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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칼 융의 분석심리학” / 박노권 교수
1. 융의 생애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융은 조숙해서 6세에 라틴어 책을 읽었으며, 그는 고독감과 부모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나무를 파서 말을 만들어 그 위에서 혼자서 놀곤 했다. 외부세계로부터의 고립감을 느끼면서, 그는 자신의 꿈, 환상과 사고 같은 내부세계에 몰입하곤 했다. 그는 바젤 대학에 입학해 의과를 선택했고, 나중에는 정신의학을 전공했는데, 이것은 그 원리들이 그의 주된 관심인 과학과 인간성을 잘 조합시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5세에 융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신병원 중의 하나였던 취리히의 브루겔쯔리 정신병원의 수련의가 되었다. 30세에는 취리히 의과대학의 임상과장이 되었으며, 그 학교에서 정신의학 강의를 했다. 융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의 아내는 심리학 교육을 받아 1948년에 설립된 융연구소에서 강의를 하였다.
융이 자신의 정신분열증에 관한 연구서를 프로이드에게 보내자, 이를 본 프로이드는 융을 비엔나로 초청했고, 한동안 프로이드는 융을 그의 논리적 계승자로 여겼다. 그러나 융은 모든 정신병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는 프로이드의 환원주의와 고집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프로이드도 종교에 대한 융의 관심과 시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마침내 융이 리비도가 항상 성적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일반화된 삶의 에너지라는 시각을 발전시켜 1912년에 「변형의 상징」을 발간했을 때 깨지고 말았다. 그들 관계의 결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이후 3년동안 융은 우울 증세를 보여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겉보기에는 인정받는 개업의로서, 유능한 대학교수로서, 그리고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존경받는 정신의학자였으나, 그 이면에서 융은 점점 현실감을 잃어 갔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는 가르칠 수 없다고 느꼈기에 교수직도 사표 내고 저술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지적으로 이해하여 해결하려던 그의 모든 시도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절망감 속에서, 그는 결국 무의식의 충동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돌들로 모형 마을을 만들어, 자신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벽돌을 가지고 놀았는데, 이러한 놀이치료법은 그가 처한 위기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여전히 자신의 뇌리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로 만든 마을을 가지고 놀면서 그는 자신의 심리내부의 이미지를 쫓아 2년간 무의식세계로의 오랜 탐험을 했다. 이때 그가 무의식 속에서 발견한 것은 거대한 용암의 흐름 같은 것이었고, 그 열기가 그의 인생을 재조형하게 되었다. 이 같은 외상적인 중년기의 위기를 통해 융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중심과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가 분석심리학이라 부르는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는 점차로 신화, 상징, 예술, 민담, 꿈과 환상 등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자원들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후에는 또한 뉴멕시코로 가서 푸에불로족 인디언의 상징과 신화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69세 때 치명적인 심장마비에서 회복된 뒤, 융은 일련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이후 그가 매우 독창적이고 참신한 내용의 저서들을 펴내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융은 “나는 단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즉 아무런 주관적인 저항을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내가 사물을 보고 이해한 그대로를 수용했을 뿐이며, 나 자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느껴지는 그대로의 나의 본질을 받아들였을 따름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후 융은 놀라울 정도로 왕성한 저술과 치료활동을 하다가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서재에서의 융: 뒤로 색유리로된 만다라 그림이 보인다.
융은 일생동안 개인의 영적인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심리학자로서, 또한 정신치료가로서 그는 자신의 임무가 사람들의 정신을 치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언젠가, 인간의 정신 세계를 관리하고 있으며 인간 영혼의 발달에 지침을 주고 있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치료적 상징 체계들”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가 인간의 성숙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종교이해를 고찰하기 전에 그 토대가 되고 있는 분석심리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융의 분석심리학
1) 마음의 구조
심층심리학적 접근이 모두 그렇듯이 융도 인간의 정신세계는 ‘의식’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1) 의식
의식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우리의 정신세계 또는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고 매일의 삶을 영위해 가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 의식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 자아(ego)이다. 의식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때,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의식하도록 또는 알도록 해주는 역할을 자아가 담당한다는 것은 자아가 바로 의식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무의식
무의식은 나의 정신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현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으로, 그것은 의식의 부분에 비하여 매우 광범위하고 깊으며 그 존재를 쉽사리 만나거나 인식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무의식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곳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나름대로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정신세계의 또 다른 독립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융은 무의식이 전인성으로 향해 움직이는데 필요한 주된 자원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무의식은 주로 상징을 통해서 표현된다. 프로이드의 견해와는 반대로, 그는 무의식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는 ‘창조성의 위대한 저장고’로써 이해했다. 개체화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림자, 아니마, 자기는 모두 무의식적인 존재이다. 그들을 의식세계로 가져올 때, 그리고 개인의 자기 지각이 성장할 때, 그들은 인성의 차원을 풍부히 할 수 있다.
