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삼위일체론과 성 문제- 조희주).hwp
4102096 조희주
제6장
삼위일체론과 성문제
1. 들어가는 말
기독교회는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는 분이라고 고백해 왔다. 이런 고백은 성서에 근거해 있으며 세례 및 성찬식을 통해 계속 전수되면서 교회의 표준적인 삼위일체 이해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여성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많은 신학자들은 이 전통적인 삼위일체 정식은 여성의 존엄성을 거부하며 가부장 제도를 정당화시킨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고백될 때 하나님은 천상의 한 거대한 남성으로 이해되면서, 오직 남성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적인 인간으로 여기게 하며 이로 인해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정당화시킨다고 말한다.
1) 메리 데일리(여성주의 철학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가부장적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때문에 전통적 삼위일체 정식 속에 들어있는 남성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여성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 캐럴 크리스트(급진주의적 여성신학자)
그녀에 의하면 진정한 여성 해방은 이 “가장 불결한 삼위일체와 그 상징”이 유발해 온 파괴의 사슬을 끊어 버릴 때에 가능하다. 정녕 “이 악마적인 삼위일체를 축출해 내는 것이 여성이 되는 길이다”
3) 엘리자베스 존슨(로마 카톨릭 여성신학자)
이 정식이 여성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어 있다고 보면서 좀 더 양성의 평등을 도울 수 있는 형태 혹은 탈성적인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4)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여성 신약 신학자)
그녀에 의하면 여성이 교회 안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받고 또 실제적 힘을 행사했던 첫 두 세기 동안은 하나님은 남성 및 여성적 이미지로 함께 표현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의 원래 정신인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주변의 가부장적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여성적 표현은 교회에서 사라져 갔고 오직 남성적 표상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현대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여러 여성 해방 운동들에서 보듯이 가부장 제도의 극복과 남성과 여성의 건강한 관계 형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도 여성의 존엄성을 고양하며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건강하게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전통적 삼위일체 정식은 성 차별적인가? 또 성 차별적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좀 더 성적으로 평등한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2. 답변들
1)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하나님의 계시로 직접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그 원래 의도에서는 성 혹은 성 차별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수정이나 보완 없이 있는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2) 이 정식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성 차별적이고 여성 억압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고 대신 여성의 존엄성을 지켜 줄 고대의 여신 숭배 전통으로 이를 대치하여 한다고 말한다.
3) 이 정식이 성차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다른 상징들을 사용하면서 보완하려고 한다.
4) 하나님에 대해 인격적 용어를 사용하되 특정한 상과 관계된 용어는 피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언급에서 성 차별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한다.
5) 하나님을 자연 속의 어떤 대상이나 현상으로 표현함으로써 혹은 하나님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성 차별적 표현를 피하려고 한다.
3. 첫 번째 답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호칭의 원래 의도에는 성 차별적인 요소가 없었다. 또한 이 이름들은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본래적 이름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같은 입장은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으며 삼위일체론과 성 차별이란 문제에 대한 다섯 형태의 답변들 중 가장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답변이다.
현대 신학자 중에서 이런 주장을 처음으로 편 사람은 현대 신학의 거인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아버지 하나님’이란 이름은 성서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주님이며 창조주라는 뜻이다.
바르트는 이를 “하나님만이 그 홀로 계신 분이며 따라서 그의 영원한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로 마땅히 그리고 적절하게 아버지라 불린다”라고 말한다.
바르트의 이런 견해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특별히 1990년 초반『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함 : 거룩한 삼위일체와 여성주의 도전』이란 책으로 표현되었다.
1) 로버트 젠손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해야 하니 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2) 알빈 킴멜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삼위일체적 이름은 “우리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서 결코 변경할 수 없다고 한다.
3) 드보라 벨로닉은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이름들이며 따라서 역사나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이름들이다.
4. 평가
성부, 성자, 성령 이 이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결코 뗄 수 없을 만큼 결합되어 있으며 기독교적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드러내어 주기 때문에 결코 소홀이 다루어질 수 없다.
중요한 질문 하나는 이 정식이 원래 성 차별적이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글의 뜻은 그 말을 한 이나 쓴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말을 실제로 듣거나 읽는 사람에 의해 우선적으로 결정된다. 단순히 ‘성부’나 ‘성자’란 표현이 원래 남성적 용어가 아니며 성 차별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은 이런 입장은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직접적이며 문자적인 하나님 언명은 아니다. 그것은 성서의 많은 다른 표상들처럼 하나님의 관한 은유적 표현이다. 칼라너에 말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비 혹은 은유의 길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말함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란 표현에만 배타적으로 매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셀리 멕페그의 말처럼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은유 아닌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배타적으로 사용될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또 불러야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는 점, 곧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아버지이며 남성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정식의 원래적 의도와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방법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그가 뜻하신 바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하나님을 남성의 성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성을 초월해 잇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버려진 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이런면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가까운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한 아버지 하나님은 생물학적 혹은 가부장적 아버지가 아니다. 샌드라 슈나이더가 말하듯 예수의 아버지 이해를 기준하여 모든 생물학적 가부장적 아버지 이미지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해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또 전통적인 삼위일체 정식인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진 성 차별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정식과 함께 하나님에 관한 여러 여성적 상징들을 나란히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