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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와 세 가지 가짜 죽음
news letter No.541 2018/9/25
폴 리쾨르(1913~2005)가 죽은 지 2년째 되던 해인 2007년에 ⟪죽을 때까지 살아 있기(Living up to Death)⟫라는 제목의 유고집이 출간된다. 이 책에는 리쾨르의 사후에 발견된 원고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단편적인 글들이 실려 있다. 특히 이 책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은 그의 아내인 시몬느 리쾨르(Simone Ricoeur)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1996년부터 1997년 4월경까지 씌어진 것이다. 시몬느 리쾨르는 1998년 1월 7일에 사망했다.
폴 리쾨르는 이 책에서 죽음의 허상, 또는 죽음이라는 말에 얽힌 허상을 제거하는 데 주력한다. 그는 특히 죽음이라는 말에 얽힌 세 가지 의미가 개념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인 것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 의미는 죽음과 죽은 사람을 혼동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으로 존재하는 미래에 대한 상상, 나의 시신에 대한 상상과 관련된다. 리쾨르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사랑하는 타인의 죽음, 미지의 타인들의 죽음과 만난다. 누군가가 사라졌다. 한 가지 질문이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그는 아직 존재하는가? 어디에서? 다른 어딘가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보이는 어떤 형태로? 이 질문이 죽음과 죽은 사람, 또는 죽은 자들을 연결시킨다. 이것은 살아 있는 자, 내가 나중에 이야기할 것처럼 아마도 건강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질문이다. 죽은 자는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꽤 집요한 것이어서, 세속화된 우리 사회에서도 우리는 죽은 자, 즉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체는 물질적으로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가정 쓰레기처럼 시체를 쓰레기장에 던지지 않는다. 거짓은 일반화에 의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나의 죽음, 우리의 죽음, 죽은 자를 향해서 말이다. 차이를 없애면서 일반화가 진행된다. 사랑하는 사람에서 제삼자로… 그러나 나는 죽은 자의 운명에 대한 이런 종류의 질문을 없애 버리고 싶다. 이 질문으로 인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애도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인가? 왜인가? 이미 죽은 죽은 자의 운명에 대한 질문의 예상과 내면화로 인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죽음과 맺는 나 자신의 관계가 모호해지고, 제거되고, 변경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미래 완료 시제로 일어나는 내일의 죽음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으로 존재하게 될 이런 이미지가, 죽은 자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고, 어떻게 지내는가?라는 질문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생존자들에게 내가 이처럼 죽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내일의 죽은 자라는 이런 이미지에 대항하여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죽음이 죽은 사람과 모든 죽은 자에 의해 흡수되는 그런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에 의해 흡수되면서, 내가 나의 죽음을 마치 타인의 죽음처럼 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죽은 자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죽은 자의 영원한 소멸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그래서 죽은 자가 사후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그대로 나의 죽음에도 적용된다. 타인들이 나보다 오래 살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죽은 자처럼 나도 언젠가 타인들의 눈앞에 놓인 시신이 될 것이다. 나는 타인들에게 내가 어떤 시신이 될 것인지를 상상한다. 타인들이 나의 시신을 둘러싸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상상한다. 나의 시신을 상상하면서 나는 마치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타인들은 나의 시신을 향해 죽은 자의 운명에 관한 똑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는 죽은 자의 운명에 대해 다른 상태로의 이행, 부활, 환생, 불멸의 영원성 같은 어휘를 구사하면서 답변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죽은 자의 운명에 대한 질문은 살아남은 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죽음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내가 나의 시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나의 시신을 타인의 시신처럼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마치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나의 시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 이후에 나는 여전히 시신으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가? 이처럼 타인의 죽음을 접하면서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물음을 내면화한다. 죽기 전에 내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살아 있는 자들이 나의 시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을 내가 미리 던진다. 타인의 죽음에 던지는 질문을 나의 죽음에 던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말에 들러붙는 두 번째 의미는 나의 임종에 대한 상상과 관련된다. 나의 임종에 참여하는 타인들에게 나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를 죽어가는 사람으로 상상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내일 죽는다는 것은 내가 내일 이미 죽어 있다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종의 고통에 대한 예상은 우리가 갖는 죽음 공포의 핵심 내용을 구성한다. 그런데 리쾨르는 에이즈(AIDS)나 말기암 환자의 완화 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또렷하기만 하다면,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죽어가는 것이라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임종 30분 전까지도 그럴 수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리쾨르는 임종이 외부 구경꾼이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으로 점철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는 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죽어가는 자에게 임종의 고통이 선물하는 ‘종교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죽음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종교 간의 장벽을 넘어선다. 