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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심리학 12주차 종교경험의 심리적 해석: 죄와 용서, 의심, 꿈” / 박노권 교수

12주

I. 죄와 용서

1. 죄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일이 죄인가? 교통 규칙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될까? 남의 권리를 무시하는 일이 죄인가? 엄밀하게 말해서 죄는 종교적인 문제이다. 죄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하여 범죄, 부도덕, 이기심 등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범죄(crime)는 법률에 어긋나는 행동이며, 국가의 법을 어기는 일이다. 부도덕은 반도덕적인 행위이며 사회에서 받아 내려온 관습이나 전통을 모독하는 일이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이며, 이웃의 이익을 무시하는 일이다. 죄(sin)는 반종교적인 행동이며, 종교적인 가치 질서에 위반하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와 상호간의 응답관계에 서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기는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죄의 개념은 종교적 발전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죄의 지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종교적 관심이나 당신에 대한 책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죄의 감각이 점차로 후퇴하여 가고 있다. 죄의 느낌을 비정상적이요, 불건전하며 병적인 것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마슬로 같은 심리학자(또는 인본주의 심리학자들)는 사람들의 죄책감이나 책임을 밝히기보다는 그들을 용납하고 잠재력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죄를 두려워하는 것을 사회적인 퇴보라고 하는 사회학자들도 있으며, 저들은 옛날의 금단(taboo)이 무지와 미신에 근거를 두었다고 보며 현대의 새로운 사회 환경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제대로 못하여 괜히 걱정하며, 지나간 과거사에 대해서 조바심을 품는 것이라고 한다. 저들은 굳이 이러한 일들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제대로 생각을 잘하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주장한다.

2. 죄책감이란?

죄책감은 대단히 중대한 심리학적인 문제이다. 자책의 감정에 사로잡혀 버리면 불안과 공포, 자포자기, 투사와 억압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일, 또는 강박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죄책의 멍에는 감당하기 고달프고 고뇌하는 마음은 좀처럼 긴장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죄책감이 건강에 해롭고 인격의 저해되는 요소라고 한다면 차라리 죄의 관념을 깨끗이 단념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우리는 자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나 목사들은 이런 꺼림칙한 죄책감을 가지라고 요구할까? 이러한 물음에 몇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1) 죄책감은 정상적인 심리적 경험이다. 이것은 심리 에너지와 목표, 심지어는 관심, 욕구, 갈망, 의도, 희망, 애정간에 생기는 자연적 긴장의 일종이다. 목표를 향한 모든 갈망이나 노력은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모험에 항상 직면한다. 목표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다는 감각은 죄책감하고 동등한 감정이다. 노심 초사와 실패의 긴장이 없으면 생이란 평안할는지도 모르지만,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목표에 도달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게 만든다.

2) 죄책감은 윤리적 성격에는 미리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윤리적인 각성은 이상을 명령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윤리적 책임은 이상을 향하여서 작용하며 성장한다. 개인적인 실패감으로 또는 더 잘 하여 보겠다는 긴박감으로서의 죄책감이 없다면 진지한 관심을 저버리는 무감각, 무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적당치 않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일은 더 한층 적당하게 노력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3) 죄책감은 상호 인격적인 관계의 성장을 말한다. 이 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은 상호간에 충분한 배려를 함으로써 옳고 그른 일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다. 사회의 존속은 사회 구성원이 피차가 서로 도와가면서 일하는 데 좌우된다. 사회 정의도 각자가 전체를 위해서, 전체가 각자를 위해서 지니는 책임에 의거한다. 죄책감은 상호 인격적인 책임을 인식하는 일이며, 자기가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하는 데 대한 수치감이며, 타인의 권리를 유지한다는 의무감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사회 봉사자는 양심적이며, 공통된 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이다.

