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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
Ⅰ. 오리엔트 문명
* 오리엔트(Orient)란?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4대 문명 발상지 중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의 중동 지역을 오리엔트 지역이라고 불렀는데 서양의 그리스보다 약 2천년 이상 앞선 문명을 발전시켜 ‘빛은 오리엔트에서’ 비추기 시작했다고 한데서 유래. 이는 오리엔트 문명이 서구 지중해 문명의 모체임을 의미
* 오리엔트 연구: 19세기 이후 대량 연구
-Egyptology: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로제타 스톤과 이집트 지 36권, 토마스 영에 이어 1822년 샹폴리옹의 상형 문자 해독
-Assyriology: 페르세폴리스 비문과 베히스타 스톤, 롤린스의 해석
ⅰ. 메소포타미아: meso(between)+potam(river)+ia(earth)
-지형: 개방적 지형, 호전적, 교역, 교통의 발달, 잦은 흥망성쇠
-생활: 평야 지역은 농경생활, 사막과 고원은 유목과 대상(隊商) 활동
-민족: 다양한 복합 인종
야베트 어족: 수메르족, 힉소스족, 엘람인, 후리안, 히타이트족, 카시트족
셈 어족: 아카드, 아무르, 아시리아, 칼데아인, 페니키아인, 아람인, 유대인
인도 유러피언 어족: 메디아, 페르시아족, 히타이족과 카시트족(귀족 계층)
-시대구분: 선사시대→초기 왕조 시대→아카드 시대→우르 제 3왕조 시대→바빌론 시대→카시드 시대→아시리아 시대(BC 731~626)→신 바빌로니아 시대(BC 626~539)→헬레니즘 시대→파르티아 시대
-정치적 발전: 지배세력의 변천
①수메르인: 전기(BC 3000~2371)와 부흥기(BC 2113~1792), 기원전 2000년경에는 우르, 라가쉬, 우룩, 니푸르, 에리두 등 12개의 도시 국가 건설, 기원이나 이주 방향 그리고 정착 시기 등은 의무, 설형문자, 지구라트, 12진법, 원통형 인장
②아카드인: 최초의 통일 왕국, 전성기는 사르곤 대왕(BC 2277~2221)
③수메르인의 재기: 우르 3왕조(BC 2300~2200), 우르 남무 법전
④아무르인: 도시국가 건설(리피트 이쉬타르 법전, 에쉬눈나 법전), 고바빌로니아 왕국 건설(수도는 바빌론, 전성기는 함무라비 왕 BC1792~1750)
-신권 정치
-종교: 다신교, 군신 중심, 현세적 특징
-문자: 설형 문자(점토판)
-역법: 태음력
-법률: 함무라비 법전
-신분계층: 1계급은 귀족, 승려, 전사, 관리/ 2계급은 상인, 금융업자, 공인, 농민/ 3계급은 노예
-문화: 자연과학 발달(점성술, 천문학, 수학 발달), 건축(지구라트, 이시타르의 문), 문학(길가메쉬 서사시)
ⅱ. 이집트
-지형: 폐쇄적 지형
-생활: 농업 발달
-민족: 햄족
-정치적 발전: 선왕조 시대→상․하 왕국→초기왕조시대→고왕국시대→중왕국시대→신왕국시대
①선왕조 시대: 도시국가 노모스의 출현, 상이집트 20개와 하이집트 22개
②상․하 왕국: 두 개의 왕국 출현, 상 이집트는 매 그리고 하 이집트는 코브라가 왕권의 상징
③통일 이집트: 왕조시대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의 30왕조 시대 구분
a. 초기왕조시대: 메네스, 멤피스 도읍
b. 고왕국시대(3~6왕조, BC 2700~2300): 피라미드의 시대, 수도는 멤피스, 왕권 강화 c. 중왕국시대(11~13왕조, BC 2050~1785): 수도는 테베, 왕의 골짜기
d. 신왕국시대(18~20왕조, BC 1575~1785): 수도는 테베
⑴아마르나 시대: 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 왕), 태양신 아톤(Aton)을 유일신으로 하는 종교개혁을 단행, 아마르나로 천도, 히로이즘적 전통을 깨고 자연주의·사실주의의 정신을 도입하여 예술의 발달을 이끌어 냄, 노예해방, 평민을 위한 정책, 귀족과 신관의 반란으로 시해됨
⑵19왕조의 람세스 2세(BC 1290~1223): 대표적인 파라오, 아부심벨 등 다양한 신전과 자신의 조상을 건설
-신권정치(파라오)
-종교: 다신교, 태양신 라 중심, 내세적 특징(미라, 사자의 서)
①통일 전 각 부족은 신성한 동물, 악어 등을 신성시하고, 동물의 얼굴 모습을 한 아누 비스나 호루스 신등을 숭배, 영혼 불멸 사상, 부활을 믿음
②중왕국시대 태양신 아몬 라와 같은 자연신
③오시리스나 그의 처 이시스 같은 인간적인 신
④정의의 신 Matt과 같은 추상적인 힘의 신격화
-문자: 상형문자(파피루스), 공용문자, 상용문자
-역법: 태양력
-신분계층: 귀족, 사제/ 서기, 관료/ 장인, 상인/ 농민/ 노예
-문화: 자연과학 발달(점성술, 천문학, 기하학, 의학 발달), 건축(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ⅲ. 오리엔트 문명의 성격: 서양문명의 모체
-서양문화의 2대 원류: 헬레니즘(Hellenism), 헤브라이즘(Hebraism, 유대교의 영향)
-그리스의 철기문화: 히타이트의 영향
-서양의 알파벳: 페니키아의 표음문자의 영향
Ⅱ. 에게해 문명
ⅰ. 그리스 지역 개관
1. 자연환경: 지중해식 기후, 산지가 많음, 포도, 올리브 레몬, 무화과, 사이프러스 등의 작물이 많음, 해안선 발달, 다도해
2. 민족
①아카이아: 미케네, 소아시아 서북안
②이오니아: 아티카, 보에오티아, 소아시아 중부
③도리아: 펠로폰네소스 남부, 소아시아 남부
3. 그리스의 시대 구분: 크레타(미노아) 문명→미케네 문명, 키클라데스 문명, 트로이 문명→암흑시대(철기시대)→아르카익 시대→고전기→헬레니즘 시대
ⅱ. 에게해 문명 개관
☞전기에는 오리엔트의 영향이 강했으나 후기는 그리스적 요소가 강해짐
☞에게해 문명의 전파에 관한 두 가지 학설
①크레타에서 미케네로의 전파
②미케네에서 크레타로의 전파
☞특색: 최초로 독자적인 해양 문명 건설, 지중해식 생활양식, 청동기 문명
☞관련 사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와 같은 문헌 사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고고학적 발굴(쉴레이만-트로이와 미케네, 에반스-크레타의 크노소스)
1.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
-에반스가 제작한 연표
①고왕국 시대 EM(Early Minoan Ⅰ, Ⅱ, Ⅲ): BC 2800~2700
②중왕국 시대 MM(Middle Minoan Ⅰ, Ⅱ, Ⅲ): BC 2100~1600
③신왕국 시대 LM(Late Minoan Ⅰ, Ⅱ, Ⅲ): BC 1600~1100
1) 중심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페스토스, 말리아
2) 건축: 크노소스 궁전(미궁)-수도시설, 수세식 변소, 공적행사를 위한 광장, 복도와 계단이 많음, 성벽이 없음, 벽화가 많음(다양한 주제, 프레스코, 안료 발달)
3) 신앙: 자연숭배, 소아시아계 여신, 소(양날도끼)와 뱀(뱀의 여신상)을 숭배, 신전이나 승려계급이 따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됨
4) 문자: 에반스가 찾아낸 신성문자, 상형문자, 선문자(Linear) A
①미해독의 135표의 상형문자 MM Ⅲ기
②선문자 A: 선으로 표기, 음절을 표현, 점토판에 새겨져 나무 상자 속에 보관,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 해독이 되자 않았으나 숫자, 10진법 분수
③선문자 B: 미케네인이 만든 것, 1952년 M.B.F. Ventris가 해독(그리스어를 기록하고 있다는데 착안하여 해독), BC 1100년경 미케네 파괴 이후 문자 소멸(BC 8세기 이후 페니키아 문자)
5) 미노스 문명의 파괴: BC 1400년 경 크레타 섬 전체 건물이 완전히 조직적으로 파괴
※미노아 해상 제국설
☞미노타우로스 신화: 미노스+타브로스, 농경과 황소 경기 등을 상징
☞에게해를 지배한 왕은 미노스 왕으로 트로이, 미케네, 크레타를 중심으로 미노스 문명이 발달하였고 크레타가 트로이, 미케네를 지배하여 미노아 해상제국을 이룩
☞미노아 해상 제국설
①헤로도토스: 크레타 인들이 원할 때 키클라데스 군도에서 공물을 받는 대신 선박을 받음 으로 세력을 확대했다고 전함
②투키디데스: 함대 보유, 기지 설치, 왕위를 계승, 해적 소탕 등에 대해 언급
③에반스: LM Ⅰ~Ⅱ기 크노소스 궁전이 대규모, 성벽이 없음, 그리스 본토의 에게해 일대 유물이 크노소스 유물 양식과 일치
2. 미케네 문명
1) 미케네 환경: 농업이 발달(밀 산지), 인력 풍부, 주변에 강력한 국가가 없었음, 해상제국은 아니었지만 상업 발달
2) 중심지: 중부 그리스의 보이오티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폴리스
3) 문화: 건축(키클롭스의 성벽, 사자의 문, 원형 분묘), 귀금속(황금가면)
4) 통치 체제: 왕(wanax)과 바실레우스(basileus, 촌락의 수장)은 공납관계, 미케네 문명 파괴 후 바실레우스가 독립해서 폴리스 건설, 장로회의는 왕을 보좌
5) 토지 소유: 공동 소유지를 추첨으로 할당
6) 멸망: 트로이 전쟁을 기점으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기울어짐, 공동체 사회 및 관료 조직의 붕괴, 13세기 말엽 미케네의 성벽이 강화됨(새로운 외적 대비), 11세기 아테네를 제외한 모둔 왕국 파괴, 크레타나 로마제국의 쇠망보다 규모가 더 큼, 파괴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으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된 시점에 도리아인들의 침입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임
3. 키클라데스 문명
1) 지역: 에게해 남부의 섬들을 키클라데스 제도라고 부름, 이 지역은 동그라미를 의미하는 커클로스(델로스 섬을 둘러싸는 원을 형성)에서 따온 명칭으로 사실상 모순됨, 이 섬들은 초기 시대부터 소아시아와 크레타, 그리스 본토를 잇는 정박지 역할을 함
2) 문화: 대리석 조각품
4. 트로이 문명
1) 지역: 소아시아 지방
2) 특징: 상무적 요소를 가진 문화권(ex. 트로이 전쟁에 관한 신화)
Ⅲ. 그리스 본토 폴리스의 성립
ⅰ. 암흑기
특징
☞왕(wanax) 대신 지방 장관 바실레우스(basileus)가 왕으로 대체됨
☞철기의 전래, 1000。C 이상의 토기, 동물이나 식물대신 기하학 문양 등장, 인구 팽창, 내부 분열로 식민 활동, 고고학적 발굴로 이시기에 수공업, 상품교환 등이 행해졌음이 밝혀짐
2. 암흑시대와 고전기 연결 관계에 관한 학설
1) 문명 단절설: 영국 캠브리지의 T.B.L. Webster, 미국 Capenter
2) 문명 연속설: 영국 A.J.B. Wace
3. 암흑시대가 끝나고 고전기 시작과 관련한 3가지 큰 사건
1)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
①호메로스에 관한 기록
-히오스의 늙은 소경으로 전해짐,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800년경에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함, 호메로스 이전에도 서사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임
②호메로스에 관한 문제: 생존 인물인가? 자신이 쓴 것인가 아닌가?
