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최근 삼위일체 신학의 주요 동향들(1)-유장환교수님.hwp
2011년-2 유장환교수 현대삼위일체론연구
제 1장 최근 삼위일체 신학의 주요 동향들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회는 하나님이 한분이지만 또한 성부∙성자∙성령의 삼위로 계신 분이라고 고백해 왔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론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1) 우선 삼위일체론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신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철학적 일신론이나 이교적 다신론으로부터 구별된다.
2) 또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적 믿음의 총괄이며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를 그 회원 교회로 받아들임.
3) 더 나아가 삼위일체론은 대단히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원래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원 경험에 근거해 있다.
하지만 이런 신학적, 실제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론은 교회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누리지 못했다. 그 주된 이유는 삼위일체론이 신앙 공동체의 구원 경험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라 주로 한 하나님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추상적인 질문을 다루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런 오해는 4세기의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사이의 논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리우스 – 유사본질 homoiousios
아타나시우스 – 동일본질설 homoousios
니케아 공의회(325 AD) : 아버지와 같은 본질 (homoousion to patri)
니케아 공의회로 인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곧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면 과연 성부와 성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가운데 교회는 초기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소박한 신앙 고백에서 벗어나 점차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한 세련되고 때로는 무척 고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즉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묻게 됨에 따라 삼위일체 신학은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체험이란 원래적 맥락에서 벗어나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의 내적 관계를 묻는 추상적인 탐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별히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의 중세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거의 단절되어 철저히 하나님의 내적 비밀에 대한 사변적인 탐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오해는 근대와 현대 신학에서 계속되었으니 이 시기 동안 삼위일체론은 그저 하나님 안의 신비를 다루는 무의미한 사변이거나 신앙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부수적 교리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극복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0년대부터는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삼위일체 신학의 특징
1) 구원 경험에 대한 신학적 진술로서의 삼위일체론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내적신비에 대한 탐구가 아닌 삼위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교회의 진술로 이해한다. 즉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이 교리가 원래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교회의 체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땅히 구원 역사와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월터 카스퍼(Walter Kasper)는 삼위일체 고백의 자리가 가장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신앙 고백의 자리인 세례식 및 성찬식이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 교리를 구원 경험과의 연관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역시 이 교리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실제적 사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의 요약판”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을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구원 체험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성찰로 보도록 한 공헌은 현대의 탁월한 두 신학자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게 돌릴 수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은 역사 속의 한 구체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교회의 교리적 표현이라고 한다.
라너는 바르트가 강조한 삼위일체 신학에서의 구원론적 맥락의 중요성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더욱 철저화한다. 그에게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이른 구원의 신비에서 진실로 알려지며 따라서 삼위일체론 역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현대의 삼위일체 신학자들 대부분은 바르트와 라너의 이런 주장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오늘날의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일체론을 하나님 안의 내적 신비에 대한 탐구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성찰 및 그 연구로 이해하고 있다.
2) 실천적이며 해방적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특징은 이 교리를 대단히 실천적이며 해방적인 교리로 이해하는데 있다. 가령 위르겐 몰트만,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다니엘 미글리오리(Daniel Migliore) 등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및 생태계 보존을 위한 신학적 원리를 찾으며 엘리자베스 존슨(Elizabeth Johnson)이나 케서린 라쿠냐 같은 여성 신학자는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의 해방과 인간성 회복의 근거를 발견하고 레이몬드 파니카(Reimond Panikkar), 개빈 드 코스타(Gavin D’Costa) 등은 이 교리에서 다른 종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1)자유와 평등의 공동체 건립의 신학적 근거로서의 상위일체론 :
위르겐 몰트만, 레오나르도 보프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이야말로 철저하게 자유와 평등의 교리라고 한다. 이는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온전한 사랑과 사귐 안에서 자유와 평등으로 하나 되어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남미의 해방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역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사귐과 일치에서 진정한 인간 해방과 평등을 위한 신학적 원리를 찾는다. 그는 하나님 본질상 온전한 평등과 자유의 사귄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로 존재하시며, 이 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진정으로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등이 실현 되는 공동체적 삶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교리에서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등의 사회 공동체의 원리를 찾고자 한다.
(2)여성해방의 신학적 근거로서의 삼위일체론
어떤 신학자들, 특히 일부 여성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에서 여성해방의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미국의 여성 삼위일체론자인 캐서린 라쿠냐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내적인 신비에 대한 탐구 아닌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성찰이며 이 점에서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교리라고 본다.
