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증거1 -유장환교수 최종 요약.hwp
닫기10. 성령의 증거(I) (The Witness of the Spirit, I. 1746년) 최종
유장환교수 요약
“성령 그 자신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신다” (롬 8:16)
1. 열광주의자들 본문 왜곡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상상의 음성을 이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로 착각하여, 여전히 마귀의 일들을 행하고 있으면서도[요일 3:8]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질없이 주제넘게 상상하였던가!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본래적인 열광주의자들(enthusiasts)이다.
2. 이성적인 사람들이 이런 망상의 끔찍한 효과들을 보면서그 반대의 극단으로 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의 증거를 어떤 사람이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들이 그런 사람을 기꺼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그러나 우리는 꼭 이 극단이나 아니면 저 극단으로 치달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는 가운데 길로 잘 조종하여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저 오류와 열광주의의 영으로부터는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되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큰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음의 것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이 ‘우리의 영의 증거(witness) (또는 증언[testimony])’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의 증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서 증언’하시는 것인가?
둘째로, 하나님의 영과 우리 영의 이 합동증언(joint testimony)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의 상상(presumption) 및 마귀가 주는 망상(delusion)과 어떻게 명백하고도 견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I,1. ‘우리의 영의 증거’ 또는 ‘증언’이란 무엇인가
많은 성경 본문들과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증언과 그 자신의 영의 증언 이 두 가지가 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밝혀준다.
2. 우리 자신의 영의 증언에 관하여는 그 근거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들을 묘사하는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에서 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들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만일 그가 첫째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모든 거룩한 기질들과 행동들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를 안다면, 그리고 그가 둘째로 ‘나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다.
3. 성 요한이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말한 그 모든 명료한 선언들도 이 말씀과 일치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일 2:3]. “만일 너희가 그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안다면, 너희는 의를 행하는 자는 누구나 그로부터 태어났다 것을 알 수 있다”[요일 2:29].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요일 3:14]. “그가 우리에게 주신 (순종하는) 영으로써, 이로써 우리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요일 3:24].
4. 이 모든 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런 특징들을 갖고 있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특징들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5. 그런데 우리가 이런 특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제기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네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아는가? 네가 지금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다고 하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아는가? 너는 그것을 즉각적으로(immediately) 의식하지 않는가? 만일 너의 영혼이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면, 너는 이와 동일한 즉각적인 의식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네가 교만하여 느꼈던 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고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너는 이와 동일한 즉각적인 의식으로써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6.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우리 자신의 영의 증언’, 즉 우리가 가슴에 있어서 거룩하며 외적 행동거지에 있어서 거룩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양심의 증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에게 속하는 기질들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된 그 기질들을 우리가 입양의 성령 안에서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하여 받아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다. 즉, 그 기질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 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하는 가슴, 어린아이 같은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꽉 붙잡는 것, 하나님 이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 우리의 모든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모든 개개의 사람을 진지하고도 부드러운 정감을 가지고 포옹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려놓았듯이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형제를 위하여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그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양이 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의와 자비와 진실 안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의식이다.
7.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증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깊은 일들”[고전 2:10]을 설명할 말을 인간의 언어에서 찾는 것은 어렵다. 성령의 증언이란 영혼에 임하는 일종의 내적 느낌(an inward impression on the soul)인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여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신을 나를 위하여 내주었다는 것을, 나의 모든 죄들이 지워졌다는 것을, 내가, 바로 내가 하나님에게 화해되었다는 것을 나의 영에게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8. 이 ‘하나님의 영의 증언’은 이치적으로 볼 때 ‘우리의 영의 증언’에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우리가 가슴에 있어서 거룩하며 삶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것을 의식하며, 그래서 우리가 내적으로 외적으로 거룩하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의 영의 증언을 갖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가슴에 있어서 거룩해져 있어야만 하며, 삶에 있어서 거룩해져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우리의 영에 증언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영의 증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모든 거룩에 앞서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모든 거룩에 대한 우리의 내적 의식,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모든 거룩에 대한 ‘우리의 영의 증언’에 앞서 있어야 한다.
