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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인간학의 이해
김 광 태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인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 : 1874~1928)는 1928년 그의 저서인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를 출간하며 현대적인 철학적 인간학을 말했다. 인간학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들은 참으로 다양하게 많다. 개별 과학들은 그 연구 방법론에 한계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들은 인간 존재의 어느 한 부분만을 밝혀주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과학들이 하나의 전체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개별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를 초월하여 모든 문제를 통합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별 과학은 어떤 특정한 부분을 한정하여 거기에 알맞은 방법을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느 한정된 부분만 다룰 수 있을 뿐이지 인간 전체를 다루지 못한다. 예를 들어, 심리학은 인간 의식 및 심리 현상만 다루지 인간의 생리현상 등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밝히진 못한다. 더구나 인간다운 올바른 가치나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심리학은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별 과학이 경험과학인 한에서는 인간의 본질의 통합성을 통찰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인간의 생명은 인간 외적인 육체적 행동과 삶의 결과와 그리고 내면적 심성인 정신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에 관한 물음들이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인간학은 개별 과학들이 연구해놓은 인간 이해에 관한 지식들을 종합하여 인간의 전체서를 철학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본 논문은 철학적 인간학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살펴 보기위하여 우선 20세기에 들어와 철학적 인간학이 대두하게 된 동기를 알아보고 이를 근거로 하여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과 그 연구방법론을 고찰한 후에 철학적 인간의 본질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Ⅰ. 철학적 인간학의 대두 동기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이라는 말은 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프리이스(Fries, Jacob F : 1773~1843)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다. 그는 이 철학적 인간학에서 이성에 대한 인간학적 비판을 시도하며, 이를 통해 인간학의 관점에서 철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것이라면서 철학적 인간학은 바로 인간에 관한 철학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프리이스가 주장하는 이러한 철학적 인간학이란 기껏해야 심리학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철학적 인간학이란 심리학적 인간학과 같이 인간의 특정한 부분만을 밝히고자 하는 인간학이 아니라, 인간을 종합적 ‧ 전체적으로 연구하여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인간학이다. 이런 유형의 철학적 인간학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셸러는 오늘날의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인간 이해의 암흑시대’라고 정의한다. 즉 다양한 인간관과 인간에 관한 많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시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 과학에 의한 수많은 지식들이 인간 삶에 제시되었지만 그러한 지식들이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는 대체로 단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돕기 위하여 셸러는 서양 문화상에 나타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사상을 두루 고찰하고, 역사적으로 나타난 인간 이해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는 신을 추구하는 종교적 인간관(homo religius), 둘째는 이성을 인간정신의 본성이라고 여기는 사유인(思惟人. homo sapiens)의 인간관, 셋째는 실증 과학에 입각한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의 인간관, 넷째는 이성을 생(生)의 병으로 돌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der dionyshe Mensch)의 인간관, 다섯째는 평범하고 속된 인간의 초월을 주장하는 초인(Ubermensch, superman)의 인간관 등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떠한 인간관도 현대인의 인간상을 올바르게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철학적 고찰은 모든 존재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인간을 육체 ‧ 영혼의 이원론적으로 보거나, 영혼 혹은 육체 가운데 어느 하나에 다른 것을 환원하여 밝히려고 함으로 인간을 총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래 전통적인 인간관을 이끌어왔던 종교적, 형이상학적 해석이 근대 실증 과학의 계몽주의 정신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아 맥없이 붕괴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이후 인간에 대한 과학적 접근들은 그 입장과 연구 방법의 상이(相異)와 다양성으로 인하여 인간 이해에 관한 각각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인간 이해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대립을 야기함으로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해석을 얻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다문화적인 사회 가치 상황 아래에서 인간 정체성에 대한 고유한 물음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적 인간이라고 셸러는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인식을 토대로 자각적인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통일적인 인간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 이해의 불명확성과 이에 따르는 위기를 맞이하여 인간을 단편적인 존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며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가 셸러에 의해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명명 하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Ⅱ.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 정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물음을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전제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고 있다. 이 물음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 물음 중의 물음이요, 모든 물음들 중 가장 절박하고 절실한 물음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바른 삶인가? 그것은 오래된 물음이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물음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음이다. 또 유적(유(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물음이다. 내가 인간에 대하여 묻는 경우, 나는 나 자신을 인간으로 이해하며 나 자신을 인간으로 묻게 된다. 이 물음은 묻고 있는 자신을 물음 속으로 끌어들이며, 다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 묻게 되는 물음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물음의 특징이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철학의 시초부터 비록 ‘인간학’ 이라는 독립된 분야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서 존재해왔고, 현대에 와서는 인간소외, 인간성 상실의 문제, 비인간화 현상 등이 대두되면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인하여 이 물음이 더욱 철학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개별 과학들은 인간에 관한 수없이 많은 지식들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이런 경험적인 개별 과학들에 의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어떤 철학적 원리를 토대로 인간의 근원성과 현존재의 전체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서 제대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을 문제 삼고, 인간 자체를 전면적으로 총체적으로 해명해보려는 학문이 철학적 인간학이다.