-두 작품 속에 모순이 있음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 Aristarchos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가 호메로스가 쓴 것이라 주장
☞18세기 말엽 F. A. Volf는 호메로스 시대에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호메로스는 대충의 줄거리만 썼고, 많은 시인들이 첨가한 합작이라 함. BC 9-6세기까지 구전하던 것을 Peisistratos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봄
☞M. Parry는 14세기 유고슬라비아 서사시 연구를 통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비교. 과거의 서사시가 구송시임을 언어학적으로 증명
③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도덕적 교훈서로 그리스 민족의 사고방식과 지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생활의 지침서로서의 권위가 있음, 미케네와 암흑시대를 배경으로 함
2) 문자의 전달
☞8세기 중엽, 현존하는 최고의 문자 기록은 BC 730년경의 것임, BC 621년 드라콘의 성문 법, 새로운 문자의 도입은 그리스 문화의 성격을 결정지음
3) 폴리스
☞폴리스란 용어는 청동기 시대에 나타남(일리아드의 언덕 위의 왕정, 오디세이에는 일반적 국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 국가로서의 폴리스는 고전 문명 말기에 나타났으며, 엄격한 의미에서는 도시 국가가 아님
①폴리스 형성의 이유: 集注(synoikismos). 폐쇄적 지리 환경, 민족성 등
②폴리스의 수: 아리스토텔레스-158개, 1000개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음
③구조: 도시부 (아크로폴리스+아고라)와 전원부
④폴리스의 일반적 성격
-포도송이와 같은 독립된 주권 국가, 자치, 자급의 도시 국가
-서로 폐쇄적, 배타적.
-동족 의식: 공통된 언어, 종교, 올림피아 경기, 헬레네스, 헬라스.
언어의 중요성: 폴리스의 생명, 정치권력과 권위의 수단, 시민 상호 토론의 수단
공동체 성원의 유사성, 균등성: 분할지 kleros, 경제적 균등에서 출발
전사 공동체: 호메로스 시대의 전사는 개인적 영웅→폴리스 시대는 팔랑크스(phalanx) 단체전 공동체 의식
Ⅳ. 스파르타와 아테네
ⅰ. 스파르타
☞그리스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소박한 양식, 공동체 원칙을 극단적으로 구현
cf)아테네는 개인의식 발달 추구, 페리클레스는 공동체속의 개성 강조
아테네의 사상가들은 스파르타의 생활양식 찬탄, 플라톤의 이상 국가
1. Sparta의 특이성
1) 2왕가-서로 견제, 전쟁 중에는 1인이 최고 지휘권.
2) Spartiatai-시민권 소유자가 정치 독점
perioikoi-주변인으로 위성 국가적, 정치 참여는 않고 신분적 자유
helotai-국가 노예로 국가에서 시민에게 배당(아테네의 노예는 개인 소유)
3) 자급자족 경제체제-철 화폐 사용, 무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음, 외국문물 수입 금지, 출입 제한, 시민 재산의 매매 양도 저당을 금지
2. 기구
1) 왕 2인과 ephoros 감독관 5명: 임기 1년, 왕을 감독하는 관리
2) gerusia 원로원: 일종의 아레오파구스, 2명의 왕과 28명의 귀족-30명으로 구성, 60세 이 상, 귀족 가운데서 시민이 뽑음, 고문 단체, 형사 사건 담당
3) apella 민회: 30세 이상의 스파르타 시민, 에포로스와 gerusia를 선출, 에포로스가 의장 담당, 안건은 왕과 ephor, gerusia가 제출할 수 있고, 의결은 고함이나 박 수를 쳐서 결정, 전쟁 강화와 관직 계승의 문제에 국한, apella의 의결이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님 -gerusia에 의해 의결 무효가능
3. Lykurgos(BC 9세기 경)의 개혁: 신화적 인물로 보기도 함
☞델피의 신탁으로 법(Rhetra)을 얻고 하루아침에 이들 개혁을 단행하였다고 함(불가능)
사회적 불균등, 경제적 균등화-토지 평균 분배: 9000명 시민에게 분배-매매 양도 금지,
공동 식사sissytia
국가 교육-철저한 군대 교육
금은화폐 사용 금지-철을 사용
스파르타의 제도는 점차적인 정치, 경제적 변화 속에서 이루어짐
근거: 메세니아 전쟁, 기원전 8세기 초와 7세기 초에 걸친 2차 정복
정복에 앞서 부족개편: 혈연적 3부족-자연적 5부족제
7세기에 식민 활동, Messenia의 풍부한 목장 점령-강력한 군대 소유, 농업국으로 발달
4. 스파르타의 교육: 철저한 군사 교육
ⅱ. 아테네
☞9세기에 시작, 8-7세기에 완성, 집주(Synoikia)형성, 건국자 Theseus
초기 아테네의 정치
1) 왕정-basileus라는 왕이 존재, 별로 알려진 것이 없음, 아크로폴리스에 정주
2) 귀족정-투쟁이 있었다는 흔적은 없고, 평화적으로 귀족정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
basileus는 관직명으로 남음
①관직: Archontes(archon의 복수형)-아테네 정치 담당, archon eponymos, archon basileus, archon polemarchos, 후에 6개의 archon 첨가됨
②귀족 회의: Areiospagos(Ares 군신의 언덕)회의-귀족정의 아성, 아르콘 출신자들이 원 로원 형성, 이오니아인, 4개의 phyle, 3개의 phratria, 몇 개의 genos
2. 민주정으로 변화 과정
1) 드라콘 법-최초의 성문법
①Herodotos의 기록: 631년 Cylon이 Megara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려함, 참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10년 후 드라콘 입법을 만들었다.
②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형법을 다루었는데 있어서 가혹했다는 것 외에는 기억할 것이 없다.
③Plutarchos의 『솔론전』: 솔론은 살인죄 이외의 드라콘 법을 폐지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죄목에 대해 하나의 형벌 즉 사형만을 적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로써 법을 만들었다.
④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나이 국제』: 1890년 발견됨, 드라콘은 무기를 장만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참정권을 한정시켰다.(Boule 형성, 신체 저당 허용, 노예제)
⑤아테네에서 발견된 비문: 19세기 중엽 발견, BC 621년 입법-401년 아테네인들이 돌에 새긴 것으로 드라콘은 고의사와 우연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임, 고의사는 phratria에 위임. 우연사는 방면 추방. 가혹한 것이 아니라 형법 역사의 진보된 수정
2) 솔론의 개혁: 594년 입법
①귀족출신으로 현인(*리디아의 왕 쿠로이소스와의 일화)이자 정치가이자 시인
⇒법률을 시로 표현, 아테네에 있어서의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경제적 면에 대한 심각성 깨달음, 그러나 계급제도 타파는 생각지 않음
②경제 개혁(Seisactheia): 신체 저당 금지, 부채 말소법
③금권정적 신분재확정:
Pentakosiomedimnoi-500(1메딤노이는 1.5 부셀) / hippeis 귀족 300 / zeugitai 부유한 자영 농민 200 / thetes 빈한한 농민
⇒솔론은 thetai까지도 참정권 부여(종전에는 zeugitai 까지), 피선거권은 없음, 관리는 hippeis 이상만 가능
④400인회 창설: 4phyle 각 100명 씩
⇒아레오스파고스 약화, 민중 법정 창설(관리 고발)
아르콘 선출 방법 변경: 민중의 대표자가 선출(전에는 원로원 귀족 회의에서)
법질서, 법의 존엄성 확립: 사회의 모든 계층
⑤그러나 솔론 이후 사회 혼란: 해안당, 평야당, 산지당.
3) Peisistratus
①두 번 추방된 후 Macedonia에서 용병을 사서 아테네 침입하여 주도권을 잡음→참주정
②해외 원정: 살라미스섬 정복
광산 개발, 공공 토목 사업→노동자에게 일거리를 줌
③문화 사업: Homeros 시 편찬 사업, 그리스 비극 상연함
④귀족정을 허물고 자신의 지지기반인 민중을 위한 정치→민주정의 경제적 토대 마련
⑤두 아들인 Hippias, Hipparchos에게 정권을 물려주었으나 타도됨
4) Cleisthenes의 개혁
①부족 개편: 혈연적 부족→지연적 부족
⇒아테네 귀족정의 온상이었던 혈연조직 4부족제 phyle를 타파
4phyle는 파당의 온상이라는 생각으로 혈연적 4phyle를 지연적 10phyle로 개편, 이 주를 해도 demos이름을 가져감
*10부족제의 구성
데모스(Demos,區:100~1000명의 데모스(시민)로 구성) 140-200 데모스 |
→ |
1 해안 트리튀스 |
→ |
1부족 |
→ |
30 트리튀스 (Trittys) |
→ |
10 부족 (Phyle) |
|
1 內地 트리튀스 |
|||||||||
1 도시 트리튀스 |
②500인 협의회 (boule)
⇒각 부족 50명(3개의 trittys 각각 17,17,16명), 이들은 demos의 인구에 따라 뽑음-최초의 비례 대표제, 1년 임기, 원칙상 재임불허→먼 간격으로 재임 허용
⇒의결 기관은 ekklesia(민회)이나 민회에 대한 예심기관이 boule(의회)임
⇒외교, 재정, 종교상에 대한 문제 상의, 당번 결정, 1년을 10기로 나눔(35-36일)-1 부족이 1기 담당, 당번 부족은 프리타니, 당번은 prytaneiai, 당번이 의장을 뽑음-boule와 민회의 의장이 됨-국가의 수석, 모든 boule 의원은 임기 중 병역 면제, 무보수였으나 후에는 보수 지급
③군대 조직 재개편-민병제도
⇒strategos의 선출, 임기 제한 없음, 각 부족에서 1명씩 총 10명의 strategos, 임기 무 한정(실제적 실권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형식은 민주정이나 내용은 전제정이 될 수 있 음. ex. Pericles)
④도편추방법(Ostrakismos)
⇒실시된 연대는 문헌상 488(7)-418(7) →8명 추방. 클레이스테네스가 정권을 잡은 연대 는 기원전 508년, Aristoteles에 의하면 4세기까지 제도가 존재하였다 함
* Grote의 견해: 클레이스테네스 시기는 민주정이 불완전→ 이러한 조처가 불가피.
