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神論壇 第38集
Ⅰ. 서 론
Ⅱ. 성령을 통해 인식되는 하나님
Ⅲ. 성령의 신성과 세상
Ⅳ. 성령론적 윤리학
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성령
Ⅵ. 결 론
김 명 용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칼 바르트
(Karl Barth)의
성령론
92 長神論壇-第38集
<국문 초록>
성령에 대한 칼 바르트의 가르침은 어떠할까? 바르트의 성령론을 이해하기 위
해서 우리는 그의 주저서인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1-IV/4)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이 방대한 저서에 나오는 성령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말씀
의 인식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창조 세계 역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 인식된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없이는 객관적 사실이 객관적 사실로 인식되
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무(마귀)의 세력 때문이다. 진리를 진리로 인식
하게 하는 성령은 그래서 진리의 영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은 객관
적 진리이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는 이것을 모른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초월
적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분은 성령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히스토리
(His-
torie)와 게쉬흐테(Geschichte)는 구분된다. 히스토리는 이 하나님의 초월적 통치를
모른다. 히스토리는 이 세상의 지혜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초월적 통치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게쉬흐테이다. 성경은 게쉬흐테에 관한 책이고 이 초월적 차원을 우
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분이 성령이시다.
2. 19세기의 신학은 성령의 신학이었다. 이 사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
다. 헤겔
(G. W. F. Hegel)에 의하면 세계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 발전의 역사이다.
절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헤겔에 의하면 그것은 성령이시다. 바르트는 이와 같은
헤겔적 사고를 단호히 거부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신성은 인간의 영과는 철
저히 구별된다. 성령은 인간의 역사를 심판하시는 영이시다. 인간의 역사는 그 자
체로는 희망이 없다. 오직 성령만이 인간의 역사에 희망의 세계를 만드신다. 바르
트는 그의 후기 신학의 시기에 유비신학을 발전시켰다. 유비신학은 세상 속에 행하
시는 성령의 활동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
비들을 이 땅에 만들어 가야 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유비들은 우리들에 의해 만들
어지는 것이지만 성령에 의해 촉발된 것들이다.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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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르트의 윤리학은 성령론적 윤리학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윤리학은 구체
적이고 상황과 깊이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성령께서
직접 명령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규범주의 윤리학은 잘못된 윤
리학이다. 규범은 물론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의 방향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
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개별자로서의 개인에게 그가 처해있는 상황 안에
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것은 상황윤리가 아니다. 바르트
에 의하면 성령께서 도덕적 규범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령
론적인 윤리인데 곧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4.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교회를 모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다.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성령의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성령은 세
상을 현재 심각하게 장악하고 있는 무의 세력과의 투쟁 속에 있다. 성령께서 무의
세력과의 투쟁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 속
에서 싸우고 있다.
주제어*
칼…바르트,…성령론,…인식,…성령론적…윤리학,…하나님…나라
94 長神論壇-第38集
Ⅰ. 서 론
칼바르트의 주저서인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총 13권의 책 가운데
성령론에 관해 쓴 책은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바르트는 성령
론을 무시한 신학자라고 쉽게 평가한다. 그러나 이 평가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바
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매우 강한 성령론의 신학을 전개하
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교의학』의 첫 권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의부터 마지
막 화해론의 윤리학까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성령론적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
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의는 성령론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론
이고 바르트의 교회론 및 윤리학은 성령론적 교회론이고 성령론적 윤리학이다. 바
르트의 성령론은 그의
『교회교의학』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데 한권의 책 속에 체
계적으로 바르트가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
는 것뿐 이다.
이 논문은 바르트의 성령론을 체계화하기 위한 시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
트의 성령론을 알기를 원하지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계화된 성령론을 찾는 것
은 쉽지 않다.1) 그 이유는
『교회교의학』의 방대함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매
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트의 성령론을 정리하면 어떻게 될까? 바르트의
성령론은 19세기의 성령론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면 바르트의 성령
론은 19세기의 성령론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으며, 또한 오늘의 신
학적 시각에서 보면 어떤 가치를 갖고 있을까?
Ⅱ. 성령을 통해 인식되는 하나님
1. 성령을 통해 인식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임과 말씀됨에 대한 신학적 논쟁)
1) 바르트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참고할만한 글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P. J. Rosato, The Spirit as Lord: The Pneumatology of Karl Barth (Edinburgh: T.&T. Clark, 1981);
J. Thompson,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Alison Park: Pickwick Publications,
1991); J. H. Shin, Der Heilige Geist in Karl Barths Kirchlicher Dongatik, Dissertation, Universität
Heidelberg, 1997.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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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 인식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
인식된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인식되지 하나님이 하나님을 통해 인식된다는 말이 도대체 맞는 말일까?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철저히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바르트가 하나님
이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식된다고 한 말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인식된다는 말이
었다. 하나님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성령을 떠난 하나님의 인식은 바
르트에 의하면 불가능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성령
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코 인식하지 못한다. 한국교회
내에서 근본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 성향의 복음주의자들은 자주 바르트를 비판한
다. 그들의 바르트 비판은 밴틸
(Cornelius van Til)의 비판을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2) 그 비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
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바르트는 잘못된 신
학자이고 복음주의 신학의 적이고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바르
트를 정확히 읽지 않는데서 오는 매우 황당한 비판이다. 이 황당한 비판의 배후에는
일생을 바르트를 욕하는데 바친 밴틸의 비이성적인 비판이 있다. 밴틸은 미국 프린
스턴
(Princeton)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를 세운 장본인
인데 교단분열의 정당성을 위해 바르트를 비판하는 일만으로 일생을 바쳤다. 밴틸
은 프리스턴 신학교와 미국 장로교회가 바르트 신학의 방향으로 신학적 방향이 정
향되자 거의 미친 듯이 바르트를 헐뜯는 일에 몰두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
씀이다.
