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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1402064 정윤성
평소에 읽어 보고 싶었던 ‘행복의 건축’ 이라는 책을 이번에 과제를 통해 읽게 되었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1969년에 태어났고,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가족과 함께 런던에서 살면서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다독과 역사와 철학, 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그는, 깊은 통찰력과 풍부한 어휘력을 통해 일상의 풍경과 가치들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젊은 작가다. 작가는 자신이 20대에 가졌을 법한 감정과 열망, 경험들을〈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993〉,〈우리는 사랑일까. 199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1995〉이라는 소설들에 담아 20대 중반에 발표했다. 사랑과 연애를 통한 인간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들을 담은 이 소설들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러브닥터’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특히〈우리가 사랑일까〉는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건축의 의미를 믿을 때 그 전제는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 람도 달라진다는 관념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읽으면서 건축이 사람을 바 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건축을 통해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건축물을 지을 때에는 그 사용자를 생각해 용도, 목적 그리 고 사상을 넣어야 되고 또한 이 생각이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전해져야 된 다고 생각한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바우 하우스는 건축면의 한 면을 유리를 사용한 커튼월로 처리해 건축물 내에서 자신이
실내에 있는지 실외에 있는지 애매모호한 느낌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느낌은 그로
피우스가 건축물에 있으면서도 자연에 있는 듯한 느낌을 의도한 것이다. 이처럼 건
축가의 의도를 제3자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빈에서 누이를 위해서 집을 짓느라 3년간 학계를 떠났는데 처음에 생각보다 너무나 어렵고 힘든 집 짓는 일을 마치고 쓴 그의 저서<논리철학 논고>에 ‘철학이 어렵다고 하나 건축가각 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썼다 한다. 소제목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에서는 정말 기상천외하고 흥미로운 건물을 소개하고 있다. 1767년 영국의 뱅거자작과 부인 앤 블라이는 둘 다 건축에 일가견이 있으나 서로 건축관이 달라 두 사람 사이에서 건축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에 봉착했다. 결국 건축가 스트랭퍼드 로크는 기발하게도 3층 규모의 워드성의 전면은 남편의 취향에 맞춰서 고전주의 양식으로, 뒷면은 작은 뾰족탑이 달리 성곽풍의 고딕양식으로 설계하여 부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내부에서도 남편의 사용공간인 음악실, 층계참 등은 도리스식 벽과 기둥으로 고전적인 느낌으로 하고 부인이 사용하는 공간에 해당하는 부분들은 부챗살 장식이 들어간 둥근 천장과 뾰족한 아치모양의 벽난로를 두어 고딕 분위기로 꾸몄다. 알랭은 〈행복의 건축〉이란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집을 지어 2006년에 집들이를 시작했다. 하얀 선이 예쁘게 장식된 아크릴 덧문을 열고 자신이 꾸며 놓은 집안의 디테일한 장식들을 봐주기를 원하고 있다. 초록빛 잔디와 어울리는 목재 벽체를 한 현대적인 2층 주택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보여주는 일상 속의 남녀에 모습에 이끌리어 세계적인 대가의 초대에 최소한의 예복도 갖추지도 못한 어리 버리함을 앞세우며 낯선 집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이의 초대, 건축이라는 세계를 어찌 파악해야 하나 하는 염려가 작가가 그려놓은 일상의 관찰로 풀리려는 순간 이건축가 왜 이리 머리가 뛰어난 거야?로, 어휘력은 왜 이렇게 좋지? 전문 건축서가 가져올 읽기의 어려움과는 다른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그제야 작가의 이력을 확인하며 본인의 무식함에 부끄러움이 얼굴이 붉어졌다. 제목에서 섣부르게 짐작했던 단순한 웰빙 하우스 짓기의 전략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관찰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녹아 있는 철학서였다. 저자는 건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독특하면서도 힘겨운 요구가 필요하다 했고 우리 주변 환경에 영황을 받는다는 생각을 스스로 일깨우자. 건축은 아무리 성취도가 높아도 늘 작은 부분을 구성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하며 현 상태에 저항한다고 건축은 우리에게 행복은 종종 과시할 수 없는 , 영웅적이지 않은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넓게 펼쳐진 오래된 마루 널에서나 석고 벽에 밀려드는 아침빛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상상할 것을 요구했다. 장식은 건축물에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방법이다. 장식을 통해 건축물의 느낌을 바꿀 수 있고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스칸디나비아의 도자기 세트와 장식이 화려한 세브르의 자기 세트에서는 서로 구별
되는 성취 개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평범한 도자기 세트는 민주적이고 우아하
고 서민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장식이 우아한 자기 세트는 계급사회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장식 하나 만으로도 그 느낌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다. 르 꼬르뷔지에는
모든 장식을 혐오했다고 한다. 그의 건축물 빌라 사보아가 대표적인 예이다. 빌라
사보아는 어디를 찾아봐도 장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이런 심플한
것에 있어서 건축의 주관적 관념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도 그의 나름대로
장식대신 심플함으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의 생각이 이
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더니즘은 건축물을 심플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염두
에 두고 설계를 한 것이라 생각한다.“빌라 사보아는 실용적인 정신을 가진 기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술적 동기에서 나온 비실용적인 건물이다. 아무런 장식 없이 텅 빈 벽은 장인들이 스위스에서 수입한 값비싼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이 벽은 레이스처럼 섬세한 작품이며 반 종교개혁 교회의 보석으로 덮인 본당 회중석만큼이나 감정을 자아내는데 기여한다.” 인간의 심미안에 대한 통찰력으로 저자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 만한 내적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의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련한다.” 따라서 최초의 관객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우리가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속 좁은 연상의 밀물과 썰물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라는 의미 깊은 말을 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행복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시각적으로 보았을 때 심리 적으로 큰 안정을 누린다. 나를 예로 들자면 건축물에서 창문의 간격이나 기둥의 간격이 모두 일정한 것에서 안정을 느낀다. 강박증 때문에 이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언가 질서가 있고 규칙적인 것에 안정감을 느낀다. 또한 좁은 길 을 볼 때는 마음 한구석이 답답함을 느끼고 웅장한 성당 안이나 넓은 공간을 보면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이런 건축물의 장식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찾고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행복이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닌 근처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은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 되었을 때 각자가 갖는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에 따라 좋거나 나쁘거나 생활에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차이로 나타날 뿐이지 아름답다는 것의 절대적 표준이 있을 수 없다한다. 행복으로의 입성과 과시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의 어려움을, 집짓기의 어려움을 통해 밝히고 있다. 집짓기에는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합의도 혼돈도 있었고, 인간들의 수만큼이나 드러내려는 이상과 읽어내려는 것의 다양성을 때문에 정확한 자기인식을 통한 정체성확립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공간과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부른다는 부분은 보통의 〈행복의 건축〉책을 읽으며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집의 개념이 일치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행복의 건축’ 이라는 이 단어의 뜻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고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거고 내가 앞을 건축을 할 때 행복한 건축을 할려면 어떤 방향과 시점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고 깊은 감명과 새로운 점들을 알게 해준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