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주차40 그리스도인의 완전 요약 (유장환교수).hwp
닫기40. 그리스도인의 완전 (1741년) 이선희역/유장환교수요약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빌 3:15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성경에서 완전보다 더 저항감을 주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완전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많은 모험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완전이라는 말이 대단히 큰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니 완전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포기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 되든지 설교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다면 듣고자 하는 사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을 잘 표현하고 잘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완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이어서 15절에서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은가?
둘째로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가?
I. 첫째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
먼저 그리스도인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현세에 있어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어느 것 하나 완전히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본질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행하시는 섭리 가운데 많은 부분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두 번째로 인간들은 실수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실수하지 않지만, 인간의 실수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에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부대 상황에 대하여 실수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인간 어느 누구도 전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무오할 수 없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세 번째로 인간은 한계점들로부터 자유로을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는 육체적 한계 뿐만 아니라 내적 및 외적 불완전한 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한계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한계임은 분명하고 인간은 이 한계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네 번째로 인간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을수 없다. 그러한 완전은 이 세상의 삶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육체 안에 계시는 동안, 심지어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지나 실수나 인간의 한계나 유혹으로부터 예외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은 거룩을 의미하는 하나의 다른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나 거룩이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하는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완전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며, 거룩한 사람은 성경적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절대적 완전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말하듯이, 완벽한 완전(perfection of degrees)이란 없다. 그러므로 누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II.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것인가?
먼저 전제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자연의 생명과정과 마찬가지로 여러 단계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 요한은 요한일서에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어린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 또 아버지들이라고 칭하며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요한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너희가 용서받았다고 말하고, 젊은이들에게는 너희가 악한 자를 극복했다고 말하고, 아버지들에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영혼 안에서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상태의 정도까지 성숙한 완전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주로 아버지들에 대해서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이들조차도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지어 칭의 받은 자들, 가장 낮은 의미에서 거듭난 사람들조차도 죄 가운데 계속 있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가 없다. 이들은 이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의 종이 되었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외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일3:9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듯이, 그가 전에 죄를 짓던 것처럼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1) 그러나 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칭찬받은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죄를 범하며 살고 있고 또한 불가피하게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그러나 이들이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인들에게서 난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있어 본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11:11)라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장하는 하늘나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속하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 중 세례요한 보다 큰 자는 없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명백한 결론은 지금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신 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과거의 다른 어떤 유대인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또 다른 반론하는 자들은 솔로몬이 말하듯이 죄짓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니 선을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지상에 없다(전7:20) 고 주장한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 온 그 날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들을 가져가기 위해’ 나타나시기까지는 선을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다. 이것은 율법 아래서 되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더 이상은 종들이 아니고 아들들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의 경우와 상관없이. 복음이 주어진 이후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성 요한과 더불어 긍정할 수 있다. 죄로부터의 이 위대한 구원은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시기 전에는 주어지지 않았었다고 하는 사실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 와서야 죄에서의 해방이 이뤄지는 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에 나타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에 위에 다음과 같은 강한 교훈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너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생활태도에 있어서 거룩하라.’(벧전1:15)
3) 또 다른 반박하는 자들은 베드로와 바울도 죄를 범했다. 특히 성 바울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가운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성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간구했지만 그는 그의 유혹을 피할 수가 없었다고 반박한다. 죄의 옹호자들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요새들 가운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의 말씀이 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이러한 주장들을 철저히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로 그 가시라는 것이 바울이 죄를 짓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는 볼 수가 없고, 더구나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놓이게 했다고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 고대의 교부들은 그 가시라는 것이 육체의 고통이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이 의견에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이 정확히 일치한다. 즉, 그는 ‘나를 때리거나 치거나 시달리게 하는 육체의 가시... 나의 힘은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졌다’라고 했다.
넷째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적인 죄나 외적인 죄일 가능성은 없다. 즉, 그것은 교만이나 혈기나 정욕의 외적 표현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교만이나 혈기나 정욕의 내적 동요일 가능성도 없다.
