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4 칼 바르트의 “신학의 자리”에 관한 소고(최종2017).hwp
닫기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
-신학의 자리를 중심으로
I.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학생으로서 5년, 목회자로서 12년, 교수로서 40년을 지내오면서 복음주의 신학, 즉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형성을 위해서 분투했다. 바르트는 비록 자유주의신학자들로부터 배웠지만 인간의 경험을 강조한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에 맞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주창한 신학자이다. 바르트의 대표적인 작품은 『로마서주석』(1922)과『교회교의학』(1932-1967)과 『하나님의 인간성』(1956)이다. 특히, 『교회교의학』은 복음(계시=예수 그리스도)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핵심신학사상을 인식할 수 있는 바르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르트자신이 고백했듯이 교회교의학이 너무나도 방대하기 때문이다(전13권 9000여 페이지). 따라서 바르트는 말년에 그의 『교회교의학』을 짧게 요약한 저서『복음주의 신학입문』을 출판했다. 이 저서가 중요한 것은 바르트가 단순히 교회 교의학을 요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복음중심의 신학을 새롭게 요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의 핵심부분인 제1장 “신학의 자리”에 대한 소고를 통해서 바르트 신학의 핵심내용을 요약 소개하고 어떤 점에서 바르트신학이 19세기 신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냈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II. 본론
1. 복음주의 신학의 정의와 특징들
먼저,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의 자리를 논하기 이전에 복음주의 신학의 정의와 복음주의 신학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논한다. 사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학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을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그리고 참다운 신학의 특징이 어디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지에 따라서 신학의 방향이 결정되고 다른 신학들과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의 정의와 특징들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전통적으로 “학문들”이라고 알려진 인간적인 일들 중 하나이다. 말하자면, 학문이 일정한 대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과제이듯이 신학의 과제도 “하나님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인지하고(apprehend) 이해하고(understand) 언어로 표현하는(speak)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의 학문적 개념정의는 상당히 모호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학의 인식대상인 “하나님”을 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진리의 본질이나 최상의 원리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신적인 위엄과 기능을 가진 것들 즉 대자연, 무한한 발전과 진보, 삶과 역사의 터전으로서의 민족을 신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그 나름대로 신이나 신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신학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대다수는 포이에르바하가 비판했듯이 인간의 구상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신학들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학은 무엇이고 참된 신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신학들을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여 그 중에서 최고의 신학을 소개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인가? 이에 대해서 바르트는 명백하게 반대한다. “본 강연의 목적은 이처럼 많은 신들을 가진 신학들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역사적으로 비교연구하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거나 이들 중 어느 하나를 취하여 다른 것들 위에 놓거나 이들 중 어느 한 입장을 두둔하려는 것도 본 강연의 의도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참된 신학이란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상상력에서 발원된 여러 신학들을 비교 평가하여 그 중에서 최고 또는 최선의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즉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들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복음주의적인” 신학만이 참된 신학임을 주창한다. 말하자면, 참된 신학은 인간에서 출발한 인간주의적인 신학이 아니고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전적인 타자되신 하나님을 다루는 신학으로서 이 전적인 타자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심을 증거하는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신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신학만이 참된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다른 신학들과는 달리 복음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이 하나님을 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시된 방법으로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복음의 하나님이 인간의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이 학문의 근원과 규범이 될 때 여기에 복음주의적 신학이 있다.” 결국,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도 인간적인 학문 활동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인식하는 학문인데 여기서 참된 신학이란 인간이나 역사나 자연 속에서 추상된 하나님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다루는 복음주의신학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신학들과 구별되는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의 네 가지 주요 특징들을 밝힘으로써 복음주의 신학의 정의를 보다 구체화시켜준다.
첫째, 복음주의 신학은 겸손한(modest) 학문이다. 무엇보다도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인데 여기서 복음의 하나님은 복음주의 신학의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의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과업과 모든 복음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신학들을 초월하시고 항상 새롭게 그 자신을 계시하고 항상 새롭게 그 자신이 발견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학의 모든 논리는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유비에 불과하고 신학의 모든 빛은 인간적인 반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은 겸손한 학문이다. 더욱이 복음주의신학은 다른 신학과의 경쟁이나 비교에 의해서 신적 교리로 확인될 수 없고 오직 신학의 참된 대상인 복음의 하나님이 옳다하실 때만 옳음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겸손한 학문이 되어야만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정당화에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기대할 수 있다. 비교연구가 복음주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은 그것의 대상에 의해서 복음주의 신학이 되기 때문에 겸손하고 분별력 있는 학문이다.”