”3) 바르트의 성경에 대한 실재영감론(Reale lnspirationslehre)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자 하는 이론이다.4) 그런데 바르트는 성경이 하나
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도 강조했
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2) 밴틸의 바르트 비판서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The New Modernism (1946)과 Christianity and
Barthianism(1962)이 있다. 밴틸의 바르트 비판을 반복하는 책은 한종희,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 신학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2)을 참고하라.
3)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이하 KD) Ⅰ/2, 526.
4) 바르트의 실재영감론에 대해서는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7), 113-19
참고.
96 長神論壇-第38集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완벽한 계시의 역사이
다. 그런데 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그의 역사가 하나
님의 계시의 역사라는 것을 몰랐을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
1:46)의 비아냥거리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
자가에 못 박았을까? 바르트에 의하면 그 이유는 성자이신 예수께서 나사렛 예수
라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한 교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인 동시에 은폐의 성격을 지니고 있
다.5)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명백히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가 갖고 있는
인간적 요소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몰랐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이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은폐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6)
나사렛 예수께서 계시인 동시에 계시의 은폐라는 사실은 성경에도 해당된다.
성경은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적 언어
로 쓰여 있고 이 인간적 언어 때문에 바르트에 의하면 은폐적 성격이 존재한다. 하
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적 언어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
런 까닭에 이 인간적 언어는 하나님의 계시이고 계시의 도구이다. 그런데 계시의
도구가 인간적 언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한다.
바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간 바울의 말로 듣는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바르트의 가르침의 의미는 인
간 바울의 말로 밖에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바울의 말이 성령이 역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즉, 자연인 인간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모르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
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게 된다는
5) J. Thompson,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15. 바르트 신학에서 성육 및 십자가
사건의 은폐적 성격에 대해 톰슨은 잘 설명하고 있다. 톰슨에 의하면 십자가 속에 숨어계신 하
나님의 사상은 원래 루터의 가르침이었는데
20세기에 와서 바르트와 윙엘(E. Jüngel) 및 몰트
만
(J. Moltmann)이 계승하고 있다.
6)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119-23 참고.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97
뜻이다. 바르트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미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인식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연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모른다.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들이지만 자연
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양태인지 알지 못한다. 교회의 설교를 듣고도 그 목
사 연설 잘한다고 자연인들은 생각한다.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
간인 설교자 때문에 인간의 말로 들리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
는 그것이 갖고 있는 인간적 특징 때문에 본질적으로 은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려면 바
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
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바르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님의 말씀으로 된다는 말은 하나님 인식의 성령론적 차원을 강조한 말이다. 바르
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될 뿐이라고 가르치는 심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 근본주의자들이나 보수 복
음주의자들은 바르트를 다시 자세히 읽어야 한다. 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지만 이 말씀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성령론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 신
학자였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경도, 교회의 선포도 하나님의 말
씀도 알지 못한다.
2. 성령을 통해 인식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신학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반대한 신학자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세상에 알려져 있
다.7)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적그리스도의 창조물로 보았고 어떠한 자연신학적 가능
성도 자신의 교회학에서 제거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열
7) 자연신학에 대한 대표적 논쟁으로 히틀러(A. Hitler) 통치 시기의 논쟁인 에밀 브룬너(E. Brun-
ner)의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에 대한 강력한 거부의 글인 “아니다!”(Nein!)가 있다.
그러나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전체적 이해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과 말년의 글인
『그리스도인의 삶』(Das Christliche Leben)을 살펴보아야 한다.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
』 창조론을 쓰고 난 뒤 브룬너가 바르트를 비판한 “새로운 바르트”(Der neue Barth)도
유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98 長神論壇-第38集
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바르트를 비판하는 많은 학자들은 성경이 자연신
학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데 성경적 신학을 강조한 바르트가 어찌해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라고 성토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
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것으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0). 위의 시편 말씀과 로마서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명백히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왜 바르트는 위와 같이 명백한 성경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반대한 것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위의 성경의 말씀들은 문자 그대로 진
리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
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 그대로 사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 속
에 명백히 알려져 있다.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르트에 의
하면 분명히 객관적 진리이다.
그렇다면 왜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반대하고 심지어는 적그리스도의 창조물로
비판했을까?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분명하고
객관적인 진리이지만 인간의 사상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결코 깨닫지 못
한다. 이 말의 뜻은 객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다.8)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객관적 진리에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의 사상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무
(Das Nichtige)의 세력
의 심각성 때문이다. 마귀는 인간의 생각과 사상을 전도시키고 있고, 죄에 빠진 인
간은 바울이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도 객관적 진리이고, 이 객관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도 분명한 객관적 사실이다. 바르
트는 현대의 낙관주의적인 많은 신학자들과는 달리 무의 세력의 심각성을 인식한
신학자였고 이 무의 세력에 사로잡힌 전도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
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신학자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이 바울이 말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실이다.