마지막으로 그 가시는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전 ‘14년 이상’ 동안 그에게 있었는데, 이 편지는 그가 그의 생애를 마치기 수년 전에 썼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그리므로 그는 이 편지를 쓴 이후에도 그의 생애 가운데 긴 여정을 가면서 많은 싸움을 싸우며, 많은 승리를 거두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은사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는 데 있어서 큰 발전을 보았던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고찰해 보건대 바울의 이 경우는 우리가 논하는 문제[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와 전혀 관계가 없고,‘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요한의 주장과도 결코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러나 성 야고보의 “많은 일들에 있어서 우리는 과실을 범한다”라는 주장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약3:9-10) 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우리’라는 단어의 9절에서의 용법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 저주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야고보의 입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어떤 사람의 입이 그런다는 뜻이 아니다.
둘째 본문의 바로 앞의 구절에서 이 본문과 명백히 연관하여 말하기를 ‘나의 형제들아, 우리가 많은 일들에 있어서 모두 과실을 범하니, 우리가 [선생이나 교사들이 되면] 더 큰 정죄를 받을 것을 아는 바, 많이 선생들이 되고 교사들이 되려 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부터도 사도 야고보가 ‘우리’라는 말에 사도 자신이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이 구절 자체가 ‘우리는 모두 과실을 범한다’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 관해 말한 것일 수가 없고 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말한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먼저 언급된 우리는 과실을 범하므로, 이 과실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명백히 이 ‘우리’와 대칭적으로 구별된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라고 선언되었다.
5) 또 하나의 반박은 성 요한의 말에서 나오는 상호대립이다. 한 곳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3:9)라고 선언하는데 또 다른 한 곳에서는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요일1:8)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우리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쩌라는 것인가!
하지만 요한은 다른 성경 기자들과 일치될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도 잘 일치하여 일관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모든 주장들을 모아서 한눈에 본다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둘째로,‘나는 죄를 범한 적이 없고, 나는 깨끗하게 해야 할 죄가 없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셋째로,‘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를 죄들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준비하고 계신다.’넷째로,‘내가 이런 것을 너희에게 쓰는 이유는 너희가 죄짓지 않도록 하려함이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게 되거나 죄를 짓게 되었다면’그는 죄 안에서 계속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변호사,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지울 수 없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러나며,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 요한의 가르침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전체 기초에 일치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확정짓는다. ‘그리스도인은 죄짓지 않을 그 만큼 완전하다.(A Christian is so far perfect as not to commit sin)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오직 ‘주님 안에서 강한’ 자들, 그래서 ’악한 자들을 극복한‘ 자들의 특권이다. 또는 오히려 시작부터 계신
그 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악한 생각들과 악한 기질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긍정할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은 악한 또는 죄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 그러나 악에 관한 생각들이 항상 악한 생각들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복된 주님도, 마귀가 ’네가 만일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을 때, 마귀가 말한 이 악한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생각하셨거나 이해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악한 생각이나 죄된 생각을 갖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실로 여하한 악한 또는 죄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으셨다. 주님이 악한 또는 죄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그러면 ‘그의 선생과 같은’ 종에게 있어서 악한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더 이상 악하지 않다면, 악한 생각들은 그 마음으로부터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모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낸다. 부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행복한 특권을 갖는다는 것을 성 바울도 그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우리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능력인 바, 이것은 요새들을 무너뜨리고, 생각들을 내던져 넘어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거역하여 그 자신을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내던져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순종케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실로 악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이, 악한 기질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제자는 그의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자는 누구나 그의 선생과 같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의 바로 앞에서 기독교의 가장 숭고한 가르침들 가운데 몇 가지를 베풀어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라. 너희를 증오하는 들에게 선을 행하라. 한쪽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주님은 이 말씀들을 이 세상이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곧 첨가하시기를,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 다음 절 누가복음 6장 40절에서 주님은 이러한 ‘현명한 바보들’ 도처에서 우리에게 제기하는 두 가지 중대한 반대의견을 제거하신다. 