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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심리학 5주차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돈 브라우닝의 입장” / 박노권 교수

5주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돈 브라우닝의 입장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심리학은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 특히 목회상담학을 중심으로한 실천신학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심리학을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미국의 실천신학계에서 크게 환영하며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겠다. 실제로 목사뿐만 아니라 신부나 랍비등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직업교육에서 많은 양의 정신요법적 심리학의 이론들을, 때로는 신학적 관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반성함이 없이, 배우며 받아 들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점점 다원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전통적인 신앙과 심리학의 이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심리학이 신학의 인간이해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심리학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 또 한편 거의 심리학에 의존하여 신학을 풀어가고자 하는 입장 등 다양한 형태가 있어 왔으나, 이들 대부분은 심리학이 신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 또는 아니냐 하는 응용론적 차원에서 이 둘간의 대화를 시도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현대 심리학의 등장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심리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복잡한 작품인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러한 심리학적 통찰력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그런가하면 심리학을 배척하는 입장들도 있는데, 이들은 심리학이 은연중에 교회와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위협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불안과 절망을 해결할 만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심리학으로 눈을 돌리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기독교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심리학에서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이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은 신앙과 더 진지한 성경연구, 더 많은 기도와 헌신이지 절대로 심리요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조언을 듣고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같은 딜레마에 빠질 수가 있다. 이들은 상담을 청해 오는 사람들의 심각한 정서적 문제들을 대할 때마다 인성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더 나은 상담 원리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며, 단순하게 영적인 대답만 해주는 것으로는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성경 역시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는 것도 이미 이들은 알고 있다. 따라서 만약 심리학으로 기울게 된다면 은연중에 성경이 부적합하다고 인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으로 자신은 하나님과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제 그 다양한 입장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1) 서로 대립한다는 입장

기독교와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호환될 수 없으며 서로 대화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 세속적 입장에서 보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만이 진리를 찾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며, 계시된 종교는 과학적 심리학의 견해들과 필연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기독교의 입장이 있는데, 아마 제이 아담스(J. Adams)가 이 입장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프로이드, 로저스, 또는 스키너 같이 성서와 기독교를 혐오하는 자들이 고통받고 죄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입장이다.

대립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와 심리학을 종합하는데 반대하는 이유는 보통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모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스스로 선포하고 있다(딤후3:16-17). 따라서 인간의 필요를 보다 잘 만족시키기 위하여 성경 이외의 어떤 것(심리학 같은 것)을 연구할 수 있다거나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종을 준비시키는데 불충분하다고 단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2) 이 세상에는 상담의 두 가지 원천 즉 하나님의 것과 사탄의 것이 있다고 믿으며, 성경의 입장은, 성경적이 아니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상담은 사탄적인 것이다.

(3) 심리학은 나쁜 과학이다. 우리들이 만일 진리를 받아드려야만 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우리들이 실제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확신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인간들의 헛된 사색들과 철학들은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견주어 볼 때 아무런 쓸모가 없다.

(4) 종합화하는 것은 종교적 혼합주의이다. 이것은 심리학을 하나의 종교적인 시스템이라고 가정하고, 이 둘을 혼합시켜 또 다른 잡종체를 만들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평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을 할 수도 있다.

(1)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을 인정한다. 동시에 우리들은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충족하게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성경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리스챤들은 성경이 스스로 선포하는 권위와 능력에 대해 그대로 용기 있게 주장하며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필요와 관련된 모든 면에서 유일하고도 모든 면에서 충족한 것이라고 선포되지 않음을 알아야한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 방법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으며, 농사짓는 비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을 하는데 필수적인 기초가 되며 궁극적인 대답들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상담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충분한 지침서는 아닌 것이다.

(2) 우리들은 하나님의 조언을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조언이 어떤 크리스챤의 조언과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고, 사탄의 조언이 비크리스챤의 조언과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타락이 가능하며, 타락하였고,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학, 전승되어온 신앙고백들, 그리고 우리의 기도들도 때때로 눈에 띄는 오류들과 불완전함이 있을 수 있다.

