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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과 이단
1) 오늘날 이단에 대한 관심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단 사상에 관심을 가짐.
교회가 기틀을 다지던 초창기에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했던 고대 이단들이 지
금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
이단은 영적 자유를 주장하는 대담하고 용감한 소리로 간주하고, 피해야 할 것
이 아니라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으로 여김.
이단 = 정통성 확보를 놓고 벌인 과거의 싸움에서 잔인한 기존 종교 권력에
패배한 용감한 패자들.
=>
이단 사상의 복권을 주장
– 이제껏 억압받아온 기독교의 다른 유형들을 되살려 과거의 불의를 바로 잡
는 작업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이런 생각 덕분에 이단은 유행이 되고 있다.
2) 이단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첫째, 이단은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반면, 정통파는 단조롭고 반동적이라 생각.
일반적으로 이단은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반면, 정통파는 단조롭고 반동적이라
는 생각.
(윌 허버그(Will Herberg)의 날카로운 지적에 따르면)
정통종교는 건조하고 무기력한 반면, 이단은 지적 에너지와 문화적 창의성을
뿜어내는 것처럼 간주된다.
“요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이단이라고 자랑스레 밝힘으로써 다른 이들에
게 흥미로운 존재로 보이길 바란다. 오늘날 이단이란 창의적 지성, 곧 스스로
생각하고 신조와 도그마를 경멸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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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권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오늘날 이단 논의의 밑바닥에는 권력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포스트모
더니즘의 뿌리 깊은 의심이 있다.
->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패자는 말이 없다)
소위 ‘정통파’라는 것은 싸움에서 어쩌다 이긴 하나의 이단, 그래서 재빨리 경
쟁자들을 누르고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해버린 하나의 이단에 불과할 뿐이다.
=> Walter Bauer의 논지.
바우어의 주장 ->
① 가장 초창기에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아마도 정통 신앙이 아니라 다분히
이단적인 신앙이었을 것이다.
정통파란 훗날에 발전한 형태일 뿐이며, 이전에는 진정한 신앙으로 수용되었던
여러 기독교 신앙을 억압하려 애써왔다는 것이다.
② 바우어의 저서는 1934년 독일어로 출판, 이때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
다가 1971년 영어로 번역 출판되어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문화 분위기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바우어의 책은 정통파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의 부적이 됨.
Rechtgläubigkeit und Ketzerei im ältesten Christentum.
Orthodoxy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
③ 바우어의 논지:
이단이란 본래 기독교 세계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자들에게 억압을 당한
하나의 정통신앙이었다. 억압자들은 당시를 지배하던 로마교회였다. 그러므로
자기들 사상이 정통신앙으로 공인되기를 바랐던 자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묵살
당한 일련의 “잃어버린 혹은 압제당한 다양한 기독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
다는 것이다.
④ 이 견해에 따르면, 이단과 정통의 구별은 역사적 우발성의 문제로,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정통은 싸움에서 승리한 사상을, 이단은 패배한
사상을 일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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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날 극단적인 주장:
정통은 고의로 조작된 것이다 -> 다빈치 코드의 핵심주제.
바우어의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정통은 미심쩍은 방법으로 우세한 고지를
점령한 일련의 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회의 종교 권
력기반을 확보하고자 고의로 조작한 것.
** 다빈치 코드 **
다빈치 코드 속에 들어 있는 이단 설명:
- 이단은 주류 정통파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히고 부당하게 억압당한 뒤 뒤틀
리고 부정하고 악마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일련의 고상한 사상으로서 일종의
신학적 희생자이다.
- 이단은 탄탄한 지적 토대가 아니라 적나라한 교회 권력을 등에 업은 멍청한
정통파의 대양 한복판에 떠 있는 자유사상의 섬인 것이다.
다빈치 코드의 줄거리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가 영속적으로 도모한 책략,
즉 종종 폭력까지 동원하여 자신들의 복음을 전복시킬 만한 진실을 숨기고 교
회의 복음을 지키려고 한 책략에 초점을 맞춤.
(4) 오늘날 이단의 매력은 권위에 대한 도전사상 때문이다.
이들은 종교적 전통을 절대권위와 동일시하고, 이것을 자유의 이름으로 저항하
고 전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이단은 해방을 주는 권위주의의 타파로
간주된다.
<->
하지만 이런 관점은 역사측면에서 볼 때 옳지 못하다.
일부 이단은 경쟁하던 정통파들 못지않게 권위적이었다.
이단이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해방을 안겨준다는 신념은 1세기의 현실보다는
오늘날 문화풍토와 관련된 것이다.
(5) 오늘날 이단의 연구는 역사상 이단이 어떻게 발생해서 어떻게 발전했는지
밝혀준다.
이에 따르면, 이단은 근본적으로 악의에 차서 정통파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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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교회가 억압하는 뚜렷한 신조를 가진 대안도 아니었다.
이단이란, 계획적이기보다는 우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뒤집고 동요시
키고 심지어는 파괴한 기독교 신앙의 한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신앙을 동요시키는 과정과 그 위협을 파악하는 일은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이뤄질 수도 있다. 기독교 신앙의 어떤 측면을 설명하는 이론이 처음에는
환영을 받고 널리 수용되다가도 훗날에는 그것이 낳을 부작용 때문에 중단되
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 문제이다.
비유: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불가사의한 건축물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1885년에 이 그리스 건물은 상당히 퇴락하여 보수가 불가피했다. 보수업자는
거대한 대리석을 지탱할 수 있도록 꺽쇠와 쇠막대기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는 쇠가 온도변화에 따라 수축하여 석조 건물에 압력을 가한다는 사
실을 감안하기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철제부분을 녹슬지않게 처리하는 작업을
간과한 것이다.
녹이 슬자 쇠가 팽창하면서 대리석을 지탱하기는커녕 오히려 깨뜨리고 말았다.
본래는 건물을 되살릴 목적으로 취한 조처가 결국 퇴락을 가속화하는 바람에
후손들이 훨씬 더 근본적인 보수작업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대한 실수를 바로잡는 일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반
드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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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주제를 특정방식으로 정립하려고 시도하지만, 조만
간 교회는 그 방식이 위험할 정도로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것임을 알아챈 것
이다. 한 세대가 정통으로 환영한 것이 다른 세대에는 이단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
언가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어떤 시도들은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더 믿을만
하고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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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과 이단은 신학적 관점의 양극단에 위치한다. 이 양극단 사이에는 완벽하
지는 않지만 적절한 견해부터 파괴적이지는 않지만 의심스러운 견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견해가 서 있다.
신앙의 음지에 자리하는 이단은 정통이 되려는 좋은 의도를 품었으나 파르테
논 신전을 보수한 사람의 꺽쇠처럼 결국 부식제로 판명난 실패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