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 요약.hwp
닫기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 유장환교수
I. 신학의 자리는?
II. 신학적 실존은 무엇인가?
III. 신학의 위협요소들은 무엇인가?
IV. 신학적 작업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I. 신학의 자리(Place)
1) 말씀(word)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돌입해 오셔서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며, 말씀하실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말씀은 인간에게 행하여졌고, 인간을 위하여 행하여졌으며, 인간과 더불어 행하였다.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이란 침묵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말씀하시는 행동이다.
2) 증인들(witness)
말씀의 증인들은 유일회적으로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탁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위치가 탁월한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의하여 직접 부름 받아 수용했고 다른 사람에게 확증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바로 이 근원적인(primary) 증인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로써 그의 말씀을 인간에게 말하실 때 동시대인들이었다.
3) 교회 공동체(community)
신학과 교회공동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1) 신학은 교회공동체의 신앙선조들과 더불어서 믿는다.(credo)
(2) 신학은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3) 신학은 교회공동체를 자유롭게 섬긴다.(optimum partem bona fide)
4) 성령(spirit)
신학의 실존 밑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힘의 성경적인 이름이 루아흐(Ruach)요 프뉴마(Pneuma)이다. 이 힘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힘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개방시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개방케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한다.” 성령은 인간세상 속에 실존하시는 성자의 실존의 기원이고, 이 성자를 선포하는 사도와 모든 사도 역할자들의 근원이고, 원시 교회공동체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신학은 성령의 임재와 인도 속에서만 신적인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인 로고스가 될 수 있다.
II 신학적 실존 (놀람, 관여, 책임적 응답===믿음)
응답
관여
놀람
믿음
인간실존 =사회적, 역사적, 생태학적 실존--> 신앙적 실존
1.무엇이 신앙적 실존인가?
1) 놀람(wonder)
하나님의 행위하심과 말씀하심 목격하고 놀라는 삶
이스라엘 노예들 출애굽의 하나님을 보고 놀라고, 제자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을 보고 놀라고, 120성도 마가 다락방에 임한 하나님을 보고 놀람
믿음의 삶-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행위를 보고 놀라는 삶.
2) 관여(concern)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 붙잡혀 있는 존재
믿음의 삶-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있음, 하나님의 말씀이 침투해 있음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책임적인 응답(commitment)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 보고 놀라고, 사로잡히고, 그 행위와 말씀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삶
말씀하신 바 그 말씀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삶
예) 행9:1-9 사도바울=신앙적 실존
다메섹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봄 (4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느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붙잡힘 (9절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함)
부활하신 주님께 책임적인 응답 (20절 즉시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
2. 그러면 이 신앙적 실존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칼 바르트 :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때
육체적 실존은 하나님 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부자유성= 죄의 종) 하지만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유, 신뢰할 수 있는 자유,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그러므로 신앙적 실존의 창조자는 성령하나님입니다. 성령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열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케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한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도우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행동하심 말씀하심 보고 듣고 놀라게 하시고, 붙잡히게 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 그 말씀에 책임적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예) 마16:16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중 하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III.신학을 위협하는 요소들( 고독, 의심, 시험===소망)
심판
의심
고독
소망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1. 고독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고독 속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궁극적으로는 홀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오직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독은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탄마귀는 고독을 없애려고 합니다. 어떻게? 세상과 친구가 되어라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의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통합하여 고독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독은 참고 견디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현실과 이세상의 현실은 대립되어 있기에 우리는 고독을 참고 견디어야만합니다.
2. 의심
이 세상이 더 이상 하나님의 현실이 아니기에 의심 일어나서 우리의 신앙 파괴함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의심하는 형태들
1) 이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 대적할 때 2) 교회공동체가 부패 타락 실패했을 때
3) 개개인 신앙생활이 진닌 결점들
그러나 의심 제거하려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참고 견디어야합니다. 이 의심은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라고 하는 기도로써만 극복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의심에 대해서 항거할 뿐입니다. “항거하라”
3. 시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는 하나님입니다. 고전 3: 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가장 큰 시험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사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성령의 현존과 행동을 거부하시는 사건 예) 가장 나쁜 사건 : 돛은 온통 올려졌으나 배를 움직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틀림없이 경건은 있으나 하나님에 의해서 불붙여졌고 그리하여 타오르는 불같은 신앙은 없다. 하나님께서 말해질 일에 대해서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심판받을 때
1. 우상숭배-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긴다. (반대)
2. 허망함의 표출-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앞세움 (진노)
3. 쓸데없는 사변에 머물음 예) 세상에 무관심 이웃사랑에 무관심 (공격)
4. 교회 세상 잘못 봉사, 적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지 않는가?
