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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부정적 종교비판을 넘어서: 영성의 치유 기능

발표자: 박노권

1. 들어가면서

최근 많은 사람들은 온전한 전인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인간 내면을 성찰하기 위한 노력은 심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프로이드와 융을 중심으로 한 심층심리학에서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드의 경우 무의식에 있는 억압된 내용을 의식의 세계로 가져오게 될 때 심리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융의 경우는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면 영혼의 아픔이 있을 것이고, 이 둘이 만나질 때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참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인건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때 성서는 이러한 전인건강을 위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즉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해온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관을 포함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담고 있는 원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영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또 한편 인간의 심층을 깊게 분석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상징이나 영성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심리적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미국에서는 영성의 주요 요소인 기도와 상담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리처드와 버긴(Richards and Bergin)의 경우 상담자들과 치료자들이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소홀히 했던 역사를 비판하면서, 종교적 영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상담에서 영적 문제들이 민감하게 효율적으로 다루어질 때 성공적인 결과가 더욱 많아진다고 보고한다. 무들리와 웨스트(Moodly and West)도 전통적인 치유 수행 특히 기도와 같은 것이 어떻게 상담과 심리치료에 통합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이와 같이 영성은 사람들의 심리적 안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는 주장의 글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어떠한 치유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인가?

1) 먼저 종교가 치유에 어떤 기능도 할 수 없다고 보는 부정적인 입장을 먼저 살펴본다. 종교가 무의식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통해 치유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융과는 달리, 프로이드는 종교를 유아적이고 현실과 떨어진 것, 강박적 행위의 현현으로 보면서, 오히려 인간의 성장을 막고 억압만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부정적으로 볼 때 프로이드의 영향이 컸다고 봄으로 그의 종교이해를 먼저 분석하고 왜 그가 종교가 치유 기능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그리고 프로이드의 종교이해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 종교가 어떠한 치유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기독교영성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2. 프로이드의 종교이해와 한계: 치유적 관점에서

20세기 정신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프로이드(S. Freud, 1856-1939)를 빼놓을 수 없는 데 이는 그의 정신분석 이론이 심리학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교육, 예술 등 다방면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았는데, 종교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해--종교는 환영(illusion), 집단 신경증이며 그것은 설명해서 없어져야함--는 그의 위대성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의 글을 연구해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1) 프로이드 무신론의 기원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신론자였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그의 정신분석 안에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그 자신도 시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무신론자의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어 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프로이드 어린 시절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영향, 그의 교육환경, 당시에 지배하던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분위기, 그리고 그가 인기 없던 소수민족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연구해 봄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본다.

(1) 그의 부모의 영향

가부장적 인물인 그의 아버지, Jakob Freud, 는 정통 유대인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자유스럽고 유대전통을 좀 멀리하는 태도를 지녔다. 이러한 그의 자유스런 사고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로이드의 어머니는 Jakob Freud의 두 번째 부인으로 20세가 채 안되었을 때 40이었던 그와 결혼했다. 젊은 부인으로 그녀는 늘씬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녀 생애의 마지막까지(90세) 유쾌함과 재치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3남 5녀의 장남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후에 그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일생동안 정복자의 감정, 실제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산다. 프로이드는 그가 갖고 있는 확신감은 그의 어머니의 사랑이 주는 안정감에서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적 가르침(유대교 신앙)은 프로이드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프로이드의 종교적 배경이 참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유대인으로 성장했고, 프로이드는 유대 관습들과 축제들에 대해 친숙했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에 따르면, 프로이드가 네 살적에 비엔나로 이사 간 다음에 그의 아버지는 정통적인 관습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프로이드가 오랜 종교적 전통과 관습들이 점차 사라지는 가정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네스트 존은 말한다: 프로이드는 영혼 불멸이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도 없이 자라났고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드는 후에 그의 어린 시절 성경 읽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를 하나, 존에 의하면 그것은 역사적 관심이나 윤리적 차원에서 의미한 것이었다고 한다.

(2) 반종교적 경험들

무신론의 배경에 대해 논할 때에 프로이드의 어린 시절에 깊게 영향을 준 두 개의 반종교적 경험--의식주의(ritualism)와 반 유대주의(anti-Semitism)의 경험--을 지나칠 수가 없다.

