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리학(10주).hwp
닫기종교심리학 10주차 “종교경험의 여러 주제들: 윌리암 제임스, 정신질환, 신비주의” / 박노권 교수
10주
I. 윌리암 제임스
1) 생애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미국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세 살에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화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다시 문학을 공부하는 등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다. 이 때 그는 그가 정말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찾지 못하고 이것저것 전공을 바꿔가면서 방황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정하지 못하고 아이덴터티 혼란 속에서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의 방황은 그가 27세 되던 1869년에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때 그는 불면증, 소화불량, 디스크 등에 걸리면서 신경쇠약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때 제임스가 겪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한 것이었다. 이 당시 그가 보낸 편지나 일기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저는 지난 며칠동안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몇 주 동안 계속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은 하였습니다... 오늘 나는 내 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지난 겨울 내내 나는 거의 자살을 하려는 문턱에까지 갔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는 1869년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면서, 신앙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다가 1870년 2월 1일 하버드 대학교 의학 실험실 탈의실에서 어슴푸레 들어오는 석양의 빛을 보면서 인간의 삶에는 어느 곳에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으며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들의 삶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삶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일종의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져 있는 병, 고통, 재난, 죽음 등 어두운 부분을 망각하거나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극복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삶의 근거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영원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등의 성경 구절에 의존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로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다시 그의 삶 앞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제 그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삶의 비극적인 전망,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이던 비현실감 등이 사라지고 평안이 밀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870년 5월 7일 “아, 하느님, 얼마나 제가 당신을 늦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창 속에 있을 때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환절기에 찾아온 나의 변화! 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종교 체험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종교체험을 하게 된 동기나 종교체험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체험자가 내면적으로 느끼는 감정(emotion)은 대단히 짙을 수 있으며, 그것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체험은 그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1870년 제임스는 결정적으로 종교체험을 통해서 그 전까지의 긴 방황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후 1872년 하버드 대학의 생리학 교수가 되고, 1879년 철학교수가 되며, 1889년 심리학교수가 되어 심리학과 종교적인 문제를 주로 연구하면서 살아간다.
2) 제임스의 종교심리학에 관한 연구
종교심리학은 20세기 초 윌리암 제임스(1842-1910)에 의해, 특히 그가 기포드에서 강연한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후부터, 관심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종교체험 연구에 관한 가장 뛰어난 저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의 특징: 이 책에서 제임스는 인간의 종교, 종교성, 종교감정, 종교체험, 종교와 성격과의 관계, 신앙과 건강과의 관계, 회심체험의 특성, 회심체험의 결과, 신비주의 등 수많은 종교심리학의 주제들에 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제임스가 이런 주제들을 다루면서 그것들을 기존의 어떤 이론이나 학설에 꿰어 맞추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제임스는 그가 종교체험을 했던 사람들의 자서전, 일기, 서간문들을 통해 수집했거나 그의 동료였던 스타벅(Edward Starbuck)이 수집해 놓은 종교체험담들을 토대로 해서 사람들은 왜, 어떻게 종교체험을 하고 있으며, 그 체험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또한 그 체험들은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사실에 관하여 실제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양적인 자료를 통계로 나열하는 형태로 정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에는 도표나 그래프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적인 문서들을 풍부하게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경험자가 직접 자기 손으로 쓴 일차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사례 연구자료가 되는 것이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흔히 통계적인 평균 숫자를 계산하여 가지고 대부분의 연구에 있어서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가려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제임스는 각 개인의 종교적 경험이 아무리 다르고 비정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독특한 점이 있는가 함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이러한 방식으로써 그는 인간의 종교 경험을 인습적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아무리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과연 그 가운데 어떠한 점이 인격적이며 참된 것인가를 발견하려고 했다.
(1) 신비체험을 통한 변화
이런 연구들을 통해서 제임스는 사람에게는 각성상태에서의 의식 이외에 또 다른 의식 상태인 신비적인 의식 상태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신의 현존을 느끼거나, 환상을 보거나, 환청을 듣는 등 이른바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체험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체험에 사로잡히게 되며, 그 체험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역동적인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에게는 지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교리보다는 그들의 전존재를 뒤흔들 수 있는 신비체험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체험들만이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주며, 그들의 삶에 새로운 정열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체험들은 어떻게 해서 체험자들을 사로잡으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제임스는 이 체험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emotional)인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즉 이 체험들에서 수반되는 감정은 그 전까지 그들의 의식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일상적이며 세속적인 것들을 몰아내고 그들이 방금 체험했던 종교적인 것들을 의식의 중심에 옮겨놓아서 체험자들은 이제 종교적인 것들을 따라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전까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종교적인 주제들이 이제는 삶의 중심에 옮겨지게 되고, 체험자들은 이제 그 전처럼 힘들이지 않고도 종교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종교적인 주제들이 의식의 중심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은 종교체험 때 표출되는 감정이 그 전까지 냉담함 속에 방치되어 있던 종교적인 관심사들을 그의 뜨거운 열로 데워놓아서 의식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이런 설명은 아직 정신분석학이 발달하기 전이라서 매우 소박하게 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내용들이다.
