
난다. 여기에서 볼 때 예수는 전통적인 유대 사상의 바탕 위에서 인간
의 죽음을 이해했으며, 한 가지 다른 점은 그가 인간의 죽음이 반드시
그의 개인적인 죄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2) 바울의 죽음 이해
바울은 죽음의 기원과 죽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 그리고 세례의식과 부활로 증명되는 죽음의 극복을
신학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278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첫째로,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으며(롬5:12, 고전15:21), 그 이래 모든 인
간은 ‘아담 안에서 죽게’(고전15:22) 되었고, 따라서 죽음이 세상을 지
배하게 되었다(롬5:14)고 본다. 이처럼 죽음은 죄의 열매요, 그 결과요,
또한 그 대가이다(롬6:16,21,23). 따라서 바울은 죽음의 불가피성은 궁
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악의 상태로 보았다. 이것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통적인 죽음 이해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예수로 하여금 인류의 죄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게 하셨다. ‘율법의 지배하에’(갈4:4) 태어나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
을 몸소 취하신’(롬8:3) 그리스도는 율법에 의해 요청되는 형벌로써 나
타나는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이것이 바로 그는 무죄하였으나,
그의 죽음이 ‘죄로 인한 죽음’(롬6:10)이 되는 이유이다. 그는 모든 죄
인들이 답해야 하는 죽음을 맛보았다(살전4:14, 롬8:34). 따라서 그리스
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조물의 죄와
죽음의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16)
마지막으로, 바울은 세례의식을 통해 죄와 죽음 사이의 관계를 잘 표
현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분
과 함께 죽음에 묻히며, 그 분의 죽음에 합치되며”(롬6:3, 빌3:10), 그에
의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종살이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옮겨진다(고전
10:1-4)고 말한다. 이제는 죽음의 권세로 나타나는 이 세상의 죄에 대
하여(롬6:11), 우리의 옛사람에 대하여(롬6:6), 율법에 대하여(갈2:19) 죽
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원리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다(골2:20). 이러한
죽음의 극복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골1:18) 그리
스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확신을 그는 가졌다.
3) 요한복음에서의 죽음 이해
요한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죽음이해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영생에 초
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도 바울처럼 예수의 재림과 그에 이어지는 신
앙인들의 몸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는 죽음 다음에 얻어지는
삶보다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실천 신학 개론 279
죽음의 문제에 접근을 하였다. 왜냐하면 요한을 비롯한 제3세대 기독
교인들17)은 예수의 재림이 상당 기간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죽은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영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예수 자신이 생명이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꼭 죽은 다음
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요5:24). 즉, 죽음은
신앙 안에서 이미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인 것
이다.
이처럼, 요한은 인간의 죽음의 심각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영원
한 생명을 갈구하는 기독교인의 현세의 삶이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
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
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 따라서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육신으
로는 살아있지만,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 본다면,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을 인간 생명의 자연스러운 정상
상태로써 보는 것이 아니고, “죄”라고 부르는 어떤 결정적인 요인 때문
에 인간 생명 속에 들어온 비정상 상태라고 보았으며, 이는 극복되어져
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죽음이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바
울은 죽음을 가리켜서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고전15:26)
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생물학적인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보다는, 죽음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쏘는 맛을 없앰으로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였다.18)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하고 물었다.
