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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U 종교심리학수업 질문내용들

* 일반대학생(대부분 한국항공대학학생들)으로 교회에 나가는 학생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는 그룹으로 교회나 종교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질문들과 또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의 일부룰 인터넷 수업 토론실에서 가져와서 올려놓았습니다.

1. 첫 번 째는 융의 종교이해의 교안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융의 이해가 종교를 두둔하는 것에 대해 에리히 프롬이 신랄한 비판을 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어떤 점이 비판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두번째는 ´이단´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합니다. 전철에서 쪽지를 나눠주며 "예수님을 믿으세요"하고 돌아다니시는 분을 보며 독실하고 착한 제 친구가 "이런거 이단이야" 그러더군요. 글쎄 전 이단이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이 느껴지는데... 그 분들도 예수님의 그런 큰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 같은데...(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귀찮아 하고 신경도 안쓰지만^^) 교수님께서 앞서 답변에서 상대주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런 ´이단´을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지에 알 고 싶습니다. 똑같은 분을 모시고 그 분의 말씀을 믿는데...이건 ´이단이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고 기독교 신자로서

이것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 질문이 여럿이라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1) 프롬이 융을 비판한 것은 그의 이론이 매우 기독교적인 것 같으나 결국 하나님을 심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분명하게 비기독교적 입장을 취하고 종교를 비판했던 프로이드보다도 융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비록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전도는 이제 말이 아니라 행함이 중요하므로, 말만 전하면 된다는 단순한 사고는 오늘 시대에 적합치 않은 방식이라고 본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나도 때때로 그런 사람들을 볼때, 그들의 마음은 이해하나 "과연 이래야 되나..."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많았다. 이왕이면 누가 보더라도 기분좋게 말끔하게 차려입고, 자기의 역할을 다 하면서 전도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3) 이단은 신앙고백하는 교리의 차이에서 온다. 윤리적으로 착하게 사느냐 아니냐하는 문제보다 교리를 더 중요시한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은 종말의식을 강조하며 윤리적으로 선한 행실(때론 학생들을 가출하게 하는 위기위식을 너무 강조해서 가정과 사회에 문제를 가져오기도 하지만)을 하도록 하고 있어서, 때론 일반 기독교인들보다 더욱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교리, 즉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한다는 그 차이로 이단이라고 기독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 이단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잘못하면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종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박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다 하기가 힘들고, 대략 통일교, 몰몬,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조그만 군소 이단은 무척이나 많고... 기독교와 비슷하나 결국은 다른 신앙을 말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를 설명하기가 사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2. 언젠가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인데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우리 조상들의 미신 등으로 인해 기복신앙적인 부분이 많다고 들었는데요,,저도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에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들 하십니다..그렇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그냥 주님 뜻대로 하시라고 혹은 감사의 기도를 해야만 옳은 것입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운 것을 내어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해 달라고 많이들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답변) 기도할 때 우리의 바람을 얘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비신앙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 경제적 문제, 취직, 친구, 직장문제, 좀더 나아가서 사회의 부조리문제, 자연환경의 파괴문제, 나라의 안녕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너무 나 중심의 기복적인 신앙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둑놈이 헌금 십일조를 드리면서 "하나님 다음에도 성공해서 더 크게 헌금을 바칠 수 있게 해주옵소서"하면 되겠냐? (실제로 이런 류의 신앙이 많이 있음을 보지만...)

따라서 내 뜻을 구하나 반드시 이것이 주의 뜻에 합당한지 그리고 내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강의시간에 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저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강한 사람입니다. 제 친구를 비롯한 온갓 친척분들이 교회를 다니십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좋게 볼수도 있는 면들을 가능한 한 비판적으로 판단, 분석하여 이론적이며 논리적으로 비꼬아 대곤 합니다. 참고로 저는 천주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 종교인들에 대한 정체불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목사님이신 교수님께 별로 반가운 글이 아니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언제는 이러한 이야길 들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그 나라, 그 문화에 토착화 되게 마련이라고요.. 예를 들어, 분명 현재 기독교에서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신의 God 이지만, 특별히 신을 섬기지 않고 하늘을 숭배했던 중국 사람들에게 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하늘의 주인(천주)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치어 우리도 천주교라 부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는 외국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요? 저도 물론 영국에 1년간 다녀왔지만 그 깊은 차이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별히 다른 것은 그곳의 교회는 점점 망해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교회는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종교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이면 바쁜 일이 있어도 무조건 교회에 가야하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술 한방울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교회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피우지 못한다 하고.. 물론 그 친구는 교회에서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얻는다고 하였지만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해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럴 것이면 수도사가 될 것이지.. 하여튼 이러한 부분들은 분명 외국의 그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많은 종파 중 하나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인지..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God를 믿는 사람들끼리 어찌하여 그렇게 서로 싸워대는지.. 그렇게 싫어들 하는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법은 자신들의 종교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법일텐데 왜 그리 남들에게 강요하는지.. 아무리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러한 것으로 나와 같이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은 왜 깨닫지 못하는지.. 

  두서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냥 제 생각들인데 부족하다 싶은 부분들에대하여 답변해주신다면 혹시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체험하게 될지.. 힘드시다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수 있는 사랑과 믿음중 어느것이 먼저가 될수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좀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구지 둘중하나를 고르고자 한다면 말이죠..(친구랑 매번 싸우거든요..)

답변) 네가 던진 절문은 물론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리고 틀에 맞는 한가지 대답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내 생각을 간단히 얘기해 보마.

1. 나는 기독교 신앙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았다.

2. 이때 내가 믿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틀렸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보통 사람들이 하듯)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3. 성경과 기독교전통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배웠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바닷가 모래밭에 어린아이가 만들어 놓은 웅덩이에 고인 물 정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다가 하나님이라 할 때... 

4.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 알아가야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열려있어야 하고, 세속의 학문이든 철학이든 또는 비록 종교가 다르다 할지라도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때론 배우기 위해서 또 때론 그들의 부족한 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보다 깊은 신앙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5. 예수님이나 바울도 당시 유대교를 정죄한 것이 아니고 그 유대교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려고 하셨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희랍철학을 적대시하기 보다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도 사용했다.

6.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가 중요하다. 적대감으로? 사랑으로? 그렇다면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내가 믿는 진리(믿음)는 소중하지만(결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지만) 교리에 얽매여서 싸움을 한다면 이는 성숙한 태도가 아니라고 볼 수가 있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가 아닌 지구촌화되어가는 오늘날의 시대적 배경에서.

7. 그리고 윤리나 토착화 문제등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다룬 신학서적이 많기 때문에 한번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직접 볼 수 있기를 바란다.

4. 어렵게만 느꼈던 프로이드와 융에 대한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물론 아직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지만요^^) 저는 이전부터 종교에 관해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제가 종교가 없어서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사람의 생활과 종교의 관계입니다.저는 주위에 교회에 독실히 나가는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봤는데, 그 친구들의 얘기로는 인간의 삶의 주체는 항상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사는 것이 최고이며 삶의 무엇보다도 중요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만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종교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안식과 위안을 얻으며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종교란 삶의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종교인은 예외이겠지만요) 어차피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깐요,,그리고 종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생활을 잃는 다던가 주위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이 허다하지요.. 과연 종교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단순한 마음의 위안이지, 아니면 정말 삶의 그 이상의 주체가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어리석은 제자의 질문이지만 교수님의 현명한 의견 부탁드립니다. ^^

답변) 삶의 주체는 바로 나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예수께서도 "너의 목숨을 잃으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하면 무지에 빠질 수도 있다. 소위 맹목적인 신앙이고 이것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해를 줄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왜 내가 신앙을 갖고 있느냐에 대한 인식(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나 친구가 또는 뭔가 두려움 때문에 라면 이는 성숙한 신앙은 결코 아니다(물론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자신의 뿌리(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한다. 이것이 본능적인 것이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생각이든 누구나 이런 문제를 질문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행복, 돈, 명예,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진정한 나 자신의 실현 등 많은 욕구가 있지만, 가장 깊은 내면의 나의 모습은 나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현실을 도피하거나 무엇엔가 나약하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의 깊이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자는 정말 삶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불교에서든 어떤 다른 철학에서든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신앙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얘기할 수 있고, 그것은 나의 삶을 진정 용기있게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단지 위로만 되는 소극적 신앙을 넘어서...)

