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이전의 문자 생활
지구상에는 수천 개의 말이 있지만, 그 말들 중에서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는 말
은 수십 개에 지나지 않는다. 국어는 문자언어를 가지고 있는 수십 개 언어의 하나로서 우리
는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우리말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분명
치 않으나 적어도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의 한반도에는 북방의 부여, 고구려, 옥적, 예 등이 있었고, 남방에는 진한, 마한, 변한
의 삼한이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이 북방계 언어와 남방계 언
어가 서로 상이한 언어라는 기록이 있다. 북방계 언어는 고구려어로, 남방계 언어는 신라어와
백제어로 발전되었지만 불행히도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어나 백제어 자료는 빈약하기 짝이 없
다. 삼국은 신라에 의해 통일되어 국어는 몇백 년 동안 신라어를 수도 방언으로 하였으며, 그
후 고려가 건국되어 수도가 한반도의 중부지방으로 옮겨갔지만 그 중부 지방의 언어는 신라어
의 한 방언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신라어가 국어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루로부터 현재까지 한국어는 죽 중부 지방 언어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옛말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문헌자료에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그
런데 우리의 경우 우리말에 맞는 문자가 만들어진 것인 반만년 역사에서 겨우 5,6백년 전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의 문자 생활은 한문을 통해 이루어져 왔으므로 한글 창제 이전의 국어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말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자에 의한 기록에 주로 의
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어순이 제대로 반영되며 다양하게 발달된
조사나 어미 등이 제대로 드러나는 국어의 한글 창제 이전의 국어의 모습은 거의 복구해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글창제 이전까지의 국어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 그 단편적인 모
습만을 볼 수 있다.
먼저 가장 오랜 국어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른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불리는 금석
문(金石文)이 있는데 여기에서 6,7세기 당시의 우리말의 어순에 대한 정보를 약간 얻을 수 있
다. 그 다음으로 우리말의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자료로는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매우 중요하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향찰로 적힌 향가
14수가 있으며, 그 밖에도 ‘지리지(地理志)’에는 ‘매홀一云水城, 水谷城縣一云買旦忽’과 같이
옛 고구려의 고유어 지명이 한자화된 과정이 적혀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삼국
유사』에는 ‘赫居世’와 ‘弗矩內’가 각각 釋讀과 音讀의 경우로 제시되는 등의 인명 자료가 있
어 고대국어 음운 대응의 규칙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이밖에 『계림유사
(鷄林類事)』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과 같이 전기 중세 국어의 어휘에 대한 정보를 제공
해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 『계리유사』는 12세기에 송(宋)나라의 손목(孫穆)이 편찬
한 어휘집으로서, ‘太日家稀, 水日沒 刀子日割’과 같은 350여항에 걸친 고려의 생활 어휘들이
조사되어 있다. 『향약구급방』은 13세기에 고려 대장도감에서 편찬된 약재에 대한 설명집으로
서 약재로 사용된 180여종의 동물·식물·광물에 대한 어휘 자료가 ‘桔梗鄕明道羅次’과 같이 나
타나다.
우리가 우리말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는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불과 오륙백년에 지나지 않
는다.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가 서로 맞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우리는 우리의 국어사에
서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한글 창제 이전에도 우리 조상은 한자를 이용해 수준 높은 문자 생
활을 해왔었고 한자의 사용이 적어도 식자층에게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정도이었음을 여러 문
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말과 문자의 괴리로 말미암아 현재의
우리는 한글 창제 이전의 국어의 모습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자는 조사나 어미와 같은 문법 형태소가 별로 없는 중국어의 특징에 맞는 문자 체계이다.
또한 한문은 중국어에 맞는 어순을 갖는다. 다시 말해, 교착어인 국어를 고립어에 맞게 발전
된 한자가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어순을 가지는 구어를 ‘주어-
서술어-목적어’의 어순을 가지는 한문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말로는 한국어를 말하면서 문자 생황은 한문을 이용해야 하는 언어생활의 불편을 적어도 천년
이 넘도록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5세기 중반 우리말에 맞는 문자를 만들자고
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가지 우리 조상들이
그저 남의 문자인 한자를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것만은 아니다. 일찍이 한자를 빌어와 써오긴
했지만 문법 의식이 싹터 한문과 국어의 차이를 자각한 사실을 한자를 이용해서 국어를 표기
하고자 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미 6,7세기경에 한문의 어순을 우리말에 맞게 바꾸어
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경주에서 발견된 돌에 새긴 다음과 같은 금석문은 아마도 신라 화
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 청년의 맹세를 기록한 글이다.
(7)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임
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忠道를 지니고 過失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일을 잃으면 하늘의 큰 벌을 맹세한다.)
위에서 밑줄친 부분은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의 어순이다. 이와 같이 중국어와 국어
의 어순 차이를 의식했다는 점을 중시해 이를 ‘서기체(誓記體)’ 자료라 불러 의미를 두고 있
다. 한자를 이용하긴 하지만 한문이 아닌, 이와 같은 한자를 이용한 국어 표기 작업은 구결(口
訣), 이두(吏讀), 향찰(鄕札)과 같은 차자문자(借字文字) 체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구결과 이두와 향찰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한자 대신 영어를 이용한 설명이 이
해에 효과적일 것이다.
(8) a. I-ga love you handa.
b. nayga norul saranghanda.
c. I-ga norul love handa.
d. nayga you-rul saranghanda.