시민권, 재산은 그대로 두고, 정치적 기반만 없앰. 도편추방제 실시 후 적어도 참주는 출현하지 않음-다른 나라에도 파급되어 보편적이 되었으나 정적에 의해 악용, 국가 위 기 시에 장애가 되기도 함
5) Ephialtes의 개혁
⇒아레오파고스의 부정 탄핵 권한을 박탈하여 boule, 민회, 민중 재판소로 이양
⇒아레오파고스는 단지 살인범과 종교법을 다스리는 재판소로 국한됨
→에피알테스는 귀족파에 의해 살해
6) 민주정의 최종적 완성: Pericles(495-430/29)
☞15년간 아테네 정치의 황금 시기, 파르테논 신전 건립
①급료제: 배심원에게 2 obol 지급, archon과 boule에게도 수당 지급
4세기에는 민회 참석자에게도 1obol 지급
②추첨제(급료제가 없이는 시행 불가), 다수결 만능 시대
③민회 발달: 민중 법정
④공공 의무를 부유한 시민에게 부담시킴
⑤시민권제한: 부모 둘 다 시민인 경우
⑥한계점: 여자, 거류 외국인,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던 제한적 민주정이자 폴리스 시민 들이 누린 자유는 노예의 노동력을 밑받침으로 한 노예 경제에 의한 민주정이었음
7)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기로 Demagogos 의 중우정
☞상공업자 정계 등장
시칠리 원정 실패 후 400인 과두정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30인 참주정(403), 민주파 1500명 학살, 5000명 추방
→402년 민주정 회복
Ⅴ.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ⅰ. 페르시아 전쟁
1. 원인: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지중해 해상권 쟁탈전
2. 발단: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식민지의 반란, 아테네의 원조
3. 경과: 1차(BC 492) 다리우스 1세 때 트라키아 해안, 아토스 만에서 폭풍으로 실패
2차(BC 490) 다리우스 1세, 히피아스의 안내로 마라톤 상륙,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의 응전, Phidipides의 마라톤
3차(BC 481-479) 크세르크세스 즉위, 전쟁 준비, 숙부 아르타바노스의 반대, 꿈 이야기, 육군 20만, 함선 700척
①테즈모필라이 전투: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항전→몰살당함
②살라미스 해전: 아테네 테미스토클레스 휘하 300척, 페르시아 패배
③플라타이아 지상전: 페르시아 패배
4. 결과: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축출, 페르시아 전제정에 대한 아테네 민주정의 승리했으나 소극적 승리 cf. 페르시아의 관점
5. 영향: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전성기, 고전 문화, 민주정 전성기(특히 제 4계급인 Thethes 계급의 성장), 이후의 아테네를 아테네 제국시기로 간주
ⅱ. 그리스 세계의 분열
☞동맹: 델로스 동맹(478/7) : 그 이전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존재
1. 형성의 이유: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연합의 자연적 변화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의 미온적 태도, 페르시아와 합세
2. 구성: 당시 델로스 섬은 성지이자 노예 시장의 중심
가맹국 260개 국으로 가맹국은 군선과 세금(phoros)를 제공
아테네가 금고 관리, 10명의 관리인
처음 Aristides가 1년에 460 달란트 책정(전투 시 200척의 함선 운영비)→기원전 431년 약 600달란트→이후 1000달란트
3. 5세기 중엽 아테네 제국: 거의 모든 국가가 예속되고 2-3개 국 만이 동맹국으로 남음
⇒이유: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아테네의 지배욕, 동맹국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돈을 냄으로써 아테네가 군대 독점
4. 실패: 동맹 회의 폐지
동맹국의 해군 무장 해제 (에게해의 제일 큰섬 Samos, Lesbos, Chios만 제외)
BC 451년 금고를 아테네로 이전, 금고 보관료를 받음-제국화한 구체적 시기
동맹국의 내정 간섭-민주정 실시 강화
재판권을 아테네로 이양-동맹국인의 목숨이 아테네의 대중에 달림, 재판 비용 징수
아테네의 군대 관리가 동맹국 주둔
도량형 화폐를 아테네 식으로 통일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제국의 제전으로 변형
또한 이 해에 아테네 시민권 제한 법안 통과
시민권 봉쇄와 대외적 제국화 병행. cf.로마
델로스 동맹은 반세기만에 붕괴-동맹국에 대한 가혹한 대우. 미틸리니 사건, 멜로스 섬의 반란
ⅲ. 펠로폰네소스 전쟁
1. 원인: 아테네 해상제국화, 그리스 폴리스간의 내분, 코린트나 메가라 등의 폴리스가 스파르타에 아테네의 불법성 호소→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
아테네: 이오니아인, 개방적, 진취적, 상공업, 해군
스파르타: 도리아인, 보수적, 폐쇄적, 농업, 육군
2. 경과
①제 1기(431-421 BC): 니키아스의 평화 30년 평화-8년 만에 파기
429년 흑사병-페리클레스 사후 클레온과 니키아스
②제 2기(415-404): 알키비아데스, 시칠리의 도리아와 이오니아 측의 대립, 아테네 패 배→아테네 30인 참주
Ⅵ. 그리스 문화
인간중심적, 현세적, 합리적, 이성적, 그러나 신비주의 등의 이면적 요소도 있음
조화와 균형,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 문화의 원류
ⅰ. 종교와 신화
1. 특징: 다신교, 기능적 신들,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경계가 모호
ex)제우스: 전통적 귀족을 대변, 아폴론: 상공업자들, 디오니소스: 빈민들
미스테리아 의식: Eleusis 의식(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Orpheus교 등
2. 그리스 신화
1) 신들의 계보
2) 그리스 신화의 특징
☞신화라는 말의 그리스어 미토스(μῦθος)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의미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는 인간 정신의 다양한 면모들을 담고 있는 것
①오리엔트 신화는 신비적이고, 내세적이며, 주술적 성격이 강한데 비해서, 그리스 신화는 합리적이고 현세적인 면이 강함
②오리엔트의 헤브라이인의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절대적이며, 전지전능한 유일한 존재이지만, 그리스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각 신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의 권한을 가지며, 인간보다는 강하지만 자연을 초월할 만큼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
③신화 속 주인공들은 항상 변신하는데, 신과 인간과 동물과 자연이 서로 경계가 없이 변신함
④하나의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신화보다는 수많은 버전의 다양한 신화가 존재
⑤그리스의 신들은 인간들에게 그리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데 비해서, 중국의 신들은 인간을 도와주고자 함
ⅱ. 문학
1. 서사시: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딧세이
헤시오도스: 신통기(theogonia), 노동과 나날
2. 서정시: 사포, 아나크레온, 핀다로스
3. 연극
1) 비극
①기원: Dithyrambos(Dionysos에 대한 찬가)에서 기원
기원전 534년 페이시스트라토스(추방에서 돌아와 재집권할 무렵) 시대 포도가 술이 되는 계절인 봄에 디오니소스에 대한 제사를 지내면서 비극을 처음으로 상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인 예술 가운데 비극이 최고라고 함
②구성요소: 줄거리(mythos), 성격(ethos), 대사(lexis), 사상(dianoia), 장면(opsis), 노래(melopoiia)
③3대 비극작가의 작품과 특성
-아이스킬로스: 오레스테스 3부작, 프로메테우스 3부작, 페르시아 사람들, 아가멤논 등
종교적 색채, 아이스킬로스는 제우스를 정의의 강력한 지배자로 묘사함, 그 이전 제우스는 방종한 모습으로 많이 그려짐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엘렉트라 등
인간 심리, 본성의 고찰, 아름다운 말과 교묘한 무대기술→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비극의 모범으로 삼음,
-에우리피데스: 바카스 축제,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들, 히폴리토스, 미친 헤라클레스, 페드라 등
합리적, 사실적, 신화에 대한 이지적 비판
2) 희극: 아리스토파네스: 구름, 개구리, 여인의 평화 등
ⅲ. 철학Philosophy: philo + sophia
☞자연 철학→휴머니스트적 철학 (소피스트→고전 철학의 단계)
1. 자연 철학: 이오니아 학파
1) 특징: arche가 무엇인가? arche (beginning, principle, power)
-탈레스(Thales):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세계는 아페이론(apeiron:무한자)이라고 불리는 지각 할 수 없는 실체로부터 나온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만물의 본질은 아이르(aer:안개·수증기·공기)이다.
* 존재론 논쟁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 만물은 유전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엘레아 학파): 만물은 부동한다.
현상=환각의 세계, 진리=부동, 불변, 무한, 불분할의 세계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4원소 설(물, 불, 흙, 공기)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원자론(아톰)
* 피타고라스(Pythagoras): 만물의 본질은 수, 數의 신, 數=삼라만상(홀수=빛, 선, 남자, 오 른쪽/ 짝수=암흑, 악, 여자, 왼쪽) 이원론, 영혼 불멸 metempsychosis
2. 소피스트 철학: 지적 혁명
1) 배경: 민주주의의 절정기, 시민 권력의 흥기, 새로운 출세의 길이 열림, 개인주의의 성장, 실제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요청
⇒키케로에 따르면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인간의 세계로 가져다주었다
2) 특징: 인간중심 철학, 입신 양명술, 수사 변론술 발달→상대주의, 회의주의, 개인주의, 주관주의적 경향
⇒현명한 사람들→공허한 추론을 일삼는 사람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영원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만물의 진리는 자기 자신에 있다
⇒유용성의 개념 도입-윤리적, 법적 규범의 상대성
-고르기아스(Gorgias): 이기는 것이 정의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다, 법률은 지배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다
⇒정글의 정의, 약육강식
3. 고전 철학
1) 소크라테스: “너 자신의 알라”, 진정한 선(善)의 사상
⇒산파술, 대화법, 무지의 지, 인습, 전통을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따름, Daimon에 복종
2) 플라톤: 이데아의 세계, 소피스트에게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지만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만물의 척도임, 참된 존재를 이데아로, 비존재를 현상계로 파악
피타고라스의 영혼불멸설 수용
인간의 영혼: 이성, 의지, 감정
네 가지 덕: 정의, 지혜, 용기, 절제
정치는 철학자에 의한 것을 이상적으로 봄, 지배계급은 사유재산제, 가족제 부정-사유욕구를 막기 위해
국민수는 5040인이 적당, 균등 토지, 금은소유금지, 공무원 취업 금지, 교육국가임
3) 아리스토텔레스: 현실적, 경험적, 실증적, 관찰적
ⅳ. 역사
1) 헤로도토스: Historiai(페르시아 전쟁사), 역사학의 아버지, 설화적, 문화사적 접근
2) 투키디데스: Historiai(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과학적, 비판적 역사, 정치사, 전쟁사 중심
3) 크세노폰: 아나바시스(일만인의 퇴각), 회상 등
ⅴ. 의학
1)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4기질설(다혈질red, hot-moist/ 담즙질 yellow, hot-dry/ 우울질black, cold-dry/ 점액질white, cold-moist)
ⅵ. 건축과 조각
1. 건축
1) 건축 양식의 변화
2) 대표적인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
3) 고전기 시기의 유명한 건축가
-익티노스(Iktinos)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 파르테논 신전
-므네시클레스(Munesikles): 프로필라이아
2. 조각
1) 특징: 조각은 장식물로 건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
2) 페이디아스(Phidias): 아테나 파르테노스, 제우스 좌상 등을 제작
ⅶ. 도자기
☞5세기 도기 화가들은 원근법을 사용
1) 흑색상 기법: 붉은 바탕에 검정색 유약을 사용
2) 적색상 기법: 검정색 유약을 전체에 두르고 자연적인 붉은색을 살림
Ⅶ. 헬레니즘 문명
ⅰ. 헬레니즘이란?
