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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종교심리학 9주차 “종교경험의 심리학적: 회심의 정의, 효과 등” / 박노권 교수
9주
■종교경험의 심리학적 이해: 회심
일반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회심을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종교적 경험으로 생각해 오고 있으며, 단 일회적인 신비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회심(Conversion)은 주로 종교적인 경험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회심을 어떤 종교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종교적 회심 체험은 개인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줌으로 모든 종교는 이 회심을 중요시하고 있다. 진정한 회심은 마음 깊은 곳에 심오한 변화를 일으킬 뿐 아니라, 사회와 인간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심리학이 종교적 경험들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이상, 이제까지 회심을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로 삼아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회심은 일종의 행동 현상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회심 현상은 종교적인 관점뿐 아니라 세속적인 시각에서도 연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은 회심 경험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1. 회심의 정의
회심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신념으로부터 다른 신념으로, 한 종교로부터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서적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좀 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한 윌리암 제임스의 말로 표현한다면 “회심은 분열된 자아의 통합”(conversion as the unification of a divided self)이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돌아서다’, ‘중생하다’, ‘은혜를 받다’, ‘신앙을 체험하다’, ‘확신을 얻다’ 등 회심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분열과 잘못과 열등감으로 시달려 오던 자아가 종교적 실재를 확실하게 파악함으로써 의롭고 자신 있고 행복한 자아로 변화하는 점진적인 또는 갑작스러운 과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회심은 반드시 이와 같은 도덕적 변화를 수반한다.
이러한 정의는 회심에 관한 몇몇 중요한 전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전제들은 제임스의 권위로 인해 종교심리학 분야에서 아직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회심을 정의할 때, 어떤 학자들은 신학적이며 하나님의 개입을 암시하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어떤 이들은 이 회심의 행동을 경험적인 관점에서 보며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용어들이 가리키고 있는 현상은 서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
2) 이 정의에서 언급되는 자아는 분열될 수도 있고 통합을 이룰 수도 있다. 프로이드, 융, 랭크, 설리반, 호니, 프롬, 로저스, 마슬로, 그리고 코후 같은 후대의 자아 심리학자들은 한층 다듬어진 자아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모든 개념들은 제임스의 회심정의에,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것이다.
3) 제임스의 회심 개념에 내포된 또 다른 전제는 자아 내부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바울과 어거스틴의 종교적 체험이나 신학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만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자, 이제 일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나서 그 일을 꼭 하리라고 굳게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할 뻔했을 뿐 결국 하지 못하고 말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제임스는 이에 관해서 “어거스틴은 그의 심리학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극심한 갈등으로 시달리는 자아의 분열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는 자아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자아가 분열하면 우리 자신이 갈등을 일으킨다. 아무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아와 미래 지향적인 자아 그리고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 사이의 갈등이다. 회심 경험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은 회심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4) 제임스는 회심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회심은 초자연적인 관점뿐 아니라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제임스는 행동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 신학적 추구로서의 종교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이 조성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 이론이나 신학교리가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면서 이 창조적인 긴장을 포기한다면 두 분야가 서로 관련되는 영역은 탐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5) 제임스는 회심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회심은 점진적일 수도 급진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회심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보증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보는 교회들은 격렬한 감정이 따르는 순간적인 회심만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종교적 회심은 급진적이고 심리학적인 회심은 점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욱 급진적인 회심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돌리고 더욱 점진적인 회심은 종교교육이나 올바른 정신 발달의 결과로 여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은 회심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점진적으로 일어나든 급진적으로 일어나든 간에 그 과정이 늦고 빠를 뿐 진정한 회심은 모두 똑같은 도덕적 변화를 수반한다.
제임스가 회심을 정의하면서 제시한 종교 심리학의 이와 같은 다섯 전제들은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정의는 지금도 회심 연구를 위한 작업 가설로 사용되고 있다.
2. 회심의 효과
1) 성장을 촉진시킴
촉진이라는 말은 우리의 발달 과정이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인해 가속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을 촉진제로 보는 것은 회심 경험이 우리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가속화하고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처음으로 시도한 학자는 스탠리 홀과 에드워드 스타벅이다. 스타벅은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청년기의 성장 과정에 비추어 볼 때 회심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아동기로부터 벗어나 성숙한 자기 성찰을 시작함으로써 크게 성장한다. 이때 겪는 스트레스와 혼란은 오히려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가속화시킴으로써 단축시키는 효력을 지닌다.... 회심 역시 우리를 다양한 정서적 위기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발달 과정을 강화하는 한편 짧게 단축시키고 있다.
스타벅은 청년기의 성장과 회심을 지나치게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표본 집단이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융과 에릭슨의 연구는 스타벅의 이러한 단점을 어느 정도 시정해 주고 있다. 칼 융은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극심한 신앙의 위기들이 주로 35세 이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입은 마음의 상처보다는 성인들의 의미 상실에서 신경증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에릭슨 역시 청년기보다 다른 시기의 혼란과 스트레스 역시 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외로움에 직면하여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성년 초기, 남을 위한 생산성과 자기 도취의 침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성년기, 그리고 인격적 통합과 절망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노년기 등을 들고 있다. 이 시기 동안에 우리는 분열된 자아를 통합시키기 위한 싸움을 통해서 성장한다. 에릭슨이 말하는 인간의 덕목인 사랑, 돌봄, 지혜를 지향하는 자아의 성장은 늦을 수도 있고 빨리 진행될 수도 있다. 회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들일 수 있다. 이 때 회심은 우리를 정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발달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회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발적으로 맹세함으로써 전과 완전히 다른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최초의 경험 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퇴행시키는 회심의 경험
회심을 성장 촉진제로 보는 스타벅의 관점은 회심이 항상 완전한 성숙을 향한 성장 과정에서 일어날 뿐, 유아적인 상태로의 퇴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제임스는 병든 종교와 건전한 종교를 구분하면서 종교 심리 병리학의 출현을 예고하였는데, 종교 심리 병리학은 회심이 성장 과정을 단축시키기는 하지만 이미 진행중인 유아 상태로의 퇴행과정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 뚜렷한 특징은 퇴행적인 개종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나치게 광적인 신앙생활이다. 이러한 회심은 대부분 교만, 증오, 편협, 강박적인 개종 그리고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순교하고 싶은 자학적 욕구를 일으킨다. 또한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회심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폭군처럼 되어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한다.
