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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로마서  서문1)

1546(1522)

번역:  권진호

이  서신은  참으로  신약성서의  주요한  부분이며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신을  한  마디  한  마디  외워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매일  양식처럼  매일  그것을  다

루어야  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  서신을  아무리  많이  읽거나  깊이  생각한다고  해도  지나치

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더  많이  다루면  다룰수록,  그것은  더  소중해지고  더  많은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모든  사람이  이  서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시는  한  이  서문을  통하여  이  서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서신은  그  자체가  거의  성경  전체를  비출  만큼  충분히  밝은  빛일지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그

럴듯한  주석들2)과  모든  종류의  쓸데없는  이야기로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먼저  우리는  이  서신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바울이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  등의  단어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읽어도  아무  가

치가  없다.

당신은  여기서  “율법”이라는  짧은  단어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마치  행해야  하거나  행하지  말아

야  할  행위에  관한  가르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법을  다루는  방식

일  뿐이다.  여기서는  진정한  마음이  없을지라도  인간은  행위로  율법의  요구를  수행한다.  그러

1)  루터가  신약성서의  두  번째  부분(1546년  신약성서  개별  판에서는  “바울의  서신들:  성  요한의  계시록

까지라고  되어  있다)을  위해  처음부터  개별적인  서문을  제공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1522년  9월  성서의  출판  바로  전까지  이  가장  중요한  로마서  서문의  작성을  연기하였다.  그는  로마
서  서문을  복음서에  대한  포괄적인  서문의  반복과  연속으로  보았다(앞에  있는  신약성서  서문을  참조
하라).  루터가  바울  신학과  자신의  복음적  가르침의  기본  개념들을  설명한  이  유명한  서문  배후에는 
물론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철저한  연구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1515-16년  로마서  강의(픽커
(Johannes  Ficker)에  의해  라틴어로  출판된  “Vorlesung  über  den  Römerbrief”  [Leipzig  1923,  2
판]와  엘바인(Eduard  Ellwein)에  의해  독일어로  출판된  MA

3,  Er  2[München,  1957])와  최근  완성된 

멜란히톤의  “신학강요”(Loci  communes),  그리고  루터가  자극했고  또한  서문을  써준  로마서에  대한 
멜란히톤의  주해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웨슬리의  진술에  따르면  1738년  5월  24일  회심의  시간에 
그의  마음이  “매우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했던  서문으로,  웨슬리는  이때  이  서문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다.  WA  DB  7,  xxxi-xxxiv.  이  번역은  WA  DB  7,  3-27에  나오는,  1546년  성경전서에  나오는  판
에  기초하고  있다. 

2)  종교개혁  이전시기부터의  상당히  많은  수의  주석을  포함하여  로마서  주석들에  대한  알파벳  순서의  목

록을  위해서는  William  P.  Dickinson  (trans.),  H.  A.  W.  Meyer’s  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York:  Fund  and  Wagnalls,  1884),  pp. 
xv-x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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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님은  마음의  깊은  곳을  따라  판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역시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요구를  하신다.  그것은  행위로  만족되어질  수  없고,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으

로부터  행해지지  않은  행위를  위선과  거짓으로  벌한다.  그래서  시편  116편(11절)3)은  모든  사

람을  거짓말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거나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  선한  것은  싫어하고  나쁜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  선에  대해  즐겨하는  기쁨이  없다면,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율법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분명  죄가  있고,  외향적으로  많은  선한  행위들

과  존경할만한  삶이  있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하여  바울은  2장(13절)에서  율법의  행위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하면서  유대인

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이를  통하여  누구나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율법의  행

위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간

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나,  네  자신은  간음하는도다”(2:22),  “심판자인  네가  바로  똑같은  일을 

행하므로  너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자신을  정죄하는도다”(2:1).  이것은  마치  다음

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너는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겉으로는  훌륭한  생활을  하며,  그렇

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한다.  너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  7:3).

