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문서여성의 목회자 안수에 대한 논쟁.hwp

닫기

여성의 목사안수 논쟁에 대한 소고

On the Issue of the Ordination of Women

박 노권

여성의 목사안수에 대한 논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 기장은 1974년에 규정이 통과되어 1977년부터 여성목사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예장통합도 1996부터, 기하성은 1997년부터, 예성은 2004년, 기성은 2005년부터 침례교는 2013년 부터 여성목사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감리교는 가장 이른 1955년부터 여성목사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구세군은 부부가 목회를 대부분 같이하다 보니 여사관이 5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예장합동 등의 보수적 경향이 강한 곳에서는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성 목회안수에 대한 논쟁은 늘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목사안수가 규정으로 뿐만이 아니라 이미 오랜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감리교의 신학교 수업에서도 여성 목사안수의 타당성에 대해 논할 때는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종종 있어서 이들과 토론을 하곤 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 안에 잠재하고 있어서 아직은 .... 여성안수가 어렵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목회 안수의 타당성에 대해 논할 때 핵심이 되는 성서의 구절들에 대한 신학적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해보고, 목회실천적인 관점에서 여성 목사안수의 타당성에 대해 제시해 봄으로, 이러한 논의가 오늘날 목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하는 기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여성안수 반대의 근거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오늘과 같이 성직계급과 평신도와의 이원화된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교회에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엡4:11-12), 사도들, 선지자들, 목사들, 교사들이 남녀의 구분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감에 따라서 교회운영과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교회에는 감독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이 나타나 세분화된 목회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목회직의 변천과정에서 교회에는 교권제도가 강화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두 계급으로 구분 되었는데, 이때부터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목회로부터 소외되고 성직자들에 의존하여 피동적인 계층으로 전락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성직자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지게 되며,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되게 된다. 그렇다면 남성만 성직자가 되는 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그것은 당시의 남성중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있었고, 또한 성서에서 바로 이 성차별적인 문화를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그 근거가 되는데, 이 성서적 근거들은 기독교 오랜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성 목사안수의 반대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들을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린도전서 11장2-16절: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자도 여자의 머리라고 주장하였다.

2) 고린도전서 14장33-36절: 바울은 여자는 허락함이 없이 회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지 말라는 율법을 들어 호소하고 있다. 또한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하라고 말한다.

3) 에베소서 5장21-33절: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것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한다. 물론 머리의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드림으로써 본보기가 된 것같이 서로 위해서 헌신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서열적인 개념으로 주로 인용된다.

4) 디모데전서 2장9-15절: 여자들은 오직 배우며 경청하고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랍비의 해석에 따라 창세기 1장과 2장을 해석하면서 나온 것으로, 여성들은 역사가 시작된 처음부터 남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으니 오직 순종할 것을 주장하며, 단지 여자가 신중하게 믿음과 사랑과 성결을 가지고 살면 해산하는 일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성서의 구절들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 그리고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은 오랜 기독교 전통을 근거로 여성의 목사안수에 반대를 해왔고, 지금도 이것이 반대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2. 여성안수 찬성의 근거들

위에 언급된 여러 성서 구절들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은 것들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여성의 목사안수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목사안수가 타당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여성안수를 인정하는 교단의 규정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여성 차별적인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서도 여인들이 지도적 역할을 한 성서의 이야기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안수 반대의 근거가 되었던 성서 구절들에 대한 재해석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던 성서의 여인들

지도력은 남자들에게 국한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서에 나타나는 역량 있는 여자 지도자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의 여자 사사인 드보라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 사무엘이나 다른 선지자들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그밖에도 그녀가 지었던 찬송의 시가 사사기 5장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성경의 거룩한 내용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빌립보서 4장2-3절은 여성도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포함되어 있음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는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싸운 여인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올라 있습니다.고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이 여인들과 함께 수고하는 특권을 기꺼이 증거 하였고, 이 여인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과 수고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본문에는 상하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전혀 없으며, 다만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함께 일하면서 전적인 평등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에 있는 교회의 여러 성도들에게 언급하는 로마서 16장1-16절에서도 비슷하게 바울은 남자들을 언급하는 것과 함께 주 안에서 동역자들로 여러 여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16:3-5)에서 보듯 여자인 브리스길라의 역할을 볼 수가 있고, 이 밖에도 마리아, 드루배나와 드리보사, 버시 등의 여인들의 수고가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로마서 6장1절에서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일꾼(diakonos)이란 말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인 말이다. 즉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주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계속하여 교회에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뵈뵈를 소개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그녀는 공적으로 인정받으며 교회를 섬기고 있던 복음 사역자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사명을 주고 가장 많이 의지하였던 동역자들을 상세히 언급하는 데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자라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예상외로 사도전통이 로마세계로 전달되는 초기 상태에서 이미 여자들이 그와 같이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분명히 수행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며 또한 여성들에게 부여된 역할과 위치에 대한 당시의 문화적 추세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더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2) 예수의 여인들에 대한 태도