융은 프로이드와 달리,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한다. 인간이 경험한 어떤 것도 마음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융은 자아에 의하여 인식되지 않은 경험들은 기억되지 않을 뿐 정신세계로부터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자아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고통스런 경험이어서 억압된 내용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여기에서 개인 무의식이란 개개인의 독특한 삶의 경험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경험에 의해 축적된다는 의미에서,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공적이 있다면, 무의식에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인 차원까지 있음을 발견한 것에는 융의 공적이 있다. 즉 그는 무의식에는 한 개인이 그의 의식적 생활과 양립하기 어려워서 무시해 버리거나 망각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억제하거나 억압한 내용들만이 콤플렉스의 형태로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무의식에는 한 개인의 삶의 경험을 무한하게 뛰어 넘는 집단적인 차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집단무의식은 신화나 전설 속에서 원형적 표상(archetypal representation)을 통하여 명확하게 드러나며,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의 행동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끌어 가는 원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융의 집단 무의식 역시 인간의 많은 행동을 설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더구나 신화나 종교 분석에 있어서는 매우 유용하다. 이 집단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드가 주장한 개인무의식이 부정적이며, 열등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긍정적일 수도 있으며 목적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서 융에 의하면 집단무의식 원형 가운데 하나인 자기(self)는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원리이자 삶의 틀인 것이다.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과 원형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 때문에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2) 집단무의식과 원형(the collective unconscious and archetypes)
개인 무의식이 어느 개인의 삶이나 경험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집단 무의식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집단적인 정신의 내용물을 원형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행동경향 내지는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소질과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집단 무의식이란 개념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쉽지 않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돕기 위하여, 집단 무의식에 대한 융의 개념을 과일 열매에 빗대어 설명한 클라인벨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각각의 나무는 개별적인 삶과 독특한 정체성,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무들은 같은 토양 속에 뿌리를 박고, 같은 물줄기와 토양분의 흐름을 경험하고, 같은 공기, 태양과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간다. 각각의 나무는 그 자신의 본성과 잠재성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예를 들어,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고, 감나무는 감을 만들어내고--그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자는 독특하고 자율적이다. 그러나 가장 심층적인 부분에서 우리 모두는 생명체들의 거대한 상호 의존체계 속에서 서로 관련을 맺으며 민감성과 배려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을 이 같은 초개인적인 차원으로 개방시킨다면, 전체 생태계와 의미 있는 관련을 맺는 감각을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 자신을 완성시켜 가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저장된 곳으로 이해되었기에 융은 인간이 이것을 만나야 하며 의식해야 한다고 믿었다. 집단 무의식 안에 자리하고 있는 원형들을 만나고 의식화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의식된 영역과 의식되지 않은 영역으로 나뉘어 정신의 온전함이 유지되지 못하고 분단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마땅히 자신이 되어야 할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나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무의식은 현재 의식에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활동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마음의 균형과 통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이 병든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살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여 자기 자신과의 단절이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오히려 단절되고 분열되었던 정신세계가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원형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원형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그것은 지적인 개념으로는 소화될 수 없는 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여러 조건이고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집단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원형은 문화와 인종,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뛰어 넘어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행동의 근원적인 유형이며 선험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 원형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에너지 때문에 그것이 의식과 만나는 경험은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자아는 그것을 다스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힘에 지배를 받게 되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융은 그러한 상황을 종교적인 경험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원형으로는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 자기 원형을 들 수 있으며, 자기 완성의 길에서 이들과 대면하고 인식하여 나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원형을 개념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나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 정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1) 페르조나(persona)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역할에 의한 가면이다. 사회적인 인간이 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려면 그것에 맞는 적절한 태도나 행동양식을 발달시키면서 페르조나는 자리를 잡게 된다. 모든 직업에는 거기에 맞는 페르조나가 있으며 그 직업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 방식들을 설정해 놓고 있다. 이때 페르조나는 비록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상 외부에 비쳐지는 나에게만 관심이 기울어 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지나치게 동일시되고 바깥 세상에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도취되면, 의식은 내면의 세계와 분리되고 마음의 조화가 깨지게 된다.
