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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성령강림절 후 아홉 째 주일 누가복음 10:38-42
박찬웅
마르다인가 마리아인가
A.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
1. 예수 전승의 여성 이해
고대 문서들 가운데 신약성서처럼 여성의 활동을 부각시키고 여성의 비중을 무게 있게 다루고 있는 글은 드물다. 특히 복음서의 일화들과 예수 말씀들은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 가령 수난 이야기 장면에서 예수로부터 유일한 칭송을 들은 익명의 한 여인은 메시야에게 기름을 붓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같이 묘사됨으로써 성역할의 한계를 넘어서며, 더욱이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동이 함께 전해지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실 정도로 높이 칭송 받은 모델로 제시된다.
또한 복음서에는 남성과 여성의 비중 묘사가 동일한 수준으로 묘사하시는 예수의 말씀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남성이 주체이나(눅 13:18f.) 이어지는 누룩의 비유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13:20f.). 잃은 양의 비유의 등장인물은 남성인 반면(15:3-7), 잃은 동전의 비유에서는 여성이다(15:8-10). 또한 성가신 친구의 비유(11:5-13)와 성가신 과부의 비유(18:1-8) 등도 마찬가지의 예이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성 역할 대조 및 균형을 뚜렷이 보여준다. 악한 귀신들린 남자(4:31-37)와 베드로의 장모(4:38-41), 가버나움의 백부장(7:1-10)과 나인 성의 과부(7:11-17), 선한 사마리아인(10:25-37)과 마르다, 마리아 자매(10:38-42),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24:13-35)과 예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24:1-11), 바울을 지키던 간수(행 16:25-34)와 루디아(18:11-15)의 일화들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또한 마가복음 2:21, 마태복음 24:40-41, 6:26-28 본문 역시 남성과 여성의 일에 대한 언급이 균형 있게 드러나 있다.
물론 여성을 종속적이고 주변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존재로 인식한 가부장주의의 틀을 혁명적으로 뒤엎는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예수 운동의 유일한 중심축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 운동은 가부장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양성평등적인 태도를 취하는 조류를 나란히 공유하고 있다.
어쨌든 예수 전승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여성 우호적인 태도는 실제로 예수의 활동에 여성의 역할이 현저했음을 반증해주며,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는 당시 유대 가부장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예수 운동의 여성 주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면들을 내포한다(타이센/메르츠,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26쪽 이하 참조). 첫째, 예수 주변의 여성은 단순히 보호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적 역할을 한다. 둘째, 예수의 기적이 하나님 나라 임재의 중요한 증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여성들에 대한 보도는 중요성을 지니며, 특히 그러한 본문들에서 여인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남성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제자들은 예수의 선교 여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예수 운동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바울의 사역에도 여성의 역할이 현저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넷째, 예수 운동의 또 다른 여성 주체들로 정주(定住) 지원자들이 존재했다. 누가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의 집을 예수 활동의 거점으로 제공했던 예라고 볼 수 있다.
2. 본문의 맥락
본문 직전인 누가복음 10장에는 72인 파송과 귀환, 회개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화 선포, 예수의 감사기도에 대한 보도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는 10장 도입 직전 9장 57-62절에서 예수를 따르는 길,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예시된 일화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파송 명령을 받은 72인은 준수해야 할 규칙에 따라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다. 제자들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는 화를 입을 것이며,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산 증인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일련의 장면 직후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시며, 이후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신다. 마르다 집에서의 일화에 이어 11장에서 예수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마르다 본문은 제자직과 관련된 일련의 가르침 속에 위치하며, 바른 제자도에 관한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을 보존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문은 거시적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한 전환적 상황을 담고 있다. 본문의 앞 장면들에서 예수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신 후(8:1-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시고 사마리아를 거쳐 길을 가신다(10:51-56). 본문은 예수가 이와 같은 분주한 여행을 하시는 도중 마을로 들어가서 머무신 첫 장면에 해당된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신 장면을 시작으로 예수는 ‘머물러 계시면서’ 많은 다양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며(11:1-13), 예수가 바알세불과 관계되었다는 모함을 거부하는 등(11:14-26) 한참 동안이나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열중한다(11:27-13:21). 달리 말해 마르다 본문은 예수가 동적(動的) 선교활동을 잠시 중단하신 채 정적(定的)인 사역, 즉 중요한 가르침을 시작하시는 서두에 놓여 있다.