2) 분열된 자아를 통일시킴
회심은 분열된 자아를 통일시켜 주는 매우 바람직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 분열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분열증과는 다르다. 정신분열증은 전문적인 용어로서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환상적인 세계로 도피하는 증상을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임상적으로 뚜렷한 정신질환 증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딜레마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1) 성실성의 딜레마
분열된 자아가 처해 있는 첫 번째 딜레마는 성실성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면, 18세부터 25세 사이의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양육받아온 방식과 친한 친구들이나 또래 집단의 생활양식 중에서 어떤 것을 따를 것인가 하는 갈등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들은 부모에 대한 효심과 또래들에 대한 성실성을 모두 지키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서 19세의 어떤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부모에게도 잘하고 싶었지만, 가출하기도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을 수가 없었다고 하자. 이 경우 성실성의 딜레마를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일 만한 새로운 대상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대상은 지금까지 자신의 에너지를 습관적으로 소모해 왔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차원 높은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부모에 대한 효성과 또래들에 대한 충성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게 해준다. 이 새로운 대상은 자신의 삶에 등장한 새로운 인도자, 예를 들어 목회상담자, 교사 또는 선배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이나 진로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또래 집단의 신념 체계를 받아들일 때에도 더 차원 높은 대상에 몰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 젊은이들은 새로운 관심을 중심으로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감으로써 성실성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2) 권위의 딜레마
분열된 자아의 두 번째 딜레마는 권위의 딜레마이다. 부모, 아내나 남편, 직장의 상사 또는 제도의 권위와 투쟁을 벌일 때 우리는 갈등에 빠진다. 우리의 종교적 갈등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배운 것들에 대한 회의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에게서 습득한 종교적 전통이 자아의 일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아의 거부를 받고 있을 때 우리의 자아는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충동과 싸움을 한다. 부모를 버리고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자아 내부에서 벌어진 투쟁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를 떠나 결혼하는 것도 부모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지배하려고 다투거나 가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싸우는 것도 권위 딜레마의 또 다른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부부가 함께 받아들임으로써 이와 같은 딜레마를 벗어나게 되면 서로를 존중하는 겸허한 삶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새롭게 태어나는 결정적인 변화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권위 사이의 갈등은 권위 딜레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없다. 만일 있다면 나는 이미 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니체가 이러한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투쟁은 이른바 히브리스(hybris)로 알려져 있는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를 ‘원초적인 자기 도취’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회심은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받아들이게 한다.
(3) 자유와 억제 사이의 갈등
분열된 자아가 처해 있는 세 번째 갈등은 자유와 억제 사이의 갈등이다. 이와 같은 갈등은 자유를 원하는 충동과 제도적인 종교의 굴레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가장 격렬해진다. 마틴 루터는 회심을 통하여 이러한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카톨릭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루터보다 훨씬 이전에 어거스틴이 경험했던 회심은 방종과 타락으로부터 카톨릭의 질서와 규율로 돌아가는 전환이었다.
자아가 분열되어 있는 사람이 이러한 성실성, 권위, 그리고 자유와 규율의 딜레마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종잡을 수 없는 불안과 순환 논리의 포로가 되어 끝없는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이와 같은 딜레마들을 확실히 깨닫고 나면 적어도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결단을 책임 있게 내려야 할 지를 알게 된다. 책임 있는 결단은 철저한 회심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중대한 요소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 사회 제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관계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결정적인 자양분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관계들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회심은 그 체험자들 내면의 분열을 통합시켜 준다. 회심을 하기 전에 체험자들은 이상 자아와 현실 자아 사이의 분열 때문이든, 이 세상을 향한 욕망과 신을 향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분열 때문이든, 어쨌든 내면적인 분열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는다. 제임스는 이것을 ‘분열된 자아’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내면적인 분열은 그에게 여러 가지 종류의 정신, 신체적인 질병을 일으킨다. 그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러한 위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되나, 많은 경우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의도적인 모든 노력을 포기했을 때, 그는 어떤 이상한 힘이 그의 영혼을 치유하려고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때때로 신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이 힘을 어떤 신적인 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를 어떤 정동적인 체험상태--소위, 신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는 황홀경의 상태--로 이끌어가며,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종교체험자의 분열된 자아는 통합되는 것이다.
3) 삶의 방향을 바꿈
이와 같은 회심은 지금까지 논한 회심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회심이 삶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개인적인 결단과 변화 방향을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개입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회심 과정은 점진적일 수도 있고 급진적일 수도 있으며, 극적일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영적 전환을 일으키는 회심은 신약성서에 ‘마음이나 생각’의 변화로도 표현되어 있다. 이 단어는 “생각을 돌리다” 또는 “깊이 뉘우치다”로 번역되고 있다. 이 “돌아서는” 순간에 폐쇄적인 태도로부터 개방성으로 그리고 의심으로부터 신뢰로 대전환이 일어난다. 구약성서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 ‘회개’라는 단어 역시 ‘돌아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계약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통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된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면 길을 잃고 헤매기 마련이다. 이때 회개를 통하여 올바른 방향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필요하다.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회심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철저한 회개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모두 맡김으로써 자기를 포기하게 한다. 회심이란 단어는 주로 “변화됨”, “변화되다” 등 수동태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 사실은 회심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던 투쟁적인 태도를 버리고 실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평안한 관계로 들어가는 자기 포기 행위”로 보는 관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 갈등과 투쟁을 그치고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능력을 지닌 그 분을 깊이 신뢰하게 된다.
