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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두 차원

교회력과 성서일과, 성만찬

여는 말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길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아는 방법입니다.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학은 비잔틴 교부들을 중심으로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찬란한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Evagrius of Pontus),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념의 정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을 카타파틱 신학(theologie cataphatique) 혹은 긍정신학(theologie positive)이라고 합니다. 이 신학은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점으로 하는 서방교회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세기를 통해 꽃피웠습니다. 그리고 근대로 이행하면서 또 하나의 신학적 진전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경험적 실용성의 신학입니다. 이 세 가지 신학은 마치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모방한 것처럼, 한 본질의 세 특질을 이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균형 잡힌 신학이란 이렇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 신학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신학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와 말씀입니다. 크라이튼(J. D. Crichton)은 '전례의 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사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약성서의 전 역사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와 파란만장한 여정을 통해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역사로 알려져 있다. 메시야 자신과 그의 수난, 죽음, 부활 등의 구원 사업은 구원사의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성령의 강림과 그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만물이 요약되는 종말(eschaton)을 기다리는 것으로 넘겨졌다. 이 모형이 총체적인 크리스천 전례의 기초이다. 구약 성서일과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복음 독서에서 절정을 이루는 신약 성서일과의 케리그마 선포를 위한 준비가 된다. 유카리스트는 파스카 축제와 광야의 계약 체결이라는 맥락의 한 가운데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파스카의 신비는 유카리스트의 핵심이며, 아남네시스(Anamnesis)의하여 재현되며,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교회는 유카리스트와 기타의 성사들을 거행하는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도달한다. 강림절에서 오순절에 이르는 전례 주기는, 바로 이 동일한 과정을 따르고 있다." 크라이튼의 전례의 신학에 따르면 성찬과 교회력과 성서일과는 결코 떼어놓으면 안 되는 예배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공전하며 선포된 성서일과는 반드시 성찬을 통해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도달하게 합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력에 대해 소개하고, 그에 따른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교회력

교회력의 다른 표현은 예배력(Litugical Calender)입니다. 2세기경의 산물인데, 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 혹은 목회 실천적 의미를 말한다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시간으로 설명되는 케리그마입니다. 교회력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음미하게 하고 참여하게 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교회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회상하도록 초대됩니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맞이하는 성탄절,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점점 밝아 오는 그를 바라보는 주현절(현현절)과 그의 수난과 죽으심의 전 과정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로 사는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생태적 발걸음, 이것보다 어떻게 더 그분을 가까이에서 현장감 넘치게 바라볼 방법이 있을까요? 따라서 오늘의 교회들은 이 교회력의 공전을 따라 걷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2. 성서일과

교회력을 따라 낭독되는 성경본문의 일람표를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Lectionary)라고 합니다. AD 4세기경 만들어진 이 성서일과는 독서를 뜻하는 라틴어의 Lectio에서 온 말로, 공적인 예배에서 회중에게 낭독하기 위해 질서 있게 정리한 성구집을 일컫습니다. 강림절 제1주부터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까지, 연간 52주 교회력을 따라 성구를 배열한 주일성서일과와 연간 365일 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매일성서일과가 있는데, 이것은 3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매주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씩 택하여 세 개를 낭독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시편이 매주 성서일과와 함께 주어지지만 루터교를 제외한 나머지 전례적 교회들은 설교 본문의 범주에 포함하기보다는 예배순서의 '응송'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역시 위 세 개의 성서일과와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인용하면 보다 시편 저자들의 감성이 한껏 배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일과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력에 따라 성서일과를 봉독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업을 전하고, 사도행전과 사도서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르침과 구원 사업을 계승한 사도의 활동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종말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전례는 성서봉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전하지만 성서 전체를 그대로의 형태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 목록에 의해 각 장을 있는 그대로의 순서로 봉독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관계있는 구절을 성서 전체에 걸쳐 읽는 것이다.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통해 일관된 것으로 이 구원 역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구약성서와 사도서간과 복음이 봉독되고, 강론으로 그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전통의 성서학자들의 참여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 완성된 까닭에 오늘날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들은 이 문헌에서 개정된 성서일과를 공동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당 교회력에 따른 구약성서와 서신서와 복음서 간의 통합적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앞의 문헌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업이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고,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의 성서일과를 묵상하다 보면 반드시 그 안에 감추어진 통합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화처럼 감추어져 있는 그 메시지가 한 주간 내가 걸어가야 할 주님께서 비추시는 길입니다.