5. 강의록에 보면 ´융은 분명이 종교를 두둔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는 종교를 심리학적 주관주의의 늪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대주의로 축소시키고 말았다는 비판을 결코 면할 수는 없다고 본다´라고 되어있는데요.. ´심리학적 주관주의의 늪´... ´상대주의로 축소´..넘 어려워 이해가 안되는데요...??? 그 말 자체도 이해가 안가지만 왜 그런 이유로 융이 비판을 면치 못한건지도 의문이네요..

답변) 심리학적 주관주의란 심리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객관적이 아닌 주관주의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어떤 추상적인 그림을 봤을 때, 그 그림 자체를 판단하기 보다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심리를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최근에 TV에서도 어떤 행동에 대해 심리적으로 파악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라고 보면 좋다. 이런 경우 객관적이기 보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더 앞서는 경우가 많다. 즉 융은 종교자체를 보기 보다(신의 실재성이나 성경 말씀의 역사성 등)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이는 당연히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주의란 요즘 많이 얘기되는 개념으로, 예를 들면, 모든 종교는 각각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 속에서 나름대로 옳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로 옳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즉 융에 따르면 어떤 종교든 그 종교경험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하나만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물론 융은 기독교를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윤리에서도 얘기되는 것으로 각자 개인이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해준다면, 이때 생기는 문제는 공동체의 윤리, 가치관이 무너지고 오히려 사람들이 정신적인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상대주의가 좋은 점이 있음에도 그 한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융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심리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교수라는 나의 울타리안에서 보는 비판일 수가 있다. 역시 나도 내 환경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이런 비판을 통해 서로가 더욱 많이 생각할 수 있으리라 본다.

6. "1951년에 쓴 어떤 편지 속에서 융은 독일의 신약성서 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을 비판하고 있다. 융이 생각하기에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개신교 합리주의의 결과로서 기독교의 상징주의를 더욱 더 불모 상태로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개신교는 더욱 더 따분하고 보잘 것 없는 종교로 되고 말 것이라고 융은 말한다." 이부분이 저에게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융이 종교의 상징성을 통한 인간의 개성화를 주창한 부분이 저에게는 그리 탐탁치 않았지만 불트만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저역시 불트만신학을 비판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자유주의 신학은 제 생각은 이미 퇴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신학의 퇴보가 기독교상징주의의 득세를 뜻하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인데...도리어 복음주의 신학또한 융이 말하는 기독교의 상징화 부분을 강조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답변) 너의 글을 정말 흥미롭게 읽으면서, 신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느꼈다. 1. 융이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을 가진 불트만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만, 과연 이것이 상징주의의 득세를 뜻하는 것인가? 오늘날 상징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상징이나 신화가 거짓이 아니라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깊은 인간세계와 인간내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거대한 상징체계이며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주의의 입장과는 다르다.

  2. 복음주의는 지난 2세기에 걸친 이성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신앙을 이성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기독교전통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이다. 물론 현대 학문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그 정신(철저히 이성과 논리만 인정하는 정신)은 비판하면서 복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내가 공부한 Drew대학의 토마스 오든, 그리고 정말 괜찮은 옥스포드 대학의 앨리스터 맥그레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맥그레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IVP,2001)은 내가 적극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7. 제3주차 -융의 분석심리학(개성화)의 개성화를 이루기위해 해야할 일 뒷부분에 융은 [개체화의 네 번째 단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되는 전체 인성을 통합시키는 핵인 진정한 자기를 발달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에 [개성화는 개인의 자기가 의식화되었을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자기실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성화란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과제이다. 융은 존재의 완전한 실현으로서의 인성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이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이상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상은 다만 이정표이지 결코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개성화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말하고있다.

  그리고 [개성화를 이룬 사람들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융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개성화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일, 융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자신에게서 찾지 못했다면 (개성화는 개인적이라고 말했지만) 평생동안 그것을 연구하고 집중한 사람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 하는데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느정도까지 도달할수 있단 말인가? 그럼, 한 순간의 [득도]를 통해서 밖에 안된다는 말인가? 

답변) 융의 개성화 이론은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융 자신이 프로이드와 결별후 우울증에 빠졌을때,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하였으나, 모든 것을 무의식의 흐름에 맡기면서(어린 시절의 놀이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무의식의 용암처럼 흐르는 힘에 대해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의식적으로만 (교리적으로만) 살아가면서 삶이 메마르고 건조한 모습을 보면서, 내부의 무의식(남이 보는 겉모습의 나 보다 깊은 내면의 자아)과 만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즉 이러한 깊은 무의식과의 만남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종교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같은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삶에서 개성화가 필요한 것을 융은 느꼈고,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상징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고대신화나 동양종교나 세계각국의 원시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그럼 그는 얼마나 개성화를 이루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글쎄..."가 될 것 같다. 답변이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판단기준도 세우기 그렇고...

8. 안녕하세요.....? 저는 상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특히 미술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습니다.....저의 전공과는 많은 거리가 있지만 언젠가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헌데 그러하기 위해서는 심리공부를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듭니다(기초적으로라도..) 많은 심리학자들이 무신론자인지.... 기독교적 입장에서 심리와 인간의 기본적 본질을 탐구한 학자들은 누구인지.... 좋은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참!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시며 리플을 달아주시는 것 참 멋지시다는 생각이듭니다....학생들을 가까이 대하시는 그 모습에 그 학생들이 부럽습니다..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답변) 청희의 글을 읽으면서 지금 창 밖으로 느껴지는 화사한 봄기운 못지 않게 내 안에도 새로운 힘이 약동하는 것 같다. 살아가면서 좋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자, 질문으로 돌아가서,

1) 정신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크리스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에를 들면, 연세대에 이만홍교수나, 인제백병원의 최영민교수등.. 미국에서도 정신의학쪽에서는 기독교와 별로 대화가 없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기독교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좋은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David Benner, 정신치료와 영적탐구(이만홍, 강현숙역, 하나의학사, 2000)를 들 수 있다. 참, 정신의학은 상담보다는 약물등을 통한 의학적 치료를 중점으로 한다.

2) 심리학에서는 일반상담이론만 가르치지만, 한국에는 많은 상담자들이 기독교인이라 신앙을 상담에 접목시키고 있다. 그래서 목회(혹은 기독교)상담학회가 매우 많이 있다. 한국기독교상담심리치료학회(kaccp.org)에 들어가면 link site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3) 구체적으로 심리학이론과 신앙을 접목시킨 책을 소개한다면 하워드 클라인벨의 "현대성장상담요법" 제랄드 코리"상담학개론" 그리고 보수적인(성경을 매우 강조하는) 제이 아담스의 "목회상담학" 등 많이 있다. 기독교서적을 취급하는 책방의 상담학 코너에 가보면 이외에도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다.

9. 교수님의 답글에 덕분에 궁금해했던 칼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개념을 이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무의식의 개념을 들었다는 건 단어상의 모순이 아닐까요??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게 더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답변)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가능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마음의 흐름에 맡길 때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꿈이나 그림, 음악, 특히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의식적 노력이라기 보다 무의식의 흐름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 상징(예를 들면 기독교의 십자가)을 보면서 오는 감동, 명상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것 등은 수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노력보다는 만나진다고 말할 수 있다.