8)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인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화해론
의 윤리학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세히 논했다; Karl Barth, Das Christliche Leben (Zürich:
Theologishcer Verlag, 1976), 187-254.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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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하늘이 하
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시편 기자의 표현은 시편 기자가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찬송이었다. 시편 기자가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이 아
니면 바르트에 의하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객관적 진리
이지만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이 아니면 이 객관적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거
짓
(Lüge)은 인간의 죄악의 근원이고 무의 힘이 활동하는 통로이다. 이 죄악과 무의
힘을 부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인간은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의 믿음의 진술이다.
그것은 객관적 진술이지만 세상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객관적 진술은 아니다. 성
령은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주는 영이다.
3. 성령을 통해 인식되는 하나님의 역사
(세속 역사이해의 초월적 차원의 결여에 대한 신학적 비판)
바르트가 역사를 히스토리
(Historie)와 게쉬흐테(Geschichte)로 구분한다는 것
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히스토리가 무엇이며 게쉬흐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
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소수이다. 정확히 아는 사람보다 잘못 아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히스토리를 일반적 역사 혹은
객관적 역사로, 게쉬흐테를 의미의 역사 혹은 믿음의 역사로 구분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게쉬흐테는 객관적 역사는 아니다. 객관적 역사는 히스토리이고 게쉬흐테
는 이 객관적 역사를 어떤 시각 혹은 안경으로 재해석하는 역사가 된다. 즉, 게쉬흐
테는 과학적 역사라기보다는 의미의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게쉬흐테가 객관적 역사이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게
쉬흐테는 단지 의미 속에 존재하는 역사가 아니다. 게쉬흐테는 객관적 역사이고
참 역사이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부활은 게쉬흐테의 영역에 속한다. 바르트에 의
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객관적 진리이고 참 역사이다. 예수의 부활보다
더 객관적인 역사는 없다. 그것은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참 진리이고 객관적
사실이다.9)
9)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흐테(Geschichte)에 대해서는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201-11
참고.
100 長神論壇-第38集
그런데 이 부활은 히스토리의 차원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왜 부활이 히스토
리의 차원에서 파악되지 않는 것일까? 부활이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라면 당연히
히스토리의 차원에서 파악되고 또한 입증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르트에 의
하면 게쉬흐테는 하나님을 향해 열려져 있는 역사이고 히스토리는 하나님을 향해
닫힌 역사이다. 히스토리는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역사인데 이 역사는 초월적 세계
를 향해 닫혀 있는 역사이다. 세계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역사
가 아니다. 세계사는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역사가 만나면서 만들어져 가는 역사이다. 게쉬흐테는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
을 모두 갖고 있는 역사인 반면에 히스토리는 수평적 차원만 갖고 있는 역사이다.
즉, 히스토리는 매우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는 역사이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초월
적 개입을 알지 못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담을 수 없는 역사이다.
예수의 부활은 히스토리의 차원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의 부
활이 객관적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고 히스토리가 갖고 있는 역사이해의 본질
적 결함 때문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부활을 신화로 본 것도 그들
이 갖고 있었던 역사 이해가 히스토리의 차원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참 진리이고 가장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이 부활의 빛
에 비추어 보면 세상에서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객관성이 심각하게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초월적 차원이 결여된 세상의 역사는 객관적 진리성에 큰 문제를
갖고 있다.
많은 바르트 비판가들 가운데, 특히 근본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바르트가 부활
의 역사성을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바르트가 부활이 히스토리의 차원에 속하지 않
는다고 했기 때문에 바르트가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 신학자라는 것이다. 이 황당
한 비판은 원래 일생동안 바르트 비판으로 살아 간 밴틸이 한 것인데 한국의 상당
수의 신학자들은 바르트를 깊이 읽어보지 않고 이 비판을 반복했고 한국교회가 바
르트를 미워하도록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복음주의 신학자 카넬
(E. J. Carnell)은
바르트를 깊이 연구한 후 밴틸의 바르트 비판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면서 밴틸은 바
르트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빌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10)
바르트에 의하면 게쉬흐테가 참 역사이고 객관적인 역사이다. 그것은 수평적
10) 밴틸의 바르트 비판의 지나침과 이에 대한 카넬의 지적에 대해서는 Gregory G. Bolich, Karl
Barth and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nterVaristy Press, 1980), 66-73 참고.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01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공존하는 역사로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주는 역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히스토리의 차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고 게쉬흐테의 차
원을 설명하는 책이다. 물론 오늘도 기적은 일어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개
입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객관적 역사적 사실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사를 볼 수 있는 자들은 성령에 의해 감화된 사람들 뿐이다. 게
쉬흐테의 차원을 읽어내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성령을 통해 인식된다. 바르트가 말하는 신앙의 역사는 성령
을 통해 인식되는 역사이다. 참 역사는 성령이 아니고는 인식되지 않는다. 세상에
서 객관적인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
간 상호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역사로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 역사이다. 참으
로 객관적인 역사는 성령을 통해 인식된다. 성령은 세계 역사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 참된 진리의 영이다.
