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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동서양교류사에 대한 기본 정의와 이론
1. 동양과 서양의 구분
1) 문명과 문명교류사
-문명: 하나의 권역, 즉 문명권을 이루어 생성하고 발전
-문명교류사: 이질 문명 간의 교류를 다루는 학문, 인류 문명을 동과 서라는 문명의 이질성을 상징하는 공간적 대응 속에서 그 교류상을 연구하기 때문에 동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는 것이 연구의 선차적 과제
-토인비(Arnold Toynbee)가 구분한 문명권과 문명교류
⇒인류가 창조한 문명을 모두 30개로 헤아림, 성장 도중 정체된 정체문명 5개와 태어나기 전에 죽어버린 유산문명 4개를 제외하면 제대로 성장한 성장문명은 모두 21개, 성장 문명 중에서도 14개는 이미 사명을 다한 사문명이고 20세기까지 살아 숨 쉬는 생존문명은 고작 7개(인도, 이슬람, 극동, 비잔틴, 남동유럽, 그리스 정교, 서구문명)뿐임, 인류 역사상 있어 온 문명의 교류는 바로 이 21개의 성장문명권 사이에서 진행된 교류, 인류 문명의 교류는 여러 이질 문명권 간의 다원적인 교류
2) 문명 교류에서 있어서 동과 서
-다원적 교류를 ‘동’과 ‘서’ 사이의 이원적인 교류로 치환하여 이해 함
ⓑ근세에 들어와서 급부상한 서양이 자기문명중심주의로 일시 기선을 놓친 동양을 상대하면서 문명의 ‘편가르기’를 추구
-‘동’이나 ‘서’는 여러 개의 문명권을 복합적으로 아우르고 있으며, 그들 간에도 문명교류가 행해짐, ‘동’과 ‘서’를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며 ‘동’과 ‘서’는 하나의 상징적인 개념
-동과 서는 역사, 지리적 및 정치 문화적 복합 개념으로서 그 개념의 복합성만큼이나 이해에서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옴
-오늘에 와서 동은 동양(東洋, the Orient)이나 동방(東方, the East), 서는 서양(西洋, the Occident)이나 서방(西方, the West, 때로는 서구 혹은 유럽)에 대한 범칭으로서 동서양인이 공히 그 범주를 인정하고 그대로 사용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필요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기준으로 그 개념을 제시
⑴중세적(고전적) 개념: 중세(13~17세기)에 중국인(주로 송, 원, 명대)들과 중국에 온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 제시된 개념
①송대: 중국인들은 남해를 비롯한 인도양에 대한 지식이 깊어짐에 따라 송대 말에 처음으로 항해 침로를 기선으로 하여 바다를 지리적으로 구분하기 시작
②원대: 지리적 구분이 보다 세분화됨으로써 처음으로 그에 상응한 ‘동양’과 ‘서양’이란 용어가 출현, 큰 바다를 기준으로 한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란 뜻으로서 오늘날의 동양과 서양의 개념과는 다름, 여행기나 풍물기에 동양과 서양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남
ex) 『천남행기』와 『진랍풍토기』, 『남해지』
③명대: 정화의 7차 서양 사행(1405~1433)을 계기로 동서양의 개념에 일련의 변화가 일어남,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서양이 포괄하는 범위가 크게 확대, 명대 중기 이후 동양과 서양의 범위가 점차 동쪽과 서쪽으로 넓어짐에 따라 그 중간 지역과 수역에 대한 지칭으로 ‘남양’이란 이름이 나타남(오늘날의 동남아이사 일원에 해당하는 곳), 명대 중기 이후 중국에 온 유럽 선교사들은 서방에 대한 자신들의 지견과 중국인들의 대양 중심의 전통 구획법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동서양 개념을 창출
⑵근세적 개념: 18세기 이후 유럽 중심주의를 지향한 유럽인들이 제시한 새로운 개념
-아시아의 어원
①원래 앗시리아 어에서 일출을 뜻하는 단어 ‘assu’가 어원
②역사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235년경 흑해 지방으로부터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하던 히타이트 왕이 에게 해 동쪽에 있는 ‘앗수바(Assuva)’란 부족 또는 그 연합체의 영토를 정복한 바 있는데 이 ‘앗수바’는 일출을 뜻하는 ‘assu’에서 연유된 것으로 짐작, 후일 그리스인들 역시 에게 해 동쪽에 있는 ‘무한대의 대륙’을 막연하게나마 ‘동쪽 지역’이란 뜻의 ‘아스바(As<e>va)’로 지칭 그러다 근대에 와서 서양인들이 식민지 대상이 된 동방을 지칭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동쪽 지방’이란 뜻으로 사용하던 ‘아스바’를 유사음인 ‘아시아’로 재생시킨 것, 근세에 와서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아시아’란 용어는 지리적 개념과는 별도로 주로 정치, 문화적 개념에서 ‘동’과 ‘서’란 개념이 정립
⇒유럽인들은 중국인들처럼 어떤 자연 환경적 요인(바다나 산맥)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순수 자기 중심주의적 발상에서 출발,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인위적으로 동서를 나누어놓고 모든 면에서 동서간의 관계를 대립 관계로 설정했다가 점차 화해와 협조의 공생 관계로 바뀜
2. 문명
1) 문명의 개념
