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3) 캐서린 라쿠냐, 테드 피터스-이효정.hwp
제 2 장
구원 역사의 진술로서의 삼위일체론
4102082 이효정
3) 캐서린 라쿠냐, 테드 피터스
삼위일체론의 자리를 철저히 역사 속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찾는 가운데 경륜적 삼위일체와 분리된 선재적인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를 거부하는 주장은 미국의 여성 신학자 라쿠냐와 테드 피터스에게도 나타난다. 라쿠냐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비밀스러운 교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삶 및 우리 각자의 삶에 관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기본적으로 우리와 관계 맺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이 같은 전제 밑에서 라쿠냐는 삼위일체 교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의 행위에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녀에게서 이 교리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삶에 대한 설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실재, 곧 신-인의 교제의 신비뿐이기 때문에 구태여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분하고 나눌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정말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역사와 인격 안에서 구원의 역사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단 하나의 세계 경륜뿐이다. 즉 그녀에게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어떤 존재론적 차이가 아닌 개념적 차이만 있다. 따라서 그녀는 오해되기 쉬운 ‘경륜적 삼위일체’나 ‘내재적 삼위일체’란 말 대신 오이코노미아(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와 테올로기아(하나님의 영원한 신비)를 쓰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녀에게서 오이코노미아는 삼위일체가 역사 속에서 밖으로(ad extra) 펼쳐진 것이 아니라 창조에서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론적 완성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그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의 사랑과 교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총체적 구원 행위를 뜻하며 테올로기아는 삼위일체 그 자체(Trinity in se)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뜻한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학은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내적 존재 구조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구원 경륜의 내적 구조, 곧 구원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구조나 패턴을 뜻한다.
테드 피터스는 라쿠냐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와 어느 정도 이상 분리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삼위일체론은 그 원래 성격상 철두철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설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피터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원(identity)은 역사의 과정에 의해 결정되며 마침내 그 종말에 최종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의 신학에 독특성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영원성을 하나님의 일시성(혹은 역사성)과 연관시키는 방식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주된 대화의 상대자는 현대 물리학이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회는 플라톤적인 사고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영원을 주로 무시간성(timelessness)으로 이해해 왔으며 이런 이해에서 하나님의 영원과 피조 세계의 유한 혹은 일시성은 상호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해는 결국 내재적 삼위일체를 시간 및 인간의 구원 역사와 관계없는 무시간적인 신적 존재로 이해하게 했으며 결국 삼위일체의 추상화, 비현실화를 초래했다. 따라서 피터스는 현대 물리학으로 시선을 돌려 거기에서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들리는 영원과 시간 이해를 찾으려고 한다. 1)시간은 인간의 의식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 세계의 실제적 기본 구성 요소의 외적으로 존재한다. 2)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다. 그것은 속도와 중력의 영향을 받아 바뀔 수 있다. 3)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 4)시간은 시작이 있었고 언젠가 끝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이런 발견들에 근거해서 이제 피터스는 영원을 모든 유한하고 일시적인 전이(passage)를 포괄하는 시간의 총체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피터스는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적용시킨다. 만약 영원이 시간적 독자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장이며 그 완성이라면 이는 곧 내재적 삼위일체도 경륜적 삼위일체와 독립적으로 있지 않고 오히려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장이며 그 완성으로 이해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다름 아닌 경륜적 삼위일체, 곧 하나님의 이 세상과의 사귐의 역사의 최종적 완성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의 삼위일체만 있다고 주장한다. “오직 한 삼위일체만 있으며 …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구원 경륜의 역사(history)에서 경험하는 삼위일체이다.
살펴본 것처럼 라쿠냐와 피터스는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역사속의 하나님의 행위와 독립되어 있는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런 주장의 강점은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란 것을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다는데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행위를 바로 하나님 존재 자체로 이해하는 가운데 신적인 초월성과 자유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가령 라쿠냐는 하나님 안에는 역사와 관계 되지 않은 어떤 “내적 삶”이 없다고 은연중에 주장한다. 그녀에게서 세계와 관계없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논의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논리적으로 볼 때 만약 창조 세계나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구속의 경험이 없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 역시 없었을 것이라는 극단적 주장에서 결코 멀지 않다. 피터스 역시 하나님은 철저히 역사 안에서만 존재하는 하나님이며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하나님이다. 결국 라쿠냐와 피터스의 경우 하나님의 역사 내재성이 너무 강조되는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유가 소홀히 취급되어 버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전통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의 내적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해되었으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구원 행위와 사실상 독립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신학은 그 원래의 구원론적 맥락에서 분리되어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삼위 사이의 관계를 묻는 추상적이며 난삽하고 또 비실제적인 교리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어떤 식으로든 역사 속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 곧 경륜적 삼위일체와 유기적 연결을 맺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성격 및 경륜적 삼위일체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구별된 그 자체로 선재한 내재적 삼위일체를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자체와 그 역사 속에서의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하나님의 이 자유가 어떻게 하나님의 철저한 역사성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라쿠냐, 피터스 등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독립된 선재한 내재적 삼위일체 자체를 사실상 부인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철저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진술로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역사와의 관계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의 종말론적 완성의 모습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주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철저히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서 찾고 있다는 강점이 있으나 반면 역사를 심판하고 극복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충분히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최근의 삼위일체 신학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그저 무시간적, 초시간적, 정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역사와 연관해서 이해하고자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최근 삼위일체 신학 역시 구체적인 삶과 연관된 ‘땅의 신학’을 추구하는 최근 신학의 주된 특징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