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리학(14주).hwp
닫기종교심리학 14주차 “연령별 종교심의 발달: 청년기, 종교적 성숙” / 박노권 교수
14주
I.청년기
청년기(18-25세)의 심리는 완전히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으로부터, 습득된 경험으로부터 조건지어진다. 또한 종교심도 이와 같은 사회적 경험을 통하여 성숙되어 역동적 균형에 도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청년이 자명하게 종교적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청년들은 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다원적 감정을 갖고 있다.
이들의 종교적 자세의 유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인간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최대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초월성, 믿음, 종교적 소속감 등에 거부감을 느끼는 무신론자들, 둘째로 약간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교회에 대한 소속감은 없이 세속적 가치를 더욱 편하게 생각하는 무관심자, 셋째로 교회 소속감은 강하고 여러 모임에 가입도 하나, 신앙 생활은 의식적이고 소극적인 형식주의자, 넷째로 종교의 권위를 신성시하고 신앙이 활기 있으며 교회에 대한 성실성이 확실하지만,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는 의례주의자, 그리고 교회의 대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청년들 등이 있다.
1. 자기 계획의 중심적 가치로서의 종교
청년기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내면적으로 자기 주체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발달하고 이상과 행동의 원리를 찾으면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청년 시기에 종교적 가치가 인격의 구조 안에 다소간 통합적 방법으로 확실하게 취해질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여백적으로 또는 배제적으로 될 수도 있다.
1) 통합의 상황은 종교적 행동이 인격의 총체적 구조 안에서 탁월하고 절대적이고 최상의 가치가 되도록 할 때 달성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존재 가정이 더 이상 지능적 인식으로 뿐만이 아니고 또한 자기 생활 계획의 통합적 부분이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계획의 본질적 핵심이 정서적으로, 애정적으로 연결되어 느껴지게 되는 존재론적 상태를 해석하는 기본적 체계일 때만 가능하다.
2) 여백성의 상태는 청년의 심리가 하위적 욕구(심리?생리적 혹은 심리?사회적 욕구)에 머무르는 미성숙 상태에서, 종교심이 아직도 이전 단계의 발달의 미해결된 문제점을 고집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경우에 종교는 전체적 체험으로 이루어진 행위의 동기를 구성하지 않고 부분적인 동기만을 구성할 뿐이다. 이러한 동기는 기회적, 산발적인 방법으로 상대적으로 여백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활용될 수 있지만 존재의 총체적 의미를 주는 데 활용되지 못한다. 이때에 종교적 가치 이외에 다른 가치를 자기 계획의 본질적 핵심을 구성하고자 하는 데 선택한다.
3) 완전히 배제된 상황은 종교적 가치가 생의 계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여백적일 때 있게 된다. 이 경우 모든 행동은 세속적이고 비 종교심의 상태이고 더 나아가서는 완전한 무신론의 상태가 된다.
* 청년기에는 소위 ‘절대의 대용’이 크게 부각된다. 이것은 종교적인 동기 유발에 고무되지 않을 때라도 개인의 심리성을 충분하게 통합할 능력을 갖는 일련의 어떤 가치를 일컫는 것이다. 이 가치는 초월자를 배제한다. 사랑, 돈 , 성공, 정의, 자유는 ‘절대의 대용’가치로서 청년의 심리성 안에서 통합적 기능을 전개할 수 있고 초월적 차원과 어떤 관계없이 생활의 최고 가치로서 구성될 수 있다. 이러한 가치의 절대화는 인간 생활에 의미를 주려고 하는 근본적인 종교적 차원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행동 가치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게 된다.