가톨릭 의식주의와의 경험

어린 프로이드를 돌보던 늙은 보모는 유능하고 엄격한 체코인으로 카톨릭 교인이었는데, 프로이드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카톨릭 개념 그리고 다른 기독교 가르침 등을 주곤 했다. 또한 그녀는 어린 프로이드를 카톨릭 미사에 정기적으로 데려가곤 했는 데, 그가 교회에서 돌아와서는 설교를 흉내내고 하나님의 하는 일을 설명하곤 했던 것을 보면 미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로이드가 두 살반이었을때 그 보모는 도둑질 한 죄로 쫒겨났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 시기에 이 중요한 인물의 영향을 옳게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스는 “... 그녀의 이런 부정적인 영향은 프로이드가 후에 기독교적 신념들과 의식들을 싫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종교에 관한 첫 에세이인 강박적 행위와 종교적 의례」(1907)에서 그가 강박적 신경증을 종교 형성의 병적 대응물로 그리고 종교 그 자체를 우주적 강박적 신경증이라고 묘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의 반유대주의 경험

프로이드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생각했으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학교에서 늘 일 등을 했지만 소수의 유대인 친구 외에는 친구가 없었으며 반 유대적 크리스챤들에게 날마다 조롱을 당하곤 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건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프로이드는 한 꼬마가 그의 아버지의 새 털 모자를 흙속에 던지면서 포장된 길에서 꺼져, 이 유대인아!소리치는 모욕을 그저 감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프로이드의 내면세계에 일찍부터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일으켰으며 기독교 신앙이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로이드가 어려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반 신앙적 결론들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거나 성숙하지 못했다. 그럼 어떤 과정을 통해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주요 도구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3) 학문적 과정

프로이드는 1873년에 비엔나 대학에 의과 대학생으로 들어가서 당시 널리 퍼진 과학적 분위기에 푹 젖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생리학 교수였던 브뤼케(Ernst Brücke)와 프로이드의 우상의 하나였던 헴홀츠(Hermann von Helmholtz)를 만난다. 브뤼케는 프로이드가 되고 싶어하는 잘 훈련된 과학자의 타입으로 꾸준한 관찰과 묘사에 근거를 둔 과학적 방법의 철저한 사용을 매우 강조하는 독일 학자였다. 프로이드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마침내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실에서 나는 쉼과 만족을 발견했습니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연구실에서 6년간 머물렀으며 그후에도 그곳을 떠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던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권면대로 연구소를 떠나 비엔나 제일 병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곧 수련의(a junior resident physician)가 되었다. 1882년부터 병원의 여러 과에서 일을 했는 데, 특히 유명한 정신의학자 메이네트(Meynert) 박사와 신경병리학과에서도 근무했다. 뇌해부 연구소와 어린이 병원에서 때때로 일하는 동안에 그는 그의 연구를 동물 신경세포와 신경조직으로부터 인간의 중추신경체계로 확대시켰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정신의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뇌해부에 관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이 점에서 필프 박사는 프로이드는 한가지 주제나 문제에 대해 집중하는 확고한 경향을 여기에서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그가 너무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받도록 까지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브뤼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1885-86) 샤코트(Jean Charcot)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치유 방법으로서의 최면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영혼 탐구의 첫 시작이었고, 신경학에서 정신병리학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최면술에 만족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효과는 단지 일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프로이드로 하여금 히스테리에 큰 관심을 갖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안나 오(Anna O)여인의 케이스였다. 그의 동료 의사인 브로이어(Josef Breuer)의 환자로 히스테리로 인해 고통받던 지적인 젊은 여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는 히스테리의 증상은 감정적 쇼크(마음의 상처)의 산물, 특히 억눌린 성표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통해 프로이드는 브로이어와 갈라서게 되는 데, 브로이어는 이 문제를 생리 화학적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했었고,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을 떠나 심리학적 범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프로이드의 관심이 생리학에서 심리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그의 과학적 심리학을 위한 과제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1895)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심리학적 과정들을 묘사하나 여전히 신경세포의 수량적 상태같은 순수한 생리학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5년후 꿈의 해석에서 보듯이 프로이드는 점점 생리학적 표현들에게 심리학적 의미를 주고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심리 특히 직접적 지식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정신 지층인 무의식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완전한 어둠이고, 의식적인 정신적 삶과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심리적 활동이 처음에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그의 주요 통찰력이었는데, 이것이 첫 번째심리과정이고, 반면에 의식적 과정은 두 번째이다. 프로이드의 획기적인 업적은 무의식을 체계적인 과학적 설명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물론 구분했고, 후에는 정신의 다른 체계들--이드, 자아, 초자아--사이를 구분한다. 프로이드는 정상적 상황에서, 무의식적이고 불쾌한 본능적 충동은 다소 격렬한 갈등 후에, 의식, 자아에 의해 거절된다고 말한다. 방어기제에 의해 처음부터 자아에 의해 거절된 그들은 무의식으로 흘러 들어가는데(즉 억압되어지는데), 이때 변함없이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의 전량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꿈의 형태나 또는 육체적 신경체계안에서 대리 만족(즉 신경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서 치료의 과제는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노력해서 무의식에 억압된 정신적 충격 등의 내용을 억압 상태로부터 끌어내어 의식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이전의 거절된 본능적 억압을 수용하든 거절하는 것이 되든--을 내려야 한다. 이리하여 프로이드는 무의식 즉 취급되지 않은 정신적 외상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냄으로서 정신적 질병의 치료로 이끄는 길을 발견했다. 이때 자유연상, 전이, 또는 말의 실수 등이 무의식에 자리잡은 이러한 감정들을 밝히는데 좋은 방법이지만, 이것을 위한 지름길은 꿈의 해석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꿈을 (심리적인)소원성취라고 보면서,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운 신경증 증상들처럼 꿈도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고 따라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꿈 해석의 도움으로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의 잊혀진 것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기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위대한 발견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프로이드는 유아가 이미 성적(리비도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단지 이것은 성기적 성애가 아니라 프로이드가 전(前)성기적 성애라고 이름 붙인 입, 항문, 피부라고 하는 성감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 아주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아이의 성격 발달, 나아가서는 일생의 운명의 발전에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에서 말한다.