4)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정신병자이다. 이러한 사람의 성격 구조는 너무나 훼손되어 있어서, 감히 동포의 관심이나 이상적인 목표에 반응을 표시하지 못하고, 다만 무관하다고 하여 자신을 속이고 만다. 죄책 없는 종교는 남을 속이는 종교이다. 무엇을 믿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속인다. 그러한 종교는 진리와 오류, 선과 악을 혼돈하며, 가치와 가치 없는 것의 분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만일 종교가 신적인 선을 추구한다면 그 종교는 사람이 선 혹은 악을 이루어 나가는가 하는 데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죄에 대한 관심이 결여하면, 가치를 규정하고, 선포하고, 실현시키는 데 실패할 것이다. 무관심한 중립성에 그릇된 자만을 가진다는 일은 종교적 기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죄책이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때론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주며,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삐뚤어지게 한다. 종교적인 부모나 교사들은 고상한 이상에 집착하는 나머지, 자라나는 아동이나 청년들에게 완벽주의자로서의 요구를 하기 일쑤고, 부단히 저들의 결점과 실패에 대하여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엄격한 도덕률이나, 욕설이나 눈치의 압력에 억눌려 사는 아동들은 안정과 용납을 상실하는 가운데 심한 불안에 고통을 받게 된다. 태도와 느낌의 자발적인 표현은 감시를 당하며, 나아가서는 모든 행위가 부모나 종교적인 권위자에게 힐난이나 배척을 받지 않게 하느라고, 가혹한 억압에 사로잡히게 된다. 만일 이러한 아동이 충돌 가운데 휩쓸려 들어가서 분노, 공포, 죄책의 심각한 감정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공부를 할 수가 없게 되고 창조적이며 일상적인 일에 성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 건전한 죄책감의 필요성

목사는 죄책을 일으켜서 확대시키는데 반하여, 심리분석자들은 죄책을 감퇴시켜서 불안을 없애려고 한다. 그리 하여서 목사와 심리분석자는 서로 대립하여 가지고 상대편이 생의 가장 심각한 욕구를 그릇되게 다루고 있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의 욕구와 종교적 관심이 서로 만나게 되는 완충 지대가 될 수 있다. 불안이 없으면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둔감하게 되어 그것이 어떤 일을 유발시키는 데에 장애가 되며, 그 반대로, 지나치게 불안을 느끼면 감정 생활에 큰 어려움을 야기시키게 된다. 이러한 양 극단의 중간 지점에서 우리는 건전한 죄책감을 느끼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책임적이며 건설적인 불안감을 느끼도록 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죄책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불안을 느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과도하게 걱정만 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생의 전진적인 관계에 스스로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심리분석자들은 형벌적인 초자아의 위험을 갈파하여 개인의 본능적 충동 에너지를 부정 억압하여 증오심을 내면화하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적인 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은 그 잠재성의 원숙한 실현을 위해서 자유롭게 생산적으로 일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러한 장애를 수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심리 치유의 목적이 가끔 초자아의 힘을 감퇴시켜서 억압되어 있던 성적 욕구를 해방시키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레르는 신경질환의 결과가 억압적인 기능을 과도로 습득하는 데서가 아니라, 책임적인 양심을 덜 습득하는 데서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그 뿐만 아니라, 쾌락이라는 것은 다만 본능적 충동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양심의 쾌락(conscience pleasure)이라는 것도 그것이 충족되어지는 경우에는 이에 못지 않게 만족스러운 것을 그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양심이 마치 원숙한 발전 과정에 있는 자아 기능처럼 통합하는 책임을 갖고, 벌하기보다는 회개하고 용서하며 이러한 화해를 하는 가운데서, 새롭고도 한결 능률적인 인간을 만들어 간다고 본 것이다.

3. 화해

죄책감은 인격성 안에서 대단히 장애가 되는 요소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과 사회에는 언제나 이러한 감정이 있어 왔으며, 이것은 윤리적 성격과 종교적 성장에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이 감정은 전류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 흐름의 출구가 막혀버리면, 모든 대립되는 것을 태워버려서 산산히 부수어지게 한다. 즉 죄책감은 상호 인격적인 관계에의 출구가 막혀버리면, 이에 반항하는 인격성 안에서 극심한 광란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폭발적인 힘은 출구를 마련해 주면 건설적인 행동과의 화해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여러 역사적인 종교는 이러한 죄책을 감소시키며 깨어진 관계를 화해시키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회개