10. 교수님의 강의 중 이런 내용을 읽고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좀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것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있어서도 적용이 된다. 프로이드의 위대한 발견은 역동적인 무의식을 우리 마음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력(motive force)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과 인류 역사가 무의식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것과, 또한 이 무의식은 자유연상과 꿈 분석 등의 방법을 통해 완전히 탐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무의식의 역동적 본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일반적 주장이 옳았다 할지라도, 그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너무 편협된 것으로 보인다"라는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강의에선  무의식의 세계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측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로 정의 내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프로이드의 입장에선 무의식이 두 가지가 동떨어진 것이 아닌 모든 심리적 활동의 무의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심리적인 활동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의식이라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대한 편협한 주장이라고 단정 짓기 보다는 그의 무의식에 대한 해석이 남들과 좀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문제에 접근시 자기의 가치관에 의해서 문제를 해석하고 단정 지을경우 편협한 생각 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무의식이란 세계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의 논리는 편협하다기 보다는 새로운 시점을 우리에게 제시해준 창조적인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한번쯤 하게 됩니다.

답변) 좋은 지적이었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세계가 성욕으로 대부분 채워졌다는 것에 대해 편협한 것이라고 내가 비판적으로 얘기했지만, 네가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프로이드에게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창의적인 것일 수가 있다. 사람은 각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옇든 깊이 있게 읽어보고 좋은 질문을 해주어서 고맙다.

11. 동화와 신화 등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을 보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동화와 신화의 이면에 대해 알게 됩니다. 종교 또한 심리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재해석(재해석이란 말이 어울릴 지 모르겠지만...)한다면 상당히 흥미롭고 새로울 것 같은데 여기서 종교심리학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범주까지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종교심리학이란 글자 그대로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자체를 (또는 하나님 자체) 논하기 보다 사람들의 종교 경험(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설명을 해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부정적인 입장이나 긍정적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입장이 종교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그것 자체가 종교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2. 융의 이론 중 그림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의 어둡고 열등한 측면이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그림자라고 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그림자도 무의식속에 있지만 의식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되요?  꼭 그림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무의식은 우리 의식과 같이 작용하지 않는가요? 토론방에 보니까 의식과 무의식을 완전히 분리해서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저는 의식과 무의식은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서로 상호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생각이 틀린건가요? 알려주세용..^^

답변) 맞다. 의식과 무의식은 나누어 설명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있어서 서로 늘 상호영향을 주고 있으니 분리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초자아, 자아, 원본능이라고 심리를 삼등분하지만 이것은 서로 다른 공간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의 역할에 따라 단지 구분한 것 뿐이다. 그렇게 보면 좋을 것이다.

  나도 가끔 강의를 논리적으로 준비해서 얘기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내가 생각지도 않던 어떤 감정(기쁨,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의식과 어떤 무의식의 힘은 서로 섞여질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단지 역할의 차이로 구분할 뿐인 것이다.

13. 무의식은 자기도 모르게 발견되는가요. 저의 생각은 무의식이라는것도 자기도 어느순간에 의식으로서 찾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기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봅니다. 즉, 무의식을 발견하려는 의식---> 무의식을 통해서 나타나고 ---> 그런 무의식을 바탕으로 의식화 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것으로 봅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누군가의 답변) 나도 모르는 나의 무의식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미지를 탐험하는 것과 같이 흥미롭다고 생각됩니다. ^^ 우리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때 설레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여행은 너무 어려운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구요~~ 요즘 한창 전쟁여행이 유행하고 있죠?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게 무의식이든 아님 진짜 우리 전쟁이든 ....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지만...그런데 그것으로 인한 치료도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아무튼 현재의 내 생활을 떠나 나이지만 또 다른 나의 인생을 경험할수 있는 거잖아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거나 아님 책을 읽을 때처럼 말이죠 ^^ 

  그렇지만 여전히 내안의 무의식의 세계를 본다는 것을 쉽지 않은 일 같더군요. 프로이프의 꿈의 해석이란 책에 실제로 꿈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면 자신이 쓰고 있던 검은 모자 하나에도 전남에 대한 불만이 어렸을 때의 불만이었던 검은색과 연결되고.... 하는 등의 아주 복잡한 설명이 있었는데 오래 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흥미로운 부분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

답변) 적어도 이론적으로 무의식은 의지에 의해 발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나, 말의 실수, 연상, 전이 등의 방법으로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는 상징, 신앙교리, 그림, 음악 등의 방법을 통해 무의식에 있는 것들이 의식의 세계로 오게 되는 것이다. 요즘의 예를 들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좌뇌를 멈추고 아무 생각이 없어야 비로소 통합적이고 직관적인 우뇌가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명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생각하고 따지고 분석하는 것으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심층심리학의 기본적 이론이고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도 있다. 

14. 집단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원형은 무한한 에너지 때문에 그것이 의식과 만나는 경험에서 자아는 그것을 다스리기 보다는 오히려 그 힘에 지배를 받게 되며, 이는 종교적인 경험과 유사하다고 하셨는데여~ 그러나, 반드시 무의식만이 지배를 하는 건지....그러니깐 자아가 지배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우 그것은 자아실현에 역행되는 것으로 개성화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여??

답변) 정말 좋은 질문이었다. 먼저 자아가 지배할 수도 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어떤 느낌(무의식에서 오는 힘)보다는 이를 억압하고 대신 철저히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융이나 심층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것에 반대의견으로 무의식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어떤 것이 맞을까? 각자의 선택이지만, 우리의 무의식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 것은 융의 큰 공헌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의 부정적인 힘에 의해 오히려 자아실현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 맞다. 내가 몇가지 예를 들기도 했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힘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고(강의의 예를 들면, 노인이 갑자기 빨강머리 앤이 좋아져서 바람을 피우는 경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15. 저의 작은 할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셨고, 작은 아버지께서도 목사님이십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제가 중학교 이후로 교회도 나가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어서도 아니고, 성경말씀을 의심해서도 아닙니다. 제가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은 ´기독교인´ 때문이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사람을 보고 믿고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떤 종교의 신자를 보고 그 종교를 판단하려하는 세태에 대한 심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종교전쟁이나 일삼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종교를 내세워 사기치고,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나고...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아직까지도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이 잡히지 않고 있고, 종교에 대한 회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수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너무 막연한 질문 같지만...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관데... 사람을 이리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리고 저의 이런 회의와 혼란이 정당한 것입니까? 주님께는 큰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요...

답변) 너의 진지한 고민이 담긴 질문을 해주어서 고맙다. 종교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1) 청년기에는 심리적으로 볼 때 이제까지 배워온 모든 것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시기이다. 이것은 종교뿐 아니라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 등에서도 나타난다.

2) 이제까지는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 즉 주어진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하는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1+1=? 또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는 왜 떨어질까? 라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답이 주어지는 질문도 있지만, 삶에서 대부분의 질문은 주관적인 질문이다. 예를 들면, 사랑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은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고 더 깊이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맞고 다른 답은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종교라는 주제는 하나의 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갈등이 있을 수 있다.

3) 의심과 회의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신앙에 대해 정말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하도록 도우며 더욱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모습도 있다고 본다.

4) 종교라는 주제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5)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말이지만(앞의 어디엔가 썼음)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즉 믿지만, 어떤 글자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더 깊이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때 참으로 스스로 깨닫고 생각하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너의 혼란을 두려워 하지말고,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진실로 스스로 생각하고(남의 강요나 생각없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아가는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신앙의 삶도 순례의 길과 같은 것이다. 단지 마음의 평안만 얻기 위한 도구(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대답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너는 이미 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좀 어렵게 대답을 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함께 하길 기도하며.

16. 원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올려놓은 그림에서... 중심에 자기원형이 있고 다음에 집단무의식, 개인무의식, 자아 이런 순으로 그려졌있는데 여기서 자기원형이 자기 깊숙한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 다음이 집단무의식,개인무의식 ..이런 뜻으로 그림을 이해 해야 하나요? 아님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네가 옳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의식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 안에는 개인무의식, 그리고 더 깊이는 집단무의식, 그리고 이 집단무의식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자기 원형이 가장 깊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원형은 사실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신을 경험하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 때, 융은 바로 신을 만나는 자리가 자기 원형이라고 한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기의 모습을 만날 때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다.(물론 여기서 변화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변화를 말한다)

17. 제가 교수님께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어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져냐는 원초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궁금하게 느꼈던 것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보통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는 옷을 깔끔하게 입고 가는 것이 예의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교회에 오라고들 하죠..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려면 꼭 교회에 가야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교회에 가는데 옷을 깔끔하게 입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6살때 교회에 다니다가 주일에 한번 잠이 덜깬상태에서 잠옷을 입고 교회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 성가대에 누나가 ´다음부턴 잠옷입고 교회 오지 말아라라고 해서 어린마음에 상처를 입고 다음부터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게 믿음일까요? 아니면 형식일까요? 아니면 믿음과 형식을 다 같이 바라실까요? 그리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전도하는 분들이 서서히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꼭 교회에 가야지만 예수님을 믿을수 있는지... 기도를 하려면 집에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성경을 다 읽어본 결과 어디에도 교회에 와서 기도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제 질문에 정확한 답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교수님의 견해가 듣고 싶습니다.

