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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종교심리학 11주차 “종교경험의 심리적 해석: 예배, 기도” / 박노권 교수
11주
I. 예배
1. 예배를 왜 하는가?
사람은 왜 예배를 할까? 그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모든 예배의 태도나 갈구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종교들은 형식과 상징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은 예배에서 보통 행렬, 기원, 음악, 기도, 경전낭독 또는 설교, 봉헌, 그리고 여러 상징적 행위들로 나타난다. 그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예배 행위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동기를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상호인격론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욕구 중에서 상호 반응을 하는 관계를 가져보겠다는 욕구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한다. 간헐적인 기도는 어떤 대답을 하는 반응을 찾아 외치는 것이며 이런 행동은 어린 아기의 울부짖음에서부터 유한된 인간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찾아볼 수가 있다. 인간은 나이가 얼마를 먹든지, 자기가 처하여 있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의 불충분한 데 대한 구극적인 해답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의의란 대답하는 반응을 찾아 헤매이는 유한된 인격의 외침이라는 가정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배란 사회화된 기도(socialized prayer)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개인이 ‘당신’을 찾는 일에 함께 울부짖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 개인들이 함께 모여서 어떤 한 가지 행동을 협력해서 취하려면 동시에 행동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혼돈된 표현만 잡다하게 늘어놓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공동체는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예배 순서를 따르게 된다.
종교적인 공동체는 예배로 말미암아 두 차원에 걸쳐서 완성을 모색한다. 즉 구극적인 의미에서의 ‘당신’을 수직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예배에 있어서 하나로 융합되는 이웃과의 수평적인 모색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예배는 구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답하는 응답을 찾는 연합적인 외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마치 개인과 개인 사이에 주고받는 것과 같은 대화의 관계가 전개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언어는 대화의 언어이며 응답을 부르는 기도로 엮어져 있다. 예배의 분위기는 초월자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느끼는 은근한 흥분에 감싸여 있으며 이로써 예배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당신’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현존의 넘쳐흐르는 신비 속에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다.
세계 모든 종교의 예배형식을 보면, 인간이 관계를 가지기 위해 탐구하는 일의 성격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예배의식의 행렬은 ‘당신’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은 ‘당신’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은 ‘당신’의 현존에서 느끼는 희열을 나타낸다. 기도는 유한된 인간의 욕구를 돌보아 달라고 ‘당신’에게 요청하며 그와의 관계를 가질 것을 부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물은 이 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표식으로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2. 예배 내용의 심리적 분석
1) 접근(approaching) 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행렬 가운데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다. 무엇 때문에 신자들은 예배의 대상을 향해서 접근하려고 하는가? 호기심, 놀라움, 매혹 등이 이러한 접근을 하게 하는 동기이다. 곤충이나 동물은 밝은 색깔, 움직이는 물건, 매혹적인 냄새 또는 이와 비슷한 것에 유인을 당한다. 예배에서 사용하는 상징은 역시 감각에 호소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더 심오한 동기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에까지 나아가게 한다. 루돌프 오토는 이를 압도적인 존엄, 장엄한 아름다움, 신적인 힘의 생명적인 긴박감 앞에서 경탄의 마음을 머금게 하는 신비의 매혹이라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흥분된 감정적인 응답은 절대 타자를 향해서 품는 것이며, 구극적인 신비에 접근함에 있어서 두려움과 소망이 서로 엉켜져서 여기에 경외의 감정과 아울러 진실된 관심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신뢰와 애정이 접근의 강렬한 동기이며 피조물을 창조주에게 이끌게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린 아기가 사랑과 확신을 가지고 부모에게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기대(anticipating)는 예배에서 떼어질 수 없는 대망의 분위기를 말한다. “종교는 기대하는 것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서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예배로써 더 충실한 생활을 기대한다. 이러한 종교적 활동은 고립되었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상호 인격적인 것이다. 예배는 ‘당신’에 거룩한 심정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기쁨과 감사, 혹은 욕구와 관심의 고백으로써 그의 현존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대는 인식에의 본질적인 것이다.