사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
280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는 허무감과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 하고,
영원히 죽지 않을 기념물을 만든다. 그러나 이런 태도 자체를 죄로 보
는데, 그 이유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내 자신이며, 유한자인
나를 궁극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
나님과 함께 살면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
님 안에서 나의 유한성을 깨닫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 안에
서 모든 것을 맡기며 그의 인도를 따라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서 생물학적인 죽음이 야기하는 죽음의 쏘는 맛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3. 오늘날 기독교적 죽음 이해19)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태도를 중요시하는 오늘날에 죽음을 바라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는 이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의학의 발달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새로운 경험과 이해의 측면을 다변
화시켰다. 이제는 죽음이 악한 영의 직접적 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생
각은 적어도 어떤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
었다.20) 또한 죽음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도 어떤 신앙인들에게
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사람이 죽으면 사탄이 침대 곁에서 그 영
혼을 빼앗아가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고 구조는 많은 신자들
의 생각에서 지워져버린 듯 하다.21)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죽음 그 자체’보다는 ‘두려움과 소외 속에서 죽
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보다 많이
이야기한다.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 임상목회교육)에서나 호
스피스 운동이나 그 밖의 죽음에 대한 많은 연구나 보고서들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으며, 그런 사
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제 죽음은 단지 종교나 신학의 문제이기보다는 심리학
이나 의료적인 면으로도 많이 접근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22)
그러나 기독교는 생물학적인 죽음 후의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설명
실천 신학 개론 281
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질문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앞에서 보듯 다양한 입장이 있어왔지만,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영과 육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영혼과 육체의 분리 문제
죽음의 순간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육체는 무덤으로 들어가 다
시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어떠한 모양으로든 계속 존재하여 간다
는 것은 수많은 토속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23), 우리 기독교의 오랜 전
통이기도 하다.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 지복과 평화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생각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부터 나타나는데24), 이는 희
랍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죽음으로 이해할 때에, 죽음의 과정을 이
해하는 것이 큰 신학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오시리
라던 예수의 재림이 지연될 때, 몸을 떠난 영혼의 여정이 어찌될는지는
중세 내내 수많은 신자들과 신학자들의 큰 관심사였다. 우선 영혼의
존재 및 불멸의 양태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개개인의 영혼은
언제 생겨나 어떻게 사람 안에 내주 하다가 죽음 이후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기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 같은 희랍철
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교부들은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죽은 후에 영혼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가하면, 이
레네우스 같은 교부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은 불가지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25)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속적인 영
육이원론적 인간관은 원래 히브리 전통과 성서 전통과는 다른 것이
다.26) 히브리적․성서적 전통에서 볼 때는, 인간 그 자체 안에는 어떤
신성한 본질도 갖고있지 않다. 즉, 인간의 영혼 그 자체는 육체와 구별
되어 불멸성을 지닌 실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몸을 지닌 혼(bodily soul)이며, 동시에 혼을 지닌 몸
(besouled body)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네페쉬(nephesh)는 신약성
경의 푸슈케(Psche)와 같이 몸을 지닌 인간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헬
282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라적 영육이원론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영혼이 아니다.27) 바울 및 닛사
의 그레고리 같은 이들은 영혼과 육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거나 따
로 존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28)
따라서 기독교 역사에서 영혼은 육체에 비해 가치론적으로 우월하며
본질적으로 신적이라는 플라톤, 고대 교부신학자들, 중세 스콜라 신학
자들과 개신교의 루터, 칼빈등 정통신학자들의 인간이해는 성서적․히
브리적 인간생명 이해의 헬라철학화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인해서가 아니라, 본
래부터 불멸적인 영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본래
적 죽음 이해에 혼란을 가져왔고,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29)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의 신앙은 헬라적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영혼불
멸설이나 영혼윤회설이 아니고, 영육합일체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
한 인간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 지고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변화한다는 신앙이다. 만약 이러한 의미에서 인
간영혼의 불멸신앙이라 말한다면 기독교 (히브리․성서) 전통과 헬라
전통은 접촉점을 가질 수 있지만, 본래 헬라적 의미에서의 영혼실체의
존재론적 불멸설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영생의 시작
생물학이 죽음을 존재의 마지막이라고 말할 때, 신학은 그것이 영생
의 시작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무궁한 삶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죽음을
일종의 존재의 완성으로30), 나아가 이 땅의 유한한 삶에서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에로 이행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31)
그런데, 이와 같은 신학적 이해의 뒷면에는 인간에 대한 독특한 기본
적인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즉, 기독교 신학은 사람을 단순히 숨쉬는
동물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사람만
이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지음 받은 존재로 보
실천 신학 개론 283
는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을 통해 한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종언을 맞았
어도, 그 사람으로서는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서서 계속되는 어떤 관계
를 가질 수 있음을 가능케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신학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서는 그 어떤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서 성서가 말
하는 내세나, 구원의 반열이나, 성도의 교제 같은 개념들이 비로소 새
로운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죽음의 의미는 관계적이요 신학적인 것이 된다.