1. 드로이젠: 헬레니즘이란 용어 사용
2. 헬레니즘의 범위
1) 넓은 의미: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명 (매튜 아놀드)
2) 좁은 의미: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에서 BC 30년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
3. 그리스의 상황
⇒BC 4세기 폴리스간의 만성적 전쟁 상태 →폴리스의 균등성 상실
시민 전사단 붕괴 →토지 집중과 빈부의 차이 극대화
용병 유행, 범폴리스적 세계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 팽배
ⅱ. 마케도니아(도리아 계통)의 흥기
1. 필립포스 II(359-336)-개혁
1) 이중적 군대 체제: 중무장 보병과 기병대 강화, 군사적 전제 왕권
2) 그리스 정복→그리스 연합(스파르타 제외)
*아테네 두 명의 정치가: Isocrates: 범 그리스 사상 vs Demosthenes: 소 그리스 사상
2. 알렉산드로스 III 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메난드로스: 신은 위대한 사람을 사랑한다.
1) 인물 형성의 기반: 아버지로 부터 정치가, 장군으로서의 자질, 결단력, 판단력, 실행력
어머니로 부터 용모, 야성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3년간 교육
2) 동방 원정
⇒그라니코스(Granicus) 전쟁(334, 소아시아 획득)→이수스(Issus) 전투(333), 이집트 정복 후 알렉산드리아 건설→가우가멜라(Gaugamela) 전쟁(331, 최종 승리, 페르시아 다리우스 III세의 죽음)
ⅲ. 알렉산드로스 제국 및 정책
1) 동방적 전제 군주제
2) 혼인 정책: 서방인과 동방인의 결혼 생활 인정
3) 알렉산드리아 시 건설: 군사적 거점, 그리스 문화의 전파
4) 현지 임명주의: 군제 개혁(반란을 우려하여 지휘군을 세분, 축소)
→ 기원전 323년 6월 Indus강에서 바빌론으로 귀환한 후 사망
ⅳ. 제국의 분열: 계승(Diadochi) 전쟁
1) 셀레우코스 조(Seleuchos): 시리아 왕국
2) 프톨레마이오스 조(Ptolemaios) 이집트 왕국
3) 안티고네스 조(Antigones) 마케도니아 왕국
ⅴ.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
1. 특징: 범민족적 영토국가, 개인주의적, 세계 시민주의적 경향
2. 정치 형태: 전제 군주제
3. 경제: 동서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시리아-지중해-카스피해 연결(로도스, 코린트, 델로스 섬이 중개 무역) 교통의 발달로 상업 발달, 일반적으로 통제 경제
4. 문화: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오리엔트 문화와 조화, 도시 지배층에 그리스 문화 침투했다고는 하나 피상적 침투, 정치적 쇠퇴와 더불어 쇠퇴함, 동방에서 그리스 문화 정착은 실패했으나 뜻밖에 로마에 전파됨
1)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2) 자연 과학의 발달: 철학에서 과학 분리,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물리학), 에우클레이데스(Euclides,기하학),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천문학),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지리학) 등
3) 철학: 개인주의적 혹은 세계 시민적 윤리학 발달
①에피쿠로스 철학-에피쿠로스(Epicuros)의 쾌락주의
②스토아 철학-제논(Zenon)의 금욕주의
4) 조각: 인간의 격동적, 관능적 순간 포착(ex. 라오콘 군상, 밀로의 비너스 등)
Ⅷ. 에트루리아 문명과 고대 로마
ⅰ. 로마개관
1. 로마의 역사는 내부적, 외부적 투쟁의 역사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정복시기에 내부적 즉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 이루어짐→포에니 전쟁(서지중해 통합, 상업국)→동지중해 통합(제국)
2. 로마 문화
⇒처음에는 그리스문화의 영향 받았으나 후일 기독교 문화와 융합(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통합)되어 서구 문화의 기반을 형성
3. 학자들의 로마에 대한 평가
1) 예링: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지배함-무력, 기독교, 법
2) 랑케: 로마 문화를 호수에 비유-서양 고대사의 집약적인 대성
4. 로마의 기원
1) 어원: 용맹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 로마라는 이름의 귀부인의 이름, Ruma라는 에트루리아 부족명, 로물루스라는 이름에서 기원
2) 지역적 기원: 티베르강 라티움 평야 7개 언덕의 부락이 한 평야에 모여 중심부를 이룸
5. 로마의 대략적 정치 변화
1) 제 1기: 로마 왕정 시대 753-509 BC
전설상의 시대, 1대 로물루스에서 7대 에트루리아 출신 타르퀴니우스까지
2) 제 2기: 로마 공화정 시대 509-27 BC
초기의 귀족 중심의 공화정에서 민주적 공화정으로 이행하다가
결국 군주 독재 체제로 마감함
3) 제 3기: 로마 제정 시기 27 BC-476 AD
초기의 원수정적 제정과 후기의 도미나투스 체제적 제정의 시작
6. 학자들이 평가하는 로마가 강대해진 이유
1) 폴리비우스: 로마 정치 체제의 우수성. 로마는 왕정적 요소은 consul 귀족정적 요소은 senatus, 민주적 요소은 comitia tributa를 동시에 다 갖춘 정치형태
2) 키케로: 권력 consul, 권위 senatus, 자유 comitia의 조화
3)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 종교에 관한 로마인인 포용적인 사고방식
4) 플루타르코스: 패자를 포용하는 능력
5) 스트라본: 로마의 지리적 조건과 인적 자원의 우수성-군사적, 정치적 수행 능력의 우수성과 통솔력
5) 리비우스: 로마인의 도덕성
-개인의 시민적 자질, 권력에 대한 의지
ⅱ. 로마 건국
1. 건국
☞대표적 건국 신화: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로물루스 신화
1) Italici 민족: Aria 족의 일 분파, 다뉴브 강 상류로부터 서쪽으로 BC 2000년 경 알프스 산 이북까지 옴, 1500년경부터 반도로 남하 이후 일시 중지하였다가 1000년경부터 본격적 남하, 라틴 정착민의 일부가 라티움 평야에 정착 후 로마 건설
2) BC 753년 로물루스의 건국: 아이네이스(Aeneas)의 16대 왕 Numitor 때 아우 Amulius가 왕위 찬탈, Numitor의 딸 Silvia가 군신 Mars와 결합 후 쌍둥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를 낳음,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레무스는 아벤티노(Aventino)언덕에 로마를 세우고자 함, 이후 로물루스가 레무스 죽임
3) Sabini 여인의 약탈, ‘귀여운 사비니 여인’, 2대왕 누마
2.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민족들
1)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민인 이베리아인과 리구리아인
2) 켈트인과 유사한 언어의 움브리아인, 라틴인. 삼니테인, 일리리아인, 갈리아인
3) 산지의 Volsci, Aequi, Sabini인
3. 선진 민족: 에트루리아인, 마그나 그레키아, 페니키아 식민지
1) 에트루리아인: BC 900년경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부터 에트루리아인이 들어가 북부에 산재-엘바섬, 캄파니아지방, 나폴리, 파두아등
2) 페니키아인: BC 800년경 서쪽으로부터 카르타고, 시칠리아 일부 정착
3) 그리스인: BC 800년경 해외 식민지 건설-흑해, 이집트, 이탈리아 남부 Tarentum 중심, Sicily 동부 연안,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인의 식민도시 Magna Graecia
⇒이 중 에트루리아의 영향이 가장 큼
4. 에트루리아
1) 기원: Tyrsenoi, Tusci 또는 Etrusci
『신통기』 1011-16, 헤로도토스 I. 94, 리디아인과 기근
언어는 비인도 유럽어족,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이주(1000-800년 사이)
2) 지역: 움브리아와 토스카나-로마 서북방 100km 지점 타르퀴니아. 세부분 남부의 tufa 평원, 북서부의 Catena Metallifera와 북동의 Apennin 골짜기, 12국가
3) 사회: 신정적 귀족사회, 왕은 선임된 행정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건설 방법, 7세기 이래 남하하여 로마와 충돌, 일시적 로마 지배, 혹은 이들이 로마 건설, 6세기에 번영-로마의 왕 중 에트루리아인의 이름(타르퀴니우스)이 보임, 5-4세기 에트루리아 귀족들은 토지 소유자, 무역상, 수공업자, 생산 담당은 Lyguria인과 전쟁 노예
금속 풍부, 그리스 혹은 델피와도 상업 혹은 해적 행위, Magna Graecia와 해양 활동, 그리스 문화 섭취-로마로 전달, 로마의 유모적 역할
4) 문자: 그리스의 알파벳 사용, 그러나 내용은 거의 해독 못함-라틴어의 기원
5) 미술: 도자기, 테라코타-종교적 의식에 사용, 원시적 생기발랄한 역동감이 보임
무덤의 벽화-소아시아계, 청동기 시대 납골 항아리: Villanova(볼로냐 근처) 무덤은 죽은 자의 가옥 혹은 사당, 건축과 가구로 구성된 여러 개의 방, 고분의 벽화와 항아리, 운동 경기 제전-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영향, 분묘 벽화에서 레슬링, 기마전, 전차 경기, 말 경기, 복싱. 춤음악 경연
음악 발달-트럼펫과 파이프
6) 종교 및 사고: 숙명관-일정한 주기의 삶, 인간 70세 이후는 마땅히 죽음, 죽은 사람을 연회에 참석한 사람처럼 묘사, 삶은 투쟁이었고 이제 끝났음, 검투 경기는 그 중에서도 특히 장례 의식과 관련-죽은 자를 달래기 위한 피의 제사
16-그들에게 중요한 숫자, 하늘을 16등분(templum), 어느 부분에서 번개가 치는가가 매우 중요, 천둥의 색깔과 소리, 간lung을 우주의 축소판으로 봄-내장占 발달
미네르바, 유노, 유피테르 등 삼신숭배→로마에 영향
7) 쇠퇴: 로마는 6세기말 Tarquinius Superbus 왕을 추방하고 귀족정으로 넘어감, Veii 시의 함락 등 로마에 복속
ⅲ. 로마 초기의 정치와 사회
1. 로마의 사회 계급
☞Familia - gens – curia - tribus
☞300개 씨족 - 30개 쿠리아 - 원래 3개 tribus가 로마 인민(populus Romanus) 구성
☞귀족정 초기에는 20-21개 tribus로 확대: 원래의 tribus는 혈연적 성격, 평민의 참가로 늘어남
☞3부족제→4부족제(6대 Servius Tullius 왕이 개편), 시구(市區)는 4개, 전원구 17→31개
2. 로마의 신분 계급
1) 귀족 Patricii: 진정한 로마인, 공권과 사권 등 완전한 시민권 소유자, 대토지 소유자
개별 씨족군: 22씨족, 81가구, 타 계급과 통혼 금지(Canuleius법까지)
2) 평민 Plebs: 소농민, 임금 노동자, 수공업자 등
공권 없이 사권만 인정(민회 참석권), 병역과 납세의 의무, 시민병의 핵-유일한 무기는 참전 거부
*프롤레타리아트: 무산자, proles 밖에 없는 자
3) 해방노예 liberti: 주인에 의해서 해방된 노예
⇒피호민被護民 clientes-보호자 patronus: 주로 patricii 편에서 plebs와 투쟁
피호민 Clientes는 귀족과 일종의 봉건적 관계, 신분적으로는 자유, 정치와 경제적 권한은 없어 patronus의 보호를 받음, 피오민은 군사 경제적 의무, 보호자는 경제적, 소송 사무(cf. 중세의 가신제도) 지극히 로마적임-신의에 입각
⇒원래 patrici와 plebs의 기원은 모호, 정복민과 원주민? 4세기 중엽 이후에는 22씨족만 patrici
4) 노예 servus: 전쟁 포로 혹은 부채 노예, 형벌 노예
Ⅸ. 로마 공화정
ⅰ. 정치적 변화
☞전설상 BC 753년, 실제는 600년경
캄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사비니인과 합동 취락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지배(575-509 BC): 5-7대 Tarqunius라는 에트루리아식 이름
1. 왕정: 7대왕 rex
☞리비우스(Livius)가 왕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나 신빙성 문제는 남아있음
1) 세습 왕정이 아님: 고문회의senatus의 결과에 의해 지명, curiata의 승인
2) 왕권은 절대적이 아님, 왕성이나 궁 없음
3) senatus, comitia curiata, 신관 등의 공화정 시대의 관직 존재
2. 귀족정
☞귀족 혁명: 508년 (아테네에서는 Cleisthenes의 개혁) Etruria인을 물리침.