둘째,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로운(free) 학문이다. 하나님이 변증법적으로 자기를 계시할 때 인간 실존은 거기에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기에 그리고 인간은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고백하기에 그리고 인간은 신앙의 지성을 가지고 계시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기에 신학은 인간실존과 신앙과 인간의 능력이라는 세 가지 종속적인 전제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대신에 인간실존, 신앙, 인간의 영적 능력이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이나 주제로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들이 신학의 대상과 주제로 전개되면 하나님은 부차적이요 우발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실존, 신앙, 인간의 영적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이 되어야만 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신학의 종속적인 전제에 관한 한 온갖 겸손을 가지고 행해지는 자유로운 학문이요, 그것의 대상에게 최대의 자유를 주는 학문이며, 그것의 대상에 의하여 끊임없이 종속적인 전제들로부터 자유케 되는 학문이다.”
셋째, 복음주의 신학은 비판적인(critical) 학문이다. 하나님은 행동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시기에 하나님은 이 행동사 안에서 자신의 실존과 본질을 동시에 가지시며 이 실존과 본질을 증명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정체를 알리는 그의 역사를 반복할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으며 미리 앞당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정체를 알리는 하나님의 자신의 행동사에 나타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생생한 하나님의 행동사의 과정을 인지하고 숙고하여 언표할 경우에만 자기의 사명을 다하게 된다. 만일 신학이 하나님의 행동사 과정 중 어느 한 순간이라도 역동적인 연관성을 떠나서 고립시켜 이해한다면 그것은 신학의 진정한 대상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옛 것과 새 것을 항상 다시 구별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 옛 것을 경멸하고 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복음주의 신학은 통일성을 상실하는 것 없이 하나님 자신의 현존과 행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구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 신학은 두드러지게 비판적인 학문이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신학은 계속해서 그것의 대상 즉 살아계신 주체에 의해서 심판에 노출되는 학문이고 위기에서 결코 벗어 날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넷째, 복음주의 신학은 행복한(happy) 학문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제한 받거나 조건지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복음의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을 폐쇄하고 있는 고독한 하나님도 아니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전적인 타자도 아니다. 복음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통일성 속에 계신 한 분이시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버지, 형님, 친구로서 인간의 하나님이시다. 오히려 인간보다 고상하기만 하고 먼 거리에 있으며 낯설은 하나님은 인간성이 없는 신성으로서 이런 하나님은 비복음의 하나님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며 하나님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관계한다. 따라서 신학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한되거나 조건지워질 수 없는 자유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 아니 인간의 하나님이 되셨음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행복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에 관계한다. 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은 가장 감사하고 가장 행복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신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신-인학(Theanthropologie)이라는 용어가 신학의 관심이 누구이며 신학의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더 잘 표현해 주는 용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래 신학(Theologie)은 하나님 자체나 인간 자체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 즉 인간과의 관계 속에 계신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바르트에 따르면 참된 신학은 철학적 사변이나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고 복음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복음주의 신학이다. 이 복음주의 신학은 그 자신은 절대적 주권과 자유 속에 계시지만 복음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겸손과 자유와 비판과 행복의 학문이다. 복음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보다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신학의 대상은 자유가운데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지 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전제들이 아니기에 우리는 인간적인 종속적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행동사 전체 속에서만 분별될 수 있기에 우리는 옛 것과 새 것을 구별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며, 복음의 하나님은 절대 주권 속에서 인간의 하나님이 되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우리는 감사와 행복 속에서 신학을 행해야만 한다.
비판적인 고찰
칼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은 신-인학(Theanthropologie)이다. 즉, 신학은 하나님을 말하는 학문인데 여기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신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신-인학이라는 용어가 신학의 본래적인 관심과 내용을 잘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학을 신-인학이라고 규정한다면 여기에는 자연과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닌가? 신학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및 세계와의 관계 속에 계신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이 아닌가?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만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세계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계를 경시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바르트에게서도 나타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과 인간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의 이와 같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반하여 구약성서는 세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사는 곳, 곧 세계 안에 계시는 “새 하늘과 새 땅”(계 21장)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2. 신학의 자리
신학이 기본적으로 복음 속에서 자신을 계신하신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신학의 자리(place)는 어디인가? 바르트의 신학이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도
신학의 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신학사를 되돌아 볼 때 신학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 따라서 새로운 신학이 등장했다. 17-18세기에는 계몽주의 영향으로 신학을 이성에 위치시킴으로써 합리주의적 자연 신학이 등장했고, 19세기에는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서 신학을 경험에 위치시킴으로써 자유주의신학이 등장했다. 이처럼 신학의 자리의 문제는 신학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의 자리는 근본적으로 말씀과 성서와 교회공동체 아래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말씀(word)
먼저,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의 특별한 자리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학(theologie)이란 개념자체가 명료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어원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신학의 개념정의에는 인간적인 주관적인 응답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신학을 신학되게 하는 것은 이 신학이 듣고 응답하는 말씀(로고스)이지 이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인간의 말이 아니다. “신학은 자신의 말들에 선행하는 말씀과 더불어 죽고 산다. 신학이란 이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고 일깨워지며, 도전받는다. 신학이 저 말씀에 응답하는 행동 이상이려고 하든가 그 이하이려고 하든가 그 이외의 무엇이 되려고 한다면, 그의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공허할 것이요 무의미할 것이요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말씀에 대한 대답으로서 무엇보다 말씀의 창조행동에 의하여 촉발되며, 실존하고, 현실적이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의 선행이 없이는 본래의 신학, 곧 복음주의 신학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신학의 자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말씀 밑이다.