예수는 승천하기 전에 남녀 모두를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포함시키기 위해 마련된 성례를 제정하셨다(마28:19-20). 옛 성례인 할례는 오직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세례는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남녀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문화적 전제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어쩌면 모험적인 행위일 수도 있었다.

특히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가운데 특이한 점은 항상 여인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예수는 여인들을 섬기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셨고, 여자들을 소유물로 간주했던 유대 사회와는 달리 여자들을 가치와 위엄을 지닌 각 개인들로 대우해 주셨다. 여자들의 존재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도 함께 해주셨고, 복음, 성경의 의미, 종교적인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공적인 가르침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남녀를 분리시키는 벽이 없는 갈릴리 바다 근처 동네와 시골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또한 사적인 자리에서도 여자들을 가르치셨는데, 나사로의 자매들이었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있었고, 우물가에서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자를 가르치는 것은 부당하며, 심지어 모욕적인 일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의 행동은 여자들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3) 중요 성경구절에 대한 재해석

성경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기록되어 있지만 또한 시간과 상황에 대하여 상대적인 진리도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위에 말한 여성 목사안수 반대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은 절대적인 신앙의 차원인가 아니면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텍스트(어떤 말이나 사건)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상황)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이해해야만 보다 정확하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 본다. 이런 관점에서 대표적인 몇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2)

만약 딤전 2장 12절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언급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학교나 혹은 어떤 교육 현장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고, 여자들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안에도 여자 교사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누가복음 1장 46-55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찬송이다. 만약 하나님이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었다면 남자들은 마리아의 노래처럼 여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는 잠언 31장은 르무엘 왕이 쓴 것인데, 그는 이것이 자신의 어머니가 훈계한 말씀임을 인정하고 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덕있는 여인의 역할을 아들에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린 르무엘이 자라나는 동안 그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 가르쳤는데(행18:26), 로마서 16장에서는 이 둘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라고 불렀고, 모든 이방인 교회가 이 둘에게 빚진 자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장에서 언급된 39명의 동역자 가운데는 마리아를 비롯한 사분의 일 이상이 여자들이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그의 모친과 그의 외조모로부터 들은 교훈을 저버리지 말 것을 상기시켰다(딤후1:5-6).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역사 전체에 걸쳐 세상에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들도 포함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 구절은 성서에서 보이는 여자에 대한 태도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바울은 그런 말을 했을까? 브리스길라가 창립 지도자였던 이 교회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여자 목사인 뵈뵈를 아주 귀하게 접대할 것을 요구했던 바울이 여자들을 절대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디모데에게 말함으로 자신의 의견과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고 이 말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첫 번째 서신을 썼을 때 디모데가 시무하고 있던 에베소교회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유대인들과 이방 종교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초대교회를 핍박했고, 설상가상으로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 이단을 퍼뜨리는 등 디모데는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전 교회에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바라는 하나님의 꿈을 추구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남자들에게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그리고 바울은 또 여자들에게 말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9-10). 이런 말을 한 것은 신약 시대에는 과시하는 옷차림 그 자체가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한 저자는 장신구를 좋아하는 아내는 정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고, 로마인들은 다른 어떤 보석보다도 진주를 귀하게 여겼는데, 진주를 사용하는 것은 가장 심한 겉치레로 간주되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여자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인 미덕에 초점을 맞추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딤전 2:10)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특정한 여인에게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나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는...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1-15)고 말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9절-10절은 여자들“(복수)로 표현하고, 11절부터 15절 상반절까지는 한 여자‘(단수)를 쓰다가, 15절 하반부는 여자들‘(복수)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복수에게 단수로 다시 복수로 표현을 했을까?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는 에베소의 한 특정한 여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본문은 그 여인이 에베소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거짓 교훈을 공공연하게 권장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된 한 여자에 대해 언급하며, 더 이상 이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디모데에게 지시한 것이다.