당신이  처벌이  두려워  혹은  보상을  위하여  외적인  행위로  율법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율법에  대한  기쁨과  사랑  없이,  억지와  강요아래  마지못해  행해지는  것이다.  만일  율법

이  거기에  없다면,  당신은  다르게  행하고자  했을  것이다.  결론은  당신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

터  율법을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마음으로  도둑이라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외적으로  즐거이  도둑이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둑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당

신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외적인  행위가  그러한  위선  가운데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을지라도  그렇다.  그렇게  당신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나,  당신  자신을  가르치지는  않는

다.  또한  당신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  당신은  아직도  율법을  정확

히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바울이  5장(20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은  죄를  증가시키는데,  왜냐

하면  율법이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것을  더  많이  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율법을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7장(14절)에서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

가?  만일  율법이  육체를  위해  있다면,  그것은  행위로  만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행해지지  않

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

해서만  주어진다.  이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율법과  닮게  형성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마음속에 

3)  불가타  성경에는  시편  115:11.  KJV  성경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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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한  열망을  얻게  되고  이후로  율법을  두려움과  강제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율법이  그러한  영적인  마음에  의해  사랑받고  성취되는  한,  그것은  영

적이며  또한  그러한  영을  필요로  한다.  그  영이  마음에  없는  곳에는  죄가  남아  있고,  또한  율

법  자체는  선하고  바르고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율법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있게  된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실이라는  언급에  익

숙해야  한다.  율법의  행위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

거나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행위  가운데에는,  그리고  그런  행위들과 

더불어  여전히  마음속에는  율법에  대한  혐오와  율법에  대한  강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헛되며  아무  가치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3장(20절)에서  의미한  것인데,  여기서 

그는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따라서 

논쟁가들과  궤변가들이  사람들에게  행위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칠  때,  당

신은  그들이  기만을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  사람이  그  마음속에서  혐오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만  선행을  행한다면,  어떻게  행위로  선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행위가  마지못해하고 

반항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면,  행위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는가?

그러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기쁨과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요,  율법의  강제  없이  자발적으로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기쁨과  사랑은  바울이  5장(5절)에서  말

하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마음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이  서론에서  말하는  것처

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면  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믿음은  바울이  3장(25절),  4장(25절),  10장(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

의  아들이자  인간이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하나

4)  스콜라  신학의  은총  개념의  지배적인  두  요소는  주입과  공로이다.  토마스(1225-1274)는  은총을  하나

님의  사랑이나  호의,  혹은  용서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는,  사람  안에  주어진  어떤  초자연
적인  것”  -  즉  주입된  상태,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초자연적이고  윤리적인  본성으
로  생각하였다.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는  계속하여  은총을  위하여  준비하거나  마음을  갖도록  움
직인다.  토마스는  항상  은총을,  그리고  그와  함께  인간  안에  있는  선한  모든  것을  제일  동인으로서 
하나님의  작용으로  소급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인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실
체적  선물로서의  은총  개념은  –  인격적인  요소가  전체적으로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  인간의 
개인적인  작인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계속적으로  전면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주입하시는  은총의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공로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공로는  자유  의지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스콜라신학자들은  가치  있는  공로(meritum  de  condigno,  순수하게  은총의  산물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만한  행위)와  적합한  공로(meritum  de  congruo,  자유의지의  행위로부터  나온  결과이며  특별한 
탁월함에  걸맞는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만한  행위)  두  종류를  구별한다.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
님은  처음에  “거저  주어지는  은총”을  주신다.  그  결과로  생기는  인간  의지의  움직임은  협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음  선물,  즉  “수용가능하게  하는  은혜”를  받을만하게  된다(적합성으로).  다시,  결과로  오
는  인간  의지의  움직임은  협력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을만하게  된다(가치에  의해). 