답변) 먼저 예수 믿으려면 꼭 교회에 다녀야만 하나?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꼭 다니지는 않아도 된다. 실제로 성경을 믿고 예수를 믿지만 교회에는 다니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그 이유는 정말 다양하지만, 많은 경우 교회의 부패 때문에 실망해서 안다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꼭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가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선포되고 가르쳐지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친교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불완전할지라도 조직이라는 것은 내용을 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주의 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성도들이 모여 하나를 이룸)이라 말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가 기도하는 곳이라는 말씀은 성경뿐 아니라("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사도행전에 기록: 당시 초대교회는 지금과 같은 건물이 아니고 가정교회였음) 기독교 역사에서 가르쳐온 말씀이었다. 종교심리학에 관한 것보다도 실제로 생활에서 많이 느끼는 교회(또는 종교)에 관한 질문들이 많은 것 같구나. 어쨋든 좋은 질문이었다.

(추후답신) 사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상당히 많이 해봤는데 교수님처럼 자세히 설명해 주는 분이 없었던것 같군요.. 다들 막무가내식으로 다녀라, 아니면 다니지 마라고 말했었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것 같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__)(--)

18. 저는 개인적으로 무신론자 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건방진 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제하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에 대해서 거부감부터 드러냈던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를 진리추구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모두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진리추구에 가까운 것으로도 보입니다 . 불교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부처님의 신격화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부처님을 믿는 불교신자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의 고통, 두려움을 떨치고 사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사후의 세계에서도 행복을 얻고자 종교를 찾기 때문에, 눈으로 볼수 있는 신을 만들고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는 등으로 종교가 유도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종교가 그러한 것인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단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이 존재해서 사람들이 찾는 것인가?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논쟁도 많은 주제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중 하나인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면, 인간은 심미적단계(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찾음으로 인생을 즐기는 단계), 윤리적 단계(이타적 삶을 살음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삶에 있는 단계), 그리고 종교적 단계(신 앞에서 참 인간의 모습을 찾는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종교적 인간은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고, 오직 비약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믿음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고, 요즘 초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월에의 추구(나 자신의 자아실현이 심리학의 가장 높은 추구단계였는데, 요즘은 나를 넘어 초월하고자 하는 경향)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신앙의 문제이지(단순히 믿느냐 안믿느냐를 넘어서 마음 깊이에서 고민하고 결단해야할 문제) 오늘날 우리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이성(또는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늘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 견해를 밝히면, (앞의 어디선가도 이런 비슷한 대답을 길게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분인지를 생각하고 더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프로이드 이론의 한계에서도 지적했지만, 심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해서 그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될 수가 있다. 

19. 저는 평소에 궁금하던 교회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한 예로 저의 집 주위 반경 1Km안에도 10개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걸어서 1분도 안되는 곳에 교회가 3군데나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말씀을 알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리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교회들을 지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 하는지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혹....주위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어 1~2군데의 교회로는 예배를 일요일에 볼 수 없다면 이해가 가지만 저의 동네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몇 개의 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교회들은 신도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교회의 제정이 부족하여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큰 힘이 든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걸 보면서 교회..다시말해 많은 목사님들은 복음을 전하는 본질에서 이외 이윤추구 즉...하나의 사업을 하시는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건 똑같은데 왜 교인들은 자기가 다니지 않은 교회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지 또한 의문입니다. 저의 친척 중에도 교인이 많습니다. 실제로 목사가 되기위해 공부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일요일이 끼는 명절에는 절대 교향에 내려가시지 않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명절에 교향에서 부모님과 보내고 예배는 교향 동네에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고 찬송가도 부를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것을 꺼려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가 좀 어리석은 질문을 했지만 교수님은 저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특히 첫번째 질문에 대한 명괘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럼..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교수님!

답변) 보통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있는 실제적인 질문을 했구나. 너무 많은 교회? 혹시 사업적인 이윤추구가 목적? 사실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나도 때때로 해봤단다. 실제로 요즘 상가지역(아파트 단지 내에는 교회를 세울 수가 없으니까)에 크고 작은 교회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고 경쟁적으로 교인을 만들기 위해 여러 부정적인 모습도 비추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목사로서 나는 교회가 많고 적음보다는 교회가 과연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만일 그 많은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에 도움을 주고 이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교회라면 교회의 숫자는 문제되지 않으리라 본다. 가까이에 숲이 많이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공기를 많이 주면 줄수록 좋은 것처럼.  문제는 교회가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고 이웃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못할 때 문제가 된다고 본다. 나도 정말 좋은 교회가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주일은 가능하면 본 교회에서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 곳에 소속해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사회적인 관계성과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님마다 다르겠지만, 요즘은 명절때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교인들이 시골에 가기도 하고, 또 옛교회를 방문하기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좀 다른 얘기지만 미국에서는 휴양지에 교회가 있다. 그래서 휴가철에는 그곳 교회로 나가는 교인들이 많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기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20. 교수님께서 기독교인이라서 묻고싶고 듣고 싶은게 있습니다. 저도 기독교인이라면 쑥쓰럽지만 교회는 안빠져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 따라 교회를 갔었구요, 지금도 물론 일요일엔  안 빠지고 교회를 나갑니다. 솔직히 말해서요 엄마성화에 못 이겨 나간 것입니다. 교회수련회도 여러 번 갔었는데 저에겐 참된 믿음이라고 할까여? 생기질 않아요.. 되려 머리가 굵고 세상살이를 알게될수록 교회에 대해 교회는 그저 사회에 한 단체. 즉, 그냥 인간관계형성에 도움을 되겠다는 생각만 할뿐이고 그 이상은 아니에요. 교회 가서 목사님 설교를 들어도 그때그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참 많아요..태초부터 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선 모든 사람들에게 악한 것을 생각할 수있는 능력까지 주셔서 시험을 하시고 그러하셨는지......이런저런 이해가 안 되는게 참 많아요...그리고 솔직히 서울에 큰 교회는 비리도 있다고 들었구요.. 또 과학이발달하고 알려지면서 신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도 많이 갑니다 이런 거 생각하면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요..그래도 제가 교회를 매주 가는 것은 저와 우리가족을 위해서요..무슨말 이냐면요 제가 교회를 안가면 제 어머니께서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그러시거든요..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서 자든 어쩌든 빠지지 않고 갑니다..이래도 되는건지..또 정말로 하느님께선 존재하시는 건지 ..아님 믿는 사람들 맘속에만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런질문 많이 받으셨져??.. 죄송함다..그래두 답변해 주실수 있죠? 정말 교수님께서도 교회 다니시고 그러니까 이번 강의 많은 도움이 될껏 같습니다..^^;;종종 이해가 안되는 거 있으면 질문해도 되죠??^^

답변) 이에 대한 답변은 선불교 4행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를 인용하면서 아래 어디선가에서 부분적으로 답을 했지만 다시 한번 시도를 해보마. 물론 내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해서 네가 갑자기 믿는 것도 아니고 또 역으로 내가 하나님이 없다고 해서 네가 신앙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각자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2,000년도 더 걸릴 것이기 때문에, 내 경험을 간단히 말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고3때 신앙적인 갈등을 심하게 경험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예수라는 사람이 정말 있었고 믿으면 천국이라는 곳을 가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이것은 신나는 일이다. 생각해봐라. 시험도 없고(당시 시험에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을 상상해봐라), 나쁜 녀석들도 없고(내 주변에 깡패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늘 좋은 일만 있고.... 그런데 만일 이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이제까지 속아서 살아왔고(모태신앙이었음) 앞으로도 속아서 일생을 살게 될 것이다.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마음의 갈등이 심해서 기도하던 중 어느 날 환상을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 구름위에 있으신데 너무나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이 날 이후 난 나름대로 신앙의 확신을 갖고 신학대학에 들어와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여러 다른 종교와 철학들,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 등을 배우면서 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좁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여러 해 동안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더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질문을 해보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기서 하늘은 어디인가? 지구와 달 사이? 은하계? 안드로메다 성운? 은하계 너머 저 먼 어느 곳?....단순한 신앙은 단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도 된다. 그러면서 이것이 물질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예를 들면, 높은 곳에 좌정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도 역시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결코 어떤 공간적인 개념은 아니다.

