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차 은혜의 수단(이선희역 유장환 해심요약 죄종).hwp
닫기은혜의 수단 (The Means of Grace 1746, 이선희교수역) 유장환교수 핵심요약
말라기 3:7 “너희는 나의 규례들을 떠나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I].1. 복음에 의하여 생명과 영생이 밝히 드러난 지금에 와서도[딤후 1:10] 우리가 지켜야 할 여하한 ‘규례들’(ordinances)이 여전히 있단 말인가?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상적인 통로로서 하나님이 규정하신 여하’한 ‘수단들(means)이 있단 말인가? 사도시대의 교회에서는 만일 누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는 이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비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졌을 때”[마 24:12] 일부 사람들은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기 시작했고, 종교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가슴이 새로워지는 것에 두기보다는 오히려 은혜의 수단들을 실천하는 그 외적 행위들을 행하는 일에 두기 시작했다.
3. 은혜의 수단은, 이것을 그와 같이 오용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수단이 규정될 때의 그 목적으로 인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가슴과 삶에 있어서 점점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두 배나 더 지옥의 자식들이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이 수단들이 그 마귀의 지식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이 개별적 경우로부터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즉,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수단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그러나 참된 내적 종교를 갖춘 사랑의 사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하나님의 규정들(the ordinances of God)을 멸시하는 사람들보다는 오용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5.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 하나님의 규정들이 지독하게 세속화되고, 세속화된 형태로 교회 전체에 퍼지며, 결국에는 이것이 참된 종교를 거의 세상에서 몰아낸 것을 강렬하게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그들의 열렬한 열정과 사람들의 영혼을 이 치명적인 기만으로부터 회복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렬한 열정에서부터 마치도 외적 종교는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니며, 마치도 외적 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에서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II.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1.“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선행은혜(preventing grace), 또는 칭의은혜(justifying grace), 또는 성화은혜(sanctifying grace)를 그것을 통하여 전달해 주실 수도 있는 바의 일상적인 통로들(ordinary channels)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규정하고 명하신 외적 표식들(signs), 또는 말들(words), 또는 행동들(actions)이다.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은밀한 가운데 드리는 기도든지 또는 큰 회중과 함께 드리는 기도. 성경탐구(즉, 성경을 읽기, 듣기, 성경 말씀에 관하여 묵상하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받기, 즉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가운데 빵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
2.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인정한다,
1) 은혜의 수단들의 가치는 오로지 이들이 종교의 목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따라서 이 모든 은혜의 수단들은 종교의 목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며 공허한 것이라는 것, 무엇보다도 은혜의 수단이 조력해야 하는 종교를 오히려 대체하는 일종의 종교 대체물로 사용되는 경우에 특별히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이 주신 무기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며, 기독교를 가슴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하여 규정된 은혜의 수단들을 오히려 기독교를 가슴 밖으로 끌어내는 데 사용하는 그 엄청난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2) 모든 외적인 은혜의 수단들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 전혀 유익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전혀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어떤 것을 우리 안에서, 물론 그 자신의 전능의 능력으로써, 행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 그 자신이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하한 은혜의 수단 안에 여하한 본유적인 능력(power)이 들어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면서[마 22:29]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3) 여하한 수단을 사용해도 그것은 단 하나의 죄도 보상하지 못한다는 것,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화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된다는 것,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누그러뜨림은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는 없다는 것, 죄와 부정을 씻는 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공로(merit)가 있다는 것, 신자 자신의 여하한 행위 안에는 공로가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누구나 깊이 깨닫고 있다. 그리스도가 은혜의 유일한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이다.
4)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큰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영혼이 파멸에 이르도록 은혜의 수단들을 오용하고 있다. 경건의 능력은 없이 경건의 외양으로만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딤후 3:5].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가 그들의 가슴에 결코 나타나신 바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가슴 안에 부어져 충만해진 바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것을 행함으로 자신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어리석게도 믿고 있든지, 아니면 그들은 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는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수단 안에 모종의 능력(power)이 있어서 그 능력으로 조만간에 분명히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든지, 아니면 은혜의 수단의 사용에는 일종의 공로(merit)가 있어서 이 공로가 분명히 하나님을 움직여서 그들에게 거룩을 주시거나 그들을 용납하시도록 할 것이라고 그들은 안일하게 꿈을 꾸고 있다.
3. 그들은 기독교라는 건물 전체의 저 위대한 토대, 즉 “너희는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엡 2:5, 8]라는 말씀의 뜻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죄들로부터, 즉 그 죄들의 죄책과 능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총애와 형상에로 회복되었는데, 이것은 너희의 여하한 행위나 공로나 상 받을 만한 것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 즉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공로를 통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에 의한 것이다.
