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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1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
(1)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아(창 1:26), 그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했었다. 인간이 부여받은 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질적 형상’(the natural image), '정치적 형상‘(the political image), '도덕적 형상’(the moral image)이 그것이다.
첫째로,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을 본받은 형상인 그의 ‘본질적 형상’에 있어서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 및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과 또한 이 세 가지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썩지 않는 영적인 존재로 피조되었다. 둘째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형상인 ‘정치적 형상’에 있어서 인간은 이 땅위의 만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존재로 피조되었다. 셋째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의와 진정한 거룩함’의 형상인 ‘도덕적 형상’으로 피조되어서, 하나님의 계명에 그 전인격으로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깨끗하여 죄도 없었고 악도 알지 못하였다.
(2) 이처럼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완전한 율법(롬 7:12)을 주시고, 이 율법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셨다(창 2:16-17).
(3)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여, 그의 조물주를 창조주로 알아보며, 사랑하며, 순종함으로써 섬길 수 있는 능력인 자유(liberty), 다른 말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를 부여하셨다. 이 선택의 자유라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지음 받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인간도 진흙이나 돌 조각 이상으로는 조물주를 섬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의로우며 거룩하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 때) 범죄하여 거룩하지 못하다든지 하시는 말씀이 무의미했을 것이다.
Ⅱ.2 원죄(原罪)
(1)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이 선택의 자유를 오용하여, 창조주의 뜻을 따르기 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했다(창 3:1-7).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도덕적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여 의와 거룩이 전혀 없는 완전한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본질적 형상’도 왜곡되어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그의 이해력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며(이것이 불신앙의 상태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 뜻(self-will)을 추구하며(이것이 교만의 상태다), 그의 감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따르게 되었다(이것이 육신의 정욕이다). 그리고 ‘정치적 형상’도 왜곡되었다. 여기서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어리석음과 불행이 시작되었다.
(2)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重生 전에는, 죄의 세력(the power of sin) 하에 종노릇하므로 그의 자유의지를 선한 쪽으로 쓰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웨슬리의 원죄론에 의하면, (1)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있어서 아담과 동일한 죄책 및 처벌에 해당되며, (2) 그래서 이 인간의 영혼, 정신, 모든 내적 및 외적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했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기질과 생각과 행동이 악하며, (3) 그의 본성 속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은 전적으로 철저히 악하다.” (4) 그리고 이 악한 상태는 가끔 중단되어 선한 상태로 바뀌다가 다시 악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동일하게 악하다. (5)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은 이성으로 신존재 증명은 할 수 있어도, 이성이나 그 이외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도 없고 사귈 수도 없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하게 됐을 때 피조물들을 보고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것들, 즉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배우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의 사귐은 없었던 것이다. ... 우리의 천연적 기능 가운데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 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 무신론자’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연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사귐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귀게 되는 것은 오로지 계시를 통해서이다. 웨슬리는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7절을 근거귀절로 인용한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6) 원죄 하의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 이성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성은, 아무리 계발하고 발전시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생산할 수 없다”. (7)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도 없다. (8) 그러나 이러한 무신론적 상태가 인간을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자연적 상태에서는 우상숭배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는 뜻이다. 이것이 교만이요, “모든 교만은 우상숭배다”. (9) 태어날 때부터 원죄 하에서 교만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의지’(self-will)라는 사단의 형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오직 교만만이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책을 져야하는 유일한 우상숭배의 형태가 아니다. 사탄은 그 자신의 형상을 자기의지라는 형태로 우리의 가슴에 인쳐 놓았다”. (10) 그리고 교만과 자기의지는 ‘세상사랑’ (love of the world)이라는 형태의 우상숭배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붙어 있는 악의 형태로서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지를 사랑하는 것이 천연적인 것처럼 세상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천연적인 것이다”. (11) 인간을 이 원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로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우리의 무신론을 하나님 자신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써 치유하신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특히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바로 나를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하는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증거와 확신(a divine evidence and conviction), 즉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무신론을 치유하신다”. 그렇다면, 이것은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는 칭의를 어떠한 제한도 없이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따라서 칭의에 의하여 인간은 (이 때 비로소!) 원죄로부터도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3) 웨슬리의 원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짓게 하는 세력’(the power of si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처음 인간 아담으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범죄하도록 유혹하기 위해 죄의 힘(the power of sin)을 발휘한 죄의 존재(the Being of sin)는 본래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의 일부로서, 그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타락한 천사들인데, 악을 세상에 초래한 최초의 범죄자요 죄의 창시자 “아침의 아들, 루시퍼”(사 14:12), 즉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요일 3:8)이다.