어거스틴도 두 가지 죽음을 말하는데, 첫 번째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
아오는 것으로서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생물학적 죽음이요, 둘
째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는 죽음이다. 이 두 번째 죽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할 수 있
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밖에 없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다.32)
3. 하나님과의 분리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의미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의 가장 확실한 표라는
것이다. 즉,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원래의 완전한 성품을
갖지 못하고 자기 중심의 죄된 인간적 혹은 실존적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인데, 이 점을 전통적 신학은 인간의 죄와 타락의 표시라고 말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틸리히는 이를 인간 실존의 구조적 모습이라고
말한다.33) 따라서 죽음은 피조물의 본래적인 성격이요 그것은 한계를
지닌 피조물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죽음 이해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죽음이 마
치 구조적으로 본래적인 삶의 모습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지니
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칼 바르트는 피조물의 한계성이란 하나님
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의 성품이지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형벌의
모습이 아니란 점을 주장한다.
284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죽어감’이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에 그렇게 결정되었고, 또 그 창조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죽어감이란 옳기도 하고 또 선하기도 한 것이다. 시간성 내의
인간 존재란 유한한 것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
자체로는 심판이 아니다. 죽음이란 그 자체의 성격상으로, 또 본질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심판인 것은 단
지 나타난 현상의 결과(de facto)로서만 그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를 반드시 꼭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은
나타나는 결과로서만 두려울 뿐이다.34)
바르트에게 있어, 죽어간다는 한계성은 자연적인 것이다. 오히려 문제
는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의 단절, 즉 관계 적이면서도 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와 관계의 단절이다. 이런 뜻에서 죽어간다는 것
은 자연적인 현상이요, 죽음이란 한 인간의 영적인 단절 내지는 무의미
를 뜻하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단절 및 심판을 의미한다.35)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사상에서는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
는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이고, 죽음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말며, 또한 죽음
이란 우리 삶과 관계없는 것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에서 문득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인데,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
도 아니고 죽음으로 우리 삶의 어느 것도 소멸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또한 죽음이란 우리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이미
우리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처럼 죽어갈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과 삶을 같이 나눌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에게만 매달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영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
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에게 매운 맛을 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 신학 개론 285
4. 죽음에 대한 실천적인 목회적 접근
오늘날 죽음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하
는 것은 우리의 숙제이다. 틸리히는 큰 시대적 변환의 때마다 사람들
이 느끼던 공포나 불안이 일종의 특이한 타입이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중세의 말기에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
으로 떨었다. 즉 이생에서의 죄와 그로 인한 지옥의 형벌에 대한 공포
가 서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공
허감’과 ‘무의미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그는 본다.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영적인 고통, 정신적 공백 상태 속에서 현대인들이 분열된 삶을
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36)
이런 분석은 죽음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당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아픔을 당하는 그 내용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각
기 다를 수 있음을 예측케 한다. 이것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하
다. 그렇다면 그 개개의 아픔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고 또 실제로 당사
자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진술의 내용이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
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목회적으로 죽음에 접근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다원주의화된 오늘의 사회37) 속에서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인가?
오늘 시대에서는 현대 병원의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의 문제를 제일 처음으로 제기한 퀴블러로스가 죽음에 대한 접근
을 하는데 중요하고도 바람직한 기본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은 죽음을 혐오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는 인간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죽음이 자기에게 결코 다가올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면서도,38)
논리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에 죽음 자체를 혐오하고 있으며, 수많은 최신식 의료기구들을 통해서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주면서 인
간의 삶에 필연적인 죽음을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분석처
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
286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충격, 혐오, 분노, 비탄, 우울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망각하고 부정하며 거부하려한다.