알콜 중독자 치료에 일생을 바쳐 온 정신의학자 헤리 티보우는 외부의 요구에 대한 단순한 굴복과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진정한 자기 포기 행위를 구분하고 있다.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너무도 무력함을 깊이 깨닫는다.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에 지적으로 승복하기보다는 인간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기 포기가 가능하다. 자기 포기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이에 반해 굴복은 억지로 따를 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승복이 아니다. 이 철저한 자기 포기 정신은 알콜중독자 치료협의회의 “회복을 위한 12단계”중 첫 두 단계에 나타난다.
첫째, 우리는 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삶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
둘째, 우리는 전능하신 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을 되돌려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 두 단계는 알콜 중독을 완전히 극복하는 과정의 첫 관문으로서 많은 중독자들이 이를 통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이와 같이 자기 포기 능력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회심자들은 그들의 체험을 통해서 그들이 실제로 그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과는 다른 더 깊은 차원의 실재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는 삶이 더욱더 영원한 삶이며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삶은 이제 그 이전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되고, 그들의 인격 역시 그 이전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격이 되는 것이다.
3. 회심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
1) 위기형 회심
이 회심은 비교적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진행되며 또 개인적인 갈등의 돌연적인 해결이 포함되는데 이러한 해결은 의식될 수도 있고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제임스는 이러한 유형을 ‘자기포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충격적인 체험은 17-18세기의 대각성 운동시에 많은 신자들--특히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이 갈망하였고, 현재는 오순절교도(pentecostals)이나 그 밖의 복음교도(evangelicals)들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위기형 회심은 확인 가능한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단계들은 기술하는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의식적인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혼란, 불안, 갈등의 시기가 온다. 사람들은 실제 혹은 가상의 죄악에 대해서 우울해지거나 죄책감에 싸일 수도 있고, 분열되고 산산이 찢어진 것처럼 느낄 수도 있으며, 공허하거나 불완전하며, 삶에서 모든 의미를 잃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두 번째 단계에는 종종 매우 강한 감정을 동반하는 빛의 체험(illumination) 혹은 통찰의 갑작스런 느낌이 포함된다. 또 흔하게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단계는 고조된 자기포기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삶의 형태의 근본적인 변화 속에서 개인적 우주의 중심은 자아로부터 신 혹은 새로운 신앙의 요구로 옮겨진다. 죤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회심은 명백하게 무의식적인 갈등에 대한 이와 유사한 갑작스런 해결을 보여준다.
나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강독하고 있던 올더스케잇 가의 어떤 모임에 본의 아니게 가게 되었다. 8시 45분경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진정으로 역사하신 변화를 설명하는 동안 나는 가슴속 깊이 이상하게 뜨거움을 느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신 그리스도에게 신뢰를 느꼈다. 그가 ‘나의’ 죄를 사해주셨고 ‘나의 것’까지도 구해 주셨으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 번째 단계는 통합, 평화, 고요, 안도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죤 웨슬리는 확신에 대한 새로운 느낌에 대해 말을 했다.
2) 점진적 회심
점진적 회심의 체험은 첫 번째 유형에서와 같은 갑작스런 위기의 체험은 없지만 새로운 삶과 신앙으로 뚜렷하게 전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는 스타벅을 쫓아서 이것을 의지적(volitional) 유형의 회심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의지가 ‘자기포기’ 상태에서보다는 좀더 활발하고 의식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마다 정의나 분류체계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람들 가운데 몇 퍼센트가 점진적인 회심을 체험했는가 하는 것은 말하기 어렵다. 드레이크포드와 로버츠의 신학도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들은 각각 44%와 40%의 점진적인 유형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갑작스런 회심과는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십대들에 대한 1978년의 조사에서는 명확한 전환적 변화를 보고한 사람들 중의 82%가 점진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5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회심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323명중 61.6%인 182명이 점진적인 회심을 경험했다고 답하였다(급격한 회심 80명, 특별한 회심경험 없음 27명, 기타 6명).
3) 무의식적 회심
제임스는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회심을 체험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는데 그 자신도 그들 속에 포함시켰다. 그는 주장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너무 비관적이거나 유물론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너무 둔감하고 메말라서 종교적 신앙의 열정과 평화를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종교적이긴 하지만 회심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서 전환점을 감지하지 못한 채 점진적으로 종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스타벅은 자신의 연구에서 종교적 성장이 비교적 평온 무사했던 이러한 유형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종교에서 탈피했고, 유치한 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표현했다.
스타벅은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1) 아동기의 종교적인 주위환경, (2) 완고하고 독단적인 견해로부터 합리적인 자유, (3) 발달하는 데 있어서 매 시점마다 아동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할 것, (4) 신앙과, 의심할 수 있는 자유가 안정된 상태로 혼합을 이룰 것 등이었다.
스코비는 영국 신학생의 회심체험에 대한 조사에서 이러한 종류의 발달을 ‘무의식적 회심’이라고 불렀다. 그의 응답자 중 전체적으로는 30%가 이러한 유형의 회심을 주장하였는데 각 학교의 교파에 따라서 9%에서 45%까지의 범위를 보였다.
4) 계획된 회심
오츠는 개신교가 대각성운동과 같은 행사로부터 회심을 제도화시킨 것을 일컫기 위해 ‘계획된 회심’(programmed convers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여러 교파에서는 회심이 신앙에 필수적인 주요 관문이 되어 왔다. 젊은이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연령에 이르고 난 후,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에게 회심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은 종종 ‘부흥회’와 연결되었다.