      물론  은총이  없으면  공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칭의를  얻기  위해  사람은  적합성에  의하여  마음

을  가지거나  준비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가브리엘  비일(Gabriel  Biel,  약  1452-1492)은  “사랑  없이  도
덕적으로  수행된  선행은  적합성에  의하여  ...  칭의의  은혜를  얻는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공로의  사상
은  보다  중요한  은총에  대한  호소  가운데  공로에  행해진  경건한  해석에  의해  수용할만하게  될  수  있
었다.  반면  주입된  은총  개념에는  공로의  체제를  통하여  달리는  가질  수  없는  요소가  도입되었는데,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요소이다.  Cf.  Seeberg,  History  of  Doctrines,  II,  11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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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말씀  혹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고  율법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

여  믿음이  성령을  임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처럼  마음을  기쁘

고  자유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선행은  믿음  자체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바울이  3장(31절)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는  율법의  행위를  거절한  후에,  이러한  믿음으로  율법을  던져  버린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는  “아니오,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라고  말한다.  즉  믿음으로  율법

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죄는  육체의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들을  하도록  이

끄는  모든  활동들,  즉  모든  힘을  가진  내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짧은  단어  “행하

다”5)라는  말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육

체와  영혼으로  죄  속에  완전히  뛰어들지  않는다면,  죄의  외적인  행위조차  행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성서는  특별히  마음을  살피며  모든  죄의  뿌리와  근원을  골라내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

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며  성령과  선한  외

적인  행위에  대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창세기  3장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것처럼  불신앙만이  죄를  지으며  정욕과  악한  외적인  행위를  낳는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6장(8-9절)에서  “성령께서  세상으로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유일한  죄라고  하셨다.  이

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거나  악한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  선하거나  악한  열매

로서  믿음  혹은  불신앙이  있어야  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이자  수액이요  주요한  힘이

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에서  그것은  독사의  머리요  옛  용의  머리라  불리었는데,  이것은  창세

기  3장(15절)에서  아담에게  약속된  것처럼  여인의  씨인  그리스도가  발로  밟아야  하는  것이다.

은총(은혜)과  은사(선물)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은총은  실제로  하나님의  호의나  선한 

의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분  스스로  우리를  향해  가지시고  있는  것인데,  이것으로  그는  우

리에게  그리스도와  성령을  선물과  함께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신다.  이것은  5장(15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은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

다.  은사들과  성령이  우리  안에서  날마다  더해지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5절  이하)와  갈라디아서  5장(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령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

과  죄들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고,  창세기  3장(15절)에서  예언된  것처럼  여인의  씨와 

독사의  씨  사이에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많은  것을  행하기에  우리

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는  은사처럼  나누이거나  분

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재자요  중보자인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은사가  우리  안에

5)  Thun,  즉  ‘죄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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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작되어  우리에게  완전히  호의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러한  의미로  7장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아직도  자신을  죄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는  8장(1절)에서  단지  아직  충만하게  되지  않은  은사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  육은  아직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는  아직  죄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성령의  역사의  시작을  갖고  있기  때

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은혜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세거나  죄  때문에  우리

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는  죄가  근절될  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따라  우리를  다루신다.

믿음은  어떤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관념이나  꿈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향상이

나  선한  생활이  뒤  따라오지  않음을  볼  때,  그들은  –  비록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많은  것을 

듣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  위하

여  행위를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일

을  시작하고  “믿는다”라고  말하는  관념을  자신의  힘으로  마음속에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들은  이것을  참된  믿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깊은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

의  허구와  관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도  나오지  못하며  어떤  향상도  뒤따르지  않

는다.