또 한편 크리스챤들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때로 불신자들의 안목 있는 저술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1장은 자신의 본질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들을 불신자들에까지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3) 물론 심리학의 주장들 중에는 기독교적 사고와 맞지 않는 것들도 있고, 때론 쓸모 없는 주장들이나 조잡한 내용들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기독교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책에서도 발견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성경의 계시는 완전하나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므로). 심리학은 다양한 영역을 다루므로 일관성이 없을 수 있으나,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4) 사실 종합화를 한다고 어떤 크리스챤 심리학자들은 조잡한 성경해석과 무리한 신학적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바람직한 통합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긍정적인 통합의 입장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2) 신학이 심리학에 대해 종속되는 입장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부정하고 종교에 대한 인본주의, 자연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추구하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서있는 사람들은 과학적 주장과 이성을 성경의 권위보다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구속적 측면보다 보편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랑, 자유, 책임, 그와 유사한 미덕들에 초점을 두는 반면 성경에서 강조하는 죄, 구원의 필요성 등은 뒷전에 둔다. 이런 후자의 개념들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들로서 바람직한 인간 이해에는 필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상징하는 것은 무언가 특별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인 인간으로 볼 수는 있지만, 핵심 사항에 있어서 기독교는 가치 있는 삶의 진리를 찾게 해주는 여러 길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신학과 심리학을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연계하려는 다양한 시도 속에는 종속적인 태도가 많이 반영되는데, 융의 심리학에 영향을 받은 성공회 사제 샌포드(John A. Sanford)의 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정신 속에 이렇듯 힘이 넘치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꿈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했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 꿈은 정신의 내적 힘을 나타낸다. 즉 꿈은 우리를 이 힘의 중심점과 연결시켜 주며, 우리는 그 힘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의 지시를 받게 된다. 요컨대 꿈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종교 발달의 필연적 요소들을 이해하게 되며, 심리학과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교리를 더욱 흥미롭게 비교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샌포드가 이에 앞서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과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자아 사이의 의미상 차이점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고는 해도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개념이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과는 상당히 구별된다. 틸리히(P. Tillich)와 같이 하나님을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란 인간의 내적 자아가 투영된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샌포드의 생각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인간 내면의 불일치가 인격화된 형태로 인간의 외면으로 투사되어, 남신, 여신, 귀신, 유령 등 여러 가지 신을 믿는 다신론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유일신 사상은 하나님을 객관적 실재로 보는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한층 통일된 인간의 내적인 힘들이 외적으로 표현된 형태라고 하였다.

종속적 입장을 고수하는 또 다른 인물로는 힐트너(S. Hiltn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에는 본연의영역이 있다고 하는 견해는 자유의 그릇된 남용의 의미와는 또 다른 것으로, 회개와 건전한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와 인간의 내부에는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역사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서 현재까지 사람들은 자신과 부분적으로 얽혀 있는 사회적, 역사적 힘에 의해 행동의 영향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 죄가 본래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때 이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확신을 얻게 된다면 죄를 비난받아 마땅한 것, 특히 개인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는 개념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힐트너는 신학적, 심리학적 개념을 연계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원죄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심리학적 신념에 더욱 완벽하게 들어맞는 환경적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서 원죄 개념이 아담과 하와의 죄가 후손들에게 개인적으로 전가된다는 의미는 사라지고 사회의 조절 과정으로만 표현되었다. 죄가 사회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종종 우리들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죄를 많이 짓는 것이 사실이지만, 힐트너의 분석은 자신의 심리학 체계에 적합하도록 성경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의 언급 속에서 예리한 통찰들을 많이 얻을 수는 있으나 그의 방식은 성경을 심리학에 속한 문헌으로 취급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맥락에서 출발을 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 내용은 세속적인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성경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학과 심리학 사이에 의미 깊은 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은 보이지만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희생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즉 성경(또는 신학)을 심리학에 국한시키고 계시와 초자연적 특성을 배제하게 될 때, 기독교의 독특한 특성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서로의 대화라는 것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룬다는 입장