먼저 회개가 죄책으로부터 화해에 이르는 처음 단계이다. 이 회개는 심한 뉘우침하고는 다른 것이다. 뉘우침은 허황한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이며, 회개는 소망으로써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다. 뉘우침이란 절망적인 초조감이며 죄책의 병적 애착을 더하는 일이다. 그러나 회개는 심정, 태도, 목적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회개한다는 일은 죄책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일을 중단하고 자유로이 각자가 저지른 악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인 책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일은 신경질적인 자기 방어를 벗어나게 하며, 비난을 깨끗이 인정하고 새 출발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2) 고백

고백은 화해의 또 다른 하나의 단계이다. 죄가 비밀의 장막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한, 그것을 늘 은폐하고 억압하고 또한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승화 작용을 하며 울적한 죄책감을 개방된 표현으로 풀어주곤 한다. 비밀을 공개하여 버리는 일은 그 비밀을 몰아내는 결과가 되고 그것을 남에게 고하는 일로 말미암아서, 그 선포를 확증하며 인증하게 한다. 심리 상담을 담당한 사람에게 자기의 불안을 말하면 그것을 객관화하여서, 속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자신과 분리하여 공개하는 것이 된다. 고백은 종교적 건강에는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고백을 하는 일이 죄에서 구원을 받는 한 가지 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톨릭에서 행하는 고백성사는 심리적으로 매우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3) 용서

죄책을 해소시키고 화해로 이끄는 셋째 단계는 용서이다. 죄책 긴장감은 상호 인격적인 관계에서 생겨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범죄는 시민 단체나 법 기관에 관하여 죄책을 느끼게 하고, 이기주의와 부도덕적인 행위는 사람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죄책을 갖게 한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시키며, 종교를 형성하는 가치 체계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그릇된 일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것으로 시정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릇된 일이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죄책은 말소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용서는 깨어진 관계를 조화에로 회복시키는 데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업적이다.

이때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한, 다른 사람과 화해하려는 용서의 정신을 가질 수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 한, 사람은 마음놓고 행동할 수가 없다. 만일 그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다면 그의 양심은 깨끗하게 될는지 모르나, 그의 사회적인 관계는 아직 회복되어 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죄책에서 완전히 해방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일을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고 헛되이 박해를 가하더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깊은 안정감에서 표면에 드러나 있는 적대하는 불의의 파문에 감히 꿋꿋이 맞설 수가 있게 된다.

4) 배상

죄책에서부터 화해로 이르는 넷째 단계는 배상이라는 것이다. 배상이라는 것은 잘못과 해를 끼친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감정과 결단을 효과적인 행동으로 옮기고, 뉘우침의 초조감을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파손된 관계를 건설적으로 고쳐 가는 일로 말미암아 잘못을 극복하게 된다.

* 용서하는 사랑이 갖는 치유의 힘

예수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용서하는 사랑의 관계가 근본적인 욕구임을 인식하고, 이 화해의 관계를 생의 종교적인 길로서 제시하였다. 그의 구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풍성한 용서의 사랑과 은총을 알아서, 그 넘쳐흐름이 모든 생의 관계에 적용되는 일이었다. 보잘 것 없고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이르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며, 신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할지라도 용납하면서 베풀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용서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은 당신의 관계의 정신으로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용서하는 사랑의 치유적인 가치는 현재 많은 심리학자들이나 정신 건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널리 인식되어져 있다. 자라나는 아동들은 이러한 사랑을 받을만한 것이며, 부모들도 엄중한 훈련에다가 이러한 부드러운 사랑으로 하는 지혜를 가지도록 교훈을 받고 있다. 이 사랑이 결여되면 신경질적인 불안, 소년 범죄, 학습에의 반항, 잠재력의 실현 장해, 정신병의 중요 원인이 된다고 이해되어지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용서하는 사랑은 종교적 행동의 구극적인 관심이다.

4. 다양한 죄와 그에 대한 용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실제로 저지르게 되면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인식되면 죄책감은 죄의식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태도나 행동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다양한 종류의 죄들은 용서를 경험할 때 역시 다양한 행동과 태도의 변화를 일으킨다. 체계적인 구분은 어렵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죄와 용서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 우상숭배를 죄로, 삶의 확장을 용서로 보는 관점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항상 참신과 거짓 신을 구별해야 할 필요에 부딪친다. 회교, 기독교,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교는 우상 숭배를 가장 큰 죄로 여기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은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며 이 계명을 어기게 되면 2차적인 각종 범죄들이 따르게 된다. 아이들을 신처럼 떠받들거나 돈과 물질을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거나 또는 섹스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우리 자신의 삶이 초라하게 위축될 뿐 아니라 자녀들을 타락시키고 섹스나 물질을 오용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우상숭배와 삶의 위축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물질 자체를 더 이상 궁극적인 목적으로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한없이 확장된다.