오늘날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들로 막스 셸러를 비롯하여, 헬무트 플레스너(Helmit Plessner) ‧ 놀드 겔렌(Anold Gehlen) ‧ 볼노브(O. F. Bollnow) ‧ 미카엘 란트만(Michael Landmann) ‧ 에머리히 코레트(Emerich Coreth) 등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 중 셸러와 란트만의 견해를 중심으로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 정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일면적 내지 단편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종합적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질을 철학적 관점에서 전체적 ‧ 전면적 ‧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학을 말한다. 철학적 인간학은 그 연구 대상의 면에서 볼 때, 인간 그 자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심(心) ‧ 신(身) 양면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철학적 인간학은 정신적 측면을 절대시하여 신체적 측면을 그것으로 환원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관념론적 입장을 배격할 뿐 아니라 반대로 신체적 측면을 절대시함으로써 정신적인 것을 그것으로 환원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유물적방식도 배척한다. 왜냐하면, 이 두 측면은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동일한 실재로 다같이 중요한 것으로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요소로 해소해버리는 환원적 오류인데, 유물적이나 관념론이 바로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 관점에서 셸러와 란트만은 그 개념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셸러에 의하면,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질, 그 본질의 구성과 자연의 영역들(무기물 ‧ 식물 ‧ 동물)과 모든 사물들의 근본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시원(始原)과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의 물리적 ‧ 심리적 ‧ 정신적 근원뿐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고, 인간이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그와 같은 힘들이 나오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런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생물학적 ‧ 심리학적 ‧ 정신과학적 ‧ 사회과학적 발전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학문들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과 그 현실성에 대한 기초 학문(Grundwissenschaft)으로, 여기에는 인간의 정신적 ‧ 물리적인 심신 문제와 사유, 생명의 문제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에 대하여 셸러가 밝히고 있는 이러한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면, 우선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총망라하여 서로 관련시켜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 구성을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분리 하지 않고, 이들 두 가지 요소들을 상호 유기적 관계로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코레트가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의미와 같다고 하겠다. 코레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이 내적으로 형상을 부여하고 있는 본질 구성적인 육체의 원칙이라고 했을 때, 정신은 육체의 구속을 받고 육체 안에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육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을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 영혼이 스스로 물질을 매개로 그 영혼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물질적 육체에서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그 결과로 아주 분명해진다. 살아 있는 육체의 진정한 모습(實際. Wirklichkeit)은 정신적 영혼 자체가 육화된 실제다. 육체는 본질적으로 영혼의 유체며 따라서 영혼도 마찬가지고 이 육체의 실제다. 이둘은 하나의 본질적인 통일을 형성한다. 이처럼 셸러는 인간의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총체적으로 이해고자 하였다.
이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양식과 삶의 과정에서 인간과 무기물, 인간과 식물, 인간의 존재 양식과 삶의 과정에서 인간과 무기물, 인간과 식물, 인간과 동물들 간에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인간 존재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파악하고자 하였다.