심리학은 과학으로, 종교는 개인적 경험이나 헌신으로 간주되어 서로의 영역이 다르므로 접촉하지 않으려는 입장이다. 이때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또는 신학)과 심리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특별히 중복될만한 중요 사항이 거의 없다고 보는 고립적 입장이다. 또 하나는 서로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으로, 가령 초자아를 양심과 비교하고, 이드는 탐욕, 옛본성 등에 대비하며, 성경과 심리학의 일부 개념들이 상호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심리학의 저변에 있는 공통원리들을 찾아보는 심도 있는 대화가 아니라 단지 두 개의 구별되는 개념을 정렬시키는 정도이다.

고립적인 입장의 예를 들면, 인정받은 실험심리학자인 지브스(Malcolm Jeeves)는 심리학과 신학은 명의 서로 다른 차원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리학의 엄격한 실험적 과학관을 취하면서, 심리학의 설명들은 경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진실이나 가치에 대하여 이렇게나 저렇게 결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상관이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밀러드 샐(Milard Sall)은 정신분석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분석학적 자료와 성경을 비교해 보자.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17:9)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옛사람”(롬6:6)과 신학자들이 일컫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본성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옛 본성은 심리학의 통제되지 않은 이드의 충동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은 이러한 충동으로 야기된 투쟁이 갈수록 약화된다고 묘사하였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18,24) 바울은 때때로 그의 자아가 이러한 이드적인 충동에 휩싸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회심은 사람의 욕망을 변화시키지만 유혹을 제거해 줄 수는 없다. 유혹에 직면한 자아는 최고의 초자아와 같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대항할 힘을 얻게 되므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이와 같이 샐은 심리학에서 이드는 바울의 에 비교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초자아와 대비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용은 원리나 개념적 차원의 만남을 가능케 할 만한 포괄적 이해가 부족하며, 자칫 성경을 심리학적으로 부정확하게 이해하거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표면적으로만 심리학을 수용할 수도 있다. 상담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려는 아담스가 이런 입장을 거절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할 경우에는 기독교 심리학이 단순히 일개 세속 심리학 이론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긍정적인 통합의 입장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어느 시대에서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이해를 쌓아 갔다. 성경의 계시가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에 비해 인간의 신학적 이해는 계속 발전해 갔는데, 예를 들어, 니케아 종교회의(A.D.325)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형성되었고, 칼케돈 회의(A.D.451)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신이었다는 사실을 정립하게 되었다. 또 인간의 구원에 대한 교리 문제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공론 끝에 오늘날에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정통적인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정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는 것은 가정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고 이 문제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수많은 해결책이 등장하고 있는 최근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신학적 통찰이 사회적 관심도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위에 언급한 것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신의 세계와 자신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당면 문제에 대해 깊고 새로운 이해를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리학이 기독교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본다는 것은 상당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인본주의적 심리학이 자아 존중자아 수용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존엄이나 가치에 대해 인식하기 위해 인간의 부패, 교만, 자아애와 같은 개념이 암시하고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심리학과 집단심리학이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가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신학과 심리학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볼 때 이 둘의 관계를 바람직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통합의 입장에서, 신학과 심리학이 대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에서 발견된 진리도 역시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 상충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학문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와 창조 세계를 통한 일반 계시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므로 성경과 심리학적 발견 사이에 일치점이 있을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브라우닝은 오래 전에, 한 유한한 인간이 인간을 치유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치유한다는 큰 존재 구조 안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로 서로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돈 브라우닝이 보는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오늘날 다원주의 하에서는 심리학과 신학이 보다 깊은 차원에서 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데, 이것은 돈 브라우닝이 제시하는 그의 수정된 상호연결 방법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 인간 경험(특히 심리학)과 기독교 전통(신학)을 상호 비판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려는 작업으로, 오늘날 신학 특히 실천신학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1) 신학과 심리학은 서로 갈등하지 않는가?