Ⅲ. 성령의 신성과 세상
1. 성령과 세상과의 질적 차이(19세기 성령론과의 신학적 논쟁)
많은 사람들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시대에 성령은 신학의 대상에서 사
라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19세기 신학의 큰 오류는 성령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
를 인간이 차지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 없는 시대가
19세기의 근본적인 문
제였다고 비판한다. 성령은 사라지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한 시대
가
19세기고 이 시대정신을 대변한 신학이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일반적
인식이 많은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
정말
19세기에는 성령이 사라졌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성령이 사라진 시대라
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19세기는 성령론의 시대였다. 19세기
정신의 아버지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역사철학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 세계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발전의 역사라는 헤겔의 가르침은
19세기
를 관통하는 중요한 시대정신 이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이 무엇인가? 헤겔
에 의하면 세계역사는 하나님의 영의 자기발전의 역사이다. 세계 역사 속에 성령이
활동하고 있고 이 성령의 활동으로 세계 역사는 발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
102 長神論壇-第38集
아가고 있다는 것이 헤겔의 가르침이 아닌가!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 속에 하
나님의 영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은
17세기의 옛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주장
한 것처럼 죄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가르쳤던
17세기의 옛
정통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죄를 만드는 공장이다. 그러나 헤겔은 그렇
게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이성 속에 투영되어 있고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은 세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세계 속에 내재해 있
고, 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세계 역사는 발전하고 유토
피아의 세계는 만들어진다.
19세기는 성령론의 시대였다. 19세기 신학자들은 성령의 제3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있었다. 과학의 발전은 그들에게 새로운 환상을 심어주었고 과학
을 발전시키고 있는 인간의 이성은 성령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역사 속에 천년왕국
이 도래할 것이고 성령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사용해서 천년왕국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천년왕국은 일부 부흥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마침내
천년왕국의 시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세계적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은 역사 앞에서의 경외를 가르쳤다. 역사 앞에서의 경외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역사의 발전이 하나님의 자기발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
심을 갖고 역사 앞에 서 있어서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19세기는 성령이 사라진 시
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성령의 제
3시대가 도래했다는 환상이 지배한 시대였다. 영
의 세속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성령론이 발전한 것이
다. 성령은 세속세계 속에,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과학과 세상의 문화 속에 활동
하고 있다.
19세기의 문화기독교는 문화를 성령의 도구로 인식하는 신학이었다. 자
유주의 신학자 하르낙과 헤르만
(Wilhelm Herrmann)은 독일이 발전시킨 문화에 대
해 깊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자본주의를 악이라고
생각했고 세계가 영국의 자본주의에 근거한 식민지 운동으로 고통 속에 있다고 생
각했다. 하나님의 영은 독일이 발전시킨 형제자매 공동체인 사회주의 정신 속에 녹
아 있고, 그런 까닭에 독일의 문화의 확장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동일했다. 이
런 시각 때문에 하르낙과 헤르만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Ⅱ)의 제1차 세
계대전의 전쟁선포에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하나님의 영은 정말 독일의 문화 속에 녹아 있을까? 독일의 사회주의는 영국
의 식민지 운동의 자본주의를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성령의 도구일까?
1934년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Deutsche Christen)은 히틀러는 예수 그리스도에 상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03
응하는 민족의 구원자로, 히틀러가 내세운 국가 사회주의 이념을 성령의 길로 선
포했다.11) 그들에 의하면 국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 있는 민
족과 세상을 구원하는 성령의 길이었다.
19세기의 문화기독교의 성령론은 20세기
의 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명분과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와 제
2차 세계대전 배후에 헤겔이 있다는 시각
을 나타냈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제2판(Der Römerbrief, 1922)은 바르트의 새로운 성령
론의 출발을 알리는 저술이었다. 하나님과 세상의 질적 차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저술에서 바르트는 인간을 성령론적으로 신성화시킨
19세기의 모든 문화기독교와
단절했다. 바르트는 젊은 시절 하르낙과 헤르만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인간이 이
땅위에 있는 제
2의 신이라고 설교했고 인간이 만든 것이 언젠가는 완전한 것이 될
것이라고 설교한 적이 있었다. 자펜빌
(Safenwil)의 젊은 목사 바르트는 사회주의 운
동을 하나님의 나라 운동으로 생각했고 설교했다.
『로마서 강해』 제2판은 19세기
의 신학과의 단절인 동시에 과거의 자신과의 단절이었다.
『로마서 강해』 제2판의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인간이 신을 소유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
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빙하의 계곡이 있
고 죽음의 선이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성령론적으로 신성화시키면 안 된다. 인간
이 신을 소유한다는 오만한 생각의 결과는 심판이고 죽음이다.
『로마서 강해』 제
2판의 위기의 신학은 인간과 신을 성령론적으로 결탁한 19세기 신학에 대한 심판
을 선언한 신학이었다.
19세기의 환상이었던 성령의 제3시대가 과연 이 땅에 도래
했는가? 과학이 발달할수록 세상은 더욱 심각한 위기 앞에 서 있고 인간의 죄악과
국가의 이기심 앞에 세계는 파국 직전의 상황이 아닌가? 인간과 국가가 과연 자신
의 이기심을 극복 할 수 있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힘을 세상의 역사가 과연 극
복 할 수 있을까?
바르트에 의하면
19세기의 낙관주의는 허구이다. 인간과 국가 속에는 이기심
과 붉은 죄악이 들어 있지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사회주의도 국가 이기심에 의해 전쟁의 도구로 전락되어 있지 않는가! 신학의 출발
11) 1934년 3월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에 의해 선포된 성명서에 의하면 “히틀러가(국가사회주의
가) 독일 민족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자 성령의 길이다.