철저히 구원사 안에서 이해된 삼위 하나님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라쿠냐는 이때의 하나님은 철저히 삼위 사이의 사랑과 상호침투, 자유, 평등으로 특징 지어지는 공동체이며 이런 하나님은 모든 인간관계, 특히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진정으로 사랑과 자유에 기반을 둔 평등한 관계기 되기를 원하신다고 본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것은 곧 남성의 여성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며 억압과 성 차별이 사라진 세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3)생태계 회복의 신학적 근거로서의 삼위일체론 : 위르겐 몰트만, 셀리 멕페그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에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 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
1. 위르겐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에서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의 신학적 원리를 찾은 다음 그것을 생태계의 영역에까지 확장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생태계 파괴의 주요한 한 원인은 하나님을 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 주체자로 보는 데 있다. 즉 신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창조 세계는 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인간이 정복하고 이용해도 되는 물질 덩어리로 이해되었고 이로 인해 무자비한 약탈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생태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어떠한 신 이해가 생태계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여기에서 몰트만은 하나님이 절대적 초월자 혹은 절대적 권력자가 아닌 철저한 사랑으로 특징되는 내재의 신으로 이해될 때 생태계 회복을 위한 신학적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신이 정녕 이 세상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신다고 믿을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소모품이 아닌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집이 된다.
특히 하나님이 하늘 위의 ‘단일자’가 아니라 사랑과 평등으로 특징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사귐 속에 존재하신다면 하나님과 창조 세계와의 관계, 또 창조 세계에 속한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의 관계도 지배와 복종이 아닌 이런 사랑과 상호 존중의 관계로 이해 될 수 있다. 따라서 몰트만에 의하면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사회 혹은 공동체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이해는 생태계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 원리가 된다.
2. 삼위일체론에서 생태계의 위기 극복을 위한 신학적 원리를 찾으려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시도로 미국의 여성신학자 셀리 멕페그의 신학을 들수 있다. 셀리 멕페그에 따르면 20세기 신학은 크게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변화해 왔다.
첫째 단계는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루돌프 불트만, 파울 틸리히 들의 거장들이 활동한 20세기 중반까지의 신학으로 주로 이성과 계시 및 신앙과 역사의 관계 그리고 신학 방법론 특히 신 인식의 방법에 관한 질문을 중심으로 한 시기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0세기 신학의 두 번째 단계는 1960년대의 해방 신학들의 등장과 함께 찾아왔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하지만 멕페그는 20세기 신학의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신학의 세 번째 단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 새로운 신학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체적 현실이 된 핵전쟁의 위험과 지구 전체를 ‘느린 죽음’(slow death)으로 몰고 가는 생태계 파괴 앞에서 어떻게 하나뿐인 지구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낼 것인가?
20세기 신학의 세 번째 단계인 생태계 신학 또는 생명 신학은 인간의 해방을 지향해 온 해방 신학이 그 해방의 범위를 자연계 전체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핵전쟁과 생태계 파괴 앞에서 ‘어떻게 인간과 온 자연 세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핵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총체적 멸망은 이제 분명한 가능성이 되어 인류는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멕페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신학이 물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핵전쟁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지구적인 멸망을 피할 수 있는가? 즉 우리 시대에 정말 절실하며 또 신뢰할 수 있는 신학은 핵전쟁과 생태계 위기에 책임 있게 반응함으로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 주는 신학이며 그 이외의 다른 신학적 논의는 모두 이차원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럼 어떤 신학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첫째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이 서로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신학,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명을 보존할 권한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이다.
둘째, 이 신학은 신학적 진술이 가져오는 사회적, 생태계적 결과에 우선적 관심을 가지는 신학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신학의 가치를 생명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이는가 하는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
셋째, 이 신학은 신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전개되는 신학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신학자들의 끊임없는 대회와 상호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작업이어야 한다.