(2) 그림자(shadow)
우리의 어둡고 열등한 측면을 우리는 무의식 세계로 억압하여 부정적인 자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자아(ego)의 그림자이다. 이것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나의 어두운 면을 뜻한다. 예를 들면,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렁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고, 도덕적 결백을 신조로 하는 이가 성적 추문을 일으키고, 자유와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굴욕에 눈이 어두워져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파우스트와 멤페스토글레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도 이런 의식과 그림자라는 무의식이 대비되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동성의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곤 한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이나 편안하지 않은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 그것은 나 자신의 약점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면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나의 그림자가 타인들에게 투사되어(희생양을 처리하듯이)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림자가 부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꿈속에서 그림자가 종종 어둡고, 원시적이고, 불쾌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의식화될 때 우리 자신의 거부된 부분들을 되찾게 되며, 이것은 자발성과 본능적 에너지, 창조성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
(3) 아니마와 아니무스(anima and animus)
융은 여성들의 무의식 속에 아니무스가 있고, 남성에게는 아니마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무스는 남성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심리구조이고 아니마는 여성적인 성향을 가진 심리구조인데, 문화나 인습의 영향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남성은 아니마를 여성은 아니무스를 억압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의 내재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꿈, 환상 및 기타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표현들 속에서 만날 수 있으며, 우리가 삶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적인 심리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시킬 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우 ‘야성적인’ 남자와 지나치게 ‘여성적인’ 여자는 자신들의 문화권 내에서 엄격하게 규정된 성 역할에 위배되는 감정이나 성향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그래서 이를 억누르고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된다. 이것은 흔히 부부 갈등의 문제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만일 남성이 그의 거부된 아니마를 되찾게 되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아니무스를 되찾게 된다면, 그들은 전인적인 사람이 될 것이며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남자가 (그 동안 억압되어왔던) 그의 부드럽고, 순하고, 감성적인 면을 되찾고, 여성이 그의 이성적, 주장적, 분석적인 면을 증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서로가 갖고 있는 자신의 일면에 대해 숭배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4) 자기(self) 원형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되는 전체 인성을 통합시키는 것으로, 의식 세계의 중심인 자아(ego)와는 구별된다. 이 자기는 인간들의 인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융이 말하듯 “우리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기는 꿈속에서 종종 신성의 상징들인 만다라나 원으로써 나타난다. 융의 자기 개념은 앗사지올리의 ‘보다 높은 자기’(higher self) 개념과 매우 유사하며, 기독교 전통에서의 영혼 사상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자기에 대한 개념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의 의식보다 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실재를 경험적으로 제시할 뿐이라고 융은 말한다.
3) 개성화(individuation)
개성화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al. divide나누다), 즉 분리되고 분할할 수 없는 전체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개성화 과정이란 인간의 여러 가지 정신적 요소들을 통합시켜 주는 인간의 정신 작용이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대극적인 존재이다. 즉,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조나와 아니마(또는 아니무스) 등 서로 정반대가 되는 관계에 있는 정신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발달하게 될 경우, 인간의 정신적 균형은 깨어지게 된다.
