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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1.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들
신학은 인간의 여러 학문 중 매우 특수한 학문으로 하나님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과 신학이라는 말은 다의적이며 그것은 최선의 욕망, 신뢰의 대상, 충성이나 의무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진리의 본질이나 어떤 최상의 원리의 힘을 말하기도 하며, 신이나 신성에 관한 명제를 거부할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적용할 위엄과 기능을 다른 대상-자연, 창의력, 무의식적이고 충동적인 삶의 욕망, 이성, 발전과 진보,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 구원의 무 등도 신이 될 수 있으며 이 경우의 신학은 불경건한 것이다. 이 불경건한 신학들은 각자의 신학을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으며 레씽은 3형제의 반지 이야기(임종하는 부친에게서 3형제가 모두 금반지를 물려받았지만 그 중 하나만이 진짜 금반지인데도 세 사람 모두 자기 것이 금반지라고 우긴다는 내용으로 유대교,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주장들을 비유한 희곡)를 통해 타 신학과의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를 권하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와 종교 개혁 이후의 여러 교파들 안에 모두 들어있다. 여기서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은 여러 신학의 보편적, 에큐메니컬한 연속성과 통일성을 의미하며 복음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에 의하여 제시된 방법으로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신학은 이 복음의 하나님이 인간의 학문의 대상이 되고 학문의 근원과 규범이 될 때 이루어진다.
복음주의는 복음 그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복음주의적(evangelical)이란 말은 복음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복음적이란 말은 한 가지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이단적인 것에 반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적인 것, 현대적 혹은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교파나 신학 노선에 국한되지 않고 초교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고백 즉,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문서에 숨은 기원을 가지고 신약 성경의 복음서 기자들,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문서에서 계시된 신학과, 16세기 종교 개혁 때 재발견되고 채택된 신학을 담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네 가지 학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며 이 복음의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 권위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제어될 수 없으며 복음주의적 신학보다 훨씬 우월하시고 항상 새롭게 계시되어야 하며 발견되어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정당화 하에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기대할 수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복음주의 신학이 되기 때문에 겸손하고 분별력있는 학문이어야 한다.
둘째, 복음주의 신학은 세 가지 전제하에 진행된다. 즉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신학의 한계로는 풀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상황을 통해 신앙을 갖게 하시고 이 모든 계시가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 인식, 고백하게 하시며,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신앙의 이성( 인지, 판단과 언표 능력)을 통해 복음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위한 신학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이나 주제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며 인간 실존, 신앙, 인간의 영적 능력 등이 대상이 될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 실존의 증명과 주권의 증명을 전제로 하여 인간 실존, 신앙 및 인간의 영적인 힘이 복음의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한다.
세째로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행동사를 통해 우리는 그 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행동사 안에서 하나님의 실존과 본질이 증명된다. 복음의 하나님은 역사적 연관 속에서 관찰되고 확정되어야 할 분이시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복음주의 신학을 통해 하나님의 정체를 알리는 그의 역사를 반복할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으며 미리 앞당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행동사의 과정을 인지하고 숙고하며 언표할 때에 복음주의 신학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하나님은 역동적인 역사의 연관성내에서 인식되어져야 하며 마비되고 고정된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 자신의 현존과 행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구별해야 하며 동시에 통일성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
넷째로 복음의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을 폐쇄하고 있는 고독한 하나님이거나 전적인 타자가 아니다. 무엇과도 비교, 제한 조건 지워질 수 없는 분이며 인격적으로나 물적으로 전적인 타자로 묶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시다. 복음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통일성 속에 계시며 인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계시며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인간보다 고상하며 먼 거리에 계시고 낯설은 하나님은 인간성이 없는 신성으로 이런 하나님은 비복음의 하나님이지만 복음주의 신학의 하나님은 고귀하고 고상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리에 오실 만큼 낮고 천하신 분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의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위해 행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은 돕고, 치유하고, 바로 잡으며 평화와 기쁨을 일으키는 일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이 은혜의 yes에 대한 응답의 노고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응답의 노고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관련이 있다. 복음주의 신학의 정체성과 관심은 신-인학(theanth- ropologie)라는 용어에서 잘 설명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을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있다.
복음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참된 계시이며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신다고 믿으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구속적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을 믿으며 죄와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다같이 실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찾아 오셨다는 것 등을 주장한다.
현대 복음주의는 먼저 16세기 독일의 종교 개혁에서 비롯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복음에 대한 루터의 신앙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 때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으로 이 신칭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며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직,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신자들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복음주의의 두 번째 역사적 뿌리는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청교도 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현대 복음주의자들로 이어지고 있다.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교회 갱신 운동이었으며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신약 성서적 교회의 회복을 모토로 삼았다. 그들은 중생의 체험을 중시했으며 형식적 신앙을 반대하고 체험적 신앙을 주장했다.
복음주의의 세 번째 원천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정통주의 루터교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라며 그 반동으로 대두한 것이 경건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의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 즉 의인, 중생, 성화의 과정을 체험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들의 주 관심은 개인적 신앙, 자신들의 영혼 구원에 있었다.
현대 복음주의는 부흥 운동에서도 그 맥락을 찾을 수 있다. 부흥 운동은 18, 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신앙운동으로 종교 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회심 체험, 경건하고 성결한 삶, 교회 갱신, 노예제도 폐지와 인권 향상 등 사회개혁, 봉사와 선교 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 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 운동의 산물이며 이 운동들이 복음주의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Ⅰ.신학의 자리
2. 말씀
우리는 여기서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신학의 특별한 자리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신학의 “자리"란 자기내부로부터 제시된 출발점을 말하며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유하는 출발점이다. 신학은 이 출발점으로부터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및 실천신한으로 나가야 한다.
신학(Theologie)이란 단어는 “로고스”라는 말을 내포한다. 신학이란 무엇보다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고 확정된 “말들"(Logia)이요, ”논리”(Logik)요, “논리체계”(Logistik)이다. “로고스”는 일단 “말씀”(Wort)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는 요소들 가운데에 첫 번째 것이기는 하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신학 그 자체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나 신학을 신학되게 하는 것은 이 신학이 듣고 응답하는 말씀이지 이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말이 아니다. 신학은 자신의 말들에 선행하는 말씀과 더불어 죽고 산다. 신학이란 이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고 일깨워지며, 도전받는다. 신학이 저 말씀에 응답하는 행동 이상이려고 하든가 그 이하이려고 하든가 그 이외의 무엇이 되려고 한다면, 그의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공허할 것이요 무의미할 것이요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미 논한 대로 신학이란 저 말씀에 대한 수용이요 응답인 까닭에 이 신학은 겸손하며 자유로운 학문이다. 첫째로 신학은 겸손하다. 왜나 하면 신학의 모든 논리는 저 말씀에 대한 인간적인 유비(ana-logie, 類比)에 불과하며 신학의 모든 빛이란 인간적인 반사(Widerspiegeln=Spekulieren)요, 신학의 모든 소산은 인간적인 재생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학 하는 것은 그 어떤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와 그것의 창조에 대해서 가능한 한 성실하게 응답하는 찬송이다. 신학은 자유하다. 왜냐하면 이 신학은 그 말씀에 의하여 그와 같은 유비, 반성적 숙고 및 재생산, 짧게 말하면, 그것의 창조자에 대한 그와 같은 찬송에로 도전받으며, 자유케 되고, 그와 같은 찬송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그렇게 하며 그렇게 하도록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적인 사고와 언어가 저 말씀에 의하여 인도되며 이 말씀을 향하여 방향지워 지고, 이 말씀을 척도삼아 자신을 측정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 이상이 중요하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신학과 저 말씀의 증인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적합한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저 말씀 자체와의 관계에서는 너무 약하다. 여기에서 자율적인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저 말씀에 인위적으로 반응하는 것(말씀을 알맞게 해석하는 경우에도)이 아니며, 자동적으로 자명하게 저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규칙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요, 이 규칙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저 말씀에 대한 대답으로서 무엇보다 말씀의 창조행동에 의하여 촉발되며, 실존하고, 현실적이 된다. 이 말씀의 선행이 없이는 본래의 신학, 곧 복음주의 신학이 있을 수 없다. 물론 신학이 저 말씀을 비로소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저 말씀의 증인들의 말들을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킨다. 말씀자체에 대하여는 결코 해석조차 하는 것이 아니다. 저 말씀은 모든 해석에 선행하여 말씀되어졌고 수용되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선포되었다. 신학이란 위의 사실을 전제하며 위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모든 것을 자체 내에 포함하여 시발하는 근본적인 신학적 행동 그것이다. “모든 올바른 신 인식은 순종에서 일어난다”(Omnis recta cognitio Dei ab oboedientia nascitur: Calvin).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학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신학의 초석을 놓으며, 신학을 구축하는 바 이 말씀은 무에서 유를,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신학에 의해서 비로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자리는 정확히 이 말씀 밑에 있으며 이 말씀에 대면하여 있다. 신학의 자리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여기에 위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돌입해 오셔서(수용하든지 말든지 간에)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며, 말씀하실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말씀은 인간에게 행하여졌고, 인간을 위하여 행하여졌으며, 인간과 더불어 행하였다.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이란 침묵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말씀하시는 행동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가 행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행동을 통하여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행동이-시발점으로부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다양하기는 하지만-복잡하게 얽힌 것이 아니라 단순하듯이 그의 말씀 역시 놀랄만큼 퐁요롭게 표현되었으나 단순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불투명한 것이 아니라 명백하여 지혜있는 자나 바보에게 모두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그는 행동하심으로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은 발표된다. 말씀은 실제로는 무시될 수 있으나 원칙상으로는 무시될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의 하나님에 관하여, 이 하나님의 행동과 사역에 대하여 말한다.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사역은 그의 언어로 나타난다. 그의 말씀이란 신학적인 “말들”, “논리”, “논리체계”의 창조적 기초요 생명인 로고스(Logos)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좋으신 행동이기 때문에 좋으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 좋으신 행동은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Speech=Sprache)이 되었고 인간에게 걸려온 말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과의 계약행동을 노출시킨다. 이 계약행동은 그 체결의 역사, 지탱의 역사, 수행과 완성의 역사를 가진다. 이 계약행동과 계약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버지, 형제, 친구로서 그의 거룩성과 자비를 계시하며, 인간의 소유주와 심판주로서 그의 능력과 위엄을 계시하시고, 자기 자신을 계약의 최초의 파트너와 인간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이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피조물이요, 하나님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채무자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상실된 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탱 받은 자요, 구원받은 자요, 하나님을 위해서 자유케 된 자요, 하나님에 의하여 봉사와 의무에 말려든 자로 계시하신다. 이 계시에 의한 즉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그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 동시에 계약의 다른 파트너이다. 이 이간은 하나님의 인간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이 이중적인 계시가 중대관심사이다.
계약(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시요 인간은 하나님의 인간이신 바), 이 계약사, 이 하나님의 일이 다름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言表이다. 이 언표는 모든 다른 말들과 다르다. 이 로고스가 신학의 창조자이다. 신학의 위치와 과제는 이 로고스에 의하여 지시받으며 지정받는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진술하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려는 것이다.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혹은 뒤집어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말씀하고 계시며, 말씀하실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내용의 선포로서 이 특수성의 제약을 갖는 보편성이다. 이 복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체결되었고 지탱되었으며 수행되었고 완성된 은총의 계약, 평화의 계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우정에 넘치는 교제에 대한 하나님의 좋으신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와 같은 계약과 교제에 대한 어떤 개념의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계약사를 통해 나타난 로고스이시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로고스이시다. 이 하나님은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말씀, 이 계약사의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새롭게 언어화시켜야 한다. 이 계약사가 무엇을 선포하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이 신학은 한 종족공동체를 전 인류를 위한 본보기로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다. 이 하나님은 이 공동체의 하나님으로서 이들에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며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취급하시고 이들에게 말을 거신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인 바 그 뜻은 “나는 장차 내가 될 나요”(I am who will be.), “나는 장차 지금의 나인 나일 것이요”(I will be who I am.), 혹은 “나는 장차 내가 될 나일 것이다”(I will be who I will be)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깊숙이 뿌리내렸으나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초월하여 미래를 지향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요, 인간과의 교제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자유로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진실하신 하나님과 이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고양된 진실된 인간의 통일성의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 이때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유롭게 감사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하는 말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로 이 한분이 기대되었고 약속되었는데, 아직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계약의 장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인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그것의 완성이 이 성육신의 말씀에서 기대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무엇보도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일어났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계약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그 목표에 도달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심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완전히 말씀되었고 무엇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총 결론의 말씀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들의 중보자로 파송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이신 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행동하심으로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형태가 됨으로 한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인류 형제, 자매들에게 회개와 신앙을 촉구하며 위로를 던져 주는 말 걸음이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민족에게 주신 좋으신 말씀인 바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들의 한 복판에서, 그리고 이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좋으신 행동에 대한 말씀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한 내용과 완벽한 형태로 듣고, 이해하며,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점에서는 특수하지만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는 보편적이다.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구주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全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하고 응답해야 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와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가지고 말씀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지고 말씀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과 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약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구약에 있는 것만도 아니요 신약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약의 행동역사는 이 둘의 연계성과 통일성 속에서 완전하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신학이 경청해야 하고 이에 반응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로고스는 두 역사의 연계성과 통일성 속에 있다. 신학이 이 명령을 수행할 때 그것은 자기의 초소를 받아 지키는 것이다. 바울의 놀라운 표현을 사용하면 신학이란 위의 사명수행 뿐만 아니라 그의 특수위임에 있어서 “논리적인 예배”(logike latreia=logischer Gottesdienst)이다.
3. 증인들
복음주의 신학의 자리를 자세히 규정하려면 우리는 한 특수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들의 위치가 탁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요 그것을 위하여 부름 받고 무장된 특수한 봉사 때문인 말씀의 증인들인 하나님의 말씀의 자체에 의하여 직접 부름 받아 수용했고 다른 사람에게 확증하였기 때문에 근원적 증인들이다. 우리는 이 성경에 나타난 증인들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 대해서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로써 그의 말씀을 인간에게 하실 때 동시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신들 시대에 일어난 하나님의 행동을 본 자들이요 자기들 시대에 말씀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요 이처럼 보고 듣는 일은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야훼의 아버지로서의, 왕으로, 율법을 주신 분, 그리고 심판하시는 분으로서의 행동들을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부르신 야훼는 그의 자유롭고 건설적인 그러나 역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사랑을 나타내셨고 이 백성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심에 있어서 인자하심과 아울러 그의 엄격하시고 진노하시는 모습을 계시하셨으며 교정을 모르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피곤할 줄 모르는 은혜를 베푸셨다.
저들은 좁은 의미의 예언자로서든지, 예언적인 화자이든 율법사이든 예언적인 시인이든 지혜의 교사이든 간에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사시킬 수 있으며 이들은 종종 자기들 선배들의 이야기를 청종해야 했고 그들의 말씀에 대한 응답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아야 했고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과 관계하시는 야훼의 역사 속에서 말씀된 야훼의 말씀을 그들의 백성에게 살아있는 음성으로 들려주었고 후세대의 회상을 위해서 기록하였으며 기록케 하였다. 이 때에 각자는 가기 시대 자기들의 문제 자기들의 교양과 언어의 지평에서 그렇게 한 것을 이 종류의 문서들을 훗날에 수집 편집한 것이 구약경전이란 것이다. 이 문서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빙할 만하고 권위 있는 증언으로 통용되고 인정받았던 것으로 “신약성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성경은 신약에서 분명해진다.”
신학은 그 관심의 초점을 이스라엘 역사의 목적, 이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목적, 신약성경의 사도들을 통하여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맞추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에게 순종을 다한 인간적인 파트너의 실존과 하나님의 나타나심에서 이룩된 계약의 완성이다. 이 계약을 성취하신 주님은 종으로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대신하여 사셨고 고난 받으셨으며 죽으셨고, 이들의 죄악을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덮어주셨고 이들의 죄책을 스스로 걸머지시사 저들에게서 벗겨주셨으며 이들을 계약의 파트너이신 하나님과 연합시키셨고 화해시키셨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를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언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파송 받은 사실에 상응하여 이 세상의 한복판으로 파송 받았다.