2. 사회 문화적 환경과 종교적 가치관과의 갈등
청년의 심리적 발달은 청년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여러 여건(사회조직이나 문화적 흐름 또는 청년이 소속한 소집단 등)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인격은 환경과 지속적인 상호 관계의 결실이다. 또한 환경은 종교적 인격이 발달될 수 있는 필수 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 사실상 종교심은 문화적 가치와의 대결을 먼저 극복하지 않고서는 인격의 구조 안에서 성숙되고 통합된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변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 문화적 환경은 종교적 가치와 새로운 문화적 가치 사이의 종합 과정에서 어려움을 창출할 수 있다. 청년들은 세속화되어지는 사회 구조에서 종교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속화의 결과는 특히 청년들에게 종교 생활 실천의 포기와 종교적 감정의 약화, 종교 진리에 대한 믿음의 위기, 종교적 의식의 비신성화, 사회 단체나 개인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의 감소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 두 가지 특징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개인적 종교심과 제도화된 종교심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점진적으로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와의 갈등이다.
1) 개인적 종교심과 제도적 종교심간의 갈등
사회 조직의 각 형태에서 보여지듯이, 제도화의 과정은 교회 안으로도 개입되어 예배 형태, 믿음, 조직 등에 점진적 제도화가 나타나고 이로 인하여 예배, 믿음, 조직 등을 조직화, 형식화, 공고화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청년들은 제도화의 이러한 경향을 종교적 가치 안에 절대적이고 내면적인 것의 장애물로서, 즉 종교적 가치의 순수한 이해의 장애물로서 생각한다. 이러한 장애물 앞에서 청년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첫째, 예배 형태의 점진적 제도화 앞에서 많은 청년들은 교회 생활을 포기한다. 이유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으로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다. 또는 청년들은 예배가 뜻하는 상징을 이해하려고 하고 거기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예배의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의도를 생각지 않고 상징의 의미를 평범화하려는 위험이 따라온다. 또한 다른 이들은 예배적 행위가 구원적 사건의 본질적 의미임을 깨닫고 기꺼이 참여하기도 한다.
둘째, 교리의 조직화 앞에서 어떤 청년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철학과 타협된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이해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초월적인 구원의 기쁜 소식의 전달자가 아니고, 다만 숭고한 윤리적 학설로 생각한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인간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의 요구에 민감하게 순응하면서 기독교 복음의 사회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선포된 해방의 초월적이고 전체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 반면에 정치적?철학적?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비하여 종교적 복음의 절대적 초월성을 인정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문화적 타협을 거부하고 흥망성쇠로 인하여 교차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항구하게 지탱되고 있는 기독교 진리의 비판적이고 비신화적 기능을 믿는다. 그러나 문화와의 관계는, 적어도 현대인에게 접근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의 소식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교회 조직의 제도화 앞에서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해 많은 청년들은 결정면에서 교회 내 조직의 민주화와 폭넓은 참여를 절실히 요구하고 성직자 위주의 독단주의에 대한 거부 반응을 노골화한다. 그리고 제도로서의 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선포할 때 대면하게 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권력의 불법 소지자와 타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있다. 여기서부터 카리스마적 교회, 즉 세속적 장애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비제도화된 교회를 원하면서 청년들은 그들의 수많은 문제점을 진실되게 구체적으로 해결해줄 새로운 조직을 갖춘 교회를 갈망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활동, 이상, 판단을 통하여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이러한 신앙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젊은이들의 요구에 부응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될 필요성이 요청된다.