우상숭배는 오래 전부터 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현대의 심리학과 신학도 매우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너희도 신과 같이 되리라에서 유한한 것을 무한한 신으로 섬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아를 분열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앤지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부분이 유기체의 전 기능을 마비시키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올포트도 포괄성을 성숙한 종교적 감정의 특성중 하나로 보고 있다. 이것은 목원생활에 실렸던 필자의 짧은 글에서 쉽게 표현되어 있으므로 소개해 본다.

한 아이가 낡고 더러운 그리고 위험하기도 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안돼!하고 소리 지르면서 빼앗을까? 하지만,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형을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더 좋은 인형을 주면서 한 번 얘기해 볼까? 그러다가 문득 인생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익숙해져가는 좋지 않은 취미, 생각, 습관을 없애라고 소리 지른다고 없어지나? 차라리 더 좋은 것을 보고 그것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되면 이런 낮은 차원의 집착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지 않을까? 말초신경 자극하는 섹스만이 인생의 최대의 기쁨인 것처럼 사는 사람. 사업에 실패했다고 그것 하나에만 매달려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 시험 못 보았다고 좌절하고, 마음 변한 애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인생의 구석에 가서 담을 쌓고 도인처럼 살려는 사람. 눈앞의 쾌락/슬픔으로 인해 생의 일부분에 불과한 이런 것들에 집착해서, 삶이 주는 인생의 또 다른 기쁨들과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거나 포기한다면, 우린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가을에 숨을 좀 돌리고 여유 있게 나에게 주어진 많은 것을 생각해 보자. 아침 햇살의 신선함. 누렇게 변해 가는 황금 들녘. 가끔은 밉기도 하지만 역시 좋은 친구들. 잘생긴 엄지발가락. 복잡하긴 해도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고 다양한 재능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니 절대로 한가지에만 너무 집착하다가 내게 열려있는 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잃지 말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본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이제는 높은 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나를 가슴아프게 하는 사소한 것들에 너무 아이처럼 집착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해 눈을 들어보는 연습을 하자. 이것이 크게 배우는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정말 멋진 삶이 아니지 않겠는가?

폴 틸리히도 우상숭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우상숭배는 일시적인 관심에 궁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조건적인 어떤 것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부분적인 어떤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유한한 어떤 것을 무한한 것으로 여긴다(현대의 우상숭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는 종교적 민족주의이다).

우상숭배에 빠진 삶을 철저하게 회개한다는 것은 죽어 가는 초라한 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원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회심을 위해서는 충성의 대상이었던 가족, 국가, 교단, 인종, 섹스, 이데올로기적 편견 등에 대한 지금까지의 집착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따라서 용서란 자신의 감정을 확장하여 다른 가족, 다른 나라, 다른 학교, 다른 인종, 다른 사상 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받아들일 때 체험한 삶의 현장이 바로 용서이다. 베드로는 이때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상숭배를 그침으로써 용서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 관계의 새로운 차원을 깨닫게 되며, 다른 사람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숭배해 오던 우상보다 훨씬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서 그를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2) 파괴적인 습관을 죄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의 회복을 용서로 보는 관점

일반적으로 죄는 파괴적인 습관을 의미한다. 이것은 알콜이나 마약, 일 또는 난폭한 행동에 중독이 걸린 사람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무서운 죄의식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을 너무나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간다. 그들은 나쁜 습관을 지속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삶을 제어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무력감이다.

여기에서 용납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심리학자들이 있지만, 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행동 자체를 나쁜 행동(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죄)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 윌리암 글레서는 이런 근거에서 현실 치료를 고안해 냈다. 글레서는 무의식적 동기를 인정하지 않으며 정신 질환을 하나의 행동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한다. 그에 의하면 이것들은 자신의 행동을 과거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 또는 정신 질환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넣어 주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고치려는 노력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다. 이처럼 글레서는 가치 중립적인 시각보다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행동을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행동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고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평가한다.