(4) 이제 아담이 이 범죄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는 순간에(창 3:1-6) 죄의 존재(the Being of sin)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은 이 죄짓게 하는 세력의 종노릇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 죄를 통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 왔다(롬 5:12). 그리하여 죄의 지배와 죽음의 지배가 온 인류에게 임하되 지속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5)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자신에게는 원초적인 저주가 내리고(창 3:16-19), 그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에 대한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피조물 전체가 고통받기 시작하였다(롬 8:19-22).
(6)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전가된다: (1) 우리의 몸은 가멸적이 되었다. (2)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3) 우리 모두는 죄악되고 악마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4)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롬 5:18, 엡 2:3).
(7)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하는 것은 악한 습관과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 죄의 존재와 세력의 지배 하에 종노릇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까닭에 그 기질과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본성상 악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죄짓게 하는 세력의 종노릇 하는 상태에서 절대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8) 모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부패라고 하는 이와 같은 원죄는 모든 자범죄의 뿌리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과 자기고집이 나오고, 여기서 허영, 야심, 탐욕, 정욕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분노, 증오, 악의, 복수, 선망, 질투, 시기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어리석음과 해로운 욕망이 나온다(롬 1:18-31).
Ⅱ.3 회개(悔改)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 자신의 원죄 하에 있는 상태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한 죽음에 해당되는 죄들을 스스로 범했음을 자인하고, 이 죄책의 대가를 스스로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씻기움을 받고, 그의 성령에 의하여 정결케 되는 것을 기대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죄인에게 칭의를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을 줄 수 있고, 성화를 통하여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안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마 11:28).
3.1. 선행(先行)하시는 은혜 (preventing or prevenient grace)
(1) 죄인인 인간을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선행하시는 은혜다. ‘선행하시는 은혜’라는 말의 뜻은 인간이 먼저 스스로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원죄 하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닌 듯이 착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오셔서 역사하심으로써(이와 같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먼저 사랑으로써 값없이 손수 행하시는 하나님의 役事를 ‘은혜’라고 부른다) 비로소 인간이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가?’ 하고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2)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뜻하지 않게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라도 느낌이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전혀 모르고 또는 무시하고 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최초로 동터오듯이 생긴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눈멀고 무딘 마음, 즉 하나님과 그 하시는 일을 전혀 모르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하여 건짐을 받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 단계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아오다가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또는 어떤 환경의 영향도 아니고, 또는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임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있게 되는 현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자연적 양심’, 즉 누구나 태어날 때 갖추고 태어나는 일종의 도덕적 기능이락 흔히 이해하나, 웨슬리는 이것을 명백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라고 말한다.
(3)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간에 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역사를 느끼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 응하며 나가면 전도라든가 교회라든가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응하지 않고 소위 이 ‘양심’의 빛, 정확히 말하여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역했을 때는, (다소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이다”.
(4) 그러나 양심의 현상이라 하는 이 ‘선행하시는 은혜’에 응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양심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양심적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하며 복음에 대하여 완악하여 질 수 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3.2.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
(1) 사람이 선행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이제 처음으로 막연하나마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시된 뜻, 특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율법을 알도록 하신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임(롬 7:12)을 알게 하시고, 이 율법을 지킬 때 약속하신 복을 이루시되(신 28:1-14), 이 율법을 어기면 정죄와 처벌이 임한다는 것(신 28:15-68)을 알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장 선한 마음과 최선의 능력으로도 결코 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없고, 그래서 결코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에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결국 율법으로는 죄를 알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롬 3:20)을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이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되며, 죄인을 불사르시는 하나님의 영벌의 처벌을 알게 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간절하게 되고, 그러나 내 힘으로는 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므로 나를 죄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분, 하나님에게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웨슬리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 즉 회개시키시는 은혜라고 부른다.
Ⅱ.4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
(1)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칭의와 중생 前에) 회개로 인도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와 같은 말씀에 기대를 걸게 된다. 즉, 믿음 받기를 사모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와 중생을 받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칭의하시는 은혜”라고 부른다.