넷째,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전쟁을 옹호하며 생명을 말살하는 국가주의, 군사주의, 무제한의 경제 성장, 소비주의, 생태계의 파괴와 같은 폭력주의에 저항하며 다 함께 살아감을 강조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특별히 멕페그는 생태계 회복과 생명 보전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녀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왕, 지배자, 군주, 주인 그리고 아버지란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신 이해는 정복주의적이며 전투적, 호전적이어서 지배와 복종, 명령과 예속의 구조를 정당화하고 결국 다툼과 전쟁을 이끌어 지구 위의 생명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데 더 적절한 하나님 이해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왕, 아버지, 군주, 지배자 하닌 어머니, 연인, 친구로 보며 또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는 신학을 주장한다. 그녀는 하나님을 천상의 절대 군주나 왕 혹은 아버지로 이해하던 종래의 신 이해를 과감히 포기하고 지구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며 하나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의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신 이해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종교 간의 만남을 위한 기독교적 원리로서의 삼위일체론
최근 삼위일체론자들 중에는 삼위일체론에서 다른 종교와 만나고 대화하는 신학적 원리를 찾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최근의 신학은 종교 신학의 형성이란 과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그중 어떤 이들은 가장 포괄적인 기독교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에서 다른 종교를 만나고 대화하는 기독교적, 신학적 원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진 신학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인도 출신의 기독교 사상가 레이몬드 파니카(Reimond Panikkar)이다. 그는 세계 종교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이상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삼위일체적 구조 안에서 세계 종교들은 서로 만나서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삼위일체론은 “모든 세계 종교들의 진정한 영적 측면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거장이다.” 라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그 자신이 자라난 힌두교와 기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성(Triad)에서 두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신학적 원리를 찾는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니니안스마트(Ninian Smart)와 스티븐 콘스탄틴(Steven Constantin)역시 삼위일체론에서 세계 종교 사이의 만남과 대화의 가능성을 찾는다. 즉 이들은 하나의 교리적 형태로 나타나기 이전의 신 체험에 있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체험과 힌두교의 신 체험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음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은 그 내재적 본질에서의 브라만(Brahman)의 삼중성(threefoldness)과 상응한다고 본다.
3) 유신론(Theism)과 무신론(Atheism)의 극복으로서의 삼위일체론
최근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전통적 유신론을 논박하고 이와 연관된 무신론까지 이론적으로 극복하려는 데 있다. 대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며 마침내 그것을 최후의 구속으로 이끄는 절대적이며 인격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특별히 중세 말기 이후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피조물과 대립되는 분으로서 무한하며 자존하며 비육체적이며 영원하며 그 무엇에도 영향 받지 않고 고난당하지도 않으며 완전하며 전지전능한 이, 곧 유신론적인 존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신론적 신 이해는 오늘날 여러 방면에서 아주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이런 신 이해는 철학적인 신 이해이지 결코 성서의 신 이해가 아니며 결코 진정한 기독교적 신 이해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이런 신 이해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할 지배적, 가부장적, 여성 억압적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더 나아가 이런 이해는 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누르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인본주의적 무신론의 도전을 초래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전통적 유신론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있으며 특히 성서의 증언에 충실한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 유신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곧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철학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유신론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신론에 반대해서 나온 근대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면서 유신론과 무신론을 다 같이 극복하는 기독교적 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려고 한다.
삼위일체론을 통해 전통적 유신론과 인본주의적 무신론을 다 함께 극복하면서 좀더 성서적, 기독교적인 신 이해를 찾아보려 했던 선구적 신학자는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독교적 신 이해는 철두철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하며 이 같은 신 이해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이해된 삼위일체론은 철학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전통적 유신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또한 바로 이 점에서 전통적 유신론에 대한 거부로 발생한 근대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을 극복하면서 성서적이며 또 우리 시대에 적절한 신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4) 관계(Relationship) 속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
서방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하나의 궁극적 신적 실체(one divine substance) 혹은 하나님의 궁극적 본질(one divine essence)로 이해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즉 이 전통은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하나의 궁극적 실재나 본질로 이해한 다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이 어떻게 이 하나의 온전한 신성에 참여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이 같은 이해가 성서의 증언 및 교회의 삼위일체 하나님 체험이 아닌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실체성(substantiality)이 아니라 관계성(relationality) 혹은 상호성(mutuality)의 범주를 사용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즉 오늘날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관계적 존재, 곧 자기 자신 및 그 만드신 세계와의 관계 안에 존재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특별히 현대 삼위일체 신학은 동방 교회의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들의 통찰인 성서는 하나님을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같이 이루어 가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의 관계성으로 존재하며 또한 관계적 존재로서 당연히 이 세계와 관계 맺으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즉, 현대 삼위일체론의 큰 특징은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상호간의 관계 속에 잇는 세 구별된 인격들로 파악함으로써 실체 개념이 아닌 관계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는 데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삼위일체론자들은 이런 이해가 보다 성서적인 신 이해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성서의 근본적 증언과 잘 부합된다고 보아 이런 이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5)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영향력 증대
전통적으로 서방 기독교회는 하나님 안의 삼위성과 일체성 혹은 복수성과 단일성 사이의 관계를 주로 심리적(psychological) 혹은 인간 내면적(inter-personal) 유비를 통해 설명해 왔다. 즉 이 전통에서 삼위일체론은 주로 인간의 정신 구조의 특성과의 유비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 왔으니 그 주된 관심사는 신이 한 분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삼신론(tritheism)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이 전통은 삼위의 완전한 독립성과 구별을 설명하기 어려운 약점으로 인해 언제나 양태론(modalism)적 위험을 갖고 있었다.