죽음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 접근은 오늘날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지
금까지의 신학이 이성과 합리, 머리와 사변 중심이었다면, 감정과 가슴
그리고 감정적 공명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오
늘날 죽음에 고생하는 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에 이성과 논리보다
는 감정과 공명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심리학의 시대에
살고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39)
이런 관점에서의 접근은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접근이라
고 본다. 현실적으로, 목회자는 죽음이 임박함에 따라 임종자에게 여러
가지 반응이 일어남을 알게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오랜 투병
끝에 오는 해방과도 같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죽어 가는 사람은 임종
이 지연되는 데 대하여 고통스러움을 경험하며 이것이 지속되지 않고
쉽게 끝나기를 갈구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근본
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이것과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경우
에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다양한 상황 가운데서 목회자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깔려있는
감정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면밀하게 경청하여, 적당한 때
에 죽음의 절실한 상황에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증거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공감 그 자체가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담의 기본 전
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우리 자신도 상대방이
경험하고 있는 고독과 두려움과 아픔을 들어주고, 같이 느끼고 이해하
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만일 “그가 진정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느
낌을 상대방이 갖지 못하면 더 이상의 효과적인 대화는 힘들어 지는
것이다.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죽음만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
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에 말이 없이 같이 옆에 있어주거나, 손을
실천 신학 개론 287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로를 받게되는 것이다. 이때 비록 환자가
죽음 앞에서 충격을 받고 이를 부정하거나 분노하게 될 때에도, 이를
억압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임을 이해하고 솔직히 그 감정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교회에 잘 나오던 신자
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할지라도, 이 순간이야말로 도움을 가장 필
요로 하는 때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야지, “그렇게 하면 어떻합니까?”식으로 권위주의적으로 신
앙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어째서 내가 하필
이 몹쓸 병에 걸렸느냐?”고 원망할 때, 그 투정을 들어주면서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셨던 것처럼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한 것
이다.
고통과 고독에 있는 자에게 목회자가 같이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이며, 이런 공감이 없이 내 자신의 죽음관을 강요하
는 것은 오히려 죽어 가는 자에게나 곁에 있는 유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이, 일반 목회에 있어서 처럼 죽음 앞에서도 목회자는 상대편
의 입장에서 들어주는 일(“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 롬12:15), 부드럽
고 무조건적인 수용(“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하
라” 눅6:36), 내적인 일치와 감정의 소유(“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의 자세가 필요하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위로하심
을 증거하는 일(“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
이라” 마5:4)과 솔직함과 정직 그리고 필요할 때는 맞서는 자세도 필요
하게 된다.
2.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으로 도와야한다.
CPE에서나 심리학에서는 단지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갖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진지한 대화는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
다. 목회자는 적절한 위로를 주기 위하여 항상 경청하여야 하며, 어떤
순간에는 말을 아끼면서 인간적으로 가깝게 있어주는 예민성이 필요하
288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다. 이러한 경우에는 논리적인 변증법이나 장황한 설교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며,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
는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에 인생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을 피하
지 말고, 유한성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한 이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목회자는 죽음에 임박할 때가 영적 성
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경험에서 알기 때문이다. 죽음에 임
박해서 사람들은 그 동안 자신을 방어하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
다. 따라서 죽음이란 위험할 정도로 파멸의 힘을 갖고 있는 동시에 또
한편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하는 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의 한계 상
황 안에서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 순간에 목회자는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순간 “책상과 도서관과 서적을 바탕으로한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사변이나 이론이 정작 아파하고, 괴로워하
며, 절망하고, 죽음의 문 앞에서 몸부림치는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수 있다. 이때 물론 임종을 앞둔 침상에서 피
상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교회에
나가 본적이 없다는 이유나, 또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
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피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된다. 성령께서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심을 믿으면
서 분명하게 또한 상황에 맞게 증거해야 한다. 만약 목회자가 이 말씀
을 전하지 못한다면 목회자의 도움을 누가 필요로 하겠는가? 그것은
목회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죽음 앞에서 누가 부활에 대