4. 그러나 핵심 질문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믿어라. 그리하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1]라고 네가 말한다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맞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믿게 될 것인가?’ 그러면 너는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말할 것이다 ‘알았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은혜의 수단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은혜의 수단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가?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되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은혜의 수단들을 옆으로 치워 놓고 기다려야 하는가?’ (페터레인신도회-파운더리신도회)
III. 성경의 결정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이 은혜를 하나님이 규정하신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즉 은혜의 수단들을 옆으로 치워 놓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이 은혜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는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구하는 자는 누구나 받기 때문이고, 찾는 자는 찾을 것이기 때문이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마 7:7-8]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받기 위해서는 구하라고, 즉 받는 수단으로서의 구하기를 사용하라고 아주 명료하게 지시받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즉 높은 가격의 진주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찾으라고, 그의 나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두드리라고, 즉 구하고 찾기를 계속하라고, 우리는 여기서 아주 명료하게 지시받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탐구하는 가운데” 그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탐구하라. 왜냐하면 ...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5:39]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참된 지혜를 주시며, 견고하게 하시며, 증가시키시는 한 방법이라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씀, 즉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고, 이 성경은 너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딤후 3:15]라는 말씀에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증가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주님 자신이 주신 지시이기 때문이다: “그가 배신당하시던 그 날 밤에 그는 빵을 취하여 찢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취하여 먹어라. 이는 나의 몸이니라하셨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를 행하라. 또한 그는 잔을 취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새 언약(또는 계약)이다. 내 피 안에서의 새 언약이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를 행하라. 왜냐하면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너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1:23-26].
IV.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무리 명백하게 지정해주셨어도 반대의견들이 수도 없이 많다.
1. 첫째로 “이 방법들을 너는 신뢰(trust)하지 않고서는 사용할 수 없다”라는 반대의견이 있다. 여기서 ‘은혜의 수단들을 신뢰한다’는 말로써 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것인가? 만일 내가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기다린다면, 나는 다른 방법으로써는 얻을 수 없었을 그것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나도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오, 내 생애의 끝까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나는 나의 죽음의 날까지 나는 은혜의 수단들을 그런 의미로 신뢰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신실하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믿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나를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나는 보았으므로, 나는 그의 말씀대로 될 것임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2. 둘째로 “이것은 행위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반대의견이 있다. “행위로써 구원을 추구한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글에 보면 그것은 모세 율법 가운데 제의율법을 준행함으로써 구원받기를 추구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의 행위들 덕분에, 우리 자신의 의의 공로 덕분에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 방법 안에서 기다린다는 것, 그러면서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나는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그 수단들 안에서 만나주시리라고 기대하는 것, 여기에 위에 말한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이루실 것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만나시며 축복하실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기대하는 것은 내가 행한 여하한 행위들 때문도 아니고, 내 의의 공로 때문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시는 그의 아들의 공로와 수난과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다.
3. 셋째로 ‘그리스도가 유일한 은혜의 수단이다’라는 반대의견이 열렬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은 단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우리가 ‘기도는 은혜의 수단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통로(channel)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다. 네가 ‘그리스도가 유일한 은혜의 수단이다’라고 말할 때, 너는 은혜를 위하여 지불한 유일한 값이요, 은혜를 산 유일한 구입자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다. 즉,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논하는 은혜의 수단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4. 넷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기다리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다윗은 ‘나의 영혼이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의 구원이 오기 때문입니다’[시 62:1]라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 자신이 어떤 길을 지정하셨다면, 하나님을 기다리는 더 나은 길을 네가 찾을 수 있을까? 다윗도 그 자신의 말이 충분히 증언하는 바와 같이 같은 방법으로 기다렸다: “오 주님,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주의 율법을 지켜왔습니다”[시 119:166]. “오, 주님, 주의 율례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내가 그것을 끝까지 지키겠나이다”[시 119:33].
일부 사람들은,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지정하셨다. 즉, ‘잠잠히 서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출 14:13]”라고 하면서 반대의견을 내세운다. 네가 말하는 그 성경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잠잠히 서서 주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 ...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라. 너는 너의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내밀어 바다 위로 펼치고 바다를 갈라라. 그러면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될 것이다”[출 14:10-11, 13, 15-16].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잠잠히 서서’ 보았던 그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즉,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앞으로 전진하면서”(!) 보았던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5. 다섯째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었으면, 왜 너희는 규정들에 순종하느냐?’[골 2:20]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즉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는 규정들을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는 반대의견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의 규정들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격이다! 물론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기 때문에 너는 이 성경구절에 언급된 ‘규정들’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규정들일 수가 없다는 것을 첫 눈에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반대의견들에도 불구하고 저 위대한 진리,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지정하신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그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음에 틀림없다.