바울은 이 여인이 잠잠해야 하는 이유를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의 상황과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아담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죄를 지었으나 하와는 속아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담이 원죄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바울은 여겼다. 여기에서 하와의 죄는 아담처럼 불순종의 결과가 아니라, 미혹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바로 이 미혹이 에베소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도 미혹되었고 또 종용해야할 이 여인도 미혹되었는데,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거짓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 잘못된 믿음으로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죄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종식시키기 위해 죄가 자랄 수 있는 원인이 되었던 미혹을 종식시키고, 또 미혹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상황을 종식시킴으로 이것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그 당시 여자들에게는 교육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들이 더 쉽게 미혹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목자의 마음으로 디모데에게 그 여인이 진리를 알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가르칠 것을 권함으로 교회내에서 이와 같은 미혹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미혹되었던 여자를 회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전체를 회복시키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금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된 교훈을 가르쳤기 때문에 금한 것이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그녀가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 이단을 가르치는 것을 금한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을 금지해야 할 사람은 물론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바울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악한 사람들”(딤후3:13)인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해 썼다.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남자들과 여자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딤전1:3)라고 일렀고, 사람들(남자들과 여자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6-7)라고 경고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딤후2:17)같으므로 조용히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 후메내오, 알렉산더, 빌레도, 익명의 여자 등 남자나 여자에 관계없이 거짓 교사들을 금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경건한 여인들의 가르침을 금하는 것이 아니었다. 디모데 역시 두 경건한 여인(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으로부터 선한 교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여자들이 잠잠하길 원한다는 것이 성서의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바울의 말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2)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고전 1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6에서 여자들이 공적인 사역에 관여하는 것을 칭찬했다. 그는 여자들이 회중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모두가 상호유익을 얻도록 촉구했다. 바울은 질서의 하나님에 대해 강조했으며 그들의 모임에서 무질서를 자아내던 세 부류의 사람들, 즉 방언을 하는 사람들, 예언을 하는 사람들, 여자들의 잘못을 지적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그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금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역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지도 않았다. 사실 신약시대의 모든 문화와 비교해볼 때 바울은 여자들의 교육을 위한 파격적인 배려를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왜 여기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했을까?

우리는 머리라는 단어를 들을 때 직장의 상사, 지도자, 권위자, 통치자, 대표 등을 보통 생각하게 된다. 이 머리는 희랍어 단어로 케팔레(kephale)인데, 이것은 몸의 머리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은유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된다. 그렇다면 바울의 편지를 읽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주었을까? 고대 문학에서 머리(케팔레)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근원혹은 유래를 의미했던 많은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11장 2-16절을 전체로 볼 때, 7절은 창세기에 나오는 사건을 연상시키고, 그 다음 8,9절은 남자에게서 말미암은 첫 여자에 대해 언급한다. 12절은 그 이후에 모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즉 이 모든 내용은 유래에 관한 언급이다. 따라서 케팔레를 근원, 유래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 구조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도 모든 남자들의 권위자, 지도자가 된다는 것보다 만인과 만물의 근원, 유래가 된다는 것이 더 적합한 해석이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8:6)고 선포한 것을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도 수직적인 권력체계 안에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것이 4세기 교부인 아타나시우스가 고린도전서 11장3절에 관하여 머리상관이 아니라 근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왜곡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던 이유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2절에서 그리스도와 사귐 안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고 기록한다. 즉 바울은 남자 여자는 서로 동등하게 필요하며, 이들 모두는 동등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데, 목회의 직무는 그러므로 남성이나 여성목회자를 통하여 상호보완될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과 같이 남편도 아내의 머리” (엡5:21-23)

이 구절은 위에 언급된 구절(딤2:12)과 같은 내용이며, 이미 머리가 계급적 구조가 아님을 밝혀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머리에 대해 또 다른 관점에서 언급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남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구속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머리이다. 이 말씀은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우리 머리의 형태나 계율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만약 본문 말씀이 그러한 머리직의 형태를 의미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시오”(21절)라는 구절을 그 기본적인 전제로 계속 반복하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이러한 유비에서 남자들은 스스로 희생하고 봉사하는 가족의 로 부름받았다. 이 유비는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말하고 있다. 그 다음 구절남편된 이들이여,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물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것 같이 하시”(엡5:25,26)에서 이 요점이 더욱 더 강조되고 있다.

이는 결코 사회적으로 지배 또는 피지배 관계나, 불평등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성의 차이가 있으나 동등한 위치에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상호 보완관계는 서로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

이 말은 여성 목사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바울은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정말 이것은 신앙의 불변적 진리 차원에서 바울이 한 말일까? 아니면 당시의 어떠한 상황에서 나오게 된 표현일까?