”; 김명
용,
『칼 바르트의 신학』, 91-101 참고.
104 長神論壇-第38集
은 세상의 위기를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성령은 인간을 무로 만들고 그곳에서 다
시 시작하는 영이시다. 인간의 역사와 발전을 성령론적으로 신성화시키면 안 된다.
그것은 이내 위기에 휩싸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2. 성령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간적 유비들
(후기 바르트의 유비신학의 성령론적 차원)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제2판은 하나님과 인간을 성령론적으로 연결시키는
19세기의 문화기독교를 파괴하는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성령의 거룩성과 신성을
강조했고 인간과 세상의 역사의 죄성에 대해 심대한 비판을 가했다. 인간이 만든
과학과 이념과 문화는
『로마서 강해』 제2판의 바르트에 의하면 어떠한 성령론적
가치를 지닐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간적
인 것들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 있는 과학과 이념과 문화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런 관련
이 없을까? 세상에 있는 과학과 이념과 문화는 어떤 경우에도 성령론적 연관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칼빈주의자들이 발전시킨 민주주의는 세계를 해방시키고 인
권과 자유와 정의가 숨 쉬는 새로운 세계를 가져다주었다. 민주주의의 발전도 성
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로마서 강해』 제2판의 성령의 거룩성과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강조는 근본적으로 옳다할지라도 거룩한 성령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 거룩한 어떤 것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을까? 바르트의
『로마
서 강해
』 제2판은 인간의 죄성을 하나님의 은총 보다 더욱 크게 보는 신학이 아닐
까?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거역하는 역사이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세상의 역사의 주는 그리스도시고 세상의 역사는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있
는 것이 아닐까?
바르트의 신학은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 끝나는 신학이 아니다. 후기 바르
트는 하나님 나라의 유비의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이 유비의 신학은 바로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바르트의 답을 담고 있는 신학이었다.12) 바르트는 일생동안 하나님과
12) 바르트의 하나님 나라의 유비의 신학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저술로는 1946년의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이다. 바르트는 이 저술에서 시민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비에 대한 신학을 본격화시켰다.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05
인간과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한 신학자였지만 후기 바르트의 신학은 성령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유비의 가능성을 열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하나님 나라의 유비는
교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세계 속에도 있다. 세속세계 속에도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진리들과 말씀들과 빛들이 있다. 그런데 이 진리들과 말씀들과 빛들은 바
르트에 의하면 철저히 성령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클라페르트
(B. Klappert)에 의하면 후기 바르트 신학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모차
르트의 음악은 명백히 하나님 나라의 유비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
은 유비라는 말의 뜻이다. 유비는 말 그대로 유사하지만 동시에 똑같지 않다는 것
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후기 바르트의 유비의 신학은 세상 속에 성령에 의해 촉발된
하나님의 나라의 유비들이 존재하지만 이 유비들은 유사한 것이지 결코 같지 않다
는 것을 의미하는 신학이다. 후기 바르트의 신학에도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라
는 기본적인 대전제는 강하게 존재한다. 바르트는 결코 세상의 것을 하나님과 직접
일치시키는 우상숭배적인 성령론을 전개하지 않았다. 세상은 세상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바르트가 유비의 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 촉발된
하나님의 나라의 유비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유비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유비들은 더 나은 유비를 향
해 열려 있어야 하고, 때가 되면 폐기 되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유비들이다.
후기 바르트의 유비의 신학에서 유념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신은 그 유
비들을 바르트는 인간적인 유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13) 왜 그 유비들을
인간적인 유비들로 부르고 있을까? 그 이유는 그 유비들이 성령에 의해 촉발된 것
이지만 그 유비를 만든 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도 인간이 만들었고
모차르트의 음악도 인간이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인간적인 어떤 것들이
다. 바르트는 인간적인 것들을 성령론적으로 신성화시키는 것을 그의 생애 마지막
까지 반대했다. 히틀러가 제
2의 그리스도가 되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가 성령의
길로 선포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뒤바꾸는 마귀적인 일이다.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일과 성령에 의해 촉발된 인간이 하는 일은 결코 같지 않다.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일은 완벽하고 거룩하고 은혜로우시지만 인간이 하는 일은 성령에 의해 촉발되었
다고 해도 매우 불완전하고 죄성이 깃들여 있고 은혜롭지 않다. 인간적인 것을 신
성화시키는 것은 성령론적으로 허락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유비들
은 그런 까닭에 철저히 인간적인 유비들이고 한계가 있는 유비들이다.
13) Karl Barth, Das Christliche Leben, 347-470 참고.
106 長神論壇-第38集
Ⅳ. 성령론적 윤리학
바르트의 윤리학은 규범주의적 윤리학도 상황윤리학도 아니다. 바르트의 윤리
학은 성령론적 윤리학이다.14) 바르트에 의하면 규범이 윤리학의 최종적인 답이 아
니고, 상황에 의해 윤리학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지가 곡해되는 방향으로 규정되
어서도 안 된다.15)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과 세상을 참으로 살리시는 성령께서 우리
를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는 최종적인 윤리적 명령을 말씀 하신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성령론적 윤리학이란 무엇일까?
1. 자유의 영이신 성령
현대무신론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동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왜 하나님 없음
을 논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가?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의 자유 때문
이다.