란트만은 철학적 인간학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망라한 인간 전체에 관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밝히려 한다. 즉, 철학적 인간학은 경험적 개별 과학들에게서 자명한 것으로 전제된 인간에 관한 지식을 문제로 삼으며, 인간의 전체적 특성(全人間)에 관하여 문제 삼아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존재인 식물이나 동물, 무생물들과 구별되는 특성(독자적인 고유성)에 대하여 고찰한다. 이런 철학적 인간학은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생존하게 될 모든 인간들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인간의 특징들에 관해 물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와 문화에서 있을 수밖에 없는 특징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며, 이에 따라 어떤 존재가 인간인지를 규정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어떤 기준에 관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란트만이 규정하고 있는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은 지금까지 모든 개별 과학이 인간에 관해 밝혀놓은 지식들을 종합하여, 이들을 토대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정을 이끌어내고, 다시 이들을 통합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 규명은 인간과 다른 존재물인 식물과 동물, 무생물과 비교하여 인간만의 고유성을 밝힘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들의 삶을 토대로 모든 사회와 문화권에 걸쳐 인간만의 고유성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철학적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란트만은 인간의 자기 형성에 대한 자기 해명이 철학적 인간학의 과제라고 하였다. 인간의 삶은 자기 형성 과정이다. 인간은 불변하는 완성된 존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각과 행동의 특정한 방식만은 본래부터 인간에게 고정된 세습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고정된 세습 부분이 인간에게 전부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고정된 것을 넘어서서 이차원의 세계가 생기는데, 이 같은 이차원의 세계는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창조력과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예를 들어 채집할 것이지 사냥할 것인지, 밭을 일구어먹을 것인지 가축을 기를 것인지에 대해 인간은 그 자체 안에서 본능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이 어떻게 먹고 살며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지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환경과 삶의 조건에 따라 경험과 새로운 발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의 세계를 상당한 부분 스스로 형성해나간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 환경에 그대로 갇혀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다가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세계(생활 세계)는 자연 환경과 인간이 만든 문화 환경을 합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문화를 형성하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나간다. 이런 인간의 자기 형성이 각자의 삶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미리 정해진 궤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래부터 반쯤 미완성된 채로 세상에 태어나 자기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나간다. 이런 자기의 삶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인간의 자기 완성의 과정이자 자기 자신의 창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는 물론 종족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는 겔렌이 “인간은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삶을 이끌어나간다”고 주장한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할 것이다. 인간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그 자신이 어떻게 자기 완성을 이룩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완성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자기 이해를 필요로 한다. 란트만에 의하면, 철학적 인간학은 이같은 올바른 자기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철학적 인간학자들 중에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셸러와 란트만의 견해를 중심으로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 정의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이 밖에 다른 철학적 인간학자들은 이들과는 좀 다른 관점과 논지로 철학적 인간학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개념 정의를 일의적(一義的)으로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러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서로 다른 관점과 표현 방식으로 철학적 인간학을 주장하더라도,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밝히고자 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 관점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내용들이 아니라고 하겠다.
Ⅲ. 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
철학적 인간학 자체가 매우 다양하듯이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연구 방법론도 매우 다양하고 그 내용들도 차이가 많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은 매우 다양하게 다원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절대적인 타당성을 인정받는 하나의 출발점이란 없다. 이 물음은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제기될 뿐 아니라 제기되는 여러 가지 경우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단지 인간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기초적인 일반적 방법의 원리들 중 몇 가지만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연구 방법의 원리로 첫째는, 철학적 인간학은 다양한 인간의 자기 이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철학적으로 비판하고 숙고하여 밝히는 방법으로 연구한다. 인간의 자기 이해란 이미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해서 전이해(前理解. Vorverstandnis)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평상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게 이끌어가고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도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진화론자가 인간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화석(化石)의 뼈를 발견했을 경우, 그는 인간에 대한 전이해를 토대로 그 의미를 규명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자는 처음부터 창조설을 부인하고,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되었으며, 동물은 유기체로부터, 유기체는 무기체로부터 진화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생각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한 이해를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인간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것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물질로만 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전이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전이해는 일반적으로 각자의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연구자 자신의 인간에 대한 자기 이해가 항상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 이해를 전제로 인간을 동물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임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가령, 인간이 자연환경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동물들과는 달리 이성의 도움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보다는 아주 빈약한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대신 우수한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등은 인간의 바른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사회를 형성하고 문화를 누리며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해하게도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인간의 인격에는 정신적인 요소가 중요한 작용을 하며 이런 인간의 정신 형상은 동물의 단순한 의식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그 질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다양한 자기 이해(전이해)를 토대로 인간다운 의미를 추구하고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 연구 방법의 원리로 둘째는, 인간에 대한 연구는 개별 과학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실증주의적인 개별 과학의 지식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개별 과학들의 실증주의적인 지식을 토대로 이를 종합하여 인간을 전면적으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개별 과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한 생물학적 인간학을 들어볼 수 있다.
