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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심리학 6주차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토마스 오든의 입장” / 박노권 교수

6주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토마스 오든의 입장

1920년대에 임상목회교육(CPE)의 등장과 함께, 정신요법적 심리학들이 목회적 돌봄 특히 상담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다. 1950년대 초기 이후에는, 특히 일대일의 심리학 지향적인 상담모델에 대한 강조가 주요 개신교 목회적 돌봄에서 있어 왔는데, 이때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이 일반적인 구조를 제공했고, 또한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주요 자원으로 등장했다. 목회학 분야에 있어서, 이런 심리학의 영향은 대표적인 실천신학자인 힐트너, 와이즈, 오츠, 클라인벨 등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심리학과 신학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늘 제기되었는데, 70년대 이후의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현대 심리학의 도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전통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은 보다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학과 심리학과의 관계를 복음주의 전통에서 이해하고자 시도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드루(Drew) 대학에 있는 토마스 오든이다. 그의 처음의 입장은, 시카고 대학의 돈 브라우닝과 같이, 심리학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신학과 심리학간의 유비를 찾아보고자 시도했었다. 그러나 후에는, 공적 신학을 내세우며 심리학 쪽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간 브라우닝과 달리, 현대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보다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복음주의적 접근에 대한 분석은 현대후기 상황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를 정립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오든의 초기 입장 : 60-70년대

오든은 바르트의 정통적 신학과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심리학을 유비적으로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행위와 치료자의 행동 사이에는 상호 관련이 있음을 가정한다. 그러나 66년에 처음 썼던 그의 글과는 달리 78년에 다시 나온 그의 책 케리그마와 상담에서는 신학과 심리학과의 유비를 시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심리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신앙 유비라는 관점 아래에서 심리학을 이해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주장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행위(계시)

  치료자의 행위(명료화)

개인의 반응

(본래성을 향한 성장)

성육신(Incarnation)

공감적 이해(Empathetic

understanding)

자기이해의 증대(Increased

self-understanding)

하나님의 조화

(Divine congruence)

치료자의조화

(Therapeutic congruence)

자기 정체감의 증대

(Increased self-identity)

용서(Grace)

수용(Acceptance)

자기 수용의 증대

(Increased self-acceptance)

은총(Grace)

허용(Permissiveness)

자기 지향성의 증대

(Increased self-direction)

하나님의 사랑

(Divine grace)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타인에 대한 사랑의 증대

(Increased love of others)

* 예: 성육신과 공감적 이해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를 들어 설명한다면, 예수의 성육신과 상담자의 공감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이다. 오든에 따르면,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의 상황에 들어오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조건을 나누시면서 우리의 준거 구조를 취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든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빌2:5-7)과, 치료자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준거 구조에 놓고, 세상을 그가 인식하는 대로 인식하고, 그의 세계를 함께 나누고, 그래서 내담자가 스스로 수용되고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치료적 과정에는 유비적인 상호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비록 그런 유비적 추론이 상담에 관한 어떠한 전망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치료자는 내담자의 고통을 상상적으로 나누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는 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의 죄와 소외를 직접 담당하신다는 어떤 결정적인 점에서 이 유비에는 한계가 있음을 오든은 인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타자수용의 근거가 되는 자기-수용이라는 정신 치료법에서의 권고는 그것의 깊은 존재론적 뿌리를 기독교의 선포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에서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해 있다고 분명하게 선포한다. 즉, 자기 수용의 기초는 죄와 절망과 적개심에 의해 부서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수용이다. 이처럼 인간은 타락 속에서 구원받은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다. 루터의 말을 빌면,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고(simul justus et peccator), 죄가 가득차 있음에도 분명히 수용되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에 반해 치료자의 수용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 하면, 치료자 자신 역시 유한한 인간이므로 그 자신의 욕구, 투사, 왜곡 속에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성 속에 있으며 시간적 제약을 받고 있는 피조물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의 유한성이나 문화적인, 그리고 개인적 관점이라는 편협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든이 말하는 심리학과 신학의 핵심적인 유비 관계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적 신학 (바르트) 구조