“하나님은 없다 그러니 마음껏 즐겨라.” 이것이 애써 하나님 없음을 논증하
려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
는 것과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는 일이
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면 정말 인간의 자유는 침해당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역사는 율
법주의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가
깊이 존재하고 있다. 청교도주의나 경건주의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깊은 가치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로 오해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고 실재로 교회의 삶 속에는 율
법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존재했다. 기독교의 율법주의는 분명 무신론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외침과 대립적 위치에 있다. 기독교의 율법주의는 무신론의 인간의 자
유에 대한 외침을 정죄할 것이고, 무신론은 인간의 자유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존
재를 거부해야 한다.
경건주의 가문에서 자란 바르트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
를 잘 알고 있었다.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강해』 제1판(Der Römerbrief, 1919)을 쓰
면서 이미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경건주의 속에 있는 율법주
14) Karl Barth, KD I/2, 404, 412.
15)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272-79.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07
의를 비판했다.16) 경건주의자들은 스스로 율법에 묶여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
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학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며, 마음의 지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트가 언급한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은 경건주의 교회 안에만 있는 지옥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도 바
르트가 언급한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에 갇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고 절규한 바울의
절규에서, 이 율법의 굴레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바르트의 답은 인간은 결코 그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는 것
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바르트에 의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
”(롬 8:2)에서 우리를 해방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해방시키
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억압이나 강요
의 신이 아니다. 성령은 자유의 신이시고 인간의 자유의 무한한 원천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마음에 새겨지는 성령의 법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다.
“너는
~ 해야 한다
”라는 율법은 인간을 죄와 사슬 속에 가두고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
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
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는 ~ 해야 한다”는 명령이 “너는 ~ 하도록 허
락되어 있다
”라는 놀라운 새로운 정황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17)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이다.18) 자유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삶은 억압이나 강요가 없는 자유의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지 강요나 억압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마
음속에 새겨진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
고, 희망하게 하고, 결단하게 인도하지만 그 모든 일은 우리의 자유 안에서 일어나
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법을 실천함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자가 된다는 점이다. 바
16)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63-66.
17) Karl Barth, Predigten 1954-1967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2003), 163-70.
18) 위의 책, 168.
108 長神論壇-第38集
르트에 의하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참으로 인간이 되고 인간성이 갖고 있는
깊은 신비와 비밀을 경험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자유와 기쁨을 누린다. 바르트에 의하면 무신론자들
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 세력이 말하는 거짓된 자유
다. 그것은 인간을 저주와 곤경 속에 몰아넣는 부자유의 극치이다.
성령을 받으면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운 자가 된다. 인간은 율법의 의무에서 해
방되고 즐겁게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인간은 참된 자아를 찾고
하나님께 달려가는 사람이 된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묶던 모든 굴레에서 해
방되고 자유로운 주체로 하나님과 이웃 앞에 서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성령은 마음으로부터 인간을 설득하고, 인간의 이성과 마음
에 성령의 빛을 비추어 자유로운 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
다.19)
“성령보다 인간의 이성에 더 가까운 친구는 없다.”20) 성령은 인간을 이성적으
로 설득하는 영이지 강요하는 영이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하는 영이지 억압하는 영이 아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은 인간도 참된 자유인이 된다.
2.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성령의 인도하심
바르트의 윤리학은 규범주의적 윤리학을 반대한다. 왜 바르트는 규범주의적
윤리학을 반대할까? 예컨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제
4계명은 하나님의 명령
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하는 윤리적 규범이다. 이 윤리적 규범은 모든 그리스
도인들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닐까?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이 규범
들은 하나님의 명령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규범주의적 윤리학은 인간의 자유를 해치고 인간을 율법주의
의 굴레에 가둘 위험이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바른 윤리학은 성령론적 윤리학이
다.21) 성령론적 윤리학만이 인간을 참으로 해방시키고 인간에게 복음의 자유와 기
쁨을 선사한다. 성령론적 윤리학은 규범주의적 윤리학이 아니다. 성령론적 윤리학
19) Karl Barth, KD IV/3, 1081.
20) Karl Barth, KD IV/4, 31.
21) 바르트의 윤리학에 대해서는 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259-84 참고.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09
은 매우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 깊이 고려된 윤리학이 성령론
적 윤리학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윤리의
규칙을 적용하는 인도하심이 아니다. 예컨대, 병원에서 일요일에 당직으로 근무해
야 하는 의사가 있다고 할 때, 그 의사는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전쟁
중에 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는 병사는 일요일에 어떻게 해야 할까?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병원에서 당직으로 근무하는 의사에게는 일요일에 병원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 계명이 명령
하는 규범이지만, 성령은 당직 의사에게는 전혀 다른 명령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
이다. 어쩌면 성령은 당직 의사에게 토요일에 예배드리고 일요일에는 병원에서 위
급한 환자를 돌보라고 말씀하셨을지 모른다.
바르트에 의하면 안식일 계명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인간
은 안식일 계명을 통해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참 인간이 된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이 명령이 규범
주의의 형태를 띠게 되면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는 율법이 된다. 일요일에 위급한
상황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는 즉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시간을 늦추는
것은 응급실 환자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될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당직
의사에게 응급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성령론
적 윤리학은
“지금,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윤리학이다. 바르트
에 의하면 규범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말씀하시고 함께 하
시는 성령이 우리를 살린다.