-문명(civilization):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창출된 결과물의 총체로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으로 대립
-인류 문명은 자생(自生)과 모방(模倣)에 의해 탄생하고 발달하며 풍부
①자생성: 문명의 내재적이고 구심적인 속성으로 문명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규제
②모방성: 문명의 외연적이고 원심적인 속성으로서 문명의 전파성과 수용성을 결과
⇒자생성과 모방성은 문명의 2대 속성인 동시에 그 발생, 발달의 2대 요소
-문명의 모방은 그것이 창조적인 모방이건 답습적인 모방이건 간에 문명 간의 교류를 통한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현실화, 교류는 모방에 의한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 이러한 교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인 통로를 거쳐서만이 가능 ex)실크로드
2) 문명과 문화
-문화(culture): 문명을 구성하는 개별적 요소이며 그 양상
-문명과 문화의 관계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총체와 개체, 복합성과 단일성, 내재와 외형, 제품과 재료의 포괄적 관계
-개체와 재료로서의 문화도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로 크게 구분
-이질 문명 간이나 동질 문명 내의 세분 문화나 미세분 문화 간의 교류 현상은 상이한 경제권이나 문화권, 지세권 간의 교류에서 잘 나타나고 있음(경제권-농경문화와 유목문화 간의 교류, 문화권-과학기술과 종교의 상호 교류, 지세권-해양 문화와 대륙 문화 간의 교류)
3) 문명의 진화
-문명의 진화(evolution of civilization, 문화의 진화): 장기간에 걸쳐 문명이 단계적으로 하나의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변해나가는 것, 문명이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단계적으로 변화(변동)가 거듭된다고 보는 시각으로서 변화는 단기적인 진화이고 진화는 장기적인 변화
-문명 진화론: 문명의 변화는 돌연변이처럼 그 문명 체계 내에서 새로운 문명 요소의 발명이나 발견에 의해서 또는 유전자의 이동처럼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문명의 전파에 의해서도 일어남, 유전자의 제거처럼 어떤 문명 요소가 제거되거나 유전자의 유실처럼 어떤 문명 요소가 소멸되어 문명의 변화가 발생, 문명은 생물의 진화 원리와 흡사한 모양새로 변화를 거듭
-대표적 문명진화론자
①멜더스(T. Malthus)는 1798년 『인구론』에서 적자생존의 원리를 제시
②스펜서(H. Spencer)는 1852년 「발전가설」에서 문명진화론을 피력
③모건(H. Morgan)과 타일러(E. B. Tylor)도 문명진화론을 정립
⇒19세기 초 문명진화론의 주요 내용을 보면 문명은 세계의 모든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양식으로 연속적인 발전 단계를 따라 진화
①단선진화론자: ‘안락의자 인류학자(armchair anthropologists)’라고 불림, 야만 시대(구석기)→미개 시대(신석기)→문명 시대로 진화
②다선진화론자: 스튜어드(J. Steward)가 대표적, 모든 문명은 동일한 선을 따라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을 따라 진화
⇒생물은 유기체이나 문명은 유기체가 아닌 초유기체인 까닭에 문명의 계승은 생식 과정에 의해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과 모방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
4) 문명의 이동
-문명 기원설
①문명단원설: 문명이 한 곳에서 발생한 후 다른 지역으로 확산, 문명의 이동에 바탕을 둠
맨체스터 학파(Manchester School):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에서 대두
ex)스미스(E. Smith)의 『고대 이집트』, 페리(W. J. Perry)의 『문명의 성장』
⇒문명단원론에 기초한 문화연속설을 주장, 문명의 유일한 발상지는 이집트로 거기서부터 문명이 세계로 계속해서 이동, 확산되었다는 것=문명이동론
※문명이동론: 문명은 3대 간선을 따라 세계 곳곳으로 이동 확산
ⓐ문명 이동 남선: 이집트~시리아~홍해~남아라비아 반도~인도~인도네시아~중남미, 대표적 문화가 태양과 석물을 숭배하는 양석복합문화
ⓑ문명 이동 중간선: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이란 북부~중앙아시아 사막 지대~알타이 산맥~고비 사막~중국, 대표적 문화가 채도 문화
ⓒ문명 이동 북선: 이집트~중앙아시아(러시아 남부)~시베리아~북미, 이며 대표적 문화는 즐문토기 유물은 비너스 상
⇒3대 간선은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3대 간선, 즉 해로(sea road)와 오아시스로(oasis road), 초원로(steppe road)와 대체로 일치
②문명복원설: 여러 문명이 제각기 자생한 후 발달되어 옴
⇒20세기 초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의 복원설이 밝혀지고 문명의 개별성(고유성)이 강조, 문명은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결코 일방적인 하향 이동이 아니라 상호 이동 즉 교류
5) 문명권
-문명권이란: 문명의 전승이나 전파를 통해 이루어진 공통의 문명 구성 요소들을 공유한 국가나 민족, 지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명의 역사적 및 지역적 범주를 말함