2)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와의 갈등
도시화 현상의 확대, 과학 기술의 발달, 대중 문화의 도래, 사회구조와 행동 모형의 다원론적 현상은 세속화의 현상을 가져오는 요인들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현대 사회의 여건은 전통적인 모든 종교심에 이의를 제기하고 종교적 체험 자체를 문제점으로 돌리는 세속화 현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보다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청년은 자기 인생관의 본질적 핵심이며 생의 전체적 모형을 부여하는 종교의 요구와 비교하여 세속화가 분명해지는 갈등적 내용(적어도 부분적으로는)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때 나타나는 세속화의 형태는 종교를 생활 중심에 놓지 않고 주변부로 돌리는 여백 감정의 증대, 종교 의식에 대한 비신성화, 세속적 인문주의의 대두 등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개인적으로 청년은 단체의 경험을 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있다. 또한 심리적, 사회적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해서 단체 생활을 지향한다. 소속 욕망, 인정 욕망,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좌절, 고독과 소외는 자주 청년들로 하여금 종교를 탐구하도록 충동한다. 그리고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 의식 행위의 본질적 의미를 다시 찾아보려는 시도도 활발해진다. 그리고, 청년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 쾌락과 안일한 생을 살며, 이런 세속적인 철학을 따라가면서 전통적 종교심을 공백화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종교적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인문주의 가치와 대화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여건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청년기의 종교심은 대부분 아직도 성숙한 종교심의 단계 이전에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결정적 선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개인에 따라서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아직도 구조화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아기의 거룩한 종교심의 비판과, 종교나 교회에 대한 불만족과 부분적 세속화의 과정으로부터 특징 지워진 종교심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실천면에 있어서 여백적 사실이 되어가고 개인에 따라서 어떤 이는 자기의 심리적 욕구(안정감, 인정, 가치화 등)에 응답하는 순전히 심리적인 기능 면에서 효과적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의 의문에 어떤 해답이 가능해지면 부정적 종교심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II. 종교적 성숙
1. 심리적 성숙과 종교적 성숙의 관계
개인에게 있어서 종교 발달의 마지막 단계는 종교적 성숙의 단계이다. 성인의 종교심 그 자체가 성숙한 종교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심리적 성숙성을 기준으로 하여 성숙한 종교심에 도달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성숙의 의미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아는 심리학적인 자주성 혹은 독립성을 뜻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현실적인 견해를 갖는다든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와 남을 수용하는 자세, 또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모습 등은 자주적인 인격의 요목으로 고려된다.
1) 현실적 견해란 자신과 남에 대하여 갖는 객관적 견해를 말한다. 비현실적 기대에서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열등감과 원망, 분노가 촉발된다. 이러한 사고가 계속되면 생각의 패턴 자체가 왜곡되어 스스로 설정한 한계 안에 갇히고 만다. 성서적 관점에서 현실적 견해를 말한다면, 그것은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자기를 보는 것이다(롬3:23).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 타인, 세계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의 차원을 열어가야 할 새로운 피조물로서 보는 것이다(고후5:17). 다음으로 인간은 영성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적 본성과 능력을 지녔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이해함에 있어서 현실적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적이고 통전적인 안목을 필요로 한다. 거룩함이 넘쳐 신이 될 것처럼, 또는 짐승처럼 자기를 방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또한 연약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2) 수용이 뜻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혹은 현상이 자기 내부의 경험 속에 실재하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허용하고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고 옳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거기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자기인식을 가리킨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희망이라든지 두려움, 욕망, 열망을 갖게 되는데 그것들이 모두 나쁜 것이라든지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이라는 판단 이전에 우선 그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는 인식이다.
수용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자신과 타인을 그의 잘 잘못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의 어떤 특징적인 일면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거절하는 것은 미숙한 인격의 예가 된다. 자신과 타인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웃 사랑은 위에서 언급한 수용의 의미에 비추어 보아 그가 얼마나 자기 이해에 성공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성서적 관점에서 본 수용은 더 나아가서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내 일상 경험 속에 있는 현실이라는 자각을 가리킨다. 아울러 자신과 타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실현되는 대상이고 그러므로 존중되고 용납될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다. 어떤 사람을 한 인간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행위와 동기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수용이란 타인의 약점을 감싸주려는 예민한 감각(히12:12)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형제애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3) 장기적인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현재를 산다는 의미는 자신이 처한 형편과 주위의 사정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해 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신과 직업, 교회, 친구, 가족 등의 중요성을 알고 그 일을 우선적으로 감당해 나간다는 말이다. 이러한 각각의 상황은 “내가 서있는 자리”를 뜻한다. 각각의 상황과 형편은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의 필요는 채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자주적인 사람은 자신의 염원과 현실을 혼돈하지 않고 무엇이 변화 가능한지를 헤아려 목표를 설정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현재’로 표현되는 삶의 질이다.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6:2)이다. 구원은 영원한 현재라는 국면을 포함한다. 이러한 예는 바울의 인격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화려했던 이전의 유대주의적 확신을 말했으나 거기 머물러 살지 않고 거기서 나와 그것을 버렸다. 까닭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부터 몸을 앞으로 내밀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다. 신앙인이란 관찰 가능한 변화의 삶을 지금 여기서 지속적으로 살아서 보여주는 것이다(고전5:9-10, 빌3:14).