시험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이지만 불시험은 은총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불시험으로 연단-- 신앙의 철저한 순화---참고 견뎌라
4. 소망
성도의 신앙생활은 고독이 없고 의심이 없고 시험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고독, 의심, 시험에 의해서 위협받을 때 해결책은?
우리가 위협 받을 때 그 위협 속에는 소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 십자가는 인류심판의 상징이지만 십자가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오 십자가여 그대는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 우리의 신앙의 대상 = 우리의 신앙의 위협 = 우리의 신앙의 소망
IV. 신학적 작업 (기도, 연구, 봉사===사랑)
봉사
연구
기도
사랑
1. 기도
신학 작업의 첫 번째 되는 기본적 행동은 기도이다. 신학 작업은 확실히 연구이며, 봉사이고, 사랑의 행동이지만 우리는 기도로써 신학 작업을 시작해고 진행해야 한다. 신학에 관한 한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법칙은 어느 경우에도 타당하다.
(1) 올바른 신학작업의 특징 : 천창(天窓)이 열려져야함 (2) 신학적인 작업의 대상 : 인간을 향해 말걸어 오시는 하나님 (3) 신학 작업이 다른 학문 활동과 구별되는 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함 (4) 결정적인 문제 : 하나님의 은총을 호소하는 이중적인 간청
<안셀름> “나를 당신에게 노출시키소서! 나로 하여금 나를 알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당신을 나에게 노출시키시고 알리소서!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
2. 연구
신학 작업에 있어서 기도란 한 인간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운동으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신학 작업에 있어서 연구란 외향적이고 수평적인 운동으로서 그것은 지적인 운동이요 심리적인 운동이다. 이 양자는 불가분리의 통일성 속에서 신학 작업은 이루어질 수 있다. “연구 없는 기도는 공허하며 기도 없는 연구는 맹목적이다.”
첫째, 신학연구는 경과해 버리고 마는 삶의 단계가 아니다. 신학도가 사실상 신학도라면 죽을 때까지 신학도로 남는다. 쉴라이어마허는 노년에도 종종 “신학도”라고 서명하였다.
둘째, 어떤 신학자도 목사고시에 합격하여 목사가 되고 박사학위를 얻어 교수노릇을 하려고 신학을 연구해서는 안된다. ---배우는 학도
3.섬김(service)
신학자의 작업이란 “하나님 말씀에의 섬김”(ministerium Verbi divini)이다. 글자 그대로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시중드는 것이다.
1)우리는 신학을 신학자체를 위해서 연구할 수 없다. 하나님 섬김과 인간 섬김이 신학작업의 의미요 목표이다. 2)신학이란 섬김을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지배해서는 안 된다. 신학은 하나님의 관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군림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신학에 적합한 겸손의 궁극적인 근거는 신학이 섬김이라는 사실에 있다.
4. 사랑(love)
사랑이 없는 신학이란 비참한 논쟁이요 말들의 소모이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며 아무리 철저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연구해도 그리고 몸을 불사르도록 봉사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이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신학 작업이란 그냥 받는 사랑의 선물을 수용함으로 시작되며, 지속되고, 끝맺는다.
1) “Eros” : “Eros”의미의 사랑은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욕망.
2) “Agape”: “Agape"의 의미의 사랑은 적극적인 他者에 대한 추구. 아가페 사랑은 타자에 대해서 자유하기 때문에 자기주장과 자기성취 수단으로 타자를 필요로 하며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자를 찾지 않는다. 그는 그를 그냥(gratis)사랑한다.
신학 작업의 대상은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완성역사(歷史)이다. 이 계약사건에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나님을 인간과 연합시키는 완전한 사랑이 일어났다. 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 자신을 위하여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했다. 이 완전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신학 작업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