한 소망으로 위로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때 비록 목회자가 비록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언어
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방은 대화 중에 목회자의
생각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고통을 나누는 목회자의 자세에서 하나님
이 함께 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기회가 될 때 좀더
진지한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같이 나누며, 상대방의 생각을 신앙
안에서 바꾸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지옥과 천국, 죽음이 삶의 마지막, 영육의 죽음 또는 분리 등의
실천 신학 개론 289
죽음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경우, 사소한 견해로 논
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음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것
으로 인정하면서, 인생을 뛰어넘는 더 큰 존재인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
으로 위로를 받게 해야한다. 예를 들어, 죽는 순간 영이 육을 떠나 하
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소박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우리의 죽음은
영육의 죽음이요 오직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성경에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40)
신앙 안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신자도 있겠지만, 회복의 가능
성이 없는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 죄책감으로 우울해하거나 고독해 할
때에는 옆에 같이 있어주며, 손을 잡고 기도로 힘을 주며, 시편에 나오
는 고통의 순간들(시30, 23등)을 읽어주며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울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이 있음을 얘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말(회개가 되었든 두려움에 떠는 울부짖음이 되었든)을 들어주
는 가운데, 목회자는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얘기하며, 공포와
절망을 넘어선 상태에서 죽음에 임할 수 있도록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
는데, 이때 목회자 자신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 부활과 생명에 대
한 확신을 가져야 함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3. 죽음 앞에서 목회자의 사명
영혼의 목자로서 목회자는 죽음과 관련된 여타 직종과는 다른 사명
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뛰어난 의료기술
이 있지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속수무책이며,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
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호사도 법적 권리 문제나 죽어 가는
사람의 유언, 세금 문제나 재산 분배의 문제에 관해서는 필요한 것을
자문해줄 수 있으나, 생과 사로 분리되는 사별의 내면적인 아픔에 대해
290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서는 할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장의사도 사후의 시신을 처리하는
데 대해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인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죽음의 의미
에 대해서는 오직 목회자가 대답해 줄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당사
자들과 가족들이 목회자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목회자
는 이에 대해 기독교 전통 안에서의 바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특권을 가진 목회자가 임종시에 하게되는 예배는 훌륭한 목회
적 돌봄이 된다. 임종시의 예배의식에서 다양한 순서가 있지만, 하나의
기도문을 소개해 본다. “오 거룩한 성도의 영혼이여, 그대를 지으신 전
능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대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대를 성별 하신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하노니, 이 세상을 떠나 오늘 그
대에게 평화의 안식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천국, 그대의 거처에서 안
식할지어다”41)
5. 나오는 말
목회자는 언제, 어디서나 죽음을 외면하고는 목회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죽음을 직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 사
실이다. 자연 현상으로서 피할 수 없는 세력이요 비극적 현실인 죽음
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임종을 맞도록 돕는 것은 목회자의 사명
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평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얼마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목회적인 예방 차원이 될 수 있으며, 위기
의 순간에 죽음을 자신 있게 맞아들이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
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현실적인 위협이지만 그것은 이미
전장의 패잔병처럼 세력이 꺾이고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사망의 찌
르는 가시는 꺾이고 오히려 생명에로 삼킨 바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
을 바로 이해하고 믿는 자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망
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실천 신학 개론 291
주(Note)
1) Lily Pincus, Death and the Family (New York: Random House, 1974)
13.
2) M. Heidegger, Sein und Seit, 8-19. 한동윤, 「호스피스」(서울: 도서출판
말씀과 만남),1993에서 재인용.
3) 김승혜 외,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도서출판, 1990)에 죽음에 대한 다
양한 종교 이해가 잘 정리되어있다.
4) 현대 심리학에서는 퀴블러로스 여사가 정립한 중환자가 임종에 이르는
다섯 과정--부정, 분노, 타혐, 우울, 수용--을 근거로 상담의 목적은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데 있다고 한다. E. Kübler Ross, 「인간의 죽음」, 성염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79); E. Kübler Ross, 「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
답」, 이인복 역 (서울: 고향서원, 1980). 이 다섯 과정이 잘 묘사되어 심리학
에서 교재로 많이 사용되는 책은 Leo Tolstoy, The Death of Ivan Ilich,
trans. Lynn Solotaroff (New York: Bantam Books, 1987)이다.
5) 목회자로서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올바른 목회적 접근을 위해 필수
적이다. 이는 성문제 상담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기독교의 윤리
나 가치를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학적인
정리를
한
브라우닝의
주장은
큰
도움이
된다.