3) 찬양(praising)은 인식과 기대에 이어서 따라오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그를 맞는다는 것은 저속한 일상 생활의 충동을 고상한 조화로 이끌어 올리는 경험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감사를 느끼게 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된다. 이처럼 찬양은 은사를 준 존재로부터 감사로써 받은 은사에 이르기까지 이르러 기쁨 가운데 부단히 은사를 준 존재에 다시 되돌아가는 순환을 계속한다. 거룩한 음악은 이 기쁨을 나타내는 데 멜로디와 화음을 갖추어서 마치 샘물이 넘쳐흐르듯이 흘러나오게 된다.
4) 부탁(asking)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배는 인간의 소원을 간청하는 것 이상의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예배는 겸손의 태도이며 여기서 사람은 더 위대한 존재에 의지함과 그의 돌보심과 은총에 의지하고 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가 과거의 일에 감사함과 같이 미래의 일에 대해서 부탁을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간청하고 부탁한다는 것은 예의 범절의 표현이요 결코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턱대고 받는 것도 아니다. 존경과 신뢰로써 간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5) 봉헌(offering)은 값진 것을 남에게 주는 행위이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절대자에게 제물을 바치는가? 그것은 준다는 일 자체가 하나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인 동기에서 주는 선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 사업을 위해 돈을 바친다거나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주는 물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주는 일 자체이다. 바친다는 일의 종교적 의의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활을 봉헌한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과 같은 자발적인 봉헌은 완전한 헌신의 거룩한 행위이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이런 의미에서 감정에서부터 성별된 행동에 이르기까지 봉헌하는 일이 없으면 예배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6) 새로워짐(renewing)은 생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우리의 생활은 피로와 과오, 죄와 모순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고갈, 싸움, 과오, 죄 등으로 유한된 인간은 간단없이 참신한 기분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예배는 은총의 수단이며 이로써 파탄에 직면한 정신을 회복하게 된다. 정화의 제사는 악을 제거하며 병을 고치는 상징적인 청결을 나타낸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의 죄책을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채찍질하여 자기 입술을 제단 위에 있는 숯불에 지지게 되었다(사6:1-9).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된 것이 이러한 욕구를 강렬하게 하여서 더 건전한 순결과 효험 있는 권능으로 전환하는 새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화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깨끗함을 받아서, 힘을 얻어서 비로소 종교적인 생활과 사명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 우리는 거듭 예배에 참여함으로 올바른 생활의 근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7) 긍정함(affirming)은 진리 가운데서 기뻐하는 건설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지각없이 동의한다는 것이 예배가 아니며 생활을 가치 있고 보람있게 하는 것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예배이다. 신조를 암송한다는 것은 확신을 가지고 신앙을 천명한다는 일이며, 삶의 기준이며 그것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만한 것이다. 성서를 읽는 일은 새로운 통찰을 찾으며 잃어버린 보화를 되찾는 일이다.
하나님에의 헌신이라는 중심적인 초점을 가진 예배의 온갖 형식과 의도는 한 목표를 향해 움직여나가는 행위이다. 예배는 수동적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향해서 독백하는 것으로써 예배자는 만족하지는 않는다. 예배하는 자는 자기에게 결핍한 것을 소유하고 그의 욕구를 채워줄 ‘당신’을 향해서 전진하여 나간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접근, 인식, 기대하는 행위이다. 즉 간구하고, 드리고,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예배의 모든 행동의 목표가 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른 의견을 가질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저들은 예배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당신을 향해서 대화를 하며 당신은 선하시며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3. 잘못된 예배: 주관적인 예배
프라트는 주관적인 예배와 객관적인 예배를 구별하였다. 객관적인 예배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려고 하는 반면, 주관적인 예배는 예배하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본래 예배 의식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지 회중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인본주의자들의 주관적인 예배에서는 하나님께 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하여 무시하며 다만 인간적인 효과를 노리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공중 집회 예배가 자기에게 어떤 심리적인 인상을 주려는 저의에서 하는 연극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는 별로 이러한 모임에 깊은 인상을 받지를 않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모임에서 재미를 느끼고 덕을 닦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이를 구경하는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에 그는 연극을 하는 사람의 진지성을 의심하기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떠한 객관적인 일이 교회 안에서 생기지 않는다면 그가 교회에 참석한다는 일은 편의상 또는 기분이나 충동에서 하는 것이며, 더 좋은 매력을 느끼는 일이 있으면 그에 쏠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즉, 객관적인 관련이 전혀 없는 주
관적인 목적이 과연 예배일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만일 예배가 ‘당신’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을 도외시하는 행위는 예배의 본질일 수가 없다. 폴 죤슨이 말하는 어떤 인도주의자들의 예배는 이런 점을 잘 시사해준다.
