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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主, 우리의 의(義)(20) (이선희역/유장환교수요약)
(The Lord Our Righteousness) [1765년 11월 24일] 7페이지
예레미야 23:6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1. 지금까지 종교에 대하여 일어난 논쟁들은 얼마나 끔찍했으며 또한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약한 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실족했던가!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곪아터진 악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말싸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그들 가운데 화평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못할 것이며, 무슨 고난인들 마다할 것인가? ‘
4. 이 진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한 조항이 위에 인용한 설교본문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깊이 들어가는 진리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구조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진리다. 루터가 이 진리와 밀접히 관련된 진리에 대하여 한 말을 또한 이 진리에 대하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교회가 그 위에 서면 서고 아니면 쓰러지는 그런 교리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면, 아무리 다른 점들에서는 서로 다를지라도, 이 진리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리라고 기대함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모두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교리도 또한 드물다.
6. 그러나 상호 간의 차이가 실제의 경험에 있다기보다는 의견에 있고, 또 의견에 있기보다는 표현에 있는 것이라면,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진리에 대하여 그토록 심각하게 서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의 몇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나, 주된 이유는 그들이 서로 간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견해’에 너무 열렬하게 애착하는 것과 각자의 독특한 ‘표현’방식에 너무 애착하는 것이 여기에 결부되어 있다.
II. 그리스도의 의(義)란 무엇인가,
II. 언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가(imputed)
그리고 짧고 평이한 적용을 하나 소개함으로써 결론을 맺을 것이다.
I. 그리스도의 의란 무엇인가? 이는 두 가지다. 그의 神性的 의 아니면 人性的 의를 의미한다.
1. 그의 신성적 의는 그의 신성적 본질에 속한다. 그는 신성적 본질에 있어서 만물 위에 존재하시는 분이요,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시나,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지고하시며 영원하신 분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성적 의라는 것은 그의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거룩성이다; 그리고 그의 무한한 공의와 자비와 진리가 그의 신성적 의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그와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적 의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가(轉嫁)의 교리(the doctrine of imputation)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오로지는 아니라 해도, 주로 그리스도의 인성적 의의 전가로 이해한다.
2. 그리스도의 인성적 의는 그의 인성적 본질 안에서 그에게 속한다. 그는 인성적 본질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다. 이 인성적 의는 내적 의와 외적 의로 나뉜다. 그의 내적 의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과 기능에 인쳐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내적 의는, 그의 신성적 의가 인간의 영에 분여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의 신성적 의의 모사다. 이 내적 의는 신성적 순결함, 신성적 공의와 자비와 진리다.
3. 그리스도가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외적 의의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그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 아무런 외적 죄를 알지 못했으며, ‘그의 입에서는 어떤 음흉한 꾀도 볼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적절치 않은 말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며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번이라도 행치 않았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외적 의의 가장 작은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이 정도라도 그리스도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여인으로부터 난 누구에게도 결코 속해 본 일이 없으며 속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단지 소극적인 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외적 의조차도 적극적인 면 또한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다 잘 행했다.’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행동들이 다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정확히 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행하셨다. 그의 순종은 전체적으로도 완전했고, 각 부분마다 완전했다. ‘그는 모든 의를 다 이루었다.’
4. 그러나 그의 의는 이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의는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당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그가 이 세상에 들어온 때부터 ‘나무 위에서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 때까지, 그들을 위해서 속죄를 완전히 이루신 다음에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혼이 떠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 전체를 온전히 감수하신 일을 포함한다. 이것을 통상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앞의 것을 그의 능동적 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는 실제로는 결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때나 심지어 생각할 때에도, 이 둘을 전혀 서로 분리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주, 우리의 의’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서로 결합한 상태에서의 이 두 가지 의에 관련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II. 언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주, 우리의 의’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다른 말로 해서, 언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인가? 그리고 전가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온 세상을 두루 살펴 보라. 이성 있는 사람들 가운데 토론할 필요가 없는 첫 번째 사실은 이것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그것이 전가되는 것인가?’ 그들이 믿을 때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그가 믿을 때 곧 바로, 전가된다.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는 불가분리의 관계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일치되게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믿는 자들이 모두 똑같이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표현의 차이는 반드시 마음의 차이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3.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의견에 있어서도 우리와 다를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과] 동일한 값진 믿음의 동참자일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바로 그 복에 대한 명료한 이해(a distinct apprehension)를 갖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들의 개념들(ideas)이 명료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건전할 수 있다.