다음으로, 말씀이 신학의 자리라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행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행동이요 행동을 통해서 말하여진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돌입해 오셔서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며, 말씀하실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말씀은 인간에게 행하여졌고, 인간을 위하여 행하여졌으며, 인간과 더불어 행하였다.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이란 침묵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말씀하시는 행동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좋으신 행동이기 때문에 좋으신 말씀 즉 복음이고, 이 복음의 내용은 인간과 맺으신 은혜의 계약이요 이 계약 속에 나타난 이중적인 계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약사를 통해서 나타난 로고스이고 이 로고스가 바로 신학의 창조자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혹은 뒤집어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말씀하고 계시며, 말씀하실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복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체결되었고 지탱되었으며 수행되었고 완성된 은총의 계약, 평화의 계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우정에 넘치는 교제에 대한 하나님의 좋으신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계약사를 통해 나타난 로고스이시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말씀, 이 계약사의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새롭게 수용하고, 항상 새롭게 이해하며, 항상 새롭게 언어화시켜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약사를 통해서 나타난 로고스라면 이 계약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선포하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계약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불성실하고 불순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구약의 계약을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체결하신 계약을 이 이스라엘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완성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관계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깊숙이 뿌리내렸으나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초월하여 미래를 지향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심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완전히 말씀되었고 무엇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총 결론의 말씀이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이신 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신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포괄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점에서는 특수하지만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는 보편적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全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하고 응답해야 한다. 만일 신학이 구약만을 수용하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없고, 만일 신학이 신약만을 수용하여 말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없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구약에 있는 것만도 아니고 신약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약의 행동역사는 이 둘의 연계성과 통일성 속에서 완전한 것이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신학이 경청해야 하고 이에 반응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로고스는 두 역사의 연계성과 통일성 속에 있다. 신학이 이 명령을 수행할 때 그것은 자기의 초소를 받아 지키는 것이다.”
비판적인 고찰
바르트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시작과 완성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체결하신 계약을 이 이스라엘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완성하셨다. 더욱이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으로서 신학적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을 향한 인식이다. “이 중심(예수 그리스도)은 신학자에게 성경 중 그 어떤 것도 중심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자신과 경쟁하는 제2의 중심을 만들도록 허락지 않는다. 중심이 하나인 원이 중심이 둘인 타원형이 될 때 소종파주의, 이단, 혹은 배도에 떨어질 것이다. 진정한 신학적 인식의 첫 번째 표준이란 이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으는 인식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 이해는 성서를 닫힌 책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적인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성서는 닫혀있는 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활의 비유가 더 적당한 비유가 아닌가? “성서의 역사적 증언을 해석하는 열쇠는 ‘성서의 미래’이다. 성서의 문서들은 하나의 심장을 지닌 닫혀 있는 유기체 혹은 하나의 중심을 지닌 닫혀 있는 원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의 모든 문서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적 성취를 향해 열려 있다. 성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미래이다.”
2) 증인들(witness)
바르트에 따르면, 말씀이 신학의 첫 번째 자리라면 신학의 두 번째 자리는 말씀의 “증인들”이다. 먼저, 말씀의 증인들은 유일회적으로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탁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위치가 탁월한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의하여 직접 부름 받아 수용했고 다른 사람에게 확증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바로 이 근원적인(primary) 증인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로써 그의 말씀을 인간에게 말하실 때 동시대인들이었다. 이들은 계약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인들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들의 증언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로고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학은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간접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오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오는데, 곧 신앙공동체의 참으로 인간적인 증언, 기억, 희망, 실천 등을 통하여 온다.”