(2) 우주와의 연합을 통한 변화
또 한 가지 제임스의 주장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삶의 목적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의 성공이나 어떤 성취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우주와의 연합이나 조화에 있으며, 이 연합으로부터 그들은 어떤 종류의 영적인 에너지를 부여받아서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안정과 평안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임스의 이러한 주장은 결코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러한 삶이 더 좋다는 정도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살았으며, 지금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사람들은 그런 삶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나의 욕망이나 나의 좁아터진 의식에만 사로잡혀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존재’와의 하나됨 속에서 그에게 이끌려 사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에게 있어서 이런 삶은 종교적인 천재들에게만 가능한 삶이 아니다. 많은 종교체험자들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삶은 허용되어 있다. 물론 체험의 강도야 모든 사람들에게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3)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평가
제임스의 연구 방법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그는 어떤 종교체험이 참다운 종교체험인가를 판단하려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이 있듯이 그 체험의 결과를 보고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는가? 즉, 모든 참다운 종교체험은 궁극적으로 체험자들을 성자성(saintliness)으로 이끌고 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윌리암 제임스는 존 듀이와 함께 미국 실용주의의 시조로 불린다.
3) 제임스의 “두 종류의 사람”
제임스가 기여한 여러 가지 이론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 한 번 태어난(once-born) 사람과 두 번 태어난(twice-born) 사람”을 소개해 본다.
(1) 건강한 마음(healthy-minded)의 사람: 한 번 태어난 사람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족한 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병적인 회한이나 삶의 위기가 전혀 없이 자연스럽고 올바르게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숙명이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들이 체질적으로 쾌할한 성향을 가지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지극히 일시적인 슬픔이나, 순간적인 의기소침도 선천적으로 느끼지 않게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되어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건강한 마음의 사람들은 기독교 사상의 중심인 죄의 회개를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한다. 이들에 의하면 회개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2) 병든 영혼(sick soul)의 사람: 두 번 태어난 사람
건강한 마음의 사람들이 악을 조심스럽지만 가능한 축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면, 병든 영혼의 사람들은 가능한 악을 확대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깊은 정신적 우울이나 고통을 경험하고 새롭게 인생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같아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길게 서술해 본다.
50세경에 톨스토이는 어떤 당혹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상태에서 톨스토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예전에 자명해 보이던 사물들의 의미가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그 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안에서 무엇인가 그 동안 내가 내 삶을 그 위에 얹어 놓았던 것이 무너짐을 느꼈다. 나를 버티어 주고 있던 것이 무너져 버렸으며, 나의 정신적 삶이 이제는 끝나 버렸음을 느꼈다. 도저히 무찌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의 존재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 나를 보라. 겉으로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밤에 혼자서 자는 방의 서까래에 목을 매달지 않도록 밧줄을 숨겨두고 있다. 또한 더 이상 사냥을 가지 않는 나를 보라. 내가 총으로 내 삶에 마지막을 고하려고 하는 손쉬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나는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삶을 떠나도록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삶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모든 외적 환경으로 인해 완전히 행복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으며, 착한 자녀들이 있었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늘어나는 재산이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동족과 아는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 밖에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도 나를 칭송하고 있었다. 과장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내 이름이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노라고 믿을 수가 있었다. 더구나 나는 정신이 이상하지도, 병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 나이 또래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농부들처럼 밀을 거두어들일 수가 있었으며,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두뇌 노동을 할지라도 조금도 탈이 나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삶의 그 어떤 행위에도 합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내 마음의 상태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내 속에 어떤 사악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란 삶에 취해있는 한에서만 살 수 있으며, 그가 정신을 차리면 삶이란 모두 어리석은 기만이라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삶의 진실은 그 안에 아무 것도 심지어 우습거나 재밌는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삶이란 정말 단지 잔인하고 바보 같은 것이다. 사막에서 맹수에 놀란 여행자에 대한 오래된 동양의 우화가 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어느 날 여행자가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물이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 우물의 바닥에는 그가 떨어지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큰 뱀(dragon)이 있었다. 그래서 이 가련한 사나이는 맹수에게 잡혀 먹힐까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뱀에게 잡혀 먹힐까봐 아래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이 우물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 어느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팔에서 점점 힘은 빠졌고, 그는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려 있었다. 그때 그는 두 마리의 생쥐를 보았다. 하나는 흰색이고 다른 하나는 검은 쥐였는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 주위를 기어다니면서 그 나무의 뿌리를 갉아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보며 그 여행자는 자기에게 죽음이란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나무 잎사귀에 꿀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길게 내밀어 꿀을 핥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홀한 맛이었다. 이 우화 속에 나오는 여행자처럼 나 역시 삶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 나 역시 죽음이라는 뱀이 나를 찢어발기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이런 순교자적인 운명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인생의 단 꿀을 빨아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 그 꿀은 나에게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낮과 밤인 하얀 쥐와 검은 쥐는 내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갉아대고 있다. 나는 한 가지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피할 수 없는 뱀과 쥐 두 마리뿐이다. 그들에게서 나는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이것은 결코 하나의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반박할 수 없는 진리로서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의 결과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내일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내 삶의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우리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도저히 파멸시킬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이 질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질문들이다. 어리석은 어린아이에서부터 가장 현명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 없이는,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삶을 더 지속해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쌓아놓은 지식의 더미에서 이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해보았다. 나는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이 문제들에 관해 물었다. 그리고 나는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열심히, 끊임없이 그 해결책을 찾아 헤맸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길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여정 속에서 나는 결국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나보다 먼저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학문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던 사람 역시 아무런 해답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들 역시 나를 절망으로 이끌어 갔던 문제--인생의 무의미성과 모순성--가 인간의 평상적인 지식을 가지고서는 결코 접근해 갈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택하고 있는 길이 네 가지가 있다고 톨스토이는 주장한다. 1) 첫 번째로 동물들처럼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 아래에 있는 뱀이나 위에 있는 쥐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단 꿀만을 핥아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나는 이 같은 방식에서 아무런 것도 배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2) 두 번째로는 반성적인 쾌락주의이다. 즉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이 쾌락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첫 번째 방식보다 더 교묘하게 취해서 사는 방식이다.