  이때 단지 문자적인 것에 얽매여서 신앙생활을 한다든지 그런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냐? 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1+1=2라는 식의 객관적인 답변이 아니고, 다양하고 사람마다 깊이가 다르게 답변될 수 있다. 

  이제 나름대로 내 답변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계시다. 그러나 나는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늘 깊이 생각해본다. 이분은 내 안에 계시지만 단지 내 믿음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초월해 계시는 어떤 큰 분이시다.결코 단답식으로 설명될 분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나는 내가 듣고 배워온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늘 노력한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21. 종교와 문화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민족마다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그 문화 속에 종교가 깊숙이 관계되어 있죠. 프로이트 수업에서 종교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자녀를 교육시키는 교육방법을 들었는데 얼마 전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소녀들이 불이 난 학교에서 충분히 대피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차도르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신성모독, 풍기단소) 꽃다운 소녀들을 질직사 하게 만들었다면 국가의 강압과 문화와 종교적 힘이 합해져 인간이 필요로 해서 만든 것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면 이 모든 것이 필요악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 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봄니다. 비단 이 사건뿐만은 아닐 것입다. 실제하지 않는 소설을 예로 들어 죄송하지만 장미의 이름이란 책에서도 종교적 신념과 문화가 어울려 어떤 해악을 끼칠수 있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종교가 한 사회내에서 바람직하게 발휘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전 세계를 통틀어 종교가 없는 민족(국가)는 일본뿐이다 라고 들은적이 있는데 이것이 맞는 말인가요? 일본이 천황(왕?)을 숭배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민간에게 수천 수만가지의 믿음의 대상(예를 들어 집앞의 나무라던가 돌맹이에게 까지...)이 존재하기 때문인가요? 두 번 째가 맞다면 이것은 정령숭배적 성향으로서 종교로 가는 과도지적 성향이므로 민간신앙의 종교에 포함할수 있는 건 아닌가요?

답변) 너의 질문은 너무 거창한 질문이라 여기서 답을 시도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 같다. 나에게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행해온 것을 역사에서 (예를 들면 마녀사냥-여기에는 남자도 있었음-이나 틀린 교리를 믿는다고 죽이는 일들..) 그리고 또 지금 현실에서도 보고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잘못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판단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종교심리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하옇든 종교도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아직까지는 미미하고, 그들의 종교인 신또이즘도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고, 대체로 신사참배(크게 말해 죽은 조상들을 섬김)가 그들에게 나름대로 종교적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라고 할 때에는 어떤 역사적으로 인정된 커다란 종교뿐 아니라 샤마니즘(무교)도 종교의 분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22. 프로이드에 관한 강의를 듣다가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드가 가진 편협한 종교관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비판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의 편협한 종교관을 비판하면서도 프로이드의 종교관 때문에 종교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게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프로이드가 심리학에 끼친 영향이 너무 컸고, 또 나름대로 종교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지금 기독교인의 생각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의 이론이 도움을 준 것이라면,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 상이 어린 시절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는 것을 본다. 더욱이 그것이 부정적인 것일 경우에는 (예를 들어, 조금만 잘못해도 혼내주는 무시무시한 하나님, 완벽함을 요구하는 하나님 등)그의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잘못된 신앙을 갖을 경우 프로이드는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내 글을 좀더 읽어보기를 바란다.

23.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답변) 지금은 누구나 인간에게 무의식(이에 대한 설명은 프로이드와 융을 보아 알듯이 사람마다 다르게 설명할 수 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체계적으로 한 프로이드를 가지고 말해 보겠다.(물론 프로이드 이전에도 무의식을 얘기한 사람은 많이 있다. 플라톤도 그렇고... 그렇지만 무의식이 인격형성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것과 그리고 이를 심리적으로 체계있게 설명한 사람은 프로이드이다)

  죠셉 브러이어라는 학자와 프로이드가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안나 오 라는 여자가 찾아왔다. 갈증이 나는데도 컵에 있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증상때문에 왔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신체적인 증상(물을 못마심)인데도 몇번의 대화를 한 후에 치료가 된 것이다. 브리이어박사는 이를 당연시 여겼지만 프로이드는 이것을 심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안나 오 라는 이 여자가 어느 시장의 만찬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다가 정원에서 시장 부인이 말을 껴안고 컵으로 물을 먹이는 모습을 보았다. 안나 오는 말을 싫어해서 그 모습이 역겹고 싫었지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서 참았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물을 못마시는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심리적으로 설명했다. 역겨운 감정을 억압했는데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단지 의식에서는 사라졌지만 무의식이라는 곳에 들어 갔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물을 보는 순간 의식에 뛰쳐나와서 자기도 모르게 물을 못마시게 된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치료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고, 이런 예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심리학에 관한 기초적인 책들을 보면 프로이드의 이런 무의식에 관한 설명이 많이 나와 있으니 좀더 참고해 보기를 바란다.

24. 움,,,,수업을 듣다 보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여....집단 무의식´에 관한 부분이 이해가 갈듯하면서도 막연하게 개념이 안잡혀서여....움...혹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지상정´과 같이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하는 그런건가여? 그리고 그런 ´집단 무의식´도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을수는 없나여? 잘 모르겠습니다.. 클라인벨이라는 사람의 말도 잘 이해가 안가여.....제가 쫌 이해가 느려서요 ....아주 쉽게 설명하지 않으면 잘 못 알아 듣거든여

죄송합니다......

답변) 집단 무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융의 이론이 논리적이기 보다는 경험을 중심으로 풀어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난해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통찰력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을 갖는다. 쉽게 말해,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경험이 무의식에 쌓인 것이다. 그렇다면, 집단무의식은 개인이 비록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경험된 것들이 무의식에 쌓인 것이다. 아마도 유전인자를 통해서 전달되지 않았을까...(융은 유전인자라는 말을 사용 안함) 

  예를 들면, 서로 사는 곳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인류 모두가 "어머니"의 모습이나 "여성"(다음 강의 ´융의 종교이해´에 그림으로 설명함)의 모습에 대해 비슷한 이미지를 갖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집단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경험을 뛰어넘는...칼 융은 유명한 심리학자이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그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25. 어려서부터 성당을 다니며 지금까지 오랜 기간 종교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유일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타 종교의 가르침 또한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하지만 정말 무례하게도 제 짧은 소견으로는 교수님의 수강 자료에 객관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이야기를 하시는 것인지 기독교와 유대교 하여튼 크리스쳔이라고 불리우는 그룹의 종교 이야길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수님 또한 교수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즉, 프로이드가 그릇된 종교관을 가지고 종교를 분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수님 또한 기독교적인 종교관내에서 프로이드및 종교를 분석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뜻도 모르고 그저 반야심경을 의미 없이 외우는 것 처럼 이렇게 부적절하게 동기 되어진 종교적 행위는.." 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는 정말 놀랐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행하는 타 종교에 대한 무분별한 싫어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시다면 현재 저희가 알고 있는 종교들.. 그리고 설사 인정되지 않은 종교들, 흔히 이단이라 불리우는 종교들에 대해서 까지도 공부하였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는 이러한 한계가 있으며, 불교에는 이러한 한계가 있고, 이슬람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는지. 어떤  장점이있는지.. 이곳이 교회나 절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는 이성적으로 판단 될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논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답변) 민승아, 네가 쓴 글을 재미있게 읽어 보았다. 프로이드는 나의 비판에 변명할 기회가 이제 없지만, 나는 살아있으니 네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변명하면서 답해 보고자 한다.