그러나  믿음은  요한복음  1장(12-1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드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

고  우리를  마음(heart)과  정신(mind)과  생각(sense)과  능력에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

든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을  동반한다.  오,  이  믿음이야말로  살아있고  바쁘게  일을  하고  활동

적이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행을  끊임없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선

행이  행해져야  하는지  묻지  않고  질문이  있기  전에  이미  선행들을  행하고  계속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가  불신앙인이다.  그는  믿음과  선행을  더듬거

려  찾고자  하나,  믿음이  무엇인지,  선행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과  선행에 

관하여  많은  말로써  반복하여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살아있고  용감한  신뢰인데,  신앙인이  자신의  생명을  천  번이나 

거기에  걸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러한  신뢰와  지식은  하나님

과  모든  피조물들을  대할  때  사람을  기쁘고  담대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 

안에서  수행하시는  행위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으로부터  강요  없이  누구에게나  선한  일을  행하고  봉사하고  모든  것을  겪고자  하는  각오

를  할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행한다.  그리하여  열과  빛을  불로부터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행위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잘못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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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믿음과  선행들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어

리석은  자들인  쓸모없는  수다쟁이들을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믿음을  만들어내시

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거나  무엇을  행할  수  있든  분

명  영원히  믿음  없이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의란  바로  그러한  믿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를  주시고  그것을  우리의  중재자  그리스도를  위해  의로  간주하시고  사

람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를  성취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하여  사람은  죄

로부터  자유하게  되고6)  하나님의  계명을  좋아하게  되며,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 

드려야  할  명예를  돌리고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한다.  또한  그는  가능한  수단들을  가지고  동

료를  기꺼이  섬기고,  해야  할  일을  모든  사람에게  행한다.  본성,  자유의지,  그리고  우리의  능

력은  이러한  의를  생기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믿음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는  것

처럼,  자신의  불신앙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가장  작은  죄  단 

하나라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  없이  혹은  불신앙  가운데  행해진  것은  모두  오류

이다.  로마서  14장(23절)이  말하는  것처럼  행해진  것이  아무리  좋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

은  위선이요  죄이다.

당신은  육(flesh)과  영(spirit)을  이해하되,  마치  육은  부정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만,  영은  마음

의  내적인  것과  관계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요한복음  3장(6절)에서  그리스

도가  말씀한  것처럼,  바울은  육으로부터  난  모든  것을  육-즉  몸과  영혼과  정신과  감각을  가진 

전인-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육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

신은  고상하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고  가르치고  말하더라도  은혜  없이  행

하는  자는  ‘육적’이라고  부르도록  배워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19-21절)에  있는  “육의  일”이

라는  말로부터  당신은  바울이  이단과  미움을  “육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리고  로마서  8장(3절)에서  그는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

은  부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모든  악  중에서  가장  영적인  불신

앙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을  때(요  13:1-14),  그리고  베드로가  배를  타고  고기

를  잡았을  때처럼,  당신은  가장  외적인  종류의  행위를  하는  자를  ‘영적’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서  ‘육’은  육의  이익과  이  현세적인  삶을  위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살고  일하는  자이다. 

‘영’은  성령과  미래의  삶을  위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살고  일하는  자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알지  못하고는  당신은  이  바울의  서신이나  다른  성경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

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어를  다른  의미로  가르치는  모든  선생들이  누구이든  간에,  그가  비

6)  Wird  on  sünde  (죄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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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록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그리고  이들과  같은  다른  사람

이나  그들보다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조심하라!  이젠  서신을  다루어보자.

복음의  설교자에게  있어  바른  일은  첫째로  율법과  죄를  드러냄으로,  성령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닌  모든  것을  죄로서  징계하고  지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겸손해  져  도움을  청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바울이  행

한  것이다.  그는  1장에서  자명한  엄청난  죄들과  불신앙을  견책하기  시작한다.  이것들은  하나

님의  은혜  없이  사는  이교도들의  죄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불경건한  삶과  불의함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계시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그들이  알고  날마다  인식할지라도,  본성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악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  본성은  눈이  어두

워지고  점차로  더  악해져  마침내  우상숭배에  따라  모든  악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죄를  뻔

뻔스럽게  행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견책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범하도록  한

다.