3) 세 번째로는 자살을 하는 것이다. 자살은 논리적인 지성인들(쇼펜하우어 같은)에 의해서 우리 인생의 가장 자연스럽고 일관성 있는 여정이라고 논의되어 왔다.
4) 마지막으로, 그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나의 지성이 작동하고 있을 때, 내 안에서는 또 다른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자살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을 이름지어 말한다면, 아마 생명에 대한 의식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금년 한 해 동안 내가 밧줄을 이용해서 자살을 할 것인가 아니면 권총으로 자살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골똘해 있는 동안 그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감정이 내 가슴에서 떠올라 와서 그 생각들을 맥빠지게 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신에 대한 갈증이라는 명칭 이외에 다른 어느 단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신에 대한 이 열망은 당시의 내 생각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 당시 내 생각의 흐름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내 가슴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두려움의 감정--나를 고아처럼 보이게 하고 낯선 것들 한 가운데서 소외되게 만드는 감정--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감정은 누군가의 도움을 찾는 희망에 의해 완화되었다.
톨스토이를 회복으로 이끌어간 이 과정, 신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 이 지적이며 감정적인 과정을 통해 그는 일상생활의 미몽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이 톨스토이에게는 무가치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인생을 보는 방식과, 악(고통)이란 우리의 삶에 본질적이라고 보는 삶의 태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가 병적인 마음가짐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후자의 눈에 보기에 건강한 마음가짐은 너무 경솔하거나 맹목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건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병든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인생을 보는 방식이 너무 남자답지 못하고 병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병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완전한 종교란 그 속에서 삶의 비관적인 요소들이 충분히 발달해온 종교인 것으로 본다. 불교와 기독교는 이런 종류의 종교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종교이다. 그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해방의 종교이다. 사람은 진정한 생으로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비본래적인 생에서 죽어야 한다. 제임스는 바로 이것이 종교체험, 즉 분열된 자아가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2. 종교와 정신질환
우리는 보통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우리와 다르거나 또는 정해놓은 규범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심한 경우 “마귀에 들렸다”고 표현하며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기도 한다. 소위 이 “마귀들림”이 보여주는 증상과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신질환과의 관계는 무엇이고, 더 나가서 이 정신질환과 종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종교심리학에서 다루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 본다.
1) 성서의 마귀론과 정신 질환
귀신과 정신 질환의 관련성에 대해 20세기 중반에 들면서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버논 멕케스랜드 교수는 신약성서가 쓰인 시대의 헬레니즘 문화, 다시 말해서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세계관에 비추어 성서의 마귀론을 연구했는데,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현대의 의사들은 혼란된 정신 상태를 신경증 또는 정신 질환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고대인들은 똑같은 현상을 귀신들린 상태로 보았다.... 현대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정신 질환은 원본능(Id), 컴플렉스 또는 초자아의 충동이 너무 강해서 자아가 이성적인 조절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정신의 혼란이 지속되면 인격은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레슬리 웨더헤드는 예수가 질병을 치유할 때에나 갈릴리 호수에서 폭풍을 가라앉히던 기적을 제외하고는 악마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비록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에 귀신이 때때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 대신에 예수는 어떤 사람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점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순수한 마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 철저한 헌신 등이 인격의 건강과 통전성 유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레고리 질부르그는 마귀론, 마녀 사냥, 귀신 축출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회와 의학이 마귀론에 완전히 굴복함으로써 정신의학이 법전화된 마귀론의 일부로 그리고 정신 질환 치료가 일종의 법적인 처벌로 전락하여 정신의학이 대 암흑기에 빠지게 된 역사적 과정을 밝혀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모두 마귀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신질환을 널리 퍼뜨리는 일에 앞장 서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두 종교 재판장 헨리 크래머와 제임스 스프랭커가 마녀나 귀신들린 사람들을 가려내어 처벌하기 위한 법적 지침서를 만들어 널리 배포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오늘날 정신 질환으로 여겨지고 있는 수많은 증상들을 처벌해야 할 죄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질부르그의 주장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2) 마귀론의 심리학적, 과학적 의미
(1) 프로이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학자들은 종교적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오던 마귀론의 심리학적인 의미들을 밝혀내기 시작하였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신 현상을 처음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학자는 프로이드이다. 1923년에 출판된 한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과 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에도 암흑 시대의 마귀론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중세 시대에 악령으로 여겼던 것들을 ‘자연스러운 충동들을 무조건 거부하고 억누를 때 일어나는 악한 소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중세의 마귀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뿐이다. 우리는 악한 소원들을 외부의 어떤 대상에 투사하기보다는 환자의 정신적인 삶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2) 칼 융: 융은 ‘원형’ 개념을 통하여 악마의 문제에 접근을 한다. 융은 아니마(anima) 원형이 우리를 신들의 세계로 인도해 줄뿐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많은 원형들중 하나이다. 아니마는 우리의 삶에 혼란을 일으킨다. 아니마는 우리의 깊은 내부에서 악마적인 속삭임으로 우리를 충돌질한다. 예를 들어, 존경받는 70대의 노학자가 가족을 버리고 빨강머리 여배우와 결혼을 한다면 그는 악한 신들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아니마의 강렬한 힘을 깨닫게 된다.
융은 또한 그의 악마 개념을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 하나님은 세 인격을 가진 한 분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제4의 인격은 분명히 악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4의 기능인 악마는 무의식 세계에 속한다. 우리는 이 악마와 타협하여 서로 상반되는 욕구들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뒤에는 마치 불합리한 미신을 강요당할 때처럼 격렬한 갈등이 따른다.