현대심리학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이며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왔다. 사실 현대심리학이 과학적 지식인 한에 있어서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신학의 주장들과 갈등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이반 바버는 이런 견해를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대한 매력적인 해결책이다; 이 두 분야는 그들이 만일 전적으로 다른 기능을 한다면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 과학적 언어의 기능은 자연에 대한 예측이고 통제이다; 종교적 언어의 기능은 자기 위탁, 윤리적 헌신, 그리고 실존적 삶의 방향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대부분의 뛰어난 심리학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기술적 가치가 무엇이든 지간에 그것에 덧붙여서, 긍정적인 문화 즉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 상징체계와 윤리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심리학 특히 임상심리학은 종교적, 윤리적, 그리고 과학적 언어들을 포함하는 혼합된 분야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을 과학으로서 본다. 그러나 이것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해볼 때, 그들 자신이나 일반인들이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종교적, 도덕적 지평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브라우닝은 과학적이고 서술적인 심리학의 한계를 넘어서 심리학의 내면세계를 밝혀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그는 심리학을 과학적 또는 임상학적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성격과 우리가 사는 방법에 영향을 주는 실천적 도덕 체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치료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유사종교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심리학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차원은 인식되고 비판적 분석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심리학과 신학은 별개의 것을 다루는 분야라기보다는, 세계관과 윤리관이라는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갈등할 수 있으며, 서로 상호간의 비판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대화의 기준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즉 심리학이 비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단순한 기술적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에 근거해서 각자 안에 있는 세계관과 윤리관을 비교함으로 어느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 필요성

왜 심리학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윤리적 차원을 브라우닝은 밝히려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하려는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 브라우닝의 가장 큰 관심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의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인데, 현대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덕 규범(윤리)의 결핍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상담에서 많이 강조되는 사랑, 수용, 용서 없이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없으나, 또 한편으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얘기하는 도덕 규범이 없다면 사람은 더 깊은 정신적 혼란으로 인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최선인가를 알고 싶어 하나 오히려 도덕 규범에 혼란을 갖게 되는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전통과 세속가치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전통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규범이 자동적으로 오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실천적인 도덕 규범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전통(신학)과 세속 문화(특히 심리학)와의 상호 비판적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화를 통해,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권위를 갖고 강제로 강요할 때 오히려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하게 되는 권위주의의 폐해는 오늘날 심리학의 도움으로 잘 알려졌으므로), 어떻게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세울 것인가를 그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빗 트레이시를 따르면서, 브라우닝은 그의 방법을 수정된 상호연결방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틸리히의 상호연결방법--심리학 같은 세속 분야에서 제기되는 실존적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종교적 전통으로 연결시키는 방법--과 달리, 질문들뿐만이 아니라 답들도 심리학에 의해 제시된다고 봄으로, 상호연결방법(실존은 질문하고 계시는 답을 한다는 일방적인 방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은 일반 세속문화(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예술 등) 중에서도 특히 심리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심리학이 현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 리프의 정신요법 분야들이 현대 개인들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영향이라는 주장을 포용한다. 미국이라는 상황에서, 오늘날 삶의 복잡성, 종교적 언어의 상대적 약화, 우리 세계 안에 넘치는 의미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심리학이 점점 종교의 영역을 차지해 가고 있음을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의 기술적 배후에 있는 철학들과 기독교 신앙과의 상호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더 나아가 비기독교인인 현대인에게도)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제시하고 하고자 하는데, 구체적으로 이런 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심리학이 함축적으로 갖고 있는 은유와 윤리들이 무엇이라고 분석하는가?