4. 성서일과에 의한 설교기획

2019년 교회력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성서일과를 토대로 작성한 설교 기획의 예를 보겠습니다. 각각의 성서일과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려면, 한글 파일로 작업해서 출력해 두거나 화면에 띄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설 교 기 획

연월일: 2019년 6월16일

교회력: 성령강림제1주, 삼위일체주일

성서일과 및 개요

구약성서 : 잠언 8:1-4, 22-31

서신서 : 로마서 1:1-5

복음서 : 요한복음 16:12-15

지혜를 의인화 시켜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잠 8:22-26)과 천지를 창조하실 당시에 지혜가 함께 있었다(잠 8:27-30)고 증언한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며 성자 예수님을 소개한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그가 성자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요 16:14), 그 영광은 본디 성부 안에 있던 것(요 16:15)이라고 하신다.

주석 및 설교를 위한 힌트

지혜와 창조는 분리될 수 없는 개념, 지혜문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22절-31절까지는 3:19, 20에서 언급되었던 지혜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지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태초에(케뎀, םדק)'영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피조물보다이전에 존재한 선재성을 가리킨다.

고전적 헬라어에서 에이레네(화평, είρήνη)’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오는 평화 또는 번영을 이끌어내는 제도적 안정을 의미했다면, 사도 바울은 그 의미를 뛰어넘는 개념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είρήνη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나오는 화평’, 오직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뜻한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시는 역할을 하실 것이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서 성령께서는 예수의 영광을 나타낸다. 영광을 나타내리니의 희랍어 돜사세이, δοξάσει’는 메시아의 영광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것을 가지고”(15절)에서 '내 것'이 본디 아버지의 것이었음은 17:10을 참고할 것

교회력과의 관계에서 본 본문들의 통합적 요점

성삼위 하나님은 사랑으로 연대하셨고, 마침내 한 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그 하나님의 지혜는 성자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께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제자들이 감당치 못할 지혜였다. 그래서 성자는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마침내 성자 안에 담긴 성부의 지혜를 제자들에게서 드러내셨다.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

목표: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고, 성령 안에서 새 창조와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격려한다.

서론

삼위일체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빌립이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b-10a) 물론 이 신비가 가능하도록 돕는 능력은 성령님의 몫이다.

비고

AD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신경과,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참고할

응송

시인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 4)라고 노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그 빛을 더한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도, 성자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도 성령님의 임재와 현존도 모두 사람을 향한 사랑을 그 목적으로 하고 계시다.

본론

구약 : 잠 8:22-26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함과 정직과 진리는 창조와 관련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창조하신 것들을 당신의 뜻에 따라 통치하신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명철이며, 이 지혜안에 겸손히 머무는 것이 신앙의 첫 관문이다.

서신 :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라며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창조세계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롬5:2) 그런데 바울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움을 '환난'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한다.(롬5:3) 실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움은 때대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몰고 올 때가 있다는 것에서 바울의 말씀은 지당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과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인내도 함께 요구된다.

복음 :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당신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를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6:12)는 것이다. 실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단지 개념으로 이 교리를 수긍하는 것을 넘어 모든 신앙의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 안에서 이룬다는 뜻이다.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하나를 이루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성자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성부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게 된다.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읽기 | Lectio

신약 | 잠 8:1-4, 22-31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 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응송 | 시 8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서신 | 롬 5: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 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복음 | 요 16:12-15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 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 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묵상 | meditatio

잠 8:1을 묵상하십시오. 성부 하나님 곁에서 창조자가 된 지혜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린 것은 무 엇입니까?

롬 5:2-5을 묵상하십시오. 환난으로 시작해 소망으로 마무리 되는 여정에서 성부 하나님의 사 랑은 어떻게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까?

요 16:12-14을 묵상하십시오.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무엇을 우리에게 말 해줍니까?