2장에서  그는  외적으로  의로워  보이는  자들과  은밀히  죄를  짓는  자들에게까지  견책을  확대시

킨다.  유대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갈망이나  사랑  없이  점잖은  삶을  살지만  마음

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며  다른  사람을  성급하게  심판하는  모든  위선자들이  포함된다. 

마태복음  23장(25-28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위선자들의  본성이란  스스로  순전하다고  생각

하지만  탐욕,  미움,  교만,  모든  부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선함을  무시하고  완

고함속에서  스스로  진로를  쌓는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의  참된  해석자로서  바울은  누구나  죄 

없다  하지  않고,  본성으로  혹은  자신의  의지7)로  잘  살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

를  선포한다.  그는  그들을  명백한  죄인들로  만든다.  그는  그들이  완고하고  뉘우칠  줄  모른다

고  말한다.

3장에서  그는  그들  모두를  함께  한  무더기로  보며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동일하다고  말한

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믿지는  않지만,  이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진실이  완

전히  소멸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수적으로  시편  51편(4절),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는  구절을  인용한다.  후에  그는  다시  이  문제로  돌아와  성서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율법의  행위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되지  못하며  율법은  오직  죄를  깨닫도

록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바른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공

7)  Aus  natur  oder  frieiem  willen  (본성이나  자유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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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로  없이  그리스도,  즉  보혈로써  우리를  의롭게  할  만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은혜의 

보좌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의가 

우리를  돕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를  용서하신다.  이  하나님의  의

는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부여하신  것이요,  복음을  통해서  그  때에  계시되었고  율법과  선지

자에  의해  미리  증언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믿음을  통해  세워지지만,  율법의  행위들은  이

에  대한  자랑함과  더불어  거부되어진다. 

죄가  드러나고  의에  이르는  믿음의  길이  가르쳐진  첫  세  장  이후에  바울은  4장에서  몇  몇  항

의와  반대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행위  없이  믿음이  의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들을 

때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다룬다.  그들은  “그렇다면  우리는  선행을  행하지 

말아야  하나요?”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아브라함의  예를  택하여  “그때에  아브라함

은  선행으로  무엇을  성취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  없이  오직  믿

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바로  창세기  15장(6절)에서  아브라함은  할례의  행위  이

전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선포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순종의  선행이라 

할지라도  할례  행위가  의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선행도  의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이미  믿음  안에  있는  자신의  의를  보여주

는  외적인  표시인  것처럼,  모든  선행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외적인  표시에  불과하다.  좋은 

열매처럼  선행은  이미  사람이  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성서의  이러한  강력한  예증을  통해  바울은  3장에서의  믿음에  관한  교리를  확증한다.  그는  또

한  다른  증인으로  다윗을  인용하는데,  다윗은  시편  32편(1-2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분명 

행위  없이  머물지  않을지라도,  그는  행위  없이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후에  바울은  율법

의  다른  모든  행위들에  거슬러  이  예를  더  넓게  적용한다.  그는  유대인이  단지  혈통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는  되지  못한다고  결론지었

다.  그들이  참된  상속자가  되고자  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물려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율

법  앞에서  -  모세의  율법과  할례의  법  앞에서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모든  믿

는  자들의  아버지로  불리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율법은  은혜보다는  오히려  진노를  가져다주는

데,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  율법에  대한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오게  되는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분노이다.  그러므로  믿음만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  역시  믿도록  우리를  위해

(롬  15:4)  쓰여진  것이다. 

5장에서  그는  평화,  기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신뢰와  확

신과  담대함과  용기와  소망과  같은  믿음의  열매와  믿음의  행위들을  다룬다.  이  모든  것은  믿

음이  참되다면  뒤따라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풍성한 

선하심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적이었을  때  그에게  요구할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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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어떤  행위  없이  의롭게  한다

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행위들

이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행위로  의롭고자  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창안해  내지만,  그  안에는  평안,  기쁨,  신뢰,  사랑, 

소망,  담대함,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  행위와  믿음의  어떤  유형도  없다.