글레서의 이러한 관점과 에릭 번의 상호교류 분석에서는 파괴적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력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는 극복할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하소연하고 싶을지도 모르나 상호교류 분석학은 우리에게 극복할 힘이 하나도 없기는커녕 도전을 받으면 강렬하게 솟구치는 건강한 힘이 우리 내부에 숨어 있다고 믿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극복할 힘이 없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무책임한 유아적인 자아를 부추길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면서 그 행동을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면 그 결단에 대한 보상으로서 무력감을 떨쳐 버리고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회복이 바로 용서이며, 이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의심과 좌절감의 속박으로부터 저절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이 힘의 원천은 결정 그 자체이다. 자아가 이와 같은 힘을 얻는 좋은 예로는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자신의 두 발로 서도록 명령하고서 그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에스겔 2장 1절 말씀을 들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무력감에 다시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무력감이나 좌절감을 조장하는 것으로 끝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철저하게 보상할 수 있는 힘을 북돋워 주는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3) 신이 되고 싶은 욕구를 죄로, 인간으로 돌아감으로써 다시 회복한 기쁨을 용서로 보는 관점

하늘에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비극적인 그리스 신화는 대부분 신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창세기의 타락 설화에서 뱀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예수는 온 세상이 자기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리게 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자신의 인성을 부인하고 싶은 충동을 극복할 수 있었다(눅4:14).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강림한 신으로 여기고 숭배하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들도 당신들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유혹을 물리쳤다(행14:8-18).

신이 되고 싶은 욕구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죄이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죄는 무력감이 따르는 파괴적인 습관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취해 있는 반면에, 파괴적인 습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성에 의해 압도당해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고통이 따르는 깊은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카렌 호니는 신이 되고 싶은 욕구를 영광을 받고 싶은 욕구로 보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경쟁하기를 중단하고 주위 사람들을 월등하게 앞서고 싶은 강박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때 용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안에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류라는 대가족의 진정한 일원이 된다. 이러한 용서는 주위 사람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게 하고 그들과 하나되게 해 준다. 자기 과대 평가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인다.

이러한 용서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배우자를 지배함으로써 주도권을 쥐려고 다투는 부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신이 됨으로써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을뿐더러 자기는 항상 옳다는 자만심과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고집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약점이나 유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서를 경험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과 새로운 친교를 나누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을 보상으로 얻게 된다.

4) 소외를 죄로, 친교 회복을 용서로 보는 관점

소외감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정서적으로 만족을 주는 주위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거나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 관계 결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소외되었던 에베소인들(엡4:18-19)은 예수 그리스도와 심오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커다란 기쁨과 만족을 얻었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소외된 사람들과 성도들을 하나로 묶었을 뿐 아니라 하나로 합하여 새로운 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더 이상 소외되지 않음으로써 자아의 분열도 치유되는데, 소외감은 자아를 분열시키는 주요 요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외의 두 번째 특징은 무감각과 무관심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아가 단단한 껍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소외는 카뮈의 이방인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보여준 무감각한 태도 때문에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증언을 기초로 하여 장례식 이틀 후에 해변에서 발생한 아랍인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그들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멀리 해야만 자기에게 이롭다는 대중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소외 죄에 대한 용서는 멀어진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용서는 주로 분노나 갈등으로 금이 간 인간 관계에서 경험된다. 분노는 구체적인 불공평한 처사에 대한 불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사 소통이 차단되면 더 많은 불평이 일어난다. 하지만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행동의 배후에 있는 동기나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 불평은 대부분 사라진다. 그러나 분노를 부인하고 억누르게 되면 분노는 날이 가고, 해가 가고, 세대가 지나가도 사라질 줄 모르고 쌓이기만 한다. 분노로 인한 소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부모, 형제, 동료, 상사 등) 사이에 적개심의 장벽을 쌓을 뿐 아니라 자기 내부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람은 우울증에 사로잡혀서 삶의 가치를 의심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노는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음으로써 소외를 느끼게 한다.