융은 기독교의 원죄론이 지니는 커다란 의의를 강조하면서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이 교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융은 악마에게 하나님과 똑같은 실재성을 부여함으로써 무의식을 신화화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3) 모튼 프린스: 프린스는 그의 책 「인격의 분열」에서 임상적으로 밝혀진 중요한 사실들을 다루었다. 그는 서로 다른 인격들을 나타내는 있는 크리스틴 뷰쳄프라는 여자의 이상심리를 관찰했는데, 그녀의 인격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인격이 변함에 따라 성격과 기억도 변했다고 보고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아 외에도 그는 서로 다른 세 인격 중 하나가 되곤 했다. 내가 이 인격들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 것은 같은 몸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격, 사고방식, 관점, 신념, 이상, 기질, 지식, 취미, 습관, 경험 그리고 기억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두 인격은 간접적으로 얻은 정보를 제외하고는 서로 다른 인격에 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며 각 인격이 활동하지 않은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두 인격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의 몸을 사용하였고, 이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며 방금 전에 한 행동이나 말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머지 세 인격 중 한 인격만이 다른 인격들의 생활을 알았으며 이 인격의 성격이 너무나 기괴하고 다른 인격들과 동떨어진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두 인격으로부터 이 인격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 인격들은 계속해서 그의 몸을 들락달락했으며 24시간 안에도 수시로 변했다. 서로 매우 다른 이 세 인격과 고유한 자아를 합해서 모두 네 인격으로 되어 있는 미스 뷰챔프는 방금 전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언행이나 계획들을 다음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가 하면 그의 이상에 안 맞아 싫어하던 취미에 갑자기 몰두하곤 했다.
프린스는 이러한 증상을 “인격 분열증”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차적인 인격들을 정상적인 자아의 일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적 응집력이 스트레스의 분해력에 굴복할 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는 이 인격 복합체에 대한 임상자료들을 500페이지가 넘도록 자세히 얘기하고 난 후, 근심, 불안, 그리고 책임에 따르는 정신적, 신체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생활 환경이 각박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장기 치료를 받고 나서야 미스 뷰쳄프는, 물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유한 자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스펜서 로저스: 인류학자인 로저스는 벵크스 군도의 한 18세 소년을 소개함으로써 귀신들리는 현상에 관한 또 다른 사실들을 밝혀 주고 있다. 이 사례는 마가복음 5장 2-9절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이 소년은 매우 심한 두통을 호소해 왔다. 그리고 나서 잠이 든 후 깨어났을 때 그는 마귀들린 상태를 보여주었다. 힘이 엄청나게 세졌기 때문에 건강한 8명의 장정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격렬한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그는 자신의 소리가 아닌 생소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군도의 주민 중 하나가 이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우리는 많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서(죽은 친척들) 그의 몸안에 있는가 물어볼 때마다 한참 동안 확인하고 난 후 ‘있다’ 또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스펜서 로저스는 그 섬의 주민들이 귀신을 몇몇 뚜렷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남인도 사람들은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악령들을 두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 유형의 귀신들은 자손들이 제사를 소홀히 해서 화가 난 조상들의 혼이다. 그리고 다른 유형의 귀신들은 각 지방의 초자연적인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유능한 무당만이 이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사랑하던 사람이나 미워하던 사람 또는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던 사람을 잃고 나면 그의 영혼이 유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은 틀림없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도 사별로 인해 극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행동이나 음성 또는 습관을 그대로 흉내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 사람과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 온 동일시가 사별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한꺼번에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잘 나타나 있다.
(5) 토마스 울프: 그러나 인격 분열증을 관찰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원시적인 사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분열 증상은 토마스 울프의 다음과 같은 자서전적 고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파리에 머물 때 잠을 조금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저녁 내내 거리를 방황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나의 몰골은 전에 없이 초라하고 비참해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쌓여 온 모든 스트레스와 긴장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으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아를 제어하고 통일하는 힘이 내게서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굉음을 내면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기관차 등에 올라타 있는데도 그 기관차를 조절할 힘이 한 마리의 파리보다 약한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날 밤에--그 보다는 아침 동틀 무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해 보았다. 그때 나는 내 몸이 적어도 여섯 사람으로 분해되는 무서운 경험을 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이 사람들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 내 주위를 서성댔다. 그 중 한사람은 내 팔을 잡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귀에 무어라고 속삭였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침대 주위를 돌아다녔다. 내가 무서워서 갑자기 몸을 뒤척이면 그 사람들은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곤 했다. 맹세하건대 그때 내가 꿈을 꾼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상하고 두려운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약 3일 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울프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내적 혼란이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웠던 것은 틀림없지만 이 고통이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아의 일부를 자아 밖에 있는 독립된 존재로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악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실제로 건전하고 창조적인 어떤 욕구가 지금까지 거부당하고 억눌려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토마스 울프의 창조적인 저작 활동이 그가 위에서 고백한 고통의 소산일 수 있으며 울프 자신도 그렇게 보고 있다.
3) 마귀론의 종교적 의의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성서나 원시 신앙의 마귀론과 심리학의 정신 질환 이해는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 겹쳐진 부분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커다란 혼란에 빠질 위험이 크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들은 거라사의 마귀 들린 자의 치유 기사를 설교에 자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만일 예수를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정신과 의사로 보는 한편 그가 베푼 치유를 충격 요법, 진정제 또는 그 밖의 현대적인 정신 질환 치료와 비교하여 설명한다면, 이러한 시대 착오적인 해석은 예수가 귀신들린 자와 만나던 당시의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메시지뿐 아니라 현대 의학까지도 모두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조심해야할 또 다른 사실은 현대의 정신 질환 증상과 성서의 정신 질환 치유 기사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사례들을 동일시하려고 하면 위와 똑같은 시대착오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 잘못의 시발점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비과학적인 이해와 과학적 해석이 중복되는 부분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에는 오해가 따른다. 우리는 마귀론을 고통에 대한 직관적, 존재론적인 이해로 바라보아야 한다. 정신 치료는 직관보다는 경험과 관찰을 기초로 한다. 마가복음 3장 19-27절은 동일한 증상을 정신 이상으로 여김과 동시에 마귀 들린 상태로 보고 있다. 이 두 해석 중 어느 하나는 고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성서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서로 다르지 않다. 신약성서의 세계와 현대의 세계는 모두 다 정신적인 혼란을 정신질환으로 보는 한편 마귀 들린 상태로 해석하고 있다.