또 한가지 프로이드의 중요한 발견은 이른바 외디프스 콤플렉스이다. 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해소되지 않은 외디프스 콤플렉스가 있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네 다섯 살의 남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집착과 동시에 라이벌이 되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의 감정, 또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 거세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관념의 복합을 외디프스 콤플렉스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디프스 왕에서 이 이론의 근거를 삼는다.

이러한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매우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었고, 종교이해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이제 프로이드는 뇌해부학과 생리학, 정신 병리학 그리고 심리학의 새로운 형태(초심리학)에 이르는 그의 긴 여정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종교는 무엇인가?

2) 종교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해

프로이드는 Totem and Taboo라는 책에서 원시인의 심성과 강박 신경증 환자의 사고 과정사이에 유비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종교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Moses and Monotheism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것을 다루기는 분량이 많고 또한 본 발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책 The Future of an Illusion(1927)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종교 현상을 꿈과 신경증 증상에서 발견되는 소원성취의 모델에 적용시킨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개념들이란 우리 사고의 최종 결과나 경험의 오랜 축척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간절한 인류의 소원이 실현된 것(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환영(illus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어떤 소원들인가? 그것은 생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정의의 실현, 그리고 영생 등에 대한 인간의 소원이다. 이런 모든 소원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유아의 경험에서 나오는데, 이때 신은 세 가지 기능을 갖게 된다: 자연의 공포를 없애주는 것, 사람들을 운명(죽음)에 화해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문화든 욕망의 금지에 근거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일반 문화생활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 보상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란 희망에 의거한 사고 즉 환영이다. 환영은 종교가 도덕적 의미에서 고의적 거짓말이라거나, 인식론적 의미에서 오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꿈이나 신경증 등에서 나타나는) 소원 성취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 이를 위해 프로이드는 한 예를 드는데, 만일 한 가난한 소녀가 언젠가 왕자가 와서 자기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환영에 붙들려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데렐라처럼 그녀는 왕자와 결혼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것을 믿음으로서 간직할 합리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하는, 우주적인 인류의 강박신경증으로서의 종교는 과학 정신의 증가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있다고 프로이드는 보았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소망으로 끝쳤지만, 그는 개인에게 있어서 그리고 인류 전체에 있어서, 종교는 인간 발달의 과도기 단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처음 단계는 신화적(또는 정령 숭배적), 둘째는 종교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적 단계이다. 개인으로서 또한 인류 전체로서 사람은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없다. 사람은 성장해야한다. 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면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고 하나님과 흥정하는데, 이는 부모에게 매달리는 아이의 모습이므로 더 이상 유아적 환상에 매달림으로 성숙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라서 사람은 현실을 그 자신의 자원들과 과학의 도움으로 지배해야 하고,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에 대해 단념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한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쾌락원리에서 실재원리에로 전환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이네의 시에서 인용한 한 구절은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Den Himmel überlassen wir

Den Engeln und den Spatzen.

(하늘은 천사들과 참새들에게 맡겨라.)

