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이프파이.hwp
닫기2019-2학기 목원대학교 신학과 <공관복음> (담당교수: 박찬웅)
영상수업: Lif of Pi
영화 <Life of Pi>는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2001년)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2013년 개봉).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이 제작했고, 영화와 소설 모두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품성 면에서도 소설과 영화 모두 치밀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많은 것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영화는 어떤 소설가가 중년이 된 주인공 파이에게 찾아와서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인터뷰를 하는 틀로 되어 있다)
주인공 파이(Pi)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생각이 깊고, 독서를 좋아했던 파이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고상한 종교라고 생각하며, 이 세 개의 종교를 믿는 독실한 신자가 되기로 작정한다.(영화의 초점은 파이가 신앙의 세계에 유별난 관심이 있었다는 데 있으며, 소위 다원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동물원에 있던 사나운 호랑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자기 내면의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그러다가 하마터면 호랑이 밥이 될 뻔했지만 말이다.)
청소년기가 되었을 때, 파이의 가족은 불가피하게 인도를 떠나게 된다.(수업시간에는 이 부분부터 감상한다. 31분 30초부터!) 아버지, 어머니, 형과 함께 동물원의 모든 동물을 화물선에 태우고 멀리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그러다가 가장 깊은 바다인 필리핀 마리아나 해구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고, 파이는 홀로 살아남는다. 그런데 우연히 구명선에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호랑이가 함께 타게 되는데, 다른 동물은 다 죽고 결국 호랑이(리차드 파커)와 파이만이 살아남아 한 배를 타고 227일간 표류하게 된다.
중반부터 영화는 호랑이와 파이의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무서운 호랑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다가 호랑이와 정도 드는 애매한 상황이 된다. 호랑이에게 구명선을 넘기고, 자기는 튜브를 배에 연결하여 거기서 지낸다. 호랑이에게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준다. 하지만 거센 폭풍을 만나고, 몹시 지친 둘은 모두 죽음의 문턱에 다가선다. 그러던 순간 신비한 섬에 도착하여 간신히 살 수 있게 된다. 그 섬에는 담수가 있고, 먹을 것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섬은 밤이 되면 돌변하여 죽음의 섬이 된다. 그래서 파이는 거기서 안주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한다. 호랑이도 함께 말이다. 얼마 후 배는 기적적으로 육지에 닿게 된다. 파이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갔고, 호랑이는 숲속으로 사라진다.
침몰한 화물선 회사 사람들이 와서 파이에게 배가 침몰한 경위를 묻는다. 이 장면이 영화의 엄청난 반전을 보여준다. 파이는 그들에게 두 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영화에서 보여준 그대로의 스토리를 들려준다. 또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얘기다. 얼룩말은 불교 청년이고, 하이에나는 난폭한 요리사고, 오랑우탄이 자기 엄마라는 말이다. 그리고 호랑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호랑이는 파이 자신이거나 파이의 또 다른 면모라는 것이다.
아마도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파이의 인생에 각인된 것은 ‘해석된 사건’인 전자의 스토리인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경험을 소설로 쓰겠다고 찾아온 작가도 그것을 놀라운 이야기라며 감동한다.
여기까지가 줄거리다. 이것이 <공관복음>과 무슨 관계일까? 우리는 마가복음 해석을 통해서 복음서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실(fact)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엄청나게 고도로 해석된 신비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그렇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자의(또는 각자의 공동체의) 관점에 따라 예수의 이야기를 독특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해석한다는 식의 평범한 주장이 아니다. 복음서의 이야기에는 독보적이고 확고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경험이다. 평범한 영웅의 삶을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수준의 해석과는 차원이 다르다. 복음서를 기록한 1세기의 엘리트 신앙인들은 예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는 위대한 메시야 예수를 통해 인간들에게 심오한 메시지를 던졌음을 간파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하신 일은 단순히 합리적인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하나하나 모두 심오한 차원으로 해석되어 전승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하나님과 악의 종말론적 대결의 신비한 차원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의 차원으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결정적인 화해의 차원으로 해석되어 전해졌다. 네 개의 복음서를 포함하여 27권의 신약문서들이 모두 각자의 세련된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숭고한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파이가 경험한 일은 보통 사람이 겪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라는 점을 영화는 강조한다. 파이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는다. 배가 침몰한 지점은 지구에서 가장 깊은 심연 마리아나 해구다. 그것은 절망의 끝, 고통의 정점을 상징한다. 혼자 살아남았다고 안심을 할 수 없다. 파이는 무서운 호랑이 때문에 매일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다. 배고픔 때문에 하지 못할 일도 해야만 한다. 야광 플랑크톤 무리의 아름다움을 보며 잠시나마 안식을 취하려 해도, 거대한 고래의 다이빙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버릴 지경까지 간다. 폭풍우 속에서 곧 죽을 지경이 되는 순간, 그는 신에게 절규한다. 원망 섞인 절규를 하다가도, 또 신에게 감사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모티브가 보인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밖에 없는 파이에게 그래도 무언가 희망이 있었다는 식의 주제는 영화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영화와 소설은 오로지 절망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파이가 신에게 의지하면서도 이성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저 미쳐서 호랑이랑 함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합리적, 이성적 계획과 행동을 한다. 신앙의 세계는 현실과 신화적 상상력이 혼재된 영역이다. 신앙인은 그런 혼재된 세상을 살아간다. 합리성과 이성만을 강조하는 현실만을 믿거나, 반대로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신비한 세계만 추구한다면 불완전한 신앙적 삶일 것이다. 양자가 결합된 삶이 진정한 삶이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원동력에 가깝다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화를 감상하면서 눈을 떼지 말고 주의 깊게 보자. 어떤 장면이 느린 프레임으로 진행되는지, 카메라가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파이와 호랑이의 정체감이 중첩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인지 등을 유심히 보자. 물론 신앙적(또는 신화적) 상상력의 표현은 항상 현실의 정황과 일대일 대응되지 않음을 또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영화의 모든 장면이 각각 실제로는 어떤 것이었다고 설명될 수는 없다. 이는 모호함이 아니라 현실과 상상력을 초월하는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