여기에서 (8a)는 구결이요, (8b)는 향찰이요, (8c)나 (8d)는 이두에 해당한다. 아래에서 각각
의 표기법에 대해 절을 달리하여 설명한다.
가. 구결(口訣)
중국어와 우리말의 차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은 크게 국어에는 중국
와 달이 문법 형태소가 많이 발달해있다는 것과 어순이 다르다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차자 문자는 바로 이 두 가지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였는가에 따라 분화된다.
먼저 중국어와 국어의 차이에 대해 가장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알래 (9)와 같은 ‘구결’이라
고 할 수 있다.
(9) a. 天地之間 萬物之中厓 唯人是 最貴爲尼
b. 國之語音이 異乎中國야
與文字로 不相流通 故로 愚民이 有所慾欲야도
구결은 ‘입겿’이라고도 하고 ‘토(吐)’라도도 하는 것으로서 한문의 어순을 바꾸지는 않고 단
지 부족한 문법 형태소만 첨가한 것이다. 따라서 구결문에서 구결만을 빼면 그대로 중국 사람
들도 이해할 수 있는 한문이 된다. 구결에선 (9a)와 같은 한문 구결과 (9b)와 같은 한글 구결
이 있다.
위 (9a)에서 ‘厓’는 처격 조사에 ‘에’에 해당하고, ‘是’는 주격조사 ‘잉’, ‘爲尼’는 ‘하니’에 해
당한다. 이 경우에 ‘厓’와 ‘尼’는 한자의 음을 딴 음독(音讀)의 방법에 의한 것이고 ‘是’와 ‘爲’
는 한자의 뜻에서 딴 훈독(訓讀)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를 각각 음차(音借)와 훈차(訓借)의
방법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구결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으며 이들은 약체자(略體字)
로 쓰이기도 하였다.
(10) 주격 조사 ‘-이’ 伊/是
목적격 조사 ‘-을/를’ 乙
보조사 ‘-은/는’ 隱
연결어미 ‘-니’ 尼
연결어미 ‘-하고’ 爲故
연결어미 ‘하야’ 爲也
한글 창제 이후에는 (9b)와 같은 한글 구결이 많이 쓰였으며 구결은 지금까지도 한문을 읽
을 때 첨가되어 읽히는 요소이다. 한문에 변개를 많이 가한 이두나 향찰보다 구결이 더 생명
력이 긴 이유는 그 기본 개념이 이두나 향찰보다 단순하여 사용이 편리하면서도 한문을 읽을
때에 국어에 더 있는 요소로 보강을 쉽게 할 수 있어 실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기 때문일 것이
다.
나. 이두(吏讀)
이두는 구결보다는 적극적으로 국어를 표기하고자 한 표기법으로서 단지 문접 형태소를 보
충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어순까지도 국어에 맞게 적은 표기법이다.
(11) 必干 七出乙 犯爲去乃 三不去有去乙
비록 칠출을 범하거나 삼불거있거늘
위에서 밑줄친 요소들은 이두이다. 목적격 조사 ‘-을’을 ‘乙’로 쓴 것은 구결과 같지만 ‘하
거나’를 ‘爲去乃’로 쓴다거나 ‘있거늘’을 ‘有去乙’로 쓴 것이 구결보다 어미를 보다 완벽하게
국어화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이두적인 요소인 것은 한문에서라면
‘雖’로 나타내었을 ‘비록’과 같은 부사를 국어 발음을 딴 ‘必干’와 같이 적은 것이다. 어순 또
한 한문과는 다르다. 분면히 목적어가 동사 앞에 온 한국어 어순인 것이다. (11)을 한문으로
나타내면 (11`)와 같이 적을 수 있다.
(11`) 雖犯七出 有三不去
이 이두는 하급관리들이 공문서 등을 만들 때에 주로 사용한 일종의 전문 언어로서, 19세기
말 갑오경장 이후 공문서를 한글로 적게 하기까지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대중적이지는 못하였
지만 그 명맥을 길게 유지해 왔다.
다. 향찰(鄕札)
구결이나 이두보다 더욱 더 적극적으로 국어를 표기하고자 한 것이 향찰이다. 향찰은 어순
을 국어의 순서대로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위에 말한 訓借와 音借를 이용하여 문법 형태
소뿐만이 아니라 명사나 동사의 어간과 같은 실질 형태소들에까지도 국어를 반영시키도록 적
은 것이다. 25수의 향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처용가』의 한 대목을 보자.
(12) 東京明期月良 동경 기 라라
夜入伊遊行如可 밤 드리 노니다가
밑줄친 부분은 그대로 음차로읽히고 있는 이들은 모두 어미들로서 문법 형태소들이다. 그밖
의 부분은 지명인 ‘東京’과 같은 교유명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뜻으로 읽는 훈차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곧, 개념을 나타내는 실질 형태소는 훈차(訓借)를,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형태소는 음차(音借)를 이용하여 적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훈주음종(訓主音從)의 방식은
하나의 단어를 적을 때에도 말음첨기(末音添記)라 하여 받침을 나타내는 글자를 첨가하는 방
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밤, 구름’ 등은 ‘夜音, 雲音’ 등으로 적어서 앞 글자는 뜻
을 나타내지만 뒷글자는 국어 한문은 아니어서 그 표기법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해독할 수 없
다. 바로 여기에 향찰로 된 향가 것인데, 향가 표기 이후에 이 향찰의 표기법이 계속해서 쓰
인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이용된 이 표기법을 완전히 발힐 수 없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