심리학(로저스)의 구조

  인간의 곤경(죄)

  내사된 가치들에 의한 부조화, 또는 갈등

  구원의 사건(구속)

  (상담자)의 공감, 조화, 배려를 통한 자기 수용

  은혜안에서의 성장(본래성)

  경험에의 개방, 조화, 완전히 기능하는 인간

* 보충설명

여기에서 내담자가 상담자를 찾아올 때 부조화 혹은 갈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과 유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학생이 장래에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자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어쩌면 이것은 자신보다는 부모의 가치나 사회의 요구가 자신 안에 내면화되어 마치 자신의 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 그의 성적은 보통 이하여서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게 보일 때, 그 대학생은 이상적인 자기 개념과 그의 성적에서 보여주는 실제적인 자기 모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어, 자신감을 잃고 불안에 빠지며 드디어는 상담자를 찾아오게 된다.

이 때 초기의 내담자의 감정을 말한다면, 극단적으로 경직된 신념과 태도, 진실성의 결여, 자신의 감정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감각,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싫어함,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모든 부정적 감정들과 문제들의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담자의 진실성(조화), 내담자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 내담자의 타고난 독특성을 깨닫는 능력 등으로, 내담자는 차츰 방어의 벽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가면서 가면적인 겉모습 뒤에 숨겨진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상담이 진행되어 가면서, 내담자는 점점 더 완전하게 자신의 감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제 내담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볼 때 수치스럽고 부정적이어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던 자신의 감정들, 공포, 불안, 죄책, 미움, 분노 등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담자는 자아에 관련해서 서로 모순되고 혼동되는 감정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와 같이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구원과 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구원받은 이가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하는 것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내담자는 자신의 경험에 더 이상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더 개방적이 되어가며, 덜 방어적이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자유스런 결단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갈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더욱 신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심리학과 신학간에는 인간 내면 흐름에 대한 유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든은 이러한 유비를 설정하면서도, 로저스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으며, 구속에 대한 그의 교리는 개인적인 자기-화해로서 사회적 화해라든지 우주 전체에 대한 구속의 폭넓은 희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한다. 그리고 내사된 가치들(Introjected values, 부모나 사회에 의해서 즉 밖에서 내 안으로 주어지는 가치)을 로저스는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데, 이는 성숙한 양심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춘 개인적 자유인으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당한 도덕적 구조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당한 요구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사회적 통제라는 합법적인 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고전적 기독교 신앙의 회복

1980년대 논문인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함에서, 오든은 교회의 고전적 목회적 전통이 현대 심리학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어떻게 20세기에 크게 무시되어 왔는지를 심도 있게 논증한다. 예를 들면, 클라인벨, 힐트너, 웨인 오츠, 폴 뚜리니에 같은 20세기 목회학 저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오든은 그들이 어거스틴, 그레고리 교황, 죠지 허버트, 루터, 칼빈, 제레미 테일러 같은 전통적인 저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프로이드, 융, 로저스, 프롬, 에릭 번 같은 현대 심리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표1. 대표적인 19세기의 목회신학자들: 고전적 목회전통에 대한 언급 횟수

 

shedd

(1879)

Fairbairn

(1875)

Hoppin

(1884)

Bridges

(1829)

Koestlin

(1895)

Gladden

(1891)

Kidder

(1871)

total

(합계)

Cyprian

 

1

1

6

2

   

1

11

Tertullian

2

1

2

1

1

 

 

7

Chrysostom

1

2

6

13

6

3

2

33

Augustine

9

1

1

37

2

2

1

53

Gregory

   

 

1

6

2

1

 

10

Luther

6

1

4

22

11

5

1

50

Calvin

8

1

1

25

3

2

1

41

Baxter

8

7

2

37

3

3

1

61

Herbert

1

1

4

19

1

4

1

31

Taylor

2

1

3

7

2

2

   

17

Total(합계)

37

16

25

173

33

22

8

314

표2. 대표적인 20세기의 목회신학자들: 목회적 돌봄의 고전적 자료에 대한 언급 횟수

 