1) 관리
①집정관(consul): 국가 최고 행정관, 임기 1년, 귀족 중 2명 선출(독재 방지, 상호 견재)
②재무관(questor): 임기 1년, 8명, 사법관계 담당→재정담당
③검찰관(censor): 임기 18개월, 2명, 전직 집정관 중 5년 마다 선출, 일종의 내무 장관, 호구 조사, 국민의 풍기 감찰, 과세
④법정관(praetor): 임기 1년, 1명, 사법권
⑤건설관(curule aedile): 임기 1년, 로마시의 도로, 교통, 수도, 시장 관리, 도량형, 곡물 분배, 공공 경기 감독
⑥통령(dictator): 임기 6개월, 국가 비상비, 원로원이나 집정관 중 1명 선출
⑦전직 집정관(proconsul): 전쟁 임무 혹은 특수 임무, 집정관 임기 후 속주의 장관
※집정관, 재무관, 법정관, 건설관은 후일 평민 중에서도 선출
2) 원로원 senatus=그리스의 아레오파구스
☞구성 의원 300명(처음 100명, 후일 600명 900명 등 변동), 임기 종신
☞국정 자문기관, 로마 공화정의 핵 → 점차 권한 약화
3) 시민회의 다양화
①쿠리아회(Comitia Curiata): 1표의 투표권을 가진 씨족단(氏族團, 총 30 쿠리아)이 모여 중요문제를 결의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음
②지구민회(Comitia Tributa): 지구(地區 또는 부족, 35개)별로 모여 집정관 선출․ 입법․ 재정과 관련된 재판에 관여
③백인회(Comitia Centuriata): 병사로 조직된 국민회의, 전쟁 여부, 법률 제정, 집정관등의 선출, 결의는 원로원의 승인 필요
ⅱ. 평민권의 신장 과정-신분 투쟁(Conflict of the Orders)
호민관제 |
B.C. 494 |
평민호민관직은‘성산 사건’(B.C. 494년)을 계기로 설립, 매년 2명(B.C 450년경부터 10명)을 선출. 평민의 이익을 수호하기 때문에 집정관․원로원의 결정이 평민에게 불리할 경우 거부할 수 있었다. |
평민회 |
B.C. 471 |
B.C. 471년부터는 평민회 설치. 평민호민관이 주재 |
12표법 |
B.C. 451 ~449 |
로마 최초의 성문법. 법원의 판결이 불문의 관습법에 의거하여 몇몇 학식 있는 귀족들에 의해 내려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평민들의 요구에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 귀족에 의한 법의 독점을 억제 |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
B.C. 367 |
호민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의 합작 ①토지 소유를 500유게라(약 125 ha)로 제한 ②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에서 선출하도록 규정 |
호르텐시우스법 |
B.C. 287 |
독재관 호르텐시우스의 제창으로 평민회의 결의는 원로원의 승인 없이 법으로 시민에게 효력을 발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 |
ⅲ. 로마의 팽창
1. 이탈리아 반도 통일
1) Cassius 조약(BC 493년): 로마와 라틴 여러 도시 국가가 체결한 동맹 조약
전리품은 공평하게 분배, 전시에는 공동 방어
2) 북방 침략 전쟁(BC 4-5세기): 에트루리아의 Veii 시 함락, 켈트족의 침입, BC 387년 로마함락 약탈, 배상금 지불
3) 1차-3차 삼니테 전쟁: BC 343-41, 327-304, 298-290
4) 타렌툼 전쟁(BC 280-272): 그리스 본토의 에피루스 국왕 피루스의 원조, 로마의 승리로 이탈리아 반도 통일 완성
5)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완성
①국가조직: 이질적 도시국가의 집합체 divide et impera
②자치시(Munipicia): 자유시, 자치도가 강함, 로마에 조세 의무=로마의 fellow citizen
동맹시(Socii): 외교권, 군사권에 있어 로마의 간섭
식민시(Colonia): 두 가지의 식민시가 존재-로마 식민시(완전한 시민권 보유)와 라틴 식민시
2. 로마의 서지중해 제패-포에니 전쟁 BC 264-146
1) 원인: 로마가 남부 이탈리아 도시 이익 옹호함으로써 카르타고와 관계 악화, 지중해 해상권 쟁탈
2) 1차 포에니 전쟁(264-241):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싸움, 시라쿠사의 용병 대장 Memertini 가 로마에, 사라쿠사는 카르타고에 구원 요청, 로마가 241년 Aegetes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첫 해외 식민지 획득
3) 2차 포에니 전쟁(218-201): 한니발이 알프스-로마로 진군
트라비아 강 전투, Trasimene호수 전투 등에서 한니발의 연전 연승,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의 지연작전
한니발의 라틴 민족 해방 전술 우리의 적은 로마뿐이다
대체로 라틴인은 로마에 충성을 지킴
칸네 전투: 4만의 병력 4만으로 8만의 로마병 전멸시킴
이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본국을 침
한니발은 자마 회전에서 패전⇒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인국 4분의 1로 감소, 원로원 300명중 177명 전사
4) 3차 포에니 전쟁(150-146): 2차전 이후 카르타고의 빠른 부흥, 카토의 카르타고 섬멸론 (delenda est Carthago)
3.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한 로마사회의 변화
1) 속주 지배 체제의 등장: provincia
포에니 전쟁 이전은 예속과 동맹으로 간접 지배
예속: 도시 형태는 잔존하나, 국가는 소멸, 종교 정치, 사유권 모두 포기, 로마법 적용
동맹: 형식적 독립국가, 정복 이전과 같은 정치 조직, 법률 제도 답습, 군대도 주둔하지 않으나 실질적 종속, 자주적 대외정책 실시 불가
속주 지배: 시칠리, 사르디니아, 코르시카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는 속주, 알프스 이북의 갈리아,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일리리아, 마케도니아, 아시아의 속주는 로마의 proconsul이나 praetor가 지배(임기 1년) 속주는 군사적으로 로마의 방벽, 경제적 부의 근원, 징세 청부는 정치가나 기사
2) 노빌레스 지배의 성립: Poetelius, Populius, Plautius, Martius 등 4대 평민 가문이 귀족 가문과 결합하여 특권적 지위를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nobiles 형성
각 가문의 최고 정무관 직에 있었던 최초의 사람을 novus homo라고 함
patricii가 최성기에 봉쇄적이었는데 비해서 nobiles는 원칙적으로 성원의 신진 대사가 가능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과정에서 각지의 상류층이 patiricii의 도움으로 고급 정무관이 되어 원로원에 들어오고 consul이 되어 nobiles에 가입
3) 기사 계급의 등장: 평민 권리 투쟁의 결과는 기사 계급의 승리로 돌아감
BC 367년의 개혁은 결국 재산에 의해 정치 권력을 나누어 줌-기사에게 참정권 인정,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 부유한 사람들이 자비로 배를 건조, 전투 형태가 달라졌으므로 기사는 실제적 직무보다 계급의 명칭으로 잔재
세금 징세 청부업자, 화폐 자본가 계급, 각종 청부 군대 의복 조달, 소금, 광산 채굴권, 산림 채벌권. 어로권 등
218년 Claudius 법은 기사 계급과 순수 관료 귀족인 senatus 계급을 분리시켜 원로원 계급의 경제 활동을 사실상 라티푼디움에 한정시킴, 즉 징세 청부업 종사를 못하게 됨에 따라 기사는 상업이나 국가사업 청부에서 독특한 지위를 인정받게 됨
4) 사회 경제적 변화
①자영 농민의 몰락: 오랜 종군, 속주의 곡물 유입, 노예의 대량 유입
②라티푼디움 제도 발달: 자영농 몰락과 노예의 대량 공급
③농업 국가에서 상업 국가로 등장
④노예제 발달: 로마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킴, 노예는 매매, 양도, 증여, 선물이 가능, 노예는 말하는 도구라는 인식
☞로마시기 노예반란: 시칠리아의 노예 반란(BC 135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 73-71, 카푸아지역의 검투사들의 난)
⑤헬레니즘의 사치 풍조의 유입: 로마인의 생활양식의 변화, 대저택, 호화 사치 향락, 퇴폐
⑥군대 통수권의 변화: 용병제도, 218년까지 consul이 군대 통수권, 218-211년 praetor와 propraetor가 지휘하고 consul에 종속됨, 그 후 군대 지휘자는 공식적 관리가 아닌 자 가운데서 선출됨, 술라 이후 가속화, 장군과 사병 사이에 clienteia 관계 형성
4. 로마의 동지중해 제패
1) 1차-4차: 마케도니아 전쟁 BC 215-146
2) 페르가뭄 획득: BC 133 아탈로스 3세의 유증
3) 시리아 정복: BC63
4) 이집트 정복: BC 31 악티움 해전
ⅳ.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자영농 육성책 및 노빌레스 지배에 대한 반격
1.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BC163-133
1) 사회적, 교육적 배경: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위기 도래, 지식인들 반성운동
카토의 정신 운동-사치, 유행에 대해 검소 절약 회복 주장
Gaius Laelius-농민 구제 운동
티베리우스-스토아적 교육, 호민관에 선출됨, 에스파니아 원정 당시 참상을 목격→자유농민의 노예화 현상, 중장 보병의 필요성
2) 개혁 내용: 토지 문제에 관한 신법(Rogatio Sempronia)
①공유지에 대해 일인당 500 유게라로 한정함, 단 남녀 자녀 2명에 한해서 각각 250 유게라씩 더 인정
②나머지는 국가에 반납시켜 토지 없는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 농민에 분배
③분배지는 양도 금지 가벼운 세금 부과(30 유게라 이하로 분배)
cf.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3) 경과: 분열, 대립→호민관 Octavianus를 파면하고 추종자인 호민관을 임명→토지 재분재 위원 3명 임명→Pergamum의 헌납된 땅을 농민에 분배 시도→BC 133년 귀족이 그라쿠스 일파 살해→토지 재분배 위원은 이후 계속 활동
2.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153-121
1) 재판법: 원로원의 특별 사법 위원 해산, 사법권을 기사계급에게 이월
원로원의 권한을 민회로 이양
2) 곡물법: 속주의 1/10세를 기사 계급에 의해 징세하고 이 세금으로 시민들이 보다 싼 곡 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함.