반면 동방 교회는 사회적(social) 혹은 인격 관계적(inter-personal) 유비를 주로 사용했다. 가령 동방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체계화한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서로 독립되고 구별된 세 인격 사이의 관계로 이해했다. 바질과 니사의 그레고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인격이란 것은 베드로, 바울, 바나바가 서로 다른 인격들인 것과 같다고 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온전히 서로 구별된 개체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양태론의 위험은 넘어서지만 삼위의 통일성을 성부 하나님에게서 찾음으로 인해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예속되는 종속론(subordinationism)적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전통 중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서방 교회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이었으며 이로 인해 신 안의 통일성은 삼위성을 압도하여 하나님은 세 분이기 이전에 이미 한 분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 삼위일체론은 이런 전통을 의심하고 비판했다. 현대의 삼위일체론자들에 따르면 서방 교회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안의 삼위성 혹은 복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너무 철학적이며 사변적이어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 맺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삼위성을 먼저 강조했던 동방 교회 전통을 더 중요시하여 그것에서 배우고자 하며 때로는 그 전통을 철저히 재해석해서 더욱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삼위의 통일성을 성부에게서 찾음으로 종속론의 위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주목하면서 세 인격 사이의 더욱 철저한 독립성과 구별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곧 오늘날의 본격적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을 서로 완전히 독립되고 구별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이루는 공동체(community) 내지 사회(society)로 이해하며 이들 사이의 일치 내지 연합을 성부 아닌 세 신적 인격 사이의 통교적 연합(perichoretic union)에서 찾는다. 오늘날 현대 삼위일체 논의의 중심에는 이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이 서 있으니 이들은 하나님 안의 삼위성과 일체성의 관계, 삼위일체론에서의 인격(person) 용어의 사용, 또 이 교리의 구체적, 실제적 의미와 같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새로운 답변들을 제시하고 있다. 정녕 최근 삼위일체 신학의 큰 특징은 교회사를 통해 주도적이었던 심리학적, 인격 내재적 모형(psychological intra-perconal model)은 점점 뒷면으로 물러나고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데 있다.
6)삼위일체론과 성 문제(The Trinity and Gender Issue)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논쟁 하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정식인 ‘성부, 성자, 성령’이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가령 예언자적인 여성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고 가부장 제도를 영속화시킨다고 보면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거부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좀 더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엘리자베스 존슨 같은 여성 신학자는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으나 남성우월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관한 다른 성 평등적 혹은 비(非) 성적인 은유를 함께 써야 한다고 말한다.
곧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중요한 질문 하나는 전통적 삼위일체 정식인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이 정녕 성 차별적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다섯 가지의 대답이 있다.
첫 번째,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뿌리박고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본래적 이름(proper name)이라고 본다. 또한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삼위일체 정식은 그 원 의도에 있어서 결코 하나님을 인간 세상의 남성과 같은 존재로 이해하지 않으며 특히 성 차별과 관계가 없다고 보아서 이 정식은 결코 거부되거나 바뀔 수 없고 지금 모습 그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극단적인 여성 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향으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을 구제 불가능한 가부장적이며 억압적 유산으로 보아 완전히 거부하고 대신 고대 세계의 여신 표상(the images of goddess)으로 대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가부장적인 기독교의 신을 벗어 버리고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신비를 충분히 긍정하고 축하하는 여신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답변은 이 정식이 성 차별적이며 억압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서 신에 관한 표상들 속의 성 균형을 유지해 보려고 한다. 가령 하나님에게 여성적 특징들을 귀속시킨다든지, 삼위 중 한 인격을 여성적 존재로 이해한다든지, 하나님을 동시에 남성적 상징과 여성적 상직으로 표현한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삼위성 아닌 사위성(Quaternity)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네 번째 반응은 아예 신에 대한 남성과 여성적 상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을 자연 속의 은유들, 가령 산성, 바위 등의 표현이나 거룩한 신비(칼 라너), 미래의 능력(판넨베르크) 같은 추상적 표현으로 서술함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정식이 여성 억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직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2. 최근 삼위일체 신학 : 평가와 전망
첫째,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이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 안의 신비적, 밀교적 비밀에 대한 탐구 아닌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신학적 진술로서 기독교인의 삶과 바로 연결된 구체적 교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역사 내재성의 관계, 곧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역사 속의 행위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더 깊이 다루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역사 속의 행위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하나님은 그 행위에 매이게 되며 결국 신의 다르게 될 수 있는 자유, 곧 신적 주체성과 초월성은 훼손되어 버린다. 반면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분리되어 따로 있는 숨어 있는 신(deus absconditus)을 말할 위험성에 빠지게 된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라는 용어를 통해 하나님 안의 이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이해하고자 했으나 그 강조점은 역시 신의 초월적 주권성에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 내재성 혹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의 구원 역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진술로 이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 내재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모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초월성과 관계성, 영원성과 시간성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만족스러울 만큼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의 주요 과제 하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교회 공동체의 구원 경험 안에서 이해하면서도 이렇게 이해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초월적인 주권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데 있다.