B. 본문 주석과 해석
길을 가다가 예수는 “한 마을”로 들어가신다. 요한복음 11:1과 12:1-3에 의하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의 누이로 예루살렘 근방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예루살렘 근방이라기보다는 갈릴리에 가까운 지역인 것처럼 보인다. 본문에는 예수가 마르다의 집에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는지 여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예수 혼자 이 집에 들어간 상황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면 마르다 자매와 예수 사이의 친분은 매우 두터웠고 각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등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8:1-3) 마르다 역시 예수 일행을 후원하는 독립적 여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떠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던 추종자들과 달리, 마르다는 한 곳에 정주하며 예수 운동을 지원했던 대표적 모델로 등장한다. 아마도 마르다는 공동체 내에서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가령 바울의 동역자로서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diakonos)이자 바울의 보호자(prostatis)로 활동했던 뵈뵈의 위상과 비교될 만한 여성 일꾼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인에 관한 전승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는 과부들을 보살피다 죽은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도르가)가 베드로를 통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행 9:36-43). 자기 마을에 들어온 예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 마르다는 유복하고 자의식 강한 여인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은 diakon-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마르다를 묘사하고 있다. 이 단어가 초기 교회 전승에서 교회의 중요한 책임자를 가리키는 ‘집사’라는 개념과 긴밀하다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본문이 마르다가 교회 안의 책임적 역할을 떠맡은 인물을 대표하는 것임을 암시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본문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마르다와 예수뿐, 마리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은 마르다가 교회의 입장을 대표하는 활동가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다의 행동은 본문의 도입부를 통해 볼 때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예수를 ‘영접’한 마르다의 행동은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눅 9:53). 또한 72명의 일꾼을 파송하면서 어느 성읍이 그들을 영접하면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복음을 전파할 것이지만, 영접하지 않으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주님을 영접한 마르다의 행동은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태도로 인정된다(10:1-12).
한편, 마리아의 태도는 어떠한가? 누가복음 8:2에 언급된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인 이 마리아는 스승의 발아래에 앉아서 말씀을 배우는 전형적인 제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pros tous podas)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장면의 표현 방식과 일치한다(행 22,3). 스승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자는 철저히 스승을 따름과 동시에 스승과 일체감을 형성한 제자라고 볼 수 있다. 즉 ‘발아래’라는 표현은 누가 기자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으로 제자가 열정적인 태도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눅 8:35; 행 22:3).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이러한 제자가 될 수 있는 경우는 전적으로 남성에게 해당된 것이지 여성이 제자로 묘사되는 것은 매우 이색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행함으로 ‘섬기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여성의 모성(母性)보다도 중요하다. 가령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가슴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하고 말한 여인에게 예수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신다(눅 11:27f.). 즉 ‘말씀’은 신앙의 삶에 있어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기준이자 원칙인 것이다.
본문의 직전 단락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제사장/레위인의 대조를 통해 이웃 사랑 계명, 즉 인간 상호 간에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도리가 강조된다면, 여기서는 섬김과 관련된 두 유형이 대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행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태도와 말씀을 듣는 제자의 태도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 사랑 계명의 중요성이 강조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다소 도식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봉사와 말씀이 비교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누가는 말씀의 중요성을 이렇게 천명한다.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참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눅 8:15)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마르다는 서운한 감정으로 예수를 비난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마르다의 ‘섬김’의 태도를 원칙적으로 거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섬김’의 역할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상대적으로 주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경시함으로써 ‘섬김’ 자체를 절대화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다의 푸념에 대해 예수는 그녀가 ‘들떠 있다’(thorubazo)고 진단하신다. 신약성서에서 이 동사는 시정이 필요한 행동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된다. 마가복음 5:39에 의하면,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으로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책망한다. 또한 사도행전 20:10에 의하면,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 일화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소란 피우지 말라.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고 훈계한다. 이와 같은 어근을 가진 ‘토루보스’(thorubos)라는 명사가 ‘소란, 소요, 난리’ 등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 대표적 어휘임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신다. 이는 근심어린 심각한 말씀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도시를 부르시면서 그 패망을 예언하는 말씀(“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눅 13:34)에서,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는 말씀에서도 이러한 반복이 등장한다(“시몬아, 시몬아,” 22:31f.). 즉 예수는 마르다의 이해 방식을 심각한 마음으로 교정해주신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은 모두 중요하다. 다만 자기의 맡은 바 역할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며, 마리아처럼 말없이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선택한 신앙적 태도는 결코 철회될 수 없다.