3) 심리학에 대한 분석

많은 현대 임상심리학 안에 감추어져있는 은유와 윤리의 차원들을 밝혀내고, 이를 재해석된 신학적 명제들과 대비하는 작업을 브라우닝은 그의 책 종교사상과 현대 심리학에서 체계적으로 시도한다. 여기서는 범위를 한정해서 프로이드와 인본주의 심리학에 나타나는 은유와 윤리의 차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1) 프로이드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우선적으로 본능의 본질에 관한 이론 위에 세워졌다. 그의 본능 이론의 변화 과정은 전 생애를 걸쳐서 일어났는데, 처음 그의 임상작업에서 나오게 된 본능 이론은 자아 본능과 성적 본능의 대비였다. 그러다가 나르시즘에 관한 연구를 한 다음에는,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 본능을 대비해서 말하다가, 최종적으로 쾌락원리를 넘어서에서, 본능 이론의 완성으로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의 두 부류로 나누었다.

프로이드의 삶과 죽음본능 이론은 그의 임상이론에서 실제적인 문제들, 즉 반복 강박행위의 문제(왜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파괴적인 증상들을 반복하는가), 퇴행의 문제 등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그는 죽음 본능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생명은 생명 없는 상태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삶의 본능에 굴복하면 새생명의 생산을 통하여 자신을 재생산하고 보존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삶과 죽음의 본능 이론은 모든 생물학적 생명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 행동에 영향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궁극성의 은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형이상학, 또는 적어도 어떤 세계관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얼리가 지적했듯이, 모든 신앙과 모든 종교적 우주론의 파괴자인 프로이드는 그의 정신분석을 지지할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것이다. 즉, 유대교와 기독교가 오디프스 갈등과 그와 연관된 신경증적 억압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 후에, 프로이드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대안적인 그림을 발전시킨 것이다. 서구 종교적 전통의 하나님--유일신론, 윤리적 주장들, 구속적 행위들--은 단지 젊은 아들들이 최초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난 다음 갖게된 원시적인 두려움과 사랑의 투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후에, 그는 경험의 궁극적 맥락을 보여줄 또다른 은유의 체계--삶과 죽음의 본능 은유--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윤리 차원에 있어서 프로이드는 파괴적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태도를 취한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하는 사람은 필립 리프이다. 프로이드의 윤리관에 대해서, 리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프로이드는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만일 이것이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만일 문제가 되는 윤리를 이행할 능력을 인간이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떤 윤리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프로이드는 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브라우닝도 동의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다른 사람, 특별히 보다 큰 사회, 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자신의 리비도 에너지를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과 그 불만의 전 주제이기도 하다. 즉, 문화는 우리 리비도 에너지의 자연적인 목표를 고갈시키는 희생 위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드가 이웃사랑이나 아가페가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은 죽음 본능의 역동성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리비도와 성적 본능의 나르시스적 방법에 대한 견지에서도 불가능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함축적인 윤리는 리프의 말처럼 일종의 철학적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묘사될 수 있다.

(2) 인본주의 심리학

인본주의 심리학의 문화적 충격은 정신분석보다 더욱 광대하였다. 폴 비츠는 그의 책 종교로서의 심리학: 자아 숭배의 비의 종교에서 인본주의 심리학은 새로운 20세기의 종교--헌신의 근본적인 대상이 자아 바로 그 자체가 되는 종교--라고까지 말한다.

인본주의는 모든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내적 가능성의 실현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칼 로저스는 그의 책 내담자 중심 요법에서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한가지 추구하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실현화하고 유지하고 또한 고양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차별성과 자율성과 자기 책임 안에서 성장하려는 강한 내적 추진력을 사람들은 어디서나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점차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성숙성을 추구하는 역량과 성향이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자아실현에의 욕구는 삶의 주요한 동기가 되며, 모든 심리치료법들이 인정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명백히 보여지는 신장, 자율화, 발전, 성숙에의 강한 충동이며, 동시에 유기체의 모든 능력을 표출 내지는 발현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은 자아실현이 무도덕적 선(non-moral good)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선하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말하지만, 브라우닝은 자아실현이 도덕적인 기능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 자신을 실현화시키면 자동적으로 그 자신을 실현화시키려는 타인과 조화를 이룬다고 낙관적으로 보는데, 여기에서 자아실현은 내가 우선적인 관심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성격을 띠게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리의 차원에서 보여지는 이기주의는 조화(harmony)의 은유를 전제로 한다. 나의 자아실현은 자동적으로 남의 자아실현을 돕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이 조화로운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화의 은유가 비록 인본주의 심리학 안에서 직접적으로 공표 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함축하는 시적 이미지는 도처에 있다고 브라우닝은 보고있다.