V.1.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규정하신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 그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은혜의 수단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그 수단들을 사용하는 순서와 방법의 면에서 더 탐구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순서에 관하여, 우리는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기뻐하시는 일종의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고 감각이 없는 악한 자가 그의 모든 생각 속에 전혀 하나님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그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중에, 그 때 하나님이 부지중에 그에게 임하실 수가 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앞으로 임할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이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하면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가를 ‘들으러’ 간다. 만일 그가 가슴에 와 닿게 말하는 설교자를 발견하면, 그는 놀라게 되고, 그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여, ‘성경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하고 말하기, 즉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물론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거의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성만찬]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 그는 한 동안 이러한 주저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그런 생각들을 극복하고 성만찬을 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하나님의 길로 가기를 계속한다. 즉, [성경을] 듣기, [성경을] 읽기, [성경의 말씀] 묵상하기, 기도하기,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를 계속하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의 가슴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화 가운데 가라”[눅 7:50] 하고 말씀하실 때까지 그는 계속한다.
2. 하나님의 이 순서를 관찰하면서 우리는 각각의 영혼에게 어떤 은혜의 수단을 추천해 주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미련하고 감각없는 죄인에게 미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또는 대화하기일 것이다. 자신의 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그리고 아마도 다른 진지한 책들 읽기가 좀 더 깊은 죄의 깨달음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근심과 무거운 마음이 지속적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다 쏟아 놓도록 조언함이 좋다. 항상 기도하고 실망하지 않도록 조언함이 좋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행하면, 그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눅 22:19]을 그는 곧 기억하게 될 것이다[=성만찬을 받고자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 규정하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단계적으로 다 거쳐 갈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될 것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명령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도 어떤 순서를 변함없이 한결같이 지키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인도되는,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는 은혜의 수단들은 수천가지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며, 그 순서도 다양하고 서로 조합되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여전히 지혜로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외적인 섭리, 즉 때로는 이런 은혜의 수단을, 또 때로는 저런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기회를 주시는 것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성령이 우리의 가슴 안에서 가장 기뻐하시면서 역사하실 은혜의 수단이 무엇인가를 우리의 경험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탄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확실하고 일반적인 방법은 이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하나님이 규정하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은혜의 수단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은혜를 가지고 너를 만나주실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딛 2:11].
4. 은혜의 수단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과연 여하한 은혜를 전달하는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태도(manner)에 달려 있는데, 이 태도에 대해서는 주의할 점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이 모든 은혜의 수단들보다 높이 위에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항상 견지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행하신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규정하신 은혜의 수단들 안에서도 또는 그 밖에서도 그의 은혜를 전달해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실지 모르므로 항상 주시하라. 하나님은 항상 준비되어 있으시다. 하나님은 항상 구원하실 수 있으며,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좋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시도록 해드려라”[삼상 3:18].
둘째로, 여하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다음의 사실을 너의 영혼에 깊이 새기도록 하라: 은혜의 수단 안에는 아무 능력(power)이 없다. 은혜의 수단 그 자체는 빈약한 것이며 죽은 것이며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은혜의 수단은 마른 낙엽이며 그림자일 뿐이다. 내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 안에는 여하한 공로가 없다. 은혜의 수단의 사용 그 자체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opus operatum, 즉 행하여진 행위 그 자체(사효적 입장)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너의 가슴에 새겨라.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성령 안에만 있으며,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네 가슴 안에 새겨라. (no merit, no power)
셋째로,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라. 모든 외적인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만을 그리고 그의 아들의 공로만을 바라보라. 은혜의 수단을 행하는 행위 그 자체에 매달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만일 은혜의 수단 그 자체에 매달리면, 그 행위는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엡 4:6]. 또한 모든 은혜의 수단들은 수단으로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은혜의 수단 그 자체를 위하여 규정된 것이 아니라, 너의 영혼을 의와 진정한 거룩 안에서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규정된 수단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은혜의 수단들이 실제로 이것을 지향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은혜의 수단들은 똥이요 쓰레기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행한 후에, 그렇게 행한 너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지 주의하여 보라. 마치도 무슨 대단한 일을 행한 것처럼 너 자신을 축하하지 않는지 주의하여 보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독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이런 절규를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다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죄에 죄를 더하여 온 것이 아닙니까? 오, 주님,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구하여 주소서. 아니면 제가 멸망하겠나이다. 이 죄를 나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만일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의 사용에 계셨다면, 만일 그의 사랑이 흘러나와 너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면, 너는 외적 행위는 잊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는 것을 보며, 알며, 느낄 것이다. 콧대를 꺾고 겸손하라.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 모든 칭송을 하나님께 드려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모든 것 안에서 영광 받으시도록”[벧전 4:11] 하라. “너의 모든 뼈들로 하여금 이렇게 외치게 하라”[시 35:10]: “주님의 사랑하시는 친절하심을 나의 노래가 늘 찬양합니다. 나의 입으로 나는 항상 주님의 진리를 대대로 말하겠습니다”[시 89:1].
<<결론>> 은혜의 수단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은총의 수단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사 마음의 거룩과 삶의 거룩을 이루신다.
무시===>정숙주의--열광주의 극복
오용===>율법주의—공로주의 극복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