바르트에 의하면 규범주의적 윤리학은 인간을 율법의 굴레에 가두고 성령론
적 윤리학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살린다. 그렇지만 규범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
다. 규범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리는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안
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임이 분명하
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살리는 법으로 사용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과 분
리된 하나님의 법은 인간을 죽이는 율법이 된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은 모
두 다르다. 개개인의 삶을 참으로 살리는 길은 성령만이 정확히 알고 계신다. 바르
트에 의하면 이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살림의 길을 말씀하신다. 어쩌면 그 길은 다
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다를 수 있다. 성령의 법은 자유의 법이고 율법주의나
규범주의를 뛰어넘는 참으로 인간을 살리는 길이다.
110 長神論壇-第38集
V.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성령
1. 교회를 모으고, 세우고, 세상을 향해 보내는 성령
바르트의 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은 교회의 사역보다 넓다. 교회 밖에 성령에 의
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귀중한 것들이 있다. 교회 밖에 진리들과 빛들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말씀들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을 교회의 사역 속으로
제한시키면 안 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령을 독점하고 교회의 제도 속에 성령을 유
폐시키고 있는 가톨릭의 교회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가톨릭의 피우스
(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 사상은 성령께서 가톨릭의 제도 속에 유폐되고 있다는 비난
을 받을 만큼 위험한 교회론이다. 교회는 결코 성령을 독점 할 수 없다.22)
바르트의 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이 교회의 사역보다 넓고, 교회가 성령을 독점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 신학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
하다. 바르트는 교회 밖의 성령의 활동의 가능성을 열고 있지만 바르트의 성령론의
무게의 중심은 교회에 있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상응하
는 신약의 하나님의 은총의 기관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 그리
스도의 지상적 현존이다.23)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교회를 모으고, 세우고, 세상
을 향해 보내는 영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신 것처럼 교회 역시 참된 지식의 요람
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가 참 진리이지만 세상은 이 진리를 모른다.
인간과 세상의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세상은 허무로 가득 차 있다. 세상
을 지배하는 비관주의나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뒤섞인 사상들 모두 거짓이다. 낙
관주의 역시 낙관주의의 참 근거를 모르는 그릇된 낙관주의로 그것 역시 거짓이다.
성령은 세상 속에 참 진리를 가르치는 영이시고 성령에 의해 세움을 받은 교회 역
시 참된 지식의 요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교회를 모으고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를 만든
다. 이 공동체는 진리의 요람이고, 성령께서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
나님의 영의 강림은 세상과 구별된 다른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22) 가톨릭의 피우스(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
에 대해서는 이신건,
『칼 바르트의 교회론』(서울: 성광문화사, 1989), 241-55을 참고하라.
23) Karl Barth, KD IV/3, 2, 904.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11
이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세상과는 다른 사상과 품성을 가진 인격이 되고, 과거에
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능력 있는 인물이 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와는 전
혀 다른 인격과 능력의 인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운 꿈과 소망과 삶의 목적
을 갖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바로 이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모으고, 세
우고, 또한 이 공동체를 세상으로 보내는 영이시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인 것처럼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는 교회 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기관
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고, 세움을 받고, 세상을 향해
성령에 의해 보내진 공동체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
상에 증거하기 위함이다.
오늘의 시대는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시대이고, 교회의 시대이고, 선교의 시
대이다. 성령의 시대나 교회의 시대나 선교의 시대나 모두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증거이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최종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시키는 영이신데, 이 사
역을 위한 성령의 기관이 교회이다.
전통적으로 개혁파 신학의 성령론은 성령을 칭의의 영과 성화의 영으로 이해
했다. 성령이 칭의의 영이고, 성화의 영이라는 것은 바르트의 성령론에서도 매우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성령의 개인주의적 시각보다 공동체적 시
각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교회를 예정하시고
교회를 통해 개인을 예정하셨다. 교회는 바르트의 성령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령
은 교회를 모으고, 세우고, 세상을 향해 보내는 영이시다. 개인은 성령께서 세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하나의 지체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이 교회와 더불어 세상
끝날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지상과제를 수행하신다. 왜냐하면 이 예수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인류와 세상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성령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시고, 교회의 과제도 예수 그리스도
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오해 하는 것은 바르트의 성령론과 교
회론이 세상 속에 세워야 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이론이 아닌가 하는 점에 있
112 長神論壇-第38集
다. 다시 말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데올로기 등 세상의 문제와 바르트의 성
령론이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성령과 교회의 과제가 예수 그리
스도의 증거에 불과하다면 성령과 교회의 일은 전도로 축소될 것이고, 세상의 정치
나 사회, 경제, 문화 및 이데올로기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바르
트의 성령론이나 교회론과는 무관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고, 교회 역시 하
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관이다.24)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님의 나라가 이미 계시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에 나타
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
라의 선취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매우 눈길을 끄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몰트만이
1964년 『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 개
념이 후기 바르트의 신학에 이미 앞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바르트의 신
학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언급하고자 했던 것 중 많은 것들을 이미 몰트만 보
다 앞서 언급했다.25)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
의 선취이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활동으로 세상 속에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
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
이 일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바르트에
있어서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동일한 일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은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말로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성
령과 교회의 과제가 전도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말
(Sprechen)과 행위(Handeln)로 하는 일이다.26) 행위로 예수 그리
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하
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만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24) 위의 책, 991.