⑴문명권 형성 요인
①독특성(상이성): 다른 지역 문명과 구별되는 일련의 문명 구성 요소들을 공유
②시대성과 지역성: 시대적으로 장기간 존속해야 하고 지역적으로 한정된 국가나 민족의 범위를 벗어나서 비교적 넓은 지역에 유포
③생명력: 장기간에 걸쳐 지역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
⑵문명권 구분법
①2분법: 동양 문명권, 서양 문명권
②3분법: 유럽 문명권, 중근동 문명권, 한자 문명권
③5분법: 토인비가 제시한 21개의 성장문명 중 이미 사라진 14개의 사문명을 제외한 7개의 생존문명을 5개의 문명권, 즉 서유럽 문명권, 러시아 정교 문명권, 힌두 문명권, 이슬람 문명권, 동아시아 문명권
6) 이질문명
-문명교류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교류로서 ‘서로의 다름’이야말로 문명교류의 전제인 동시에 필수적인 요인
-인간은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종에 속하여 육체적 속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속성도 공유하지만 자연 환경이나 인문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문명을 창출
⑴동서양 문명의 특징
①서양문명: 절대적, 배타적, 원심적, 능동적, 외향적, 논리적, 분석적, 개인적
②동양문명: 상대적, 포괄적, 구심적, 수동적, 내향적, 직관적, 종합적, 관계적
⇒문명교류사 연구는 이질 문명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함
3. 문명교류
1) 문명교류의 개념
-문명은 자생성과 함께 모방성이란 고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생성이나 발달은 기필코 타문명과의 교류를 수반
-문명교류: 구성요소를 달리하는 문명 간의 상호 전파와 수용을 말함, 문명이 지니고 있는 근본 속성의 하나인 모방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진행되는데 그 구체적인 과정은 문명의 전파와 수용에 의해 실현, 이 속성 때문에 문명교류는 물리적 거리나 여러 가지 장애를 무릅쓰고 끊임없이 진행
2) 문명교류의 당위성
-문명은 모방이라는 근본 속성으로부터 산생되는 전파성과 수용성으로 인해 교류가 불가피함→물리적인 힘도 이 당위적인 문명교류를 막을 수 없으며 간혹 외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교류가 잠시 멈추게 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우연에 불과함
-문명교류는 문명의 또 다른 근본 속성인 자생으로부터 산생되는 개별성과 보편성에 의해 보장
⑴문명의 4대 특성
①문명의 보편성: 같은 환경이나 여건 하에서는 물론 때로는 다른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용과 형태에서 유사한 문명이 창조된다는 것을 뜻함
②문명의 개별성: 매개 문명이 자기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다른 문명과 구별된다는 것을 말함, 문명 간의 이질성을 조건 지어 주기 때문에 문명교류의 결정적 전제가 됨
③문명의 전파성: 창조된 문명은 물리적 거리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주위에 조만간 보급 확산된다는 것을 의미, 문명교류의 필수적 과정으로서 그 양태에 따라 교류상이 좌우됨,
④문명의 수용성: 전파된 문명이 피전파 문명에 합류․정착되는 것을 뜻함, 문명의 수용은 문명교류의 징표, 수용성 때문에 문명교류는 비로소 가능
⇒문명교류를 당위적인 것으로 만드는 4대 특성 중 보편성과 개별성은 문명교류의 객관적 필요성과 전제이나 전파성과 수용성은 그것을 현실화하는 실천적 요인
3) 문명교류의 전개 과정
⑴전파방법
①직접전파: 문명 간의 직접적인 통로나 수단, 매체에 의해 실현되는 전파로서 보다 신속하고 원형적인 문명 요소의 전파가 가능
②간접전파: 제 3자에 의한 전파이기 때문에 보다 완만하고 변형적인 문명 요소가 전파
ⓐ연파: 전파가 간단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짐, 문명의 자연적이고 광폭적인 확산
ⓑ점파: 연속성 없이 군데군데 점재되는 것, 우연적이고 소폭적인 확산
⇒문명접변현상
⑵수용방법
①순기능적 수용: 정상적인 전파 과정을 통하여 피전파 문명에 자연스럽게 적응되고 합류되는 것, 순기능적 수용에 의한 접변은 선진 문명의 창조라든가 전통 문명(피전파 문명)의 풍부화 등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선과를 초래
②역기능적 수용: 비정상적인 전파 과정을 통하여 피전파 문명에 강요됨, 피전파 문명의 해체나 퇴화 등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악과(惡果)를 낳음, 보통 이러한 악과로 나타나는 것이 두 문명의 접변으로 인해 피차가 아닌 제 3의 문명이 형성되는 융화와 일방적 흡수인 동화 현상
⇒전파에 의해 이동된 문명이 다른 문명 속에 합류, 정착되는 수용 과정은 어디까지나 선택적인 과정
Ⅱ. 동서교류사에서 유목민의 역할과 영향
1. 유목기마민족의 출현
1) 유목기마민족의 개념
-북방 유라시아의 지리대
①북극해에 면한 동토대(Tundra)
②이남의 침엽수림대(Taiga)
③북위 50도 부근의 초원지대(Steppe)
④북위 40도 부근의 사막지대(Oasis)
→초원지대와 사막지대는 대규모의 관개수리가 요구되어 자연 농경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계의 유일한 수단은 가축을 기르는 것