14장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시 덕스럽고 질서있는 참여를 이루기 위해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지적을 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들(28절), 예언을 하는 자들(30절), 그리고 교회 안의 여자들(34절)에게 잠잠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나 예언하는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절대적이며, 영구적이며, 상황에 상관없이 언제나 적용되는명령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동일한 구절에서 그는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역의 은사는 영구적으로 잠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질서대로”(고전14:40)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자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공적인 사역을 삼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을 향한 명령만을 빼내어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나 예언을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명령보다 더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고전14:26) 때로는 참여하고 때로는 잠잠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와 동일한 것이 여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잠잠하라고 언급한 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여성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성들과 이야기를 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질서있는 예배를 방해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전에 이방 종교에서 하던 대로 큰 잡음을 냄으로 예배를 방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여자의 사역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는 것이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찬송시, 혹은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14:26)에 참여할 자세를 갖추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참된 사역을 권장하기 위해서 바울은 잠잠하라”(고전14:28, 30, 34)는 세 가지의 명령을 통해 사역의 잘못된 형태를 수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바울이 단순히 여자는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곧 여자는 회중 가운데서 지도적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말하고자 했다면, 여자들도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고전 11장2-16절과의 모순이다. 고린도전서 11장11-14절에서 기도와 예언은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중예배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에게 기도하고 예언하도록 격려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잠잠하도록 명령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to speak(말하는 것, lalein)이지 to teach(가르치는 것, didaskein)이 아니다. 즉 이 단어는 공식적인 강의나 권면이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이야기나 잡담 정도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에만 관계되는 것이었다(고전14:35). 이 구절은 교회에서 여성이 활동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침묵은 한정적인 것이며 여자들이 성령의 감동아래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 자체를 막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전11:5).

(5) “만일 여자가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고전14:35)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생각이 많이 있었다. 마치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에서 그랬듯이 고대 희랍인들도 여자들은 잠잠히 복종하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침묵은 여자에게 덕이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반복했고, 여자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로마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프루타크는 집안에 남아서 잠잠히 있는 것이여자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했고, 로마의 한 극작가는 결혼한 여자는 말없이 바라보고 소리 없이 웃을 것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소리가 집에서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한다라고 말했으며 자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사고는 유대 랍비들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는데 그들은 여자들에 대해 이런 말들을 했었다: 그대의 침묵은 그대의 발언보다 낫다.’ ‘조용한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여자의 음성은 선정적이다그러므로 여자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음탕한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문화적 환경에서 여성들이 공적인 집회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기독교가 오해받지 않도록 집에서 남자에게 물어보도록 권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말은 공공장소인 교회에서 여성의 참여를 금지하는 말로 해석되기도 하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여자들의 배우려는 갈망을 격려하는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여자들에게 방관자로 머무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온전한 참여를 위해 자신들을 준비시킬 것을 촉구한 것이다. 당시 희랍인이나 로마인 가운데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가 아주 적었거나 전무했다. 유대인들 또한 여자들이 정규 종교 훈련을 포함하여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서 남편들에게 자신들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라고 여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대로 비록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그들의 발언이 교회 안에 무질서를 야기 시켰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다른 사람이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중이나 혹은 공적인 사역이 진행되는 예배 중이 아니라 적합한 환경에서 질문을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6) “하와는 돕는 배필” (창 2:18-20)

하나님은 하와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오랫동안 해석되어져 왔다. 그러나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어떤 종속적인 관계에서 돕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히브리 단어 ezer는 구약에서 21번이 나오는데, 16번에 걸쳐서 종속적 위치에서가 아닌 초능력적 위치에서 돕는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시121:1-2에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46:3-5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것은 남자 혼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자를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여자를 낮추거나, 또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야웨 기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돕는 배필은 상호보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7) 열두 제자들이 남자들이었다는 것에 대한 해석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열두 명의 남자들을 택하셔서 자신의 제자를 삼으셨다는 사실로 인해 교회 안에서의 여성 지도력에 반대한다. 그들은 주님의 모범을 따라 교회 안에 남자 지도자들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것이 근거있는 발언이라면 왜 자격 조건을 단지 성별에만 국한 시키려 하는가? 예수는 유대 나라의 한 지방이었던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만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아람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갈릴리 출신 유대인 남자중 아람어를 말하는 사람만을 지도자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예수는 비록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여자가 사역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이다. 보통 7명의 남자집사들의 사역은 잘 알려져 있고 예수를 따르던 여자 집사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들을 하였다. 이 여자들은 베드로의 장모(마8:14,막1:30,눅4:38-39), 막달라 마리아(마27:55-56, 막15:40-41, 눅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27:55-56,막15:40-41),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매(마27:55-56,막15:40-41), 구사의 아내 요안나(눅8:3), 수산나(눅8:3),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눅10:40, 요12:2)로 예수의 사역을 도왔던 자들이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선포하는 일을 여자에게 맡기셨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고 명하셨다. 그 외에도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 찾아와서 예배하던 여인들에게 주님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9-10)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여자들을 신뢰하시고 부활의 첫 선포를 맡기셨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여자들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보인다.