다음으로, 신학이 성서증인들 밑에 있다면 말씀의 증인들의 구체적인 증언은 무엇인가? 먼저,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야훼의 하나님의 행동들을 보았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약속들을 들었고, 야훼의 말씀을 그들의 백성에게 살아있는 음성으로 들려주었고, 후세대의 회상을 위해서 기록하였으며 또한 기록케 하였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구약을 신학의 서곡 정도로 들어서는 안되고 저들의 증언을 최대한도로 진지하게 들어야만 한다. “신약성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성경은 신약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신학이 구약의 증언을 신약의 서곡으로만 간주하고 소홀히 여긴다면 신학은 항상 골수암의 위협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약의 완성을 보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과 화해를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 삶 속에서 새 인간의 등장을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보았고, 또한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를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언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한복판으로 파송 받았다. 사도들의 증언의 주제는 예수에 대한 인상들, 이 예수의 인격과 사업에 대한 판단들 및 이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었고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킨 능력의 말씀이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역사가 하나님의 화해케 하시는 행동이요 이것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는 점 이외에 이 구속사와 이 계시사에 선행하는 그 어떤 측면도 말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관심하는 예수의 역사란 오직 구속사요 계시사였다. “신약성경의 증언들의 기원, 대상, 내용은 하나님의 행동이자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속사요 계시사이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신학과 성경의 증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1)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응답들인 한, 신학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하던 일과 공통점을 갖는다. 신구약성경의 증인들은 인간으로서 시공의 제약을 받은 통찰과 사고방식과 인간의 언어로써 저 말씀을 수용하였고 증언하였듯이 신학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위되어있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언어양식을 연구하여 배워야 한다.
(2) 그러나 말씀과 신학의 관계는 말씀과 증인들의 관계와 다르다. 성서 증인들은 말씀에 대해서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학은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만(간접적으로만) 말씀에 대해서 물을 수 있다. 신학은 말씀의 증인들과 더불어 그때 그곳에 있지는 않았었다.
(3) 신학의 자리는 성경적 증인들의 자리보다 높지 않다. 성경의 증인들은 말씀과 직접적인 충돌을 통해서 행동했지만 그 어떤 신학이나 교회공동체도 말씀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했다. 신학자는 증인들의 동료 교수가 아니며 증인들을 교정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4) 신학의 자리는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의 자리 밑에 있다. 신학이 취급하는 성경은 인간의 문서로서 인간적으로 조건지워진 글이지만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 때문에 거룩하고 탁월한 책이요 특별한 존경과 주의를 받을 만한 책이다.
(5) 신학자들에게 단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복음의 하나님과 친숙케 되는 일이다. 이 일은 결코 자명하거나 이미 주어졌거나 어떤 영성에 의해서 이미 확보된 것도 아니다. 이 복음의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바 자체 내에 하나님의 인간과의 친숙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신학은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으로 항상 다시 돌아감으로 이 대상을 만날 수 있다.
(6) 그러나 신학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다양한 증거를 만난다. 성경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러 가지이므로 구약과 신약의 소리 안에서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분별해야 한다. 성경 증언의 다양성은 증인들의 언어와 신학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조건의 다양성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풍요로운” 실존과 행동과 계시에 근거한다. 성경은 신학이 하나의 하나님, 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실존, 행동 및 계시를 만나는 학교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 작업은 여러 측면을 가지고 실존하며 표출되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높은 산을 피곤한 줄 모르고 맴도는 것과 같다.
(7) 신학은 성경의 증언 안에서 하나님의 로고스를 항상 새롭게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시도함으로 하나님의 로고스에 응답한다. 성경 본문이 인간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사시키고 메아리치고 있다는 사실이나 혹은 어느 정도 그러한가는 자명한 것이 아니고, 항상 다시 이해되어지고 들려져야 하며 항상 새롭게 밝혀져야만 한다. 오늘날 성경적 표현을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각 책의 어느 장에서도 어느 구절에서도 자명한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언어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과 분석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까운 본문들의 관련과 보다 먼 본문들과의 관련도 주의 깊게 연구하고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경의 중심내용을 밝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을 각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인 바 이것은 증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그 속에 있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 있느냐 하는 것은 계속해서 발견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고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탐구의 노고가 요구된다. 이것이 신학의 노고이다.”