분노로 인한 소외는 무조건적이면서도 책임 있는 사랑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처럼 이해하는 사랑은 공포와 불안을 제거해 주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똑같은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랑이 항상 상대방의 마음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일단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분노는 녹아지게 된다. 분열을 조장하는 적개심의 장벽이 무너지고, 미워하던 대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내부에 쌓아 온 저항감도 자취를 감춘다. 이처럼 소외에 대한 용서는 친교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II. 의 심(종교적 회의)

의심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어리둥절케 하며 걱정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혼란을 야기시킨다. 이미 존재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의심은 권위에 반항하고, 기성 전통을 배반하고 저버리기도 한다. 회의적인 불안은 심각한 우울, 불안정, 확신을 잃는 일, 그리고 죄책감과 혼합되어진다. 계속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유지하면 결국에는 무관심 혹은 절망의 기분에까지 발전하여 건설적인 행동을 깨뜨리고 창조적인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심을 가끔 두려워하며 반대하게 된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질문을 하게되면 심하는 것은 좋지 않아. 그냥 믿는거야하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이 언제나 악이라고 할 것인가? 사실 의심은 대단히 유용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의심은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독단적인 잠에서부터 비판적인 지성을 깨워주는 것이다. 의심은 공허한 전제를 문제삼고, 잘난 척하는 위선에 대해 도전한다. 의심은 정직한 연구를 요구하며, 잘못을 폭로하며, 수정을 촉구한다. 만일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신은 오류, 혼란, 무지함 속에서 번식하게 될 것이다. 조직적인 의심은 이러한 오류를 잘라 버리고 진리가 자라날 자리를 마련해 준다.

종교도 가끔 미신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초자연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배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는 미신의 그릇됨을 수정해왔다. 천문학은 점성학이라는 미신을 떼어버리고, 화학은 연금술이라는 미신을 떨쳐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고등 종교도 역시 그 전통과 믿음 가운데 있는 잘못과 미신을 꾸준히 수정하여 왔다.

꿋꿋한 믿음은 의심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를, 사법 기관에서는 소수의 의견을, 과학자들은 혁명적인 발견을 그리고 참된 종교는 진리를 위해서 잘못과 악을 비난하는 예언자의 비난을 환영한다. 의심은 잘 이용하면, 자라나는 신앙과 참 발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도 의심은 관심있는 자만이 할 수 있으므로 신앙의 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회의 경우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을 사용함으로 개개인의 고민이나 갈등과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고민이나 갈등, 또는 회의는 신앙의 성숙을 위한 몸부림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성숙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소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 문제로 갈등하고 고민한다는 것은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성장하려고 애쓴다는 증거로 이해해야 한다. 신앙의 성장은 영원한 정신과 마음의 혁명이며 끊임없는 삶의 혁명이다라고 신학자 리쳐드 니버는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갈등과 고민 없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죽은 신앙인 것이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 지나친 전통 중심의 교육,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교육, 개인의 참여나 고민이 허용되지 않는 획일적인 교육방식은 자칫 개인의 신앙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개인은 다음 단계의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고뇌나 갈등 내지는 회의에 대해 자칫 이러한 노력이 마치 불신앙의 결과처럼 부정적으로 비춰질 때 신앙적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III.

꿈처럼 인간에게 신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없다. 고대에는 꿈을 신의 계시라고 받아들였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요즘 사람들도 꿈을 통해 자기와 관련된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먼저 성서에 나타난 꿈 이해를 살펴보고, 어떻게 꿈에 대한 이해가 심리학적으로 달라져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서에 나타나 있는 꿈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꿈을 무엇보다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이해했다. 요셉은 부족의 지도자가 되는 웅대한 꿈을 꾸었는데(창37:1-11), 이 꿈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두려워했고 형들은 그를 증오했다. 노예로 팔려가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동료 죄수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으며 이로 인해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자리에 불려갈 수 있었다(창40:41). 또한 하나님은 그의 바램과 경고를 꿈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큰 나무와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베어짐(단4:1-37)--을 해석하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충고를 주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커다란 기능을 한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버리지 말고 돌보라는 계시를 받았다(마1:20). 그가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헤롯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망가라는 경고를 받는 것도 역시 꿈속에서였다(마2:13). 빌라도의 아내는 꿈을 꾸고 나서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과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도 사나왔습니다라고 당부했다(마27:19).

이와 같은 꿈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꿈이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 뒤숭숭한 꿈은 불안과 갈등을 지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 때문에 빌라도의 아내가 악몽을 꾸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꿈에 관한 현대의 갈등 이론을 말해주기도 한다.