9. 하나님의 영이 그 증언을 우리 영에게 해 줄 때에, 즉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 자신의 아들을 너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다”[요일 4:10]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너를 사랑했으며, 너의 죄들을 그의 피로써 씻어내셨다”[계 1:5]고 하는 것에 대한 증언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해 주시는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는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일 4:19, 21]. 그 때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안다”[고전 2:12].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로써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안다”[요일 5:19]. 이것이 우리 자신의 영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지속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증언하는 하나님의 영의 증언과 더불어서 계속되는 것이다.
10. 하나님의 영의 증언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한 것 가운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operation)를 ‘우리 자신의 영의 증언’에서 제외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서 온갖 종류의 좋은 것을 역사하여 발생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 자신이 행하신 일 위에 빛을 비추어서 그 자신이 이루신 일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분도 하나님의 영이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고전 2:12]. 즉, 우리의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함과 우리의 거룩한 진실함”에 관한 우리의 양심의 증언을 성령께서 강화하기 위함이며[고후 1:12],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다 더 충만하고 강한 빛 안에서 분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11.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시되, 어떻게 증언하시건대 모든 의심을 다 배제하며 우리의 자녀됨의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우리의 영의 증언에 대하여 살펴 본다: 영혼은 이 땅 위의 어떤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면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인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그것을 마찬가지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인지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논증이 옳다면, 즉 [1]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즉 겸손한 즐거움과 거룩한 기쁨과 순종하는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2] 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3]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논증이 옳다면,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12. 하나님의 영의 증언이 우리의 가슴에 명백하게 나타내지는 방법에 대하여는 나로서는 설명하려 하지 않겠다. “그러한 지식은 나에게는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 한다”(시 139:6). 나는 바람이 불 때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 바람이 어떻게 내게 불어오고 또 나를 떠나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요 3:8].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행해지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는 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만은 안다. 즉,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에게 그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여 주시되, 이 증언이 그의 영에 임하여 있는 동안에는, 마치도 그가 태양의 충만한 광선 안에 서 있는 동안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도록 그렇게 증언하여 주신다는 사실, 이 사실만은 우리는 안다.
II.1, 하나님의 영과 우리 영의 이 합동 증언(joint testimony)은 자연적 마음(a natural mind)의 주제넘은 상상으로부터, 그리고 마귀의 망상으로부터 어떻게 명백하고도 공고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2. 첫째로, 이 증언[=합동 증언]은 어떻게 자연적 마음의 상상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가?
3.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이 양자를 구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특징들을 풍부하게 열거하고 있다. 이 특징들은 믿는 자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증언하는 그 진정한 증언에 앞서서 진행되는 상황과 그 증언과 동반하는 상황과 그 증언에 뒤따라오는 상황을 아주 명료하게 묘사하고 있다.
4. 성경은 그 은사[=성령의 증언]에 앞서서 진행되는, 동반하는, 그리고 뒤따르는 명백하고도 분명한 특징들을 열거하고 있다. 예컨대 회개, 즉 죄의 깨달음이 항상 용서의 증언에 앞서서 진행되는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마 3:2]. //그러나 성령의 증언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바로 이 회개가 낯설다. 그는 “상심한 마음과 깊이 뉘우치는 마음”[시 51:17]을 안 적이 없다. “그의 죄들의 기억”이 그에게 “통탄스러운” 적이 없었으며, “그 죄들의 짐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던” 적이 없다
5. 또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증언에 반드시 앞서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 상태를 광범위하고 강력한 변화,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의 변화”, “사단의 능력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변화”[행 26:18],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변화”[요 5:24; 요일 3:14],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그는 이런 일에 대하여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것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6. 우리는 현재의 특징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자녀를 주제넘은 자기기만자로부터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의 증언에 동반되는 주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 즐거움은 겸손한 즐거움이요, 먼지에까지 낮아지게 하는 즐거움이다. 낮아짐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온유와 인내와 관대함과 오래 참음이 있다. 거기에는 부드럽고 양보하는 정신, 순하고 다정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부드러움이 있다. //그러나 주제넘은 그 사람이 자기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그 성령의 증언에 이러한 열매들이 [그 결과로서] 동반하고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하나님의 총애를 확신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높아진다. 그는 그 자신이 강한 성령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더욱 고압적이 되며, 어떠한 책망도 받아들일 능력이 더욱 없어지며, 어떠한 의견충돌에 대하여도 더욱 참지 못하게 된다. 더욱 온유해지고, 관대해지고, 잘 깨닫고,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게 하는”[약 1:19] 대신, 그는 더욱 듣기는 느리게 하고 말하기는 속히 하며, 더욱 누구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으며, 성격에 있어서 더욱 불같이 격해지며, 행동에 있어서 성미가 급해진다.