3. 종교와 정신질환과의 관계
1) 죄렌 키에르케고르
종교와 정신질환과의 관계를 다룬 학자들의 견해 중 먼저, 극심한 정서 장애를 경험한 바 있고 자신을 기독교 심리학자로 여긴 키에르케고르(1813-55)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정서 장애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르던 절망에 비추어 해석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그 절망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적인 과정이다. 그는 절망을 자아에 내재해 있는 세 유형의 양극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느끼는 ‘자기 거부’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세 유형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부조화, 가능성과 필연성의 부조화, 인식과 무지의 부조화이다. 여기서는 첫째 유형만 간략히 소개해 본다.
유한성과 무한성의 부조화로 인해 일어나는 절망: 인간이 무한성을 너무 열망하게 되면 자신의 유한성이나 상대성 때문에 절망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만날 때 자연히 자신의 무한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경험이 지나쳐서 무한성에 도취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때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의 무한성과 만나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유한성이 절망의 근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이처럼 압도당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그만큼 편협하고 초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무용성으로 착각함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과소평가 함으로써, 그리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자아가 되기보다는 자신을 하나의 영원히 복제되어 나오는 똑같은 인간의 하나로(인격이 없는 단지 번호로 취급되는 인간인 것처럼) 여김으로써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자신감을 상실하고, 독특한 자아가 되는 것을 너무 위험한 모험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한 사람, 기호, 번호, 또는 복제품이 되는 안전한 길을 택한다. 이러한 유형의 절망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은 개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사업에 성공하거나 출세하기 위한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정하거나 느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여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양극성(무한성과 유한성)을 조화시킨다면 우리는 도약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즉 무한성과 유한성(가능성과 필연성, 인식과 무지) 사이의 패러독스로 인한 모든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신앙인의 삶은 이처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별과 사별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사랑과 헌신을 바쳐오던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기도 하고 우리가 그들을 떠나야 할 일도 생긴다. 인간 관계나 공동체가 변하지 않고 항상 현재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은 양자 택일이나 흑백 논리를 강요하는 종교와는 대조를 이룬다. 신앙을 갖게 되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고 고통과 불안이 전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경건주의 또는 율법주의에 안주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욥은 자신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는 흑백 논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욥에 의하면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인은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고통은 명상을 낳고 명상은 지혜를 낳고 지혜는 인내를 낳는 것이다.
2) 안톤 보이슨
한때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정신 질환자였고 환각 증상이 있었으며 편집증으로 고통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논문 “정신 의학적인 관점에서 본 예수”에서 의학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환각 또는 환시 경험이 정신질환자들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톤 보이슨은 1936년에 이 정신의학자들과 슈바이처의 저술들을 언급하면서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병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증상의 유무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더 중요한 사실은 영혼의 모든 투쟁에서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정신병원 원목으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일생을 바쳤고 자기 자신도 세 번이나 정신질환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는 보이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는 원만하고 아름다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우주에 완전히 순응했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으나 침착하고 용기 있게 받아들였다. 그의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분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자신의 말을 몸으로 완전히 입증한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조지 폭스나 존 번연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후 더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발견한 반면 정신질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슨은 178명의 정신질환자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양심을 외부로 투사하여 객관화시킨 사람, 자존심을 위장한 사람, 모든 기능이 마비되는 증상을 나타낸 사람, 또 회복 가능성을 시사하는 자책감을 보인 사람, 그리고 극심한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 그는 공포 반응을 나타내는 환자들이 “냉혹한 현실 세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두려움 때문에 극심한 퇴행 증상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과 재앙에 대한 새로운 성찰 그리고 우주적인 존재와의 동일시가 따르는 급성 정신질환은 “정상적인 성장과 기능을 방해하는 기존 태도나 사고 방식을 쓸어버리고 건설적으로 다시 세우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급성 정신질환은 해로운 성격 발달을 저지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성장하게 한다. 이러한 정신 장애자는 대부분 깊은 종교적 관심을 보여주므로, 나타나는 증상들을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앙생활과 종교 체험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슨의 저술들은 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폭스, 번연 등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과 정신질환자들을 비교하면서, 이러한 증상들이 매우 심오한 종교 체험으로서 마치 급성 고열이 신체의 질병을 치유해 주는 것처럼 환자의 잘못된 태도나 사고방식을 개선해주는 작용을 또한 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비주의
종교인들뿐 아니라 비종교인들도 무한한 존재와 만날 때 느끼는 신비하고 비이성적 체험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비주의는 인식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인식 방법과는 달리 직관, 통찰, 또는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 진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 홀 브리지스는 신비주의를 “무아지경에서 신 또는 궁극적 실재와 하나되는 초월경험과 이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해석”이라고 정의한다.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나의 자아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나를 안내해 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영의 눈으로 영원한 당신의 빛을 보았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당신을 알기에 그 빛을 압니다. 사랑 자체이신 당신을 알기에 그 빛을 압니다. 그리고 그 빛을 알기에 영원하신 당신을 압니다. 오! 영원하신 진리여! 진리이신 사랑이여! 사랑이신 영원이여!