그  다음  바울은  주제에서  벗어나  죄와  의,  죽음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하고  아담과  그

리스도를  비교한다.  첫째  아담이  옛  육적인  출생을  통하여  죄를  우리에게  전해준  것처럼,  그

리스도가  믿음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출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전하여  주는  둘째 

아담으로서  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육신

의  출생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죄로부터  의로  끌어올릴  수  없다

고  선언하고  입증한다.  이것은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의를  위하여  도와야  하는  하나님의  율법

이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를  늘리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  왜냐하면  율법

이  금하면  금할수록,  우리의  악한  본성은  더  율법을  미워하게  되며,  더욱더  자신의  정욕을  만

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더욱  필요하게  하며,  우리의  본성을  돕

는  은혜를  더  많이  요구한다.

6장에서  그는  믿음의  특별한  일,  즉  우리가  의롭게  된  이후에  남아  있는  죄와  정욕의  완전한 

근절을  위해  영과  육의  갈등을  다룬다.  그는  마치  우리  안에  어떤  죄도  더  이상  없는  것처럼 

게으르고  해이하고  부주의하기  위해  우리가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가

르친다.  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정죄로  간주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죄

와  싸우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제어하고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육신으로 

하여금  정욕이  아니라  영에  순종하도록  하되,  우리의  전  생애  동안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닮게  되고,  죄의  죽음과  은혜의  새로운  삶을  나타내는  세례를 

완성하여,  결국  우리는  완전히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우리의  육신  조차  다시  그리스도와  함

께  일어나  영원히  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고8)  율법  아래

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스스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율법이  없

다”는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

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  없이  율법의  행위에  종사할  때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때  죄는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분명  지배하는데,  본성상  어느  누구도  율법을  좋아하지  않

기  때문이다.  그것은  커다란  죄이다.  그러나  은혜는  율법을  우리에게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와  하나가 

된다.

8)  1546년  이전  판에는  “under”(아래에)가  아니라  “in”(안에)로  되어  있다.  WA  DB  7,  19,  n.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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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참된  자유이다.  바울은  이것에  관하여  6장  마지막까지  쓰고  있는

바,  기쁨으로  선을  행하고  율법의  강요  없이  바르게  사는  것만이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영적인  자유인바,  이것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  즉  율

법에  대한  기쁨과  사랑을  제공한다.  율법에  대한  기쁨과  사랑으로  율법은  잠잠해지며  더  이상 

사람을  몰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이  봉건영주에게  빚을  지고  그것을  값을  수  없는 

상황과  같은데,  빚으로부터  당신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그가  당신으로

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고자  하여  채무문서를  찢던지,  어떤  선한  사람이  당신을  위해  그것을 

값아  주고자  하여  채무문서에  걸맞는  재산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

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은  이  후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어떤  것도  행할 

필요가  없는  방탕한  육적인  자유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많은  행위를  하는  자유이며,  율법의 

요구와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7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혼생활에  대한  유추로  뒷받침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아내 

역시  혼자가  되며,  그때  한쪽은  다른  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아내가  다른  남편을  얻을 

수  없거나  취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는  이제  처음으로  실제로  자유로이  다른 

사람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처럼  우리의  양심은  죄의  옛  사람  아래에서는  율법에  매여  있다.  그러나  옛  사람

이  성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양심은  자유하게  되며,  한  편은  다른  편으로부터  해방된다.  양

심이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처음으로  실제로  자유로이  그리스도, 

즉  둘째  남편을  굳게  붙잡게  되고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율법에  의하여  죄가  어떻게  활동하고  강력하게  되는지,  죄와  율법의  본질

을  보다  충분하게  묘사한다.  옛  사람은  더욱더  율법을  미워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율법

이  요구하는  것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옛  사람의  본성이요  옛  사람은  스스로  죄 

이외에는  다른  것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에게는  죽음이요  고통이다.  율법이  나