회심은 실제로는 하나의 예배의식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초대의 의식’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이며, 보통 부흥회나 그 밖의 다른 설교예배를 할 때 마지막 부분에서 발생한다. 공개적인 반응은 위기형 회심에서처럼 영적 갈등의 갑작스런 해결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의지적인 회심이나 점진적인 종교적 성장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1) 회심 혹은 견신례(Confirmation)
아동은 ‘초심자’ 교육을 통해서 회심의 결정을 쉽게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의식은 성찬을 보다 중시하는 교회에서의 견신례와 유대교에서 행하는 ‘소년 혹은 소녀를 위한’ 성년축하식과 공통점이 있다. 아동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게 되면서 이러한 성년식은 아동이 한 개인으로서 지금까지 부모에게서 전달받아 온 신앙을 재확인하기 위한 자발적인 선택의 의미를 갖는 의식이 된다.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회심이나 견신례에서 중요한 것은 아동이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가의 여부와 신앙이 그들의 전체적 삶에서 통합적인 힘이 될 것인가에 대한 여부이다. 교회에서 행하는 어떤 계획된 회심은 또래집단이나 성인들에 의해서 집단적인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잘못하면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
(2) 부흥회적 회심
부흥회는 보통 공개적인 회심을 유도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데 음악, 설교, 이와 관련된 선전이나 개인적인 간증 등이 모두 이 목적을 위해 동원된다. 캠프, 수련회(혹은 피정), 그 밖의 다른 대중모임들도 동일한 의도를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신자들이 새롭게 갖는 헌신적 열의를 생각할 때 특히 그렇다. 신앙 대각성 운동의 부흥회가 현대적인 부흥회의 원형으로 여겨지지만, 그 전례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다. 유대인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성에 대해 행한 전도와 오순절 날의 사도(사도행전 2장)들은 가장 영적이고 현대적인 부흥회의 취지와 그 뜻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미국과 세계 각지에서 경건주의 부활에 크게 공헌했던 빌리 그래함, 오럴 로버츠 등과 같은 대중 부흥사들도 제도화한 회심을 이용하여 많은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대중 집회들도 제도적인 회심 프로그램을 통해서 사람들을 자신들의 모임에 끌어들이고자 한다.
* 주의해야 할 부작용
회심이 제도화되면 심각한 몇몇 부작용들이 따를 수 있으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로, 부흥운동은 사람들이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회심할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따라서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회심이 인위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로, 이 외부 압력은 사람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순종하고 따르려는 성향을 일깨울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저항하고 거부하는 반항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셋째로, 하나님에게 돌아서려는 순수한 신앙보다도 외래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서 부흥사가 자신의 신적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구, 부흥사나 교회 또는 교단의 홍보와 재정을 유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부흥운동과 교회의 신자들을 배가시키려는 욕심이 더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량 생산 체제들과 마찬가지로 개종자들을 양산해 내는 부흥 운동도 사람들을 획일화시키는 비인간적인 권력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화한 회심의 이와 같은 단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학자로 리스튼 밀즈가 있는데, 그는 부흥사에 의해 유도되는 제도화한 회심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징이나 절차는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들에 오랫동안 의존하다 보면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나 진리 자체는 사라지고 형식만 강조됨으로써 처음 만들어지던 때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의미를 지니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부흥회도 마찬가지이다. 강단 앞으로 걸어 나오는 상징적인 행위가 회심과 회개의 깊은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오늘날 이 행위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구원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절대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회심은 제임스가 말했던 진정한 종교적 회심과는 관계가 멀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의 내부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은 심오한 변화가 뒤따라야만 참된 신앙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부흥사들이 바울이나 빌립보 간수의 회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열광적인 부흥 집회의 결과를 조사해 보면 그 설교들이 대부분 사악한 세력과 실제로 싸울 수 있게 도와주기보다는 그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나다나엘 호손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영감을 얻어 당시의 뉴 잉글랜드 교회 생활을 풍자하는 「천국행열차」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멸망의 도시로부터 하늘의 도시에 이르는 길이 일종의 관광 여행 코스로 변하여 요금만 내면 열차를 타고서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 실망의 늪, 절망의 쇠우리, 아폴리온과의 전투 등을 마음껏 관람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요즘 아이들이 많이 부르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관광 여행으로는 의미 있는 어떤 변화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종교 전통에서도 나름대로의 회개, 회심, 재투신(recommitment) 등에 대한 또 다른 계획된 접근법이 있다. 유대교의 욤 키퍼(Yom Kippur)는 1년에 한 번 있는 회개일이다. 힌두교, 불교, 회교에서의 축제나 순례는 어떤 때에는 열렬한 재투신의 시기가 되기도 한다.
5) 세속적 회심
회심과 유사한 체험이 모두 종교적인 내용을 지니지는 않는다. 오츠는 마슬로가 이름붙인 ‘절정체험’(peak experience)이 그 역동성과 효과의 면에서 회심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절정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 어떤 때보다도 자신의 자아가 완벽하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도 통전적인 존재로 보이게 된다. 즉, 그의 자아는 분열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경험하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가 통일되어 있고, 목표가 분명하고, 내적인 갈등을 겪지 않고, 자아의 각 부분들이 상호 협조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기능을 한다. 그는 순수하고 독특한 자기 자신과 만날수록 우주와 하나가 된다. 절정을 경험하는 그는 자신의 능력과 모든 잠재력이 마음껏 발휘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완벽하게 살아가지만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다. 그는 모든 억제, 근심, 공포, 의심, 조종, 그리고 자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자긍심, 자기 용납, 자기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발적, 개방적으로 보다 순수하게 행동하며(감추는 것 없이 솔직하게 그리고 어린이처럼 꾸밈없이 행동한다) 보다 자연스럽고(단순하고, 느긋하고, 주저하지 않고, 평이하고, 진지하고, 꾸밈이 없고, 원초적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스럽게 표현한다(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본능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표출한다).