초대교회 교부들인 클레멘트, 요한 크리소스톰, 그리고 어거스틴도 꿈을 하나님을 좀더 가까이 파악하는 길로써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꿈해석에 약간의 다양성을 보였는데, 이들은 꿈의 기원이 하나님이 꿈꾸는 자들에게 지시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간 심성의 깊은 곳에 있다고 보았다.

2. 꿈의 심리학적 해석

1) 프로이드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근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꿈을 해석하기 위해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프로이드였다.

프로이드는 그의 책 꿈의 해석을 통하여 꿈 이해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했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꿈은 무엇보다도 억압된 본능적 충동을 풀어놓고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꿈꾸는 동기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꿈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본능 지향적인 소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꿈은 꿈꾸는 자들의 언어 이전이고, 논리 이전인 일차적 과정”(primary process)의 언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꿈에서 상징들은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을 제공한다.

물론 꿈을 꾸게 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의 감각기관이 자극되어서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갈증, 허기, 통증, 날씨, 종소리 등이다. 이런 감각 자극이 수면을 중단시킬 만큼 강하지 않을 때, 혹은 수면이 중단되어서 잠을 깰 때까지 이런 감각적인 것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꿈을 꾸게 된다. 또는, 잠이 깨어 있었을 때의 정신 활동에 영향을 받은 온갖 사고, 관념, 또는 원망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최근에 경험한 정신 활동이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체험 가운데 억압되었던 것들, 이드 속에 갇혀 있던 욕구, 잊혀지지 않는 체험 등이 꿈의 동기가 되는데 프로이드는 이를 가장 중요시했다.

여기에서 프로이드는 꿈의 분명한 내용보다는, 숨어있고 다소 미묘한 내용에 강조를 한다. 그는 그의 경험에서부터, 꿈에 잠복된 내용은 종종 성적이거나 공격적인 본능적 충동의 표현이었다고 보았다. 어떤 꿈의 상징들은 직접적으로 본능적 유사물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길고 가는 물체는 남성의 성기 이미지이고, 속이 빈 그릇은 여성 성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인간은 밤 동안에 많은 충동과 욕구를 품고, 그것은 특히 성적인 성질을 갖는 것이 많지만, 본래는 그것 때문에 수면의 방해를 받았을 것인데도 꿈에 의해 이들 원망(wish)의 충족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꿈은 프로이드에 있어서 성적 원망의 충족을 위장한 표현이었다. 원망 충족으로서의 꿈은 프로이드가 꿈 해석의 분야에 가져 온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이 이론에 대해 우리는 많은 악몽을 역시 꾼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때로 수면을 방해할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욕구의 충족으로 풀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이 반론에 대해, 새디즘적, 혹은 메소키즘적인 원망이 있어서 그것은 커다란 불만을 낳지만, 역시 원망임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그것을 꿈이 충족시킨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 칼 융

꿈에 대해 다음으로 중요한 공헌자는 한 때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도 꿈은 인간 심성의 무의식적 요소들을 여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꿈의 본능적 내용보다는 심리 영적(psycho-spiritual)인 내용과 치료하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꿈의 더욱 진보된 모습들(심리 영적인 내용)이 우주적이고 원형적인 상 안에서 표현됨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건강지향적인 관점에서 꿈을 보았기 때문에, 꿈에 대해 영적으로 기울어지는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관용을 보였다.

3) 현대적 접근

상호인격 심리학과 같은 현대의 학파들은 꿈이론에 대한 프로이드, 융, 성서적 관점들을 통합하는 포괄적인 입장으로 흐른다. 즉 꿈의 동기는 다양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영적욕구 등을 충족시키거나 표현하는 여러 면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꿈의 상징은 병리지향적인 요소와 건강지향적인 요소 모두를 수반한다. 예를 들면, 가늘고 긴 물체의 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암시할 수 있다: 남자의 성기와 이와 관련된 성적 본능들(프로이드식 설명 가능성), 건강한 개성화를 위해 상호인격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무거운 곤봉(융식 설명 가능성), 영적 성장과 하늘로 이끄는 사다리로 올라가도록 사람들을 초대하는 덩굴(성서적 또는 영적 설명 가능성),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들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꿈의 종교적 의의