즉, 내세에 대해서는 기대를 버리고 이 땅위의 삶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로부터 그의 개인적 무신론에 대한 본질적인 논증들을 받아들였다. 포이에르바하도 하나님 개념에 대한 투사는 소원이나 환상에서 온다고 주장하며 무신론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입증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종교사와 종교 심리학의 견지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심리학적 투사론에 한층 더한 깊이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프로이드는 먼저 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투사론을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후에 단지 그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의 종교 이해의 본질은 바로 포이에르바하가 세운 가정(hypothesis)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3) 종교이해에 있어서 프로이드의 한계

(1) 정신분석은 어린 시절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매우 강조한다. 신경증적 성격, 성품, 개인의 신념 등은 부모-자녀 관계에 있는 어릴 적 경험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그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견해 역시 그의 어린 시절 가정교육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오랜 종교적 관습들이 퇴색해가고 종교 그 자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더욱이 유대인으로서 다시 말해 인기 없는 소수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비록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민족을 박해하는 다수 기독교인(특히 로만 카톨릭)을 향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그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감정은 크리스천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읽을 때 특히 그가 모든 종교는 환영이라고 확신할 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프로이드가 그의 정신분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음은 그의 종교이해에 있어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있어서도 적용이 된다. 프로이드의 위대한 발견은 역동적인 무의식을 우리 마음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력(motive force)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 개개인과 인류 역사가 무의식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것과, 또한 이 무의식은 자유연상과 꿈 분석 등의 방법을 통해 완전히 탐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무의식의 역동적 본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일반적 주장이 옳았다 할지라도, 그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해석은 너무 편협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도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사회적인 편견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드는 그의 비엔나 환자를 치료하면서 거의 얻어진 증거에 의해 다시 말해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인간이해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엔나 의사의 경험으로 그는 성적 부적응은 신경증이 유발될 때 많은 경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가 살던 독특한 사회 환경에서 즉 성욕이 억압되던 사회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론이었고 (물론 이것은 상류층과 하류층에는 비교적 해당이 안되었지만), 결국 이런 배경에서 프로이드는 무의식 안에서 (억눌린)성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아주 부정적으로 억압된 소원의 창고로 이해되는 무의식적 과정의 견지에서만 종교 경험을 설명하려는 프로이드의 시도는 매우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무의식의 본질과 또한 상징주의에 대한 그의 편협한 태도는 융이나 아들러같은 그의 동료들을 정신분석학의 울타리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었다.

(2) 프로이드는 19세기 생물학적 진화론, 유물론적 인과론적 입장에서 환원주의 등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견해를 진리의 완전한 계시로서 믿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에 대한 믿음, 다른 말로 하면, 과학에 대한 유사 종교적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을까? 프로이드의 예언과는 반대로, 피스터가 주장했듯이, 서방에서나 동방에서나 신에 대한 믿음은 아직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분야에서 과학의 확실한 진전(가공할 파괴력의 무기나 생명복제 기술 등)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믿음--과학은 자동적으로 진전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이것은 우주적인 인류의 행복에로 이끄는 열쇠라는 믿음--을 의심하게 한다. 오히려, 큉이 말하는 것처럼, 때때로 과학의 진전과 기술은 종말론적 공포에 이르게까지 하는 어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퍼치고 있다. 과학 그 자체는 인간의 비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인간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리고 진정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가치들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맹신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왜 소망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가? 인류나 개인의 삶이 단지 자연의 비정한 법칙이나 우연성이나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모든 것은 무(nothingness)로 죽어간다는 생각에 오히려 혐오를 느낄 수 있지 않는가? 프로이드의 무신론은 가정이다. 프로이드 자신도 이것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질문한다: 삶이란 무엇이고, 도대체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런 질문에는 병리학적인 어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단 신경증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그가 생각하는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이러한 질문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의 한 근원이고 인간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 부분이다. 프로이드는 이 경향을 무시하던지 또는 그것을 비정상인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그의 종교이해의 또 다른 한계이다.