사도들의 파송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키신 능력의 말씀을 주제로 하며 사도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들, 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업에 대한 판단들 및 능력의 말씀이 중심 주제였고 예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화해케 하시는 행동이요 이것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는 점 이외에 예수님의 역사란 오직 구속사며 계시사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인자로 설교했으니 이는 예수 자신의 선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이들이 알고 믿은 바는 구체적 예수 그리스도였으니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이 믿지 않았을 때에도 이들을 만나셨고 이들이 믿을 수 있게 된 후에도 이들을 만나주신 분이었다.
신약성경 경전이란 문서로 확정되어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증언들을 수집한 것이며 이 증언들은 제 1세기 원시교회들이 그 당시 모든 다른 문서들과는 달리 신빙할 만한 문서로 증명했으니 그 내용인즉 예수님의 부활을 본 바요 들은 바요 말한 바로 이 원시교회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하고 권위 있는 증거로 인정하였다.
다음에 우리는 복음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성경적 근거와 무슨 관계를 갖는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들인 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하던 일과 공통점을 갖으며 신구약성경의 증인들은 인간으로서 시공의 제약을 받은 통찰과 사고방식과 인간의 언어로써 저 말씀을 수용하였고 증언하였다.
(2) 그러나 신학은 예언자나 사도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신학은 최초의 증인들의 말을 통하여 저 말씀에 대해서 묻는다. 신학은 말씀의 증인들과 더불어 그때 그곳에 있지는 않았었다.
(3) 신학의 자리는 성경적 증인들의 자리보다 높지 않다. 가장 형편없고 희귀하며 단순하고 알려지지 않은 성경적 증인이라도 가장 경건하고 학구적이며 예리한 현대 신학자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며 성경적 증인들은 그들의 특수한 시각에서 특수한 양식으로 계시적인 말씀에 대하여 생각했고 말했으며 기록하였고 이 말씀과 직접적인 충돌을 통하여 행동했다.
(4) 신학의 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의 자리 밑에 있다. 신학이 취급하는 성경은 인간의 문서로서 인간적으로 조건지워진 글이지만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 때문에 거룩하고 탁월한 책이요 특별한 존경과 주의를 받을 만하며 성경의 증인들이 저 중심적인 것에 대하여 신학보다 더 조예가 깊기 때문이다.
(5) 신학자들에게 단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복음의 하나님과 친숙케 되는 일이다. 이 복음의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바 자체 내에 하나님의 인간과의 친숙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으로 항시 다시 돌아감으로 이 대상을 만난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 한다.”
(6) 그러나 신학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다양한 증거를 만난다. 성경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러 가지이므로 구약과 신약의 소리 안에서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분별해야 한다. 신학은 동일자에 초점을 두고 숙고하며 유랑하는 즉 구약에서 신약으로 다시 신약에서 구약으로 야훼 문서에서 제사장 문서로 다윗의 시편에서 솔로몬의 잠언으로 요한복음에서 공관복음들로 갈라디아서에서 지푸라기 문서인 야고보서로 계속 방랑해야 하며 이 성경 안에서 하나의 전승에서 다른 전승으로 전승사를 추적하되 확실한 추적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추측에 불과할 경우도 있으며 복음주의 신학이란 한없이 “풍요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인 바 이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이긴 하지만 그의 넘쳐흐르는 풍요한 계획들, 길들, 판단들 속에 있다.
(7) 신학은 성경의 증언 안에서 하나님의 로고스를 항상 새롭게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시도함으로 하나님의 로고스에 응답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적 표현을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석의적 신학적 과제라는 것을 알지만 성경의 중심 내용인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각 책의 어느 장이나 어느 구절에 있어서도 단순히 자명한 것으로 전제될 수 없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언어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과 분석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까운 본문들의 관련과 보다 먼 본문들과의 관련도 주의 깊게 연구,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성경의 내용을 각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부차적인 일이어야 하며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인 바 해석되고 인식되고 탐구되어야 하며 신학자는 이 성경적 증인들과 이 성경을 탐구의 대상으로 계속 만나야 한다.
4. 개교회로서의 공동체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인들을 대면함에 있어서 그것의 장은 텅빈 공간이 아니라 또한 너무 막연하고 부담을 주는 “교회”라는 말을 피하고 “개교회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을 가지고나가야 신학적으로 타당하다.
종종 사람들이 “교회”라고 부를 때에도 그것은 기독교를 뜻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집되었고 기초 지워졌으며 질서 잡혀진 단체를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식과 신뢰에 의한 신앙과 순종적 수용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 서열의 증인들의 합창을 따라 이 말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개교회로서 공동체란 신앙에로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 받고 각성된 사람들의 백성이다. 신학은 이 공동체 안에서 특수한 자리와 기능을 가진다.
교회 공동체는 “성도들의 교제”이요, “믿는 자들의 회중”이요, “증인들의 연합체”이다. 왜냐하면 이는 믿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으로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단순히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실존한다는 사실로도 말하며 세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이 독특한 태도로서도 말하지만 특히 세상에서 소외되고 연약하며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말없는 봉사로서도 말한다.
끝으로 이 공동체는 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해야 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렇게 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요,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처음부터 구두로도 말했고, 이 구두로써 이 공동체가 수용한 말씀에 상응하는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말로뿐만 아니라 글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설교, 기독교교육, 목회상담은 모두 구두로 되어지는바 이것에 의하여 삶이 형성되고 표현되도록 명령받는다. 신학의 특별한 봉사, 기능은 이 교회 안에서 시발한다.
교회 공동체의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이 공동체와 이 공동체의 신앙을 기초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제기된다. 어떤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참인가 하는 식의 물음은 교회 공동체의 진리물음이 될 수 없다. 신학이 제기하는 물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즉, 교회공동체는 이 전 사건들 속에서 말씀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이해하고, 숙고하며 표현할 때에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철저하게 숙고하며, 얼마나 명쾌한 개념으로 표현하는가? 과연 이 공동체는 둘째 서열의 증거를 얼마나 양심적으로 책임있게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열띤 물음이 될 수 있는 이 진리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대답은 결코 이 공동체에 의하여 주어질 수 없다. 가장 생동적인 신아의 가장 유능한 표현이라도 하나의 인간적인 행위이다. 즉,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경적 증언들을 해석하며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고하며 잘못 말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세상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를 줄 수도 있다. 교회 공동체는 이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일 기도해야 할 것이요, 자신의 임무를 진지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작업이 바로 신학적인 작업이다.
진리에 대한 물음으로 항상 새롭게 불타오르지 않는 기독교적 증거는 어떤 증거는 어떤 경우에도 어느 때 그 누구의 입에서도 신빙성 있고 생동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질적이고 책임적인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은 특별히 관심 있는 사람이나 재주 있는 사람의 취미 정도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데 참여한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아무에게나 맡겨져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깨어있으면서 자신의 위탁사항과 과제를 의식하는 교회공동체만이 필연적으로 신학적인 관심을 가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특별한 사명을 지닌 신학자의 관심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신학은 이미 과거가 주어진 전통의 지반 위에서 탐구하고 가르쳐야 하며 이 전통으로부터 제기되는 과제를 풀어나간다. 결코 전통과 관계없이 탐구하고 가르쳐서는 안된다. 교회사는 오늘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학의 특수과제는 이 전통을 비판하는 것이다. 신학은 전통에 의하여 규정된 교회공동체의 선포를 진리물음의 불에 노출시켜야 한다. 신학은 이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성경의 증거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것의 근거, 대상 및 내용을 검토해야 하고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맹목적인 수긍과는 구별되는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의 성격을 갖도록 해야 한다. 확실히 신학은 과거의 교회 공동체가 상당히 올바른 길을 걸어왓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신학은 오늘의 교회공동체를 결정하는 전통을 전적으로 불신하기 보다, 원칙적으로 신뢰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은 교회공동체를 규정하는 전승에 대해서 교회공동체가 무엇을 물어봐야하고 무엇을 제안해야 하는가를, 교회공동체에게 강제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려깊은 제안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교회의 권위나 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발하는 그 어떠한 놀라운 소리도, 신학의 이 정직한 비판적 과제수행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교회공동체의 전통적인 말에 접근하는 숙고와, 때에 따라서 개선을 위한 제안을 개방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신학은 오늘의 교회공동체 및 이 공동체의 신앙선조들과 더불어 “나는 믿는다”고 말한다. 신학은 “알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말한다. 이 뿐만 아니라 신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공동체를 위하여 일해야 하는 자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이것은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신학은 제 1세기의 교회공동체에게 순수한 예언자적 증언이요 사도적 증언으로 알려진 문서들이 결국 제1세기의 교회공동체에 의하여 선택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이 문서들을 확고히 포착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그 당시 신아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인식하였고 고백한 것이다. 이 전통적인 경전이야말로 신학이 무엇보다 단순하게 받아들여 감행하는 작업가설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교회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활동을 하기 때문이요,저 신앙의 행동과 저들을 함께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교회공동체의 사고와 말은 오랜 역사와 여러 가지로 뒤얽히고 혼동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소리와 이것에 의하여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주목은 항상 열려있었던 것도 아니요 항상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교회 공동체는 전혀 다른 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하는 유혹을 항상 물리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물리칠 수 없었다. 교회공동체의 교리들, 신조들, 신앙고백들은 이러한 유혹을 막고 그것의 근원에로 돌아가고자 하는 문서들이었다.
신학은 교회의 전통이 물려 준 그 어떤 교리와 신앙고백도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규준하여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신학이 진리물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 그 어떤 신조족 명제들을 전통에 충실한다는 이유와 널리 알려진 것이라는 이 주의보다 더 나쁜 이단은 없다. 신학이 알고 있으며 행사하는 신실성이란 오직 하나이다. 이 하나의 신실성은 “신앙의 지성”에 근거하여 고대 및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에로 나간다!
신학이 살아있는 역동적 학문일진대, 교회공동체는 행이든 불행이든 자 어제의 신학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기 때문에 이 지난 날의 신학과 접촉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공동체는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를 계속해야 한다. 즉, 선배들의 신학에 각별히 유의하여 귀기울여야 하며, 가장 좋은 부분들을 해석해 내야 하고, 이들의 문제들을 그냥 버리지 말고 계속 추구해야 하며, 이들의 물음제기를 항상 다시 숙고해야 하고, 유념하여 돌이켜 보아야 하며 새롭게 수용해야 한다.
5.성령(spirit)
신학이란 하나님의 행동 안에서 말씀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학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성경의 학교에 배우는 학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부름 받은 교회공동체에게 부과된 진리 물음을 계속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직 신학은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노력이다 이 신학은 말씀이외에 아무 전제도 갖지 않는다. 신학의 근거와 정당성과 목적은 이 말씀이다.
신학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이 신학적인 명제들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힘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자신의 명제들을 근거시키며, 자격을 부여하고, 목적 지향적이 되도록 할 때 아무 것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전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다를 것이 분명하다. 신학이 만약에 자신의 명제들과 자신을 추구하는 어떤 힘 을 전제한다면(수학에서 수학공식을 위하여 공리가 전제되듯이) 이는 신학이 저 힘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이 힘을 제공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학이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신학과 이 신학의 명제들을 떠받칠 수 없는 힘이다.
우리는 주변세계와 공동체 그리고 이 공동체를 섬기는 신학 속에도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힘에 대하여 사려 깊게 말하자. 이 힘은 우리가 마음대로 포착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힘은 신학의 명제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 속에 있으며, 구속사와 계시의 역사 속에 있으며, 성경적 증인들의 들음(Horen)과 말함(Reden)에는 물론 이 증인들의 의하여 생겨난 교회 공동체의 존재와 행동 안에도 있다. 이 힘은 모든 인위적인 전제들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는 이 힘은 창조적 힘으로서 모든 다른 힘들에 근거하는 모든 안일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힘은 안전을 창조하는 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 힘은 영향력이 커서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없다(잠기게임에 있어서 가장 힘센 말이 마구 힘을 쓰듯이).결국 신학은 이 힘의 근원 효력과 영향력 및 그것의 한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신학자는 이 힘의 속삭임을 들어야 하며 자신의 명제들이 이 힘의 의하여 결정되고, 규제되며 통제받게 되어야 한다. 이 힘은 임마누엘의 역사 속에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와 이들 안에서, 교회공동체의 회집, 세워나감, 파송에 있어서도 주권적으로 역상했고 역사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한다.
이 주권적인 힘의 성경적인 이름은 루아흐(Ruach)요 프뉴마(Pneuma)이다. 이두 단어는 모두 움직여진 공기요 움직이는 공기, 입김, 바람, 및 폭풍을 뜻하는데, 라틴어의 Spiritus와 불어의 Esprit는 이 말의 본래의 뜻을 잘 알려 준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 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란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자유이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은 주 하나님 이신 바 이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서방교회가 채택한 니케아신조에 보면 이 영은 “성경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수여자” 이시며 이어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라고 되어 있다.
이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오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성령은 창조 두 번째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신학은 기독교, 각 기독교인 및 신학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이 성령의 생명력에 대하여 너무 친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성령의 바람이 자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분다는 사실과 이 성령의 현존과 행동이 항상 자신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것은 신학이나 공동체보다 우월하며 인간의 계산을 초월한다. -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그리고 신학은 성령을 움켜쥔 다음 소유물로 만드는 식으로 이 성령을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성령이 물, 불, 전기, 원자에너지 등과 같이 인간에 바보 같은 신학은 이 성령이 자신의 신학적인 명제들의 대전제로서 이것을 친숙히 알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란 전제로서의 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성령을 전제하는 신학은 비 영적인 신학일 뿐이다. 성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공동체와 신학에게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는 생명력이다. 이처럼 비 영적인 신학을 돕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성령은 신학으로 하여금 그때그때마다 신학이 만들어낸 전제들의 비참성에 대하여 의식케 하고 인식케 한다. 따라서 공동체와 신학이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창조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생명의 성령이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부유하다. 즉 신학은 다른 전제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히 가난하지만 부유하고 지탱 받으며 유지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령의 약속을 확고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꿰뚫고 탐구해 들어가되 하나님의 심오한 것 까지 알아내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Ⅱ. 신학적 실존
6. 놀라움(경이, Verwunderung, Wonder)
복음주의 신학이란 항상 한 인간의 실존과 행동 속에서 그리고 협의에서든 광의에서든 신학자의 실존과 행동 속에서 맥박치는 역사 그것이다. 신학이 한 인간을 만날 때, 이 인간을 직면하고 이 인간 안에 들어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지금 복음주의 신학의 “실존적인 것들”(existenzialien)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접근을 위하여 우리는 여러 동심원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장 밖에 있는 원을 우리는 “놀라움(Verwunderung)"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누구든지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놀라움의 경험이 솟아올라서 더 이상 상실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계속 강건해져야 한다.
하나의 대단히 특수한 놀라움이 모든 신학적인 인지, 탐구 및 사고의 시작에 있어서 경험된다. 모든 신학적인 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이 겸손하고 자유하며 비판적이고 기쁨에 찬 학문이 되어야 하고, 항상 새롭게 그렇게 되려고 할 때 반드시 놀라움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놀라움이란 일시적으로 비상하고 낯설고 새로운 현상에 관한 일시적인 당황과 질의 이상의 것이다. 이 일시적 현상은 학문의 전개과정에서 조만간 평범하고 낯익고 옛것이 되고 말며, 인간을 놀라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처음에는 놀랍지만, 곧 별로 놀랄 일도 아닌 다른 현상에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엄습하는 놀라움이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신학의 대상이란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구처럼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참 신학의 대상은 항상 신학자의 전 표상의 세계를 초월하면서 신학자를 만나신다. 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신의 대상에 대한 당황과 질의 즉, 놀라움은 항상 신학을 지배한다. 이 놀라움의 경험이 그에게 일어날 때 그는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회적으로 놀란 사람이 된다.