-유목민이란: 가축을 기르면서 풀을 찾아 주거지나 활동지를 이동하는 사람들을 통칭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유목은 광역적 이동 목축의 주요 행위이며, 성원 대다수가 주기적 목축 이동에 참여하는 특이한 형태의 식량 생산 경제
-유목기마민족이란: 기동력이 좋은 말이나 마구를 이용해 유목하는 사람들의 혈연 및 사회문화적 공동체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기마민족은 하나의 통칭으로서 그 구성원들은 시공간적으로 다양함 ex)스키타이, 사르마트족(Sarmat, 볼가 강 중류), 키메르족(Cimmer, 우크라이나에서 카프카스의 쿠반 강까지 지역), 사카족(Saka,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천산 지방, 이란계), 몽골 지대의 흉노와 정령 등
⇒1천여 년이라는 긴 세월과 광활한 지역이라는 상당한 정도의 시공간적 격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 유목기마민족은 높은 기동성과 활동성 용감성과 전투성 수용성과 순응성 등 일련의 민족 고유의 특징을 공유
2) 유목기마민족의 문화
☞높은 기동성으로 다른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하고 또한 다양한 교역으로 인해 농경권과의 접촉이 불가피함으로써 다원적인 문화를 창조 영위할 수 있었음
⑴대표적인 유목문화
①켈테미나르(Kelteminar) 문화: 서카자흐 초원에서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남
②텔세크 카라카이(Telsek-Karakai) 문화: 켈테미나르 이후 등장, 목축을 위주로 하고 농업은 부업
③다자바시크 야브 문화: 호레즘 지방에서 켈테미나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생, 밀을 재배, 양이나 말 소 따위의 가축 사육, 원시적인 야금술 이용, 호레즘은 오아시스이기 때문에 농경을 위주로 하고 목축을 부업으로 하는 복합 문화
④아파나세보 문화: 남러시아 오비 강으로부터 미누신스크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대 말 개화이후 1천년 정도 지속, 목축을 위주로 하고 농경을 부차로 했으며 수렵이나 어업의 흔적도 보이고 소나 말, 양, 돼지를 사육
⑤안드로노보 문화: 기원전 1700~1200년 서쪽으로는 우랄 강과 아랄 해, 동쪽으로는 미누신스크와 알타이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첫 청동기 문화로 발생, 이란계 인종, 목축을 주업으로 하고 농업을 부업, 상당한 정도의 농경 문화를 향유
⑥카라수크(Karasuk) 문화: 기원전 1200~700년 안드로노보 문화 이후 등장, 목주농부 문화, 양 위주의 목축업
⑦사카(Saka) 문화: 기원전 700~400년 시루 다리야(시루 강) 상류로부터 천산 중부와 알타이 산맥 이서 지역에서 꽃핀 금속 문화
3) 전투적인 기마민족으로 발전
-기마민족의 출현: 기원전 3000년경에 오리엔트 문명을 비롯한 주변 문명의 영향을 받고 농경민과의 문물 교역을 하면서 발전
-기마민족의 변화: 기원전 1000년경 평화적인 유목 생활을 버리고 전투적이고 기동력이 강한 기마민족으로 일변
※변화 요인
①근본적인 요인으로 문명 발달상의 불균형에서 오는 갈등
②기마 전술의 출현: 고삐, 재갈, 등자 등의 발명(역사적 사변)
4) 유목기마민족과 문명교류
⑴유목민의 문명교류의 특징
①혼성 문화: 기본 성격은 유지하면서도 주변의 농경문화나 도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질적인 문화 요소들을 거리낌 없이 수용, 이러한 수용은 생존을 위한 필수이고 법칙이기도 함 ex)호한문화(胡漢文化)
⇒혼성은 유목 문화의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들의 멸망과 유목 문화의 멸적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함
②불완정성: 유목민들은 자연 조건이나 생활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여 늘 유동적이기 때문에 일정한 권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통일적이고 집중적인 국가권력이나 사회 조직을 갖추기 어려움,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주변 농경민이나 도시민들로부터 생활필수품이나 무기를 얻어야 하는 의존성을 벋어날 수 없음
③후진성: 부단한 유동으로 인해 유목민들은 문자 등을 갖지 못함
⇒북방 유목기마민족들은 나름대로 문명을 창조하고 문명권을 형성하였지만 그들이 이루어놓은 문명권은 완결된 문명권이 아니라 준문명권으로 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주변문화’로 밀어내는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문명사관은 지양해야 함
⑵유목기마민족들이 수행한 문명교류의 특성
①교류 내용에서의 한계성: 지속성 결여
②강한 융화성: 유목 문화의 상대적 후진성이나 불완정성에 기인(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③중개역할
2. 스키타이와 문명교류
1) 스키타이의 흥망
⑴스키타이란
①좁은 의미: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흑해 북안의 초원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한 유목민
②넓은 의미: 스키타이가 강성해지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자 그 치하에 있던 유목민도 일괄해서 스키타이라고 지칭, 페르시아의 북동과 북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키르키스 초원, 천산 지방으로 이동한 이란계 유목민인 사카족도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