극장에서 일요일 아침에 열리는 이 집회는 먼저 풍금 전주로 시작되고 이어서 키플링의 ‘Spirit of Truth’라는 찬송가를 부른다. 사회자는 성서 낭독 대신에 대학 학장의 서한을 낭독하고, 현악 삼중주가 연주된다. 설교 대신에 “대학생의 종교에 이상이 있는가?”라는 연설이 있고, 이 연설이 끝나면 현악 삼중주가 ‘헌금’ 주악을 하며 그 동안 헌금을 걷게 되는데, 그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경비를 지출하기 위하여서 걷는 것이다. 마지막 찬송 대신에 로버트 브리즈의 ‘Youth’라는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지막의 축복 기도는 하지 않고 사회자가 폐회사를 말하고, 그 다음에 풍금 후주가 계속된다. 이 집단의 달력에 기록된 구호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명철한 이성이 우리의 종교 지침이다.” “정신적 자유가 우리의 종교 방법이다.” “인류에의 봉사가 우리의 종교의 목적이다.” “무한을 우리는 측량할 길이 없다. 우리로서는 다만 인간성에 대해서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연설은 유창하고, 그 사상은 고상하며, 음악도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가 있을까? 거기에서는 기도, 하나님의 인식, 신앙 고백, 헌금, 하나님에의 헌신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한다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인간의 더 깊은 욕구는 더 고도의 근원을 찾아 외친다. 예배는 ‘당신’과의 대화를 하고자 하는 관심으로 탐구하는 가장 깊은 기갈을 의미한다. 예배의 건전한 힘은 이러한 만남 가운데서 새 생활의 창조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4. 예배에서의 배움
하나님과 만난다는 심오한 의미에서 하는 예배는 그 성질상 극적인 것이며 아마도 인간 경험에 있어서는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예배의 궁극적인 의의 이외에도, 또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가 어떤 경건한 심리극(psycho drama)의 심리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배에 있어서 그룹은 함께 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개인을 지지하게 된다. 신자들은 개인이 그 자신을 성찰하는데 힘을 돋구어 주며, 그가 잘못을 고백하는 일을 도와주며, 유한한 존재가 느끼는 초조감과 고민을 함께 탐구하며, 그의 내면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좋은 방법을 함께 모색하여 준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고민하는 그와 상호간에 응답하는 관계를 갖게 되어서 그는 구극적인 ‘당신’과 만나는 마음을 준비할 수가 있게 되며, 그는 자신의 불충분함을 자인하는 가운데 겸허의 고민을 겪게 되며, 따라서 용서하는 사랑의 치유적인 응답을 불러들여 이로써 파탄에 직면했던 자기 존중을 회복하며, 남들에게 환영을 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구도와 발견의 생활을 함께 나누어서,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여서 생의 목적을 통합함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한다.
심리요법자 모레노가 기독교를 가리켜 심리 요법적인 공동체라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사람이 생각하여 낸 것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하고도, 잘 생각해 낸 심리 요법적인 종교이다. 여기에다 비교하면 의학에서 하는 심리 요법은 사실상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의 목적은 시초로부터 인류 전체의 치료이며 이 사람이나 저 사람, 혹은 어느 한 그룹만을 치료하자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만일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않는다면, 회중이 이러한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구비하여야만 평범한 사람도 종교적 지도자가 된다. 만일 그가 상봉의 감각을 상실하는 한, 그는 속절없는 인위적인 또는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매일 쉬지 않고 기도를 하는 일이 예배를 위한 최선의 심리적 준비라고 하겠다. 그렇게 되면 예배가 구극적인 관심의 크레센도(crescendo)가 되며, 이는 ‘당신’과 만났다는 순수한 내면적인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 된다. 종교적인 믿음, 사랑, 소망의 심각한 태도로 ‘당신’의 응답을 탐구한다는 것이 예배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결과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인격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을 때에 그 사람은 위기에 대하는 고요한 용기를 가지며 또는 일상 생활의 권태를 극복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상봉의 경험을 주는 예배의 형식을 보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즉 생생한 만남을 갖게 하는 계기를 엄격한 형식 속에 가두어서, 다만 과거를 현재라는 빈 무덤 속에서 기념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자꾸만 반복하는 가운데 마멸감을 느끼고 수동적인 타성에 안주하여서 회중이 자연히 예배에 고민하면서 참여하기보다는 다만 청중이 되어버리기 쉽다. 이럴 때에 무감각에서 깨우쳐 주는 예언자적인 기능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신비적인 훈련도 사람의 전 에너지를 새롭게 하여 이 비극적인 유한된 불완전성의 순간에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준다.