(3) 평가

프로이드가 종교를 취급하는 가운데 보여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의 일부는 사실이라는 것은 시인되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이 잘못된 투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크리스천의 하나님 이미지는 어린 시절 인상 남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형성된다. 때론 고의적으로 그들의 자녀를 훈련시키기 위해 교육의 방법으로 부모에 의해 벌하시는 아버지-하나님이 남용되기도 하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것은 아이들에게 종교에 대해 부정적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다. 또 종교가 소원 성취에만 의존할 때, 본질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은 순수한 욕구의 만족으로 환원되어진다. 그런 종교는 유아적 소원으로의 퇴행이다. 또한 종교가 어떤 형식, 의식, 종교적 개념의 강박적 반복가운데서 문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종교적 개념들은 강박적 의례적 반복에서 오는 만족으로 빠지게 된다. 마치 뜻도 모르고 그저 반야심경을 의미 없이 외우는 것처럼. 이렇게 부적절하게 동기 되어진 종교적 행위는, 강박 신경증 환자의 개인 의례에서처럼, 어떤 유혹이나 벌에 대한--가끔 무의식적인--두려움, 공포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어 대책이다. 이처럼 프로이드의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자칫 빠지기 쉬운 종교의 모순을 벗어나서 건강한 종교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실수는 모든 것이 파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리꿔가 지적한대로, 정신분석은 구습타파에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 신에 대한 신앙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태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것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신에 대한 믿음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관점으로부터 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투사의 구조를 나타내거나 단순한 투사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연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그녀 자신의 이미지를 반드시 투사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투사의 도움으로 그/그녀는 오히려 단지 객관적인 관찰자로 밖에서 상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보다 더 심오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단순한 투사의 사실이 그것이 언급하는 대상의 존재나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드는 종교 개념의 심리학적 본질에만 (환영으로서)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진리 내용(실재로서) 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형상이 상징하는 심리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점에서, 게이(Peter Gay)도 프로이드가 구약의 아모스, 이사야의 신학이나 신명기 신학 등에는 관심이 없고, 억압된 것의 복귀”(return of the repressed) 개념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만 구약의 하나님을 본다고 지적한다.

3. 종교적 영성이 주는 유익

행복, 삶의 질, 혹은 심리적 건강 등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측면의 세 영역이 조화를 이룰 때 올 수 있다. 그럼에도 앞서 보듯이 프로이드의 경우는 영성이란 단지 환상에 불과하고,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까지 하였다. 즉 종교는 정신건강에 불필요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해로운 것으로 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심리학의 흐름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이 한 개인은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영적 측면들을 지닌 통합적 존재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협회(APA)에서도 종교적 혹은 영적 문제들을 인간의 심리적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DSM-IV-TR에 소개하기도 했고, 종교와 영성이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정신적인 평안에 기여한다는 연구 결과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1) 영성과 심리적 건강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영성과 심리적 건강과의 관계에 관한 글들은 비교적 많이 나온 편이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중요한 단행본과 논문들을 소개한다.

(1) 조옥진. 영성과 심리상담」. 서울:가톨릭출판사, 2005. 신학과 심리상담을 통합한 영성심 리상담을 활용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 하워드 클라인벨. 전인건강」. 이종헌, 오성춘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영성이 전인건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밝히고 있다.

(3) 장동진, 김용태. 영적초월과 심리적 안녕 간의 관계.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 16(2008): 165-186. 한 개인의 인식을 뛰어넘는 초월의식(영성)이 행복과 관련있으며, 문제 해결 능력에도 관계가 있고, 자기 수용과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보다 잘 가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4) 허현나. 종교적 지향성과 영성적 안녕 및 심리적 안녕 간의 관계.석사학위논문. 가톨릭대학교, 2002.

(5) Benner, David. Care for Soul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8. 영성과 심리치료 간의 관계를 일원론적인 입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아래의 논문들에서는 심리적 속성들과 영적 혹은 종교적 측면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잘 이루어졌다.

Karasu, T. B. "Spiritual Psychotherapy." American Journal of Psychotherapy, 53.2(1999): 143-162.

Piedmont, R. L. "Spiritual transcendence and the scientific study of spirituality." Journal of Rehabilitation, 67(2001): 4-14.

Harris, S. J. Religiosity and Psychological Well-being among Older Adults: A Meta-Analysis. Ph.D. dissertation, Albisu University, Florida, 2002.