그는 임종이 초문화적이고 초종교적이며, 임종의 상황에서만 우리가 종교적인 경험을 운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리쾨르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시선이 낳는 죽음의 의미가 나의 죽음의 의미가 되는 것을 비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외부자의 시각,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외부자의 시각을 내면화하면서 생기는 나의 죽음에 대한 나의 예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죽음에 들러붙는 첫 번째 의미에서 그는 ‘죽음’과 ‘죽은 사람(dead person)’을 분리하고자 했고, 이제 두 번째 의미에서는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dying person)을 분리하고자 한다. 리쾨르는 죽어가는 자를 ‘이제 곧 죽을 사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삶을 위해 분투하는 자’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여전히 살아 있는 죽어가는 자를 향한 상상력과 공감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이라는 말에 들러붙는 세 번째 의미는 앞의 두 가지 의미의 혼란 속에서 생겨난다. 리쾨르는 ‘이미 죽은 죽은 자’와 ‘이제 곧 죽어 있을 죽어가는 사람들’의 구별이 모호해지면서 능동적이고 파괴적인 인격화된 죽음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죽음의 의인화’는 특히 전염병이나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에게 에워싸일 때 발생한다. 집단적인 죽음이라는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인간은 자기를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의 무차별적 집합체의 일부라고 느낀다. 이때 살아 있는 죽은 자, 죽어가는 자, 이미 죽은 죽은 자가 한데 뒤섞인다. 리쾨르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대학살을 언급하면서, 반복적으로 한 가지 물음을 던진다. 죽음이 삶보다 더 실제적일 수 있는가? 인간의 상상력은 집단 학살의 범인으로 절대악, 악마, 신의 보복 같은 것을 등장시킨다. 이때 비로소 “큰 낫으로 무장한 죽음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전염병은 신이 만든 인류 몰살 기획이나 죽음 프로그램처럼 그려진다. 모든 인간이 죽음이라는 전염병의 습격을 받아 하나둘씩 쓰러진다. 리쾨르는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 노령으로 죽은 사람들, 따라서 생명이 소진되어 죽은 사람들처럼 모든 죽은 자가 폭력적인 죽음에 흡수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떤 죽음도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모든 죽음이 응집하여 저주받은 덩어리(massa perdita)를 형성한다… 모든 죽음이 인간을 몰살한다."
우리를 속이는 죽음의 세 번째 의미는 의인화된 죽음이 모든 인간을 죽인다는 상상적 그림이다. 이러한 죽음 개념을 가질 때 모든 인간은 자진해서 자기가 만든 상상의 수용소 안에서 갇히게 된다. 아니, 세상이 이미 죽음의 수용소가 된다. 내 주변에는 이미 죽은 시신이 가득 쌓여 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고통의 신음이 매일 밤 귀청을 간지럽힌다. 인간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시신처럼 바라보며 산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시시각각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삶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미 죽은 유령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리쾨르는 “어떤 조건에서 그 자체로 평범한 죽음이 한계에 처한 죽음, 즉 끔찍한 죽음에 의해 오염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가짜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가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폴 리쾨르는 사후세계로 자기를 투영하는 상상력을 포기하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의 죽음 이후에도 생존할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처럼 리쾨르는 자신의 사후 생존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살아갈 타인의 생존을 배려하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리쾨르는 내가 사후에도 여전히 타인들의 시간을 바라보며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자에게 상상적으로 투영되는 “병렬적 시간성”, “죽은 자의 또 한 번의 시간성”, “영혼-유령의 시간성”을 계속해서 비판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나아가 인간은 세상에서 자기 존재가 완전히 망각될 것을 두려워한다.
누군가는 “신의 승인이 없다면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어떤 일도 헛되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신이라면 이 모든 일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신은 이러한 일의 원인을 알고 있으며, 설령 내세에서라도 이러한 불의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인간이 현세의 불공평을 바로잡는 공평한 내세에 대한 그림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현세의 불의를 현세에서 교정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현세의 불공평을 치유할 가능성이 전혀 없이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 인간은 내세를 떠올리고, 사후의 생존과 사후에 이루어질 보상과 처벌을 갈망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신은 죽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신이다.”라고 말한다. 현세가 아니라 내세의 정의와 처벌을 위한 자리에 신을 배치할 때, 이 신은 죽음의 신이다. 어쩌면 리쾨르는 ‘죽음의 신’을 ‘삶의 신’의 자리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가짜 죽음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가짜 내세와 가짜 미래를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내 죽음의 의미를 나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을 타인들, 내 죽음의 생존자들의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리쾨르는 “내세 없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굳이 내세가 존재한다면 내 죽음의 생존자인 타자가 바로 나의 내세일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나의 내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 나의 내세는 얼마나 지옥인가? 아니 얼마나 천국인가?
이창익_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논문으로는 ⟨종교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조너선 스미스의 종교 이론⟩,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종교, 인공지능, 포스트휴머니즘⟩, 저서로는 《종교와 스포츠》,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역서로는 《종교, 설명하기: 종교적 사유의 진화론적 기원》, 《구원과 자살: 짐 존스・인민사원・존스타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