4. 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인이 이 주제[주, 우리의 의]에 대하여 명료하게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벨라민(Bellarmine)이 임종시에 ‘당신은 성인들 가운데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외치는 말을 들었었다면, 그는 –물론 잘못된 의견들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한 것이 없다고 우리는 확인했었을까?
5.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의가 믿는 자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다: 모든 믿는 자들은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이나, 또는 과거에 있었던 무엇 때문에, 즉 그들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엇 때문에가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에 용서되고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말한다.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이나 그들이 행한 무엇 때문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의나 행위들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행한 의의 행위들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비하심을 따라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이다.’ 우리는 ‘값없이 그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얻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6. 이것이 내가 거의 28년 동안 끊임없이 믿어오고 가르쳐온 교리다. 이 교리를 나는 1738년에, 그리고 그 후에 열 번 내지 열두 번에 걸쳐서, 우리 교회의 설교집(Homilies)에서 발췌한 그 말들과 또한 같은 의미의 다른 말들로써 온 세상에 공표했다.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다음 사항들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 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믿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막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치도 우리가 칭의를 받아 마땅한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인간의 의를 막는 것이다.
우리가 오로지 믿음에 의하여 칭의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들의 공로를 모두 깨끗이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칭의를 마땅히 받게 하는 공로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돌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로부터 값없이[=인간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우리의 몸값[죄의 값]의 어떤 일부라도 지불할 능력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의 어떠한 공로 없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준비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써 우리의 몸값이 지불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도록 하려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다.
7. 그 후 일년 또는 이년 뒤에 출판하고 그 후로 여러 차례 재출판한(이것은 나의 입장이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찬송시집들도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와 의는 나의 아름다움이요
나의 영광스러운 옷이다:
온 세상이 불타는 가운데 나는 이것으로써 치장하고
기쁨으로 나의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8. 19년 전에 그리고 다시 7년 내지 8년 전에 출판했던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설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동일한 내용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이 사실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이제 ‘세상을 하나님 자신에게 화해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의 죄들을 그들에게 전가하지 않으셨다’. [...] 그래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때문에,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행하고 감수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한 가지 유일한 조건(이 또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만으로 우리의 죄들에 해당하는 처벌을 면제해주시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총애의 자리로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영적인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시는데, 이 영적 생명은 장래에 받을 영원한 생명의 약조금이다.
9. 이 내용은 내가 작년에 출판한 「칭의에 관한 논고」(Treatise on Justification)에 더 자세히 그리고 세부적으로 표현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한다’는 표현의 의미를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및 능동적 순종을 포함하여 그의 의를 주시는 것이데, 그 의에 대한 보답의 형태로, 즉 그 의에 의하여 취득된 특권들과 복들과 이익들의 형태로 주신다는 의미로 본다면, 믿는 자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칭의하는 것이요, 믿는 자 자신의 어떠한 의 때문에 칭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런 의미로 칼빈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으로써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또는 총애를 얻어내었다.’ 또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으로써 우리를 위해 의를 얻어내었다.’ 또 ‘이와 같은 표현들은,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또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다,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우리를 위한 의가 얻어졌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10. 그러나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아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진다”라고 너는 단언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거듭해서 단언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것을 단언한다. 즉, 믿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믿음이 그렇다는 말이다. 즉, 내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는 오로지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때문에 용서받으며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그러나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여받아 지니는 것 또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따라서 위에 인용했던 그 찬송시는 모든 믿는 심령의 언어다:
예수의 피와 의는
나의 아름다움이요
나의 영광스러운 의복이다.