2) 종교적 명상이 주는 심리적 치료 효과

명상훈련이 주는 심리적 치료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이미 미국에서 폭넓게 이루어져 왔는데.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Girodo, M. "Yoga meditation and flooding in the treatment of anxiety neurosis," Journal of Behavior Therapy and Experimental Psychiatry. 5(1974), 157-160. Shapiro, D. H. "Zen meditation and behavioral self-control strategies applied to a case of generalized anxiety," Psychologia 9 (1976), 134-38. French, A. P. & Tupin, J. P. "Therapeutic application of a simple relaxation method,"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28(1974), 282-87. Shapiro, D. H. & Zifferblatt, S. "Zen meditation and behavioral self-control," American Psychologiest. 31(1976), 519-32. 이들의 연구결과는 주로 다음과 같다: 다양한 형태의 명상들은 불안을 감소시킨다. 폐쇄공간 공포증, 시험, 고독, 또는 심장병에 대한 공포증을 감소시킨다. 마약이나 알콜중독을 감소시킨다. 확신, 자기존중감, 자기통제감, 공감, 자아실현을 고양시킨다. 심리적 정서적 상태의 증가된 자기 인식으로 이끄는 집중력을 가르치며, 이것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을 지배하고, 자신의 진실된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증가시키고, 자아 의식을 보다 우주적인 의식에로 확장하는데 돕는다.

기독교 명상의 형태들이 심리적 유익이 있다는 관점에서 연구된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모톨라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리듬을 타는 호흡을 하는 이냐시오의 영성수련 형태가 심리학적 가치가 있음을 조사하였다(Mottola, A. 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Ignatius. New York: Doubleday & Co., 1964). 쌕은 30일간의 피정 동안에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을 46명의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 자아의 통합에 있어서 증가가 있음을 보고하면서, 명상기도 형태는 치료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Sack, H. L.. "The Effect of spiritual exercises on the integration of self-system."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 18(1979). 46-50.) 휘니와 말로니도 기독교 명상기도가 심리요법에서 증진을 가져왔고 영성의 증진도 가져왔다고 조사했다(Finney, J. R. & Malony, H. N. "An empirical study of contemplative prayer as an adjunct to psychotherapy,"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13.4(1985), 284-90).

3) 기독교 영성이 주는 치유 효과: 렉시오 디비나를 중심으로

렉시오 디비나의 치유 효과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있었는데, 예를 들어, 베이커(D. Baker)는 명상의 방법으로 렉시오 디비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적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하며, 스트레스, 불안, 그리고 다른 신체적 증상을 완화시키는 등의 일반 명상이 주는 심리학적 유익을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지적, 행동적 변화나 개인무의식의 깊은 영역에 접근 할 때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가 있으며, 특히 의식에 무의식의 요소들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에서 가장 큰 가치가 있는데, 이때 개인적 정체성, 정서적 태도, 그리고 삶의 목적과 복지감을 재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고 그는 말한다. 델몬트(Delmonte)도 렉시오 디비나 과정에서 일어나는 집중적인 재훈련의 과정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치료적 유익이 있다고 추정한다. 실용적인 방식에서, 개인적 구조 체계를 개선하고 증진시킴으로서 인간행동을 변화시킨다. 구조 체계 안에서 이전에는 접근이 불가능했던 무의식의 내용에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구조 체계를 넘어선 실재의 자유로운 공간을 비록 잠시라도 경험하는 의식의 바뀐 상태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렉시오 디비나 또는 기독교 명상에 관한 연구들의 결과는 대부분 명상이 줄 수 있는 심리적 치유효과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갖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의 치료적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여기에서는 상담의 주요 목적의 하나인 무의식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린 시기에 발달시킨 낮은 자아상으로 인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따라 살기로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잘못된 무의식적인 동기가 여전히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렉시오 디비나에서의 반추기도가 가질 수 있는 치유효과에 대해 허성준은 이렇게 말한다.