(2) 칭의의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칭의하시는 이유: 만물의 창조와 보존과 섭리는 모두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므로, 만물 중의 하나인 인간 자신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안에 어떤 선이나 의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손수 행하신 것이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행위로써는 자신의 죄를 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 있는 “인간에게서 교만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3)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는 말씀은 인간의 행위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손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다.”
(4) 그런데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다음의 세가지 ‘소위 믿음’과는 구별된다: (a)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고, 선악간의 행위에 대하여 이성의 도덕을 따라 보상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이성종교의 믿음과 다르다. (b)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적으로는 인정하되, 그의 구속의 능력이 자신에게는 현실이 되지 못하는 머리로만 믿는 생명이 없는 믿음, 곧 그 당시 영국국교회의 구원관이 말하는 믿음과도 구별된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의 제자들의 믿음처럼 복음전파에 헌신적이고, 마귀를 제어하며, 치유의 능력도 있으나, 아직 십자가도 부활도 모르는 믿음, 즉 회심 이전에 웨슬리 자신이 오로지 헌신과 선행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던 그런 믿음과도 구별된다.
(5)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진리로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우리 안에 살아 계시도록 하신 바 우리의 속죄와 생명으로 알고 그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존하여 기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나의 자범죄들이 다 용서되었으며, 따라서 내가 하나님에게 화해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확신이다. 그 결과로 내가 우리의 ‘지혜요, 의요, 성화요, 구속’이신, 한마디로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에게 연합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6) 이 믿음을 통하여 오는 구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현재적 구원이다. 이 땅위에서 이미 지금 구원을 얻었다. (b)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자범죄로부터 해방이며(롬 3:25), 원죄로 인하여 나를 지배하고 있던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다(롬 6:2,18). (c)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 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d)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과 화해된 자녀로서(롬 5:1) 하나님의 영광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롬 5:2). (e) 이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범죄하지 않는다.
(7)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죄책의 용서와 형벌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부른다.
(8) 이렇게 칭의된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자이다. 나의 중심이 믿음의 상태로 변화되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죄없다고 인정하시며(칭의), 이와 동시에 역시 즉각적으로 나의 중심에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가 중생이다. 이와 같이 칭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형식면에서의 변화(나를 죄인으로 여기시던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시지 않게 된 것)이고, 거듭남은 칭의와 동시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면에서의 변화(죄의 세력에게 종노릇하던 내가 이제 내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칭의와 중생은 이제 내가 해방되어 벗어난 바의 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본격적인 성도의 삶(성화: 聖化)의 첫출발이다.
Ⅱ.5 거듭남(重生)
(1) 거듭난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a) 믿음, (b) 소망, (c) 사랑이 그것이다.
(2) 믿음은 소망과 사랑의 기본바탕이다. 이 믿음은 칭의 받을 때의 그 믿음과 같은 내용이나, 이제 중생하여 성화(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점점 더 죄를 이기며 거룩하여지는 것)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는 이 믿음은 이제 점점 더 자라가야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 믿음의 열매는 (a) 죄를 이기는 것과 (b) 하나님과의 화평 안에서 인생의 온갖 환란과 곤고를 이기는 평안이다.
(3) 소망은 (a) 예수님 재림 시에 주님을 직접 뵐 것을 기다리며 지금의 고난 앞에서 죄짓지 아니하고 자기를 성결케하는 것이요, (b) 중생한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기다리며, 받는 바 성령을 이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시험과 시련과 핍박 앞에서도 영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이다(벧전 1:3-12).
(4) 사랑은 먼저 (a)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나의 마음에 부으신 바 된 것을 깨달아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이요, (b)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바 이웃사랑이다.
(5)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그 중심에 이와 같은 믿음, 소망, 사랑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생겨서 생동적으로 운동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운동의 방식은 이렇다: 믿음을 가지면 죄를 용서받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담대함을 얻게 되고(롬 5:2; 히 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마지막에 일어날 심판을 기다리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이것이 소망이다. 이 소망이 있으면, 마지막 심판 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신 대로(계 22:14),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게 되는데, 말씀은 크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므로, 이것이 곧 사랑이다. 사랑하고 살면, 하나님 앞에 더욱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는 믿음을 더 크게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재림 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뵐 때 주님이 나에게 ‘충성된 종아, 네가 참 잘 하였도다’ 하고 칭찬하시리라는 소망을 더욱 크게 하고, 이 소망은 사랑을 더욱 북돋우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은 중생한 사람 속에서 생명력있는 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Ⅱ.6 성화(聖化)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
(1)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분간은 아무 시험도 느끼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는 한 동안, 즉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저들을 높은 곳에 두시고 죄의 세력이 건들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육신에 계실 동안 시험 당하신 것처럼, 그의 종들도 시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2) 중생한 사람들은 물론, 믿음 안에 굳건히 거하며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한, 외적인 죄들은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생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 즉,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느니라”(갈 5:1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라고 부르나, 또한 이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고전3:1)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이 믿음을 버리고 다시 중생 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그릇된 성질이나 소행이 있으니, 이런 것들과 싸워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 정복하라는 권고이다.