C.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설교주제: 설교구성을 위한 제언
기독교 신앙에서 말씀과 행함의 이중적 요소는 모두 중요하다. 그 중 어떤 한 요소도 나머지 다른 요소를 폐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차원은 그 공동체적 의미이다. 말씀이 우선되는 상황과 행함이 우선되는 상황은 그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와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말씀인지 행함인지, 그것은 우리의 기도와 지혜를 통해 분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월 26일, 부활절 셋째 주일 사도행전 3:12-19 (참조: 눅 24:36b-48; 요일 3:1-7)
“기적을 행해도 박해는 오는가?” 박찬웅
A. 본문의 상황과 배경
본문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본문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제자들을 통해 일어난 최초의 기적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행해진 설교를 담고 있다. 본문 앞의 사도행전 2장이 신비한 오순절 방언 체험 사건에 대한 보도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3장은 사도들을 통한 첫 번째 치유 기적을 중심 주제로 전개된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약속에서 제자들이 ‘권능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권능’에 해당하는 ‘뒤나미스’(dynamis)는 ‘세메이온’(semeion) 및 ‘테라스’(teras)와 함께 기적을 가리키는 누가의 대표적인 어휘이기 때문이다. 이후 사도행전 곳곳에는 기적에 관한 놀라운 역사가 곳곳에 묘사되어 나온다. 둘째, 본문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기록만을 놓고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의 수난 장면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며 배신한 인물에 불과하다. 물론 빈 무덤을 목격한 인물로 묘사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시키기에는 역부족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이어 본문에 해당하는 3장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에 확실히 성공한다. 일개 어부지만 구약 성경의 예언을 예수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할 능력을 지니고, 또 설득력 있게 예수의 삶과 그 의미를 선포할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한 선포의 결과 사도들은 예수가 당한 것과 동일한 수난과 죽음의 박해를 당하게 된다. 즉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그야말로 제 2의 예수와 같은 존재로 활약하게 된다. 셋째, 본문은 신약성서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의 굵직한 주제를 처음으로 웅변해주고 있다. 사도행전에 수차례나 기록된 많은 설교들은 대부분 예수의 삶과 부활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신학적 방향을 제시한다.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에 관한 복음이 세상에 퍼져 나가고 그에 따른 박해 및 그 극복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B. 본문의 구조와 내용
1. 본문 전후 문맥의 구조
사도행전의 초반 부분은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삶의 정황이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강조한다.
1장: 예수의 승천과 12사도 조직 정비(맛디아 충원)
2장 1-42절: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이은 베드로의 설교와 공동체의 확대
2장 43-47절: 초대 공동체의 이상적인 공동생활 묘사(1)
3장: 첫 번째 기적 보도: 선천적 장애인 치유 사건 및 베드로의 설교
4장 1-22절: 베드로와 요한의 체포(첫 번째 박해)
4장 23-31절: 공동체의 기도
4장 32-37절: 초대 공동체의 이상적인 공동생활 묘사(2): 긍정모델
5장 1-11절: 초대 공동체의 이상적인 공동생활 묘사(2): 부정모델
5장 12-16절: 두 번째 기적 보도: 요약적 보도
5장 17-42절: 사도들의 체포(두 번째 박해)
6-7장: 스테반의 순교(세 번째 박해)
이와 같이 사도행전 초반부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점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된다. 12사도를 중심으로 잘 정비된 예루살렘 공동체는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 강림의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권능을 입는다. 2장과 4장에서 언급된 공동생활의 모습은 성령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이상적인 형태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정통 집단이라는 첫 번째 외연적 증거가 3장 본문에 언급된 치유 기적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도 치유가 불가능하고 사회 변두리에 내몰려 있던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다(3장). 그런데 예수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초대 공동체도 겪게 된다. 그러한 놀라운 기적 수행의 결과를 보고 유대인 지도층은 사도들을 박해한다(4장). 기적이 발생한 놀라운 일에 이어지는 결과가 ‘박해’라는 점은 5장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적으로 보도된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스테반이라는 인물 역시 기적 수행의 결과 박해를 당하는데 결국 사도행전에서는 처음으로 순교를 당하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기적 수행 → 박해]의 주제는 급속도로 고조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문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첫 번째 기적 보도’에 속한다. 이 본문의 구조를 간략하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2. 본문의 구조
ㆍ 12절: 치유 기적의 행위자는 누구인가?