비판적인 고찰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이다. 성서는 증언이기에 우리는 믿음과 성령 안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로고스를 듣고 증언해야만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는 성서문자를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서주의자가 아니고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 주제의 빛 속에서 성서의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적 성서해석자’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계시된 말씀(revealed Word),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선포된 말씀(preached Wor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불필요한 성서문자주의의 혐의를 받아왔다. 성서는 계시된 말씀이 아니라 계시적인 말(또는 계시의 말)이 아닌가? “계시는 계시의 매개체로서의 말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학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대된 교리로 환원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바르트) 그러나 만일 이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말”이 계시와 동일시되고 “말”이 모든 신적인 자기 현현이 그 아래에 종속될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든지 아니면 계시가 말해진 말에만 한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을 통한 계시(revelation through word)는 계시된 말(revealed word)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3) 교회 공동체(community)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인들을 텅빈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교회공동체의 장 안에서 대면하기 때문에 신학의 세 번째 자리는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신앙에로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둘째 서열의 증인) 부름 받고 각성된 사람들의 백성이다. 신학은 이 공동체 안에서 특수한 자리와 기능을 가진다.” 이처럼 신학이 교회공동체 밑에 위치한다면 신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는 믿기 때문에 말한다. 공동체는 말과 실존과 봉사와 기도를 통해서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즉, 무엇이 이 공동체의 신앙을 기초시키는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고, 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사고이고, 올바른 표현방식인가?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물음이다. 신이 존재하는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우리의 구주인가와 같은 물음은 교회공동체의 물음이 될 수 없다. 참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얼마나 명쾌하게 표현했는가?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는 바는 진리물음은 공동체 뿐 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부과된 책임이라는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말하느냐의 문제는 이 공동체에게 뿐만 아니라 각 구성원에게도 주어진 물음이다.” 그런데 이 진리물음은 좁은 의미에서의 공동체의 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의 세상적 실존과 정치적 입장과 사회봉사활동에도 해당된다. 더 나아가서 이 물음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삶이 무의식중에 하나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들을 혐오한다. 첫째는 나의 임무는 신학이 아니라 설교요 행정이다. 둘째는 신학은 이미 배웠으니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이런 견해들은 잘못된 생각들이다. 진리에 대한 물음으로 항상 새롭게 불타오르지 않는 기독교적 증거는 어떤 경우에도 신빙성 있고 생동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책임적인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되 특히 교회 내에서 설교직, 교육, 목회상담을 떠맡은 지체를 섬긴다. 신학은 이들의 인간적인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는가를 항상 새롭게 물어야한다.”
그렇다면 신학과 교회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1) 신학은 교회공동체의 신앙선조들과 더불어서 믿는다.(credo)
먼저, 신학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교회공동체를 위해 있으며 이 공동체의 전통에서 나왔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 즉 제 1세기의 교회공동체에게 순수한 예언자적 증언이요 사도적 증언으로 알려진 문서들을 확고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 교회공동체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과 더불어 좋은 경험을 나누고 있다. 이 전통적인 경전이야말로 신학이 무엇보다 단순하게 받아들여 감행하는 작업가설이다.
(2) 신학은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교회공동체의 사고와 말은 오랜 역사와 여러 가지로 뒤얽히고 혼동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소리와 이것에 의하여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주목은 항상 열려있었던 것도 아니요 항상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전혀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유혹을 항상 물리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의 전통이 물려 준 그 어떤 교리와 신앙고백도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하여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신학이 진리물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 그 어떤 신조적 명제들을 전통에 충실하다는 이유와 널리 알려진 것이라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이러한 전통주의보다 더 나쁜 이단은 없다.
(3) 신학은 교회공동체를 자유롭게 섬긴다.(optimum partem bona fide)
신학은 살아있는 역동적 학문이다. 즉, 교회공동체는 어제의 신학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기 때문에 이 지난 날의 신학과 접촉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를 계속해야 한다. 즉, 선배들의 신학에 각별히 유의하여 귀기울여야 하며, 가장 좋은 부분들을 해석해 내야하고, 이들의 문제들을 그냥 버리지 말고 계속 추구해야 하며, 이들의 물음제기를 항상 다시 숙고해야 하고, 유념하여 돌이켜 보아야 하며 새롭게 수용해야 한다. 결국, 신학과 교회의 관계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온고지신(溫故知新 )이다. 교회공동체는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맹종해서는 안되며 항상 새롭게 수용해야한다.