3) 시민권법: 이탈리아 반도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려 함
4) 카르타고에 거대한 식민지 건설
중산 계층과 결탁하여 빈민 구제, 원로원 중심에서 민회 중심의 공화정 체제로 이행
→원로원, 부유층의 반대로 실패
3. 그라쿠스 형제 개혁의 결과
1) 실패함으로써 정권은 귀족과 부유층에 의해 장악
2) 토지 겸병 가속화→빈부 격차 심화
3)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lulares)의 대립: 군벌의 세력(Marius와 Sulla) 다툼(원로원 기능 마비)
ⅴ. 군벌의 세력 다툼
1. 마리우스(Gaius Marius): 농민 출신, 게르만 민족의 위협(튜톤족, 킴브리족) 속에서 군공을 쌓음, 평민당의 영수가 됨
1) 개혁: 병제 개혁, 토지 없는 시민을 의용군의 형식으로 정규군에 가담토록 함→일종의 직업화, 통솔자와 병사간의 긴밀한 관계 조성(Clienteia 관계 형성), 군사력을 배경으로 BC 107년 집정관이 됨, BC 104년 집정관 재취임
2) 결과: 평민당의 세력 증대, BC 100과 99년 호민관과 집정관 선거에서 귀족 계급과 대립
2. 술라(Sulla): 벌족파의 영수, 소아시아 Mihrideates 왕의 반란 진압을 둘러싸고 Marius와 충돌, 술라는 평민파를 타도하고 귀족의 이익 대변, BC 82년 정적의 대량 학 살(정적의 black list 작성) Marius와 일진일퇴
1) 정책: 호민관과 민회 권한 삭감, 평민의 고급 정무관직 취임 금지, 곡물법 폐지, 대신 대규 모 식민사업과 토목 사업, 원로원의 권위 회복(정족수를 600명으로 증가, 권한 확대)→자신의 지지 기반
2) Sulla 사후 BC 73-7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진압), BC 63년 Catilina의 음모(키케로가 진압) 등 발발
ⅵ. 동맹시 전쟁 BC 91-88
1. 원인: BC 91 호민관 Drusus가 동맹시민에게도 로마 시민과 동일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이 원로원 반대로 실패하고 암살당하자 발발.
2. 결과: 전 Italy 동맹 시민이 로마 시민과 동등 권리 차지
Ⅹ.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
ⅰ. 삼두 정치(Triumvirate)의 등장
1. 제 1차 삼두정치(BC 60)
1) 중심인물
①폼페이우스(Pompeius): Sulla의 부하, 벌족파, 反 Sulla폭동과 노예 반란 진압에 큰 공, 해적 소탕, 에스파니아 담당
②카이사르(Caesar): 기원전 100년 탄생, 가난한 귀족가문 출신,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 Sulla를 피해 로도스 섬에 피신, 후일 Gallia 담당, 『갈리아 전기』
③크라수스(Crassus): 동방 담당, 파르티아 원정 중 동방에서 전사 (BC 53) 2) 경과: BC 52년 로마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제 1인자로 추대, BC 50 Caesar는 Gallia 총독 임기 마감하고 연기 신청→거절당함→BC 49년 카이사르는 갈리아(Gallia)군단 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진격→폼페이우스와 그리스에서 대격전→폼페이우 스는 이집트로 도주 살해됨→클레오파트라를 단독 왕으로 옹립→로마로 귀환(승전 보고 veni, vidi, vici)
2. Caesar의 독재
1) 권력 집중: 임기 10년의 총통, 임기 10년의 집정관 취임
군대 통솔권 및 국고 처리권 장악
Imperator란 칭호 사용, 종신 총통직 및 최고 신관직 차지
2) 빈민층에 큰 인기, 식민지 건설로 빈민 이주 정책, 시민권 확대(갈리아 일부와 시리아 지방 일부), 빈민 군단에 토지 분배
3) 정책: 세제 개혁, 속주 통치 개선, 율리우스 역법, 곡물법 제정, 토목 공사
4) 종말: BC 44. 3.15일 공화파의 음모로 암살당함(Idus Martius)
3. 2차 삼두 정치
1) 결성 목적: 기원전 43년 11월 26일 북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모인 카이사르파의 세 사람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카이사를 죽인 반대파를 숙청한다는 목적 아래 결성, 공화파들은 카이사르 살해 후 해외 망명→모두 살해당함(키케로의 죽음)
2) 중심인물
①안토니우스: 동방 속주 담당
②옥타비아누스: 서방 속주 담당
③레피두스: 아프리카 담당, BC 36년 실각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장군 아그리파(Agrippa)에게 안토니우스 패배
ⅱ. 로마의 제정 초
1. 로마의 제정연표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Julius-Claudius) 가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B.C.27-A.D.14)-티베리우스(Tiberisu, 14-37)-칼리쿨라(Caligula, 37-41)-클라우디우스(Claudius, 41-54)-네로(Nero, 54-68)
2) 플라비우스(Flavianus) 가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69-79)-티투스(Titus, 79-81)-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3) 5현제 시대
네르바(Nerva, 96-98)-트라야누스(Trajanus, 98-117)-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콤모두스(Commodus, 180-192)
4) 셉티미우스(Septimius) 가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3-211)-카라칼라(Caracala, 198-217)-세베루스 알렉산드루스(Severus Alexander, 225-235)
5) 군인황제 시대(235-285): 26명의 황제
6)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율리아누스(Iulianus)-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 옥타비아누스의 프린키파투스체제(Pricipatus-princeps)
1) 의미: 공화정을 가장한 군주 독재 체제, 2원적 지배, 공동의 지배 체제(일인정+민주정)과 군사적 능력의 우수성
①옥타비아누스가 내부적으로 종신집정관, 원로원 의장, 호민관, 최고 재판관 등을 차지 ②외부적으로 종신 proconsul 명령권(실제적)
③제권으로 권력 집중(Imperator)
④원로원으로부터 Augustus(존엄한자- 종교적 색채)를 칭호를 받음
⑤Pater Patriae, Pontifex Maximus 등의 칭호를 획득
⇒이론상으로는 원로원이 황제 선출권 보유했으나 한 가문 (Julius Claudius 家)에 머문 것은 군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함
2) 로마의 국방 전략의 변화
①군대 감축: 로마에는 친위대만, 변경에는 상비군 2군단(게르마니아와 동방 파르티아 국경에 배치
*로마군 편제
정규군(Legio): 중무장 보병, 1개 군단은 6천명, 28→25개 군단
보조군(Auxilia): 속주민, 기병이나 궁수 등 25년 복무 후 시민권과 보상금
근위군(Cohortes Preatoriae): 항상 로마에 주둔, 100명이 한 대대, 대대가 9개
해군: 주로 경제적 역할, 노예를 이용하여 노를 저음
*Pax Augusta: 평화의 여신 Pax는 평화를 보호하는 무기위에서 휴식
②군대 재정 통제
③속주 구분: 원로원 관할 지역(아프리카, 소아시아, 크레타, 그리스 등)과 황제 관할 지역(갈리아, 이집트, 시리아).