따라서 인성의 완성으로서의 개성화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양극들인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통합되어 살아 있는 관계에 있을 때 가능해 진다. 그런데 정신적 성장은 의지의 힘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정신의 성장과 완성을 조절하는 중심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실현되는 것임을 융은 강조한다. 정신의 전일성을 지향하는 마음의 중심이 바로 자기 원형이다. 그러므로 개성화는 개성이 강해지거나 성인군자 혹은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한 개인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그것은 자기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융이 제시한 성숙한 인간에 대한 이미지가 탈 인습적이며 본질을 중요시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융은 인성의 발달이 경험이나 학습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전통적인 발달적 관점을 배제하고 개성화 과정이라고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개성화의 과정은 보편적으로 그가 말하는 중년기(대략 35세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이전의 시기는 주로 한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기간이어서 외적인 세계에 정신 에너지가 집중되기 때문에 한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조명하고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작업은 아직 관심의 지평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중년기에 들어가면서 정신의 에너지가 내면의 세계로 방향을 바꾸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다 본질적인 삶의 질문에 직면하게 되고 그로 인한 마음의 흔들림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한다고 보고 이를 ‘중년의 위기’로 불렀다. 사실 그러한 질문들은 누가 가르치거나 물어서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속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갈등이나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성화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4) 개성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할 일
(1) 인간이 전체가 되려고 노력하는 개성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개발했던 페르조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페르조나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집단 정신이 개인에게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외부에 보여지는 나를 대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나는 아니라는 자각이 필요하며, 그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나와 집단정신(문화적 고정관념, 인습과 같은 것을 말함)에 동화되어 있는 페르조나를 구별하는 작업은 자기실현의 첫 관문이다. 그러나 페르조나가 자아에 지나치게 동일시 할 때 의식은 무의식의 세계와 단절되면서 삶이 경직되고 결과적으로 인격의 분열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페르조나는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양쪽 가능성을 모두 갖는다.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지나치게 동일시되고 바깥 세상에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지나치게 도취되는 사람들은 그들의 페르조나의 경직성과 무게를 줄이도록 치료적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소모시키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한 페르조나는 우리를 사회적 태도와 힘의 큰 충격에서 보호해주는 데 필요하다.
(2) 다음으로 만나야 하는 무의식의 내용은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자아의 어두운 측면으로서 자아의 또 다른 면이므로, 자아가 어떤 하나의 요인에 관심을 집중하면 할수록 무의식에서 억압되는 그림자는 힘이 강해지고 그로 인해 개인의 생활은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어두운 형제’는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전체에 속해있다. 개성화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의식의 영역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그림자와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림자에는 단순히 어린아이다운 것이나 원시적인 특질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인습적으로 억압되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은 인간의 현실존을 조금 더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명은 우리들을 우리들의 뿌리와 대지로부터 떼어내고자 했다. 즉, 그림자가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며 부적절하고 거칠다고 해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두운 형제’는 비록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주는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자를 치료 과정에서 인식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거부된 부분들을 되찾게 되어서 우리 내부의 삶에 대한 그것의 지배력과 위험한 성질의 많은 부분을 줄일 수 있게 된다. 이 그림자는 투사(projection) 속에서 경험되어 질 수 있다. “투사시킨다”라는 말은 그의 무의식적인 것을 (무의식적으로) 외계의 어떤 대상물에 고착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그림자가 투사될 때 그는 “마치 자기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 속에서 발견한 유약성이나 악덕들을 마음놓고 흉보거나 저주할 수 있다”라고 에딩거는 말했다. 즉 투사에 의해 무의식의 내용이 어떤 대상물에 전이되며, 그 대상물에 이것이 예속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 투사가 의식화될 때, 다시 말해서 그 투사의 내용들이 자기밖에 있는 어떤 것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투사는 그치게 된다”고 융은 말했다. 그림자의 문제와 그 그림자의 투사의 문제는 집단 심리학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그림자를 취급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개인의 삶의 평화뿐만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한 큰 시도라고 할 수 있다.