1) 신비 체험의 다양성
신비 체험들은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자들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그 의미나 성격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미가 서로 다른 다양한 신비 체험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물론 질적으로 분류한다기 보다는 그저 몇몇 독특한 유형들로 분류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 자연 신비주의
자연 신비주의에서는 자아와 자연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자아가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든 사물과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연 신비주의는 워즈워드의 시 “틴틴 수도원을 지나 몇 마일 더 걸어가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고결한 생각과 기쁨으로 떨게 하는
그 분의 임재를 느꼈네.
그 분과 하나되어 한없이 넓고 깊은 감정에 사로잡혔네.
그 분이 사는 곳은 황금빛 노을, 끝없이 펼쳐진 바다,
신선한 공기, 파란 하늘, 그리고 우리의 영혼.
그 분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운행하네.
자연 신비주의에서 경험의 주체와 객체는 어머니와 태아처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자연 신비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말을 걸고 들어주는 땅, 바다의 신비와 위엄, 태양의 빛과 밝음, 그리고 하늘의 수려한 색과 포근함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 신비주의는 범신론적 성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연 신비주의는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2) 무아 신비주의
무아 신비주의는 자아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자 또는 궁극적 존재 안으로 흡수됨으로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강조한다. 불교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일시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본다(諸行無常).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처럼 일시적인 삼라만상에 대한 자아의 집착과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부르는 ‘열반’에 드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욕망을 제거하고 자아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자아를 초월하는 길밖에 없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고통이나 근심뿐 아니라 기쁨이나 흥분도 모두 사라진다. 힌두교에서 열반은 자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브라만과 다시 결합함으로써 생명의 불꽃이 꺼져 버리는 상태이다.
신비 체험을 자극하는 약물을 자주 복용했던 헉슬리는 일종의 우상 숭배인 자연 신비주의로 만족하지 말고 초자연적인 의식 안에서 자아를 완전히 버림으로써 한 걸음 더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만일 예술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은 숭배하면서 자아를 초월하지 못한다면 우상 숭배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구원은 개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 찾아오는 것인데, 이는 브라만에서처럼 정욕과 증오와 망상의 불을 가슴에서 꺼버림으로써 신과 더 위대한 동일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이러한 해방은 자아를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숭고한 영적 상태로 들어가게 해준다고 한다.
(3) 플라톤 또는 신플라톤 신비주의
플라톤 신비주의는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체로부터 영을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플라톤 신비주의는 서양 문화의 오랜 역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이 신비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하나의 종교적 체계로 전환시키려고 했던 플로티누스(AD 204-269)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신은 물질, 명상 그리고 영 등 세 단계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물질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것은 암흑이라고 한다. 이때 신을 찾는 첫 단계는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영이 더러운 육체를 벗어나 순수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순수한 상태는 명상 또는 직관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을 깨닫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명상은 신에게로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행동보다 휠씬 우월하다. 명상은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초월하고, 신의 영 안에서 자아를 버리고, 신에게 돌아섬으로써 신과 하나되는 황홀한 경험을 통하여 신이 되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런 신비주의는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의 신인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4) 기독교 신비주의
유대-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영육 합일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이다. 물질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은 성령이 거주하는 성전이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변화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주위 사람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영성 생활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신비주의는 퀘이커파 신비주의자 루퍼스 존스의 자서전적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미래의 삶을 구상하면서 숲 속을 홀로 거닐던 중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나는 갑자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영원한 분이 내가 있는 세계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기이한 빛도 볼 수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었으나 숲이나 산보다 훨씬 차원 높은 실재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신발을 벗고 엎드리게 만들었던 신비한 경외심에 사로잡혀 서 있던 숲 속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어떤 중대한 과제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명감을 깊이 느끼고서 그 일을 위해 나의 온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로 결단하였다.
이 글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친밀감,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라는 깨달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느끼는 깊은 경외심, 삶의 목적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헌신을 찾아볼 수 있다.
(5) 실용적 신비주의
실용적 신비주의는 그렇게 많이 논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삶을 그 어떤 신비주의보다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보통 일반인들이 경험하는 것으로 세속적 신비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실용적 신비주의는 쫓기듯이 살아가는 바쁜 일상 생활을 잠시 잊고서 조그마한 들풀 하나를 관찰하는 순간에도 경험된다. 테니슨은 이와 같은 체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갈라진 벽 사이에 자라나는 풀 한 포기. 나는 너를 그 틈에서 뽑아내어 뿌리째 나의 손에 들고 서 있다. 작은 꽃에 불과한 너. 하지만 내가 너를 속속들이 알 수 있다면 신과 인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용적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신비주의와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저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경험들 사이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를 문득 문득 궁금하게 여긴다. 즉, 세속적인 경험을 할 때에도 역시 그 배후에 있는 초월적인 실재에게로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이 초월적 실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낸다. 그는 제도화한 하나님을 찾는 우리들의 도식적인 관념을 뚫고 들어와서 자기가 조종되거나 도식화될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아집을 버리고 삶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2) 신비 체험의 특징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은 나름대로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으나 공통적인 특징들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면 신비주의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윌리암 제임스는 신비 체험의 네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첫째로, 신비 체험은 우리의 언어를 초월한다. 이 체험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사랑과도 같다고 한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둘째로, 신비 체험은 깨달음의 한 방법이다. 신비적 상태는 감정의 상태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그러한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지식의 상태처럼 느껴진다. 신비적 상태는 산만한 지성에 의해서는 측정되지 않는 진리의 깊이를 통찰하는 상태다. 이 깨달음은 일종의 깊은 통찰 또는 계시로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지표 역할을 한다.