⑵스키타이 문화
①특징: 스키타이에 의해 창조된 유목기마민족 문화로서 동물의장을 위주로 한 금속(청동기와 귀금속) 문화
②발원지: 남유럽 카르파티아 산맥과 돈 강 사이의 드네프르 강 하류 유역, 초창기 농경민적 요소가 다분했으나 남하하여 다른 유목민족과 어울린 후 전형적인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창조
⑶스카타이 연구를 위한 사료
①최초 기록: 앗시리아의 에사르하돈(Esarhaddon,BC 681~669년 재위)왕의 연대기, “아슈구자이(Ashguzai 혹은 Ashkuzai)”라고 불림,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흑해 북안에 취락을 여러 개 형성하고 스키타이와의 교역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스키타이(Skythai)” 혹은 “스키테스(Skythes)”라고 부름, 스키타이들은 자신들을 “스코롤텐(Skoloten)” 혹은 “슈크(Shk)”라고 지칭
②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고분을 비롯한 이러한 스키타이 유물은 서쪽은 다뉴브 강에서부터 동쪽은 몽골에 이르기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분포, 유사성이 강한 유물들은 주로 마구류와 장식물, 청동제 화살과 철제 단검 등 무기류, 각종 금은제 장식품들
⇒스키타이는 문헌 기록을 남겨놓지 않아서 그들에 관한 연구는 앗시리아인과 그리스인들의 문헌 기록이나 그들의 분묘, 그리고 거주 지역 유물 조사에 의해서만 가능,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시대를 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Historiai)』와 후대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가 남긴 17권의 『지리서(Geographia)』
⑷스키타이의 인종 계통
①헤로도토스의 견해: 두 가지 전설을 전하는데 첫 번째는 시조가 타르기타오스(Targitaos)인데 아버지는 태양신 제우스이고 어머니는 보리스테네스 강(현 드네프르 강)을 낀 땅이라는 설과 두 번째는 그리스인들의 전설로 헤라클레스가 드네프르 강 연안 스텝 지대에 있는 울창한 삼림지인 힐라에아(Hylaea)에 거주하던 사녀와 동거하여 낳은 셋째 아들 스키테스(Scythes)가 스키타이 시조라는 설
⇒공통점은 스키타이 시조나 정착이 드네프르 강과 관련이 있음
②19세기 이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이란인의 한 계통으로 생각
⑸민족 기원
①남러시아로부터의 이동설: 헤로도토스에 의해 처음 제기, 유라시아 동쪽 어디에선가 중앙아시아 종족인 마싸게태(Massagetae)인들에게 쫓겨 흑해 북안으로 이주)
②유적을 추적한 결과 볼가 강 하류 크발린스카야(Khvalynskaya) 문화가 스키타이의 이동과 관련된 문화임이 확인(목곽분(Srubnaya) 문화)
⑹스키타이 역사
①강력한 세력 집단으로 역사 무대에 출현한 것은 기원전 7세기 전반: 흑해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흑해 북안의 원주지에서 쫓겨난 키메르인들은 남하하여 카프카스(코카서스)의 쿠반 강 유역에서 지반을 닦고 쿠르간(Kurgan) 문화를 가꾸다가 앗시리아 사라곤 2세 때부터 그 예하의 우라루투 왕국을 비롯한 소아시아 제국을 위협, 기원전 680년에 앗시리아와 혼인 동맹을 맺은 후 소아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단행하여 키메르인들을 소탕, 기원전 623~622년 바빌로니아와 메디아가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자 앗시리아를 도와 침공을 격퇴, 일부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다뉴브 강 하류에 있는 요지 도브루자를 점거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위협, 다른 집단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남부까지 진출
②기원전 6~5세기경에는 강력한 부족 연맹을 형성
③기원전 4세기 초 볼가강 중류에서 흥기한 유목민 사르마트(Sarmat) 족이 서진해 스키타이 요새를 점령하고 서쪽에서는 켈트 족이 공격해 옴으로써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일대로 밀려남
④기원전 3세기 중엽 사르마트 인들이 다시 돈 강을 넘어 오자 스키타이는 크리미아 반도로 도피
⑤네아폴리스(Neapolis, 현 Simferopol)를 수도로 하는 소국을 건설하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로 유지하다 기원전 1세기에 멸망
⇒스키타이는 한 번도 통일국가를 건립하지는 못한 채 부족 간의 특수한 유목민적인 동맹체제에 의해 권력을 유지, 주변 국가들과의 잦은 마찰은 스키타이가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
2) 스키타이의 사회와 문화
⑴스키타이 사회(헤로도토스 기록에 따른 내용)
☞스키타이 사회는 왕족 스키타이(돈 강 하류에서 쿠반 강 유역), 혼혈 스키타이(그레코스키타이, 드네프르 강 하류), 농경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중류), 유목(목축)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동쪽)의 4대 집단(부족군)으로 구성