25) 클라페르트(B. Klappert)는 『화해와 해방(Versöhnung und Befreiung)』 이라는 제목으로 바르트
의 화해론에 대한 중요한 글을 저술하면서 바르트의 화해론에 이미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에 나오는 중요한 사상이 거의 나타나고 있음을 입증했다. 클라페르트에 의하면 바르트의 화
해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정향된 신학이다.
26) Karl Barth, KD IV/3, 2, 990.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13
것은 아니다. 그 화해의 현실을 세상 속에 구현해야 한다.27) 이 화해의 현실을 구현
한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
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무의 세력은 궤멸되었다. 마귀는 더 이상 세상의
지배자가 아니다. 마귀, 악령 등으로 상징화 되는 무의 세력은 복음의 전도와 복음
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쫓겨 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
지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만, 성령과 교회의 활동으로 쫓겨나가야 할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령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은 말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고 말과 실천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화해론의 윤리학인 『그리스도인의 삶』
(Das christliche Leben)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고, 폭력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세력과의 투쟁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으로
가르치고 있다.28)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목적은 세상을 지배하는 무의 세력을 부
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성령은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와
함께 일하고 계신 영이시다.
27) 화해의 현실을 구현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새로운 것”(radikal Neues)을 세상 속에 구현하
는 것이다.
Karl Barth, KD IV/3, 810. ; J. H. Shin, Der Heilige Geist in Karl Barths Kirchlicher
Dogmatik, 171-72.
28) Karl Barth, Das Christliche Leben, 347-99.
114 長神論壇-第38集
Ⅵ. 결 론
바르트의 신학에서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고 세상과는 다른 영이시다.
19세기
의 신학이 주장한 것처럼 세상 속에 내주 하면서 세상의 진보와 일치하는 진보의
영이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세상을 비판하시고 세상이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여시는 영이 성령이시다. 바르트는 성령이 아니고는 창조세계나 세계 역사
를 참으로 바르게 알 수 없음을 가르친 신학자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성령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게 되고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세계 역사를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로 인식하게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성령을 통해 세상을 비판하는 능력을 얻게 되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
과 무질서의 근원인 무의 힘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성령은 인간과 세상과 역
사를 참으로 바르게 보게 하는 진정한 계시의 영이시다.
성령은 인간과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영이시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으로 세상 속에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을 통해 인간과 세상 속에 계시고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
도의 몸인 교회를 모으고,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공동체를 세상
으로 보낸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와 함께 하
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다. 성령은 무의 세력인 폭력과 무질서의 힘을 부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가 빛나는 세계를 만드는 영이시다.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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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16 長神論壇-第38集
< Abstract >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Myung Yong Kim (Dr. theol.)
Professor
Systematic Theology
PCTS
What is the teaching of Karl Barth of the Holy Spirit? In order to understand his
teaching of the Holy Spirit, we must read his Church Dogmatics.
1. According to K. Barth, God is recognized only by the Holy Spirit. His Words
are recognized only by the Holy Spirit. Although the Bible is God’s Words, it becomes
God’s Words only by the Holy Spirit.
God’s creation is recognized as God’s creation only by the Holy Spirit. It is objec-
tive truth, that God created the world. But it can’t be recognized as objective truth
without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of truth.
God governs the world. It is objective truth, that God governs the world. But the
wisdom of this world doesn’t know this truth. The Holy Spirit opens us the transcen-
dental governing of God. According to K. Barth, there is difference between Historie
and Geschichte. Historie doesn’t know this transcendental governing of God. Historie
is the wisdom of this world. Geschichte knows the transcendental governing of God.
The Holy Spirit opens us Geschichte.
2. The theology of 19.th century was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G. W. F. Hegel the world history is the history of selfdevelopment of the asolute Spirit.
What is the absolute Spirit? It is the Holy Spirit. K. Barth denies strictly this idea. Ac-
cording to K. Barth, the deity of the Holy Spirit is total y different from human spirit.
The Holy Spirit judges the human history. The human history has no hope. Only the
Holy Spirit makes hopes in this world.
김명용‐칼…바르트(Karl…Barth)의…성령론
117
K. Barth develops in his late days analogy idea. According to K. Barth, we must
make analogies of the Kingdom of God in this world. Although these analogies are
made by us, they are influenced by the Holy Spirit.
3. K. Barth’s ethics is a pneumatological ethics. His ethics is concrete and con-
textual. He doesn’t teach that we must always fol ow moral principles. Although the
moral princeples show us God’s intentions, The Holy Spirit speaks us directly. But it
is not a situation ethics. It is pneumatological. The Holy Spirit uses moral principles
freely. We must follow the teaching of the Holy Spirit.
4. According to K. Barth,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who builds the church and
establishes the Kingdom of God. The time between resurrection and the second com-
ing of Jesus Christ is the time of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testifies Jesus Christ
and establishes the Kingdom of God. In order to establish the Kingdom of God, the
Holy Spirit goes into battle against the power of nothingness which rules over the
world. The church also goes into battle against the power of nothingness which rules
over the world.
Key Words *
Karl…Barth,…Doctrine…of…the…Holy…Spirit,…recognition,…pneumatological…ethics,…Kingdom…of…God.
•투고(접수)일…:…2010.…06.…26… … •심사(수정)일…:…2010.…07.…22 •게재확정일…:…201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