“놀라움(Verwunderung)”은 "기적"(Wunder)이란 말에서 왔다. 신학에 손을 댄 사람은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기적과 관계한다. 신학이란 필연적으로 기적의 논리이지만 이것만이 신학의 전부는 아니다. 신학은 신학이기에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학은 성경적 증거들의 경륜을 아무리 역사적으로 사고한다 해도 이 기적의 역사들의 기능을 거부할 수 없다. 신학은 이 기적사의 필수적 기능을 검토해야 한다. 이 기적의 역사는 형식적으로 말해서 일종의 알림의 표증들로서 원칙상 놀라운 역사들로 기능한다.
성경의 증거들에 의하면 기적에 관한 말들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인간을 위협하고 억압하고 있는 자연과 세상의 일상적인 과정의 과격한 변혁인 바, 이는 고립된 사건들이요 일시적인 사건들이지만 인간에게 큰 도움을 주며 인간을 구원하는 사건들이다. 이와 같은 기적들은 임마누엘 역사에 대한 성경적 증언들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요,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이 기적의 역사는 새로운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서 시작되었고, 진행하고 있으며 그것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새로운 것의 표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표증들이 인간에게 다른 더 좋은 자연과 세상을 내다보는데 관한 놀라움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성경적 증거가 말하는 정말 결정적인 새로운 것이란 새 인간이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이 새 인간인 예수님은 다른 동료 인간들 속에 계시면서도 저 행동들을 통하여 이들 모든 인간들의 주님이시요, 종이시요, 보증자로서 행동하셨고, 이들 가운데에서 자신을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선포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이 예수님께서 새로운 것인데 그는 이미 오신 빛이시오 장차 다시 오실 큰 소망의 빛으로서 저 작은 불빛들을 통하여 미리 비추어졌다. 이 새로운 것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성취요 완성인데, 이것은 구약에서 선지되었고, 신약의 예수님 안에서 완결되었다. 새 것이란 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개방된 길인바 이 길은 모든 인간이 성령의 생명력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아버지께 이르는 자녀의 길이다. 구주이신 예수께서 모든 기적들 중의 기적이시다. 이 분은 무한히 경이로운 분이시다. 인간이 이 경이로운 분을 알게 되고 인식할 경우에 이 분에 대한 놀라움은 인간을 필연적으로 가장 깊숙이 그리고 유일회적으로 놀란 인간이 되게 한다.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신학자가 되고 신학자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여성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은혜이다. 신학자가 신학자 될 수 있는 것은 과격하고 근본적인 놀라움에 의한 것이다. 신학자는 이 은혜를 수용한 사람으로서 이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학활동을 한다. 또한 이 은혜의 수용자는 다만 자신만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신을 즐기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7.관여
놀라움과 경탄은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신학이 진지한 학문이 되어야만 할진대 단순한 경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 불가피한 놀라움 즉 하나님의 기적이란 이것을 대면하는 주체로 하여금 결코 이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 하나님의 기적이 놀라움의 경험을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며, 이 대상에 관여하는 이 인간을 놀라움의 경험을 한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 인간은 그 대상에 관여되어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은 이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이 대상으로부터 동떨어져서 혼자서 자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 대상과의 대면에서 오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이 대상은 그를 찾아내며, 그가 있는 그곳에서 그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그를 습격한다. 그를 엄습하고 만나며 붙드신다. 그를 지배하신다. 즉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하시려고 이미 생각하셨고 이미 어떤 일을 이 인간과 더불어 시작하셨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아직 아무 것도 모를 때에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식되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과 자신을 인식하도록 일깨움과 도전을 받게 되고, 자신이 탐구되어짐을 발견함으로 탐구하도록 부름 받으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사고되어짐을 깨닫고 나 다음에 사고하도록 부름 받고, 이치에 닿는 말은커녕 중얼거리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말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즉, 인간은 이처럼 탐구하고 사고하며 말하는 자유를 하잘 것 없이 구사하기는커녕 이 자유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알기 전에 이처럼 탐구하고 사고하며 말하도록 자유케 되었다.
이 대상이 이 인간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대상에 의하여 매혹당하고 엄습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도 하잘 것 없는 신학자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무엇을 의미하나?
(1) 신학적인 실존이란 각 인간의 실존처럼 우주의 현세 속에 있는 실존이다. 이는 아직 종착역에 도달하지 않은 세속시간의 한 토막 속에 있다. 이 실존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인간의 개인역사와 사회역사의 능동적인 주체이기도 하며 수종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신학자라도 모든 다른 인간들 속에서 그리고 이 인간들과 더불어 그의 우주적인 상황과 우주적인 피 규정성을 통하여 특별히 주어진 가능성을 지닌 피조물로서, 그의 환경이 주는 특수한 곤경을 겪는 피조물로서, 그러나 동시에 그때그때마다 특수 과제들과 희망들에 참여한 피조물로서 실존한다. 신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낳은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으며, 힘이 더 있는 것도 아니요 힘이 더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신학자는 하나님의 행적을 통해서 선포되고 이해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이 신학자의 특징이다. 신학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 말씀이 자신의 세계에게, 자신의 시대의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인류에게, 그리고, 인류가 안고 있는 오늘의 문제들 때문에 움직여진 세계에게 향해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감출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인류가 갖는 온갖 곤경과 약속의 총화보다도 더 심오한 곤경과 더 고차적인 약속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선한 삶과 죄악된 삶 모두에 대한 판결이요, 심판이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었고 맺어졌으며 성취된 인간과의 은혜의 계약이요, 하나님이 인간과 이룩하신 화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인간의 불의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하고, 인간의 모든 전쟁들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불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평화에 대하며 말하며, 인간의 모든 무질서의 한계를 선언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하며 말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이 그러했듯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끝내는 지금 감추어진 것이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은혜의 시간일 것이고 은혜의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영원하며, 영원하기 때문에 시간적이고, 天的이며, 天的이기 때문에 지상적이고, 오고 있으며 오고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저주와 구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류의 비합리성과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에 선포된 자유롭고 우리의 공로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yes'이다. 모든 사람들이 간과해버릴 수 있을지라도 신학자는 그럴 수 없다.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전 앞에 구체적인 방법으로 응전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동시대인들의 짐을 나누어지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인 신학자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 문제시하고, 관계하며, 관여할 뿐이다. 신학자는 이처럼 말씀에 의하여 관계 맺어지고, 관여되어지며, 정말 마음에 의하여 꿰뚫린 실존이다.
(2) 신학적 실존이란 인간 일반의 실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실존이요, 신구약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함께 불러 모아졌으며 함께 유지되고 지탱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실존이다. 기독교의 문제성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신학자가 될 수 없다. 신학자는 항상 새롭게 무(無)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또한 이 무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에 참여 한다. 신학자는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이며, 물리적인 세상적 힘들로부터 때로는 필연적으로, 때로는 우연히, 그러나 오히려 의무적으로 고립하는데 참여한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고립을 깨드리려는 기독교의 행복한 혹은 덜 행복한 시도에도 참여하며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나쁜 평가에도 참여하고, 기독교의 파열과 통일성을 향한 동경에도 참여하고, 기독교의 순종과 나태 그리고, 한가로운 일들에도 참여한다. 신학자는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신학자라면 누구나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이다. 그의 상황이 어떻든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든 간에 진리 자체에 의하여 택함을 받았고, 이 진리의 계시에 의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한 회원으로서 이 진리 문제를 과제로 부여받았다. 신학자는 그가 알든 모르든 일단 진리에 대한 문제를 숙고해야 할 임무를 부과 받았다. 이 진리물음은 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처음 부과되었고 여러 가지의 역사적 형태로 이 백성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백성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신학자의 직접적인 관심사요 준엄히 신학자 자신의 일이다. 이 일에 있어서 신학자는 그 무엇도 과대평가할 수 없으며 과소평가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아무 것도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작고 큰일들에 있어서 대단히 엄격하게, 또한, 유쾌하게 이 백성과 더불어 함께 생각하며 경우에 다라 함께 말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신학자가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한 주권적 주님의 말씀이 이 신학자를 찾아와서 이 신학자에게 육박한 결과 이 신학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것에 의해서만 살 수 있고 살아가도록 허락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망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교회 공동체를 심판하는 바 이 심판이 신학자에게도 떨어진다. 공동체가 이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안에 속한 신학자에게도 해당된다.
(3) 신학적 실존이란 결국 작은 신학자 개인적인 실존이다. 신학자는 세상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혼자 실존하기도 한다. 신학의 대상인 말씀에 있어서 중대한 관심사는 이 세상이고, 이 세상 안에서 중대한 관심사는 교회공동체이다. 따라서 신학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중대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자 개인에게 떨어지는 심판이요, 이 신학자 개인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이요, 그의 속박과 해방, 그의 죽음과 삶이다. 신학자로서 그가 인식해야 하고, 탐구해야 하며, 숙고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그에게 부과된 진리물음에 있어서 결국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학자 자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신학자 자신이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회공동체요, 마지막이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적합하지 않다. 신학자가 신학자 되는 것은 세상과 교회공동체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자신의 기능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엄습당할 자요, 질문을 받은 자요, 경고 받은 자이다.
신학이 살아 있는 대상은 전인에 관여하시며 작은 신학자의 가장 사사로운 사생활까지도 관여하신다. 이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신학자는 그의 작은 사생활에 있어서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즉, 신학의 대상이 갖는 특성이란 모든 개개인간을 찾아오시는 바 이 인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리고, 어떤 분야에 있든지 찾아 오셔서 동일한 물음을 이 인간에게 제기하신다.
9. 신 앙
신앙은 그 어떤 체계화의 노력도 포기하고 신학의 대상이 어떤 무명의 인사(신학자)를 주장하고, 놀라게 하며, 관여시키고, 책임적으로 관여시키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며, 이 사람이 사실상 신학자로 살고, 탐구하며, 사고하고, 말하고, 신학자로 실존할 수 있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안에서 일어나되 전혀 전제 없이 일어나며, 서술은 가능하되 파악될 수는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이 다름 아닌 신앙이다.
신앙의 개념에 관하여 종교개혁,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 및 19세기 개신교에서 여러 가지로 논의되었으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 개념을 좀더 규명하려고 한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그냥 인간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면 별것 아닌 사건이요 여기에서 논의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만약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확실한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추측이요, 의견이요, 요청이요, 개연성의 계산이요, 따라서 이 신학의 대상을 이에 대한 추측, 요청, 개연성과 동등시하고 이런 의미로 긍정한다면 신앙의 사건이란 별 볼일 없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런 신앙은 신학자를 참된 신학자되게 하는 신앙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우리가 이미 언급한 의미에서의 인간을 놀라게 하고, 관여시키며, 책임 있게 관여시키는 신학의 대상을 생각해 낼 수 없고 추측할 수 없으며 요청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대상에 대한 신앙은 가설적이고 문제성 있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내용이 충일한 지식이요 엄격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것에 비교하면 인간적인 한계상황 이편에서 가능한 가장 확실한 지식일지라도 유용할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문제성 투성이의 가설에 불과할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만약에 누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에게 모범이 될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크고 작은 증인들에게서, 교회의 교리와 신앙고백에서, 그리고 심지어 성경에서 조차 들었거나 읽었던 신학의 대상에 관계되는 일정한 명제들과 교리들을 이들의 권위만을 믿고 진리로 인정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이 사람의 신앙 역시 보잘 것 없는 것일 것이다. 마치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인식한 것 같은 것을 자신이 인식하거나 한듯이. 이것은 바로 20세기 초 헤르만이 그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가차 없이 못 박은 사실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진리물음 앞에서부터의 불쌍한 회피이다. 확실히 이와 같은 맹목적인 결단과 결단의 실천은 “지성의 희생”이지,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며, 불신앙이지 신앙이 아니다. 단순히 권위에 의존하는 “합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인과 신학자가 그 속에서 깔려죽을 카드집을 세우는 것을 우리는 아무에게도 권할 수 없다.
어떤 이의 경우는 부적합할 정도가 아니라 너무 굉장하고 주제 넘는다. 이런 이는 어떤 부적합성이나 결핍은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신앙으로 성육신의 현재화와 실현 - 성례적인 확신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 그리고 예수의 신앙을 경험하였고 실천한 것으로 망상하며, 그의 생애 속에서 신성을 실천하며 가능할 경우(우리 속에 신성을 창조하는 자로서 신앙)이 신성을 창출해 내야하고 낼 수 있다고 망상한다. 이것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라 힌두교인에게 알맞을 수도 있을 오만하고 주제 넘는 신앙이다. 기독교적 신앙이란 믿고 있는 대상과 믿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만남이요 사귐에서 일어난다. 결코 믿을 자와 이 대상과의 동일화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개신교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신학의 대상을 축소시키면서 신앙을 존재적 중심개념으로 만들든가 진정한 구원사건으로 승격시킨다면 이것 또한 결코 좋은 경향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신앙론으로서의 신학이요, 기독교신앙에 대한 학문과 교리로서의 신학이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역사에 있어서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직 신앙의 증인들과 가능한 한 신앙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이들 19세기 개신교는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련되어야 할 내용들을 신앙의 사고와 신앙의 표현들로 수용하며 그렇게 환원시켜 풀이하고, 이것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말없이 잘라내든가 가치 없는 것이라 말하고 잘라내든가 하여 마치 교회의 사도신경이 말하는 “나는......믿는다”에서 내용을 무시하고 “Credo"만이 고백의 구성요인인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 대신에 이 고상한 말들을 통해서 표현된 교회의 신앙,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다(불행하게도 Credo Mass 라고 알려질 모차르트 미사가 있는데 이 내용을 보면 3회씩이나 Credo가 반복되는바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Credo를 생각나게 한다).
신앙이란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필수적 전제이긴 하지만 결코 신학의 대상이나 주제일 수는 어2t다. 어찌 이것이 가능했겠는가? 진정한 신학의 대상은 정말로 신앙의 요구한다. 그러나 이 대상은 이 대상을 신앙사상이나 신앙의 표현으로 용해시켜 버리려는 시도에는 거부한다.
신앙이란 신학의 절대필수의 전제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란 사건이요 역사인바 이것 없이는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가능성과 속성들을 소유했어도 그는 기독교인이나 신학자가 될 수도 없고 기독교인이나 신학자일 수도 없다. 우리는 사실상 신학적인 실존의 뿌리에 대해서 이미 지난 세 강의를 통하여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미 저 “놀라움”, “관여”, “책임적 관여”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논했다.
신앙이란 기독교적 실존과 신학적 실존을 구축하는 특수사건이다. 신앙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놀라움”, “관여”, “책임적 관여”는 신학자를 신학자 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동일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어떠한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사건과도 전혀 다르다. 신앙의 사건에 있어서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 이 성령의 능력은 말씀자체의 능력인데 - 그리고 말씀자신의 주권으로 많은 인간들 가운데 한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동기이다. 무엇인가 “움직여졌고”, 무엇인가 정말 “일어났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한사람이 이 말씀을 세상을 위한 말씀이요, 교회공동체를 위한 말씀이요, 자기 자신을 위한 말씀이요, 전적으로 위로의 말씀이요, 도움의 말씀이요, 구속력이 있으며 말할 것도 없이 타당성이 있는 말씀으로 긍정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이 사람은 항상 다시 이와 같은 자유자로 존재할 수 있다. 이 자유자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님자신의 자기언표를 기쁘게 신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고 이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했다. 이 세상에 이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통해서 정복당하였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도록 부활되었고, 창조되어진 자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행동은 비록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말씀에서 기원하였고, 이 말씀을 향하여 정위되어 있으나 인간자신의 행동이다. 이 인간이 비록 그 자신은 보잘 것 없으나 하나님에 의하여 이 말씀을 긍정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도록 부름받았고 자격부여를 받았다.