비판적인 고찰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과 교회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신학은 교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folgt) 둘째, 신학은 교회의 이야기를 인도한다.(führt) 셋째, 신학은 교회를 동반한다.(begleitet) 그러나 이와 같은 바르트의 신학과 교회의 관계는 배타적인 교회중심의 신학을 양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말씀하시되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은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도식으로 진술된다. 모든 사건을 역사라는 틀 안에서 보고자 한다. 판넨베르크는 역사 안의 혹은 역사를 통한 계시보다는 역사로서의 계시를 말하고자 한다. 판넨베르크는 모든 인간이 참여하고 있는 역사는 계시적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계시는 종래의 계시사상과는 다르게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직접계시 대신 전체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발생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균진 교수도 역사상실이 교회중심적인 바르트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비판한다. 첫째, 바르트가 자연계시에 대하여 거의 알레르기적 거부 반응을 보이기에 그의 신학에는 세계와 역사의 지평이 구성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바르트는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삼는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의 초역사를 전제하고 있기에 사실상 초역사에서 출발하고 있다.
4) 성령(spirit)
우리는 신학의 자리로서 말씀과 증인들과 교회공동체를 다루었다. 이제 바르트는 신학은 어떻게 이 명제들에 의해서 묘사된 자리를 취하고 고수할 수 있는지를 고찰한다. 다시 말하면 도대체 어떤 힘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훌륭하게 만들었는가? 증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었고 선포할 수 있었는가? 교회공동체의 행동과 실존은 무슨 힘에 근거하고 있는가?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은 자신의 명제들을 근거시키고 자격을 부여하고 목적지향적인 것이 되도록 할 때 아무 것도 전제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외부로부터든지 또는 내부로부터든지 자신의 안일을 기약하는 모든 전제들을 포기하는 일만이 잘하는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전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다룰 것이 분명하다.” 신학이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신학과 이 신학의 명제들을 떠받칠 수 없는 힘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실존 밑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이 힘은 신학의 명제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 속에도 있고, 구속사와 계사사 속에도 있고, 성경적 증인들의 들음과 말함 속에도 있고, 이 증인들에 의해서 생겨난 교회공동체의 존재와 행동 속에도 있다. 또한 이 힘은 모든 인위적인 전제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이 힘은 창조적인 힘으로서 모든 다른 힘들에 근거하는 모든 안일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자는 이 힘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힘의 역사를 뒤따라 가야한다. 결코 앞서 가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이 힘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따르면, 이 주권적인 힘의 성경적인 이름이 루아흐(Ruach)요 프뉴마(Pneuma)이다. 이 두 단어가 움직이는 공기, 입김, 바람, 폭풍을 뜻하듯이
이 힘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한다.” 말하자면,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하는 자유의 영이다. 성령과 악령의 구별점은 무엇보다도 성령은 신적인 자유 속에서 역사하여 인간의 자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인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요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운동하는 공기와 같은데 인간은 이 성령에 의해서 부름을 받고 이 성령에게 순종하는 자이다. 성령은 인간세상 속에 실존하시는 성자의 실존의 기원이고, 이 성자를 선포하는 사도와 모든 사도 역할자들의 근원이고, 원시 교회공동체의 근원이시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바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했다. 또한 성령은 기독교를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행동을 가능케 하고 실현시키신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의 근원적인 자리는 성령이다. “신학이 성령의 힘 영역 안에서만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겸손하고 자유로우며 비판적이고 행복이 넘치는 학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신학은 성령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만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로고스가 될 수 있다. 성령을 떠난 신학은 악질적인 정치기자와 가장 나쁜 소설과 같다. 바르트에 따르면, 오늘날 성령이 신학에서 떠나는 대표적인 양상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학은 성령에 인도되고 성령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신학이 마치 자기가 성령보다 더 많이 아는 척 할 때이다. 이 경우 신학은 열광주의, 역사화, 심리화, 윤리화, 교리화에 빠지게 된다. 둘째는 신학이 성령의 생명력에 너무 친숙하다는 이유로 성령의 자유와 은혜를 망각할 때이다. 이 경우 신학은 성령을 소유물로 만들어 버린다. 성령을 제멋대로 전제로 삼는 신학은 비영적인 신학이다. 성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공동체와 신학에게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는 생명력이다. 이와 같은 비 영적인 신학을 돕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따라서 바르트는 신학이 영적인 신학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창조자 성령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라고 본다. “교회공동체와 신학이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창조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당신, 생명의 성령이시여’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결국, 복음주의 신학의 근원적인 자리는 자유의 영인 성령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증인들을 증인들 되게 하고 교회공동체를 교회공동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전제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성령의 힘을 뒤따르는 가운데 말씀-증인-교회공동체 아래에 위치해야만 한다. “신학은 다른 전제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히 가난하지만 부유하고 지탱 받으며 유지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령의 약속을 확고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꿰뚫고 탐구해 들어가되 하나님의 심오한 것까지 알아내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비판적인 고찰
바르트가 신학의 궁극적인 토대로서 성령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즉 신학이 성령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성령론적인 신학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성령론적 신학은 신학사적으로 볼 때 19세기의 슐라이어마허의 인간학적인 신학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학적인 기술에 불과한 것인가? 오히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학적인 용어로 성령의 경험을 기술한 인간학적인 성령의 신학이 아닌가? 더욱이 현대신학은 성령을 인간의 하나님의 경험의 계기로 보는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의 신학과 성령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계기로 보는 바르트의 계시의 신학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성령론의 주요주제로 생각해 왔는데 이러한 양자택일은 신학적으로 정당한 것인가? “심지어 베르크홉은 이 양자택일을 서구 교회사 전체의 결정적 문제로 간주하였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하나님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수 있겠는가? ‘계시’와 ‘경험’은 현대철학의 왜소화된 사고의 틀에서만 모순된 것으로 생각된다.”