절정을 경험하고 난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하나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릴 것이고, 비종교적인 사람은 운명, 주위 사람들, 과거, 부모, 세계 그리고 기적을 맛보도록 도와준 그 밖의 어떤 대상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 감사는 예배, 기도, 찬양, 봉헌 등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다. 절정 경험은 이처럼 신비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종교 심리학을 비롯한 모든 심리학 분야에서 종교적이로든 세속적이로든 간에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 세속적 회심: 어떠한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함
마슬로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햇빛, 칼슘 또는 사랑뿐 아니라 종교나 종교 대용물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종교적 욕구를 “자신과 주위 환경을 이해하기 원하는 인식적 욕구”라고 부르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다. 정신질환자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이상한 사고 체계도 자기 자신에게는 나름대로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마슬로는 이렇게 언급한다.
인간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아무리 추구해도 얻지 못하게 되면 솜털 만한 희망만 눈에 보여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게 마련이다..... 우리는 타당하고 유용한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다. 믿도록 강요받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하고 참되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그리고 목숨을 바쳐 헌신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 체계를 원한다.
그러나 훈계나 강요를 일삼는 종교와 참신한 가치 체계를 제공하는 종교 대용물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특히 후기 청년기 그리고 전기 성년기의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서 그는 부모의 신앙과 심리학 이론 체계(그에게 있어서의 종교 대용물)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후자에 더 끌린다면 부모와 교회 그리고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그가 과거의 신앙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든 과제에 과감히 도전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 심리학 체계들이 그 본질상 종교 대용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완전히 버리는 최악의 상태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오히려 삶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고 적절한 해석을 잃어버리고 더 깊은 상처를 가질 수가 있다.
* 역회심(counterconversion)
특수한 형태의 어떤 세속적 회심은 역회심이라고 불려 왔는데 이것은 보통 종교신앙으로부터 비종교(irreligion)로의 회심을 말한다. 제임스도 역회심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말한 적이 있었고, 프라트도 이탈리안 사제 로베르트 아르디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르디고는 과학적 실증주의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몇 년 동안 고수해 오다가 갑자기 자신이 실증주의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발견한 새로운 체계는 대단히 경이스러운 것이었고 거의 완벽했으며 흔들림 없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내가 행한 마지막 성찰은 나를 종교적 믿음 속에 구속하려고 하는 마지막 위협을 일거에 없애버렸다. 마치 평생동안 종교적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새로운 사고가 내게 찾아 들어왔고, 나 자신의 순수한 과학적 성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연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종교적 회심만이 회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심의 잠재력은 인간의 심성 안에 존재하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최근 교회에 나오기를 포기했던 젊은이들 중 불교를 택하거나 무종교를 택하는 것의 예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회심에 대한 이러한 심리적 모형과 유추적 비유는 모두 회심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것들은 회심을 더 잘 설명해 주고 명확하게 해주지만, 종교적인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심리적 설명들은 심리학적 연구의 영역밖에 있는 ‘계시와 같은’ 신적인 중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 글들은 보충자료입니다.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회심 과정에 대한 분석 (보충자료1)
회심은 19세기 후반부터 심리학에서 중요한 주제였다. 당시 회심의 명백한 형태는 부흥회에서 일어났던 급격한 회심이었기 때문에, 스타벅이나 스탠리 홀 등에 의한 초기 연구들은 주로 청소년기의 극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로서의 회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비록 종교심리학이 갑작스런 회심에 관심을 갖고 있음에도, 그 후 많은 회심연구에서는 대부분의 회심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전생애를 통해 전인격이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심오한 지적변화, 정서적 성숙, 증가하는 윤리적 민감성과 행동,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강렬한 사랑 등의 종합적인 면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즉, 한편에서는 극적인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서서히 미묘한 그러나 심오한 과정으로서 회심을 서술한다.
윌리암 제임스가 극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회심과정을 위기를 통한 자아분열과 통합으로압축해서 설명했다면, 계속적으로 변화해가는 회심에서는 여러 과정의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늘날 눈에 띄는 급격한 회심보다 점진적인 회심을 경험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회심과정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 회심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람보(L. Rambo)가 제시한 이론을 중심으로 일곱 단계의 과정으로 나누어서 소개해 본다.