Hiltner

Clinebell

Oates

Wise

Tournier

Stollberg

Nuttin

Total

Cyprian

    0

     0

     0

     0

     0

     0

     0

    0

Tertullian

    0

     0

     0

     0

     0

     0

     0

    0

Chrysostom

    0

     0

     0

     0

     0

     0

     0

    0

Augustine

    0

     0

     0

     0

     0

     0

     0

    0

Gregory

    0

     0

     0

     0

     0

     0

     0

    0

Luther

    0

     0

     0

     0

     0

     0

     0

    0

Calvin

    0

     0

     0

     0

     0

     0

     0

    0

Herbert

    0

     0

     0

     0

     0

     0

     0

    0

Baxter

    0

     0

     0

     0

     0

     0

     0

    0

Taylor

    0

     0

     0

     0

     0

     0

     0

    0

Total(합계)

    0

     0

     0

     0

     0

     0

     0

    0

표3. 대표적인 20세기의 목회신학자들: 현대 심리학자들에 대한 언급 횟수

 

Hiltner

Clinebell

Oates

Wise

Tournier

Stollberg

Nuttin

Total

Freud

    8

     8

    9

     1

    9

     5

    69

    109

Jung

   10

     6

    1

     0

   13

     3

    12

     45

Rogers

   19

    18

    4

     6

    0

    26

    28

    101

Fromm

    8

     6

    0

     9

    0

     1

     3

     27

Sullivan

    5

     4

    5

     5

    0

     1

     2

     22

Berne

    0

    19

    6

     0

    0

     1

     0

     26

Total(합계)

   50

    61

   25

    21

   22

    37   

   114

    330

이 표들을 통하여 오든은 오늘날의 목회신학이 얼마나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떠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든은 그가 60-70년대에 그토록 빠져있던 현대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고전적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빠지게 된 원인은 현대성(modernity)에 대한 그의 환멸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현대성이란 전(前)현대적 지혜의 경멸, 절대화된 도덕 상대주의, 청소년의 부모 돌봄 거절, 자율적 개인주의의 이념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한 경외적인 복종, 진리에 대한 질문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과학적 경험주의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흐름을 말한다.

특별히 그는 혁신을 주장하는 현대성의 경향--새 것은 좋은 것이고, 더 새 것은 더욱 좋은 것이고, 가장 새 것은 가장 좋은 것(New is good, newer is better, and newest is best)--을 공격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은 도덕적 하락의 극적 운동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속 치료의 새로운 물결이 등장할 때마다 휩쓸렸던 운동 신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오든은 어떤 운동들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합한 표현인지를 주의 깊게 식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20여년간 신학과 심리학간의 다리를 세우는 역할을 하던 오든은 교통의 왕래가 다리 위에서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즉, 신학은 심리학의 말만 듣는 자였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도덕적 힘과 날카로운 지혜, 꿰뚫는 적절성을 가지고 있는 처음 17세기 동안의 목회적 돌봄의 전통적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현대 세계의 실제적 상황 한가운데서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옛 정통주의를 보여주려고 시도하는현대-이후 정통주의(Post-modern Orthodox)를 제시한다.