III. 나오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20세기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신학을 신학의 자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참된 신학은 인간이나 역사나 자연 속에서 추상된 하나님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복음주의 신학이다. 이 복음주의 신학은 그 자신은 절대적 주권과 자유 속에 계시면서도 복음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겸손과 자유와 비판과 행복의 학문이다. 즉, 복음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보다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신학의 대상은 자유가운데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지 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전제들이 아니기에 우리는 인간적인 종속적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행동사 전체 속에서만 분별될 수 있기에 우리는 옛 것과 새 것을 구별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며, 복음의 하나님은 절대 주권 속에서 인간의 하나님이 되신 임마누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우리는 감사와 행복 속에서 신학을 행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신학의 자리는 말씀-성서-교회공동체 아래에 있다. 먼저, 신학의 자리는 말씀 밑에 있다. 이것은 신학은 어원적으로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로고스라는 점에서 명백한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신학은 자신의 말들에 선행하는 말씀과 더불어 죽고 산다.’ 다음으로, 신학의 자리는 성서적 증언 밑에 있다. 이것은 성서가 말씀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근원적인 증인들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자명한 것이다. 신학은 성서의 증인들의 말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신학의 자리는 교회공동체 밑에 있다. 교회공동체는 둘째서열의 증인이다. 신학은 교회의 선포의 말이 얼마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표현했는지 진리의 물음을 물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부름 받은 교회공동체에게 부과된 진리 물음을 계속 탐구하는 학문이다. 끝으로, 신학의 근원적인 자리는 성령 밑에 있다. 성령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기와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공기요 자유롭게 부는 바람이다. 마치 만물이 자유로운 공기 속에 떠 있는 것과 같이 말씀과 성서와 교회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실존하고 움직이고 생명력을 얻는다. 따라서 참된 신학은 성령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의 의의와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을 강조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신학이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내재해 있는 신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르트에 따르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죄로 말미암아 건널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성서의 증언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로써 바르트는 인간의 주관적인 관념이나 의식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말씀하신 말씀으로부터 출발한다. 말하자면, 신학의 자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성서교리가 아니라 말씀 밑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Deus dixt) 그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의 진정한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나 실존이나 이성적 능력이 아니고 자유가운데 자기를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바르트는 인간의 상황을 중시하는 인간의 입각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입각점’에서 출발하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을 확립했다. 사실, 19세기신학은 신학함에 있어서 인간의 주도권을 강조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측면을 간과했고, 하나님을 오직 인간의 의식과 경험의 한계 내에서만 찾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르트 신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의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보여준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서 출발하는 신학방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계시와 종교를 구별했고 계시가 인간의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주체로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적 조류를 비판하고 극복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성과 인간을 주체로 하는 모든 신학과 그 방법론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즉, 바르트의 진정한 공헌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변되는 신학 방법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신학방법을 수립한 것이다.”