이처럼 긍정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은 이 신앙인이 하는 것이지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앙인의 열광적 행동을 배제한다. 아니다. 이 신앙인은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한다. 이 신앙인은 자신의 정상적인 이성(인간의 상상력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의지 및 정서까지도 사용해야 할 요구를 받고 있다. 그는 인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유한 인간이 되었다. 과거에는 전혀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행적에서 언표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남으로 이처럼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결코 단순히 이런 자유인이 아니다. 이 대상이 그를 항상 다시 만나며, 이 대상에 대한 긍정과 신뢰를 항상 다시 가능케 하고, 이 대상에 대하여 항상 다시 순종케 할때, 그리고 이 순종을 항상 요구하고 발견할 때, 이 인간은 새롭게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이 일이 일어날 때 그리고 이 사람이 이 일을 행할 때 그는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서 계시사건이요, 이 행동은 그 자체로서 조명 받은 행동이다. 따라서 신앙은 그 자체가 본래 -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지성”인데 - 이 대상에 대한 인식인 바 이대상은 신앙의 근원이다. 그런즉 신앙은 이 자기의 근원과 대상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다. 이런 뜻에서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다. 물론 단순한 지적 활동은 아니며 -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신학에 대한 특별한 시각인데 - 그러나 신앙은 개념들을 가지고 수행되며 말로서 언표되어야 할 지식이라는 점에서 지적인 것이다!
신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이 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겸손한 자세로 진리문제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항상 새로운 사건이 될 수 있다. 이 사건은 불가사의하고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제 6강의에서 신학적인 실존의 기적에 대해서 논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치유이다. 즉, 전에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였으나 이제는 듣고, 보고 말하는 치유로 우리는 이 사건을 묘사 할 수 있다. 신학의 대상은 이 신학자가 신학적으로 인지하고, 탐구하며, 사고하고, 말할 수 있도록 그를 주장하신다. 다음에 우리에게는 몇 가지 강조점을 지적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1) 우리는 보통 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리고 신학자이기 위하여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옳은 이유는 신앙에로 자유케된 사람이 아니고는 신학적으로 듣지 못하고, 신학적으로 보지 못하고, 신학적으로 말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적합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에로 자유케 됨으로 자유롭게 신앙하는 자로서 정말 신앙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신앙이란 사탄이 성전 꼭대기에서 주님께 제안한 것(눅4:9-12)과 같은 감행은 아니다. 신앙이란 하나의 확고하고 확실한 약속에 대한 냉정한 포착이요 담대한 포착이다. 두 번째로 이 포착은 신앙에로 자유케 하시는 성령의 현존과 행동을 보증으로 삼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한결같은 견해이다. 결국 이 신앙은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행동이다. 이 신앙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이요, 이 은총의 자명한 결과이다. 이는 싹에서 꽃으로 자라고 그리고 꽃이 태양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과 비교될 만하다.
(2) 신앙이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앙이란 매일 아침 새롭다! 따라서 신앙이란 어떤 상태나 어떤 속성도 아니다. 신앙은 명제적 전리조향들에 대한 “신념”이 아니다. 물론 신앙이 여러 가지 “통찰력”이라고 불리워 질 여러 가지 신념의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처녀탄생, 그의 지옥에 내려가심, 그의 몸의 부활, 빈 무덤에 대한 보고, 니케아의 삼위일체 교리, 칼세돈의 기독론 - 아마도 성령에 대한 고백 속에 교회를 집어넣는 것 앞에서도 - 등의 신념의 조항들 앞에서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비신화화 작업에로 날아가지 말고, 이와 같은 항목들이 무시되거나 잘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복음의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는 포착해야 한다. 위의 신념의 항목들이 복음의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만 이것들 없이는 복음의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누가 위에서 열거한 신념의 항목들을 무시한다면 이 사람은 전혀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믿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항목들에 대한 신념은 아직 신앙은 아니다. 신앙이란 “그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의 표현대로 “그 누구에게 대한 신앙”이다.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앙인 바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잠시도 위에서 나열한 항목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의 항목들 하나하나를 신념 하는 것이나 이 항목들 모두를 신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서술어들의 누어이신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일아침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인바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3) 신학자에게 꼭 필요한 신앙의 순수성과 견고성에 대한 표준은 이 신앙이 특별히 강하고, 깊고, 불같은 신앙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다. 이 신앙이 상당히 약하고 가냘프고 바람부는 인생행로와 인생의 여러 사건들 속에서 가물거리는 신앙일지라도 이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복음서에 의한즉 겨자씨만한 신앙이 산을 옮기기에 충분하다면, 이 신앙은 풍부한 신인식을 위해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신학을 가능케 하며 신학은 작동시킬 수 있기도 충분하다. 만약에 누가 그의 적은 신앙으로 - 대상이 없이는 이 신앙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하여 정위되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 그는 이 하나님을 신앙하도록 자유케 되었고, 자유하다.
(4) 정말 신앙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신앙인은 자신에게 계속 일어나는 불신앙을 바라보면서 위 사실을 알고 고백한다. 그는 이미 성령을 통하여 부름 받았고 조명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서 지극히 놀라와 한다.
그는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우소서”라고 하는 간청의 기도 없이는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이미 신앙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매일아침 새롭게 만나를 얻을 것을 소원하였듯이 그는 매일아침 새롭게 신앙을 작동시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앙, 신앙의 사건이 그 어떤 인간의 능력범위 안에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경박한 질문이다. 신앙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의 능력범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Ⅲ.신학을 위협하는 요소들
10. 고 독
지금부터 언급되어야 할 것은 신학과 신학자를 공격해오는 불확실성이다. 이 의심에 찬 불확실성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바 “놀라고”, “관여되고”, “신앙에로 책임적 관여를 한” 신학자에게도 찾아온다. 이 의심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요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리하게 파고들어 온다. 이와 같은 불협화음은 다소 시끄러우나 결국에는 주제에 순응하는 화음에는 흡수되고 말지만 이와 같은 일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여기에서 토론해야한다.
누구든지 신학에 투신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상하고 짓궂게 억압하는 고독 속으로 내 몰린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이제 이것이 우리의 화제이다.
신학자는 일반적으로 소위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Kirche) 안에서도 어떤 격리를 경험하면서 자기의 주제를 추구해야 한다.
이 점을 밝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대부분의 대학들에 있어서 신학자들의 존경받는 지위가 모든 단과대학들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고 작은 단과대학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특별히 열정적인 목사를 생각해 보자. 그는 그의 목사직에 따르는 후광 때문에 도시든 시골이든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된 낯선 사람이 되고 만다. 기껏해야 그는 특별히 관심을 가진 소그룹 안에 속할 뿐, 그의 성경메시지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신학적인 작업에 있어서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지역적으로나 친분 관계로 그와 가까이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고립은 신학의 본질과 상치되는 것이므로 감당하기 어렵다. 대중과 동떨어진 곳에 신학의 자리를 두는 일은 신학의 성격에 위배되는 것이다. 종교는 개인의 사사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이기 때문에, 신학의 대상이란 모든 인류의 상황에 대한 가장 과격한 변혁이요, 모든 인간에게 관계되는 바 이 변혁의 계시이다. 따라서 이 계시는 그 자체로서 틀림없이 최대한의 보편사이다. 사람의 귀속에 속삭여진 말이지만 지붕 꼭대기에서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틸리히(Tillich)의 시도는 그의 의도에 있어서 이해 될 만한 것이 아닌가? 즉, 신학을 철학으로 대표되는 타학문들을 질문과 대답이라고 하는 불가분리의 상관계로 신학에 통합시키려는 시도 말이다. 즉, 타율과 자율은 神律的 사고 속에 지향(aufheben)시켜 버리려는 시도이다.
신학의 고독을 없애버리려는 이 시도 혹은 이와 비슷한 시도는 실현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경우 신학은 타락 전으로 소급하여 파라다이스(낙원)의 신학으로 자신을 이해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시간을 앞질러서 완성된 신학으로 자신을 이해하든지, 창조자와 피조물의 차이를 무시하고 원형적 내지는 신적인 신학으로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이요, 그렇게 처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좀더 무죄하고 이미 완전해 진 신학이란 하나님의 신학으로서 내몰려진 학문이 아니라 그야말로 유일한 철학이요 유일한 학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으며 시도하려는 신학이란 파라다이스의 신학도(이미 우리는 낙원에 있지 않다), 완성된 식학도(우리는 아직 거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신적인 신학도(우리는 결코 그런 신학에 이를 수 없다) 아니며 인간에 의해서 수행되는 신학으로서 “순례자들의 파생적 신학”(theologia ektypa viatorum) 이다. 이들 순레자들의 특징은 아직 눈이 어두우나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식에로 조명받았고, 미래의 영광을 모두 투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참일 수 없을” 정도의 순수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적 신학과 신학적 철학의 이념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 이념은“神律的으로” 이론화하기 때문에 원칙상과 실제상으로 이원적인 것들을 개념상의 상호통합을 통하여 없애버린다. 이 경우 값싼 종합은 포기되어야 한다. 사고력과 의욕을 가지고 상당히 쉽게 실현되는 종합은 포기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태의 진상이다. 모든 학문이 하나님안에서 통일성을 내다 보지만, 그러나 신학자가 정말 사태의 진상에 일치하는 사고를 한다면, 그는 원형적 신학과 파생적 신학, 파라다이스의 신학과 순례자들의 신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신학자의 관심사와 문제는 후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신학적 인식, 신학적인 사고, 신학적인 는 결코 보편적인 인식, 사고, 언표가 아니요, 보편적인 것이 신학적인 것도 될 수 없다. 신학은 타학문들과의 관계에서 그것의 특수성과 고독 때문에 아무리 큰 고통을 느낀다 해도 감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동일한 상황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교회공동체(Gemeinde)-신학은 이 공동체 안에서 섬겨야 하지만-의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겠는가? 이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걷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려면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을 이 세상을 향하여 엄청나게 새로운 것으로 선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 공동체는 자신에게 건물로 주어진 새것에 대한 인식을 주변의 타학문들의 인식에 통합시키거나 주변의 타학문들의 인식을 자신의 것에다 통합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은 종말적 시대의 교회공동체로서 이 공동체가 선교적 임무수행에 있어서 느끼는 고독을 부끄러워 할 수 없다. 오히려 신학은 이 고독을 오직 교회공동체와 나눌 수 있다-이것이 한숨지으며 일어나든 눈물 속에서 보이는 웃음으로 일어나든지, 신학은 자신의 고독으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학과 교회공동체는 이 고독을 자기가 당하는 위협의 한 형태로 여기고 품위와 기백으로 참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신학과 신학자가 느끼는 해명할 길 없는 고독은 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 너무나도 빈번히 신학자는 자신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고독하다는 느낌에 대한 보이는 증거물들을 경험할 것이다. 이미 우리가 제2장에서 언급한 대로 신학자는 “놀라움”, “관여”, “책임적 관여”에 말려 들었다. 이것이 신학자를 신학자답게 만든다. 이 신학자는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그러하나 동료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고독해야 하고 이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신앙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신앙이란 저 흔들어 놓는 충격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이다. 이 경험은 모든 다른 인간의 경험과 다르다. 물론 기독교적 공동체(die Christliche Gemeinde)의 신앙이 인간을 신학자로 만드는 고유한 요인이다.
그런데 이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우의 사용인바, 이 자우는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의 동반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공동체란 “믿는 사람들의 회집”(Congregatio fidelium)으로서 다음과 같은 개개인들의 공동체이다. 즉, 이 개개인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홀로 신앙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여도 개인으로 믿어야 하고, 믿고 싶어 하며, 믿을 것이다.
이 길이 아니고는 신학자가 되는 길은 없다. 오직 이 길만이 그가 기독교적 공동체와 이 세상에서 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다. 만약에 그가 신앙으로 말미암는 사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독을 맛보며 시련을 겪을 때에 이것은 이기기 어려운 시련이다. 그의 신앙과 그의 교회공동체의 신앙에의 참여에 관한 그 누구도 그를 대신하여 나설 수 없으며 그는 자기 곁에 별로 도와주는 사람들을 갖고 있지 못하며 이 소수자들 가운데에 확신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그의 신앙을 계속해서 타당성있는 것이 되게 해야 한다는 숨은 사실은 그에게 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자기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 경우에 이 신앙과 그의 신학적인 실존과 신학이 아무리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확고하다고 해도 의혹 속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곤경 속에서 칼빈(Calvin)과 그 이전 어거스틴(Augustine) 및 다른 신학자들은 그토록 엄격한 예정교리를 확고히 붙들었다. 그러나 이 정보가 고독한 신학자에게 그 어떤 효과적인 위로도 줄 수 없다. 그래서 칼빈 같은 이도 사실상 우수한교회의 신학자로서 사고하며 말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의 고독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특수한 신학적 사고의 위탁을 받았는데, 이는 독특한 성격을 띤 “신앙의 지성”(intellectus fidei)으로서 항강 고독한 길을 걷는다. 신앙에로 자유케 된 사람들 중에서 “신앙의 지성”을 실현해야 할 경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직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을 채택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180도 전환(한번만이 아니라 매일같이)을 감행할 것이며, 인간에 의해서 동기 지워진 질문과 대답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동기 지워진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도 심한 요구요, 여기에서 약속된 정신의 자유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속박으로 끝날 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학이란 석의, 교회사, 교의학뿐만 아니라 윤리학도 포함한다.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 신앙의 순종이 가져오는 교회와 세상 인에서의 행동, 자우의 선물(Gabe)을 지닌 사람에게 부과된 실천적 과제(Aufgafe)에 대한 개념을 확정짓는 작업을 말한다. 신학이란 인류와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중심테마는 새로운 우주 속에서의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 책임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항상 혁명적인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의 사고와 언어에 있어서 실천적 영역의 현장에 직면하여 다른 사람들과 상충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에 종사라는 사람은 적어도 다른 기준을 가지고 척도하는 소수의 사람이라는 심한 혐의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맥 풀리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며 회의적이 되고 호전적이 되기까지 하며 약해져서 자신의 형제를 영원히 고발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지만.
복음적이고 신학적인 윤리란 자신의 거짓을 고발하지 않으려고 할진대, 확정적으로 가장 큰 쾌활성과 화평한 분위기 속에서 주장될 수 있다. 물론 신학적인 윤리의 소리가 몇 사람들의 귀에만 즐겁게 들리고 항상 처음 보는 사람에 의해서 사살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위험이 항상 별 것 아닌 것은 아니다. 신학이란 아마도 이 신학에서 간접적으로 결과하는 윤리적-실천적 충격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나 경건한 무리들에게도 통속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가 신학을 진지하게 한다면 이 점에서 고독을 참고 견뎌야 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11. 의 심
신학을 위협하는 두 번째 형태는 그것이 밖으로부터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때문에 첫 번째(고독)보다 더 위협적이다. 이것은 신학자체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의심”이라고 부른다.