빠서가  아니라,  옛  사람의  악한  본성은  선한  것을  참을  수  없고,  율법은  그로부터  선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이  달리고  뛰도록,  그리고  건강한  사람의  일을  하도록  요구를 

받을  때  그  요구를  견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이  정확히  이해되고  철저히  파악되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

리의  죄를  기억나게  하고  죄를  통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영원한  진노를  면할  수  없게  만

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이러한  모든  것이  율법과  실제로  마주치

게  된다면,  이것을  우리의  양심은  충분히  배우고9)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의롭게  되

고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과는  다른  어떤  것,  율법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9)  “Leret”(가르치다)는  다음에  나오는  말  “erferet”(경험하다)와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1530년  이전  판에는  이  단어가  “lernt”(배우다)로  나타난다.  WA  DB  7,  21,  n.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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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눈먼  것이다.  그들은  추측가운데  전진하여, 

율법이  얼마나  많은  것,  즉  자유하고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을  요구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

의  행위의  수단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를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  휘장이  그들과  모세사이에  쳐져  있고  그를  덮고  있는  것이다(출  34:29-35;  고후 

3:  12-16).

그  다음에  바울은  영과  육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예로  사용하여,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

도록  하였다.  그는  영과  육  모두를  “율법”이라고  부른다.  마치  하나님의  율법의  본성이  사람

을  몰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육은  사람을  몰고  요구를  한다.  그것은  영에  거슬러  날뛰

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이에  응하여  영은  사람을  몰고  육에  반대하여  요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이러한  긴장은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안에  지속된다.  영이나  육이  더 

강하게  됨에  따라  한  사람  안에서는  더  강하게  다른  이에게서는  더  약하게  이루어진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전인(全人)  자체는  전체적으로  육과  영이며,  완전히  영적으로  될  때까지  자신과 

싸운다. 

8장에서  그는  이러한  전투자들을  위로하는데,  이  육이  그들을  정죄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말

한다.  그는  더욱더  육과  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령이  그리스도로부터  어떻게  오시는지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의  성령을  주셨는데,  성령이  우리를  영적으로  만들고  육을  억

제하며,  우리가  영을  따르고  죄를  죽이기  위해  저항하는  한  죄가  우리  안에서  아무리  거칠게 

날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킨다.  그러나  십자가와  고난만큼 

육을  죽이는데  좋은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그는  사랑의  성령과  모든  피조물의  도움을  통

해,  즉  성령은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고  피조물은  우리가  육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우리

와  더불어  갈망함으로,  고난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신다.  우리는  6-8장이  옛  아담을  죽이고  육

을  제어하는  믿음의  과제를  납득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10,11장에서  바울은  누가  믿고  누가  믿지  않을지,  누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  근

원적으로  유래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가르친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우리의 

손아귀에서  취해져  오직  하나님의  손아귀에  놓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완전히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불확실하여,  만일  구원이  우리에게  의존되

어  있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분명  우리  모두를  압도할  것

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뢰할만하며  그의  예정은  실패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직면해서  여전히  소망을  갖는다.

여기서  이제  우리는  우선  이런  문제에  자신의  이성을  적용시키는  사악하고  거만한  자들을  일

단  중지시켜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의  끝없는  심연을  찾고,  자신들이  예정되었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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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여  헛되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절망을  통해서  혹은  위험을  무릅씀으로10)  파멸에 

뛰어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서신의  순서를  뒤따르는  것이  좋다.  당신이  당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우선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하여  염려하라!  그리고  나서  로마서  1-8장이  가

르친  것처럼  당신의  죄와  싸우라!  그리고  당신이  8장에  도달하여  십자가와  고난  아래  있다면, 

이것은  당신에게  9,  10,  11장에  있는  예정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로를  주는  것인

지에  관하여  정확하게  가르쳐  줄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의  곤경을  당하지  않

고는  어느  누구도  아무  손상  없이,  하나님에  대한  은밀한  노여움  없이  예정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아담은  이러한  것을  참아내고  강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  전에  먼저  죽어야  한

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젖먹이인  동안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도록  주의하라!  모든  가르침

에는  한계와  때와  나이가  있다.

