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1. 바르트와 라너-길현신.hwp
제 2 장
구원 역사의 진술로서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구원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학번: 4092008, 길현신
▣ 들어가는 말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론은 알기 어렵고 알아도 실제적 가치가 없는 ‘하나님 내면의 깊은 신비’를 다루는 사변적 교리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삼위일체론을 하나님 내면에 대한 신비적 탐구 아닌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독교회의 신학적 해명으로 이해한다. 곧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이 교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서술이며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가깝고 실제적인 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의 큰 특징은 바로 이 교리의 구원사와의 연관성 및 그 구체적이며 실제적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예: 신약성서, 동방교회)
1. 바르트와 라너:
삼위일체를 구원사의 맥락에서 본 선구자들
현대 신학자 중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내적 본질에 대한 탐구 아닌 하나님의 구원사의 요약으로 이해함으로 이 교리의 구원론적 연관성을 회복하는 데 크게 공헌한 두 신학자는 개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칼 라너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오직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를 통해서 적절하게 이해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구원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칼 라너는 바르트가 강조한 삼위일체 신학에서의 구원사의 중요성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철저화한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성육신, 은혜, 그리고 창조 같은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동떨어져서 취급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의 구체적인 생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교리가 되어 버렸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저 유일신론자(monotheists)에 불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라너는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내면의 비밀에 대한 추상적 논의가 아닌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인의 구원 경험의 표현으로 봄으로 이 교리를 기독교인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시키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 구원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구원의 신비를 떠나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이른 구원사 안에서 진실로 알려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탐구로서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정녕 “삼위일체론과 구원 경륜의 교리 사이를 구별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라너의 이런 주장 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자기 전달(grace as God's self-communication)이라는 독특한 은혜 이해가 깔려 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곧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로 그냥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알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다름 아닌 영원한 신비 속에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과 동일하다. 우리가 구원의 경험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이나 하나님의 한 부분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로 하나님이며 하나님 자신, 곧 “내재적 삼위일체의 단순한 복사나 유비가 아니라 바로 이 삼위일체 그 자체이다.” 즉 구원의 경험 속에서 만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체로 바로 영원부터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다.
“피조물에게 은혜로 주어지는(하나님의 자기)전달은, 만약 그것이 자유 안에서 발생하면, 아버지에 의해 아들과 성령에게 주어지는 신적 본질의 이중적 전달이라는 신 안의 양태로 발생한다.” 따라서 라너에게서 삼위일체론은 기본적으로 아들과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이 땅에서의 성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서술이다.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라너는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과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 의하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 오히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철저히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 행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또 그것에 대한 진술이 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부터 이해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라너의 명제는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라너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의 뒤를 잇는 삼위일체론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만약 라너의 말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동일하다면 곧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는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시적 행위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그때의 하나님은 역사 속의 창조 및 구속 행위와 완전히 동일하게 되고 그 피조물에 대해 다르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자유는 상실된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동일하나 내재적 삼위일체가 바로 경륜적 삼위일체와 동일하지는 않다. 즉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내재적 삼위일체)은 역사 안의 신적인 자기표현으로서의 하나님(경륜적 삼위일체)과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역사 속의 행위보다 크며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분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주된 관심: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 확보/ 대표: 바르트, 융엘)
반면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을 철저히 그 역사 안의 행위에 의해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가운데 이미 선재하고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를 거부하며 이를 하나의 개념 정도로 간주하거나 경륜적 삼위일체의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주된 관심: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역사 내재성 확보 / 대표: 몰트만, 판넨베르크, 라쿠냐, 피터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