3) 셋째로, 신비 체험은 일시적이다. 신비 체험들은 오랜 기간동안 유지되지 않고 일상적인 경험들의 와중에서 퇴색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비 체험들을 다시 맛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기억 속에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생생히 살아 있다.
4) 넷째로, 신비 체험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며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 신비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이나 육체적 훈련, 또는 신비주의에서 종종 말하는 수행방법 등의 자발적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신비적 의식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신비주의자는 마치 자신의 의지가 정지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더 높은 힘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의학박사 월터 판케는 LSD같은 의식 확장 약물들이 신비적 경험을 일으키는 효과에 관해 연구하던 중에 고전적인 신비주의 저술들에 묘사되어 있는 신비한 의식들의 진정성을 가려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다음과 같은 9개의 기준을 설정하였다.
① 내적으로는 자신의 자아와 그리고 외적으로는 자신의 환경과 통일을 이룬다.
② 세계와 우리 자신의 실존을 직접 그리고 초이성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③ 신비주의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히 깊고 넓은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④ 신성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거룩한 실재 앞에 조용히 그러나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린다. 루돌프 오토는 이를 “전율”이라고 부르고 있다.
⑤ 기쁨, 사랑, 축복, 평화 등 긍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에 가득 차 흘러 넘친다.
⑥ 몸 안에 있으면서도 몸밖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등 이성의 법칙을 역설적으로 초월한다.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초월을 체험한 적이 있다(고후12:2-3).
⑦ 제임스도 말하고 있듯이 신비적 경험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 경험을 초라하고 불순하게 왜곡시키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⑧ 신비적 경험은 일상적인 경험보다 일시적이며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신비한 의식은 계속 유지할 수 없다.
⑨ 태도나 행동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신뢰와 친밀감을 느낀다. 습관적인 방어 기제의 벽이 낮아진다.
신비주의의 이와 같은 특징들은 신비 체험들을 이론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신비주의자가 어떤 생각과 태도로 현실을 대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3) 신비주의: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그리고 예수는 변화산 위에서 하나님과 신비하게 만나는 경험을 했다. 모세는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던 중에 하나님의 신성한 임재를 체험했다. 이사야는 제사장으로서 국가적인 대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으며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다. 예수의 제자들은 피로로 인해 잠과 싸우고 있던 중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들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의도적으로 계획하거나 노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신비 체험은 영원한 분이 매일매일의 피곤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삶 속으로 우연히 돌입해 올 때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 수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오로지 떨기나무만 볼뿐이다.
월트 휘트만은 “풀잎”에서 이와 같은 신비 체험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매일, 매시간, 매순간마다 나는 하나님을 본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에서.
길거리에서 하나님이 사인한 편지들을 발견하지만 줍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내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 거리를 지나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낮에는 꽉 짜인 시간표에 따라 강의실을 부지런히 찾아다녀야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시달리는 학생이라면 바쁘고 고달픈 자신의 삶에는 신비 체험이 일어날 수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용적 신비주의 입장에서 볼 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독특한 삶의 역사와 추억을 지니고 있다. 가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노인 어른은 가끔 이런 말씀을 한다. “이제까지 내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숙고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밤늦도록 나를 지키시고 보살피셨다는 경외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런 내용은 지난 시절을 돌이키며 시편을 써나갔던 다윗에게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역사를 신중하게 다루기만 한다면 기억력을 이용하여 삶을 새롭게 개조할 수 있다고 본다. 파멸직전에 구원받은 사건이나 새로운 삶으로 인도되던 경험 또는 기도 응답을 받던 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영적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 체험은 몇몇 특이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이상 반응이나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 자기 최면으로 자신을 치유하는 헛된 시도가 결코 아니다. 사실 신비 체험처럼 신앙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는 것도 없다. 종교를 신비 체험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지만, 어쩌면 신비 체험이 결여되어 있는 종교는 곧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다음 참고자료들은 강의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시간을 내서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신비주의자가 되는 길 (참고자료 1)
신비주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적 수련과 자기 훈련이 필요한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1) 도덕적 훈련
전통적 스승들은 신비주의란 강력한 도덕적 지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도들은 명상수련에는 계율(도덕적 청정성이나 덕행)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십계를 보면 ‘죽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일구이언하지 말라, 악한 말을 하지 말라, 아첨하지 말라, 탐심을 품지 말라, 분노하지 말라, 어리석지 말라’이다. 더 큰 성장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다른 금지조목이 첨가된다. 기독교의 위대한 신비가들도 비슷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는 구도자들은 중요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전에는 ‘내면의 성(城)’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쳤다.
힌두 요가의 첫째 단계--야마(yama, 禁戒)--는 불교 계율과 흡사한데, 생명에 해 끼치지 않기, 거짓말 안하기, 훔치지 않기, 과도한 성적 쾌락에 탐닉 안 하기, 욕심 안 부리기가 그것이다. 두 번째 단계--니야마(niyama, 勸戒)--는 덕행을 요구하는데, 마음과 몸의 순화, 만족, 금욕주의, 영적 공부를 통한 자기지식의 증가, 신에게의 순종이 그것이다.
2) 육체적 훈련
동양종교는 서양종교보다 육체적 훈련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요가의 세 번째, 네 번째 단계가 이러한 훈련들을 나타낸다. 체위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명상을 위한 좌법(坐法)과 육체적인 불균형이나 그릇된 상태에 대한 치료적 효과가 있다고 말해지는 체위법이 그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육체의 긴장을 풀며, 행동이나 명상상태 때 활력을 찾기 위해 훈련하는 방법으로 호흡법 같은 것이 있다.