1) 제목이 종교심리학인데, 기독교 중심으로 다룬 것은, 첫째 내가 목사이며 신학교수로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논하기가 쉽지 않았고, 둘째로 종교심리학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19세기 말부터 시작했는데, 주로 기독교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미국에서 종교심리학이라고 소개되는 책들은 거의 기독교배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런 흐름 속에 있게 되었다.

2) "뜻도 없이 반야심경만 외우는..."이 말이 타종교(불교)를 비하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네 글을 읽고 나서 해보게 되었다. 내가 적절치 못한 예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함을 느낀다. 물론 이 말은 "아무 생각없이 주기도문만을 외우는.." 또는 "성경을 베개삼아 자면서..." 이런 예들과도 같은 뜻이다. 반야심경은 금강경과 함께 내가 좋아하면서 자주 읽던 책들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책을 쓰면서, 그런 예를 들었던 것 같다. 

3) 종종 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겠지만, 나는 개신교(감리교) 목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타종파나 타종교에 대해 같이 대화하고자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강의에서는 종교들간의 비교를 하는 것은 쉽지 않고 이런 주제는 비교종교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너의 강한 질문에 변명(?)하느라 글이 길어진 것 같다. 너의 좋은 통찰력에 감사하며,

26. 교수님께서 변명 (?? ^^) 하셨듯 타 종교에 대한 비방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 하고 있습니다. 문자에만 매달리는 예로 주기도문은 그나마 우리말로 되어 있으니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적절한 인용이었다고 인정함니다. (제가 인정하고 안하고 별반 달라질건 없지만... ^^) 한 가지 질문할 점은 반야심경을 누가 만들었는지 원효대산지... 아무튼 아주 공덕을 많이 쌓으신 스님인걸로 알고 있는데 가엾은 백성이 좀더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이 불경만 외우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는 식으로 만들어 져서 지금까지 불교신자에게 끊임없이 외워지고 있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외운다는 것에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수련을 하듯이 마음을 비우는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것을 외우는 동안 심적으로 종교적 교감을 이룰 수도 있고 아니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그것을 외움으로써 자신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어도 되지 않을까요?

답변) 좋은 질문에 감사한다. 날카로운 질문들을 많이 해주어서 덕분에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뜻은 모르지만 반야심경을 반복하는 것이 줄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지 않느냐?"  지난 번 얘기하고는 모순 되듯 보일 수 있지만, 좀더 깊이 있게 얘기를 하자면, 비록 뜻을 모를지라도 반복해서 반야심경을 외운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 건강에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주고 있는 것을 본다.

  요즘 물질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넘어서 나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해서 명상, 요가, 호흡법, 좌선법 등 많은 훈련이 나온다. 기독교에서도 요즘 영성훈련이라는 것을 많이 얘기한다. 영성훈련의 방법으로 쓰여졌던 방법을 보면, 동방정교회에서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숨을 내쉬면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암송한다. 그런데 이것을 오래 반복하면서 이 말을 넘어서서 깊은 자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주기도문만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면서 언어를 넘어서 깊은 관상(명상보다 깊은 단계)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주 또는 하나님은 너무 큰 존재라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만나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온다. 즉 반야심경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말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것을 넘어 어떤 마음의 기쁨, 논리적으로 얻을 수 없는 우주와의 합일(너무 거창했나?)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융이 말하는 명상을 통해 무의식을 만나는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좀더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어 고맙다.

27. 우선 심리학(종교에 관한 것이지만) 을 수강하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저희 학교에는 교양이 많지 않아서 평소에 관심은 있었지만 배울 기회가 없었거든여....물론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접할수 있었겠지만여......(게을러서리..흑~) 전 특히 프로이드에 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강의를 본 순간 너무 기뻤습니다. 감사드리고여 종교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정신세계나 아니면 꿈에 대한 프로이드의 책을 읽고 싶은데 제가 읽더라도 난해하지않고 이해할 수 있는 (쉬운)책 없을까여? 종교와 관련된 것도 좋지만 강의를 듣고 나니 다른 분야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여,,,,부탁드립니다.....강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답변)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프로이드에 관한 책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프로이드의 모든 책들이 이미 한글로 다 번역이 되었고, 최근에도 그에 대한 해석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너의 말처럼 쉽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보자면...

최창호저,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도서출판 동녘, 1996. 김정일저, "아하, 프로이트" 도서출판 푸른숲,1996. 위 2권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고, 그리고 최창호 번역의 "한권으로 읽는 프로이트"나 프로이드의 글인 "정신분석입문"(여러 사람이 번역했음)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 쓴 프로이드비판에 관한 책이나 요즘은 언어학을 가지고 프로이드를 해석한 라깡 등의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조금은 어려운 내용이고, 원한다면 책방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28. 이것은 프로이드가 비엔나에서 생활을 했다는데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독일에서는 개인주의 철학이 발달해서 신학교에서 조차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학문으로써만 연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들은 얘긴대요 우스게소리로 독일 신학교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한국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더군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사회가 풍요해질수록 종교를 떠나 무신론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교회가 많은 한국에서도 앞으로는 이런 방향으로 변화될지도 모른다는 거구요. 제가 알고 있는게 틀리다면 리플 달아주세요. 저도 자세한건 잘 모르거든요

답변) 세속에 대처하는 종교의 흐름은 언제나 두 가지가 있었다. 18,19세기 미국에서는 계몽주의 영향으로 신앙이 이성적이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예를 들면, 헌법초안 작성하고 2대 대통령을 지냈던 토마스 제퍼슨의 경우, 부활과 기적등을 제외한 성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에 대항해서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소위 신앙대각성운동으로, 이 영향으로 미국 전역이 복음화되고 또 전세계에 선교사가 나가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으로 물들어가는 신앙 또는 신학이 있을 수 있다(네가 부분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그러나 또 한편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의 전통을 지키려는 복음주의 신앙 또는 신학이 널리 퍼지고 있다. 언제나 흐름은 다양하고 서로가 특징이 있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개인적으로는 지금 복음주의가 크게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29. 저는 종교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끔 친구 따라서 교회엔 가본 적이 있는데요 종파라고 하나요? 장로교 감리교 등 같은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 개로 나눠졌는지 궁금합니다. 그 종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거나 하등하다거나한 것은 없는지..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본래 기독교는 예수님 때부터 하나로 내려오다가, 1054년에 이탈리아 로마(지금의 바티칸)를 중심으로 한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정교회(동쪽에 있다 해서 동방정교회라고도 함, 소위 러시아정교회라는 것도 여기에 속함)로 나뉘어 진다. 그러다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1517년경부터 로마 카톨릭에서부터 개신교가 떨어져 나오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라고 할 때는 카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 이렇게 셋을 말한다)

  이 개신교에는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성결교, 구세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루터교, 메노나잇 등 수많은 종파가 있단다. 이들은 같은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을 믿고있으며, 역사적 상황, 지리적 상황,문화적 상황 등으로 조직이나 교리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들은 있지만 서로 인정을 하고 있다. 자세한 교리의 차이를 여기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고, 최근에는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같이 연합하여 일을 해나가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30. 저는 원래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지금은 그 믿음이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종교는 인간이 뭔가에 기대고 싶을 때 의지하고 싶은 그런 욕망에서 생겨난 것 같습니다.그래서 자기 의지가 약하고 나약한 인간들이 모여서 필요에 의해서 만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물론 저 역시 객관적인게 아니라 저의 생각입니다. 원래는 기독교인 이었는데, 자꾸  종교에 대한 불신이 생겨 납니다.교수님은 목사님이시기도 하니까 저의 이런 생각에 객관적인 그리고 확실한 믿음이 생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수업 내용이 부담도 없고 넘 좋습니다. 저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는 한 학기였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선불교에 나오는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4행시가 있다. 한문으로 쓸 수가 없어서 한글로 풀이해서 적어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그런데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래서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줄 알았는데

(역시 보아하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1행과 4행은 같은 말이지만 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깨달음의 차이!)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나 목사님, 선생님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이 당연히 계시다고 생각해 왔는데, 청년이 되어 보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지식을 쌓아가며 비판적인 안목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사람의 생각은 시간과 함께 바뀌어 가는 법...