Don
S.
Browning,
Religious Ethics and Pastor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6) 문희석, 「구약성서의 인간학」(왜관: 분도출판사, 1976) 190. 예를 들면,
“하나님이 나의 손을 치셨구나...”(욥19:21-22),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시90:6-9).
7) Hans Walter Wolf, Anthropology of the Old Testament, trans.
Margaret Koh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107.
8) 이삭, 다윗, 욥도 만족한 죽음을 맞이한다(창35:29, 대상29:28, 욥42:16).
즉 두려움이 아닌 평화로운 성취로서, 고령과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
여진다.
9) 물론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에 대해서는 악과 연결시켜 논하기도 한다.
안석모, “질병과 죽음의 실천신학,” 「신학과 세계」 32호, 감리교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년 봄호, 180.
10) 김경재, “영생을 향한 삶의 방식”,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도서출판,
1990) 215.
11) H. Vorgrimler, 「죽음: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 이해」, 심상태 역 (서
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2) 65.
292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12) 김성민, “죽음의 문제와 그 극복에 관한 기독교적 고찰”, 「신학과 실천」,
한국실천신학회, 1997 가을(창간호), 103.
13) Vorgrimler, 「죽음: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이해」, 73.
14) Lloyd R. Bailey, Biblical Perspectives on Dea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9) 91-92.
15) 구약에서 죽은 자가 모두 가는 곳(선악의 구별을 초월한 중간지대적인
성격)으로서 ‘스올’(음부)에 해당되는 것이 신약의 ‘하데스’라고 보는데, 이곳
은 ‘스올’의 일부로서 영원한 형벌의 곳인 지옥과 구별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상근은 사람이 죽으면 의인의 영은 낙원으로, 악인의 영은 음부로 가서
부활을 기다린다고 해석한다. 부활 후에 의인의 영은 영화된 육과 합하여
천국으로 옮겨지고, 음부의 영은 부활하여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신
약에서, 낙원은 천국의 일부요, 음부는 지옥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본다. 이상근, 「신약주해 공동서신」(서울: 예장총회 교육부, 1983) 65.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적 논란이 있어왔다. 터툴
리안과 오리겐은 순교자는 곧 낙원으로 가지만 그 밖의 영혼들은 음부에서
부활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주장한다. 이 설은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을 걸
쳐 그레고리 1세 때 연옥설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이를 전
적으로 부인하였다. 김경호,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 아세아연합신학
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3, 50에서 인용.
16) 김균진,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279.
17)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죽음이해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죽음이해이고,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죽음 이해는 두 번째 세대 기독교인의 죽음이해이고, 요한
의 죽음 이해는 곧 제3세대 기독교인들의 죽음이해라고 시대적 흐름을 분
류해서 김성민 교수는 설명한다. 김성민, “죽음의 문제와 그 극복에 관한 기
독교적 고찰,” 106-109.
18) 김남식, “소망과 완전에의 미학,” 「상담과 선교」 제1호 (1993 여름) 15.
19) 이 부분은 안석모교수의 논문을 많이 참조하였다. 안석모, “질병과 죽음
의 실천신학,” 「신학과 세계」, 32호, 감리교신학대학교, 1996.
20) 죽음이 죄로 야기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죽음을 창조 질서에 속한
것으로 보는 현대의 견해에 의해 많이 약화되었다. Rodney J.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261.
21) 안석모, “질병과 죽음의 실천신학,” 185. 이런 생각은 중세기에 널리 퍼
져있었다. 중세기에 임종시에 신부가 어떻게 죽는 이를 인도할 수 있는지를
기술하였던 책 Ars Moriendi (The Craft of Dying죽음의 기술)에 보면,
“몇몇 수도회에서 하는 방식대로, 사람이 막 죽음의 순간의 고통을 당하고
실천 신학 개론 293
있을 때에, 큰 소리로 그 옆에서 신경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은 참으로 옳고
도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중병에 걸려있는 그가 신앙의 든든함으로 정화
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이 신경 외우는 소리에 고통을 받는 마귀들이 그를
피하여 물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한다. William Clebsch and
Charles Jaekle, Pastoral Care in Historical Perspective (New York:
Jason Aronson, 1975) 181. 지금도 임종시에 찬송을 부르는 관습이 한국 교
회에 있는데, 아직도 이런 생각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본
다.