12장에서  바울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제사장으로  만든다.  그

들은  율법  안에서  것처럼  돈이나  가축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죽임과  더불어  자신의 

몸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영적인  정부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행동을  기

술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다스리고  섬기고  주고  참고  사랑하고  살아야  하

고  친구와  적과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한다.  이것들이  그리스도인

이  행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것처럼,  믿음은  쉬지  않기  때문이다.

13장에서  바울은  세상  정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가르친다.  비록  세상  정부가  사람들을  하나

님  앞에서  의롭게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적어도  다음의  것만은  수행하도록  제정된  것

이다.  즉,  선한  사람들이  외적인  평화와  보호를  가질  수  있고,  악한  사람이  두려움  없이  또는 

평안하고  태연하게  자유로이  악을  행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스스로는  세상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존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의  발자취를  따라  행해야  한다.

14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약한  양심이  신중하게  인도되고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해를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자를  후원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결과는  불화와  복음에  대한  경멸이다.  그

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강하게  성장할  때까지  그들에게 

좀  양보하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을  실패로  끝나게  하는  것보다  낫다.  이  일은  사랑의  독특한 

행위로서  오늘날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것이나  다른  자유들을  가

지고,  진리를  알기  이전에  약한  양심을  무례하고  거칠게  -  불필요하게  -  흔들어  놓기  때문이

10)  Sich  in  die  freie  Schantz  schla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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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예로  삼는다.  우리도  공공연한  죄나  좋지  못한  습관으로  그  밖의 

것에서  실패하는  다른  약한  자들을  참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  더  나아질  때까지  참아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그렇게  우리에게  행하셨고  여전히  날

마다  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많은  잘못과  나쁜  습관,  그리고  우리의  모든  불완

전함을  참으시고  항상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칭찬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임무와  설교에  대하여  말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부를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요구한다.  그가  말하거나  다루는  모든  것은  순전한  사랑이다.

마지막  장은  인사이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가르침과  더불어  생겨나고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

들의  교훈들11)에  대한  훌륭한  경고를  인사와  섞었다.  로마로부터,  그리고  로마인들을  통하여 

유혹하고  모욕적인  법규와  교령들,  그리고  머뭇거리게  하는  인간의  모든  법과  계율들이  나오

리라는  것을  그는  분명  예견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고  성령

과  믿음  자체와  더불어  이  서신과  성서  전체를  지워버렸다.  그래서  탐욕(Belly)12)이라는  우상

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데,  바울은  여기서  탐욕의  종들을  꾸짖고  있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아멘.

이  서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것,  즉  율법,  복음,  죄,  처벌,  은혜,  믿음,  의,  그

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그리고  십자가가  무엇인지  매우  충분하게  발견한다.  또한 

의로운  자나  죄인이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친구이거나  원수이거나  모든  사람에  대해  -  그리

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발견한다.  더구나  이것은 

성서에  의해서  매우  훌륭하게  뒷받침되고  바울  자신과  예언자들의  모범에  의해  증명되어서, 

더  이상  어떤  것을  바랄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하나의  서신에서  전체  기

독교적,  복음적  가르침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구약  전체에  대한  서론을  준비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이  서신을  마음속에  잘  간직한  자는  구약의  빛과  능력을  가

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로마서에  정통하고  끊임없이  로마서로  연습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빈다.  아멘.13)   

 

(2017.9.13.  1차  수정)

11)  이  책에  있는  “사람들의  교훈을  막는  것”(Avoiding  the  Doctrines  of  Men,  1522)이라는  루터의  작

품  참조. 

12)  빌  3:19;  롬  16:18  참조.
13)  1539년  이전  판에  이  마지막  두  문단의  순서는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마지막에  있는  것

은  바로  앞에  있는  부분  이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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