그 두 가지 반대의견은 이렇다. ‘이 가르침들은 너무 어려워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요, 또는 ‘이 가르침들은 너무 높아서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까지를 받았거니와,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만 해도 되니, 이에 족한 마음을 갖고 불평하지 말라.‘완전한 자는 누구나 그의 선생과 같게 될 것이다’라는 나의 약속을 내가 이룰 것임을 의심하지 말라. 그런데 그 선생님은 모든 죄된 기질로부터 자유로우셨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그와 같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갈2:20) 이것은 외적 죄로부터 뿐만 아니라 내적 죄로부터도 건짐 받은 상태를 분명하게 묘사하는 말씀이다. 이 건짐받은 상태는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표현되었다. 부정적으로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나의 악한 본성, 즉 죄의 몸이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모든 것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뜻이다. 실로 이 두 가지,‘그리스도가 내안 살아 계시다’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 두 가지는 상호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있다.(inseparably connected)
그러므로 참된 믿는 자들 안에 살아 계신 그 분은‘그들의 마음을 믿음에 의하여 정화하셨다’. 그래서 ‘자기 안에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 그는 교만으로부터 정화되었다. 그는 또한 자기의지 또는 욕망으로부터 깨끗하다. 그리고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노여움으로부터 깨끗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유하고 유순하며 인내하며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노여움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모든 노여움이 다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도 노여움을 품으셨는데 그 노여움은 노여워함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대하여 슬퍼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때 죄에 대하여 노여워하셨던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 죄인들에 대하여 슬퍼하셨던 것이다. 완전한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그런 방식으로 화를 내라. 그러나 네 자신은 죄를 범하지 말라.’하나님께 거역하는 모든 범죄에 대하여는 메스꺼울 정도로 혐오를 느껴라. 그러나 반드시 그 범죄자에 대하여는 사랑과 가슴 아픈 연민을 느껴라.
이와 같이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신다. 외적인 죄들로부터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죄들로부터도 구원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맞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의 죄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기 전에는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이론의 여지 없이 그 자신과 다른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이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이후에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그들의 선생님과 같다고 단언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1장에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요일 1:7)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죄인도 칭의에만 관련해서 그렇다든가 또는 우리의 죄책을 깨끗하게 씼어내는 것에 관련해서만 그렇다고 말하지 말라. 첫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명료하게 구분해 놓은 것을 뒤섞어 혼동하기 때문이다. 즉 사도 요한은 먼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신다고 말하고, 그런 다음에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가장 강한 의미로 행위에 의한 칭의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외적 및 내적 거룩을 칭의 앞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모든 죄로부터, 모든 불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만 남는다. 즉, 그들은 지금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악한 생각들과 악한 기질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하는 것만 남는다.
이렇게 주님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신 것이다. 모세를 통해서는 ‘나는 너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 것이며, 너의 씨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 것이다. 그리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너희의 마음과 너희의 영혼을 다 하여 사랑하게 하겠다’(신30:6)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고, 다윗을 통해서는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하고 외치게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그리고 지극히 괄목할만하게는 에스겔을 통해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너희의 우상들로부터 내가 너희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마음을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새로운 영을 내가 너희안에 넣어줄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나의 규례들 안에서 걸어가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는 나의 법령들을 지킬 것이고, 그것들을 행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는 또한 너희를 모든 너희의 불의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모든 너희의 범죄들로부터 깨끗하게 했을 때는, 주 내가 무너진 곳들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과 주 나는 말했으면 그것을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을 이방인들도 알게 될 것이다.’(겔36:25)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복음안에서 우리에게 확증하신 그 예언적 말씀을 갖고 있으므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완전하게 하자.’(고후7:1)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높은 소명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전진하자.’(빌3:13-14) 우리도‘부패의 멍에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스러운 자유로 들어 갈’(롬8:21) 때까지 밤낮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렇게 전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