즉, 당신의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 덕분에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하심과 받아주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를 입기 전에 우리 자신의 의의 더러운 누더기를 벗어버려야 하지 않는가?’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즉, 평이한 말로 하면, 우리는 복음을 믿을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반드시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의지하던 것을 끊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신뢰하던 것을 전부 내버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가질 수가 없다.
12. ‘그러나 너는 내재적(inherent) 의를 믿지 않는가?’ 나는 내재적 의를 믿는다. 그 적절한 위치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의 열매로서의 내재적 의를 나는 믿는다. 전가된 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된 의에 뒤따르는 결과로서의 내재적 의를 나는 믿는다. 즉, 나는 하나님이 의를 전가하신(imputed) 모든 사람에게 의를 [이식하듯이] 심으신다(implants)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의가 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성화가 되셨다’고 나는 믿는다. 즉,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칭의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화하신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의롭게 만들어진다.
13. ‘그러나 너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그의 의의 자리에 대신 놓는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들을[즉,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믿음을] 각각 올바른 위치에 놓기 위해 특별히 조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소망 전체의 전적인 그리고 유일한 기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기초 위에 집을 세울 수 있게 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믿음 덕분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한다고 누가 비난한다면, 그는 내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한다고 비난한다면 전적으로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세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관계없이, 모든 믿음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모든 쏘시니우스주의자들(Socinians)과 아리우스주의들(Arians), 즉 그들을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지고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15. 그리스도의 인성 면에서의 의, 또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인성 면에서의 의의 전가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 받는 전적이고도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라는 사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들, 즉 그들 교회의 원칙들에 충실한 구성원들 모두에 의해서도 부인되고 있다.
16. 심지어 개혁교회들 안에도 신비주의자들(mystics)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이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인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영국 안에서) 금세기에 이들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로오(Law)씨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절대적으로 그리고 열렬히 부인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가된 의는 전가된 어리석은 생각이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로버트 바클리(Robert Barclay)처럼 열렬히 부인했다. 퀘이커교도(Quak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단의 사람들도 같은 사상을 주장한다. 아니, 영국교회의 교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주제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하여 전가된 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전가된 의와 믿음에 의한 칭의가 모두 선행을 파괴한다고 하여 거부한다. 이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보통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와 최근에 테일러(Taylor) 박사의 글들에 의하여 계몽된 장로교회파 사람들(Presbyterians) 및 독립교회파 사람들(Independents) 가운데 수천의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개념이나 표현에서나 그토록 어두운 사람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고 그런 표현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마음이 용서와 은혜와 영광을 위해 오로지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만을 의지한다면, 표현에 있어서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더 정확히 성경적이라고 판단하는 이 표현이나 또는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자. 이런 입장을 나는 허베이(Hervey)씨가 한 말로써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 말은 황금 글자로 써 놓을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표현들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발아래 회개하는 범죄인들과 같이 겸손하게 하고, 헌신적인 용병들처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복된 영생의 길에 있게 될 것이다.’
19. 한편,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다: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다”’라는 표현을 그의 불의를 감추는 덮개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수천 번도 넘게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술취함 때문에 책망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의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나의 의다.’라고 한다.
20. 여러분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표현[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을 이처럼 가증하게 오용하지 않도록 지켜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은혜가 더하도록 계속 죄 가운데 거하지’ 않도록 경고하라!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들지 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라!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고 헛되이 상상함으로써, ‘거룩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주님을 볼 수 없다’하는 하나님의 존엄한 법령을 헛되게 하지 말도록 그들에게 경고하라. 만약 그들이 계속 불의한 상태로 있으면,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하라.
