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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우리 민족은 기왕에 알게 되었던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해왔지
만 그것은 별다른 성공을 보지 못했다. 국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하려 했던 향찰은 복잡한 이유
에서인지 너무도 단명했고, 비교적 긴 생명력을 가졌던 구결이나 이두는 국어의 극히 일부만
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조상은 15세기 중반에 드디어 우리말을 완전히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독창적으로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은 상당한
수준의 문화 민족임을 자랑할 수 있다. 문자 언어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
어 사용한 민족은 얼마 되지 않거니와, 게다가 그것이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힘과는 상관없이
수백년 동안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여도 그 생명력을 더욱 왕성히 과시할 만큼 내부적으로 튼
튼한 문자 체계이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한글에 처음 붙여진 공식적인 글자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 문자 체계를 설명
한 책 이름이기도 하다. 책 『훈민정음』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원래 『훈민정음(1446)』은 그
당시에 제1문자라고 할 수 있는 한문으로 쓰여졌고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에 대
한 한글 번역본이 바로 뒤이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훈민정음에는 한문본과 그 번역
본인 언해본(諺解本)이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한문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3) <훈민정음>의 구성
① 御製序文
② 例義
③ 解例 : 制字解, 初聲解, 中聲解, 終聲解, 合字解, 用字解
④ 鄭麟趾 序
곧, 『훈민정음』은 크게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과 본문이라 할 수 있는 ‘예의’, 그 본문에 대
한 해설편이라 할 수 있는 ‘해례’,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서문인(그러나 책 마지막에 위
치) ‘정인지 서’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편제상 ‘어제서문과 예의’는 맨 윗줄부터
시작하는 반해 ‘해례’와 ‘정인지 서’는 한 칸 아래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어제 서문’과
‘예의’가 본문이 되고, ‘해례’와 ‘정인지 서’는 부록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
다. 더욱이 이 ‘해례’와 ‘정인지 서’는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포함되지 않아 이런 추정을 더
욱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이 ‘해례’ 등의 부분이 언해본에는 없고 한문본에만 있어 흔
히 『훈민정음』한문본을 『훈민정음』해례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훈민정음』의 각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 서문’은 창제자가 신문자(新文字) 창제
의 배경과 목적을 직접 밝히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예의’는 신문자의 음가(音價)와 운용법을
설명한 부분으로서, 특히 종성 표기의 방법을 밝힘으로써 맞춤법에 있어 음소적 표기법을 취
함을 분명히 하고 있고, 그밖에 병서, 순경음, 방범 등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해례’는 제가
(制字) 우너리를 밝히고 자음과 모음 체계 등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 각각 초성, 중성, 종성
에 대해 다시 자세히 설명한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초중종성의 각 음소 문자를 합해서
음절 단위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해 밝힌 ‘합자해’, 초중종성의 각 음소 문자를 합해서 음절 단
위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해 밝힌 ‘합자해’, 초중종성별로 단어의 표기 예를 보인 ‘용자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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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해례’편과 함께 부록의 성격을 EL고 있는 정인
지의 후서(後序)는 신문자의 창제 이유와 그 우수성을 설명하고 문자의 창제자와 책의 편찬자
등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가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창제자가 서문에서
‘사마다 수 니겨 말로 메 편안(便安)킈 고져 미니라’라고 밝힌 대로 문자
를 가지지 못한 백성들로 하여금 문자를 가지게 하여 그들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곧, 첫째 목적은 爲民 便民 思想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목적은 육백년이 지
난 지금에 와서 세계에서 문맹률이 거의 0%인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의 또 다른 목적과 관련하여 신문자의 창제는 한자음
개신(漢字音 改新)을 위한 발음기호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가설이 조심
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세종대왕이 힘을 기울였던 문자 관련 사업에는 신문자 창제 외에 그
당시 매우 어지러웠던 현실 한자음, 즉 동음(東音)의 정리 작업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를 위
해 중국의 운서(韻書)였던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음체계를 한글로 표음하고 해설한 『홍무정
운역훈(洪武正韻譯訓, 1445~1455(단종3년)』의 발간에 착수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의 편찬에 성공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발간
된 책들에서는 한자에 모두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달아 그대로 읽도록 하였으나 이 동음의
정리 작업은 비현실적인 면이 많아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훈민정음을 표음문자로 만든
뜻에는 이와 같이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말의 소리뿐만이 아
니라 외국어의 표음도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 동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한글은 위와 같이 창제 목적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는 표음문자라는 점과 더불어 문자의 창
제에 과학적인 원리가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과학적이라 할 만하다. 신문자의 창제
원리는 요약해서 말하면 상형(象形)과 가획(可劃)의 원리로서, 기본자들은 훈민정음 제자해에
서 “各象其形而制字”라고 밝힌 바와 같이 ‘상형’에 의해서, 제출자들은 ‘가획’에 의해 문자의
모양을 만들었다. 자음의 기본자(ㄱ, ㄴ, ㅂ, ㅅ, ㅇ)들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모음의
기본자(、, ㅡ, ㅣ)들은 철학적으로 주역(周易)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재출자들은 이 기본자들에 획을 더하여 만든 것이다.