3) 황제의 사법권확대
①상고심으로 속주에서 올라온 중요 사건 판결
②군사의 우두머리로 군사법
③국고의 보호자로 재정법: 황제의 결정이 법적 효력을 가짐, 법의 중요한 자료 → 후일 테오도시우스 법전 4C.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6C
4) 행정 조직의 변화 없이 통치 개선에 성공
①equites의 관료화: 관리에 보수 지급
②2원주의: 도시 자체의 관직과 의회 보유
③도시화 정책추구(황제에 지지 제공)
④토지와 상업, 산업을 국유화하지는 않음
⑤Augustus에 의해 도입된 로마시민의 상속세, 노예해방세도 높지 않음
5) 제국의 재원
①공화정 시대 이래 대자본가 계속
②황제 자신도 개인 재산 소유: 황제 개인 재산 증가(로마 제일의 부자), 공공사업에 많이 지출, 속주를 포함한 국유지에서 나오는 세입에서 충당,
③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징세 방법과 징세 청부업자에 대한 엄격한 감독, 국가 관리에 의한 징세 방법
④인구 조사 시행
⑤속주의 재원: 황제의 금고 fiscus라 불림, 시간이 경과할수록 속주에 대한 중앙정부의 간섭이 심화, 징세 청부제도 폐지, 정확한 세원에 기본을 둔 수취
6) 로마 각 속주에 토목건축 사업 추진: 상공업 융성, 로마시의 미화 작업
7) 로마인의 정신 육성
①신전 건립
②도덕성 회복 운동(딸 율리아를 간통죄로 귀양 보냄)
③라틴 문학의 황금 시기 Vergilius , Ovidius, Horatius→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등은 로마 제국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형성
Ⅺ. 로마 제정
ⅰ. Julius-Claudius 황가
1.티베리우스(Tiberius)
1) 정무관의 선출을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이양
2) 민회는 모든 정치적 중요성 상실
3) 관료제도 발달
2. 칼리굴라(Caligula)
-Princeps에서 나아가 dominus et deus라고 지칭→암살
3. 클라우디우스(Claudius)
1) 도시화와 관료주의가 가장 발달
2) 황제의 개인 관료(해방 노예 포함)가 행정관료의 역할-주지사를 황제가 임명
3) 황제 재산과 국가 재산 사이의 구분이 모호
4) 아내 Messalina와 후비Agrippina(네로의 母)에게 암살
4. 네로(Nero)
1) 스승은 세네카
2) Claudius의 아들인 Britanicus 암살한 이후에 어머니도 살해
3) 황제 근위대에 의존-속주 군대의 반발
4) 로마의 대화재-크리스트교도들에 책임을 전가하면 박해
5. 69~70년의 군사 혁명
1) 네로에 대한 속주 군대의 반발
2) 타락한 군사적 참주권에 대한 반발
3) 히스파니아의 갈바(Galba)는 원로원의 승인 얻어냈으나 황제 근위대에 암살
4) 친위대 추대의 오토(Otho)를 누르고 독일군대의 추대를 받은 비텔리우스(Vittelius) 황제 가 됨
5) 동방 군대가 추대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비텔리우스 격파
ⅱ. Flavius 家 : Vespasianus- Titus -Domitianus
1. 베스파시아누스
1) 이탈리아내의 모집 군인 수 줄임
2) 정규군과 보조군 사이의 구별이 완화
3) 전통적 로마 시민단에 대한 도전
4) 속주의 로마화, 도시화 정책
2. 티투스(Titus)
1)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폼페이의 몰락
2)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콜로세움) 완공
3.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1) 원로원과 타협의 여지봉쇄ー구 귀족 가문제거
2) 헬레니즘적 군주정 지향
⇒원로원의 반항: 공화정적 복고를 원한 것이 아니라 tyranos(참주)가 아닌 basileus (왕)을 원함
* 디온 크리소스토모스의 견해: 스토아적 왕을 그 이상으로 삼음, 황제는 신에 의해 선택, 신은 유일자이며 보편적 이성의 화신, 이성적 군주의 도덕성과 자기 수양 강조, 군주는 주인이라기보다 아버지이며 은혜자
ⅲ. 5현제 시대: 1세기 말
1. 특징
1) 세습제 대신 양자제
2) 1세기 때의 군주는 로마 내에 거주하며 속주사정에 무지했으나 2세기의 황제는 거의 속주 출신임 ex.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에스파니아 출신의 로마시민이며,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는 Gaul 지역의 로마 시민의 후손.
3) 새로운 귀족은 제국 전체의 귀족, 제국은 국가의 재산
2. 지역적 통일: 도로망 건설(모든 길은 로마로)
3. 문화적 통일: 라틴어가 정치와 군대의 공용어 그러나 그리스어(koine)도 널리 사용
4. 경제적 발전: 도시 상층 시민과 제권의 타협, 로마적 도시의 건설(광장form, 공공건물, 목욕탕, 노천극장, 체육 경기장, 상하수도 시설, 개선문), 신전도시 참사회(시의회), 임기 일 년의 행정관 선출, 자유방임의 경제 체제
5. 5현제들의 대표 업적
1) 트라야누스: 최대로 영토를 넓힘
2) 하드리아누스: 수비 위주로 전환→로마 군단에 평화, 이때부터 군대는 속주 출신, 도시민들은 군복무를 회피, 군단과 보조군은 세습.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북쪽 게르만족의 남하, 게르만(German)의 용병을 고용하고 식민하여 로마의 영내에 거주하게 함→사후 자신의 아들 콤모두스(Commodus)에게 양위함으로써 몰락 시작(콤모두스 이후의 내란은 네로 사후보다 더 치열)
6. 인류 역사상 황금시대 (Pax Romana)라는 평을 받았으나 사회 모순 표출을 군사 행정력으로 억제함으로써 유지된 통제된 평화 번영,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 해결 없는 인기 정책(빵과 서커스의 정책으로 발전)
Ⅳ. Severus 왕조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 군사력에 바탕을 둔 첫 번째 황제(* 그의 유언)
Principatus의 완전한 군사화, 평민 군인이 귀족 계급으로 상승
→황제에 충성하는 기사 계급화, 기사 계급에게 공직 범위 개방, 군인에 대한 보상 강화, 봉급 인상, 원로원과 투쟁
2) 도시의 야만화 시작(도시에 중세(重稅), 지방 귀족의 재산 몰수)
저질 화폐 발행(금-은, 은-구리, 구리-납을 합금)
3) 법학 발달: Aemilius Papinianus, Domitianus Ulpianus, Julius Paulus
2. 카라칼라(Caracalla, 父의 정책 계승, 아우 Geta 살해)
1) AD 212년 시민권을 전 로마 제 국민에게로 확대(Constitutio Antoniniana)
2) 자치 도시 하층 계급은 물론 시골에도 시민권 부여-세수 증가의 효과
3) 하층 계급의 상승보다는 상층계급의 지위하락을 가져옴→원로원에 기반을 둔 로마제국의 몰락을 의미
4) 이탈리아와 속주의 차별이 없어짐-군대 우대
5) Caracalla은 파르티아 원정 중 살해됨
3. 세베루스 알렉산더(Severus Alexander)
1) 초등 교육 확산의 절정기
2) 차지인의 권리 강화
3) 군대의 결혼 허락: 각지에 군대의 뿌리→제국 정치의 중심이 확산
Ⅴ. 군인 황제 시대
☞세베루스 알렉산더의 사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즉위 시까지 50년 간(235-185) 26명이 황제로 제위한 시기(혹자는 Commodus 살해로부터 봄)
1. 특징
1) 사회적 측면: 군대의 질 저하(속주민이 입대), 지방 분권적 경향, 속주 총독의 부패, 착취, 혼란 속 비밀 경찰과 정보원 활약, 빈곤 가중, 로마 시민의 군대가 아니라 황제나 국가의 군대임, 군사적 무정부(황제 지칭자가 수십명), 군대의 횡포로 황제가 좌지우지되던 시대
2) 경제적 측면: Latifundium→Colonatus: 내우외환의 시기
2. 아우렐리아누스(270-275)
1) 팔미라의 Zenobia에 대한 승리
2) 무질서한 제국의 통화 통일, 국가와 단체에 대한 통제 증가
3) 영토 확대(시리아, 갈리아지역)
4) 제국 정부의 중앙 집권화
5) 태양신을 유일신 신앙화: 권력 이데올로기의 기반
Ⅵ.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부터 테오도시우스 황제
1. Diocletianus 황제: Dominatus 체제
1) 황제의 절대권 확보: 중앙 집권 강화, 오리엔탈적 제식 도입, 황제를 Dominus(主)라 부름, 원로원 권력을 완전히 배제, 로마에 제국적 질서 회복
2) 테트리아키(Tetriarch) 체제: 2명의 정제(正帝)와 2명의 부제(副帝)
3) 관료 정치 강화
4) 군사 조직 개편: 변경과 속주의 상비군 대폭 증가. 둔전병제 실시, 근위병 중대
2.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
1) 수도 이전: 로마→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이스탄불)
2) 로마제국 부흥 정치: 관료 정치, 신분과 직업의 고정화
3) 크리스트교 공인: 밀라노(Milano)칙령과 니케아 종교 회의
3.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
1) 원로원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부활하여 행정을 개혁
2) 크리스트교에 박해를 가함
3)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해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배교자라는 별명이 생김)
4. 테오도시우스 황제
1)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함
2) 사후(395) 두 아들에게 로마를 나누어 줌: Arcadius(동로마), 호노리우스(서로마)
Ⅻ. 로마의 문화
ⅰ. 특색
1. 실용적 실천적: 정치, 행정, 군사 면에서의 재능(통치 수단인 법, 도로 발달)
2. 절충적, 종합적. 보편적, 대중적 문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달, 계승
ⅱ. 건축과 토목
1. 건축: ‘빵과 서커스의 정책’의 표현-콜로세움, 개선문, 공중목욕탕
아치(arch)와 돔 사용
2. 토목: 도로, 수도교(水道橋) ex.가르(Gard) 수도교, 세고비아 수도교
ⅲ. 법
1. 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편찬
2. 로마법의 발전: 시민법→만민법→자연법
ⅳ. 문학(웅변, 역사 기술 등의 산문)
1. 산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2권
2. 철학
1) 스토아 철학-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2) 에피쿠로스 철학-루크레티우스(Lucretius)
3) 후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
3. 역사
1) 카이사르(Caesar)-갈리아전기
2) 플루타르코스(Plutarchos)-영웅전
3) 리비우스(Livius)-로마사
4) 타키투스(Tacitus)-게르마니아
5) 폴리비우스(Polybius)-로마발전사
ⅴ. 종교
1. 특징
1) 원래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의 영향→후일 오리엔트의 종교도 유입
2) 다신교로 온갖 종교의 경연장이라 할 수 있음
3) 결국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2. 로마의 전통 종교: 누미나 (정령신앙)→ 판테온의 신들
1) 국가 종교 형성: 신관은 일종의 공무원 -최고 신관 Pontifex Maximus,
2) 야누스, 제니우스 등의 토착신들 + 유피테르, 유노 등의 에트루리아 신들 + 그리스 12신 + 소아시아 계통의 키벨레 여신, 아티스신 + 이집트 계통의 이시스, 세라피스신 + 이란 계통의 미트라신 등(종교와 철학의 분리 현상)
3) 제우스를 믿는다는 것은 윤리적인 것의 고양을 의미하지는 않음
4)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새, 동물의 내장을 통해 점치는 것이 유행(auspices, haruspices)
5) 황제 숭배 사상: 관제 종교
①Caesar는 자신을 divus라 부름(deus-divus)
②옥타비아누스는 동방에서 신으로 숭배
③Domitianus는 거부자 처형
④Commodus '나는 신이다
⑤신총제(神寵帝) 이념: 3세기 세련된 황제 숭배 사상, 황제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 Jupiter의 대변자
6) 제정 말기에 이르러 각종 이교는 신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면서 제설 통합주의(synchretism)적 경향을 띰
3. 크리스트교
1) 성립과정과 의의
①성립: 유대의 전통 하에 Tiberius 황제 때 출현
②발전 과정: 3세기도 안 되는 시기에 로마제국의 정신적 세력 지배, 4세기에는 국교화 이후 중세 문화 사회의 기초를 마련
*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AD 29년): 보수적 유대인의 반발, 열심당 Zealot은 예수를 종교범에서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인들에게 사형을 요구
Jerusalem 교단-베드로 중심
Hellenes 교단-바울 중심, 세계 전도화. 범세계적 사랑
③의의: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 사상의 2대 근간
2) 크리스트교의 외부적 박해 원인
①황제 숭배 거부 등의 정치, 군사적 요인
②카타콤베에서의 비밀 집회에 따른 의혹, 불신, 오해
3) 특색: 성육신Incarnation, 속죄 Atonement, 구제와 사랑, 최후의 심판, 내세, 신분 막론, 크리스찬이라는 공동체 의식, 황제 숭배 거부
4) 크리스트교의 수용 과정
①박해: 네로,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최대의 박해, 순교자 수 최대-Galerius)
②공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 313년 밀라노 칙령