기 도 | Oratio | 5-10

묵상 나눔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존재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첫째 주일이자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미하는 일은 사실은 어느 특정한 날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 혹은 매일의 기도와 묵상 생활, 그리고 좀 더 확대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따로 한 주일을 내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신앙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교리에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에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빌립이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b) 그때 예수님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으면 예수님을 본 것'이지 어떻게 '예수님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9,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내가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부와 성자가 일치를 이루도록 돕는 '사랑과 일치의 능력'은 바로 성령님의 몫이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성자는 성부를 알고 믿는 것이고,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붙들고 계시는 겁니다. 성령은 성자와 성부께서 교통할 뿐 아니라 생명의 결합을 이루는 통로인 셈입니다. 우리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단지 개념으로 이 교리를 수긍하는 것을 넘어 모든 신앙의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 안에서 이룬다는 뜻이겠습니다. 성자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하나를 이루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성자와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부께서도 우리 안에 계시게 됩니다. 지난 주 복음서의 말씀이었던 요 14:16, 17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 시선을 끄는 건 '또 다른 보혜사'란 표현입니다.

이미 보혜사가 계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요일 2:1에서 예수님을 파라클레토스로 묘사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b) 여기에서 요한이 말씀하는 '대언자'란 남을 대신해 말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희랍어로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이고, 사도 요한에 따르면 이 파라클레토스가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보혜사(parakletos)로서 제자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가르치셨듯이, 이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고 돕고 위로하고 가르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 그는 누구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7) 롬 8: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오셔서 그가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결국 이렇게 각각 다른 사역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역사학자들은 주후 215년경에 쓰인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을 원시 형태로 기록된 사도신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후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교에서 최초로 공인한 신경입니다. 이 니케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면서도'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라는 사도신경과 일치하는 고백을 함으로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같은 분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니케아 신경의 발전된 형태인데 여기엔 성령에 대한 자세한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되셨으며…" 이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주(主)이시지만, 그러나 성부와 성령이 같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한분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삼위일체론을 형성시킨 신학의 교부들 즉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한다고 말합니다.그러니까 한 분 하나님의 역사 안에 언제나 세 분의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인 동시에 성자의 영광이고 또한 성령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이 고백하고 교부들이 보존해 온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위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고백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과 사도들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하나님'으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성령님은 보혜사로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된 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의 말씀은 참된 지혜가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처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 잠 8:1

여기에서 잠언 기자는 지혜를 의인화해서 '지혜가 부른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왜 지혜가 사람을 부릅니까? 지혜가 부르지 않고, 명철이 부르지 않으면 사람은 지혜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그토록 소리 높여 사람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바람은 어리석은 자들이 명철해지고, 미련한 자들의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6절과 7절에 의하면 그것은 '가장 선한 것과 정직에 관한 것과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것과 정직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혜는 다음과 같이 밝혀줍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 잠 8:22-26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정직과 진리는 창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창조하신 것들을 당신의 뜻에 따라 통치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명철이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첫 관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잠언 기자가 본문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 지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구약의 말씀은 태초에 있었던 창조 사역에 비유해서 순차적으로 설명합니다. 땅도 생기기 전에,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고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도 참여했습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잠 8:27-31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성자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서 눈부시게 나타났습니다. 고전 1:24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롬 5:1, 2

여기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솔로몬의 온갖 영화가 들꽃 한 송이보다 못했다(마 6:29)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세속화해서 사치를 누린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속화해서 왕궁을 지었고, 그 왕궁 안에서 화려한 옷을 지어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린 화려함이 인적 없는 들에 피어 햇빛만 받고 자란 들꽃 한 송이보다 못했다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들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화려한 여배우의 드레스도 이 들꽃의 아름다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들꽃 같은 사람들입니다. 햇볕 한 줌과 이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고운 들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야 말로 영원한 지혜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아는 사람은 당연히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세계이고, 하나는 세상이 주는 화려함에의 유혹입니다. 이 두 세계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에게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 롬 5:3-5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 하나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서의 '즐거워하는 삶'을 역설적이게도 '환난'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지혜로 산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들과 화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에 물든 사회는 그리스도인들을 반기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움은 때대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몰고 올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인내도 함께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인내'는 희랍어로 '휘포모네(ὑπομονή)'입니다. '최후까지 남는다.'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최후까지 남은 한 사람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그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 16:12-14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를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그 십자가의 공포에 짓눌려서 아무도 제자로서의 삶을 감히 감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고스란히 실패의 상처로 남았고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완성되었고, 예수님의 기쁨도 우리의 즐거움도 거기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삼위 하나님은 사랑으로 연대하셨고, 마침내 한 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그 하나님의 지혜는 성자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제자들이 감당치 못할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마침내 성자 안에 담겨진 성부의 지혜가 제자들에게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근본을 바로 세우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여러분을 견고히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와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기만 한다면 솔로몬의 화려했던 영광도 여러분의 영광보다 못할 것입니다.󰏨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실천 | Praxio