한자나 로마자와 같은 다른 문자들은 그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채 수천년간의 반복된
사용에 의해 굳어진 문자로서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얻어진 문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한글은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와 그 과정이 분명한 문자라는 점에서도 그 창조성을 자랑할만
하다. 그러나 이 창조성 혹은 독창성과 관련하여 분명히 해야 할 점은 한글의 창제가 다른 문
자의 영향으로부터 순수하다는 주장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하여 젊은 집현전 학자들과 동궁이었던 문종(文宗)은 밤을 새우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고
외국의 문자학, 운학(韻學)의 연구를 위해 외국 출장도 여러 차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과정에서 한자의 옛 자형이 몽고의 파스파 문자와 같이 외국 문자 등의 자료를 반드시 접하였
을 것이고 이와 같은 폭넓은 자료 조사가 신문자로 하여금 더욱 튼튼한 과학적 기반을 갖추도
록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인지 서의 “形象而字倣古篆”과 같은 기록
이나 세종실록의 “其字倣古篆”과 같은 기록에서 한자의 옛 글자체인 ‘고전의 모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이들에 대한 연구가 신문자 창제에 뒷받침이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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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御製訓民正音솅졩훈민>
[製졩 글지 씨니 御製졩 님금 지샨 그리라
제는 글짓는 것이니 어 제는 임금 지으신 글이다
訓훈은 칠 씨오 民민 百姓이오 音은 소리니
훈은 가르치는 것이오 민은 백 성이오 음은 소리니
訓훈民민正音은 百姓 치시논 正 소리라]
훈 민 정 음은 백 성 가르치시는 바른 소리다
나랏말미 中國귁에 달아
나랏말씀이 중 국과 달라
[中國귁 皇帝뎽 겨신 나라히니
중 국은 황 제 계신 나라이니
우리나랏 常談땀애 江강南남이라 니라]
리나라의 상 담에 강 남이라 하느니라
文문字와로 서르 디 아니
문 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 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내 제 들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내 이 爲윙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字 노니
내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사람마다 하여금 쉬 익혀 날로 씀에
便뼌安킈 고져 미니라
편 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ㄱ 엄쏘리니 君군ㄷ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기는 어금닛소리니 군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 虯ㅸ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규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ㅋ 엄쏘리니 快쾡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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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어금닛소리니 쾌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ㆁ 엄쏘리니 業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는 어금닛소리니 업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ㄷ 혀쏘리니 斗ㅸ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디는 혓소리니 두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覃땀ㅂ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담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ㅌ 혀쏘리니 呑ㄷ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티는 혓소리니 탄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ㄴ 혀쏘리니 那낭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니는 혓소리니 나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ㅂ 입시울쏘리니 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비는 입술소리니 별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 步뽕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보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ㅍ 입시울쏘리니 漂ㅸ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피는 입술소리니 표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ㅁ 입시울쏘리니 彌밍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미는 입술소리니 미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ㅈ 니쏘리니 卽즉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지는 잇소리니 즉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 慈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자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ㅊ 니쏘리니 侵침ㅂ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치는 잇소리니 침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ㅅ 니쏘리니 戌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시는 잇소리니 술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 邪썅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사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ㆆ 목소리니 挹읍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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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목소리니 읍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ㅎ 목소리니 虛헝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
히는 목소리니 허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
쓰면 洪ㄱ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나란히 쓰면 홍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ㅇ 목소리니 欲욕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이는 목소리니 욕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ㄹ 반혀쏘리니 閭령ㆆ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리는 반혓소리니 려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ㅿ 반니쏘리니 穰ㄱ字 처 펴아 나 소리 니라