간단한 성경 구절을 반복하며 기도하다보면 우리의 생각도 마음도 단순해지고,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자연히 집중력이 생겨 정신 통일이 쉽고 마음이 고요해져 내적 고요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분노와 같은 우리 안의 부정적 감정들을 가라앉히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게 하며,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이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말씀을 천천히 반추하는 동안 내적 통찰력이 생겨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말씀의 영적 의미가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말씀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며, 이때 눈물겨운 통회나 신체적, 정신적 치유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쓰라린 정서적 경험에 근거를 둔 행동에서 나오는 뿌리 깊은 습관을 바꾸려면 일상생활 중에 긍정적인 노력으로 관상 기도를 강화해야 한다. 물론 정기적으로 하는 관상 기도가 여기에 초석이 된다. 의식적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을 바꾸기로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거짓 자아의 무의식적 가치 체계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바꾸는데 충분치 않다. 다만 관상기도를 통한 수동적인 정화 (무의식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도록 맡기는 것)만이 이러한 치유에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렉시오 디비나에서 선택된 성서구절을 매일매일 긴 시간 되풀이하면 그것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혼자서 그 기도가 자연히 되풀이 된다. 이것이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저장되면, 이 새로운 테이프는 이미 저장된 테이프를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상시 잘못된 일을 만났을 때 분노하려고 하던 마음이 새롭게 저장된 테이프의 소리를 들으면서 분노의 마음을 잃게 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의 존재 속에 들어와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짐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심한 안절부절못함, 육체적 고통,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정서적 증상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때 이것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일이 분 동안 그 고통스런 감정 위에 쉬면서 그 고통이 우리의 기도어가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고통스런 정서들이나 심지어 어떤 육체적 고통도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에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옛날의 어떤 슬픔이 그때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표현하도록 느꼈는지도 모른다. 렉시오 디비나에서의 묵상은 우리의 삶에서 끝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끝낼 수 있도록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감정이나 사고의 형태로 그 정서들이 표출되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정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강하게 느끼는 두려움, 불안, 혹은 노여움 등이 현재의 경험과 무관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을 앉아서 견디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우리의 인격 속에 숨어있던 어두운 면을 인정할 능력이 우리 안에는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 내적 평화로부터 오는 안도감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인격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더욱 갖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정신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스런 내면을 상대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데,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겸손과 신뢰가 깊어지면 인격의 어두운 면을 더 쉽게 인정하게 된다. 즉 관상기도로 해서 흘러나오는 깊은 평화가 우리의 정서적 장애를 털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 우리의 자아 성찰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어두운 면을 만나게 하는 렉시오 디비나의 기능은 베네딕도회나 다른 수도원 공동체에서 렉시오 디비나 수련을 위한 주요 기도서가 구약 시편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분명히 볼 수 있다. 베네딕도 전통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수도원 영성과 훈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도사들은 무시무시한 폭력을 묘사하고 인간마음의 어둔 구석을 반영하는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시들을 시편에서 읽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그림자 내용을 시편을 통해 가까이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시편에 있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반영하는 글들은 인간의 그림자를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극적 요소들과의 만남이 있어야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성서를 통해 우리의 부끄럽던 자아의 부분들을 명상 가운데서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치료적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시편의 노래는 특별한 공동체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하루에 여러 번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폭넓게 수용된 렉시오 디비나의 역할 중 하나는 무의식과 그림자 내용의 거울보기이다. 다이징거(Dysinger)는 어떻게 시편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시편은 우리 자신을 기쁘고 경건한 느낌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잊고 싶어 할 인격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내적으로 찔림을 받는 경험으로, 회개로 이끌어준다. 우리가 누구인지 고통스럽게 정직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사랑의 하나님의 치유하고 변형시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시편을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발견하는 모든 것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내어 놓아서 치료받고 하나님 이미지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처럼 렉시오 디비나는 인격의 그림자 차원을 탐구하는데 열려 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원치 않는 내용으로부터 그 자신을 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의 초기 수행자들(사막의 교부들)을 보면 그 반대임을 알 수가 있다. 초기 은둔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도시에서 살면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그리고 집중된 방식으로 그들의 그림자를 직면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형적인 영적, 심리적 과정은 종종 초월과 신비의 경험을 포함했고, 그러한 변형의 최종적 목적은, 그것이 심리적이든 영적이든,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즉 온전한자아와 더욱 관련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의식과의 직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개인적 온전함의 과정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것은 융이 대극이라고 부른 것들과의 직면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적 역동은 자연적으로 우리의 전인격이 변형되도록 이끌어준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변화를 가져다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간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리적인 문제들을 치유하고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하는 것이다.

4) 영성의 한 분야인 기도가 주는 효과

그렇다면 기도가 구체적으로 줄 수 있는 심리적 유익은 무엇인가?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도에는 찬양, 고백, 감사, 치유, 명상, 탄원 등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 윌리암 제임스를 비롯한 많은 종교심리학자들은 기도가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에 관심을 갖고 다양하게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도가 줄 수 있는 일반적 차원에서의 심리적 유익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도의 심리적 효과를 경험적인 측면에서 말할 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첫째로 만일 기도가 일종의 자기암시(autosuggestion)라고 한다면 이러한 기도는 명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며,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모순된 노력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얻는 데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생활 목표를 현명하게 선택하며 이러한 목표로 향해서 생활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을 설정하며, 착잡한 감정을 조화시키며 인격성의 모순된 힘을 통일된 통합으로 이끌게 하는 데도 이러한 기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만일 기도가 현재 이 순간에 가지는 만남이라고 한다면 생의 전체 의미가 이러한 관계로 전환되어지며 이해된다. 단절되었던 통로도 당신의 만남에서 완성되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통하여 피곤에서 회복하게 되고 용기를 잃고 패배를 당할 때는 새로워지게 된다. 단편적인 의미도 이제는 당신과 만나는 경험의 전체성에 관련을 가지게 된다. 혼란하고 모순되었던 충동도 이제는 하나의 중심적인 목적을 둘러싸고 건전하게 통합된다. 이러한 기도의 심리적 효과에 대하여 죤슨은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욕구와 현실에 대한 각성: 기도가 욕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기도를 할 때 그 욕구가 더 분명하게 알려진다. 생의 현실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와 마주치게 되며 자기기만을 제쳐놓고, 더 심오한 정직이 더 참된 이해를 가지게 한다.