예배가 형식적인 것으로 흐르게 되면, 거기에는 득실 양면이 따른다. 형식은 종교적으로 창조된 고상한 작품이며, 이로써 구극적인 상봉의 심오하고도 감동적인 드라마를 재창조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 형식이 수단이라기보다 목적으로 되어 버리면 그것은 ‘당신’과의 생명적인 상봉이 되지 않고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표현 형식이야 어찌하였든 예배를 하는 순간마다 개인의 자발성의 창조적인 사건이 있어야만 하고, 이러한 사건 가운데서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거침없이 하나님과의 상봉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Ⅱ. 기도
1. 기도의 본질
기도는 종교적 경험의 자연적인 언어이다. 어린 아기의 울음이 배고픔, 외로움, 아픔, 기쁨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리고 심한 고통을 당하면 신음하는 소리로 표현하거나 갑자기 놀라면 공포의 비명을 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도 감정적인 절망에서 불가피하게 우러나오게 된다. 현대인도 역시 곤궁에 빠지게 되면 “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하고 자발적인 표현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하이데르는 이러한 도움을 요청하는 울음을 기도의 원형으로 생각하였다. 위험이나 난관에 빠진 사람이 외치는 울음소리에서부터 기도는 아주 인위적인 형식과 구절, 그리고 의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또는 제 아무리 세밀한 꾸밈새를 마련했을망정 기도의 근원은 역시 근본적인 욕구의 감정에서부터 생겨지는 초보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사람은 기도하는 일을 잊어버리지만, 위험이나 긴박한 사태가 다가오게 되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도를 하게 된다.
이때 기도를 하는 사람은 타자(他者)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그 타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역시 현실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가 계시다는 것이 기도의 근본 조건이며 이러한 존재 안에서 일인칭인 ‘나’가 이인칭인 ‘당신’에게 말을 건네게 되는 것이다. 그 타자의 본성이 엄밀하게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 존재는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탐구의 대상이 된다. 마술이나 과학은 비인격적인 힘을 기계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기도는 상호 인격적인 것이며, 인격대 인격이 서로의 대답을 구하는 행동이다. 다른 사람과 서로 상호 활동하려고 하는 역동적인 경향은 자연히 언어나 기도로써 표현된다.
2. 기도의 내용
그럼 기도할 때 우리는 무엇을 간구하는가? 육체적 욕구(음식, 건강, 기후등), 보호, 죄의 용서, 갈 길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일,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 겸손, 하나님의 현존에서 느끼는 안전, 앞을 내다보는 명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중재,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 고난을 감당하는 힘,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것, 더 나은 생활을 하며, 이전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는 일, 마음의 깨끗함, 영혼의 화평, 무엇이든지 감행하는 용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신앙, 인류에 대한 희망, 생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 이웃을 효과적으로 섬기는 능력, 교회와 성도들과 지도자, 하나님의 나라, 국제 정세의 개선 등이 될 수 있다.
이같이 기도의 심리학에서 인간의 욕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데, 이는 기도가 언제나 욕구를 그 초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의 범위는 그 처하여 있는 사정에 따라서 대단히 광범하고 다양스러운 것이다. 즉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욕구도 있다.