이 의심은 바로 두 가지 형태로 신학을 위협하기 때문에 두가지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 번째 측면은 신학활동 전체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두 번째 측면은 신학활동 전반의 본성상 지닌 위협이 아니라 이미 강의한 바 신학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참고 견뎌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의심의 첫 번째 측면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고 취급 가능한 형태의 의심이지만 이것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의심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발생한다. 즉, 신학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의 시각에서 진리물음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성취된 신적인 언표들을 항상 새롭게 탐구해야 하며, 이 언표의 진리성과 현실성을 항상 새롭게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물음에 관련하여 일어나는바 신학자는 이 진리물음을 완전히 해결보지 못한 채 항상 제기해야 한다.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신학과 17세기 개신교 신학은 진리에 대한 과격하고도 피곤할 줄 모르는 질문을 일삼았다. 이 질문은 정교하게 논리화된 것으로서 신의 존재와 같은 가장 원시적인 것이 첫째로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대답을 조목조목 정교한 논리로 응답하였다. 고전적인 요리문답의 형식을 보면 질문과 대답으로 엮어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들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예를 보면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가 “조심성 없고 망령된 사람들”을 만들어 냈는가를 묻고 있다. 이는 철저한 의심이다. 이 점에서 의심이란 신학에 있어서 아무 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학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이런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는 우리에게 부과된 “순례자들의 파생적 신화”는 전혀 다르다. 이 신학은 신학적인 작업을 해야 하고 개방적으로 물어야 하며 따라서 소크라테스적인 의심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 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으리라. 라는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에게 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학생에게도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항상 다시 이 소크라테스적 회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누구나 신학의 길에서 항상 제기되는 진리물음에 땀을 흘려 대답하는 것도 아니다. 게으른 자는 진리에로 전진하기 위한 의심의 필연성에 대하여 잠언 22:13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밖에 사자가 왔다. 나가면 길거리에서 찢겨 죽는다!”고 핑계한다. 이런 사람은 신학적인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포기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꼭 필요하고 합당한 의심을 해야 한다고 하는 노고는 정말 신학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의심의 두 번째 측면은 좀 다르다. 우리는 이것에 관하여 보다 자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여기에서 불안이 야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전(全) 신학활동을 감행할 수 있으면서 수행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불안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숙고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은 결코 누구나 그냥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즉, 진리물음이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의하여 제기되며, 과제로 등장하고 나아가서 적어도 힘써서 응답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신학적 노고가 대상을 전제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 존재에 대한 의심은 섬뜩하게도 항상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있다. 즉, 이 의심이 얼마나 단순한가를 꿰뚫어 보았고, 안셀름에게서 이 의심의 문제를 명실상부하게 배운 사람에게 이 의심이 접근하여 왔다. 이와 같은 18세기 초의 지식인들 사이에 있던 유행병으로서 진젠도르프 백작 역시 어려서부터 이런 의심을 배양하는데 익숙하였다. 만약에 신학자가 이 의심에 대처해야 하며 이 의심을 시편 55편이 말하는 바보의 행동으로 꿰뚫어 보아야 하고 경멸해야 할 시점에서 흔들리고 항복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신학의 대상, 임마누엘의 역사, 이 역사의 계시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대한 바보의 의심은 옳은가? 역사적, 심리학적, 사변적 종류의 변증, 모든 경건한 정서의 움직임들 및 이에 상응하는 자기확신들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은 이 계시 속에서 실존하시며, 사역하시고, 말씀하시는가? 누구나 이와 같은 의심을 풀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의 내적 증거가 아니고는 어떻게 우리가 저 계시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실존, 사역 및 말씀을 확실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결코 개인적으로 받은 적이 없다고 메마른 주장을 하는 18세가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의심이란 부인, 거절, 부정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의심이란 “예”, “아니오”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부정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형태의 의심은 이미 신학의 문제 대한 불확신인 바 이 의심은 신학활동의 출발에서 신학적인 물음 그 자체의 필연성과 의미에 관하여 당황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당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로고스의 탐구로써 신학을 기초하며, 신학적인 작업에로의 자유를 의심한다! 나는 이것을 위하여 자유한가? 혹은 아닌가? 머뭇거리고 흔들리며 불확실해 하고 당황하며, 이 시발점에서부터 “글쎄? 아마, 아마도 아닐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신학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형태의 의심은 현 세상적 시간의 영역 안에 있는 인간적인 수행으로서의 신학을 위협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고는 첫 번째 형태의 의심처럼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과의 관계에서 본성상 변증법적인 사고가 아니다. 즉,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물음을 제기하고 대답하는 그런 사고가 아니라 본성에 반대되는 사고요, 인간이 그의 근원과 목적으로부터의 소외 때문에 병든 사고요, 부패와 오류에 항상 노출된 사고이다.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하여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확신 없고 당황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바 상극적 반대감정이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는 기도로서만 우리는 이 상극적 반대감정을 넘어설 수 있다. 신학 그 자체를 위협하는 의심이 어떤 이유에서 생기며, 어떤 종류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기본적인 결함을 보여준다. 즉 교회공동체요, 이 공동체의 지체로서 기독교인들이요, 신학자들이기도 한 우리는 우리에게 이룩된 하나님을 위한 자유의 메시지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저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자유를 활용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인식하며, 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또다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며, 알지 못한다. 신학은 이러한 모순을 통한 내적인 전(全) 위협이 아니고는 그리고 그 성격이 부분적이요 파편적이라는 것이 아니고는 결코 지금 여기에서 사건이 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학을 그 내부로부터 위협하고, 파괴하며, 분열시키는 의심의 세가지 원인과 세가지 형태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1) 신학에 대한 회의가 강렬히 일어나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와 권력들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항할 때이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에서 찬양하고 있는 복음의 하나님의 능력을 국가나, 국가들, 상호 대립하고 싸우는 몇 국가들의 힘과 비교할 때 과연 그것이 어떠한지? 세계경제, 자연과학, 이것에 기초한 기술, 예수, 스포츠와 패션, 새 이념들과 옛 이념들, 신비적이거나 합리적인 이념, 도덕적이거나 부도덕적인 이념의 힘에 비교한다면 복음의 힘은 어떠한가? 인간은 도대체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에 열거한 힘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진정으로 이 모든 힘들보다 우월하며, 이 모든 것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 모든 힘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그 무엇을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인간이 과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말하도록 책임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며, 자유케 되었는가? 신학은 저 다른 힘들에 의해서 압도된다 해도 신학자의 눈은 멀면 안되지 않는가? 이런 이는 야보고서에 의하면, 바람에 의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바다의 파도와도 같은 것이다.
(2) 회의의 근거는 신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교회공동체에 있을 수도 있다. 이 신학자에게 알려진 교회의 연약성, 불일치, 부패된 모습 및 부패된 설교에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17세기에 시작된 기독교신앙과 기독교신학의 큰 위기는 그 근거가 근대의 발달된 과학이나, 절대 국가의 먼 훗날에는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된 국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르쉬에 의하며 이 모든 충격 이전에 있었던 세 교파의 병립, 대립갈등의 상황에 있었다. 이 세 교파 각각은 베스트팔리아 평화협정(1648)에 의하여 정식으로 인정받은 교파들로서 계시에 대한 주장을 각각 독특하게 하면서 피차 상대편의 계시주장을 상대화시키면서, 병존 그리고 대립갈등 속에 있었다.
신학자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비젼을 갖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그에게 대면해 있는 교회, 교회의 교리와 교직제도, 국가를 포함하는 기독교 세계 및 기독교와의 대면에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들, 어떤 개인들의 무리들과의 대면에 있으니 옳든 옳지않든 이것은 신학자에게 걸림돌이 된다. 십자군, 종교전쟁, 인종문제, 전쟁문제, 사회정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실패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에 이르는 교회공동체 안에는 놀랍게도 경직된 편견과 조급성, 수많은 기독교적이고 신학적인 인위성, 피상성, 비활동성, 무질서 및 무의미성이 너무나 많이 있어 온 것이 아닌가? 이와같은 측면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후회스럽지 않겠는가? 이와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신학하는 것 자체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3) 그를 의심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를 억압하는 세상도 아니요, 그를 거의 억압하지 않은 교회도 아니요, 그의 사생활의 구조가 지닌 결점인 바, 그 어떤 기독교인이나 신학자도 이 결점을 면할 수없다는 사실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반되는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이 가능성은 우리가 이미 논한 신학적인 회의발생의 두 이유에 이어 이와 같은 회의발생을 함께 규정한다.
한편 첫 번째 가능성은 신학 작업을 위해 부름 받았고,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남이 알게든 모르게든 이원론인 삶, 곧, 두 왕국에서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인식 속에서 살면서 자기영역에서만 어느 정도의 순종할 용의를 가진 사람이다. 이 경우 이 사람은 “신앙의 지성”이외에 신앙의 지배를 벗어난 다른 삶의 실천이나 혹은 우연이나 어떤 율법에 얽매인 삶의 실천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지식 이외에 하나님에 의해서 속박 받거나 지시받지 않는 세속적이고 하잘 것 없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있으며, 신학의 대상에 의해서 세워진 신학적 사고, 언어, 행동 이외에 자의적인 혹은 저 대상과 무관한 사고, 언어 및 행동을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바울에 의한즉 이런 식으로 이런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증거 해야 했고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 성령과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가 그의 신학을 이론적으로 긍정할 때에도 그렇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 경우 그 자신을 절름발이 신학자요 의심을 일삼는 사람으로 인식해야 하고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반 정도 신앙하면서 반 정도 이상을 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가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면 그의 입에서 토해 내신다고 하는 저주의 말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이 결국 어떠한 신학이 될 것인가?
신학자를 회의하도록 몰고 가는 그의 사생활의 구조적 취약점은 위와는 정반대의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인간의 관계맺음에 있어서 건강을 해치는 영양실조도 있는가 하면 건강을 해치는 과식도 있다. 어떤 신학자는 알파벳에서 A와 Z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알파벳의 글자들까지도 대신하는 대용물로 여기는 가정이나 환경에서 나온 사람도 있다. 혹 그는 풋내기로서 오직 신학에 첫 사랑을 쏟고 그렇게 살므로 이제 그는 만세에 있어서 신학자로 살며 오직 신학자로서 모든 다른 것들을 제거하면서 살고 있다.
근본적으로 신문, 소설, 예술, 역사, 스포츠나 이 밖의 그 어떤 사람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직 그의 관심의 대상은 그의 신학작업과 신학에의 종사뿐이다. 그것을 누가 알지 못했나? 이 세상에는 앞에서처럼 신학에만 전념하는 학생들과 신학교수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교회공동체 안에 평생토록 갇혀 있으면서 신학에만 혈안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사귀며 다른 사람에게 뛰어드는 목사들도 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어떤 이는 이런 식으로 신학자로서의 자신을 파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신학실험의 수행에 실패하고 두 왕국의 체계에 빠져 이로 인한 나쁜 결과에 동참하게 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이유는 신학적인 과다한 편중과 지나친 강조는 소위 수도원 언어 중에 죽을 죄로 알려진 “영적 권태”로 그를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이 권태는 회의와 지척지간에 있다. 신학에 집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요, 혹은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오직 신학만을 하고 다른 모든 것은 배제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우리는 본 주제에 관하여 세 가지 조목을 제시하면 충분할 줄 안다.
① 소장신학자이건 노장신학자이건, 경건한 신학자이건 경건치 못한 신학자이건, 단련받은 신학자이건 그렇지 못한 신학자이건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회의자라는 사실을 회의해서는 안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본의 아닌 회의자요, 그의 회의는 완결될 수 없음을 회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불쌍한 죄인이요 기껏해서 불속에서 건져 낸 불붙은 나무처럼 구원받을 죄인임을 의심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② 그는 자기의 이 두 번째 형태의 의심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無性)에 그 기원을 두는 나쁜 동반자인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이 허무성 속에서는 여우와 토끼, 그리고 여러 종류의 악마들이 서로 “Good night!”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회의자의 회의의 정당성도 있다. 그러나 회의 그 자체는 어떤 정당성도 인정받을 수 없다.
③ 신학자는 아무리 극단적인 회의에 직면하여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신학자는 절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회의란 이 현세의 영역에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절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로써 극복되어야 할 제한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치 유리창에다 “항거하라!”고 긁어 놓았던 프랑스의 유그노 여인처럼, 참고 견뎌야 한다!
12. 시험
신학은 그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다. 신학은 밖으로부터(고독), 안으로부터(의심), 그리고 위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신학 작업은 이처럼 무거운 공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시험을 받는 가운데 일어난다. 그래서 신학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의하여 연단되는 것이다.
신학자가 당하는 시험이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기도되고 작동된 작업으로부터 피하시는 사건,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사건,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성령의 현존과 행동을 거부하신다는 사건, 그리고 이에 따라 모든 나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신학 작업에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 훌륭하고 탁월한 신학 작업에 있어서이다. 이 훌륭하고 탁월한 신학이란 그것이 배경으로 하는 전통이나 그것이 시도하는 새로운 경향에 있어서 우월하며 탁월할 수 있으며, 가장 좋은 의미에서 보수적일 수 있으며 동시에 시대감각에 상응하는 진보적 신학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신학은 성경적이고 주석적인 기초를 지녔으며 조직적인 깊이와 기술을 지녔고, 예리함과 유용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학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신학이 학문으로 있으나 그것의 대상의 힘에 의해서 불붙여졌고 그리하여 타오르는 불과 같은 신앙은 없다. 모든 신학활동에 참여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생각되고 말해질 일에 대하여 침묵하신다. 이 생각과 말은 하나님을 근원으로 해야 하며 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어야 하지만. 하나님과 이 신학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신학자들과의 관계는 유명한 아모스 5장의 묘사와 같다. “두꺼운 책들을 읽고 야단 법석하는 노장들과 박사학위 논문 따위로 소란을 피우는 젊은이는 그만 법석을 떨라. 나는 너의 신학 잡지, 월간지, 계간지에서 진술되는 서평 따위에 관심 없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큰일이다. 그는 이 침묵 속에서 말씀하신다. 만약 이들이 안일하게 자기의 길을 걷다가 신학과 모든 신학적인 문제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전적으로 그리고 과격하게 공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못 깨닫는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모든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험에 의하여 결국 그리고 확정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훌륭한 신학 작업이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방향제시에 그렇게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분명하고 큰 소리로 열렬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재가 가능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는 자들을 반대하실 수 있다.
신학이 하나님의 시험에 떨어질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타당한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의 법과 의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유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선택인데 이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또한 유기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부르심인데, 이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은 작별을 고하시기도 하시고 제거해 버리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은총인데, 이 은총 안에서 하나님은 심판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의 유기, 제거, 심판 및 거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업적과 신학이라도 심판하시고 파괴하셔서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죄악스럽고, 불완전하며, 부패하였고, 무성(無性)에 떨어진 것으로 증명해 버리신다.
모든 신학활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타당하고 유용할 수 있으려면 이 하나님의 불에 노출되어야 하고, 이 하나님의 불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불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불인 동시에 이는 태워버리는 불이기도 하다. 이 불을 통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다는 말이다. 이 시험의 불에 비교하면 가장 절망적인 고독이나 가장 과격한 의심일지라도 이는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하다. 이 시험의 불을 통과하면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신학자가 오직 자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 신학자에 대립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해의 관계를 기꺼이 맺으실 때에만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있기를 갈망할 수 있다.
(1)모든 신학은 비난을 받을 만 하며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시험에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이 자신의 언어적 형식들과 구조들을 다룰 때는 물론 자신의 적극적인 개념들, 부정적인 개념들 및 비판적인 개념들을 다룸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을 비유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체와 동일화하는 주제 넘는 짓을 언제 어디에서 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신학이 이론적으로는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 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경우 하나님은 침묵으로 임재 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일그러진 관계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만난 인간들이 하나님에 직면하여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에 전적인 부조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신학적인 작업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이 부조화와 불일치를 참으시려고 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학자와 이들의 신학에 대하여 찬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신다.
(2)신학활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학 역시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허망의 표출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신학자들은 사실상 질투에 차 있음으로 계속해서 마음과 입술로 반목질시하며 나아가서 글을 통하여 깊은 불신을 나타내며 우월감을 풍긴다. 이런 일이 옛날에는 더 거칠게 일어났으며 요즈음은 보통 부드럽고, 예절바르며, 단서를 붙여서, 그리고 신랄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진노와 그 결과 침묵으로 이 영역에 임재 하시지 않겠는가? 이러한 신학자의 신학은 결국 신학의 대상에 의해서 시험받고 있는 신학이 아닐까? 비록 이들이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하든 간에.