7. 진정한 성령의 증언 뒤따르는 특징
또한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니 (이 사랑의 확실한 징표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일 5:3] 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 주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그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속히 행하기 위하여 서두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제넘게 상상하는 자가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그에게 불순종하는 방종을 주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고 지키지 않는 방종을 준다. 지금 그는 자신을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롬 6:14,15]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선행에 그만큼 더 열심히 없으며[딛 2:14], 악을 멀리하는 일에 그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에 그만큼 더 경계심을 갖지 않으며, 그의 혀를 지키는 일에 그만큼 더 열심을 내지 않는다. 즉, 그가 이렇게 명백히 마귀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영이 증거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8. 너 자신을 발견하라, 너 불쌍한 자기기만자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하는 너여, ‘너의 마음은 낮아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너는 관대하지 않으며 온유하지 않다. 너는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성령에의 참여자[히 6:4]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나님의 영이 너의 영과 함께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만큼 명백하고 분명하다. 네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행 9:18]. 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안심하라. 너의 죄들이 용서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건강하게 하였다”[마 9:2, 22] 라고 말씀하시면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음성을 들을 때까지 네 자신 안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9. ‘그러나 그 자신 안에 진정한 증언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증언을 주제넘은 상상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인가?’ 너는 어떻게 낮을 밤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가? 너는, 만일 너의 감각들이 올바로 놓여 있다면, 그 차이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않는가?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적 빛과 영적 어두움 사이에는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차이도 역시, 우리의 영적인 감각이 올바로 놓여 있다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10. 우리가 이 차이를 구별하는 방법(manner)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낼 때 쓰는 기준(criteria) 또는 고유한 특징들에 대한 보다 더 세세하고도 철학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요구이다. 이 질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없다. 예)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대답했을 때, 그 현명한 로마인이 이렇게 응대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아느냐? 어떤 기준(criteria)을 가지고, 어떤 고유한 특징들을 가지고 너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이나 천사의 음성과 구별할 수 있는 방법(manner)을 나에게 설명하라.” 이런 핵심에 맞지 않는 [단지 호기심에서 나온] 쓸데없는 요구에 사도 바울 자신이라면 대답하려고 시도라도 했을 것이라고 너는 보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누가 설명할 수 있으랴? 그것은 아마도 사람도 천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11. 문제의 핵심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 본다. 하나님이 어떤 영혼에게 “네 죄들이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신다고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그 음성을 알아듣기를 분명히 원하실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헛되이 하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영혼이 하나님의 그 음성을 알아듣게 하실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고자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행하심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발생시키신다. 그러면 그 영혼은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언을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사람도 그 증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만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일들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떤 자연적 매체나 또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자연적 방법이 있다면, 자연인도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일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는 그런 것들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즉 자연인은 갖고 있지 않은 영적 감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12. ‘그러나 나의 영적인 감각들이 올바로 놓여있는지를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성령의 음성을 착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너 자신의 영의 증언’[롬 8:16]을 통해서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대답”[벧전 3:21]을 통해서다. 하나님이 너의 영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열매들을 통하여 너는 ‘하나님의 영의 증언’[롬 8:16]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너는 네가 망상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즉 네가 네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슴 안에서 다스리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열매들은 “사랑과 즐거움과 평화”[갈 5:22], “동정심, 마음의 겸손함, 온유함, 관대함, 오래 참음”[골 3:12]이다. 그리고 외적인 열매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과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치 않는 것과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대하여 열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순종하는 것이다.
13. 바로 그 열매들로써 너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가 주는 여하한 망상(delusion)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교만한 영[=마귀]은 하나님 앞에서 너를 겸손하게 만들 능력이 없다. 그 마귀는 너의 가슴을 부드럽게 하고 우선 녹아 흐르게 하여 하나님을 향한 애통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들어가게 할 능력도 없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거룩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확실하고, 죄는 마귀의 일이라는 것이 확실하듯이, 네가 네 안에 갖고 있는 증언도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이 확실하다.