우리 지혜와 즐거움은 하나님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한분 하나님의 지혜에서 내 기쁨과 즐거움이 세워지고 있는가?

3.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의 핵심 영성훈련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을 체화(體化) 하는 훈련이요,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로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렉시오 디비나를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12세기의 수도자였던 귀고(Guigo)가 정리한 렉시오 디비나의 4단계(영적 사다리)는 이렇습니다.

1. 읽기 | Lectio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성경을 작게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다. 본문의 뜻을 이해한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물면서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해서 암송한다. 마음에 닿았던 성경 구절을 가지고 일상에 돌아가서 끊임없이 되뇌며 묵상한다.

2. 묵상하기 | meditatio

어원적으로 '묵상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메디타리(meditari)'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인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메레탄(meletn)'에서 유래한 것이다. '생각' 혹은 '숙고'를 의미하는데, 수도 전통에서 이 단어는 성경본문에 대한 반복 암송을 뜻했다. 사막의 독거 은수자인 마카리우스도, 회 수도회의 창시자인 파코미우스도 이 반복 암송의 묵상을 선호했다. 예로니모 성인은 끊임없는 독서와 반복 묵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서고(書庫)'로 만들 것을 권고했고, 요한 카시아노는 끊임없는 묵상이 마음을 채우고 우리를 형성할 때까지 열심히 쉼 없이 렉시오 디비나를 하라고 권했다.

3. 기도하기 | oratio

묵상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기도로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단계이다. 바로 여기에서 '참회의 기도, 간구의 기도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4. 관상하기 | Contemplatio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며 어느덧 하나님과 깊은 만남의 자리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면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분별을 얻게 되고 하나님 뜻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 4단계의 영적 사다리를 잘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의 분주함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는 것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단계를 꼼꼼히 따라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묵상하노라면 어느덧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고도 끈끈한 연대를 이루게 된다.

4. 성만찬

부정(否定)의 언어를 사용해 개념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 즉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의 중심에 예배가 있습니다. 나형석 교수는 그의 책 '감리회 예배 원형과의 대화'에서 "성찬이 없다면 설교는 무익하고 공허하다"면서 그 이유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면(성찬) 단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만으로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머리와 귀로 들은 설교는 대개 관념으로 머무릅니다. 성찬에 참여해 주님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서 이 관념은 비로소 영적 리얼리즘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전의 기원

1) 유월절 만찬(빠스카 축제)

예배의 기원은 유월절 식탁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과거에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던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인데,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였습니다. 유월절 식사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어떤 중요한 상황을 전제로 마련된 식탁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식사이고,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종살이하던 자들이 그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놓여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기념하는 생명의 식탁입니다. 즉 유월절 식사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동일한 희망과 메시지를 그 안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비로운 식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히브리(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해방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음식만을 나누어 먹는 식탁과는 분명히 구별되었습니다. 이 식탁은 엄숙하고 의미 있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자리요, 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먼저 손을 씻고 정결례를 행한 다음에 온 가족이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으면 가장이 유월절 축제에 대한 감사와 축복을 선언합니다. 이 때 참석자들은 식사 중 네 번에 거쳐서 물을 탄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 중 첫 잔을 마십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 음식이 들어옵니다. 이 음식은 언제나 소박했습니다. 과거 출애굽의 전통에 따라서 식탁에는 반드시 쓴 나물과 무교병이 올라오는데, 히브리어로 '마짜(matza)'라고 불리는 이 무교병은 밀가루를 발효시켜주는 누룩을 전혀 넣지 않고 만든 딱딱하고 거칠은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딱딱한 빵을 먹으면서 그들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되새겼습니다. 빵이 발효되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발효되지 못한 반죽을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서둘러서 떠났다는 것을 그들은 이 무교병을 먹으면서 상기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인 탈무드 중에서 율법 이외의 우화로 이루어진 학가다(Haggadah)를 읽는데, 어린 자녀의 질문에 대한 어른의 대답형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자녀가 먼저 질문합니다. '오늘의 이 식사는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집안의 어른이 신6:21의 말씀으로 대답해줍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의 종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애굽을 내려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다.그리고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지금의 역사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가족들의 가슴속에 새겨집니다.