(3)신학은 비난을 받을 만 하며 시험을 받을 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본성 상 이론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신학활동에 있어서 인간은 성경 앞에 허리를 굽히고, 여러 세기에 빛나는 여러 선배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진지한 경건과 자신의 날카로운 지성을 활용하여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을 탐구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는 이 신학 작업에 있어서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는 반성적 사고를 일삼으며 명상에 잠기고 열변을 토하면서도 참 하나님과 참 인간 사이의 구체적인 상황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 신학의 영역에 있어서 마르부르크에는 약간의 비신화화의 운동이 있으며 바젤에는 약간의 교회교의학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예수의 재발견이 있고 “하나님을 넘어선 하나님”에 대한 영광스러운 새 발견이 있다. 여기에는 세례와 성만찬, 율법과 복음, 케뤼그마와 신화, 로마서 13장과 본훼퍼의 유산에 대한 논의가 있다. 여기에는 에큐메니칼 논의와 세계 교회 협의회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는 낮게 평가해서는 안되고 그 어느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일들을 위하여 수많은 저명한 인사들이 결코 헛되이 땀을 흘리지 않았다.
(4)신학은 또한 자기가 이룩한 성취에 관하여서도 비난을 받을 만하며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토마스, 루터, 쯔빙글리, 칼빈, 키엘케골, 콜브류게 같은 위대하고 유명한 신학자들도 그들의 적극적인 영향력과 결과를 많이 남긴 이외에 건전하지 못한 발자취도 남긴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신학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 속에다 낯선 그 무엇, 아니 정 반대되는 그 무엇을 넘어서 해석하기도 하며, 성경 중 어느 한 가지는 인식하나 다른 것은 전혀 오해하기도 하고, 한 곳에서는 고백하나 다른 곳에서는 거부하며, 여기에는 진리를 밝히 드러내고 저기에서는 진리를 등경 밑에 두지 않는가? 신학이 이런 짓을 안 할 수 있는가? 신학은 서기관들에게 주어진 “화 있을 진 저....”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논적들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학이 저 “화 있을 진 저....”밑에 있을 진대 그것은 신학이 하나님의 시험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학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대신 적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자 않는가 라고 하는 질문으로 심판 받아야 한다.
신학에 대한 이러한 위협은 언제 어디에서나 잠재적으로 받고 있는 위협이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경험이 아니고는 정당화될 수 없고 유용 할 수도 없다. 신학이 받는 시험이 사탄이 받는 시험이면 기껏해야 고독과 의심 정도이지만 하나님의 행동일 경우, 이 하나님의 시험은 신학자와 그의 놀라운 작업에 부여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한 계기이다. 이 무시무시한 시험으로부터의 도피는 분명히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신학이 이 시험을 참고 견디지 못할 경우에 신학은 결코 기쁨에 찬 학문이 될 수 없다.
13. 소망
신학이 고독, 의심, 시험에 의하여 위협을받을 때 우리의 해결책은“참고 견뎌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학과 신학적인 실존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언제 어디서든지 위의 세 가지 위협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학적인 활동과 과제란 처음부터 끝까지 저 세 가지 위협에 직면하여 몹시 기분 나쁨을 경험한다. 이 때에 신학은 참고 견뎌야 한다. 참고 감당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부과된 짐을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벗어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지 아니하고 자신이 지는 것을 의미하며 느슨한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신학의 위협과 곤경은 소망을 내포한다. 신학은 자신의 역경을 참고 견딤으로만 이 역경이 지나간 후가 아니라 이 역경 한복판에서 희망 속에서 자신의 신학 작업을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해야 하며 수행할 수 있고 수행해야 한다. 신학은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결코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이 무슨 권한으로 이러한 위협들에서 도피할 수 있단 말인가? 신학이 자기보다 우월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마땅히 헌신하는 한 사정이 다를 수 없다. 신학은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계속해서 잘 알 수 있다. 신학은 이것을 항상 다시 숙고해야 하며 모든 육체는 그와 같은 만남에 의하여 고발당하고 정죄 받으며, 과격한 공격을 받는다고 하는 확실한 사실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선포해야 한다. 도대체 신학이 어떻게 자신을 속이면서 자신의 행적과 말은 그것으로부터 제외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신학이 그렇게 망상하면서 예의를 주장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자신의 등을 돌려대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신학은 그 속에서 자신의 봉사활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교회 공동체와 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며 분리되고 말 것 이다. 신학이 유용한 것이 되려면 오직 모든 인간의 행적이 마땅히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우지 말고, 서슴치 말고 자신의 모습을 이 심판에 노출시키고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신학이 이런 일을 해낼 때에만 신학을 학문으로 기초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과의 만남 혹은 대상과의 만남이 신학에 있어서 현실적이고 참된 것으로 증명된다. 신학이 이런 일을 감당해야만 신학을 둘러싸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인류를 위하여 마땅한 자리에서 마땅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신학이 모든 육체 및 온 세상과 더불어 연대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밑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 그것은 이 심판의 신비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소망을 지닐 수 있을 것 이다. 신학은 바로 이 소망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소망 속에서 신학 활동을 할 수 있다.
이 소망을 위하여 신학자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고독, 회의, 시험을 감수해야 한다. 신학자는 이 위협을 밖에서가 아니라 이 위협의 한 복판에서 이 소망을 포착함으로 자기에게 찾아온 위협들을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허락 받았고,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적과 말이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소망이시다. 인간이 무력하고 gms들릴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무력하고 흔들릴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옳게 소망하도록 허락받고, 소망할 수 있으며, 소망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모든 인간 실존과 특히 신학적인 실존에 대한 하나님의 과격한 위협은 상대적인 위협에 불과한 것이다. 이 위협은 참고 견딜 만한 것 이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상상되어진 하나님도 아니요 창출되어진 하나님도 아니다. 인간이 상상해 낸 신이나 창출해 낸 신은 진정한 의미의 은혜를 줄 수 없다. 그의 은혜는 조건적이다. 그러나 참 은총이란 자신을 그냥 주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이란 그것이 비록 인간의 작업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문제시되고 그의 심판대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지라도 스스로 인간과 인간의 일을 찾으시고,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바 소망의 추구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신학의 소망이다. 이 하나님의 바로 그처럼 위협받고 있는 신학의 대상이다. 이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신학의 대상으로서 또한 신학을 위협한다. 그러나 그가 위협을 가할 때 그는 또한 신학의 소망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복음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고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라는 시각에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행적이요 말씀이시다. 이 예수님만이 오직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모든 인간의 실존과 행동들을 심판하셨다. 그는 모든 인류의 심판자로서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할 인류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시고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투신하셨다. 골고다에서 정해진 심판의 비밀은 하나님의 버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의 파멸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행동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정말 무시무시한 위협인 것이 틀림없으나 또한 인간 실존, 기독교적 실존, 신학적 실존을 살리는 소망이시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신학자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이 사실을 예시하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들의 소망이 되셨다.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초석이요 대상이시며 지탱하시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고히 붙들게 되어야 한다. 오 십자가여 ! 그대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 신학이 이 사실을 확고히 포착할 때에, 이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 (theologia crucis) 으로써 또 영광의 신학 (theologia crucis) 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 또한 이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학이요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리고 신학과 신학적 행동을 위하여 계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학이다. 신학자는 자신의 행동이 위협을 받을 때에도 그 속에 감추어진 주님에 대한 소망을 계속 지녀야 하며, 고독, 회의, 시험을 더욱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에 그는“약간 대담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칼빈이 말한 대로 성령의 민첩성, 유쾌함, 영적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 감당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IV. 신학적 작업
14. 기도
신학이란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큰 역경 속에서만 착수되며 성취될 수 있으며, 비록 안과 밖으로부터 위협을 받지만 결국 신학의 대상 자체에 의한 것이다. 또한 신학은 위협과 역경 속에서 보다 큰 희망과 자극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활발하고 과감하게 착수해야 하며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한다. 신학이 그것의 대상에게 충실하고 신실할 때마다 죄인의 죽음과 그의 구원을 중요시해야 한다. 모든 고독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신학이란 그것의 대상에게 충실하고 신실할 뿐인바 신학이 신학의 대상에 의하여 시험을 받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신학 작업의 첫 번째 되는 기본적 행동은 기도이다. 신학 작업은 연구이며, 봉사이고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로써 신학 작업을 시작해고 진행해야 한다. 신학활동이란 기도의 행동으로 수행되어야 할 작업이며 이것이 신학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신학에 관한 한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법칙은 어느 경우에도 타당하다. 즉 시작할 때에만 기도하고 일의 진행은 기도 없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기도하다”의 행동인바 “일하다”는 모든 차원과 관계와 움직임이 일종의 기도요 기도의 의미이다.
(1) 옳고 유용한 신학 작업의 특징
교회와 세상의 삶의 현장을 향해 열려있는 창문들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천장을 가지고 있는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열려진 영역 안에서 신학의 대상, 신학의 근원 및 신학의 목표를 향해 열려 있으며 이런 식으로 이 대상에 근거하고 있는 큰 위협과 이 위협보다 큰 소망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활동의 영역이란 무엇보다 그 자체가 인간의 물음과 대답, 인간의 탐구, 사고, 언어의 공간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더욱 더 귀를 기울이고 신앙 고백과 교부들 및 동시대 신학자들의 소리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인 이해를 시도하며, 세상의 상당히 옳고 중요한 통찰들과 표현들에 대하여 개방적이 된다 해도 너무도 인간적인 인가의 영역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신학자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전체내용과 개별적인 내용은 결코 그 어디에서도 밝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며 자신의 통일성, 필연성, 건전성, 아름다움을 결코 나타내 보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던 작업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을 향한다고 하는 행동이다. 또한 기도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여기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열매 맺도록 그리고 이 일이 하나님의 조명 아래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 밑에 있도록 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다른 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학 작업 역시 이와 같은 의식적인 기도운동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2) 신학적인 작업의 대상
신학적인 작업의 대상은 어떤 것(Etwas)가 아니라 그 어떤 분(Einer)이시다. 이 대상은 그것(Es)가 아니라 그 분(Er)이시다. 그 분인(Er) 이 어떤 분(Einer)은 침묵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행적에 있어서 바로 그의 말씀이신 분이시다. 신학 작업의 과제는 그분, 이 어떤 분, 그의 행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이 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 그의 말씀에 관한 전말을 자기 자신에게와 교회와 세상에게 말해 주는 데 있다. 이 때에 신학은 이 어떤 분의 말씀이란 중성적인 고지가 아니라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교통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곧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걸어 오심 그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어떤 “It"나 ”something"으로 전락하면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모두 허구에 진자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하고 자신을 “나”로 해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을 “제 3인칭”으로 놓을 경우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비 본래적이 되고 만다. 즉 신학 작업이란 예배의식적인 행동의 형태를 띤 하나님께 대한 부름과 기도로써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있는 바 행동하시는 주체와 말씀하시는 주체만 되시기 때문에 신학의 대상이시라는 사실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3)다른 학문 활동이나 다른 작업과 구별되는 점
신학 작업에 종사하려는 사람은 이미 해결된 물음, 이미 도달된 결과, 이미 도출된 결론에 근거한 완벽한 확신 위에 서있으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는 매일 매순간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신학은 모든 다른 학문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신학에 있어서 진행이란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신학이 과격한 위협에 노출되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유일한 길이 된다. 신학의 대상은 자유로이 은총을 베푸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신학은 항상 다시 시작되어야 하고 출발되어야 한다. 모든 신학 작업의 행동은 모든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치는 제사의 성격을 띤다. 또한 신학 작업이란 어떤 단계에서든 어떤 방향에서든 인간에 의해서 인식된 모든 것, 인간에 의해서 산출된 모든 것, 인간에 의해서 성취된 모든 것,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든 종교적, 도덕적, 지적, 정신적, 영적 성취들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처리 아래 있도록 그분께 여유를 드려야 한다. 신학 작업이 틀에 박힌 작업이 되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되지 않으려면 고질적인 권태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학이란 하나의 기도행위이다. 신학은 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올려야 한다.
(4)실천적인 의미에서의 접근
신학 작업이란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하여 묻고 대답하며 추구하고 찾는 형태로 진행된다.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수용과 인간의 행동능력이 문제이며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노출을 통한 하나님의 현존의 문제가 있다. 전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하여는 의미 있는 물음과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밖에 없다. 후자에 관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은총만이 충분히 자유하고 능력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란 사건임에 틀림없다. 은총이 사건이라면 이 은총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말을 건네고, 호소하고 이 하나님에게만 간청해야 할 것이다. 신학 작업은 이 두 문제를 놓고 말건넴, 호소 및 간청으로 시작될 수 있으며 지탱되고 소급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성령께서 아래로부터 위로, 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운동하시면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개방시키시고 인간을 하나님에게 개방시키신다. 따라서 신학 작업은 이 성령의 오심을 간청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모든 물음, 탐구, 숙고 및 명제들은 이 간청의 여러 형태에 불과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간청을 들어주실 경우에만 신학활동은 성공적이고 유용한 작업이다. 간청의 순수성의 척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 가운데에 행해지는 데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확신에 찬 간구로 우리의 신학 작업을 용기 있게 출발하며 수행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수행해야 한다.
16.섬김(service)
신학 작업은 섬김이다. 섬김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의 : 다른 사람의 일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와 성향과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바 하나의 의지요, 활동이요, 행동이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에 의하여 제약받으며 한계 지워지는 행동이요, 그것의 영광이나 섬기는 자의 관심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향하면 향할수록 점점 커지는 그러한 행동이다.
섬김은 신학자의 작업이다.
정의 :“하나님 말씀에의 섬김”이다. 글자 그대로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시중드는 것이다. “시중들다”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의 “diakonos"란 개념이 본래 한 시중드는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신학자란 그의 행동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드높은 위엄을 시중들어야 한다. (시편 123편에 나타난 영상보다 신학자의 행동의 자유와 영광을 더 잘 묘사하는 것은 없다.)
칼빈의 교직(Ministerium)의 분류
교사 - 성경의 해석 및 설명하도록 정식으로 임명받은 사람, 특히 신학자
복음에 의하면 제일 끝에 오는 인물이요, 모드 다른 사람을 위한 종이요, 시중 드는 사람이요, 섬기는 사람이다.
장로직 - 교회 공동체의 삶을 외적으로 지도할 책임
집사직 - 교회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
목사직 - 설교가요, 교육자요, 교구목사의 기능
신학 작업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섬김과 시중 듬이다. 이것은 신학 작업의 궁극적 목표요 참 목표이다. 신학 작업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전개된다 해도 그것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풍성하게 되려면 그것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안중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인지되고, 사색되며, 명상되어지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신학 작업이 모든 다른 기능보다도 특별한 섬김의 기능을 가졌을 진대 이 섬김의 기능만을 수행하기 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 작업이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공동체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기독교적 돌봄이란 신학 작업이 전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우리는 섬김으로서의 신학 작업의 성격에 관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신학을 신학자체를 위해서 연구할 수 없다. 마치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할 수 없듯이.”옳은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구체적인 적용을 시도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가 옳은 그 무엇을 경험하려고 힘써야 한다.
두 번째로 신학이란 섬김을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지배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세상과 교회공동체의 주님이신 말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 받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받은 인간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관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군림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신학의 적합한 겸손의 궁극적인 근거는 신학의 섬김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겸손은 우리가 안정된 自意識을 가지고 신학 작업에 임할 수 있고 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슐라터(Adolf Schlatter)가 언급했던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이 나의 말을 듣는다”라고 하는 말씀은 신학자에게도 해당된다. 이것은 “성경신학자들의 교황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바 식탁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 위치에서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고개를 들 정도였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불링거(H. Bullinger)가 작성한 “제2의 스위스 신앙고백”의 제1장 1절에서 많이 인용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설교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설교되며 믿는 자에 의하여 수용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신학의 특수 섬김은 주님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다른 섬김의 행동들과는 항상 구별 되어야 한다. 신학이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섬김 즉, 신학은 설교, 교육, 목회상담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이들에 대한 진리물음을 제기 해야 한다. 신학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신학적 해명을 제공해야 하고 이들의 진리문제를 도와야 한다.