22) 죽음에 대한 이해가 죄에서 온다는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심리학적, 의학
적 이해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며, 여기에서 죽음의 도덕적
차원이 중요시 되야 함을 말하는 보니의 책은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Bonnie J. Miller-McLemore, Death, Sin and the Moral Life: Contemporary
Cultural Interpretations of Death (Atlanta: Scholars Press, 1988).
23)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에 살고 있는 아란다족은 인간이 죽으면 몸은 사
라지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영혼을 돌판에 간직해 두면,
그 돌 속에서 재생하여 동물이나 인간이 된다. 아프리카 서남부의 부쉬맨들
도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어 산 자들의 사냥을 도와준다고 믿는다. 에스
키모인들도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죽은 영혼은
저승으로 가서 행복하게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한국의 무교에
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정진홍, “죽음.종교.문화” 「기독교사상」 286호, 대한
기독교서회, 1982.4, 88f.
24) 초대 기독교에서 예수의 즉각적인 도래(parousia)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
자, 죽은 자의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죽음을 통한 영의 구원에 대한 소
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혹자는 신약성경에서도 이 소망이 나타난다고 하지
만(“죽음 후에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소망” 고전5:6, 빌1:23), 영의 구
원에 대한 소망은 육의 구원에 대한 소망과 서로 보완해서 나타난다(롬
8:23). Rodney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361.
25) 안석모, “질병과 죽음의 실천신학,” 190.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질문에는
기독교적 대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개개인의 영혼은 언제 어떻
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에 영혼도 그
생명을 위하여 따로 창조되는 것인가? 아니면, 태초에 이미 개개의 영혼이
창조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개개의 영혼은 이미 창조된 어떤 큰
영혼에서 조금씩 분리되어 개개의 영혼이 되는 것인가? 만일 영혼과 육체
의 분리가 죽음이라면, 그 영혼은 죽음 후에 어디서 어떤 양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그 영혼은 환생하거나, 아니면 유전하는 것은 아닌가?
294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아니면, 영혼이 따로 거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 것인가?
26) 영과 육의 완전 죽음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O. Cullmann, K. Barth, E.
Jungel등이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어서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
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전적인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
와 영혼이 죽는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 자체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쿨만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믿어온 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초대교회)
의 본래적인 가르침이나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큰 오해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나 바울이나 초대교회는 영혼의 불멸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부활체와 영체를 가르쳤는데, 후세의 교회가 희랍인의
사상인 영혼의 불멸론과 혼돈해서 그것이 현재까지 전달되어 왔다는 것이
다.
O. 쿨만,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전경연 역 (서울: 한신대학 출판부,
1991) 12f. 이종성, 「종말론1」(서울: CLSK, 1991) 97. 김경호, “죽음의 이해
와 목회적 돌봄,” 38f인용.
27) 프쉬케는 많은 경우에 “영” 보다는, 네페쉬에 있어서처럼 연합체(human
being as a unity)로서의 “생명” 또는 인간을 가르킨다(예, 마6:25, 막3:4,
8:35-37). R.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1201.
28) Seward Hiltner, Theological Dynamic (Nashville: Abingdon, 1972)
157-59; Milton Catch, "Some Theological Reflections on Death from the
Early Church through the Reformation," in Liston Mills, ed., Perspectives
on Death (Nashville: Abingdon, 1969) 99f.
29) 김경재, “영생을 향한 삶의 방식,” 「죽음이란 무엇인가」, 212-215.
30) 죽음을 인생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나 성취로 이해하고, 이 죽음이 영원
의 시작이라는 죽음 이해는 라너에게서 잘 나타난다. Karl Rahner, 「죽음의
신학」 김수북 역 (서울: 카톨릭 출판사, 1983) 28.