그 다음 애굽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을 구원하신 것을 회상하면서 할렐(Hallel)이라는 시편 찬가를 부릅니다. 그 다음 두 번 째 물탄 포도주를 마시고 이번에는 양고기가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은 떡을 떼어서 축복한 후에 가족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바로 이 시점(時點)에서 당신의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잔을 마십니다. 이 잔을 흔히 축복의 잔(고전10:16)이라고 부르고 이 잔을 마실 때 또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할렐(Hallel)'의 후반부인 시114-118편 혹은 115-118편을 부르고 네 번째 잔을 마심으로써 유월절 식사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2)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유월절 식탁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감정적인 이별을 하지 않으시고 성경적인 이별을 하셨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고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라고 당부도 하면서 눈물겨운 이별을 나눌 것 같은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눔으로 이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이 되게 하셨고, 또 그 순간이 주님의 살과 피로 나눈 최초의 성만찬이 되게 하셨고,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오게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15, 16)

우리도 대개 이별할 때 식사를 합니다. 식사라는 것은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한 끼 식사라도 함께 나누고 보내야 덜 섭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단지 함께 마음이나 사랑을 나누고 섭섭함이나 달래는 자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식탁으로부터 계승된 이 만찬을 통해 당신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십자가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마26:26, 막14:22, 눅22:15-16, 19)

예수님께서는 이 식탁을 나누시면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 하나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먼저 주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느 유월절 식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하시는 말씀에서 유월절 식탁이 새로운 차원을 맞이합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막 14:22)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이 말씀은 결코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지난 20세기 동안 성직자들이 문학적 충실성을 줄곧 보존하면서 이 짧은 말씀을 재생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님께서 이 말씀에 교회의 본질적인 진리를 담아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즉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중에 떡을 떼어 나누는 이 의식을 통해서 당신의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만찬사가 세 명의 제자와 바울에 의해 동일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과 떡을 떼어주며 남기신 짧은 말씀이 세 명의 제자와 바울의 기억 속에 처음부터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와 마가가 전해주는 예루살렘 전례나 누가나 바울이 전해주는 안디옥 전례가 표현에서 약간 다릅니다. 주님의 만찬사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는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 막14:22)라고 했고, 누가와 바울은 눅22:19와 고전11:24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중함은 주님의 만찬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만찬사를 자세히 주시하고 보다 분명한 사실을 전달하고 싶어 했던 사도들의 애정 서린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의 몸에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주님의 몸에 그토록 주목했을까요?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이 그대로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마26:27-28, 막14:23-24, 눅22:17, 20)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눅22:20) 하신 말씀에서 우리를 이 성찬에 초대하신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처음 초대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바울은 고전11:23에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라고 이 초대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모든 신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왜 성찬에 초대받은 자가 복됩니까? 그 이유야 이루 헤아릴 수 없겠지만, 우선 그들은 구약으로부터 전해진 언약의 계승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증언에 따르면 주님은 이 피에 대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1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 28) 여기에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을 누가는 눅22:20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한결같이 주님이 흘리신 피를 언약혹은 새 언약이라는 단어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시작된 구약의 배경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이 광경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제물로 쓰인 짐승의 피를 붉은 양털과 우슬초에 적셔서 백성들에게 뿌리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이 피를 뿌리면서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모세가 백성들에게 뿌리는 이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체결된 어떤 약속이었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세우실 온전한 구원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가 선언하고 있는 '언약' 혹은 '새 언약의 피'라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림으로써 체결되었던 하나님과의 옛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오늘 성찬에 초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구원의 새 약속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구원의 새 약속입니다.