둘째, 우리는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이 이 교리에서 기독교적인 정치 사회적, 생태계적 삶의 방식의 근거 및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함을 지적했다. 곧 오늘날 삼위일체론은 개인의 개체성과 공동체성을 다 같이 존중하며 그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신학적 기초로서, 인간 해방 및 건강한 생태계 회복의 신학적 근거로서, 또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위한 기독교적 원리로서 큰 관심 속에서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인간 구원 및 세계 변혁에 대한 직접적이며 일차적 서사는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참으로 본래적인 것은 삼위일체론이기보다는 성령과 믿음의 사람이었던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그리고 가르침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과 세계 변혁의 사역이다. 삼위일체론은 직접적이며 일차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개념화하고 조직화한 이차적 상징(second-order symbol)인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그것 자체로서는 개인과 사회, 생태계의 변혁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론보다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그 품고 있는 의미 때문에 더욱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기독교적 사회 및 생태계 윤리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점에서 기독교적인 삶의 원리를 삼위일체론에서만 찾아내려는 시도는 다소의 무리가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셋째,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삼위일체 신학이 하나님을 실체(substance)나 본질(nature)이 아닌 관계성(relationship)이나 상호성(mutuality)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과 잘 부합된다. 성서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며 관계 속의 하나님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기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분으로 실체 혹은 본질과 같은 정태적 형이상학의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둘째로 하나님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는 현대의 삼위일체론은 세계를 하나의 관계의 그물망이나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적인 세계 이해와 잘 부합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탈근대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유기적이며 전일적(全一的, holistic)인 것, 곧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역동적인 전체로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신을 실체나 본질과 같은 전통적인 정태적 존재론의 용어보다는 궁극적 관계로 또 이 세상의 모든 관계를 가능케 하는 관계의 궁극적 가능성이나 원천으로 이해하는 최근의 삼위일체 신론이 더 설득력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과 세계를 관계의 망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온 우리 한국 정신에서는 하나님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는 최근의 삼위일체론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앞에서 우리는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의 큰 특징 하나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영향력이 증대된 것을 들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영향력 증대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우선 긍정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성장은 우리들로 하여금 좀더 균형 잡힌 형태로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곧 서방의 삼위일체 전통을 주도해 왔던 심리적 삼위일체론이 세 신적 인격의 통일성은 잘 설명하지만 그들 사이의 상호 구별성과 평등성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는 데 비해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를 비교적 쉽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강점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삼위 사이의 일치 내지 하나 됨, 곧 통일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약점이 있다. 비록 일부의 학자들의 비판처럼 오늘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바로 삼신론(tritheism)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런 위험이 완전히 극복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삼위일체론 자체만으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해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심리적 삼위일체론과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될 때 하나님의 신비를 잘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앞으로 꽤 오랫동안 심리적 삼위일체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그 성격상 우리 시대의 큰 과제인 인간 및 창조 세계에서의 진정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적절한 신학적 원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신 이해와 우리의 세계 이해 사이에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 폴 틸리히의 말처럼 신이란 우리가 궁극적인 것에 붙이는 이름이라면 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치, 사회적 현실을 포함한 우리의 현실 이해가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서로 독립된 세 인격 사이의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다른 신 이해에 비해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공동체의 형성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다. 즉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을 관계적 존재로, 곧 사랑과 상호 존중의 공동체로 보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이 땅에서도 사랑과 상호 존중의 공동체로 보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이 땅에서도 사랑과 상호 존중에 근거한 인간 및 창조 세계의 공동체를 형성시킬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참된 공동체에 대한 갈망으로 특징 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로 진입해 가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근대의 기계 문명 속의 개인주의, 소비주의, 인간 소외 등의 폐해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공공의 선(common good)을 함께 일구어 갈 진정한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는 이 때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연결되어 함께 사용될 때 이런 시대의 요구에 적실한 신학적 원리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계속해서 교회 및 기독교 사회 윤리의 중요한 하나의 신학적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