1) 상황(Context)
회심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심이 일어나는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개인적 환경은 회심과정을 촉진하거나 방해할 수 있다. 비록 회심이 개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환경은 개인의 정체성과 소속감, 의식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시골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세계는 다르고, 불교신자는 기독교인들과 비교해서 다른 상징, 의식, 신화의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회심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정신의학자 리프톤(Robert J. Lifton)은 현대세계에서, 문화적 전통의 침식, 높은 유동성, 빠른 의사소통망, 세속화들로 인해 자아는 약해지기 쉬운데, 이런 자아의 약한 상태는 보수적인 종교로의 회심을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분명한 대답과 신념체계를 제공하는 종교는 오늘날 약한 자아를 갖고 수많은 선택의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안정을 주고, 중심을 상실한 세계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일관성 있는 중심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세일즈(S. M. Sales)도 1920년부터 1939년 사이에 미국의 8개 종파를 대상으로 행해졌던 회심 연구에서, ‘권위주의적’ 종파의 신도의 증가는 경제적 불황과 연관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비권위주의적’ 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경제적인 성장기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고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장로교회는 이른바 ‘좋은’ 7년동안 보다는 ‘안 좋았던’ 6년동안 개종자의 30%가 줄어들었고, 반대로 제 칠안식일교회는 좋은 해보다 나쁜 해에 68%나 더 많은 개종자를 끌어들였다. 세일즈는 마찬가지로 워싱톤 주의 시애틀 지역에서 1961년과 1970년 사이에 경제적으로 좋은 4년과 경제적으로 나쁜 4년을 구별해 냈는데 이때 연합장로교회(비권위주의적)는 좋은 해에 더 많은 개종자를 끌어들였고, 로마카톨릭 교회(권위주의)는 나쁜 해에 더 많은 개종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회심에 있어서 주위 상황이 영향을 주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 위기(Crisis)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경계선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데, 이럴 때에는 스트레스가 적절히 취급되고 정서적인 안정이 유지되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삶에서 자신의 실존이 흔들릴만한 갈등을 일으키는 위기를 만나게 될 때, 이러한 위기 속에서 이제까지 그의 삶을 지탱해주던 신화, 상징, 의식, 목표, 삶의 표준들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파괴적이고, 의미 없고 소외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습관적인 삶의 방식들이 소용없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되고 어떠한 변화가 실존적으로 절박한 것이 되게 된다.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초자아와 이드 사이의 갈등에서 위기가 온다고 본다. 특히 아버지와의 문제있는 관계, 불행한 어린 시절, 분열되고 왜곡된 개인적 관계 등의 정서적 문제가 후에 그의 삶에서 위기를 불러오는 동기가 된다고 본다. 프로이드의 갈등이론에 영향을 받은 타울레스는 청소년의 성적 갈등이 의식화 될 때 커다란 불안을 경험한다고 하며, 이것이 회심을 갖게 되는 주요 동기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이런 갈등을 해결하도록 돕는데, 이 갈등 속에서 성적 에너지는 에로틱한 감정에 대한 적절한 출구 대신에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관점에서 보는 회심의 동기와는 달리, 칼 로저스 같은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 사이의 틈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 안에 조화를 시키지 못할 때 위기가 온다고 본다.
또한 생의 각 단계마다 찾아오는 위기가 있을 수 있는데, 칼 융은 35세 이후에 정신질환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극심한 삶의 의미의 상실의 위기(신앙적 위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에릭슨은 여러 위기들, 예를 들면, 청소년기에는 스트레스와 정체성 혼란을 겪는 정서적 위기가 있고, 중년기에는 남을 위한 생산성과 자기 도취의 침체 사이에서 갈등의 위기가 있고, 그리고 노년기에는 인격적 통합과 절망 사이에서 오는 갈등의 위기 등 생의 단계마다 다양한 위기가 있음을 말한다. 특히 회심심리학을 연구하던 초기 학자들은 회심이란 사춘기 때의 현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청소년의 심리적 스트레스 및 격정이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스타벅은 격정과 스트레스, 의심, 사회의식의 확대, 지적 통합, 자아정체감의 탐색, 극도의 혼란-불안감과 불안정, 불확실성의 위기는 높은 수준의 자아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위기의 요인은 삶의 의미 추구에서부터 인생의 공허, 두려움, 비인간화된 자기 모습에 대한 절망, 일상적인 삶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위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위기들이 반드시 회심을 야기시키는 것은 아니나, 제임스를 비롯한 모든 회심연구 결과에서 보듯 회심을 가져오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3) 질문(quest)
질문은 위기에 처한 사람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최대화하려고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사고, 느낌, 행동의 방식을 추구한다. 옛 생활방식의 불만을 벗겨줄 수 있는 새로운 사고나 행동방식을 조심스럽게 살피고자 다양한 경험--신비적인 종교집단, 집단감수성 훈련그룹, 정치적 활동, 종교, 또는 심리요법 등과의 만남--을 할 수 있다.
질문에서는 회심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보통 회심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며 따라서 회심자는 그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무의식적 욕구에 반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질문은 회심자의 적극적인 면이 같이 존재함을 말해준다.
월터 콘(Walter Conn)은 콜벅, 에릭슨, 피아제, 케건, 그리고 파울러 같은 발달심리학자들의 이론을 연구한 후, 이들의 작업이 자기초월과 회심에 대한 개인의 내재적 동기에 대한 열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발달단계를 통해서 사람은 인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더 성숙해지게 되는데, 바로 이 발달단계는 초월에 대한 원초적인 인간의 갈망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심이 과거 어린 시절의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라 보는 정신분석학과는 달리, 이와 같이 콘은 보다 성숙해지고자 하는 건전한 질문이 회심을 이루는 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보고있다.
4) 만남(Encounter)
이 단계에서는 질문에 답을 제공해 주는 개인이나 그룹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 부활과 같은 성서이야기들을 가지고 목사가 설교할 때, 이 설교를 잠재적 회심자가 최근의 이혼이나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야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경우, 종교의 상징적 체계는 그럴듯하고, 의미있고, 매력적이 되며, 잠재적 회심자는 (새로운 삶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해) 이 체계와 동일시하고 이 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남을 맺은 사람은 이제 삶의 의미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만남의 단계에서는 잠재적 회심자의 애정적, 지적, 인지적 욕구뿐만 아니라 또한 회심을 주고자하는 자의 욕구도 포함된다. 과거의 회심연구는 주로 회심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잠재적 회심자와 회심을 주고자 하는 자 사이에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존재한다.(예를 들어, 새로운 회심자를 찾기 위한 선교사의 열성적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남의 단계에서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 또는 개인적 매력은 잠재적 회심자에게 역할모델, 삶의 지침, 추종자의 가치에 대한 확증 같은 것을 주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렇듯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회심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친구나 친척들과의 만남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어떤 잠재적 회심자에게 있어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자와의 만남은 갈등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고 더욱 건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에너지를 사용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만남은 일반적으로 나이나 성별, 교육수준이 비슷한 사람, 친척이나 친구들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한다.