고백과 용서를 받았다는 감정: 욕구, 실패, 그리고 불안을 고백하면 감정적인 정화를 가지게 된다. 고백의 기도에서 우리는 용서의 확실성과 아울러 더 넓은 상호 인격적인 운명에 대하여 조화 있는 적응을 찾게 된다.

신뢰와 화평감: 신앙과 소망으로 하는 기도는 긴장을 풀어주며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하며 걱정과 공포를 없애준다. 그리고 근본적인 확신으로써 불안정을 완화시켜준다.

광범한 견해와 명철한 판단: 기도는 생활을 꾸준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관점에 비친 전체성으로 보게 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마치 흩어진 책상 위의 물건을 정돈하는 것처럼 기도에서는 모든 착잡한 경험들이 잘 정비되어지며 분명한 질서를 갖추게 된다.

결단과 헌신: 이러한 명철한 견해로 말미암아 자기의 목표가 부각되어지며 이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 나가게 된다. 사람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자신을 바치면 그는 우유부단을 면케되며 능률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역동적인 원동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결단이 결국 천성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첫 단계가 된다.

감정적 에너지의 갱신: 당신과 만난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영감과 감정의 원천을 확대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건강과 정력을 부여하여 준다.

사회적 반응: 당신과 만나는 기도 경험은 고립과 고독감을 극복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반응의 감정 가운데는 도덕적인 지지, 용기, 탄력성이 있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나 남들과 함께 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은 남들의 욕구에 대해서 예민하여지며,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협조하게 된다.

기쁨, 감사, 화해: 기도는 가치를 긍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넓히며 현실을 인정한다. 이러한 긍정은 기쁨의 바탕이 되며,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며, 슬픔과 실패에 우는 자와 화해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닥쳐오든 이러한 정신으로 마주칠 준비를 하게 된다.

충성과 인내: 기도는 경건과 갱생의 행동이다. 충성심은 궁극적인 목표를 긍정하고 진실한 경건에 자신을 투입시킴으로써 배양된다. 기도로써 부단히 하는 헌신으로 말미암아 장애나 고달픔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심이 배양되어진다.

인격성의 통합: 가지각색의 유혹 속에서 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최고의 충성에다가 집중하게 한다. 혼란을 이루는 갈망이 서로 부딪히고 있는 가운데서도 기도는 중요 목적을 언제나 회상하면서 이러한 헌신의 경로를 따라서 에너지를 융합시킨다. 진실하게 기도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통합성을 나타내며 생활에 균형과 내면적인 화평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기도는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고 수용된다는 느낌을 촉진시키고, 보다 큰 온전함에 소속되었다는 감정을 새롭게 하는 데에서 갈등과 외로움을 치유시키는 역동적인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도는 누미노즘의 경험에 대한 욕구, 존재에 대한 의미, 목적, 가치감에 대한 욕구,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신뢰감과 관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킨다. 기도는 세상과 그리고 타자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갖고, 타자성과의 연계되는 곳,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기도는 경험의 재구성, 사랑받는 느낌, 용서받은 느낌, 평안의 느낌, 덜 고립되고 연결되었다는 느낌 등의 심리학적 유익을 갖는다.

4. 나오면서

종교의 치유기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심리학자로 프로이드의 종교이해를 분석하고 그의 종교이해를 넘어서 종교가 특히 종교적 영성이 어떻게 치유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Jung은 종교를 깊은 무의식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의미를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는데, 전인적인 인간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단지 교리에 매인 형식적 종교가 아닌 깊은 종교의 영성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돌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상담에서 잘 활용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에 관련된 연구가 서구에서는 많이 나와 있지만, 한국에서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론으로 뿐만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있게 되면 기독교상담이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