ㆍ 13-15절: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케뤼그마
ㆍ 16절: 치유 기적이 예수의 이름을 통해 발생했음을 증언
ㆍ 17-18절: 예언의 성취인 예수 죽음
ㆍ 19절: 회개의 촉구
3. 본문의 전승사적 의미
이 본문은 특히 양식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다드(C. H. Dodd)에 의하면, 초대 교회의 신앙적 삶 가운데 형성된 설교(kerygma) 양식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선포의 대상이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두 개의 패턴이 있다고 보았다. 가령 이방인 선교를 위한 설교 양식은 데살로니가전서 1:9b-10에서와 같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옴-예수의 부활-예수의 재림”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을 향한 선포의 양식은 대표적으로 사도행전에 집중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대인들을 향한 많은 설교들은 공통된 3차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즉 “a. 예수 생애에 대한 요약적 진술, b. 구약성경의 성취, c. 회개의 촉구”의 형식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식사 연구에 의하면, 이와 같은 동일한 설교 양식이 사도행전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 설교가 실제로 각각의 현장에서 행해졌다기보다는 일반적인 초대 교회의 예배 현장 가운데에서 고착화된 양식이 누가 기자에 의해 옮겨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개연성 있다. 따라서 양식사 연구자들은 본문의 역사성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양식사 연구의 회의주의는, 초기의 전승들이 임의적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검증 작업을 거치며 이어져 왔을 것이라는 보다 개연성 있는 추정에 비추어 본다면 지나치게 무리한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의 설교들에서 반복적인 주제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구체적 전승에 의거한 임의적 창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누가의 신학적 개입이 있었다고 해도 각각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들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본문이 지니는 신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 그 이유는 먼저 본문 전승의 가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에서 매주일 암송되는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 즉 그의 삶과 죽음, 부활에 관한 보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의 삶에 관해 이렇게 짧게 요약하고 있는 것을 요약보도(Summary)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삶에 대한 보도는 네 개의 복음서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몇 구절 안에 이와 같은 요약적 보도를 하고 있는 본문은 신약성서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러한 요약 보도가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누가-사도행전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가운데 글로바의 연설(눅 24:19-24)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들(행 2, 3, 5, 10, 13장 등 다수)에는 예수 삶에 대한 요약 전승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물론 바울서신에도 이러한 보도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가령 고린도전서 15장과 빌립보서 2장에 이런 요약 보도가 나타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의 보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특히 부활에만 강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요약 보도는 누가-사도행전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 본문의 내용
ㆍ 12절: 치유 기적의 행위자는 누구인가?
치유 기적이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인간인 사도들 자신을 주목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그러면 이 기적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가? 하나님인가?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에 의하면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인간은 그저 매개자에 불과하므로, 여기서 독자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유일신 신앙을 강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6절에서 베드로는 이를 예수라는 한 인물을 통한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유대교 신앙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발전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ㆍ 13-15절: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케뤼그마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삶의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만 논한다. 아마도 ‘죽음’으로 암시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3장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잘못’ 죽였음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해서’ 희생된 예수와 마찬가지로, 4장에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게 된다.
ㆍ 16절: 치유 기적이 예수의 이름을 통해 발생했음을 증언
유대인의 잘못으로 희생된 예수는 오히려 권능을 지닌 분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은 그 병자를 낫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ㆍ 17-18절: 예언의 성취인 예수 죽음
17절의 ‘너희’라는 주어와 18절의 (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주어가 대조된다. 즉 너희는 무지해서 예수를 ‘잘못’ 죽였지만, 반면 하나님은 예언된 바를 ‘올바로’ 성취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너희’와 ‘하나님’의 이해 방식에는 심각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ㆍ 19절: 회개의 촉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어떤 사실을 머리로 파악하는 것에 기초하여, 회개를 통하여 행동에 옮기는 것이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C. 설교 구성을 위한 제언
ㆍ 부활절 후 세 주일이 지난 지금, 부활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새겨보자.