③교리 확립: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아리우스 논쟁→삼위일체의 아타나시우스파 채택됨)
아리우스: 로고스의 진짜 성육신은 불가, 시작이 없는 분은 성부뿐이며, 성자는 한때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음 즉 半神적인 능력, 성자는 지음을 받은 분으로서 능력과 지혜에 제한이 있음
아타나시우스: 절대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올수 있다는 것, 즉 반신으로서는 안됨, 성부와의 동질(homoousios) 對 homoios(유사함)의 논쟁
④국교화: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로마 서커스 정치의 대표적 유흥거리: 검투사 경기
1) 검투사의 유래
☞검투사는 라틴어로 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고 불렸으며,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함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 글라디우스를 채택했는데, 검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를 사용했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함
2) 검투사의 기원설
①에트루리아 기원설: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인의 제물 의식을 로마가 채용한 것이라는 설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는 문헌사료를 들 수 있음
②캄파니아 기원설: 캄파니아에서 검투사 경기가 시작되어 에트루리아를 거쳐 로마로 전해졌다는 이론, 그 증거로는 이탈리아 최초의 원형경기장이 캄파니아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최초의 검투사 경기 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나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음
3) 검투사 시합의 초기 역사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검투사 시합은 기원전 264년에 로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 즈음하여 보아리움 광장에서 검투사 경기를 개최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가 벌어진 해에 밀리우스의 장례식에서 검투사 경기가 개최
☞기원전 200년에는 죽은 발레리우스의 세 아들이 25쌍의 검투사가 싸우는 장례식 경기를 4일간 벌임
☞역사학자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74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프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주최한 74인의 검투사로 이루어진 투기 대회가 특히 주목할 만 했다고 저술
☞기원전 2세기에는 원형경기장이 건설됨에 따라 도시 로마 안에서의 검투사 경기는 주로 포로 로마노에서 열리게 됨
4) 검투사 경기와 정치
☞추도를 목적으로 한 시합은 규모가 더욱 커졌으며, 고인을 추도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볼거리로써 행해지게 되면서 정치가의 프로파간다(선전)을 위한 이벤트로 변질
☞민중은 검투사 경기에 열광했고, 정치가에게 이를 개최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추도 검투사 시합은 공직 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
☞투기 대회가 점차 지나칠 정도로 화려해져 갔으며, 이를 걱정해 투기 대회의 개최일수와 검투사의 수를 규제하기 시작했으나 준수되지 않았고, 민중들도 규제가 준수되지 않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음
☞공직 선거와 투기 대회가 연착되는 현상은 제정 초기까지 계속됨
ex)카이사르가 주체한 검투사 경기
5) 제정시기의 검투사 경기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중에 8번 투기 대회를 주최하여 1만 명의 검투사를 싸우게 하였고 다른 경기와 합치면 3500 마리의 맹수를 죽임
☞티베리우스 황제는 반대로 한 번도 볼거리를 개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고 함
☞칼리굴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검투사 시합을 성대하게 개최
☞네로 황제는 전차경기나 연극을 좋아했다고 함
☞80년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명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이 티투스 황제시기에 완성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준공식으로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맹수 사냥과 검투사 시합, 그리고 모의해전이 100일에 걸쳐 진행
☞트라야누스 황제는 1만 명의 검투사를 모아 투기 대회를 개최
☞콤모두스 황제는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735회나 싸우기도 함
☞도미티아누스 황제시대 이후, 도시 로마에서는 투기 대회의 개최는 벼슬아치인 관리관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그리고 “조조(早朝)양성소(Ludus Matutinus)”의 4군데 제국 양성소가 설립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나서는 교회에서 검투사 경기를 반대함에 따라, 경기의 규모의 규모가 축소되고 인기가 떨어졌으며 훈련생도 모이지 않게 됨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투기장을 폐쇄시킴
☞523년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는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검투사 대회를 금지한다는 포고를 내림
☞6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검투사 경기가 소멸
6) 검투사가 되는 사람들
①로마에 패배한 전사들
②처벌받는 범죄자들
③자원한 자유민들
④여성 검투사들
7) 검투사 양성소(Ludus)
☞노예든지 자원한 자유민이든지 검투사가 될 사람들은 라니스타(lanista)가 소유한 검투사단(familia gladiatorial)에 속하게 됨
☞검투사 양성소에서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고 대회에 출전
☞검투사 양성소에서는 기술을 지도하는 전직 검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나 교사(Ludi Magister), 고도로 숙달된 의사나 마사지사 등이 있어 검투사 양성에 힘씀
☞도크토레는 검투사들에게 행진하는 법에서부터 무기를 다루는 법, 발기술, 찌른 검으로 어떻게 동맥을 찾는지 등을 지도하고 철저히 훈련시킴
☞검투사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으며, 짚 인형을 상대로 덤비는 연습, 훈련생끼리 연습시합 등으로 경험을 쌓아감
↳목검으로만 훈련했던 이유는 반란의 위험을 막기 위함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함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이 주어졌기에,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자도 있었음
☞훈련생들의 기숙사는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있었으며 밤에는 열쇠로 잠가둠
☞식사는 영양가 좋은 식사를 제공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보리를 먹게 되면 지방이 불어나 출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보리를 주식으로 식사를 제공
☞검투사들의 생활이 반드시 외부와 차단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연인을 가질 수도 있었고, 가족을 꾸린 검투사도 있었음
8) 검투사 경기
①사열식: 경기에 앞서 벌어지는 것으로 경기에 투입되는 야생동물, 공개처형될 범죄자들, 오후에 싸우는 검투사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행사
②오전 일정: 야생동물과의 싸움
③정오 일정: 살인, 방화, 신성모독 등의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처형함, 이때 로마 시민들은 단칼에 처형되고 비시민은 십자가형, 화형, 야생동물로 처형됨
④오후 일정: 경기의 정점인 검투사 경기를 행해짐, 사전경기→조 추첨과 무기 검사→검투사 경기
9) 검투사의 종류
☞일대 일로 싸우는 검투사는 기본적으로 5가지 종류로 분류
①트라케스(Thraces): 트라키아 사람 풍의 무장을 한 검투사, 구부러진 모양의 시카(Sica) 도나 팍스(Falx)를 무기로 했으며, 장비는 작은 원형이거나 작은 사각형 방패를 사용, 양쪽 다리에는 허벅지 길이의 레그 가드를 착용, 머리에는 크레스트(Crest)라는 닭 벼슬처럼 생긴 장식이 붙고 그리폰이 새겨진 투구, 기원전 1세기에 등장했으며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이 트라케스였을 것으로 추측
②삼니테(Samnite): 삼니움 사람 풍의 장비를 착용한 검투사, 커다란 크레스트 장식이 붙은 투구를 쓰고 긴 직사각형 방패와 쇼트 소드 혹은 창을 들었으며 왼쪽 다리에 레그 가드를 찬 중장비 검투사, 기원전 2세기에 등장, “무르밀로”도 삼니테 유형에 속한다고 보는데 무르밀로가 출현함과 동시에 삼니테는 줄어들었으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대부분 소멸
③무르밀로(Murmillo): 물고기를 본뜬 투구를 착용한 검투사, 로마 군단 병사가 사용한 직사각형 긴 방패를 들고 글라디우스를 무기로 사용, 팔 보호대를 착용했으며 성기 보호구와 벨트를 착용, 오른쪽 다리에는 발 상단까지 두껍게 덮는 각반을 착용
④레티아리이(Retiarii): 어부처럼 그물과 삼지창 혹은 작살을 사용,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한 단검을 가지고 싸움, 다른 검투사와 다르게 투구를 쓰지 않았으며 또한 방패도 들지 않음, 커다란 팔 보호대가 어깨와 가슴 한쪽을 덮거나 청동으로 만든 어깨 방패를 착용해 목과 얼굴 아래를 보호하며 싸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발전했으며 맨얼굴이 드러내기 때문에 늠름하고 젊은 사람이 많았음
⑤세크토르(Secutor): 추적자로 레티아리이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 무르밀로와 닮은 장비를 걸치고 커다란 로마 군용 직사각형 방패와 찌르기를 위한 곧은 검신의 글라디우스 장비, 두 개의 작은 눈구멍을 제외하고는 얼굴 전체를 투구로 보호
☞이외의 검투사들: 베스티아리이(Bestiarii), 디마카에리(Dimachaeri), 에퀴테(Equite), 글라디아트릭스(Gladiatrix)
10)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검투사의 시합이 크게 흥행했던 기원전 73년에 카푸아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최대 규모의 노예 봉기를 일으킴
☞약 70인의 검투사들이 탈주를 감행하여 시작된 이 사건은 12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탈리아 반도를 뒤덮음
☞반란군은 로마병 포로에 검투사 시합을 강요했는데 이를 고대 역사학자 오로시우스는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술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어 전멸
☞진압으로 붙잡힌 6,000명의 포로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 처형당함
ⅩⅢ. 로마 제국 멸망론
ⅰ. 로마제국 멸망론 개론
1. 로마 제국 멸망 논쟁의 배경
☞4세기~5세기경의 이교도의 공격과 이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응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탄생 배경임
2. 시대에 따른 로마 제국 멸망 원인론
☞르네상스기, 법제 사가적 관점, 계몽주의적 관점, 인종주의적 관점, 마르크스적 관점, 문명사관적 관점, 환경론적 관점 등등
ⅱ.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
1. 외부적 원인: 게르만의 침입
2. 내부적 원인: 문화적 창조력의 상실, 탄력성의 상실
1) 정치 군사적
①너무 비대한 영토
②관료 정치의 진행으로 관리들이 지방 자치에 간섭하고 이에 따라 지방민의 자주성 상실 → 국가 의식 포기, 향락주의적 생활
③동방적 전제 군주제, 동서 로마 분열과 제위 세습제
④군대의 질 저하-속주민의 군대 편입
2) 경제적
①국가 재정 중압으로 인한 강제적 수세-속주 확대와 방어 전쟁 등 군사력 증강의 필요에 의한 (군인 황제 시대에 심화)
②상업 쇠퇴와 도시 파괴
③이탈리아와 속주의 경제적 관계 단절
④노예제 대농장의 해체와 소작제(콜로나투스제)의 보급
3) 사회적
①인구 감소
②4세기 초 직업 고정화 및 신분 강제-참사회원, 수공업자의 직종별 조합
4) 정신적
①도덕의 타락, 사치 풍조의 유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