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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칼슨 브라운

하나님의 범우주적인 학대로서의 대속

- 조앤 칼슨 브라운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속 죽음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고통을 미화 내지 정당화하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억압 특별히 여성들의 억압을 정당화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녀는 기독교의 모든 대속 이론들은 절망적으로 학대적이며 저주스러운 것으로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조앤 브라운은 그리스의 교부들이 주장한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 대속론을 거부한다. 그녀에 따르면 이 대속론은 예수의 죽음을 인간을압제하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저항과 극복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 그 크신 능력을 보이셨고 죄를 지음으로 악마의 소유가 된 인간을 되찾아 오셨으며 이로 인해 인간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대속론은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어떤 대속의 능력도 희생자에게서 나올 수는 없고 이점은 예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다른 중요한 대속론인 도덕 감화설 역시 승리자 기독론만큼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 아들을 죽게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 사랑으로 인해 사람들이감화를 받아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다.

브라운은 이 대속론은 하나님의 영광과 법 대신 사랑과 자비를 강점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억눌리는 사람들 특별히 여성들에게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되니 그 이유는 이것 역시 무죄한 자의 고통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을 인식하고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이론은 계속해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선한 일을 이루도록 요구되어 온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여성들이야 말로 이런 자기희생에 대한 요구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들을 억누르고 희생하며 죽여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라운은 여성들에게 가장 극단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승리자 기독론이나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이 아닌 안셀무스의 만족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서구 교회의 주도적 대속론이 된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예수가 인간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 죽었다고 가르친다. 죽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켰고 이로 인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의 죽음을 당하여 하나님의 훼손된 영예를 회복시켰다

곧 이 이론에 의하면 구속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은 고난당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리를 타협함 없이 그 자신의 영예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요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또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달성되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이론의 큰 문제점 하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자유롭게 되려면 누군가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고 전제하는 데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성이야말로 가족과 교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가장 기대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 자체가 구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이론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고통 특히 여성의 고통을 영속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요구하고 실행하는 아버지로 이해하는 한 그것은 학대를 정당화하며 학대와 억압의 희생자들을 유기해 버린다. 이런 이해가 완전히 부수어지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첫째로 그녀의 대속 이해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대속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그녀는 성서에 근거해서 여러 대속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 그것들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를 받아들인 다음 그 모두가 여성 학대적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자리는 비극적이며 상상컨대 그 아들이 하나님과 인간 가족이라는 서로 소외되어 있는 두 집단에 대한 넘쳐 나는 사랑으로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고 희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유롭게 된다고 비판하는데 이런 비판에서 비전문가적이며 통속적인 이해는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속을 하나님과 예수사이의 어떤 거래처럼 이해하는 이런 이해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대속과 전혀 관계가 없다. 신약성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신적 인격들 사이의 신적 거래라는 생각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신약성서는 성부가 자신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주체자이며 또한 화해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안의 일치가 전제될때만 대속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의미를 가지며 설득력을 갖게 된다. 간단히 말해 대속 교리는 삼위일체 구조 안에서만 가능하며 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사실을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대속 죽음으로 이해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신적인 자녀 학대라는 브라운의 주장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하나 됨만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하나의 수동적인 희생자로만 이해함으로써 그의 인간적 주체성도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서가 보여 주는 예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성숙한 어른이었다. 달리 말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브라운의 말처럼 단지 악의 서력에 대한 도전의 결과만은 아니었고 아버지에 대한 자벌적인 순종의 최고의 표현, 곧 일생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행하면서 살아온 삶의 최고 극점이었다. 예수는 학대받는 어린아이가 아닌 성숙한 어른으로서 자발적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위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다.

셋째로, 브라운은 예수의 죽음을 그의 부활과 분리시켜 논의하고 있다. 곧 그녀는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 죽은 순교자 내지 희생자의 그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알려면 그의 출생에서 하나님 나라선포와 그로 인한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이르는 그의 삶의 행적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곧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셨고 그 것을 선포하셨던 예수는 그 나라를 저항하고 거부하는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층에 의해 거의 필연적으로 죽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는 브라운의 말처럼 하나의 희생자에 불과할 것이며 그의 죽음 역시 대속적인 죽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오늘의 교회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것이 갖는 사회 정치적 중요성과 분리시켜 다룸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추상화 내지 신령화 혹은 개인주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자의 죽음이었으며 이 점에서 대단히 큰 정치 사회적 의미가 있는데 교회는 이를 내 영혼을 구원한 구세주의 죽음으로서 철저히 개인주의화 내지 신령화 함으로써 복음을 제한하고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속론적으로 해석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 학대에 불과하며 잘못되었다는 대표적인 주장으로서 조앤 칼슨 브라운의 논증을 살펴보았고 또 그것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몇가지 지적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우리 시대의 중요한 복음주의 신학자와 에큐메니컬 신학자가 다 같이 고등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대속 논의를 의미 있게 하는 가운데 브라운과 같은 잘못된 대속 이해를 극복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