이제는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더 성숙해지는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다. 의심하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이지, 나쁜 것으로 꼭 피해야 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래 나는 이 4행시를 좋아한다. 역시 보아하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성숙을 위해서는 아픔이 있는 법이다. 너를 위해 기도하마.

(학생의 답변)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몰라도,교수님의 이 구절은 제가 잠시 방황을 하고는 있지만 종교는 존재한다라는 뜻입니까? 아직 잘 모르겠네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저의 질문에 답변 잘 들엇습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생각이 조금씩 싹트려고 합니다. 좀더 발전하는 제가 될수 있겠죠? 성실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31. 저는 크리스찬입니다. 가끔 불신자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크리스찬들에게서 구원론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선택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고...물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충분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만 저도 구원론에 대해서는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데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초신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려주세요...자꾸 수업내용이 아닌것을 질문해서 죄송합니다. 근데 저한텐 정말 궁금했던 질문이라..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알다시피 이것은 1+1=2라는 식의 답변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느라 10년이 넘게 신학을 공부해왔고, 구원론에 관계된 책만도 엄청난 분량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1) 하나님은 죄가 많든 적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2)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물론 역사를 통해 자연을 통해 무엇인가 나보다 큰 힘이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더라도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가 어렵다. 3)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하셨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게 하셨다. 4)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이를 믿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구원은 내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가 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믿음은 완벽한 신앙이나 완벽한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그때부터 점점 신앙안에서 갈등도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으면서...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압축시켜 놓은 답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논쟁거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는 데 하늘이 어디냐? 10만광년의 지름을 갖고 있는 은하계 어느곳? 은하계 너머 다른 곳? (물론 이것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고 상징적인 언어이지만) 이렇게 간단한 질문부터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있다. 이것은 여기서 논쟁의 한계를 벗어나는 엄청난 작업이다. 친구들과도 많은 얘기를 해보기 바란다.

32. 여성학 강의를 듣는데, 여성과 남성의 성차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 성차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 중에 일어난 편견이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남성성, 여성성 두 가지의 양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성정체성 같은 것도 인간의 사회화 과정 가운데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선 분명히 여성과 남성을 다른 존재라고(능력차원이 아니라) 보고 각자의 자리와 그리고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맞추고 보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근데 여성학에선 이것은 여성과 남성의 개념이 아닌 인간차라고 보는거죠...듣다보니 둘 다 맞는 것 같아서 혼란이 오더군요. 아직 수업내용이 많이 나간 것은 아니라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런 종교적인 것을 그 강의 시간에 질문할 수는 없더군요..그래서 교수님께 답변 부탁드립니다...참고로 전 여성이랍니다.

답변) 여성학 시간에 교수가 말한 의미는 이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인 차이는 분명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교육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여성은 다소곳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성은 강하고 거칠은 면이 있어도 되고, 눈물을 보이는 약함(감정적인 면)이 있어서는 안되고...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적인 모습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요구되어 왔기 때문에 굳어진 것뿐이다.

  남성도 소위 여성적이라고 불리우는 정서적이고 관계중심적인 마음을 지녀야 하고, 여성도 집안에서만이 아니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할 수도 있다. 지금 성의 역할이 이렇게 바꾸어가고 있다. 이것을 융의 이론을 빌려 말하면, 남성안에는 여성성(anima), 여성안에는 남성성(animus)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들이 서로 만나야 온전한 인간(전인적인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만난)이 된다는 것이다.

  성의 역할이 바뀌는 것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본다. 과연 오늘날 무엇이 남성의 참된 역할(옛날처럼 경제적인 책임만 지고 집안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참된 것인가?)인지를 찾도록 노력해야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시대는 지금과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말씀들은 그 정신이 중요하지 문자적으로 따를 수는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일만 하고, 여자는 애기 낳고 집안살림만 하는 것을 성서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여성들은 숫자에 넣지도 않았고, 영혼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경에도 여성들은 숫자를 셀때 들어오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즉, 남성과 여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왜곡되어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바로 잡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33. 저는 기독교인인데 몇 일전 버스를 타고 가다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기로는 여호와의 증인은 교주를 중심으로 교주를 하느님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분류되는 걸로 알았는데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교주 같은 것은 없고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일하고 월급이 없이 일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기독교에서는 월급제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위상이 흔들릴까봐 자기들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던데 왜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으로 분류됬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 기독교 안의 여러 종파들이 서로 차이는 있지만, 신앙이 같기 때문에 서로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이 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을 믿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고, 우리가 메시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나 제도 면에 있어서 오히려 기존 교회보다 좋은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판단은 이런 신학적인 것을 가지고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34. 프로이드의 종교에 관한 첫 에세이인 ´강박적 행위와 종교적 의례´에서 강박적 신경증이 "종교 형성의 병적 대응론"으로 그 종교자체를 "우주적 강박적 신경증"이라고 했는데 강박적 신경증이 어떤 개념인지 잡히지가 않습니다..

답변) 강박적 신경증(obsessive neurosis)이란 쉽게 말해 정상적이 아닌 신경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괜히 짜증내는 히스테리 증상이라든지, 야구선수가 타석에 나갈 때 방망이에 꼭 침을 세번 뱉고 문지르야 편하게 느낀다든지 하는 것등을 말한다. (더 나가면 미쳤다고 하는 특이한 행동들까지도)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게 만든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원인을 찾아서 밝혀주면 그 증상이 없어진다고 본다. 예를 들면, 뾰쪽한 것만을 보면 공포에 떠는 여학생이 있었는데(강박적 신경증) 상담을 해보니 그 여학생이 어린 시절에 동생과 함께 지하실에 내려가다가 남동생이 실수로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뾰쪽한 못에 찔려 죽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무의식에 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후 그 여학생을 이유없이 공포에 떨게 한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원인을 찾아 설명하면 그 공포(신경증)이 없어진다는 것이 정신분석 이론이다. 이때 신경증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종교는 우주적 신경증(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인류보편적인 신경증) 이라는 것이다. 즉 신을 찾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신경증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치유도 신경증의 원인을 찾아서 설명해 없애주는 것처럼,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더 이상 이런 집단적 신경증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경증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35. 기독교신자입니다. 카톨릭과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모르겠습니다. 뭐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마리아와 사도들을 카톨릭에서는 신성시하고 기독교에서는 아니라고 하던데...그리고 프로이드가 유대교인으로써 핍박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 어째서 그 당시나 지금의 사람들은 유대인을 싫어할까요

답변) 왜 유대인은 그렇게 미움을 받았을까?에 대한 질문은 아래 추지연에게 보낸 답변을 읽어보면 나와 있다. 그리고 카톨리과 개신교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간단히 얘기해 본다면,

1) 기독교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본래 교회는 하나였다가 1054년에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만 카톨릭(이것이 지금 말하는 카톨릭, 즉 천주교)과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정교회(혹은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방정교회라고도 함)로 나누어지었다. 그리고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지금의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등 대부분의 교파들)가 카톨릭에서부터 떨어져 나왔다. 따라서 기독교(Christianity)라고 말할 때는 이 셋을 다 얘기하는 것이다. 물론 동방정교회는 우리나라에 별로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러시아나 미국 쪽에는 많이 있다.

2) 문제는 교리적인 차이점들때문에 서로 비난하기 쉽고,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는 카톨릭이 이단이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전통이 다르고 신앙 고백에 있어서 차이점은 있지만,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성경(카톨릭은 개신교가 외경이라고 부르는 약 12권정도의 책을 구약에 더 갖고 있지만)을 믿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이 일해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것은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도 잘 보여진다.