☞왕족 스키타이가 지배 집단으로서 각지에 태수를 파견해 부족장을 통솔
☞왕족 스키타이와 유목 스키타이는 기마에 능하여 주변 그리스 식민지들과 활발하게 교역
☞군사적 색채를 강하게 띔(마구와 기마 전술용 무기 발달, ex)안장, 가죽 등자, 청동제 갑옷, 짧은 활, 방패, 특히 양인단검인 아키나케스(Akinakes)형 단검)
☞생존과 직결된 교역을 위해 그리스인들과는 우호적으로 공존하면서 그리스문화를 수용
⑵스키타이 문화
☞종교 의식: 토테미즘적이고 샤머니즘적, 신을 위한 신전이나 조상을 세우지 않음, 전쟁의 신은 각별한 의미, 장례의식(비교적 복잡하고 순장도 성행, 토광고총묘(土壙高塚墓))
☞특징: 미술공예의 발달(동물의장의 발달과 귀금속(주로 금)의 사용)
3) 스키타이에 의한 문명교류
☞페르시아 문화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고전 문화를 흡수․융화하여 고유의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창출한 다음 그것을 동방에 전함으로써 고대 문명교류의 한 장을 염
☞스키타이들의 동방 교역: 생산하거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이나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이나 중국과 몽골 일대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임
☞루트: 흑해(아조프 해)~돈 강~볼가 강 중류~우랄 산맥~이르티쉬 강~알타이 산맥 남록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동전상과 그들에 의한 문명교류의 일단을 고분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있음, ex) 기원전 4세기 파지리크 고분군(남러시아 알타이 지방 동부 울라간 시 북동 16킬로 지점에 위치, 대분 5기와 소분 20기로 구성, 1925년과 1947~49년에 걸쳐 소련의 고고학자 루덴코(S. I. Rudenko)에 의해 발굴 조사)
3. 흉노와 문명교류
1) 흉노의 기원
⑴흉노의 어원
⇒미상이기는 하지만 “흉”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으로 불렀다고 봄,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지칭했다는 것, 그러나 흉노가 스스로에 대해 비칭 사용하거나 이를 허용했을 가능성이 적으므로 ‘노’는 다른 뜻을 가진 글자로 구명되어야 할 것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생각됨
⑵종족적 연원
①기원전 6000년경 황제가 북쪽으로 쫓아냈다는 훈육이 바로 흉노의 시조로 봄
②흉노족이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상술한 선대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총체
③언어학적으로 볼 때 훈육과 험윤의 ‘훈(葷)’자와 ‘험(獫)’자는 ‘흉(匈)’자와 같은 어음의 다른 음사라고 주장, 전국시대와 진한 시대에 흉노를 지칭한 ‘호(胡)’자는 빨리 발음하면 ‘흉’자와 유사하므로 ‘호’는 ‘흉’에서 유래했다는 설
⑶종족적 구분
→흉노가 투르크(돌궐)족과 몽골족 사이에서 어느 쪽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지금은 투르크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출토된 인면상 유물과 종족의 발원지-흉노의 최초 출현지는 음산일대이지만 몽골족의 발원지는 망건하 상류 일대)
→흉노인들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투르크어족에 속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지만 흉노어나 그 밖의 종족들의 언어는 몽골어족과 투르크어족 그리고 퉁구스어족이 서로 혼합된 양상을 초래
2) 흉노의 흥망성쇠
①역사 무대에 처음 나타난 것은 전국 시대(BC 403~221) 말엽: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고 철제 무기로 무장한 흉노의 흥기는 중국 북부와 서북부의 여러 나라들을 크게 위협했는데 특히 흉노와 접경해 있는 진(秦)․조(趙)․연(燕) 3국은 그 위협을 절감해 장성을 쌓아 흉노를 방어하려 했으며 흉노의 풍속과 기마술을 수용하기도 함
②진나라의 통일(기원전 221년) 후: 장군 몽념으로 하여금 흉노를 토벌하게 하여 흉노를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대비책으로 만리장성을 축조
③진한변화기: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난 흉노는 혼란기를 틈타 전력을 가다듬은 다음 주변으로의 세력 확대를 꾀하면서 내부 정비와 더불어 발전의 전기를 맞이함, 흉노의 군주는 두만(Tu-man, 頭曼) 선우(=만인장의 천자), 태자 묵특(Mete)에 의해 몽골 고원의 여러 부족 국가들을 망라한 아시아 최초의 유목기마민족 국가가 건립
④한 건국 이후: 묵특은 기원전 201년에 대군을 이끌고 산서성 북부에서 장성을 넘어 태원을 향해 진격→흉노와 한 사이에 형제화약→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병합함으로써 서역과 스텝 지역의 거의 모든 부족들이 흉노에게 복속, 묵특의 후계 계육부터 흉노의 정세는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
⑤후한시기: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흉노가 한에 투항한 상황에서 북흉노와 후한은 계속해서 대립 관계, 두고와 두헌에 의한 흉노 정벌(91년 아타이 산에서 북흉노의 잔여 부대를 격멸)→북흉노의 잔여 세력은 선비족에 병합→서쪽으로 이동한 이들은 훈족으로 이어짐