(3) 중생한 자들 안에 있는 이런 갈등의 원인은, (a) 죄의 세력은 마지막 심판 때 재림 주 예수의 발아래 멸망당하기까지는(고전15:23-28), 여전히 모든 인간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는 활동을 계속하기 때문이고, (b) 중생한 자의 믿음이 약해지면, 그때 이 죄의 세력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고, (c) 하나님께서 특별히 중생한 자들에게 죄의 세력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즉 믿음으로만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하여 죄의 세력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 때문이다(롬 7:13). 웨슬리는 중생한 자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세력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의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죄의 세력이 나를 더 이상 지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죄의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 죄의 세력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그 세력은 나에 대하여 점점 약해진다. 중생한 자는 계속 승리하면서 점점 강하여지고, 마침내는 그 죄의 세력을 쓰러뜨리고 그가 지배하던 곳을 완전히 정복한다.
(4) 중생한 자 안에 작용하는 죄의 세력의 활동방식은, 믿음이 약해지는 것, 교만, 자기고집, 세상사랑, 안목의 정욕이요, 정욕, 분노, 원망, 불평과 같은 내적인 죄들이다.
(5) 중생한 자가 이러한 내적인 죄를 정복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a) 중생한 자가 믿음이 약해지면 이러한 내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생한 자의 회개의 첫째 단계이다. (b) 이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중생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도 자신의 내적인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 전과는 달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가 자기 위에 임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를 위한 대언자로 가졌기 때문이다. (c) 이 회개의 세 번째 단계는 중생한 자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선을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내적인 죄에서 스스로 자신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회개할지라도 이런 회개로써 죄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아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죽이며 안과 밖의 죄를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매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성화의 점진적인 과정),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완전히 내어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칭의를 얻을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것들을 근절 시킬 수도 없다. ......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 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 하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진다. 그 때에만 그 악의 뿌리, 육신의 마음은 멸절된다”. 이런 두 번째 변화는 칭의와 중생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중생한 자가 회개하며, 동시에 나를 온전케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이 약속을 지금 여기서 이루신다는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세력을 매일같이 약화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이 물론 있으면서, 또한 주님이 손수 말씀으로 “깨끗하여져라” 하실 때 일어나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Ⅱ.7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
(1) 중생한 사람은 이와 같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감리교의 믿음이다.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치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 참는 사랑이 나의 기질과 언행심사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완전의 필연적인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한마디로 완전한 사랑,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사랑이다.
(2) 이 완전은 칭의 뒤에 가능하며, 우리가 죽기 이전에,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완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완전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완전한 신자라도 오류가 없을 수 없다.
(4) 완전에 도달하여도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향상하며, 전보다 더 빨리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있다.
(5) 이 완전은 잃어 질 수도 있다.
(6)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선행이 있다. 그런 과정 중에 위에 말한 즉각적인 변화, 즉 두 번째 변화들이 있고, 이것을 통하여 완전에 도달한다.
Ⅱ.8 영화(榮化=Glorification)
그리스도 재림 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이 세상은 폐하여지고,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거부하여 중생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산 사람들은 영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간 성도들은 약속된 영생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다.
이상의 여덟 가지 개념들이 웨슬리가 말하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 내용들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구원의 순서에 관한 말씀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갈수록 성경에 정확히 일치하는 가르침을 만들기 위하여 평생에 150여 편의 설교를 쓰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 자신이 갈수록 말씀과 성령에 정확히 순종하여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하나님이 명하고 인정하시는 방식에 정확히 일치되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고 지도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의 기독교적 지도력이 말씀에 일치하는 정확도를 더해가며 성숙한 방식이다.
(이선희, <웨슬리 신학의 탐구> “제11장 존 웨슬리의 지도력”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