* 올포트(G. W. Allport)의 견해
올포트는 많은 성인에게서 종교심의 미성숙성, 유아주의의 특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심리적인 성숙성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자아 확장, 즉 감관적인 욕망, 생리적인 충동을 초월할 수 있는 자아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중대시하는 데서 자아는 확대되고 성숙된다.
(2) 자기 객관화의 능력, 즉 주체 자신의 정신적 역사에 대한 반성과 통찰 능력이며 올바른 인간성과 그릇된 판단까지도 실제적으로 자기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즉 자기 반성과 통찰력 그리고 솔직한 자기 평가는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대인 관계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며 현실적인 지각이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
(3) 체험의 통합, 즉 모든 인격의 조직적이고 역동적인 모형을 구성하는 통일적인 인생관을 지향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부과되고 이루어진 모든 체험을 통합하여 인생에 뚜렷한 목표를 가짐으로써 자기를 보람있게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성숙성의 기준에서 종교적 성숙성을 관찰하여 보면,
1) 첫째로, 자아 확장 중에 있는 사람은 일반 사회 문화와 생활 체험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처럼 종교적 문화와 종교 생활 체험의 폭을 넓히는 것을 지향한다. 아직도 많은 성인은 일반 사회 문화나 직업 문화 면에서는 크게 성장 발달하여 있고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유아주의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불균형의 간격을 메꾸어 나가지 않으면 사회적 정신 상태의 성장 발달과 더불어 종교에 관심이 쉽게 없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포기 또는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2) 둘째, 자기 객관화의 능력은 개인을 동기화시킬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기능적으로 자율적 특성을 갖는 종교심을 갖도록 한다. 욕구나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반성과 통찰 능력으로 종교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확신을 갖는다.
3) 셋째, 체험 통합은 통일적이고 집중적으로 여러 가치에 서열을 매김으로써 상대적 가치와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진다. 이 통합과정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우연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절대적 가치에 종속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확실한 종교적 성숙은 균형된 인격을 갖기에 필요한 명확성, 현실성, 적응성을 갖고 하나님 가치의 수위성과 중심성을 계속 견지하면서 2차적 가치와 최고 가치 사이의 연결점과 구별점을 찾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2. 종교적 성숙과 자아 실현
구약에 나타난 창조질서(창1:28)를 인간성의 실현으로 본다면 신약에서의 구원의 과정은 거듭남에서 시작(딛3:5)되고 그것은 자아실현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즉 자아실현이 성서적 개념으로는 구원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구원이라는 이해는 구원이 자아실현이라는 통합적 견해와 맥을 같이 한다(엡4:24, 골3:10, 창1:27). 즉 구원이 신자 개개인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신자가 자기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해 내도록 허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자는 그가 처음에 창조된 바대로, 마땅히 이루어져야할 인간상에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성서적 표현은 또한 ‘완전’이라는 개념에서 볼 수 있다. “perfect"(완전)이라는 표현의 말속에는 비교우위를 나타내는 의미보다는 다만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발전시킨다는 성숙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5:48)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신성을 지닌 전능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과정을 마친다든지 충분히 발전된다는 뜻이다. 헬라어에서 과일이 잘 익으면 성숙(teleios)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완전해진다는 뜻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보다 앞선 성취도를 말하지 않고 개인의 고유한 잠재성을 개발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로서의 목표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mature) 돕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엡4:13).
그러므로 자아실현이 인격개발과 기독교인의 성숙, 양자에 통합된 모델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격론과 기독교 성숙론(영성론)이 서로 바꾸어 놓아도 좋을 만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가 동일한 과정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은 다르다. 인격론에서 본 자아실현의 과정은 개개인의 동기와 능력과 잠재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기독교 성숙론에서 본 자아실현의 과정은 이와는 달리 개개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새롭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과정은 타락으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신자 개개인 속에 다시 회복해 가는 것을 뜻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종교적 자아실현이 무엇인지 논해보고자 한다.