※쇠퇴 요인
①후임인 군신 선우의 무능력
②제국 내의 내홍
③한제의 전격적인 정벌(한무제의 대흉노 정벌 정책):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
3) 흉노와 훈 및 훈 제국
-훈족: 3세기 말~4세기 초 아랄해와 카스피 해 부근에 홀연히 나타나서 선주민인 알란(Alan)족을 정복하고 375년에는 발리미르(Balamir, Balamber)의 인솔 하에 돈 강을 넘어 유럽에 침입, 5세기 중엽에는 헝가리를 거점으로 하여 제왕 아틸라(Attila)의 지휘 하에 유럽 대부분을 석권하고 민족 대이동을 유발
⇒일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북변에서 동쪽으로부터 이주하여 주변 투르크 종족들을 병합하여 공동체를 형성한 흉노(북흉노)가 약 200년 동안 주변국들과 큰 마찰 없이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유럽 방면으로 다시 서천한 것으로 추정
※서천에 관한 설
①생태계 변화로 거주지를 떠났다는 설
②350년 경 동쪽으로부터 이동해 온 또 다른 종족인 우아르 훈(Uar-Hun)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설
⑴흉노와 훈 사이 관계문제
☞훈족의 종족적 기원에 관해서는 아시아 흉노계, 몽골계, 투르크-몽골-만주 혼합계, 피노-우그리아계, 게르만계, 카프카스(코카서스)계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
⇒최근에는 아시아 흉노족의 후예로서 동족이란 견해가 우세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해서 처음 언급한 사람은 17세기 중국 청나라에 온 서방 예수회 선교사들
☞학술적 연구 결과를 처음 발표한 사람은 프랑스의 드 기네: 흉노․훈 동족론을 제시
⇒훈은 원래의 아시아 흉노 그대로가 아니라 흉노의 서천 과정에서 오손(烏孫)․강거(康居)․월지(月氏)․색(塞, Saka) 등 여러 곳의 잡다한 종족들이 정복․흡수된 하나의 혼합 유목민이지만 주체는 아시아 흉노라는 견해
⑵흉노․훈 동족론의 주요 논거
①흉노(Hiom-nou)와 후니(Hunni)의 음사상 유사성(드 기네)
②『위서(魏書)』의 기록와 로마 측 사료
③유럽의 고문헌 기록과 지도
④기원전 유럽인들은 동아시아의 흉노를 훈 혹은 후니로 알고 있었음
⑤『후한서』와 원굉(袁宏)의 『후한기』
⑥중국 5호16국 중 흉노 왕조인 전조와 접촉하면서 낙양에 거주한 속특 상인의 사신이 작성한 서간에서도 흉노를 훈(Xwn, Chwn)이라고 지칭
⑦언어의 친근성
⑶비동족론의 근거
①흉노는 패배한 이후 서천해서는 열반이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열반과 훈은 음사상 유사성이 없음, 역사적으로나 언어상으로 돌궐과 흉노는 투르크족이고 훈과 아바르족은 훈족
②기원전 200년경 기록에 나타난 훈족의 거주지는 카스피해, 당시 열반은 카자흐 초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민족 간에 친연관계가 없음
③훈어와 투르크어 사이에 친연 관계를 찾아볼 수 없음
④거주 환경을 비롯한 문화생활 내용이 상이
⑤훈은 우랄계의 우그르(Ugr)족이고 흉노는 알타이계 몽골족이므로 두 민족 간에는 친족 관계가 없음, 단 훈이라는 민족명은 흉노에서 연유 ⓑ당시 아시아 북부와 서역 지방에서 흥기한 많은 융적은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가 흉노의 후예를 자부하면서 그 족명을 차용하는 것이 다반사였음
⇒훈과 흉노의 역사를 한 맥락에 놓고 유럽 일원에서의 훈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유라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
⑷훈의 역사
①전기: 훈의 정복 활동 시기(374~422)
→374년 훈이 알란국을 공략하고 볼가 강 유역에 출현한 때부터 동정서벌하면서 많은 유럽 나라들과 민족들을 제압하여 유럽사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민족 대이동을 유발시키고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을 건립할 때까지의 약 48년 간
→훈의 지속적인 공격과 동․서고트인들의 서진은 주변 게르만 민족들의 안전도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규모의 서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듬: 민족 대이동의 서막
→훈은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것을 기회로 로마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
→총사령관이었던 울딘Uldin은 동로마를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
②후기: 훈제국의 건립과 멸망시기(422~468)
→422년 루아(Lua, Luga)의 등위를 계기로 제국의 통치체제가 정비되어 동․서로마를 제압하기 시작한 후 434년 아틸라의 등극으로 강력한 통일제국을 건립하여 유럽을 제압하다가 468년 2차 뎅기지크의 최후 수복 전까지 약 46년간의 시기에 해당
→아틸라를 정점으로 한 제국은 중앙집권적 체제의 모양새가 갖추어지고 부속민들도 정치적 통합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각자 고유의 언어와 풍습은 그래도 유지하고 종전처럼 여전히 동족의 부족장이나 총독,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