ㆍ 본문은 박해와 순교를 예견하는 비장한 상황을 담고 있다.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기 전, 우리는 어떠한 준비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제목: 추방하고 추방당한 예수 본문: 눅 8:26-39(평행본문 갈 3:23-29; 사 65:1-9)
2010년 6월 27일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박찬웅
I. 본문의 상황과 내용
1. 본문의 구조와 상황
본문의 사건은 마가복음 5장 1-20절과 마태복음 8장 28-34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마가복음의 본문이 가장 오래되었고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의 본문을 토대로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위해서는 공관복음을 세밀히 비교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누가복음의 본문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마태복음보다는 누가복음 본문이 마가복음 본문에 더 가깝다)
본문의 구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거라사 지역 도착 직후 귀신 들린 자를 만난 예수(26-27절)
• 귀신 들린 자의 간청(28-29절)
• 귀신 들린 자의 정체(30절)
• 귀신의 간청과 돼지 떼의 죽음(31-33절)
• 귀신 축출로 온전해진 상황과 예수에 대한 주민들의 요청(34-37절)
• 귀신 들었던 자의 요청과 예수의 명령(38-39절)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공생애 전반부에는 갈릴리 주변에서의 사역이 중심이 되고 있다. 직전 본문(눅 8:22-25)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이동했다는 것은 풍랑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바삐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암시한다. 실제로 풍랑이 일어 예수 일행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지만, 예수의 권위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그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보면 예수가 이방 지역인 데가볼리(Decapolis, 누가에는 거라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로 가서 강력한 귀신을 만나게 되는 8장 28-34절 본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위협적인 풍랑을 잠재웠듯이 예수는 군대 귀신에 맞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군대 귀신을 쫓아내고 나서 주민들이 예수를 내몰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돼지 떼가 몰살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재산 손실의 이유로 예수를 나가달라고 했는가? 아니면 여기에는 다른 상징적인, 혹은 부가적인 의미가 있는가?
오늘 본문의 무대가 되는 거라사는 갈릴리 동편에 있는 10개의 이방 자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사본에 따라서 ‘가다라’ 또는 ‘겔게스’로 언급되기도 한다). 데가볼리는 지리상으로는 팔레스틴 내부에 속하지만 헤롯 왕조의 통제에서 열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헬라·로마의 직속 관할구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 일행이 진입한 곳은 이방인의 땅이라는 것이 뚜렷이 부각된다. 또한 군대(레기온)라는 귀신의 이름은 예수의 적대자가 이방 세력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2. 본문 해석
먼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첫째, 예수는 다수의 귀신을 제압하는 분이다. 귀신의 세력이 아무리 강력해도 예수의 능력과 권위는 관철된다. 반면 예수는 주민들이 나가달라는 요청에 아무런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그 요청을 따르는 모습으로 나온다.
둘째, 귀신 들린 자는 ‘그 도시 사람으로서 ···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다. 그는 전혀 상식 밖의 사람이다. 정상적인 집에서 살지 않고 부정한 장소인 무덤에 거주했으며, 심지어 오랫동안 나체로 지낸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한 반(反)-사회적 행태의 원인은 바로 귀신에 들렸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는 쇠사슬과 고랑에 매인 채 감시를 받았으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가곤 했다.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마가복음에 의하면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막 5:4)는 언급은 이 사람이 이방인이 지배하는 힘, 혹은 구체적으로 로마의 압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를 붙잡고 있는 귀신의 이름(레기온)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이 귀신의 이름은 ‘군대’(레기온)다. 이 어휘는 명백히 로마 군대를 말한다. 이 귀신이 그토록 강력했다는 점 역시, 근대 이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동한 로마를 상징한다. 이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기를 원했다는 점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의 대표격이며(레 11:7; 신 14:8 참조), 이는 곧 이방인을 의미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지배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귀신 들린 자를 절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를 제압한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그 귀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귀신에 들린 사람은 혼자(단수!)지만 귀신은 많은 수(복수!)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 정부는 황제의 일인 독재 체제였지만 그 군대는 다수였다. 즉 단수가 복수로 드러나고, 반대도 성립하는 것이다. 군대 귀신은 ‘무저갱’(abyssos)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마가 본문에 따르면, 그 귀신은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막 5:10). 그렇다고 해서 마가 본문과 누가 본문이 이 점에서 충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마가에서는 ‘그곳에서’(from)를, 누가에서는 ‘무저갱으로’(into)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두 본문은 모두 공통적으로 귀신의 저항을 명시한다. 