이제 [이 결론을] 간단하고도 평이하게 적용할 일만이 남았다. 첫 번째로, 나는 이런 표현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표현들]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 표현들을 쓰는 사람들을 모두 율법폐기론자(antinomians)라고 정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당신들에게 말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러나 반대편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도대체 왜 다 정죄하는가?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쓰는데, 그런 표현을 쓴다고 도대체 왜 그들과 당신은 싸우는가? 당신이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유를 사용한다고 그들이 당신과 싸운다면, 그래도 당신은 그들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서, 만약 그들이 그 이유 때문에 당신과 싸운다면, 당신이 비난하는 그 옹졸한 신념을 모방하지 말라. 적어도 그들이 당신에게 마땅히 허용해야 할 그 자유를 당신도 그들에게 허용하라.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왜 표현을 가지고 화를 내는가? ‘오, 그 표현[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은 오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이 오용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그러나 오용은 제거되어야 하고, 선용은 계속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표현 밑에 함축되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확실히 유지해야 한다. 즉, 내가 누리는 모든 복들은, 그리고 시간에서와 영원에서 내가 소망하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이 표현들[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을 좋아하는 당신들에게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가고 물어보겠다.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더 원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이 싸우면서 지키고자 하는 그 의미 전부를 나는 인정한다. 즉,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나는 전적으로 인정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이 선택하는 여하한 표현들을 쓰도록 허용한다. 단지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깊이 관심 두고 방지하려고 하는 그 끔찍한 오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라. 나 자신도 ‘전가된 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이 표현과 또 비슷한 표현들을 회중 전체로 하여금 따라서 말하도록 자주 시도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나에게 양심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 나에게 사적 판단의 권리를 허용해 달라. 다른 어떤 표현보다 이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내가 판단하는 대로 그 만큼만 자주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 만약 내가 어떤 한 표현을 매 2분마다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판단할 수 없더라도, 나에게 화를 내지 말라. 만약 당신들이 원한다면, 당신들은 그렇게 사용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정죄하지는 말라. 이것 때문에 나를 교황추종자 또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적대자’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당신들에게 관대한 것처럼 당신들도 나에게 관대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룰 수 있겠는가? 마치도 내가 ‘기독교의 기초 바로 그것을 뒤집어 엎고 있는 것’처럼 비극적인 비명을 지르지 말라. ‘이 놓여진 기초 이외에 다른 기초를 아무도 놓을 수 없으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나는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초 위에 믿음으로써 내적 및 외적 거룩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마음 속에 어떠한 싫어하는 것과 불친절과, 아니, 겁 많음이나 냉정한 것을 용인하지 말라. 견해의 차이가 있을 경우에, 우리가 생각하며 또한 생각하도록 하며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의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당신들을 쉽게 용서하는 것처럼 당신들도 나를 쉽게 용서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지 표현의 차이만이 있는 경우에, 얼마나 더 많은 차이들이 [그 배후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특별한 표현방식을 더 자주 써야 하느냐 아니면 덜 자주 써야 하느냐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불화의 씨로 발전되기 전에, 서로 간에 논쟁하여 [해결하기를] 진지하게 열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의 문제와 같은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의 공동의 적들에게 더 이상 신성모독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자. 오히려 기회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기회를 주지 말자. 이제는 제발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손을 한가지로 뭉치자. 우리가 ‘한 주님, 한 믿음,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한 소망’을 가진 것 같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 서로를 굳세게 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모든 인류에게 ‘주, 우리의 의’를 선포하자.
논쟁 1
칭의의 기초?
그리스도의 의 전가
그리스도의 의 = 기초 “오직 믿음으로”—- 칭의 / 중생
논쟁2 중재-관용의 정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표현
(1) 극단적 반대자 (오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율법폐기론자
Law---전가된 의는 전가된 어리석은 생각이다.
(2) 극단적 지지자 (남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매 2분마다 사용하지 않는 자는 교황주의자다.
논쟁 3
Think and Let Think
언어의 차이, 표현의 차이 극복 중재
논쟁 4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심층문법
모든 믿는 자들이 오로지 그리스도가 행하시고(능동적인 의) 감수하신(수동적인 의) 것 때문에 용서받으며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아우틀러 “기념비적 설교“
<주 우리의 의> 1765
신성적인 의
내적인 의
그리스도의 의
인성적인 의
소극적인 의
외적인 의
능동적인 의
적극적인 의
수동적인 의
(칭의) 용서/용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기독교의 구조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진리
(성화) 내적 외적 거룩
(칭의) 용서/용납
(성령의 증거) 믿음
(기초) 그리스도의 의
<믿음-성화-선행의 관계> 웨슬리 저널 1권 3 p.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