→아틸라 사후 훈제국은 내홍과 복속민들의 이반으로 인해 국력이 급속히 약화
4) 흉노의 사회와 문화
⑴흉노 사회
①경제: 가축을 주축으로 하는 목축 경제 이와 병행하여 부분적으로 농업이나 수렵도 존재, 도시가 건설되어 정주 생활을 영위한 흔적이 있으며 수공업도 흉노 사회의 발달과 국가 건설에 기여(청동 제품, 금은 세공, 도기, 목재가공업, 모직업과 피혁업)
②계급: 신분 계층에 따른 계급 분화가 명확하지 않은 반면에 사회 구성원들의 혈연과 지연 의식은 강함
③흉노 사회의 지배 구조: 핵심 지배 집단(왕족과 왕비족), 주도 집단(제국 건설에 참여한 투르크 및 비투르크계의 초기 부족), 종족 집단(복속민과 전쟁포로)
④정치나 사회 조직: 상호 견제적인 균형을 기하려는 이원화 제도를 채택
⑤군사 조직은 십진법에 따라 십, 백, 천 만 단위로 편성
⑵흉노의 문화
①예술은 주제나 기법에서 오랜 유목 생활과 수렵 생활을 사실적으로 반영
②신앙 체계: 천신 사상이 강함, 조상 숭배 관념(사자의 안장과 조상의 묘례를 중시),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 천지 신령의 화신으로 우상 숭배
③흉노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시기(BC 3세기)는 원시 씨족 사회로부터 노예제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로서 흉노 사회에는 씨족 사회의 유습이 적잖이 남아 있음(혼인 풍습-족외혼, 수계혼, 수혼, 지배층이 주변 국가와 정치적 종실혼인을 하는 것도 흉노 사회의 특출난 면)
5) 흉노와 문명교류
①‘호한’문화를 창출: 중국의 진․한 제국과 화전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농경문화를 수용하기도 하고 유목기마문화를 파급시키면서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
②그리스․로마 고전 문화를 비롯해 페르시아 문화, 스키타이 문화, 헬레니즘 문화 등 서구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기원을 전후한 약 700~800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 북방의 동서교류를 주도
③오르도스 청동기 문화: 동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출현과 발전에 촉매제 역할⇒북몽골 고원의 유목민족인 정령이나 남러시아의 스키타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
④흉노의 스키타이계 청동기 문화는 전국 시대에서 진한 시대를 거쳐 기원후 3~5세기에 흥기한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화북에 파급된 것은 물론 더 동전하여 중국 동북 지방이나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와 멀리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침
⇒흉노 예술은 모티브나 구도 기법에서 북방 스키타이계 문화와 남방 중국 문화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으나 그것을 조화․융합시켜 독자적인 호한 문화를 창조하고 다시 그것을 동서에 전파(옥구검, 한식궁, 한경, 한견, 흉노식 동복)
4.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와 한국
1) 한국 고대 유물에 나타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의 요소
☞북방계 문화 요소라고 하면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유목기마민족 문화요소와 샤머니즘적 문화요소가 있으나 한반도의 경우 북방계 문화요소 중 유목 기마민족 문화요소가 주종
※유물 형태에서 유사성을 가진 대표적 유물
①아테나식 동검: 동일의 할슈타트 문화에서 발생, 오르도스식 동검과 연관성이 있음
②호형(虎形)․마형(馬形) 대구(帶鉤)
③각배(角杯): 초원로를 통한 스키타이계 문물의 동점과 더불어 한반도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큼 ④수지녹각형(樹枝鹿角形) 관: 신라 금관의 조형은 샤먼 모자가 남아있는 시베리아 일대에서 찾을 가능성이 큼
⑤과대(銙帶): 유라시아 유목민 사이에 널리 유행,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 요소가 짙게 나타나고 있어 그 연관성을 시사
⑥토기류: 토제 등장인 다지등(多枝燈), 장군형 토기, 동물 형상의 중공형 토제 주기
⑦마구 장식: 심엽형 행엽과 운주
⑧적석목곽분
※문양적인 측면: 십자일광문, 사슴 문양, 우상문(羽狀文), 사격자문(斜格子文), 거치문(鋸齒文)
※기법적인 측면: 누금세공기법, 감옥기법
⇒한반도의 고대 유물에는 스키타이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비롯한 북방계 문화 요소가 상당히 혼입, 특히 4~5세기 신라 유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남
2) 기마민족 정복설
☞도교대 교수 에가미 나오미는 『일본민족의 기원』, 『일본에서의 민족 형성과 국가 기원』, 『기마민족국가』 등 논저에서 기마민족정복설을 주장
☞기마민족정복설: 대륙의 기마민족이 한반도에서 북구주로 진출했다가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다시 기내 대화를 정복해 통일 왕조인 대화 정권을 세운 후 강성하여 5세기 왜오왕 시대에 이르러 이 통일 정권이 한반도에 세력을 뻗어 소위 ‘왜한연합왕국’을 건립했다는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