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구원 역사의 진술로서의 삼위일체론-조승희.hwp
2) 에버하르드 융엘
내재적 삼위일체의 선재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 부분적 일치만이 있다고 보는 신학자는 융엘이다. 바르트에 영향을 받은 융엘은 내제적 삼위일체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융엘에 의하면 내제적 삼위일체가 먼저 강조될 때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가 ‘우선적’이 될 때에만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역사 속의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자유로운 표현이 된다.
하지만 융엘은 또한 하나님은 영원부터 성자의 ‘직분’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기꺼이 선택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복락 안에서 인간이나 세계 없이도 하나님으로 계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없는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선택 하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에는 인간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삼위일체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영원한 자기 결단은 아들의 역사 속의 파송을 포함하게 되었다. 즉 세계의 창조와 화해 그리고 최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오심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성자의 세계 파송이란 하나님의 영원히 자유로운 자기 선택과 상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융엘에게서 하나님의 절대성은 하나님의 역사 속의 임재와 충돌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은혜로운 근거가 된다. 즉 그에게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우선성은 성자와 성령을 통한 성부의 역사 속의 구속 사역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 근거를 제공한다.
즉 융엘에게서 하나님 안의 ‘출원’은 결코 하나님의 역사에서의 외부적인 사역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의 하나님 안으로의 돌입도 결코 하나님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는 선행적 역사에서 이미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융엘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동일시 하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라너의 명제를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다. 융엘에게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내적 관계이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의 영원한 자기 관계(내재적 삼위일체)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원래 그 자신으로서 자기 관계적이었기 때문에 이제 세계 관계적 일 수 있다. 달리 말해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상응하며 그것을 반영하거나 완전히 동일 할 수는 없다.
특별히 융엘에게서 경륜적 하나님과 내재적 하나님의 상응성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그자신을 십자가에 고난당하고 죽으신 그분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이를 볼 때 구원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외적 행위는 곧 하나님의 내적행위와 상응한다. 따라서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나 그 반대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3) 피엣 슈넨베르흐, 이브콩가르, 월터 카스퍼
콩가르 그리고 카스퍼 등의 신학자들이 선재적 존재로서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별하며 이 둘 사이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슈넨베르흐에 따르면 신앙 속에서의 우리의 하나님 체험은 분명 삼위일체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자신 안에서 삼위일체로 계심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기 결단에 달린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의 방식이 삼위일체적인지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완전히 경륜적 삼위일체와 일치하는가 하는 질문은 순전히 사변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두삼위일체 사이의 완전한 존재론적 일치를 주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다르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구원의 역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에서도 하나님이 삼위이레적으로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브 콩가르 역시 선재한 내재적 삼위일체가 이미 있으며 그것과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부분적인 일치만 있다고 본다. 이 두 삼위일체 사이에 완전한 존재론적 일치가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계시된 삼위일체와 영원한 삼위일체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적어도 시간성과 일시성이 부여된다. 이 점에서 영언부터 계신 하나님 자신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나 내제적 삼위일체는 반드시 경륜적 삼위일체일 수 없다.
가스퍼 역시 이미 존재한 내재적 삼위일체를 전제하면서 그것과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부분적 일치만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 특별히 두 번째 신적 인격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 안에 어떤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따라서 역사 속의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하나님은 반드시 일치할 수 없다. 오히려 내재적 삼위일체는 비록 경륜적 삼위일체와 상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