그러므로 마가 본문이나 누가 본문이나 모두 로마 주둔군이 계속 머물기를 바라는 상황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군대 귀신은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군대 귀신의 오만함을 드러낸다. 사악한 귀신의 대척점에 있는 하나님/예수가 귀신 축출의 전권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은 목적지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러나 귀신들은 돼지 떼로 들어가 살기를 원했지만,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넷째, 돼지 치던 자들은 이 모든 일을 목격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들의 행동을 단순한 놀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방을 상징하는 동물이 돼지라면, 그것을 기르던 자들 또한 적대자로서의 ‘이방인’(로마)을 상징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같은 운명을 당할까 두려워서 달아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지역 주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예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의 태도가 ‘두려움’이었다는 두 번의 강조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귀신 들렸던 자가 구원을 받은 것을 보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무서워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불행한 사람이 낫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은 두려워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에게 나가라고 한다. 이는 그들이 예수를 추방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위협을 당했을 수 있다. 여기에 오지 말아 달라, 이런 일이 앞으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배에 올랐다.’ 즉 예수는 이들에게 추방을 당했다!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귀신 들린 사람의 정체감은 매우 불쌍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비상식적인 장소, 부정한 곳을 거주지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를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 즉 반듯한 사람으로 고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즉, 이 사람은 단순히 구경거리였던 자가 아니라, 권력에 지배당한 사람들, 강력한 제국 로마에 습격당한 불쌍한 다수의 사람들을 상징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로마의 침략으로 집을 잃은 자들, 거지 신세로 전락하여 걸인이 된 자들, 산 속으로 들어가 강도 떼에 합류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자들에게 본래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일, 본래 자기가 살던 가족, 집,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자에게 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와 함께 있겠다는 이 사람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이 사람 자신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예수가 이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본문의 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이 사람은 예수에게 감동한다. 그래서 ‘추방당하는’ 예수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아무리 자신을 고쳐준 분이라고 해도, 이제 소동을 부리고, 위협적인 자라고 낙인 찍혀서 등 떠밀려 돌아가는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얼마나 기특한 사람인가!
그러나 예수는 그를 거기 머물라고 하신다. 고향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리라고 말하신다. 이는 공관복음, 특히 마가복음의 ‘비밀 모티브’에 반대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는 이것을 알리라고 명하신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데가볼리에 더 있고 싶어 했을 것이다. 고국의 영토에 이방인이 지배하고 있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예수는 더 ‘대결’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첫 번째 목표로 삼은 귀신이 ‘군대’ 귀신이라는 것도 그러한 계획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만만치 않다. 그들은 로마다. 그들은 무기를 지닌 강력한 레기온이다. 시골에서 온 나사렛 예수가 그들과 격투를 벌여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택한 싸움의 종류는 영적인 차원이었다. 어두운 영의 세계를 지배하는 귀신을 굴복시킴으로써, 물리적 힘을 초월해 있는 싸움의 장을 선택하셨다. 그 영적 전투의 장소는 물리적 힘의 세계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세계의 본질적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1라운드 데가볼리 싸움에서 예수는 통쾌하게 승리하지만, 그 1라운드만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데가볼리에 남아 예수가 남겨둔 후반전을 대신한다. 예수의 바통을 이어 받아 영적인 싸움을 계속한다. 그는 “전파한다(케뤼그마).” 예수가 전파했던 대로, 세례 요한이 전파했던 대로, ‘복음을 전한다.’
3. 본문 적용
본문에서 예수는 적진에 뛰어드는 독립투사와도 같다. 무모하게 보이는 싸움을 선택한 사람과도 같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모범은 바로 이런 것이다. 신앙인은 무모한 싸움에 뛰어드는 자요, 현실을 고발하는 자이다.
로마가 세계 질서를 유지했던 원리는 ‘군사적 힘’이었다. 예수님은 그 물리적 힘의 원리에 정면 도전했다. 그래서 이방 지역에서, 군대라는 이름을 지닌 귀신과 붙어서 그를 굴복시킨 것이다. 로마 질서에 무비판적으로 안주하는 자는 본문과 부합되지 않는 자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작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관찰해보아야 한다. 선한 원리가 세상을 작동시키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지지해야 하고, 반대로 악한 원리가 세상의 원리가 되고 있으면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다.
