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삼위일체론과 대속론 존 스토트에 대하여-장성은.hwp
5장 삼위일체론과 대속론 <2. 복음주의적 대속 이해 : 존 스토트의 형벌 만족설>
4102087 장성은
조앤 칼슨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여성 신학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대속적으로 이해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복음주의적 견해를 잘 대변해 주는 신학자가 바로 영국 성공회 소속의 목사 존 스토트이다.
다른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성서적 신앙의 중심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십자가는 처음부터 성서적 종교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십자가는 예수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이미 기인하고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어떤 돌발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미리 계획되고 예수에 의해 성취된 의도적 행위였다. 예수의 생애는 처음부터 십자가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었기에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들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로 선포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도 십자가가 공포와 수치 그리고 고통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상징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럼 이 십자가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스토트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의 정점이었기 때문에 철두철미 대속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토트는 십자가를 통한 대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왜 하나님은 십자가의 필연성 없이 단순히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스토트는 죄의 심각성,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성,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하심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간다.
스토트에 따르면 죄는 신약성서에서 다섯 가지의 중요한 그리스 단어들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그 핵심은 결국 불신 내지 자기 중심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죄는 비록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우리가 창조주이자 주님인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곧 죄는 그 본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도적 적대감이다.
죄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적대감으로 이해한 다음 스토트는 이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논증한다. 인간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거기에 상응하는 정도의 도덕적 책임”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스토트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요 자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적 존재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인간이 비록 육신(타락한 인간 본성), 세상(공적인 유행이나 의견), 그리고 마귀(악마적 힘들)의 영향 아래 있음을 말하나 동시에 스스로 도덕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주체자로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성이란 인간 본성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죄의 심각성과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성 및 그들의 죄책감에 대해 논한 다음 스토트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진노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다룬다. 그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란 것은 성서적 종교의 기본이 되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거부이다. 인간과 다르게 하나님의 분노는 “지속적이며, 확고한 적대이며 오직 악에 대항해서 일어나며 그 악에 대한 유죄 선고”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 즉, 성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에서 공통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죄악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노출시키며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거부한다. 죄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은 결코 죄를 참지 못하신다. 스토트는 바로 여기, 곧 죄를 결코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서 십자가의 필요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스토트는 인간의 죄인 됨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두 가지 성서적 견해가 모두 존중될 때 인간과 하나님은 다 같이 높여 진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을 원래의 책임적 존재로 존중하셔야만 하며 또한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으로 존중하셔야 한다. 그래서 이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어떤 종류의 ‘만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토트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지를 이야기한다. 이 문제를 위해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고 또 거부되었던 ‘만족’(satisfaction)과 ‘대속’(substitution)이란 두 단어를 과감하게 사용한다. 그는 먼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왜 필요했는가에 대한 네가지 전통적인 견해, 곧 예수의 십자가는 사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전설 혹은 ‘승리자 그리스도설’),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칼빈의 형벌 만족설), 하나님의 영예와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안셀무스의 만족설), 이 세계의 도덕적 질서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그로티우스의 통치설)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이 모든 견해들은 나름대로 속죄에 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갈등, 곧 하나님의 거룩성과 죄에 대한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만족이 밖에서부터 주어져야하기 때문이다. 스토트는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셔야 한다.”라고 말한다. 스토트는 하나님의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고 주장한다. 곧 십자가는 하나님이 하나님 안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길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죄와 충돌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로로 표현되며 적절한 처벌을 요청한다. 그리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만족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인간을 그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의 거룩성이 충족되기를 원하셨다. 이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자리에 놓으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함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침해된 거룩을 회복하셨고 인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를 경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죄 없는 이가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어’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은 받은 것이다. 십자가는 대속적인 희생(substitutionary sacrifice)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죄로 인해 발생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진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속적 희생의 사건이라는 것을 주장한 다음 스토트는 이제 이 대속자가 누구인가를 묻는다.
스토트는 대속자 예수가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때는 속죄의 개념은 형편없이 왜곡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인간 예수가 주체가 될 때는 예수는 진노하는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이 베풀고 싶어하지 않는 구원을 억지로 빼앗아 오는 자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주체가 될 때는 하나님은 그 진노를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를 무자비하게 심판하는 천상의 절대 군주로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토트는 십자가 위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아무런 분리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십자가 위의 하나님은 단지 처벌만 하는 심판관이 아니다. 또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역시 무죄하기만 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그리고 갈등 가운데 행동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함께 행동한 주체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는 다같이 대속 행위의 주체들로 있다. 그에 의하면 성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한 마음과 한 의지로 함께 행동했음을 말하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의 마음속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있었던 일이다. 따라서 스토트는 우리 대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이는 그리스도 혼자만도 아니고 하나님 혼자만도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Chirst)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대속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연합된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함께 십자가에서 대속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결국 스토트에게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다 같이 인정할 때 또한 십자가를 삼위일체 사이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만 속죄에 대한 논의는 의미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등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안에서 대속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그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토트의 형벌 만족설은 성부와 성자의 인격적 구분과 그들 사이의 연합을 말하는 삼위일체론 안에서만 대속 논의가 의미를 갖게 됨을 잘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