* 오든의 기본 입장: Post-modern Orthodox

오든은 신정통주의는 실패했고, 근본주의는 고전적 기독교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 앞에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는 틸리히, 바르트, R. 니버, 브룬너, 불트만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 이전의 전통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현대를 수용하려는 개혁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자와 카리스마주의자들은 현대성에 의한 부패의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은 정통주의이지만 고전적 신앙을 회복한 현대-이후 정통주의에 필요한 날카로움을 결핍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현대-이전의 정통주의와 다른 것은 그것의 본질적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대성의 실패한 약속에 대한 환멸의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든은 목회적 돌봄에 대한 고전적 견해가 오늘날 목회자의 목회 실천을 위한 규범적 교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적 뿌리를 상실하고 현대 심리학의 이론에만 의지하려는 현대 목회적 돌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전적 전통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고전적 목회학 저자들은 성서적-신학적 근거와 목회 활동사이에 틈을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든은 그의 책,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적 전통에서 영혼의 돌봄), 에서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를 신중하게 취급한다. 그레고리 연구를 통해서 그는 행동수정기술, 무의식의 분석, 내담자 중심치료의 세 가지 가정(공감, 조화, 무조건적 적극적 배려) 등의 현대 심리학 이론들이 이미 그레고리의 작업 안에 예시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즉, 상담과 심리치료의 실천과 이론적 성향이 고전적 목회전통안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전통신앙 노선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력을 지닌 이러한 고전적 목회전통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통적 기독교를 위한 우리의 비굴한 변증을 그만둘 때이다. 대신에, 성서 본문과 초대 기독교 저자들에게 진지하게 귀 기울일 때이다. 이제는 우리의 깨어지고 혼돈된 현대 상황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어떻게 고전적 기독교 스스로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나를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전적이며 에큐메닉칼한 지혜의 근거 위에서 예수 역사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이전 정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교리적으로, 그리고 깊은 신앙심으로 연구하나, 역사 비평학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성서 비평주의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연구했으나, 심한 환원적 자연주의적 철학적 가정과 전제를 갖고 연구했다고 비판하면서, 현대-이후 정통주의는 더 이상 현대성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대성의 급격한 퇴락 한가운데서 사도적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든은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목회적 돌봄과 상담의 분야에서, 현대 심리학으로부터 배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고전적 기독교 유산을 진지하게 검토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돌이키게 하는데 가장 앞선 학자라고 할 수 있다.

3.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오든은 현대의 과학적 통찰력과 신중하게 대화를 취하면서도,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조심스러워하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는 신앙이 현대 세계와 직면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이 안에서 기독교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히려 기독교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서적 전통을 세속적 해석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상호관련 방법론을 비판한다. 이 방법론은 기독교 전통을 더욱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보기 때문에, 오든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본문이 기독교인에게 규범이며, 현대 신학의 형태와 내용에 대한 어떤 토의에서도 규범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고자 한다.

1) 고전적 기독교에 대한 강조: 다원주의에서 내 것에 대한 중요성 인식 필요

오든은 지금이야말로 고전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교차 문화적 다원주의, 혼합주의, 그리고 광대한 역사적 변천 시대에서, 초기 기독교인으로부터 배운 전통을 계속되는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왜곡 없이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퇴색시킬 해석에 대해 방어할 수 있을까?이다. 오든에 따르면, 정통주의는 현재 의견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에큐메니칼 회의에 의해 규정되고 반복적으로 재확인 되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역사 속에 나타나는 현대성에 반복적으로 도전을 하고 변형시켜왔던 사도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2) 지나친 현대성 추구의 위험

심지어 오든은 현대성을 지나치게 수용하려고 시도하는 신학적 운동을 이단으로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단의 개념은 기독교 전통에서 일찍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기-선택(이단을 뜻하는 heresy란 말은 hairein 취하는 것haireisthai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것에서 옴)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에큐메니칼한 일치에 의해 해석된 사도적 가르침에 반대되는, 대안적인 자기 선택의 견해이다. 이단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이외의 다른 가르침으로 이것은 교회의 연합과 계속성의 붕괴를 가져온다. 여기서 오든은, 이단은 교회 밖에서 오는 도전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어떤 부분적 기독교 진리들이 너무 강조됨으로 말미암아, 일치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도적 정경적 전통들 안에서 발견되는 균형과 온전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온다라고 언급한다. 예를 들면, Ebionism은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그의 신성을 희생하고, 가현론(Docetism)은 그의 신적 기원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그의 인간성과 실제 고통에 대해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에 대한 강조

따라서, 현대 심리학이 제기하는 심리 환원주의적 방법의 한계--예수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심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연구의 출발점으로 참으로 신이요 인간이신 예수를 인정하는 후기-비판적 고전적 기독교 방법이 필요함을 오든은 제시한다. 신인(神人)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전제 없이 예수의 역사 연구를 시도한다는 것은 마치 재료 없이 조각을 시도하거나 숫자를 사용하지 않고 수학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고 오든은 주장한다.