둘째,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과 성령이 통일성(unity)을 이루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다. 신학사를 되돌아 볼 때, 신학의 역사는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갈등의 역사였다. 예를 들어, 17세기의 정통주의는 객관성의 신학이었다. 17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게르하르트(J. Gerhart)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고 논리적이며 예리한 사고를 통해서 신앙조항들을 세분화하는데 집중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은 주관성의 신학이었다. 19세기 신학의 대표자인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신의식(또는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출발하여 그리고 신의식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자 했다. 물론,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 보면 나름대로 신학적인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신학과 19세기 신학 그 자체는 객관성이나 주관성 어느 하나만으로는 “참된 신학”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객관적인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내가 믿는 신앙이 아니라 교회가 믿는 신앙을 믿는’ 신앙의 교리적인 형식화를 초래했고, 주관적인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은 인간의 경험에서 출발함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인간의 경험한계 내에서만 정립하는 ‘신학의 인간학적인 환원’을 초래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에 직면하여 20세기신학은 ‘어떻게 하면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물음을 신학의 주된 과제로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들, 바르트와 불트만과 틸리히는 비록 신학적인 경향과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점에서 객관성의 신학과 주관성의 신학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객 분리를 극복한 주-객 통일성의 신학자들이다. 특히, 일반적으로는 바르트의 신학이 객관성의 신학으로만 간주되는 경향이 있지만 바르트 신학도 엄밀하게 관찰해보면 말씀과 성령이 통일성을 이루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다. 먼저,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이란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로고스의 응답이다. 말하자면, 신학은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하나님의 로고스에 생사가 달려있다. 신학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말씀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말해야만 한다. 하지만 신학도 인간의 학문 활동이기에 신학이 신학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로고스의 응답을 포함해야만 한다. 즉, 신학은 신적인 로고스를 항상 새롭게 수용하고 표현해야하며, 성서증언을 항상 새롭게 이해하고 표현해야하며, 교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표현했는지를 항상 새롭게 물어야만하고,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인도를 기도해야만 한다. 이처럼 신학이란 용어자체가 신학이란 본래 주-객 통일적인 학문임을 드러내 준다. 다음으로, 신학의 주-객 통일성은 신학의 자리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에 잘 나타나 있다. 본론에서 다룬 것처럼 신학의 자리는 말씀-성서-교회공동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인 현실을 지시한다. 그러나 신학의 근원적인 자리는 성령이다. 성령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성서적 증언을 말씀의 증언되게 하고 교회공동체를 말씀의 선포자 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이것은 말씀의 주관적인 현실을 지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둘은 항상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성령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말씀은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역사한다. 이처럼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계시의 객관적인 현실인 말씀과 계시의 주관적인 현실인 성령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에 근거한 성령론적인 신학 즉 말씀과 성령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다.
셋째,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freedom)의 신학이다. 바르트는 일생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사상과 싸운 신학자이다. 하지만 바르트의 신학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유의 신학”이다. “미국이건 유럽이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퀴나스 신학, 루터교 신학, 칼빈주의 신학, 정통주의, 종교경험주의, 실존주의도 아니고, 하르낙이나 트뢸취나 심지어 바르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시카고에서 행한 마지막 소강연에서 암시한 바 있는 ‘자유의 신학’이다. 이것만이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 대상, 내용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거의 묵시적인 진지성을 지닌 우리시대에도 이것만이 꼭 필요하다.” 이처럼 바르트의 일생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복음 안의 자유를 찬양하는데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모든 신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신학은 바로 복음에 근거한 자유의 신학이라고 주창한다. 한편, 바르트의 신학이 자유의 신학이라는 점은 무엇보다도 성령을 자유의 영으로 규정한 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 : 17) 바르트에 따르면, 성령의 어원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기와 바람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하는” 자유의 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공기와 같이 자유로운 존재이다. 하나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약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따라서 그의 말씀, 그의 계시, 그의 행위를 그 무엇도 제약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인은 자유자 같으나 실상은 죄의 노예이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을 참 자유자가 되게 한다. 성령은 인간을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만든다. 말하자면, 자유의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로 부르시고 자유로 세우시고 자유로 인도하신다. 이처럼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의 신학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칼 바르트의 신학과 폴 틸리히의 신학은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틸리히도 신과 세계의 관계를 자유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신과 세계의 관계는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초월적인 신론은 적어도 신학적인 사유를 위해서 공간적인 상을 유한한 자유의 개념으로 대체시킨다. 신적인 초월은 피조물이 그의 존재의 창조적인 근거와의 본질적인 통일성으로부터 일탈해 나가려는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그가 창조한 세계를 영원히 초월하는 자기 초월적인 자유로운 존재이고 세계 또한 그의 존재의 근거인 신과의 통일성으로부터 일탈해 나가는 자유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처럼 바르트와 틸리히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하늘 ‘위’에 또는 존재의 ‘깊이’속에 있다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은유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와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유자라는 것을 지시하는 용어들이다.
결국, 칼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을 강조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고, 말씀과 성령이 통일성(unity)을 이루는 주-객 통일성의 신학이고,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freedom)의 신학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점들 즉 하나님의 주도권, 주-객 통일성,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가 신학을 신학되게 하는 신학의 결정적인 차원들이다. “만약에 신학이라는 말이 그의 대상이 지니는 결정적인 차원 즉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free love),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charis)를 결여한다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신학이라는 말의 의미내용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에서 시작되고(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응답되고(주-객 통일성),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창조한다(자유)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