2. 초대교회의 예배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원형 그대로 계승해서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신자들의 모임 장소가 따로 없었고, 유대인들의 회당을 빌어 사용할 처지도 못 되었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 이웃끼리 적당한 집에 모여서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면서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그 준비나 절차에 있어서 그리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은 신자들이 가져온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몸과 피로 성별해서 함께 나누었고 각자 가지고 온 음식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 예식은 오늘날의 엄숙한 예배나 미사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잔치였습니다. 그들은 이 예식을 예배나 미사라 부르지 않고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그들의 처음 초대교회의 예배는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대교회의 예배는 아주 서서히 엄숙한 형태의 예식으로 변모해갔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진 변화는 예배 시간이 저녁에서 아침 시간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저녁에 드려지던 아가페외에 아침 시간에 드리는 기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성경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말씀의 예배비슷한 성격을 가집니다. 이러한 아침 기도가 날마다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정해진 날에만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매주 주일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아침 시간에 행하던 말씀의 예배와 저녁 시간에 행하던 성찬 예식 즉 아가페는 대개 3세기까지는 독립된 별개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를 전후해서 이 두 가지 예식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즉 저녁에 행하던 아가페 예식이 아침에 바쳐지던 말씀의 예식과 결합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 거행되었던 것은 최후의 만찬을 지낸 시간과 일치하기 위해서 였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시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페 예식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겨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만찬이 아가페즉 사랑의 잔치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이 예식은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이 기쁜 잔치에서는 당연히 수난과 죽음보다는 주님의 부활이 더 자주 이야기 되었고 또 수난과 죽음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고, 고통과 죽음은 부활로서 끝났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만찬 예식은 마땅히 부활을 기념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은 수난과 죽음의 시간인 저녁시간보다는 부활이 이루어진 아침 시간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아침 시간으로 옮겨지면서 아침에 드려지던 말씀의 예배와 결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상의 변화는 성만찬의 본 의미를 크게 변질시켰습니다. 본래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행해졌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의미가 강조되어져야 하는데, 성만찬의 시간을 아침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수난과 죽음을 제외하고 부활만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리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이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고, 이 만찬이 3세기 이후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 변질이라면, 그나마 그 최후의 만찬을 버리고 말씀만 정착시킨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겁니다. 웨슬리는 독립 전쟁이 끝난 뒤 아메리카의 영구 교도들과는 달리 성례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광야의 주린 양떼들을 바라보면서 1784년 9월10일 브리스톨에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 문서가 바로 북미주 감리교도들의 주일예배식었는데, 그 내용은 1)공동기도서의 개정, 2)39 종교 강령의 개정, 3)새 교회를 위한 성직서품식순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해 제안되고 발티모어 연회에서 가납, 확인된 이 예전적 예배식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폴 샌더스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매우 강렬한 복음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건주의의 종파적 환경에서 양육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적 예배나 성례전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주례적인 성찬예배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자유주의적 분파의 주장에 더욱 고무되어 기도서에 의한 예배란 진실한 신앙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해롭고도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둘째,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격조 높은 문학 양식에 익숙해 있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수준 높은 교육과 세려된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들판이나 숲속 혹은 오두막집의 난로가에서 예배가 이루어졌고, 평원지대라 하더라도 기껏해야 통나무로 지은 마을회관 같은데서 예배를 드렸으니 영국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예배식이 이런 환경에서 정착되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의 주일성찬예배식을 설명하는 서론 부분에서 나는 영국교회의 공동기도서보다 성서적이고 이상적인 경건심을 확고하게 표현하는 예배서는 세상에 없다고 확신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모든 감리교도들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하며 주의 만찬에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십자가의 요의가 성찬식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1744년 영국 교회에서 주례적 성찬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매주 성찬식을 고집하며 예전을 가진 교회’, ‘객관적 예배의 균형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가 1784년 미국에 가서 그곳 감리교도들의 너무나 간소화된 예배를 보고 나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멀리 전통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한 말은 오늘의 감리교회도 음미해 볼 말입니다.