기도가 인간의 욕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면 마슬로의 이론은 기도와 욕구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욕구의 위계(hierarchy of needs) 순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첫째로, 인간에게는 생리적 욕구가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자신의 생존적 요청은 가장 강하며 또한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면에서는, 이러한 생리적 요청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어떤 다른 욕구도 유발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의식주와 같은 생존의 욕구만큼 절규에 가까운 기도로 표현되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종교적 요청 가운데 사실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기도의 내용은 이러한 생존적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마슬로의 이론에도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생존적 욕구는 성숙한 면이 없는 낮은 욕구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성숙함은 결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설교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4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처럼,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에 대한 것에도 우리의 관심은 필요한 것이다.
2) 둘째로,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 그 다음으로 찾아오는 것이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안전해지기 원하는 욕구이다. 작고 가난한 집의 담은 낮고 허술하지만, 크고 부유한 집의 담은 마치 교도소 담을 방불케하듯 높고 치밀한 것이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본다. 흔히 입시철이면 북적거리는 종교단체들이나, 사회적 위기가 팽배해 있을 때 볼 수 있는 기도회 모임들도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프로이드의 종교비판에서도 보여지듯, 인간에게는 자연 재해의 공포나 죽음에 대한 불안이 늘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3) 셋째로, 인간은 소속감을 갖기를 원한다. 홀로 선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요청일 것이다. 무엇인가에 의존하거나 매어 있고 싶은 성향이라고도 설명된다. 때로는 소속되고자 하는 대상이나 집단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를 원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청소년의 또래 집단이나 사교 집단 심리에 이러한 소속감에 대한 절실한 욕구가 잘 나타난다.
4) 넷째로, 애정의 욕구를 갖게 된다. 이는 자신의 내적 충족감을 위한 동시에 이미 채워진 내적 충족감에 대한 밖으로 향한 발산 욕구라고 분석된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는 욕구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고픈 욕구, 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상태라고 간주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러한 욕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절대자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갈망,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또 다른 이를 향한 갈망이 어우러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5) 마지막으로 갖게 되는 욕구는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이다. 이것은 다분히 자신의 내적 성숙성 또는 사회적 완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앞서 말한 욕구들이 충족된 후에도 사람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개인이 자신에게 알맞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불만족과 불안이 곧 발생한다. 누구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말하며,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궁극적 의미와 사회적 책임을 찾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보다 더 성숙한 내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를 찾게 되며 그것을 위하여 앞서 열거한 욕구들을 포기할 수도 있는 역설적인 본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사회적으로 기여하거나 종교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모습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나중에 가서 마슬로는 자아실현을 넘어서는 욕구를 또 하나 제안했는데, 그는 이 욕구를 자아의 위에 있으면서 자아를 초월해서 발생하는 ‘초월욕구’라고 불렀다. 그는 초월이란 수단이라기 보다는 목적으로서 자기 자신이나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 일반적인 인류, 다른 종(種)의 동물, 자연, 더 나아가서는 우주와 관련을 가지면서 가장 상위에 있고 가장 포괄적이며 전체적(holistic)인 수준의 인간의식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초월적인 초월욕구는 본능적인 것이며, 완전한 정신 건강에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마슬로의 얘기에서 보듯, 만일 기도를 단지 낮은 차원에서 나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자신을 패배시키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궁극적인 존재를 찾거나 내가 원하는 일을 하여 달라고 호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앞에 와서 겸손하게 그의 현존을 감사할 때에 바로 구극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른 기도를 올릴 때 하나님 안에서 참 나의 모습을 보게 되며, 이것은 생의 전체 의의를 더 강렬하게 해줄 것이다.
3. 기도의 심리적 효과
자연 발생적인 기도는 위급한 욕구에서 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단련이 된 기도는 유한한 생활의 욕구를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충족케 하는 역동적인 힘의 원천을 찾는다. 그러면 기도가 어떠한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가? 적당한 행동으로 우리는 수십리 길을 걸을 수 있으며, 집도 짓고 또는 떡도 구울 수 있다. 사람이 일을 하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는다. 그러나 기도는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기도가 사람을 옮길 수 있으며 집도 짓고 떡도 구울 수 있는가?
물론 기도를 사람이 걸어다닐 때의 근육의 운동이나 시험 준비의 공부 대신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이 어느 목적지를 향해서 걸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지침이 될 수가 있으며 시험 준비 공부를 하는 목적을 더 새롭게 하는데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심리학적 영역에서 기도의 효과가 잘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얘기한다.