무엇을 알려야 할지, 아니면 무엇을 고발해야 할지에 관해서 본문은 명료하게 알려준다. 현실적으로는 세상의 질서 밑에 살고 있지만, 로마 군대라고 하는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영적인 승리, 즉 근본적인 승리를 차지한 사실, 이것이 알려야 할 대상이다.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일’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 은혜를 개인 실존적인 범위로 너무 좁혀서 이해하면 안 된다. 개인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큰 은혜는, 악한 세상에 도전하는 담대한 태도를 갖게 하심을 말한다.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2012년 9월 2일 성령강림절 후 열셋째 주일 “그리스도, 생명의 양식”
요 6:51-58 (잠 9:1-6; 엡 5:15-21) 박찬웅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1. 서론
성만찬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모두 나와 있는데, 이 네 개의 기록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마 26:26-39; 막 14:22-26; 눅 22:14-23; 고전 11:23-25).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일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뚜렷하게 기억된 전승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개신교의 성례전은 두 가지뿐이다. 즉 개신교는 세례식과 성찬식만을 공식적 성례전으로 삼고 있다. 이는 형식적 제의보다 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과 연결되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가 성례전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개뿐인 이 예식을 엄숙하고 철저하게 준수하고 그 의미를 잘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세례식은 일생에 한 번 거행될 뿐,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오직 성만찬이 신앙생활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유일한, 가장 중요한 제의로 여겨질 수 있다.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견은 다양하다. 초대교회는 떡과 잔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실재설(實在說)을 믿었는데 이는 아마도 떡과 잔이 가진 물성(物性)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영지주의에 대한 대응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가톨릭교회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이것은 나의 몸, 나의 피”라는 선포를 통해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또는 임재설을 주장했는데, 루터에 따르면,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편재(遍在)하시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만찬 중에 떡과 포도주는 여전히 떡과 포도주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속에(in), 그 아래(under), 그것들과 함께(with) 임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의 쯔빙글리는 희생설, 화체설, 공재설을 모두 배격하며, 대신 기념설(記念說) 또는 상징설을 내세운다. 곧 성만찬은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가시적인 상징이며, 신앙인은 신앙 고백의 행위로서 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확고한 해석으로 삼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각자가 선택한 해석을 배타적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 그 의미를 확신 있게 강하게 영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자세는 각자의 믿음과 체험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떡과 잔을 받는 그 순간 나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와 기도에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왜 성만찬 본문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요한복음에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살과 피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성만찬 제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는 떡과 포도주에 관한 새로운 차원의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다.
2. 본문의 구조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51절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선언이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나는 ···이다”(egō eimi)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드러내시는 자기 계시와도 같다. 즉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기의 특별한 정체를 스스로 계시하는 분으로서의 특징을 드러낸다. 여기서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며, 이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할 것을 선언한다.
(2) 52절은 예수의 선언에 대한 유대인의 반박이다(“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혹은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유대인의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 몸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었다는 말은 논쟁이 있었다는 뜻이므로, 예수가 자기 몸을 주어 먹게 한다는 것을 믿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공존했다는 말이 된다.
(3) 53-56절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을 향해 논증을 펼친다. 예수는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유대인들과의 계속되는 논쟁 장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53-56절 부분에서는 “살과 피”가 구분되어 언급되고 있다. 본문의 시작(51-52절)과 마지막 부분(57-58절)에서는 예수의 정체가 떡(살)으로만 은유되어 나오는 것과 달리, 여기에서는 “살과 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모순적이거나, 혹은 구성의 불균형성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살과 피”의 언급은 떡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것이 성찬식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성만찬 본문이 배제되어 있으며, 오히려 요한복음에만 언급된 세족식 장면(요 13장)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성만찬 예식이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생명(53절), 영생과 부활(54절), 진리(55절), 상호 내주(內住, 56절) 등의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어들과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53절에서 예수는 인자의 살과 피가 없이는 생명이 없음을 선언한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는 그리스도와 크리스천 사이의 긴밀한 연대성을 말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곧 생명력 있는 크리스천 됨의 기본 요건인 것이다.