3) 종교적 의식
많은 종교적 의식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명상을 준비할 수 있는 경건한 집중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는 성례전 의식이나 경전 봉독, 노래나 염불 등이 사용될 수 있다. 이슬람의 어떤 수피교단은 회전하는 탁발승(whirling dervish)들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그들이 명상적 상태를 유도해 내기 위해 중심에 있는 정점(still point) 주위를 도는 의식적 춤을 추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신비가였던 시몬느 웨일은 주기도문을 깊은 집중상태에서 외우게 되면 늘상 신비적인 순간을 촉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출가 또는 은거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내면적 생활을 계발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출가하거나 수도원으로 은거할 수 있다. 이러한 은거생활은 영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게끔 해준다. 카톨릭 수도원에서 가난, 순결, 순명을 위해 하는 서원은 한 개인으로 하여금 물질적 풍요나 대인관계에 의존하는 것 혹은 자기의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포기하게끔 도와준다. 많은 전통에서는 구도자로 하여금 사악하거나 해로운 것뿐만 아니라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좋은 것도 포기하게끔 유도한다. 불교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서는 가족, 명예, 제자, 사업계획, 여행, 학문 등과 같이 집착의 근원이 될 만한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5) 명 상
현재 명상으로 불리는 것 중의 많은 것은 사실은 명상의 준비단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어떤 종교적 개념이나 이야기들에 관해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고통이나 부활과 같은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련은 종교적인 관심사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지,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진실된 의미에서 명상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생각을 잠재우지는 않는다.
동양의 명상은 집중훈련으로 준비과정을 삼으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초월명상은 여러 갈래로 분산된 의식에서 주의를 회수하여 명상의 대상에 향하게 한다. 감각의 회수라고 불리는 이 수련은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너무 깊게 몰두되어 있어 라디오 방송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이 의식의 상태가 바로 감각의 회수법이 이루고자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일단 주의가 성공적으로 집중되면 명상수련가는 요가의 여섯 번째 단계인 집중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전체적이고 분산되지 않는 의식집중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진정한 명상은 정려(精慮)로 요가의 일곱 번째 단계이다. “모든 명상수련은 신이나 공(空)과의 합일을 꾀하는 하나(One)나 영(Zero)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하나로 향하는 길은 하느님에 대한 집중을 통해서 가며, 영을 향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가능하다.” 이와 같이 명상은 명상수련가로 하여금 신비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심리학은 사실 신비주의의 원인에 대해서 명확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몇 가지 가능한 경향성적인 요인을 제시하고, 효과들에 대해서만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신비주의자가 인식하는 실재의 단계에 대해 단언하는 것은 심리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체험에 대한 비판과 대답 (참고자료 2)
종교체험이란 무엇인가? 종교체험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인가? 종교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에게 만일 잘못된 점이 있다면, 올바른 종교체험과 잘못된 종교체험 사이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융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체험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체험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 체험에 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종교체험이 그 체험자들에게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각성시키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체험자들은 그의 체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며, 종교체험은 종종 그 체험자들이 앞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될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종교체험이 그 체험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체험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이드는 종교체험을 유아기적 퇴행 현상으로 보고, 류바는 병적인 죄의식에서 비롯된 정신병리 현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종교체험을 한낱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종교체험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종교체험에 대한 비판의 요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종교체험은 너무 주관적인 체험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둘째, 종교체험은 너무 개인적이다. 종교체험은 한편으로는 각개인의 성격, 특성, 기질에 많이 영향받고 있어서 일반적인 표준형을 상정해 볼 수가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체험자들은 파악할 도리가 없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너무 몰두해 있다. 셋째, 종교체험은 너무 비합리적이다. 종교체험의 모든 양상, 진행과정, 체험의 내용 등은 모두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연구를 할 수가 없다. 넷째, 종교체험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체험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나 고집 등은 그들 체험의 온당성 여부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체험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첫째로, 종교체험이 주관적인 체험임에는 틀림없지만 종교체험에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특성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종교체험자들이 그들의 종교체험을 통하여 그들의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하나의 객관적인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종교체험이란 어느 한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그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또한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종교체험이 너무 개인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할 수가 있다. 즉, 종교체험에는 개인적인 특성만이 반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체험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적인 특성들 역시 많이 반영되고 있으며, 진정한 종교체험이란 그 체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내면에만 몰두하게 하기보다는 그들이 체험했던 것, 예를 들어 그들이 체험했던 신의 사랑을 이웃에게 확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종교체험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체험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로, 종교체험이 비합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답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먼저, 종교체험의 대상이 되는 신적이 존재는 비합리적인 존재이다(엄밀히 말하자면 신적인 존재는 종교체험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체험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적인 존재는 인간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성을 가지고는 신적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만약에 이성으로 신적인 존재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참다운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이제 더 이상 신의 초월적인 영역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신에 대한 체험은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신적인 존재는 본질상 비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체험 역시 비합리적인 특징을 띠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합리(非合理)라는 말은 불합리(不合理)를 뜻하지 않는다. 즉, 신적인 존재가 모순된 존재 혹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비합리라는 말은 우리의 이성이 파악하지 못하는 이성 너머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적인 존재에 대한 체험을 전달하는 것 역시 모호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인간의 체험 전달에는 그것이 어떤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어느 정도 모호성을 띠게 된다. 이 점이 언어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종교체험을 더욱더 수상쩍게 만든다. 정보는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언어를 통해서 쉽게 전달된다. 그러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은 체험자가 체험한 것 전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인상, 그가 느낀 감정까지 모두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이런 것들 모두를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 전달하지 못한 부분은 비유적으로나 역설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이러한 체험담을 듣는 사람들은 종교체험이 너무 모호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종교 또는 종교체험이 자연과학과는 다른 분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종교체험을 연구할 때 합리적인 것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종교의 비합리적인 측면들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의 삶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으며,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