14. 그렇다면 너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후 9:15]. “그의 아들의 영을 나의 가슴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고”[갈 4:6], 지금도 “나의 영과 더불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롬 8:16]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의 입술뿐만 아니라, 너의 삶도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너를 그의 것으로 인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것인 “너의 몸과 너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전 6:20]. 사랑하는 자여, 만일 네가 “네 안에 이 소망을 가졌으면, 하나님이 깨끗하신 것처럼 네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요일 3:3].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네게 주신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잘 보면서”[요일 3:1], 너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너를 씻어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하게 하라”[고후 7:1]. 그리고 너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적인 제물이 되게 하라![롬 12:1; 벧전 2:5].
*** 1738.5.24.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나의 죄를 이미 가져가 버렸고, 나를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John Wesley’s Journal
14.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존 웨슬리의 설교: 성령의 증거(Ⅰ) 대한기독교서회
The Witness of the Spirit, Discourse I (1746)
서울신대웨슬리연구소 2021.8.5
해설(역자 편)
이 글은 설교라기보다는 출판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 같다. 1767년에 출판된 ‘성령의 증거(II)’에서 웨슬리는 1746년에 쓴 설교 ‘성령의 증거(I)’를 인용하면서 “20년 동안 보다 면밀히 검토하여 보았지만 나는 이 설교의 어떤 부분도 삭제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Work, V, p. 125).
웨슬리는 1741년 3월 10일 목요일 브리스톨(Bristol)에서 열린 집회의 아침 설교 본문으로 로마서 8장 15절 이하를 택하였고, 그 설교를 다듬고 수정하여 출판한 것 같다. 1753년 8월 11일 이전에 이 설교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웨슬리 초기의 설교 가운데 대부분이 이 설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하고 있다. 첫째는 열광주의자들의 사상을 경계한다. 이 설교에 나오는 열광주의자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cf. Harrison, Standard Sermons of John Wesley, p. 198).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확신의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이들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며, 칭의를 받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더 거룩할 수도 덜 거룩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의롭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곧 칭의요 성화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자의 잘못에 빠져들게 되었다(Work, I, p. 323-325). 웨슬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한편 마귀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질없이 추측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둘째로 웨슬리는 합리주의자들의 사상을 경계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합리주의자들은 당시의 영국 국교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성령의 증거는 사도시대의 특별한 기적적인 은사로서, 개인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Sugden(ed.), STS, I. p. 263 주해).
이에 대해 웨슬리는 ‘이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호소’라는 논문에서 반박하고 있다. 웨슬리는 이 논문에서 3-5세기의 교부들도 확신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면서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rysostom),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그리고 어거스틴(Augustine)등을 인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루터(Luther), 멜랑히톤(Melanchton)과 영국교회 신조까지도 인용하면서 확신의 교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주로 사변적인데 치우쳤기 때문에 생명력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면서 경험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 결과 웨슬리는 모라비안파들로부터는 율법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영국교도들로부터는 열광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웨슬리는 율법주의자도 아니요 열광주의자도 아니었다. 웨슬리는 이 설교의 서론에서 말한다. “이런 그릇된 영과 열광주의와 충분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하나님의 은사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이 큰 특권을 지니고 걸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우리는 그 중용의 도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 확신의 교리를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간접적인 증거(곧 우리 영의 증거)의 공동 증거(joint witness)로서 정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에서 언급한 양극단의 주장을 창의적으로 종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주장함으로써 합리주의자들의 결점을 시정하고, 그런가하면 이 성령의 직접 증거에 성령의 간접 증거를 결부시켜서 열광주의자들의 위험을 경계한다. 곧 웨슬리는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곧 우리 양심의 증거)의 필요성을 말함으로써, 성도의 내적인 ‘직접적 증거(Direct Witness)’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마귀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양심의 증거에 대해서 웨슬리는 ‘우리 영의 증거’라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웨슬리는 이 확신을 올더스케이트에서 극적으로 체험했다. 그 때의 체험이 너무나 감격적이었기에 웨슬리는 초기에 이 확신이 구원에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후년에 이르러 “확신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공통된 특권”이라고 정리하였다. 어쨌든 이 교리야말로 메소디스트가 외쳐야할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며 또한 웨슬리가 기독교교리사에 크게 공헌한 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