그리고 당시의 환경에서 즉 열두 제자 중에 여자를 포함시키는 것은 당시 문화적인 관념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실제적으로도 함께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당시 희랍과 로마에서 여성들은 열등하다는 팽배한 인식, 랍비들도 여자들에게는 율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당시 사회의 환경에서 바울이 여성 지도자들을 세웠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고 대단한 일이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도 교회가 시작된 이후 18세기의 세월이 걸렸는데, 남녀차별, 여성에 대한 편견도 문화에서 제거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인식할 때, 열두 제자가 남자였기 때문에 지금도 이를 근거로 교회 지도자는 남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8) 전통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

여성의 성직취임을 반대하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통주의자들은 여성 안수에 대해 반대하고 있지만, 성서와 전통,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여성의 안수는 찬성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세례와 안수 사이의 유사성이다. 세례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성에 전혀 관계없이 부름 받아 일반목회에 헌신한다. 이러한 유비로서, 만약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이 대의목회 (representative ministry)를 정당하게 대표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말씀과 성례전과 헌신의 안수목회에서 성의 차이 때문에 임의대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둘째로, 역사에서 여성에 대해 차별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역사속에서 교회는 점진적인 발전을 해나간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교회는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갈등과 고난, 그리고 한계를 경험해 왔다. 바울과 제롬,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칼빈의 시대에 팽배했던 특별한 역사적 장애와 정치적인 장벽, 그리고 폐쇄된 사회 전통 속에서 그들이 더 잘해야만 했다라고 가정한다면 이는 지나친 것이다.

과거에 교회는 일반 고대사회에서처럼 어머니의 역할과 가족을 양육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두었는데, 이러한 고귀한 일들이 성직에의 참여를 막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예전처럼 가족의 양육의 의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여성들의 목회안수와 성직활동을 부인하는 흐름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 동등하게 공평하며 똑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하는 우리의 문화에서, 여성들이 성 때문에 설교하고 성례전을 거행하고 양떼에게 목회를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

셋째로, 여성의 안수문제는 변경해서는 안될 교리를 수정하려는 문제로 엄격하게 보지 말고, 변화하는 인간 문화의 양상 가운데서 발전과정에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신학적 해석에 관한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성서와 전통을 통하여 새롭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경청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뒤늦게나마 아직 구현되지 못한 그리스도의 깊은 의도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현대 교회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3. 결론

기독교 전통의 역사에는 그 감추어진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완만하고 점진적인 역사적 과정을 거치는 많은 발전의 단계가 있었다. 즉 우리는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의미로써 전통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법에 따라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나, 대의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은 성서와 전통의 핵심적인 줄기로 함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의 본래의 깊은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기나긴 역사적 발전을 기다려야 했었다.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동안 기독교 전통에서도 성직은 남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지만, 최근에 오면서 여성도 목회에로 부르신다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목회직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성차별이 없어야 된다는 오늘의 문화 속에서 여성권리의 차원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차원에서도 그 타당성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신앙 공동체의 외적인 확증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만약 한 목회자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며, 또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한다면, 남자나 여자 모두가 이와 같은 대표의 기능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 모두가 각기 나름대로 인간 가족 전체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목자의 이미지는 부모의 이미지로서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해당되며 때로는 여성에게서 보다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여자는 목회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데 대한 강력한 신학적 근거란 없고, 오히려 복음의 깊은 의미는 남자와 여자를 상호협력, 보완, 계약적 사랑과 자기희생적 헌신의 관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지배 또는 굴종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여자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남자보다도 목회의 어떤 과업에서는 더 잘 할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경쟁하고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협력하고 양육하는 일을 하도록 훈련받은 여성들이 기독교 목회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게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