(3) 세 번째로는 남성과 여성의 마음에 숨어 있는 융이 영혼의 심상(soul image)이라고 부른 아니마/아니무스를 만나고 그들과 통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융은 여성들의 무의식 속에 남성적인 모습의 아니무스가 있고, 남성에게는 여성적인 모습의 아니마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란 우리들이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다른 성에 대한 상이다. 무의식중의 일부분인 이것들은 꿈속에서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구조가 무의식으로 남아있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의 성에게 투사해서 그 투사한 것을 좋아하던가 싫어하던가 하게 된다. 결혼생활 문제 상담시에 부부에게 자신들의 부질없는 갈등의 대부분이 자신들 각자가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을 상대방에게로 투사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심리내부의 양면성 탓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고 일깨워 준다면 매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성은 자신 속에 있는 여성적인 모습 즉 섬세하고 자상하고 정서적인 민감성 등을 두려워하고, 여성은 또한 자신 속에 있는 남성적인 모습 즉 이성적이고 분석적이고 주장적인 면을 억압하게 되면서, 이들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인 자기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남성이 그의 거부된 아니마를 되찾게 되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아니무스를 되찾게 된다면, 그들은 전인적이고 양성적인(androgynous) 사람이 될 것이며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서로가 갖고 있는 자신의 일면에 대해 숭배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면은 그것의 긍정적인 면보다 한결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간의 영적 발달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자극을 받아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비젼을 추구해 나아갔던 것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다른 성의 실체 역시 긍정적인 기능을 하며 전인성을 향한 인간의 역정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4) 개체화의 네 번째 단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되는 전체 인성을 통합시키는 핵인 진정한 자기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물결치는 풍랑을 잠잠케 하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어서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부분이 되지 않고, 분열된 상태나 단절된 상태로 살지 않고 온전한 전체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활동의 원동력이 바로 자기이다. 개성화, 정신의 완성과 같은 말은 이렇게 인간의 정신세계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며 전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그것은 융이 이해한 자기실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성화는 개인의 자기가 의식화되었을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자기실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성화란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과제이다. 융은 “존재의 완전한 실현으로서의 인성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이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이상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상은 다만 이정표이지 결코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융이 처음 개성화를 소개한 이후 분석심리학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많은 학자들이 개성화된 상태에 관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해 왔으나,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공통점은 진정한 자기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것은 자기실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대체로 자아의 태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나게 된다. 융은 교육, 종교생활 그리고 분석치료까지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개성화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의 목표 자체가 자기실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5) 개성화를 이룬 사람의 특성
개성화된 성숙한 사람은 이제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기에 적절하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일들을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평화롭고 너그러운 사람이다. 반드시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아니나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외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마음의 소리를 듣고 결정하는 가장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장에 대한 융의 접근은 특히 인생의 후반기의 성장과업에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융은 중년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많은 악성 신경증들이 인생의 중반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시기는 일종의 제 2 사춘기이자 또 다른 ‘질풍노도기’로서, 이 시기에는 흔히 폭풍우와 같은 열정이 수반되는 위험한 시/기이다. 그러나 그 나이에 갑자기 발생하는 문제들은 기존의 낡은 처방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계의 바늘을 거꾸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후반기의 성장작업은 내부지향적이야 한다. 인생 전반기에 외부에서 발견하던 의미를 이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야만 한다. 중년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위기이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 후반부에 있는 나의 환자들 중에서 그들의 문제가 인생에서 종교적인 조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각 시대의 종교가 그 추종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병에 걸렸으며, 삶의 후반기에도 종교적인 조망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에 치료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확실할 것이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인생 후반기에서의 성장작업에는 자신의 ‘다른 면’인 아니마나 아니무스 속에 방치되어 있던 자원들을 되찾고, 인생의 전반기에 무시되는 4가지 심리기능(사고, 감정, 감각, 직관) 중 어느 것이라도 개발시켜 나가는 것이 포함된다. 인생의 전반기에 주장적이고, 합리적이고, 외부지향적인 면들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은 중년에는 부드럽고, 직관적이고, 관계적이고, 감성적인 면들을 발달시켜서 전반기에 발달한 것과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집안살림을 하던 시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배려적, 관계적인 면에 편중했던 여성은 그 동안 무시되었던 이성적이고 주장적인 면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이 생의 전반부에 균형 잡힌 인성을 개발시킬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이것은 오늘날 많이 얘기하는 오른 쪽 뇌(비합리적, 감성적, 예술적)와 왼쪽 뇌(합리적, 분석적)의 활동을 서로 균형을 잡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기초로 융의 종교이해와 그 한계를 다음 주에 살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