3) 심리학과 신학의 상호 영향

위에서 분석해 본 이런 함축적인 은유들과 윤리들은 이미 심리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즉, 우리의 새로운 과학적 신화들은, 그들이 우리의 불안에 대답을 주려고 시도하고, 세상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를 제공하고, 삶의 가치, 죽음의 본질,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근거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를 형성하는 한에 있어서, 종교적 사고의 현대적 형태들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라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무엇으로서 종교와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심리학이 신학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신학은 심리학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브라우닝이 분석한 것을 정리해 본다.

(1) 신학에 대한 심리학의 영향

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로, 그가 사랑 받고 있다는 관계의 경험 안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솟아오르는 존경, 수용, 그리고 자신을 좋아함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 자신을 사랑스럽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부드러움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실현화하기 시작할 수 있고, 그가 되고 싶어하는 더욱 사회화된 자아가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그 자신과 행동을 재조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은 도덕성의 핵심으로서 상호성에 대해, 그리고 아가페와 에로스의 관계에 대해 더욱 적절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근본적인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신학은 말을 하지만,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특히, 에릭슨의 동등한 배려 또는 상호성의 윤리는 이웃 사랑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브라우닝은 에릭슨이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극적인 건강한 자아의 개념--즉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관심인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며, 그 근거로 에릭슨의 상호성에 대한 이론을 다음 세 가지로 부각시킨다. 첫째로, 이것은 계속되는 세대에 생식적인 문제뿐 아니라 폭넓은 돌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단지 자신의 아이들 뿐아니라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둘째로, 에릭슨의 상호성 이론은 '세대에 기초한 이론'위에 세워졌다. 즉,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어른들은 또한 자신 안에 있는 필요들을 채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아들이 어른들의 따뜻하고 인정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어른들도 유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유아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어머니는 젖을 빠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또한 아이들을 돌보는 바로 그 행위 안에서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가르치는 본능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셋째로, 에릭슨은 간디의 진실는 책에서, 황금률을 자기 희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진실한 행동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 준비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비폭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비폭력행동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더 정당하고 상호적인 행동을 가질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이 고통받고 상처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진실한 상호성과 정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에릭슨의 상호성을 브라우닝은 높게 평가하며, 이것은 이웃 사랑과 황금률을 더욱 적절히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2) 심리학에 대한 신학의 영향

a. 풍부한 은유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를 창조자, 심판자 또는 통치자, 그리고 구원자 등으로 표현해 왔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니버가 얘기하는 은유 즉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섭리자로서의 하나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은유적 표현으로 이들은 각각 창조는 선하고, 우주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구원(갱신)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은유들은 인간 경험의 광대한 영역에 질서를 부여한다.

기독교신앙의 이러한 기본적인 은유들은 현대심리학의 은유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풍요하고 다차원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은유들--삶과 죽음, 조화--은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만일 종교적 전통의 오래된 은유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인간은 과학적 신화들만 갖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실제적인 삶의 영역들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차원적이고 풍부하지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종교적 전통의 다양한 은유들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그가 선호하는 에릭슨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에릭슨이 가진 것은 조화구원의 함축적인 은유이며, 이 두 가지는 서구 종교전통의 근원적인 은유들이지만,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은유나 이것과 유사한 은유들을 에릭슨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체계를 필요로 하는 삶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은유들, 다시 말해 그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라고 보는 일시적인 자기 희생과 상호성을 사람들이 갖도록 힘을 부여할 깊은 은유들이 없다는 것이다.