심리학 이론들이나 또는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오든에게 있어서 분명해 보인다. 오든에 따르면, 오늘날의 새로운 환경처럼 보이는 다원주의는 결코 후기 오늘 시대에 있어서만 독특하다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라, 이미 신약시대에도 삶의 구조의 일부분이었다. 여기에서 오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 전통적 신앙은 전 우주의 창조자시며 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확증한다. 무한이 유한이 되었다. 보편성이 특별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주장은 일반적 인간 경험에 근거를 둔 형이상학적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에서 얻은 하나의 신비적 통찰력이 아니다. 복음의 개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기독교 안의 삼위일체 신론은 (유대주의나 이슬람에 있어서의) 단순한 일신론이나(힌두이즘이나 불교의 소극적 무신론주의에 있어서처럼) 소극적 신성과 쉽게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물론 그도 다른 종교들(이슬람, 불교, 힌두이즘등)과의 계속되는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에게 예수에 대해 계속 진술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오심의 우주적 성격에 대한 증언을 부드럽게 하거나, 세상의 생명이요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약의 확증을 다소 우호적으로 돌려서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그의 예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즉 예수의 복음을 희석시킴을 출발점으로 할 수 없음을 오든은 강력히 주장한다.

오든에게 있어서, 전통의 중심은 그리스도안의 삶이다. 그것은 현 교회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살아 계신 주님의 부활한 임재이다. 그는 만일 기독교에 대한 예수의 중심적 기여가 그의 도덕적 교훈이나, (어떤 자유주의 형태가 가르치는 것처럼) 종교적 통찰력이나, 또는 (어떤 종교사회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가시적 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불교가 구조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오든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중요성을 그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 조직적 능력이나 또는 그 자신의 과거의 삶의 차원에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공동체의 생명력 있는 중심으로서 예수의 현재 삶에 초점을 둔다.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효과적인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더욱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든은 전통적 신앙에 대해 철저히 위탁하면서, 심리학에 의존하려는 현대의 목회신학적 경향을 비판한다. 이것은 그의 책 Pastoral Theology(목회신학)에서 목회적 돌봄은 철저히 전통유산 즉 성만찬, 설교, 기도, 심방, 성경공부 등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는 주장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목회적 돌봄 시리즈인 Crisis Ministry(위기 목회, 1986), Becoming a Minister(목사가 됨, 1987),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 전통에서의 목회적 돌봄, 1987), Ministry Through Word and Sacrament(말씀과 성례를 통한 목회, 1989), Pastoral Counsel(목회상담, 1989) 등에서도 전혀 현대 심리학에 대한 언급이나 심리학자를 인용함이 없이 오직 고대 전통에서의 문헌--현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심리요법의 많은 가정들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만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평가

다원주의 상황에서, 크리스챤이 비판적인 대화 없이 다른 견해들을 잘못되거나 열등하다고 배척하는 배타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좀 더 진지하자면,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분명한 것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이 기독교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우닝과 같이 비판적 대화를 갖는 진지함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보나, 또 한편 내 것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주장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오든은 비록 세속적 가치 특히 심리학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준다는 약점이 있지만, 기독교의 전통을 우선하는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영혼 돌봄은 전인적인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고, 정신 요법은 정신적 건전함과 육체적 건강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여기에서 심리학적 인간 이해는 인간 내면의 흐름--경제나 정치의 흐름이 있듯이 정신의 흐름이라는 자연적인 질서--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줌으로 크게 공헌하였으나,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을 약화시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브라우닝은 윤리-종교적 영향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차원에서 기독교의 신앙의 의미를 찾으려고 함으로써 신학과 심리학간의 깊이 있는 대화를 끌어냈으나, 이것이 기독론의 약화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든은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윤리적?심리적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의 전통이 무엇보다 먼저 대화의 출발점이 되야함을 호소한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하에서는, 브라우닝처럼 동등한 차원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희석시키기보다는, 오든과 같은 신학적 입장을 취하되 무조건적 배척이 아니라, 브라우닝이 보여준 것처럼 심리학의 철학적 배경을 철저히 비판하는 안목을 갖으면서, 전통적 신학의 맥락에 맞게 보조 수단으로 심리학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