신학은 교회공동체에서 오직 성경말씀에의 구속을 생각나게 해야 하며 모든 다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권장해야 한다. 더욱 교회공동체에서 이 세상을 향하여 통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이 세상에서 돌아가며 교회공동체 안으로 항상 밀고 들어오는 그 어떤 말들도 아니다.
신학은 교회공동체가 말씀에 집중하도록 도와야 하며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든 그 포괄범위에 있어서든 이 구체적인 말씀을 말로 표현하도록 이 공동체를 도와야 한다.
신학은 고저의 낙차운동이 교회공동체에게 모범적으로 먼저 행하여야 하며 이 운동이 “신앙의 지성”의 법칙이요 자유임을 교회공동체에게 인상 지워 주어야 하고 생생하게 느끼게 해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각 사상(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교파주의, 성경 주의적, 예배의식적인 화석화, 폐쇄지향주의)의 위협들에 반대하여 교회의 선포로 하여금 정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케 해야 하며 개방성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지역, 민족, 대륙의 전통, 사회적, 종족적 전통들에 편견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신학은 이러한 불순한 영향들에 반대하여 기독교적 메시지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하며 이 메시지의 에규메니칼한 의미와 성격, 보편적인 교회, 그리고 보편적인 의미와 성격을 주장해야 한다.
즉, 우리들은 모든 인간의 의지, 행동, 의견 앎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과 같은 그 무엇을 이 모든 것의 한계, 근거, 목적동기 및 진정제로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사랑(love)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 연구, 섬김이라는 제목 하에 신학 작업에 관하여 논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서 신학의 원리에 관해서 과감히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학은 이 원리의 지배를 받을 때에만 하나의 훌륭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리고 인간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작업이 될 수 있는 약속을 가질 수 있다.
신학은 다음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저 필수 불가결의 선행조건이 신학 작업 이전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신학 작업은 차디차고, 열매 없으며, 죽었고, 나쁜 것으로 남고 만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이 완전하여도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논한 대로 성령만이, 신앙만이, 소망만이 중요하다. 이 셋은 신학 작업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이다.
신학의 근본조건에 대하여 노해 보자. 이 근본조건은 대상으로부터 신학에게 오는 것이요, 이 대상으로부터 신학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요, 이 대상의 자유케 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활발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이 사랑 안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허락받을 경우에만 신학 작업이 좋은 작업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과감한 진술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 가운데에서 단호히 행해질 경우에만 확실히 훌륭한 작업이다. 따라서 사랑만이 중요하다. 사랑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 “사랑은 세워나간다”라고 바울은 위로의 글을 썼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사랑은 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믿음, 사랑, 소망 중에 사랑이 제일 크지만 사랑은 믿음과 소망과 더불어 모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영원히 남는다.
사랑이 없는 신학이란 비참한 논쟁이요 말들의 소모이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며 아무리 철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연구해도 그리고 몸을 불사르도록 봉사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이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신학 작업이란 그냥 받는 사랑의 선물을 수용함으로 시작되며, 지속되고, 끝맺는다. 이 사랑만이 이 신학 작업을 활기 있게 해줄 수 있다.
우리들이 “사랑”이란 말을 들을 때 플라톤의 철학에서 그렇게나 격찬되고 있는 “Eros"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Eros"라고 하는 사랑은 한 피조물이 자기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 자기만족, 자기실현 및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욕망, 짙은 갈망, 추진력, 노력인 바 이는 근원적인 힘들이다. 학문적인 Eros 없이는 신학 작업이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이미 거론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신학 작업 이란 분명히 인간의 지성적 운동이요 살아있는 인간의 운동으로서 육체적 조건을 밑에 하부구조로 지니고 있다. 인간은 자기주장과 자기 성취를 위하여 이 대상을 갈망하는데, 이 대상에 관한 한 신학적-학문적 Eros는 옛부터 상극적으로 왔다 갔다 했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신학적-학문적 Eros는 지배적으로 하나님을 향할 때도 있으며 혹은 지배적으로 인간을 향하기도 한다. 학문적인 Eros가 신학의 영역 안에서 실현될 경우 이 신학은 자기의 대상을 다른 대상과 혼동하며 자기의 대상과 다른 대상을 뒤 바꿀 수도 있다. 신학 작업이 수행될 경우 마다 항상 이Eros의 사랑은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랑은 신성과 인성을 필요로 하며 갈망한다. “Eros" 라고 하는 명사와 그것에 해당하는 동사가 바울과 기타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이 확실하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Agape"이다. 이“사랑”이 나타나는 문맥에 의하면 Eros의 운동과는 정반대 방향의 운동임이 분명하다. “Agape"의 의미에 있어서 사랑이란 他者에 대한 전적인 추구이다. 이 점만이 ”Agape"와 “Eros"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Agape"사랑이란 그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의 근원이 자기 자신의 궁핍이 아니라 他者를 위해서 선물로 주어진 자유인 바 이 자유는 근원에 있어서 밖으로부터 온 것이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자를 찾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향유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그를 얻으려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욕망하는 것이란 타자를 위해서 실존하는 것이요, 그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요, 결국 자기 자신을 그에게 주는 것이다. 그가 타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은 이 능력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이다. “Agape" 사랑 역시 틀림없이 하나의 추구이지만 그것은 사심에 가득찬 이기주의적 추구가 아니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에서 알 수 있듯이 타자의 주권을 인정하는 타자 추구이다. 즉, 여기에서 ”주권적“이란 말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주권을 겨냥하고 초점 맞추고 있다. 신학 작업에 있어서 Eros의 군림은 끝나야 한다. 하지만 학문적인 Eros그 자체는 유용하다. 신학 작업을 군림하는 사랑은 ”Agape"인바 이것은 신학 작업에 있어서 밖으로부터 온 새 것으로 활동한다. 이“Agape"는 이 신학 작업이 인식해야 할 대상이 주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그것의 Eros와 대면해 있다.
신학 작업의 대상은 하나의 참 하나님과 하나의 참 인간이다. 참 하나님은 참 하나의 인간으로부터 동 떨어져 있거나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고 있다. 참 인간이란 그래서 하나의 참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거나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고 있는 인간이다. 신학의 대상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완성역사(歷史)이다. 이 역사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분 자신의 자유에 의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러나 이 역사를 통하여 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인간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이 歷史는 유일하고 유일회적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이 역사는 이 역사를 능가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조소한다. 신학적인 인식의 대상은 이 계약사건이다. 이 계약사건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나님을 인간과 연합시키는 완전한 사랑이 일어났다. 신학적인 지식의 대상이 예수그리스도요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사랑일진대 Agape만이 신학의 지배적이고 형성적인 원형이며 원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신학적인 지식이 완전한 사랑의 지배와 형성적 힘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 혹은 이처럼 부과된 길 이외에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신학적인 지식, 곧 진리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답은 완전한 사랑의 삶과 지배를, 비록 거울이 희미할 지라도 이 거울을 통해서 반사 되듯이 반사 시켜야 할 것이다.
신학적인 지식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opus operantis)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유익하고 건전한 일이 될 것인데, 이것이 계속 자유하며 반복해서 자유하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행적(opus operatum Jesu Christi)을 항상 다시 기준점으로 할 때에 가능하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냥자신을 주시는 자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자유를 인간에게 주시사 인간이 값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런 자유.
이 지식은 복음적인 신학적 지식으로서 이 복음적인 신학적 지식은 대상을 통하여 주어진 이 지식의 원형을 인정하고 확인함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행적인바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들의 모든 신학분야를 포함하는 모든 신학적인 작업의 “객관성"(Sachlichkeit)-이렇게 부르는 것이 메마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란 저 완전한 사랑에 종속하며, 이 완전한 사랑을 뒤따르며, 이 완전한 사랑에 대응하는 것이요, 모든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이 완전한 사랑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의 분야들이 모두 이 객관성을 요구한다. 신학이 이 객관성에 의해 양육받고, 이 객관성을 위하여 추구될 때, 우리가 이미 처음 강의에서 언급한 대로 신학은 하나의 겸손하고, 자유하며, 비판적이고 행복한 학문이 될 것이다.
신학 작업의 결정적인 전제는 그것의 한계상황이다. 즉,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일을 옳게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초월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형태와 어떤 힘으로든지 Eros가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전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Agape가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의 신학자는 물론 모든 사람이 이 Agape를 오직 선물로 받아 작용케 할 수밖에 없다. 이 Agape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in Christus Jesus unserem Herrn")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며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에 이 Agape 사랑이 있다.
누구든지 그에게 저 Agape 사랑이 참으로 경험되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이 완전한 사랑을 어디에서 찾으며 어디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가를 알면 그는 이 사랑에로 귀의하는 일에 실패할 수 없으며 그의 신학지식의 방향을 조명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결코 좌절될 수 없다. 어쨌든 이 완전한 사랑을 올바른 신학의 “필수전제조건”(conditio sine qua non)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모른 것 보다 백배 좋다. 비록 인간의 이 시도가 저 완전한 사랑을 향한 동경일 지라도 이미 이 완전한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계약의 하나님,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신학 작업의 목적이다.
Karl Barth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 성경의 주제와 성경해석의 문제
Ⅰ. 서론
본 연구의 중요성은 예언자적인 초기 Barth의 중심사상을 포착함으로서 후기 Barth, 즉 Gottingen과 Munster의 교수생활(1922~1929)을 통하여 그리고 1931년 Bonn대학에서 Anselm연구(Fides Quaerens Intellectum=지성을 추구하는 신앙)를 거쳐 교회 교의학에 이르는 Barth의 사상이 저 초기 신학사상과 어떻게 다르며 후기 작품들에도 아직 초기 사상이 얼마나 남아있나를 알아보는데 있으며 Barth의 성경해석에 대한 통찰이 초기 로마서(1922)에서 개발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찾는데 있다.
Ⅱ.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적 개신교
1904년 그의 나이 18세 때 Bern대학에서 자유주의 조직신학자인 Her-mann Ludemann에게서 배웠고, Kant와 Schleiermacher에도 접하였다. 사실은 Bern에서 2년을 보내고 Marburg에 가서 신칸트학파에 속하는 Wilhelm Herrmann에게서 배우려 했으나 이때에 Barth는 부친의 권유로 1906년 Berlin에 가서 R. Seeberg에게서 수학하였으나 이때에 Barth는 보다 자유주의 계통에 서있는 Adolf von Harnack과 Herrmann Gunkel 및 Julius Kaftan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부친의 만류로 다시 Bern으로 돌아 왔다가 1907년 가을 Tubingen에 등록하여 부친의 충고를 따라 신약학자인 Adolf Schlatter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Barth는 부친의 충고에 만족하지 못하고 1908년 Marburg에 가서 Wilhelm Herrmann의 지도를 받았다. 이상 Barth의 초기 교육과정에서 볼 때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충분히 노출되었다.
1900년에 출판된 Harnack의 (Das Wesen des Christentums) (기독교의 본질) 과 1910년에 일어났던 Schleiermacher르네상스는 Barth의 초기사상이 싹터 오르던 온상이었다.
그런데 이상의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은 모두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전제한다. 18세기 말 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계시란 “성경책 안에 기록된 명제들의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부터 성경해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사고 전반에 걸쳐서 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는 Schleiermacher이후 Karl Lachmann(1835) Tischendorff(1872), Westcatt and Hort(1882)가 본문 비평적 신약성경을 내놓았으며, Rudolf Kittel은 본문비평에 입각한 히브리어 구약을 내놓았다. 이처럼 19세기말에 와서는 대륙의 성경비평은 상당히 안정된 분위기를 이루었다.
즉, 독일에서는 Julius Wellhausen(구약)과 Harnack(신약)이 선배들의 비평적 통찰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Wellhausen에 이어 Eissfeldt 등이 나왔고 Gunkel 같은 이가 뒤이어 Wellhausen의 J. E. D. P. 의 가설은 너무나 분석적이고 문서의 근원적 구성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다분히 어떤 개인 저자나 편집자로 확정하려고 저자 년대 마저 확정 시키려는 경향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상의 역사 비평적 성경이해가 바로 K-Barth의 선생들의 신학이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세계 제1차 대전의 전야인 1914년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Kaiser WilliamⅡ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었는데 이들 중 Harnack, Seeberg, Herrmann등이 가담한 것을 알고 Barth는 이들의 윤리, 교의학 및 성경해석이 전적으로 가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우리는 Barth가 로마서(1922) 제 2판을 쓰기 직전에 F.Overbeck(1837-1905), S. Kierkegaard(1813-1855), 및 Dostoevski(1821-1881)를 통해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Barth가 제 2판 로마서 서설91921)에서 Luther와 Calvin의 신학사상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실을 더욱 신중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Ⅲ. 초기 Karl Barth
A. 성경 안에 있는 경이롭고 새로운 세계
이 글은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돌발한 직후 1916년 가을에 Thurneysen이 목회 하는 Luntwil 교회에서 한 강연내용이다.
-Barth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이해에 있어서 인간론, 종교론, 윤리, 인간의 학문들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반하여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초월적인 세계를 주장한다. Barth는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훨씬 초월하는 세계에 도달한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하였다. Barth는 성경의 중심내용이 인간의 학문들과 경험들을 훨씬 초월해 있기 때문에 성경자체가 말하고 있는 내용에로 수동적으로 이끌려 들어갈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학문적으로 창출해 낸 방법론이나 그 어떤 성경 밖에서 온 해석학적 원리도 성경이해에 적합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하나의 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일단 우리의 모든 것을 이 강에 내 맡기자. 그러면 이 강은 우리를 바다로 인도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들의 모든 인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해석한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몰아가는 데로 따라 갈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성경의 정신, 곧 저 강을 따라 감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대답을 찾도록 감행해야 한다.) Barth의 다음과 같은 비유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충분히 나타낸다.
그래서 Barth는 19세기의 잘못된 성경이해를 비판하기 위하여 1. 역사 2. 도덕 3. 종교에 관하여 논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초월하는 성경 안에 있는 놀랍고도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1. 역사: Barth가 (성경은 역사로 가득 차 있다. 종교의 역사, 문학사, 문화사, 세계사, 등 온갖 종류의 인간역사가 성경 속에 들어있다.)고 주장할 때 성경은 여러 가지 인간적인 역사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구약에서 신학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그 결정적인 동인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라고 하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구속사의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위의 인간적인 역사들을 단순히 역사학, 역사철학, 역사 비평학, 등 인간적인 학문의 노고를 통해서 탐구한다고 해서 저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이 구속역사의 사건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2. 도덕: Barth는 성경 안에 도덕이 있다고 한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드높은 덕망과 인간적인 위대함을 가르치며 예증하는 문서들의 수집을 포함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모범적인 사람들 이여서 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무난히 많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물론 성경에는 어떤 실천적 지혜와 어떤 형태의 영웅주의의 고상한 예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더 큰 부분은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윤리교본이나 도덕철학으로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성경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선과 악의 개념을 넘어선다.