첫째로, 꿈은 뇌의 산만한 활동이나 의미 없는 정신작용이 아니므로 종교나 신학은 꿈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물론 꿈은 무의미한 넌센스이며, 한낱 인간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면서 소변을 검사한다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좋을 것이다. 소변은 육체의 배설물이므로 그것을 화학적으로 검사하면, 우리는 그 소변을 배설한 신체의 건강 상태에 대하여 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꿈을 바르게 분석하면, 그 꿈을 꾼 사람의 마음 상태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신자들의 꿈을 신중하게 다루고 그들의 꿈에서 억압되었던 갈등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서 그 마음을 치유해야할 것이다.

둘째로, 꿈은 종교적인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폴크스는 신속안구 운동 수면 중에 창조적인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 해결과정은 잠의 주기를 하나씩 통과함에 따라 더욱 빨라진다. 논문을 쓰면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잠을 자던 중에 갑자기 생각이 나고 문제가 풀리던 것을 종종 경험해 봤다. 또한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에는 잠을 자라는 속담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증명된 귀중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계시의 관점에서 볼 때 꿈은 하나님과 만나 교통을 나누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인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사무엘이 경험한 꿈의 의미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통할 수 있다(삼상3:1-18).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 힘든 시대이기 때문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는 경험은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다음의 참고자료를 시간을 내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꿈에 관한 과학적 연구 (참고자료)

꿈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들은 두 종류의 매우 다른 수면을 분류해 냈다. 이 두 유형의 수면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들의 잠에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 첫 번째 수면은 신속한 안구 운동을 볼 수 없기 때문에 NREM(Non Rapid Eye Movement Sleep) 수면 또는 비안구 운동 수면이라고 불리고 있다. 두 번째 수면은 REM(Rapid Eye Movement Sleep) 수면 또는 신속안구 운동 수면으로서 뇌전도의 전압이 낮으며 뇌파가 빠르고 불규칙적이다. 이 수면은 안구가 빠르게 그러나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운동을 특징으로 한다.

NREM수면은 다시 네 단계의 뇌전도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중 제2단계는 D-뇌파가 나타나지 않으나 제3단계와 제4단계에서는 D-뇌파를 볼 수 있다. 우리가 밤에 잠이 들게 되면 1내지 1.5시간의 NREM수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수면과 10-15분의 REM수면이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적어도 세 번 이상 나타난다. NREM수면 중에는 정신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때의 생각은 보다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환상적이거나 엉뚱하지 않고 현실 세계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 REM수면중에도 정신은 활동하지만 NREM수면과 다른 점은 이 수면중에 잠을 깨우면 80-90%가 꿈을 꾸고 있었다고 말한다. 프로이드의 꿈 분석은 기상천외한 꿈과 추위, 더위, 습기 등과 같은 신체적 자극으로 인한 현실적인 꿈을 구분하고 있다. 수면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성, 나이, 건강 상태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NREM-REM의 기본적인 수면 주기만은 일정하다. 기본 휴식-활동 주기(Basic Rest-Activity Cycle)의 원인을 연구해 온 학자들은 이 주기가 1시간 25분 30초의 자이로콤퍼스 슐러 상수와 거의 일치하고 1/2π(P.281) 의 값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때 R은 지구의 반경이며 g는 지구 표면의 중력으로 인한 가속도이다. 또한 지구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의 주기도 대부분 90분이다.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여행할 때 경험하는 수면 장애와 이상 감각 증상은 우리의 신체 내부 깊은 곳에 시계나 메트로놈 같은 장치가 있어서 24시간 만에 한 번씩 잠을 자게 하는 순환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류스와 시걸의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수면 주기가 밀물과 썰물의 주기와 같다고 본다. 그래서 조수의 주기를 측정할 수 있듯이 수면의 리듬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REM수면은 몸뿐 아니라 영혼의 건강에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수면 동안에 꿈을 꾼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꿈은 영적 세계의 소식을 전달하는 통로로 여겨지고 있다. 현대의 정신분석 치료는 꿈을 통해서 환자의 내부세계를 알 수 있다고 본다. 간절한 소원이나 신체적 자극으로 인한 단순한 꿈들을 제외하고는 억압되었던 내용이 이때 나타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