• 54절에 따르면, 예수의 살과 피는 영생을 가능케 하며, 또한 종말 때의 부활을 보장한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55절에 따르면, 예수의 살과 피는 진리의(참된) 양식이자 음료다(“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56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신앙인이 거하고, 신앙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한다는 상호 내주의 주제가 언급된다(“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이 주제는 고별연설 단락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4) 결론: 생명의 선언
마지막 57-58절에서는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살다)가 수차례 반복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절). 하나님이 “살아 계신 아버지”로 표현된 것은 신약성서에서 여기뿐이다. 살아계신(생명의)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어 예수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예수의 몸을 먹는 그 사람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선언이 주어진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58절 말씀에서, 예수는 우선 자신을 “이는”(houtos)으로 말함으로써 본문의 가르침의 보편타당성을 강조한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의 예수의 정체성은 객관적인 계시와도 같은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의 마지막은 대조법으로 되어 있다. 즉,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는 유대인의 유산이 지닌 한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계시와 구별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지만 그 가운데 죽음을 극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광야에서 만나가 내려온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양식이 만나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해석과 적용
(1)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떡과 포도주에 관한 바울서신의 본문도 요한복음 못지않게 독특한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만찬을 둘러싼 ‘특별한 정황’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그런데 바울 본문의 초점은 강자 때문에 약자가 상처 받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어찌 보면 성만찬의 신앙적 의미보다도 사회적 의미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신앙적 의미가 명확하게 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여기서 “참여한다”는 말은 하나가 됨, 즉 합일(koinonia)의 신비를 말한다. 요한의 본문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살과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 놀라운 신비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는 초기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와 신앙인의 합일에 대한 믿음이 ‘살과 피’를 매개로 고백되고 선포되었던 폭넓은 정황을 알 수 있다.
(2) 기독교의 중요한 상징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고백은,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의 가장 중요한 제의는 희생 제사였고, 신약시대를 대표하는 제의는 (세례와 함께) 성찬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생 제의는 짐승의 피를 요구하는 유혈적인 제사지만, 신약의 성만찬은 무혈적이며, 더군다나 일상적인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를 상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식음(食飮)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행위의 배후는 뿌리 깊은 인류의 금기(타부) 사항과 관련이 있다. 피를 마시는 금기, 식인행위(cannibalism)의 금기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고백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은 야만성과 연관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공격적, 폭력적 욕망과 본능이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가 기독교 제의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시사한다. 즉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본능과 욕망은 신앙과 제사 속에서 엄격하게 제한되고 해소된다. 한편 제의 외적인 모든 영역에서는 그러한 폭력성이 철저하게 부정되고 거부되는 것이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우리의 고백은 이렇게 신비한 영역에 속하면서도 철저하게 인간적인 배경을 같이 지니고 있다.
(3)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신앙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신앙적 고백과 연결된다. 신앙인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거룩한 존재다. 이렇게 신앙인의 정체성은 신비하고 거룩한 영역에 들어선 존재임을 믿는 자기 고백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합일을 이룬 신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왜 살과 피를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선언이 필요한가? ‘하나 됨’은 본래 하나였으나 분리되었던 것, 이별했던 것이 다시 하나로 되는 것을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분리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는 것이다. 본래 하나의 혈통에서 비롯된 인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구별되고 갈라져 있지만, 본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였던 인류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세계도 그러하다.
(4)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잠언에 따르면, 지혜이신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를 돌이키게 하시고, 그가 하나님이 주신 먹을 것과 포도주를 마시고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할 것이라고 선언된다(“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잠 9:1-6).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이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의 예수 역시 새로운 놀라운 신비를 인간에게 알게 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또한 에베소서에 따르면, 신앙의 길은 세속의 삶 가운데에서도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이것이 곧 지혜의 사람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5-21).
(5)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합일의 신비가 이루어진 것은 장구한 우주의 역사 가운데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이러한 신비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다. 죄인인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가 되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 되며, 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된다. 거기에는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의 사람이냐의 구별이 없다. 잘 사는 사람이냐 못 사는 사람이냐의 구별이 없다. 사람이냐 짐승이냐, 생물이냐 무생물이냐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만물을 귀하게 여기게 만들고, 인류를 포함한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합일을 이루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이 놀라운 사건이, 세상과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되며, 우리 몸을 통해 세상이 거룩해지는 역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