① 욕구와 현실에 대한 각성: 기도가 욕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기도를 할 때 그 욕구가 더 분명하게 알려진다. 생의 현실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와 마주치게 되며 자기 기만을 제쳐놓고, 더 심오한 정직이 더 참된 이해를 가지게 한다.
② 고백과 용서를 받았다는 감정: 욕구, 실패, 그리고 불안을 고백하면 감정적인 정화를 가지게 된다. 고백의 기도에서 우리는 용서의 확실성과 아울러 더 넓은 상호 인격적인 운명에 대하여 조화 있는 적응을 찾게 된다.
③ 신뢰와 화평감: 신앙과 소망으로 하는 기도는 긴장을 풀어주며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하며 걱정과 공포를 없애 준다. 그리고 근본적인 확신으로써 불안정을 완화시켜 준다.
④ 광범한 견해와 명철한 판단: 기도는 생활을 꾸준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관점에 비친 전체성을 보게 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마치 흩어진 책상 위의 물건을 정돈하는 것처럼 기도에서는 모든 착잡한 경험들이 잘 정비되어지며 분명한 질서를 갖추게 된다. 기도로써 하는 명상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며 실제적인 계획을 세워서 실천할 수가 있다.
⑤ 결단과 헌신: 이러한 명철한 견해로 말미암아 자기의 목표가 부각되어지며 이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 나가게 된다. 사람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자신을 바치면 그는 우유부단을 면케 되며 능률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역동적인 원동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결단이 결국 천성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첫 단계가 된다.
⑥ 감정적 에너지의 갱신: ‘당신’과 만난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영감과 감정의 원천을 확대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건강과 정력을 부여하여 준다.
⑦ 사회적 반응: ‘당신’과 만나는 기도 경험은 고립과 고독감을 극복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반응의 감정 가운데는 도덕적인 지지, 용기, 탄력성이 있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나 남들과 함께 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은 남들의 욕구에 대해서 예민하여지며,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협조하게 된다.
⑧ 기쁨, 감사, 화해: 기도는 가치를 긍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넓히며 현재의 선을 인정한다. 이러한 긍정은 기쁨의 바탕이 되며,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며, 슬픔과 실패에 우는 자와 화해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닥쳐오든 이러한 정신으로 마주칠 준비를 하게 된다.
⑨ 충성과 인내: 기도는 경건과 갱생의 행동이다. 충성심은 구극적인 목표를 긍정하고 진실한 경건에 자신을 투입시킴으로써 배양된다. 기도로써 부단히 하는 헌신으로 말미암아 장해나, 고달픔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심이 배양되어진다.
⑩ 인격성의 통합: 가지각색의 매혹과 호소의 도가니 속에서 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최고의 충성에다가 집중하게 한다. 혼란을 이루는 갈망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 가운데서도 기도는 중요 목적을 언제나 회상하면서 이러한 헌신의 경로를 따라서 에너지를 융합시킨다. 진실하게 기도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통합성을 나타내며 생활에 균형과 내면적인 화평을 갖게 된다.
기도의 가치와 영향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 결과는 인격의 숨겨진 구석에 영향을 주며, 아주 미묘하게 그러면서도 끈덕지게 생의 복잡한 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를 옳게만 하면 기도는 위에 언급된 인격의 심리적인 욕구에 광범한 효과를 줄 것이며 나아가서는 상호 인격적 관계의 역동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열 가지 심리적 효과를 살펴보았는데, 이 효과들은 구극적인 관계에서부터 생겨지게 된다. 이 효과들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욕구의 연속에서부터 생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이것들은 더 깊은 충족에서 생겨진 부산물이며 그 특수한 결과이다. 그런데 욕구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우세한 근본적인 것은 역시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이다. 그리고 종교적 성장의 가장 깊은 근원과 뿌리가 있어서 다른 것들은 다 여기서부터 파생하게 된다. 그 근원이란 ‘나’와 ‘당신’과의 만남을 말한다. 이 만남은 현재의 순간에 생명적인 상봉을 한다는 감각을 말하며 여기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끝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길을 터놓게 된다.