b. 상호배려의 사랑

윤리에 있어서도 이기주의로 빠지는 일반 심리학보다 기독교의 도덕적 핵심은 상호배려로 이해되는 상호성임--물론 에릭슨에게서도 이 점이 나타나지만--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브라우닝은 이제까지 기독교 윤리를 자기 희생에 근거하여 이해한 니버의 견해를 뛰어 넘어 자율성과 상호배려의 원리를 강조한 카톨릭 신학자 쟌센의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쟌센은 이웃 사랑은 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동등한 배려이다라고 말한다. 니버와 대조적으로, 자기 희생이 기독교인 삶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상호성과 동등한 배려가 이상적이고, 희생적 사랑은 이들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희생은 목적이 아니라, 진실한 동등한 배려와 상호성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전이의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쟌센의 아가페에 대한 정의는 자아실현,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 그리고 상호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 윤리로서의 적절한 자기희생,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것은 심리학에 대해 중요한 교정을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윤리 차원에 있어서 파괴적인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세상은 깊은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각자 자아의 실현은 타인의 자아 실현화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화를 궁극성의 은유로 갖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은 이웃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가능성 실현화에만 관심을 갖음으로 윤리적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윤리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띠는 자아실현의 개념을 폭넓은 도덕적 규범으로 확장시키려는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경향성과, 건강의 개념을 자아실현에 제한하는 그들의 한계를 신학은 밝히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3. 결론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심리학과 신학간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다원주의적 상황하에서 신학을 공적” (public)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즉, 신학이 더 이상 자기의 특권만을 고집하며 독백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학들의 주장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통해 정당하게 신학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표적인 현대 심리학들 안에 있는 함축적인 윤리와 은유들을 명확하게 하며, 동시에 분석된 현대 심리학의 함축적인 은유와 윤리들을 유대-기독교 전통의 자원과 비교함으로써 이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다원주의 상황에서 신학이 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 전통(신학)과 세속문화(심리학) 사이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 그의 입장 즉 기독교전통은 세상에 줄 수 있는 풍부한 유산이 많이 있는데, 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토론에 참여함으로 같이 나눌 수 있다고 보며 심리학의 내면을 밝히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브라우닝의 입장은 시카고 대학 신학부라고 하는 경험을 강조하는 학문적 토양이 성숙된 곳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온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특히 틸리히에게 있어서 보여지는 방법론보다 더욱 진보적인 방법임에 틀림없고,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도전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브라우닝의 심리학과 신학과의 깊이 있는 대화는 우리가 희미하게 인식하던 이 둘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대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일반 학문들이나, TV, 영화, 책들을 통해,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한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갖고 있는(특히 구미에서 현대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주고 있는 심리학) 배후의 은유와 윤리를 명백히 분석 제시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가를 체계적으로 토론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과 세속 가치를 이원화시키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보며, 이 점에서 브라우닝의 공헌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다양한 기독교 주장들의 해석들과 다양한 인간 실존의 문화적 해석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종국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우선적인 충성심이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적인 질문의 공동체 안에서 수락되는 진리와 의미의 판단 기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종교적 전통의 진리 주장도 일반인간 경험에 대한 의뢰에 의하여 타당성을 얻을 때까지 불확실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애매모호함은, 도덕적 경험을 종교적 신앙의 시금석으로 강조한 윌리암 제임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은, 그의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브라우닝은 우리는 진리를 그 뿌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로 안다고 말한다. 즉, 신학과 심리학의 깊은 은유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그의 주요 관심이었다. 이처럼, 브라우닝은 도덕 규범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신학을 해석을 하지만, 윤리에 대한 지적 추구를 넘어서 기독교인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하다.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묻기 때문에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윤리적 결정에 더욱 깊게 영향을 미친다. 현대 목회적 돌봄의 심각한 문제, 즉 도덕규범의 결핍을 다섯 단계의 실천적 도덕적 추론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 사람들은 실천적 도덕적 추론보다는 신앙의 근거 위에서, 은유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들 대부분의 규범적 선택들을 하게된다는 사실을 브라우닝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라우닝은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깊이 있게 시도했지만은, 도덕 규범을 만들고자하는 좁은 범주에서--실용주의적 차원에서--활용했다는 한계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