는 반잇소리니 양 자 처음 펴 나는 소리 같으니라
ㆍ 呑ㄷ字 가온소리 니라
ㆍ는 탄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ㅡ는 卽즉字 가온소리 니라
ㅡ는 즉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ㅣ 侵침ㅂ字 가온소리 니라
ㅣ는 침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ㅗ 洪ㄱ字 가온소리 니라
ㅗ는 홍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ㅏ 覃땀ㅂ字 가온소리 니라
ㅏ는 담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ㅜ는 君군ㄷ字 가온소리 니라
ㅜ는 군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ㅓ는 業字 가온소리 니라
ㅓ는 업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ㅛ 欲욕字 가온소리 니라
ㅛ는 욕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ㅑ 穰ㄱ字 가온소리 니라
ㅑ는 양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ㅠ는 戌字 가온소리 니라
ㅠ는 술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ㅕ는 彆字 가온소리 니라
ㅕ는 별 자 가운뎃소리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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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냉終ㄱ소리 다시 첫소리를 니라
나 중 소리는 다시 첫소리를 쓴다
ㅇ 입시울쏘리 아래 니 쓰면 입시울 가야 소리 외니라
이를 입술소리 아래 이어 쓰면 입술 가벼운 소리 되느니라
첫소리 어울워 디면
쓰라 乃냉終ㄱ소리도 가지라
첫소리를 어울러 쓸 때면 나란히 쓰라 나 중 소리도 마찬가지다
ㆍ와ㅡ와ㅗ와ㅜ와ㅛ와ㅠ와란 첫소리 아래 브텨 쓰고
ㆍ와ㅡ와ㅗ와ㅜ와ㅛ와ㅠ는 첫소리 아래 붙여 쓰고
ㅣ와ㅏ와ㅓ와ㅑ와ㅕ와란 올녀긔 브텨 쓰라
ㅣ와ㅏ와ㅓ와ㅑ와ㅕ는 오른녘에 붙여 쓰라
믈읫 字ㅣ 모로매 어우러 소리 이니
무릇 자는 모름지기 어울려야 소리 이루어지니
왼녀긔 點뎜을 더으면 노 소리오
왼녘에 한 점을 더하면 맏 높은 소리고
點뎜이 둘히면 上聲이오
점이 둘이면 상 성이고
點뎜이 업스면 平聲이오
점이 없으면 평 성이고
入聲은 點뎜 더우믄 가지로
니라
입 성은 점 더함은 마찬가지로되 빠르니라
中國귁소리옛 니쏘리 齒칭頭와 正齒칭왜 요미 잇니
중국소리에서 잇소리는 치 두와 정 치가 가림이 있으니
字 齒칭頭ㅅ소리예 고
자는 치 두 소리에 쓰고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열니 혓그티 웃닛머리예 다니라]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에서 엷으니 혀끝이 윗니의 머리에 닿느니라
字 正齒칭ㅅ소리예 니
자는 정 치 소리에 쓰니
[이 소리 우리나랏 소리예셔 두터니 혓그티 아랫닛므유메 다니라]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에서 두터우니 혀끝이 아랫잇몸에 닿느니라
엄과 혀와 입시울와 목소리옛 字 中國귁소리예 通히 니라
어금니와 혀와 입술과 목소리의 자는 중 국소리에 통히 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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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훈民민正音
훈 민 정 음
정인지 서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그에 맞는 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옛 사람은 그 소리에 따른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
才)의 이치를 담으니 후세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풍토가 다르면 소리의
기운(聲氣) 또한 따라서 다르다.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그래서)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다.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수 있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은 예악(禮樂)·문장 등 문물제도가 중국에 견줄만하나, 다만 말은 중국과 같
지 않다.
(그래서) 글 배우는 이는 그 뜻의 깨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법을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기고 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
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우리 말에) 들어맞지 않는다.
비단 속되고(비루하고) 이치에 맞지 않을(무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 데 그
만분의 일도 통달치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지으셨다.
이 글자는 상형하였으나 글자 모양은 고전(古篆)을 본떴고,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칠조에 맞고, 삼재의 뜻과 이기(二氣,陰陽)의 묘가 다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28글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고도 요긴하고 정(精)하고도 통하는 까
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이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 글자로써 송사를 심리하더라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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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정(實情)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자음은 청탁을 능히 구별할 수 있고, 악가(樂歌)의 율려(律呂)가 고르게 되며, 쓰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고, (어떤 경우에라도) 이르러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이 글자를 가지
고 적을 수가 있다.
드디어 (임금께서) 저희들에게 자세히 이 글자에 대한 해석을 해서 여러 사람들을 가
르치라고 분부하시니,
이에 신(臣)은 집현전 응교 최 항, 부교리 신 박팽년, 신 신숙주, 수찬 신 성삼문, 돈
녕부 주부 신 강희안, 행(行)집현전부수찬 신 이개, 신 이선로 등과 더불어 삼가 여러
해(解)와 예(例)를 지어서 이 글자에 대한 경개를 서술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
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바랐사오나, 그 깊은 연원이나, 자세하고 묘한 깊은
이치에 대해서는, 신들이 능히 펴 나타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시정 업적이 백왕(온갖 임금)을 초월하여, 정음을 지으심도 어떤 선인(先人)의 설을
이어받으심이 없이 자연으로 이룩하신 것이라.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지 아니한 데가 없으니, (이는) 어떤 개인의 사적(私
的)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음이 오래되지 않음이 아니나, 문물을 창조하시고 사업을 성취
할 큰 지혜가 대개 오늘을 기다리셨구나!
정통 11년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 우빈객,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