3. 종교: Barth는 성경이 열어 보여 주는 낯 설은 세계, 새로운 세계, 보다 큰 세계는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그것이 카톨릭적 기독교이든 개신교적 기독교이든, 그것이 어떤 교파이든, 즉 성경 안에는 어느 한 종교가 잇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있다고 Barth는 주장한다. 이것은 곧 성경 속에서 맥박 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모든 종교는 이 말씀의 심판 밑에 있으며 이 말씀은 살아있는 겨자씨로서 이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며 신령과 진리로의 예배가 일어난다고 한다. Barth는 신. 구약 성경 안에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인간의 덕망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그의 빛으로 불러내는 하나님의 덕망, 인간의 입당들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이 있다고 선포한다. 결국 Barth가 성경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초점을 맞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Barth는 성경 안에 인간적인 역사들, 도덕들, 종교경험 등이 있으나 위에서 언급한 알맹이가 성경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Barth가 1962년에 쓴 (Rudolf Bultmann-An Attempt To Understand Him)에서 Bultmann의 비신화화 작업이 신약성경의 Kerygma가 당시 후기 유대교, 고대 세계관, 헬레니즘, 영지주의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종교적 요인들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졌기 때문에 이와 같이 껍질들을 분석해 내고 실존적인 재해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성경의 많은 부분들(역사, 도덕, 종교, 문화, 사고의 틀, 문학, 언어 형식 등)이 성경의 주제에 대하여 조건 지워졌다고 하면서 이 주제에 입각하여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arth는 신약성경이 한 메시지의 문화라고 하는 Bultmann의 견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인정한 다음 신약성경의 해석은 주제에 입각하여 행해져야 하는데, 특히 이 주제에 의하여 조건 지워진 다른 부분들 역시 이 주제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말하자면 저 신약성경 메시지와의 만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의 결단과 순종에 이를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언급한 은총과 신앙에 의하여 저 성경의 주제를 경험할 때 성경의 해석이 시작되는 것이다. Barth는 성경이해에 있어서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포착하면서(은혜와 신앙으로)(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해석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D. 로마서 주석
1.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 혹은 하나님의 말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복음인데, 이 복음이 역사의 의미이다 라고 말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로 계시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으며,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의이시다.
이 은혜, 곧 복음에 나타난 은혜가 바로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 이며 바르트는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떠나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하나님 관계 및 부활 이전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밑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정에 입각하여 하나님 존전에 선 모든 인간들이 심판 하에 있는 것을 파악한다. 이것이 성격해석에 있어서의 문자주의를 극복케 한다.
-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의 의 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어떤 처사나 품행, 그 어떤 지적 성향이나 느낌, 그리고 그 어떤 직관이나 이해력도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
바르트는 인간의 죄의식과 구원의 가능성을 결코 양심 혹은 자연법, 인간의 종교성 등 인간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계시되고 실현된 것으로 본다. 이것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자연 신학적 요소나 성경 밖에서 가져온 낮선 해석학적 원리들, 심지어 단순히 성경의 명시적 진리에 근거한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하며, 인간은 이 말씀에 조명 받아야 하나님과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선포하는 동시에 인간의 정체와 구원을 선포한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 가 나타났는데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용서하신다.
-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신 인생과 세상에 참여 하시고, 용납하심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신다. 그의 의 는 바로 그가 우리와 관계 맺으시고, 자기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적 귀결과는 모순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으로, 불가사의 하고 무조건적으로 이것은 인각 밖에서 온 의 이다. -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의 신실성에도 적용 시킨다.
- 예수님의 생애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조건 적인 순종이다. 그는 죄인 중 한 사람으로 등장 하셔서 온 세상이 받는 심판을 전적으로 받으셨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그리스도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인간들과 세상일들을 조명시키는 종말적 일들의 빛이시며, 우리는 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본다. -
따라서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의 중심사에 속한다. 이것을 상실한다면, 성경의 말들이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2. 신앙
바르트는 지금까지 논한 복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해야 한다고 한다. 즉
- 구원의 복음은 오직 신앙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문제이며, 선택을 요구한다. 신앙이란 신적인 불가지(不可知)앞에서 느끼는 경외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며, 부활을 이 세상의 전환점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즉 신앙은 하나님의 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하는 것이요, 하나님 존전에서 파멸을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한다. 믿는 자들은 복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님의 능력을 발견한다. -
우리는 위의 인용에서 복음을 신앙하는 주체의 선택, 경외의 느낌, 긍정, 인식 신뢰, 확신 등의 현상을 발견한다. 이 신앙은 회심이요, 비약이요 혈육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다. 신앙의 대상이 갖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마찬가지의 과격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신앙이다. 따라서 신앙은 기적이다.
- 하나님이 인간과 해우 하실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수용이냐 거부냐, 긍정이냐 부정이냐 이해하느냐 몰이해하느냐를 물으신다. 그런데 우린 거부, 부인, 몰이해 할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행한다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확신은 불가능한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이해는 기적이다. 이런 아브라함의 통찰이 신앙인데 이 신앙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
이와 같이 신앙은 기적인데 이것은 저 복음의 역설적 내용을 주관적으로 경험한다. 따라서 신앙의 경험은 역설이다.
3. 기독자의 실존
바르트는 로마서 5장 강해에서 믿는 사람들, 로마서에 나타난 ‘우리’, 새 인간들, 주님의 사람들에 관해 논할 때 역시 십자가와 부활을 해석의 관건으로 삼는다. 즉 기독교인의 성체성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깃발아래 새 인간이 탄생하며, 위로부터 ‘내’가 태어난다 고 말하며, 이 정체성은 항상 십자가의 위기를 만나며 또한 부활과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한다.
기독자의 실존은 계속 남아있는 죄악 때문에 저 십자가의 부정과 저 부활의 긍정 사이에 놓여 있으며 위기적 분리와 화해의 연합을 경험한다.
-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바라고 이 하나님 안에 나타난 위기적 분리와 화해의 연합을 유의할 때 평화가 온다.-
그는 기독자의 실존을 바울의 실존으로 자세히 설명한다.
-바울은 메시아의 노예이며, 복음을 위해 택함 받았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의를 존경하는 것을 배웠다. 사울로써 그가 와해 됐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인식하였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즉 그는 모든 인생들이 그 앞에서 먼지와 재에 불과한 그분의 메신저 이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살았다.” 이것이 바울이 서있던 바 은혜였다. 따라서 바울은 역설에 의해서가 아니곤 하나님의 평화나 그 자신의 실종에 대해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4. 복음에 의한 성경해석
공관복음서의 모든 구절이 십자가 없이는 해석될 수 없다고 하는 바르트의 주장은 십자가는 부활과 더불어 성경해석의 열쇠임을 말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인격, 산상수훈, 이적들, 복음이 가지는 사회적인 삶의 함축성,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종말적 측면과 직접적 층면 등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공관 복음 중 저 십자가를 떠나 해석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바르트는 죄, 은혜, 세례 등의 설명할 때 저 역설의 논리를 사용 하며 기독자가 당하는 고난에 관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비를 찾는다.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율법, 종교, 역사, 문화 등 인간의 고상한 일들 모두 십자가에 비추어 이해하고 있다. 바르트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곧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공관복음서의 말씀을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부활 없이도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우리는 바르트가 성경의 주제는 인간의 모든 학문들을 초월하며, 성경의 참 알맹이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하셔서 인간의 구속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초점을 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고 주장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전적 타자 (das ganz Andere)로서의 하나님과 이 하나님에 대한 특수 경험을 제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십자가를 통한 거룩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부활을 통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지적하고, 이 십자가와 부활이 성경해석의 관건임을 보았다. 또한 바르트의 로마서 서설에서 위의 주제와의 관계에서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해석해야 하며, 따라서 저 주제에 의존하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말하는 신학적 주제들의 중요성이 생각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는 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부정 앞에서 위기를 만난다. 인간의 의, 성취 , 역사 어떤 가치의 세계도 하나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부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자비의 긍정이 되었음을 확인 하였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곧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사랑이 계시 되었고, 성령께서 저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 것이 되게 하신다.
우린 바르트의 초기 작품에서 그가 복음과 하나님의 성경의 알맹이로 여기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루터가 성경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루터의 경우 율법과 복음이 상당히 중요한 성경 해석의 신학적 원리 인데, 바르트의 경우는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집중되는 부정의 변증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바르트의 성경 해석의 통찰이 어디에서 발견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즉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해석의 원리에 해당되는데 이론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심판과 은혜로 임하시고 결단을 촉구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임을 알았다.
초기 바르트의 경우 루터적인 복음 해석에 크게 영향 받았으며, 신학의 다른 주제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바르트는 복음 혹은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성경 해석을 시도함으로서 성경이 제시하는 다른 신학적 주제 까지도 복음에 의해서 조건 지워진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다.
바르트의 교의학중 화해론이 그 중심을 이루는데 이 화해론의 내용이 다름 아닌 바르트의 초기 작품에서 언급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 혹은 거룩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즉 바르트는 메시아 메시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것으로 삼으신바 하나님의 신실성의 자유로운 행동’ 이라고 하면서 화해론에 관하여 말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중심 메시지는 창조론, 종말론, 구원론 및 완성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런데 중심은 속죄사건에서 성취된 언약이다.-
마지막으로 바르트가 다음과 같이 모든 교의학이 기독론 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때 성경의 중심이 곧 교의학의 중심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같은 바르트의 교의학이 참 케리그마틱한 교의학이다.
-모든 교의학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기독론 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심은 계신된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교의학의 유일무이한 표준이다. 이 계시된 말씀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Ⅳ.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섬김(1934년 목사들의 모임에서 한 강연의 내용임)
말씀봉사자가 되려면 역시 은혜와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해석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경해석자는 한 기독자, 교회의 사람이어야 하고 안수 받은 목사이면 더 좋다. 이를 위하여 바르트가 딤전 1 : 9-10을 인용한 다음 말씀봉사자의 성결 조건으로 3가지를 지적할 때 이는 성경해석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리고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라고 하는 질문에 앞서 확고부동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선 그분 자신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불의에서 속량하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사 그의 백성 되게 하시는(딛2:14; 딤전2:6) 하나님, 이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 말씀에 대한 우리의 섬김은 우리가 그 분의 자비를 입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인내를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말씀에의 봉사는 우리의 감사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책임질 수 없고 감히 그 앞에 나갈 수 없는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대신 걸머지시고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가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았으며 지탱되고 위로받으며, 세움을 받았고 기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말씀봉사자의 근거이다. 따라서 오직 이 심판과 자유케 함만이 우리를 말씀의 봉사지로 만들고 ‘그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모범이 되게 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죄인들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우리는 말씀의 봉사자가 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말씀의 봉사자가 되게 하신다.”
이처럼 성경해석자는 말씀의 봉사자로서 말씀을 위해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전에, 즉 성경을 해석하기 이전에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인격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복음이 전제되는 율법이요, 선물을 전제하는 과제요, 직설법을 전제하는 명령법이다.
② “… 그런데 바울이 그의 사도에로의 소명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는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이다(딛3:5). 우리는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 집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알아야 한다(딤전3:15).… 말씀을 섬기는 교회의 직책은 교회의 직책 그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회집이요, 이들은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회집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에의 봉사자가 일어나는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피택자들을 이 회집에 불러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딤후2:10) 이 회집에 주어진다.… 그는 이 하나님의 집의 청직이요, 말씀의 봉사자이다. 그는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되어진 바를 긴박감을 가지고 듣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는 사건화한 바 그리스도의 현현과 다시 사건화 되어야할 오실 분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딛2:11-14)…“
이처럼 말씀봉사자 내지는 성경해석자는 구원을 전제함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위한 말씀 봉사자요, 교회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교회를 위한 말씀봉사자여야 한다. 따라서 단순한 개인으로서 어떤 학문적 이론전개를 위한 성경해석은 말씀의 본성과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다음 3번째로 말씀봉사자의 “성화” 에 해당되는 주장을 한다. 이것 역시 성경해석자에게도 해당된다.
③ “말씀봉사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성괴고 규정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돈되고 인도되는 인간적 존재요 인간적 행동이다.… 바울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신화(딤전1:4 ; 4:7, 딤후 4:4), 거짓 영지(딤전6:20), 거짓 영들과 악마의 가르침들(딤전4:1), 불결(딤후4:5)과 고집(딛1:7), 복종치 않음(딛1:10), 편견과 편벽(딤전 5:2)은 피하라고 경고한다. 나는 젊은 디모데에게 피하라고 한 청년의 정욕(딤후2:22)은 성적인 것과 이와 비슷한 것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주, 영도자, 형성자가 되려고 하는 자연적인 인간의 충동 전부를 말한다고 본다. 이 충동은 인간을 교만케 하며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그의 이해력을 부패케 하고 진리를 상실케 한다(딤전6:5 ; 딤후 2:18 ; 4:4). 따라서 이런 이들은 자기만 잘못된 길에 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오도한다. 이상의 모든 것과 구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더불어 의, 신앙, 사랑 및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바울의 이런 언어의 내용인즉 참 하나님과 참 인간으로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이다.….”
성경해석자는 구원을 받아야 하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간다움의 보습을 닮아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해석자에게 “선물”인 동시에 “모범”이시다.
바르트는 이어서 디모데와 디도의 예를 들어 말씀봉사자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가 들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는 데 있는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자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일컬은바 ‘가르침의 과제’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무엇보다 ‘전령사’ ‘보냄을 받은 자’ ‘교사’(딤전2:7 ; 딤후1:11)라고 말한다. ‘이것을 명하여 가르치다’(딤전6:3), ‘시간을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딤후4:2)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딛2:1) 같은 것이 바울의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 많이 나온다.… 사도가 이해하는 ‘가르침’이란 인간의 주님, 이 주님의 말씀, 이 주님의 뜻, 이 분의 행동에 관한 것으로 전적으로 사도와 대면해 계시는 이 주님과 엄격한 긴장관계에 있다. 사도가 의미하는 ‘가르침’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배우면서 대면할 수 있는 것이지 전혀 인위적으로나 사변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고 볼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지만 은혜로서 자기를 계시하셨고 계속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가르침’이란 이 세상이 이 은혜를 알아야 하고 교회는 은혜는 은혜라는 사실을 항상 다시 숙고해야하기 때문에 이는 말씀에 대한 섬김이다.… 이 ‘가르침’은 교의학의 어느 한 부분을 발전시키는 것 같은 것이 아니다. 전도자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이다.”
위에서 바르트는 “가르침”이 단순히 성경 구절이나 어떤 성경 주의적 명제적 진리들이나 단순한 신조나 신앙고백의 항목들, 나아가서 어떤 교의학의 한 부분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요, 우리와 대면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위의 “가르침”의 개념이 바울의 주 관심사인 “복음 선포”로 풀이되고 있다. 성경해석자는 이러한 의미의 “가르침”을 목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성경해석의 목적이 교회의 “복음” 선포에 있지 않은가?
두 번째로 바르트는 말씀의 봉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말씀해석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말씀해석자가 대변하고 있는 주님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성경해석은 사사로운 이론의 제시로 만족할 수 없다.
바르트의 말을 들어보자.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4:6)… 이 고난은 말씀의 봉사자에게 불가피하게 따라온다. 내가 전령자, 보냄을 받은 자, 그리고 교사인 고로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딤후1:12) ’내가 복음을 위하여 죄인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딤후2:9). …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즉 복음 자신이 고난을 받고 계신다는 사실인데, 우선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세상이 단순히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세상 속에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으심으로 승리하신다. 복음은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과시한다. 말씀의 봉사자는 은혜를 통해서 은혜로 계시되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찾는 세상의 모순과 저항 앞에 고난을 당한다. 그리고 항상 다시 은혜가 은혜 되게 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순과 저항 앞에 고난을 당한다….”
끝으로 바르트는 말씀봉사자는 전투적이라고 말할 때에 성경해석자도 마찬가지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 받은 자들로서 특수한 삶의 정황에 돌입한다.… 말씀봉사자는 밤낮으로 싸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딤후2:3)이다.… 즉 ‘신앙의 선한 싸움’(딤전6:12).… 누가 감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앞에 둔 사도 바울의 입은 아직도 더 투쟁해야 할 자의 말로서 말하고 있다. ‘경기는 옳게 싸우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딤후2:5). 우리는 ‘옳게’라는 말에 한 마디 더 첨가한다면 신앙의 싸움은 세상과 교회 한 복판에서의 싸움이다.“
바르트는 “우리는 칼빈이 즐겨 말하는바 성경의 학생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로 그의 강연을 매듭짓는다. 우리는 결국 이상에서 성경해석자의 자세와 태도 역시 말씀의 봉사자의 그것이어야 함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