3. 현대 개신교 예배 반성

윌리암 바클레이(Barclay, William)는 자신의 책 성만찬’(이희숙 역, 종로서적)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을 인용해, 개신교회 안에서의 성례전의 죽음을 말하면서 우리는 지금 성례전의 죽음(the death of the sacraments)으로 위협받고 있는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고, 이 성례전의 문제는 바로 개신교회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현대 교회의 분위기를 매우 적절하게 반영해줍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여러 개혁자들이 물려준 예배의 형태를 성서적, 신학적, 전승적 검토 없이 수백 년 동안 답습해 왔으며 무엇이든 간결하게 단순화하는 청교도적 습관과 실용적 고려로 인해 성만찬을 늘 설교 중심적 예배에서 소외시켜 왔습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매주일 성만찬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설교는 항상 성만찬이 지니고 있는 영성적 토대를 대변(代辯) 혹은 보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알멘(von Allmen)은 강조하기를 말씀의 설교는 사실에 있어서 항상 성례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성례전이 확인되고 표징될 수 있는 목적을 언제나 찾아야 하며 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확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1982년 리마 예식서의 출현 이후 성만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기는 했지만 일부 에큐메니칼 운동진영을 제외하고는 성만찬을 한국교회에서 회복시키는 노력에 부진했습니다.

4.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예배

리마 예식서(Lima Liturgy)는 1982년 남미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총회를 위해 마련되었고 거기서 최초로 베풀어졌던 역사적인 세계교회의 공동 성만찬 예식서입니다. 세례, 성찬, 직제”(Baptism, Eucharist, Ministry : BEM)라는 이름이 붙여진 리마 문서의 성찬부분은 교회들 간에 역사적으로 있어온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논쟁들을 수렴하고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 기념비이며 이정표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서에는 성만찬의 영성적인 특성들이 모두 6가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1. 성부께 대한 감사와 찬미 (눅22:17, 고전11:24)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ἀναἁμν-ησις)' (눅22:19, 고전11:23-26)

3. 성령의 임재 (요6:53-63)

4. 그리스도와의 연합 (고전6:11)

5.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와 일치 (요17:21-26, 고전12:13)

6. 나눔과 도움 (행2:44-47)

5. 맺는 말 & 제언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이 말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비오 12세의 1947년의 회칙 'Mediator Dei(하느님의 중재자)'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례 행위 안에 하느님이신 그 제정자가 교회와 더불어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제단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그 대리자의 인격 안에 현존함과 동시에 특히 성체의 성사 안에 부어진 당신의 힘에 현존하고 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7조는 이 생각을 발전 시켰으며 또한 전례헌장 실시 평의회는 1967년 발표한 성체 성사의 지침 9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체 신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신자는 주님 자신이 교회의 전례 행사 안에 현존하고 있는 그 방법의 주된 것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그 이름을 위하여 모인 신자의 집회 안에 늘 현존하고 있다. 물론 전례 헌장에 의하면 성만찬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 가운데서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하고 있으며, 성서 봉독에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께서 세상에 남겨 놓으신 성만찬 예전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이 성만찬 예전을 하나의 실재로 중요시하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예식, 더 심한 경우에는 프로그램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만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샘물과도 같은 영성적 의미들을 바로 이해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해 내는 제자의 길이요, 따름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는 것이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 신학자였던 칼 라너는 1965년 12월 12일 있었던 공의회 폐막식 강연에서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내딛었을 뿐 그것은 곧 시작의 시작이었다"고 공의회를 평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쇄신과 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참된 예배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교회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성만찬을 회복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하겠습니다. 성공회의 주낙현 신부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계간지인 '대성당지' 부활특집호에 낸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존 웨슬리 사제는 오롯이 성공회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개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무슨 제도적인 개혁이나 권위에의 도전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회의 전통 안에서 '말씀과 성사'라는 기본적인 구원의 방법에 충실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과 성사 앞에서 타성에 젖지 않았고 늘 정직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늘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이 참된 것인가,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 것인가를 말씀과 성사 앞에 드러내며 물었습니다. 이 개인적인 열심과 진지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귀한 모범이 됩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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