4. 종교적 헌신
이렇게 구극적인 ‘당신’을 향해 가는 끝없는 길을 따라서 기도 생활을 하면 그것이 순간적인 경험으로 그칠 수는 없다. 때로는 이러한 행로에 기복이 있을 것이며 허허 벌판에 다다를 때도 있어서 모든 고심이 헛수고처럼 보이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게 될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구도자들은 남들이 다 되돌아설 때에도 계속해서 탐구의 길을 걸어가며, 어지간한 회의와 절망의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견디어 내게 될 것이다. 기도의 생활로 말미암아 종교적 헌신이 더 한층 충성된 신앙 생활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당신’과 가지는 관계는 어떤 계약의 형식을 취하며 이 계약에 있어서 양자가 서로 서약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쭉 내려온 저들의 조상들은 ‘당신’을 만났으며 그런 후에 서로 계약을 맺게 되어서 서로 이행을 하여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나에게 충실하며 나를 배반하거나 다른 신을 쫓지 아니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구약성서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민족사는 바로 이 계약을 주축으로 하여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대한 모든 기도는 이 근본적인 전제를 토대로 하였고, 모든 죄는 이로써 측정되었고, 모든 승리는 이 계약이 충족되었다는 새로운 증거가 되었다. 환란과 질고가 이 백성에게 닥쳐오게 되면, 누군가 죄를 지어서 그 형벌을 받는 줄로 저들은 확신하였고, 다만 계약만이 저들을 구원의 길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진실된 헌신을 보장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율법을 제정하여, 그들은 인간 행동의 전 영역에 걸쳐서 이 율법을 적용시켰다.
계속적인 기도의 단련을 쌓은 사람들에게는 한 번 하는 기도마다 그의 끝없는 헌신의 길을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된다. 그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의 방황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자기의 근본적인 목적을 재확인하기 위해, 유한한 인간으로서 더 구극적인 근원에 의지하고 있음을 인증하기 위해, 죄와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얻기 위해,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고 앞으로 취할 길을 더 충실하게 따라가기 위해 기도한다. 그는 사랑과 감사의 사귐 그리고 참신한 에너지 가운데서 시들어 가는 생활에 활기를 주며 구극적인 헌신에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 종교적 헌신이 어려운 이유는?
그런데 종교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는 진실한 사람들이 왜 그다지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생길까?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또 비종교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고백과 또한 죄인들의 허물이 바로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심리적인 분석을 하면 종교적 헌신이 왜 어려운가 하는 이유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종교적 헌신에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인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① 영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주의 ② 이러한 가치를 주는 생활 양식을 택하는 의식적인 결단 ③ 자아를 사랑의 봉사라는 종교적 목적과 동일시하는 일 ④ 이 헌신과 충돌하며 이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다른 관심을 포기하는 일 ⑤ 하나님과 그의 생에 대한 의지를 중심으로 자신의 인격을 통합하는 일 들이다.
그러나, 인격이란 결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며,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헌신의 과정에 있어서 각 단계는 이 헌신에 따르는 독특한 장애에 부딪치게 된다. ① 종교적 관심은 어떤 다른 관심 때문에 도전을 당한다. 그 다른 관심은 세속적 매혹으로써 감각을 유혹하면서 호소한다. ② 어떤 종교적인 목표를 위해 무엇을 결단한다는 일은 더 재미있어 보이는 다른 목표들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③ 자신을 어떤 종교적인 이념이나 목적에다가 바치려고 하면, 이 일을 여러 가지 상반되는 관심이나 중심이 없이 원심적으로 분산하는 생활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견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목적에다가 선택적인 주의를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는데는 고도의 억제가 필요하다. ④ 체념을 한다는 일은 최초의 결단을 하는 시기에는 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간마다 계속적으로 체념해 나간다는 일은 평생을 두고 겪어야 할 시련이다. ⑤ 전진적인 통합이라는 것은 말로 하기보다 실제로는 더욱 힘들다. 어떤 행로를 꾸준히 따라서 살아간다는 일은 주의력이 금시 사라질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상반되는 갈망 또는 안락한 타성, 자꾸만 떠오르는 의심 그리고 계속해서 환경에 거듭 적응하는 일이 놀라울 정도로 착잡하다는 일들, 이 모든 일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면서 산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습을 진실되이 보이며 성숙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