3) 소위 마리아숭배니 성체예배니 또는 많은 조각이나 상징물들 때문에 우상숭배하는 집단 같은 생각이 들고, 교황의 무오설 주장등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실제 문제도 있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종교적 전통이 다른 데서 오는 이유도 있다. 예를 들면, 그들도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 마리아 자체가 구원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또 신성한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죄없으신 분, 성모 라는 칭호를 붙이게 되지만(물론 너무 강조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3위 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교황 중심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또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개신교의 너무나 나누어진 교파들로 생기는 문제들을 생각해본다면). 남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개신교안에도 지적될 것이 또한 많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카톨릭을 편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개신교에 속한 목사로서 나의 신앙전통에 긍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이해하고 잘못된 점은 고쳐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카톨릭도 많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이 둘의 차이를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도서관에 가보길 바란다. 교회사나 종교개혁에 관한 책들을 보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36. 저는 기독교 신자이며,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의문은 프로이드의 정신발달이론을 기초한 기독교 교육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점입니다. 저의 짧은 견해로는 프로이드의 이론적 체계인 윤리적 억제와 승화의 욕구를 기초로 한 기독교 교육이 실현된다면 이는 상당히 바람직한 교육 목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답변) 프로이드의 억제와 승화에 대한 이론을 기독교교육에 사용한다면 좋은 교육방법이 나올수 있지 않을까? ... 좋은 생각이다. 허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일단,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이론을 더욱 전개시킨 에릭 에릭슨이라는 학자가 있다. 또 이 에릭 에릭슨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교육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제임스 파울러(신앙의 발달단계를 정리한 학자)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우리가 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파울러의 신앙발달단계를 공부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프로이드의 이론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37. 강의 내용 가운데 #그러나 어네스트 존스는 ꡒ... 그녀의 이런 부정적인 영향은 프로이드가 후에 기독교적 신념들과 의식들을 싫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즉, 두살 때의 사건-가톨릭 신자였던 보모의 도둑질-이 프로이드의 반종교적 사상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했는데,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1-4세 때에도 기억이 있지만 그러한 기억들은 4-5세에 일어나는 general amnesia 현상에 의해서 다 망각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4-5세 이전의 기억은 희미한 screen memory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겨우 두살 때의 사건이 그렇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정말 좋은 질문을 해 주었다. 실은 나도 개인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곤 했었다. 프로이드 나이 두살때 자기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주었던 보모가 도둑질한 죄로 쫓겨나갔던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준 영향에 대해서 대부분의 프로이드 연구학자들은 영향을 크게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1살이나 두살까지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데, 어머니나 가까이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배우기 때문이다.(언어가 아닌 무의식 차원에서의 교육에 의해) 이때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신뢰, 세상에 대한 신뢰 등이  형성된다고 본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경험은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어린 시절의 영향의 중요성을 종종 보았기 때문에 나도 역시 프로이드 두살때 경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8. 실상 종교는 우리 실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어린시절부터 주변에서 많이 보고 들어왔습니다. 물론 유치원도 교회와 같이 붙어있던 요즈음의 여느 유치원이랑은 다른 곳을 나왔구요. 그치만 실상 지금의 저에게 남아있는 어린시절의 종교에 관한 기억이란 성탄절에 삶은 달걀위에 그려져 있는 웃는 얼굴뿐입니다. 어른이 된 지금 삶에 가끔씩 지쳐오면 저도 모르게 종교를 찾곤 하는데 저 자신이 나약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 꺼려지게 됩니다. 비단 이 생각은 저뿐만 아니라 종교에 관해 무지한 대부분의 무신론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종교는 어떤 것이며 저 같은 무신론자들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단지 마음이 평안해 진다고 믿음 없이 종교에 의지해도 되는지 매우 궁금합니다..바쁘시겠지만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신학 공부를 한 시간만 대략 14년(대학 4년, 대학원 2년, 미국대학원 석사3년, 박사 5년)이고, 또 신학대학에서 지금 신학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곤 하지만, 가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인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이렇게 이해했다. 인간은 세종류가 있다. 심미적 인간, 윤리적 인간, 종교적 인간. 심미적 인간은 자신의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이 단계에서 인간은 조금 더 성숙하면 남을 돕는 데서 참 기쁨을 누리는 윤리적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에서도 참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뭔가 자신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데 바로 그것이 종교적 인간이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생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비약(leap)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종교를 찾게되고, 참 인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니체가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허무함을 용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종교에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고, 정말 인생의 깊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인간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그렇게 가볍거나 마음의 위로만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이라고 본다. 너무 길게 쓴 것 같은데.... 하옇든 좋은 질문이었다.

39. 한가지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교수님께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강의내용의 시점을 중립적이 아닌. 종교계에서의 시점으로만 보는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즉, 강의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은, 프로이드의 여러 환경적인 영향 때문에, "프로이드의 내면세계에 일찍부터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일으켰으며 기독교 신앙이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라는 부분을 보면서요, 꼭 환경의 영향 때문에 프로이드가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드의 (적어도) 종교에 대한, 과학적이고 냉철한 어떤 의견을 환경이나, 심리적인 면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 않나 하구 섣부른 생각을 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철없는 학생의 질문이라고 너그러이 생각해주시고 , 교수님의 좋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 

답변) 대경아, 네 질문을 보면서 글을 깊이 있게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카로운(?) 질문을 주어서 반가왔다. 우선, 프로이드가 무신론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어떻게 해서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재밌는 것은 프로이드가 자신은 정신분석이라는 비판적인 도구를 얻기 전에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얘기하고, 또 정신분석은 유신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얘기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신론자가 되게 하였을까?  한스 큉이나 필립 리프 등 많은 학자들은 내 글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린 시절의 영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주관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물론 프로이드는 과학적이 되려고 노력했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들은 주관적인 것이 강했다. 예를 들면 종교비판도 외디프스 컴플렉스 이론을 가지고 설명했다. 외디프스 컴플렉스 이론은 제일 먼저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남자아이는 엄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적으로 삼고 또 동시에 그의 힘을 그리워하는 것),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외디프스 왕의 이야기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여기에 사회학의 여러 이론들을 빌려와서 종교비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기를, "비록 내가 인용한 사회학의 이론들이 (예를 들면, 족외혼, 토테미즘) 후에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틀림없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러한 비판은 물론 나도 동조하는 것이지만 많은 여러 학자들이 같이 말하고 있다. 우선 내가 기독교인이고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목사이기 때문에, 나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물론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수로서 객관적인 비판을 하려고 시도한 것도 역시 사실이다.

40.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객관적이면서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실제 프로이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가 성경외에 믿을 만한 자료를 가지고 Moses and Monotheism 을 기록했나요? 그와 같이 심리학이란 틀 안에서 성경을 다 이해 할 수 있나요?

답변) 물론 성경을 또는 신앙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종교이해에 대한 이러한 한계는 내 글의 마지막부분에서 비판을 했다. 프로이드는 이미 무신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자기가 갖고 있던 정신분석 그리고 사회학이론들의 틀을 가지고 종교를 이해하고자 했는데,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프로이드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그의 위대성 때문에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아버지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하나님 상을 그린다고 하는 등의 분석은 우리가 올바른 종교이해를 위해 생각해 볼만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종교이해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공헌과 한계를 깨닫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아뭏든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겠지만 우리의 생각을 넓혀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기를 바란다.

41. 크리스챤인들이 왜 유대교인들을 싫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차이가 있다고 잠깐 들은 적이 있은데 유대교인들을 비판하기보단 핍박받은 유대교인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그 시대 때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답변) 기독교인들이 왜 유대인을 미워했을까? 쉐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봐도 사회의 지탄을 받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는 유대인이었고..."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스피노자도 유대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나치하에서 6백만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할 때에도 카톨릭이나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여러 사회적이고 정치적, 인종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예수를 죽인 것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기독교 국가에서는 유대인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의 너무 뛰어난 점 때문에 시기에서 온 것 일수도 있고 그들의 배타적이고 독특한 유대교 사상이나 풍습으로 싫어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