1) 종교적 자아실현의 전제
‘자아실현’은 현대 교육학에서 인간의 성숙함을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가 되어 왔다. 마슬로는 선천적으로 인간은 자아실현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융은 인간이 가장 자기답게 되어 가는 과정을 본능적 경향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기본적인 가정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적 가능성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적 자아실현에 대해 정의하고자 할 때 중요한 전제는 인간 심성에 대한 기본 인식이다. 종교는 인간 본성에 신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초는 인간 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이 지고한 일을 위해 피조되었고 자신의 내면에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긍정적으로는 더 높은 비가시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자와 교류하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과 더불어, 부정적으로는 죄와 타락한 육적 본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이중적이라는 것은 종교적 자아실현의 개념 또한 이중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감리교 창시자)가 전통적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본성의 타락을 긍정하면서도 선재은총을 통한 회복과 응답의 가능성을 말한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하겠다.
따라서 종교적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 이해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 종교적 인간 이해에 있어서 본성은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일단 제거하거나 억압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다. 또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성숙한 모습은 가능한 한 본성과는 상치된 것으로 자신 밖의 요소에서 찾거나 주어지는 것으로 알아왔다. 하지만 기존의 이러한 이해는 자아실현의 개념을 통하여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성숙됨은 인간 내부의 심혼 속에 숨겨진 원천적 기능의 가동 없이는 불가능하며 다만 이것이 외적 기능과 일치되도록 조절 또는 승화시켜 주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외적 기능은 사회적 요청일 수도 있고 때로는 종교적 요청일 수도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사회와 문화의 성숙도는 그것들을 뒷받침해 주는 성숙과 자아실현의 관점에 의하여 크게 좌우되었다고 본다. 인간의 내재적 가능성을 무조건 억압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사회 문화는 굴절되거나 정체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인간의 내재적 가능성을 무조건 방치하여 오히려 인류 문화가 퇴폐화한 경우도 있었다.
2) 종교적 자아실현
종교적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인성의 부정적 측면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긍정적 가능성을 가진 인성의 이중적 측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우리는 인식했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동기와 힘은 곧 ‘인간의 욕구 속에 숨겨져 있는 최상의 원천’으로 이해되며 또한 이 힘이 잘 조절되고 승화된 것이 인간의 성숙한 사회적 행동의 표출이라고 본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종교적 자아실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1) 소극적 자아실현: 죄에서 벗어남
먼저 종교적 자아실현은 인성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극복과정으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적 자아실현의 완성은 성결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의 개념 역시 인성의 이중적 개념에 따라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설명된다. 그는 성결을 ‘완전한 사랑’이라는 적극적 개념과 함께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 박힌 죄의 뿌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개념으로 나누었는데 인간의 행동은 이러한 원죄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죄가 육에 속한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세상에 대한 모든 종류의 자기 중심적 사랑이 동기가 된다.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자아실현의 개념이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봄)을 보완해야 할 부분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인간의 내적 심리 원형 속에는 온전한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죄의 본성과 자기 중심적인 동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너희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적극적 자아실현: 성령 안에서 사랑의 실천
다음으로 종교적 자아실현은 인성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발달 과정이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부정적 측면의 극복과 함께 이루어진다. ‘완전한 사랑’은 죄를 추방하고 순수해진 그릇에 담기는 사랑이다. 인성에 내재한 긍정적 잠재력은 계속적으로 행해지고 발전됨으로써 성숙한 인격으로 나타나게 된다. 점진적 사랑의 실천 과정을 통과한 후 마음에 뿌리박힌 원죄가 뽑히게 됨으로써 내면의 정결과 외적 사랑이 일치된다. 이때 욕구를 불순하게 지배하던 죄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령 충만에 의해 동기 지워진다. 성령은 이 진행 과정을 인도하며 우리는 응답할 자유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종교적 자아실현 역시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발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