31) 영생은 어떤 몸으로 시작되는가? 바울은 부활의 몸은 육체의 부활이 아
님을 분명히 한다. 육의 몸은 실로 썩을 것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육체가 죽으면 새로운 몸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마치 식물의
씨 안에 있는 생명이 해체되어야만 새로운 싹이 돋아나듯이, 인간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썩을 몸이 썩지 않
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않을 몸을 입으리라”고 희망하였다(고
전15:53). 따라서 바울은 영적인 몸을 언급함으로써 영혼불멸만을 시인하는
헬라인의 이원론적 사고를 배격하는 동시에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이 같
은 것으로 믿는 유대적 관념 역시 배격한 셈이다. 부활의 몸에 관한 한 인
간의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형체의 근본적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
실천 신학 개론 295
기 때문이다. 이같은 부활의 몸은 자연현상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적적인 개입과 놀라운 능력에 의한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부활의 몸 곧 영적인 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백
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서 지금의 육
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몸이 부활의 몸으로 이해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황성
규, “바울의 죽음 이해,” 「기독교사상」 286호, 대한기독교서회(1982. 4) 79-80.
32) J. P. Carse, Death and Existence (New York: John Wiley & Sons,
1980) 241-46.
33)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2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57) 66ff.
3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vol.3, pt. 2, 632. Ray Anderson,
Theology, Death and Dying (New York: Basil Blackwell, 1986) 54-55에
서 인용.
35) 바르트의 죽음관이 죽음 자체가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라는 그의 이해
와 상반되게 자연적 죽음을 주장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한동윤, 「호스피스」, 67.
36)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2) 57-63.
37) 서로 다른 사회․정치체제, 문화, 가치, 종교가 한 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빠르게 정보가 교환되
는 현실 속에서는 특히 각 개인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이 공존하는 다
원주의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도 오랜 한국의 전통인 불교, 유교,
도교, 무교의 사상들이 기독교 가치와 함께 내 안에 같이 혼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어디에 내 삶의 중심을 놓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38) 퀴블러로스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은 언제나 외부적인 개입이나, 타살로서
느껴진다고 주장한다. E. Kübler-Ross, 「인간의 죽음」, 성염 역(왜관: 분도
출판사, 1994) 15.
39) 20C에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세계관보다는 심리학적 세계
관이 더욱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리프의 “종교적인 인간(칼빈)과
심리학적 인간(프로이드)사이의 전투는 심리학적 인간의 승리로 거의 끝났
다”는 강력한 언급에서 잘 나타난다. Don Browning, Generative Man:
Psychoanalytic Perspective (New York: Dell, 1973) 35.
40) 이런 관점에서, 힐트너의 주장 즉 기존의 신학적 언어를 현장에서 실행
하여보고, 그곳에서 새로운 신학적 명제를 도출하고 그런 실용적인 신학을
통하여 이론적인 신학을 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공감할 만 하다. 시
296 부록I 죽음에 대한 목회적 접근
워드 힐트너, 「목회신학원론」, 민경배 역 (서울: 기독교서회, 1968). 목회현
장을 중요시하고 실천에서 이론이 나오야 한다는 이런 방법론을 이론적으
로 확실히 정리한 이는 시카고대학 신학부의 Don S. Browning이다. 그의
‘개정된 상호관계 방법론’(Revised Correlation Method)는 Religious Thought
and the Modern Psychology: A Critical Conversation in the Theology of
Cultu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에 잘 나타난다. 우리는 기존
의 신론이나 기독론을 새롭게 현장에서 실용적인 면에서 검토하고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 즉, 환자나 죽어 가는 이들에게는 보다 의미 있고, 보다 신
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신학적 명제의 발견과 해석, 그리고 적용과 재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에게 성서나 기독교전통에서 어떤 하나님 상을 찾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떠한 죽음 이해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 그에게 적합
할까? 하는 것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41) 이것은 성공회 의식의 마지막 기도문이다. Book of Common Prayer(1979),
464. 루터교나 동방정교회, 미연합감리교회등도 유사한 기도문을 가지고 있
다. Thomas Oden, 「목회신학」 이기춘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4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