5) 상호작용(Interaction)
사람들은 개인이나 그룹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체적인 욕구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람보는 전통적으로 욕구의 네 가지 범주는 의미의 지적체계에 대한 촉구, 정서적인 소속감에 대한 욕구, 새로운 행동양태에 대한 욕구--즉, 새로운 방향의 가치와 일치하는 삶의 구체적인 지침이나 방법--그리고 이상을 구체화하는 지도자에 대한 욕구라고 말한다.
만남을 가진후 그룹과의 관계를 계속하면, 상호작용은 더욱 강해지는데, 이 단계에서 잠재적 회심자는 그룹의 기대, 삶의 양식, 가르침에 대해 더욱 배우게 된다. 사빈과 아들러(T. Sarbin and N. Adler)는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1) 새로운 삶의 방식의 모델을 제공하는 교사(혹은 멘토)와 회심자 사이의 관계의 중요성. (2) 회심자가 새로운 종교적 체계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의식(ritual)의 중요성. 이 의식을 통해 인지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새로운 신념과 실천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얻게 된다. (3) 신체적 경험의 중요성. 회심자가 금식을 하던 명상을 하던 의미있는 변화의 체계에서 육체의 참여는 필수적인 요인이다. (4) 죽음과 거듭남의 은유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독교적 이미지는 회심자가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한다. (5) 외적인 종교적 이야기가 자신에게 관계를 갖고 압도적인 것이 되면서 내면화되기 시작하는 것.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종교적 회심에서 사람들이 갖는 강력하고도 예외적인 경험을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 회심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상호작용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통찰력을 주고 있다.
6) 위탁(Commitment)
이 단계에서 회심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옛것보다 우월하다고 결정하고--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철저한 자기포기를 통해서--적극적으로 과거와 단절한다. 위탁을 통해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일상적인 삶은 새로운 은유와 이미지, 새로운 이야기로 해석하도록 요구되어진다. 때때로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위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의식(ritual)--예를 들면, 세례나 그들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간증”--이 필수적이다. 간증은 회심으로 이끌었던 경험이나 삶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회심자의 개인의 이야기를 그룹의 이야기와 명백하게 연결시키는 창조적인 과정으로, 회심자가 이 그룹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증언을 하게 된다. 또한 세례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것을 선포하는 명백하고도 경험적인 과정이다.
이 위탁의 과정에 대한 흥미있는 통찰을 모리니스(Alan Morinis)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입회식때 어떤 그룹들은 고의적으로 고통을 끌어내기 위해 신체의 절단(할례, 매질, 손가락자르기, 이빨뽑기 등)을 요구한다. 그는 고통을 끌어내는 것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자의식을 고양하는 것과 그룹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에서는 회심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신체의 물리적 절단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회심에서 이와 같은 고통은 강렬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죄와의 투쟁,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에 대한 묘사에서 잘 드러나는데, 하나님에게 돌아서기 전에 죄와 부패에 대한 강조는 바로 절단의식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많은 회심자들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의 전적인 굴복은 그들의 회심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보고한다. 예를 들면, AA에서도 사람들은 그들이 알코올 중독자이고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에는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먼저 직면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그런 무력감에 대한 철저한 인식 위에서 사람들은 알콜 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은 기독교 회심에서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죄인으로서 그들의 곤경에 직면할 때, 그런 인식에 대한 굴복 그리고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하는 때가 바로 새로운 삶을 위한 힘을 얻게 되는 때이다. 잠재적 회심자가 옛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위탁을 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두 세계 사이에서의 동요는 매우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경계를 넘는 결정은 엄청난 안정감과 삶의 기쁨을 가져온다.
7) 결과(Consequences)
회심자마다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경험은 새로운 신념과 행동을 굳건하게 한다. 기독교인의 회심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되는 성장과 갱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 대한 메타포(은유)는 순례이다. 만일 회심자가 위탁 사건에 뒤따르는 이 순례를 시작하는 것을 실패하면, 회심자는 새로운 신앙을 떠날 수도 있다. 그리고 처음의 열정이 최고조에 이른 후에, 새 회심자는 때때로 회심후 우울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때 고조된 희망은 희미해지고 새로운 신앙을 찾은 강렬한 기쁨은 사라진다. 이러한 경우에 적절한 목회적 돌봄이 없으면 회심자는 새로운 삶과 신앙에 대한 타당성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앙안에서 성숙해질 때,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관계를 갖는 삶을 향한 순례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
회심을 가져오는 데에는 다양한 동기--다른 사람의 바람에 대한 단순한 순응으로부터 심오한 하나님 경험, 삶의 의미의 발견, 그리고 정서적 갈등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기--가 있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위에서 제시한 7단계 모델은 회심의 과정에 대한 여러 다양한 심리학적 설명들을 종합해서 나름대로 일관성 있게 정리한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회심이해가 우리의 전통적인 회심이해에 어떠한 도전을 주고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회심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의 한계와 공헌(보충자료2)
제임스에 따르면, 종교체험이란 인간의 심층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프로이드와는 달리 기독교에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융도 모든 신적인 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종교체험을 통하여 그 체험자가 어떤 신적인 것을 느끼고 체험했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무의식 영역에 있는 것을 체험하고 자신의 의식 영역에 동화시켰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것을 의식화하고 동화시키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된 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은 그 이전의 의식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서 그의 인격은 변화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적인 차이가 아니라, 무의식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결과들 즉 마음의 평화나 윤리적 변화 등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적 접근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의 자리가 없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회심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의 조사에서, 그들은 심리학적인 어떤 구조에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회심을 경험했음을 본다. 제임스도「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에 모아 놓은 많은 종교체험담들을 통하여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존재로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고백했던 예수는 비인격적인 하나의 힘이 아니라, 종교체험 후에 체험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서 헌신의 삶을 살기에 충분한 인격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인격적인 하나님을 배제하고 시작하는 심리학적 설명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이 초자연적 관점뿐 아니라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행동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 신학적 추구로서의 종교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어떤 심리학 이론이나 신학교리가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면서 이 창조적인 긴장을 포기한다면 두 분야가 서로 관련되는 영역은 탐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회심을 단 일회의 하나님의 역사라는 일반적 해석을 넘어서 제임스의 분열과 통합을 통한 급격한 회심, 그리고 조금 더 긴 과정으로서의 회심 분석 등으로 폭넓게 이해를 시도하는 심리학적 통찰력은 전통적인 회심이해를 좀더 폭넓게 생각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격렬한 감정이 따르는 순간적인 회심만을 인정하고자 하는 경향에 대해서, 심리학적 접근의 회심은 이것이 문화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과정--점증하는 의식, 고려, 그리고 통합을 포함하는 등 여러 과정--으로 서서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삶이 변화하는 깊이 있는 회심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통속적으로 “결정적인 회심의 경험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기 힘들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그것이 너무 좁은 해석임을 보여준다. 회심경험은 각 회심자의 성격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정의 형태의 회심만을 강조하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인생주기에서 갈등의 구조가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됨을 인식시킴으로,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성장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소년기의 스트레스와 혼란의 정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 성숙한 자기성찰을 하게 함으로 정상적인 발달과정을 과속화 시킴으로 단축시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칼 융이 말하는 중년기의 위기도 개성화 과정을 통해 회심을 경험할 수 있는 시기로 만들수 있다.
여기에서 심리학적 이해로서의 회심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발적으로 맹세함으로써 전과 완전히 다른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최초의 경험 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진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절실한 실존적인 문제들로 갈등하다가 해결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가오는 각 시기의 절실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회심이라 할 수 있다. 신뢰할만한 회심은 변형의 계속되는 과정이다. 처음의 변화는 중요하지만 이것은 장기간의 과정, 즉 순례의 과정에 있는 첫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즉 회심을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심리학적 접근은 제시해 준다.
셋째, 인생 주기에 따른 자연적인 고민과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회심이 있을 수 있으나, 또한 자신의 삶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새로 등록한 교인이나 오래된 교인 역시)에게는 신앙적인 도전(상호작용)을 줌으로서 회심을 경험하고 더욱 성장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음을 심리학적 접근은 제시해 준다. 오늘날 개인주의화되고 상대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 속에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나 성경적인 삶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세속화된 교인이 많은데,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메시지에 대하여 소홀해져 가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회심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과 도전을 주기 위하여 기본적이고 정확한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적인 보다 높은 삶의 차원을 설교나 개인적인 대화(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처럼),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예배나 집회를 통해 전달함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도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때 일방적인 주장이나 권위주의가 아니라 함께 생각하는 차원에서 도전을 주도록 해야 한다.
이런 바른 신앙적 도전이 필요한 것은 바른 만남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퇴행으로 이끄는 회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살츠만(Leon Salzman)은 종교적 회심을 두 유형, 즉 발전적인 성숙형과 퇴행적인 정신질환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 번째 유형의 회심은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깊게 하고 우주와 하나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한다. 이 성숙형 회심은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통합하고 불안을 해소하고 발달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두 번째 유형의 회심은 주로 정신질환 진행 과정의 일부분인 경우로, 그 뚜렷한 특징은 퇴행적인 개종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나치게 광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회심은 대부분 교만, 증오, 편협, 강박적인 개종 그리고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순교하고 싶은 자학적 욕구를 일으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회심의 모습은, 프로이드에 따르면, 종종 권위적 종교의 구조 안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회심이란 오랫동안 존재해온 무의식적 갈등을 풀기 위한 시도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프로이드는, 특히 청소년 시절 독립하기 위해 권위에 대해 투쟁하는 동안 적대감과 분개하는 태도를 종종 갖게 되는데, 회심은 이런 적대감을 흘러가게 하는 수단으로서 종종 이 기간동안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때 권위적인 아버지를 향하듯 하나님을 향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이런 경험은 방어적인 해결책으로서 권위적 종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신경증에 너무 생각이 사로잡혀서 종교적 위탁과 건강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을 고려할 여유가 없이 종교를 억압된 감정이나 두려움, 죄책감에서 나오는 반응 등으로만 추정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폴 투르니에도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인격에 영속적이고 유익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더불어 굉장한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원초적인 흥분을 느끼지 못했고 생활가운데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쁜 방향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회심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폭군처럼 되어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체험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회심의 방향은 회심의 과정에서 바른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회심을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적 가르침(언어적, 비언어적 교육)이 필요함을 회심의 여러 종류를 연구한 심리적 접근에서는 말해준다.
위의 보충자료를 읽고 다음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바랍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집안에서 자라오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3 때에 신앙에 대한 심한 회의에 빠져 있다가 무언가 답을 찾기 위해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고, 그 결과 이제까지의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내적 안정을 찾았다. 흔히 청소년 시절에 가질 수 있는 이 회심경험이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음에도, 그것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회심이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유아세례 이후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신앙을 지켜왔다고 보고, 그리고 그 종교적 경험 이후에도 살아가면서 여러 종교와 사상과 철학들을 배우면서 기독교 전통적 신앙에 대한 혼란이 있었으나 다시 신앙을 정립하면서 그 이전보다 더욱 성숙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회심을 단 일회로 규정하거나 급격한 회심만이 참된 것이라면, 그는 언제 회심헀는가? 유아 세례 받았을 때?(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기 때문에) 고3 회심 경험때? 세속철학과 전통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더욱 성숙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단 한번의 정확한 순간을 얘기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발달 단계마다 어떤 갈등이 있을 때 자아 갈등과 통합을 통해 계속적으로 더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순례의 길을 계속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