생물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유기체적인 생물로 규정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자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의학 ‧ 생태학 ‧ 인류학(체질인류학 ‧ 문화인류학) ‧ 심리학 ‧ 사회학 ‧ 경제학 ‧ 법학 ‧ 정치학 ‧ 교육학 등 여러 개별 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인간의 다양한 여러 특징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해하게 해준다. 이런 개별 과학들의 인간에 대한 연구는 실증적인 연구들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이런 다양한 특징들을 다시 종합하여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본질을 밝혀주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 연구 방법의 원리로 셋째는, 현상학적 방법을 들 수 있다. 현상학은 후설이 체계화한 연구의 한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이 방법에 의해 철학적 인간학에서 어떠한 내용들을 밝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을 부연하고자 한다. 철학적 인간학은 현상학적 방법과 내용 등을 중심으로 인간에 관한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인간의 행동 규범과 당위, 가치 문제, 인간다움의 의미를 밝히고자한다. 즉, 철학적 인간학은 현상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종래의 사변적 철학 방법에 의한 인간의 해명과 설명 방식을 지양하고, 삶의 경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실제 상황과 사실들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밝고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 사실들을 단순히 수집 종합하여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그 내면적인 본질을 탐색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행동 방식은 단순히 외적인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정신적 숙고에 의해 이루어지는 면이 많다. 따라서 인간에 관한 파악과 이해는 외적인 현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내면적인 숙고와 통찰을 통하여 탐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방법이 현상학이라고 하겠다. 즉, 인간은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인간은 이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외적 현상으로 탐구하고, 그 다음으로 내면적 숙고와 통찰에 의해 인간은 정신적 존재로 인간다움을 위해, 즉 정신적인 자기 완성을 위해 어떻게 사색하고 경험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Ⅳ. 철학적 인간학에서의 인간의 본질
철학적 인간학에서 밝히고 있는 인간의 고유성이라고 할까,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사람이란 외형만 사람의 모습을 갖춘 존재로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맨 나중의 사람은 ‘사람다움’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뜻한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다움이란 인간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선 인간의 본질의 의미부터 밝히고, 동시에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이들을 토대로 철학적 인간에서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고유성, 즉 사람다움의 의미를 나타내는 그 본질을 논의해볼 것이다.
1.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의 의미
우리는 인간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런 인간에 관한 정의가 모두 타당한 관점으로 인정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정의는 그것에 대해 어떠하다는 ‘한정(限定)’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는 어떤 사물을 인식하고, 또 다른 것과 구별되거나 구별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의 고유한 특징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사물의 본질이나 그 본래적 의미 또는 내면적인 특성을 밝히기보다는 외형적인 특징이나 기능을 중심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간도 다른 생물로부터 구분해서 생물학적으로 또는 형태학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흔히 인간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역사적 존재, 문화적 존재, 과학 ‧ 기숙의 창조자 등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설명들은 전부가 인간에 해당되는 특징들이며 인간을 다른 사물로부터 충분히 구별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명들로만 인간다움의 의미를 본래적 ‧ 근원적으로 다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이 문제가 되는 경우, 우선 ‘본질’자체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분명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즉, 본질이란 무엇인가? 본질은 그것이 그것으로 되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본질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그러한 것이며 그것이 있게끔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질은 어떤 것이 ‘무엇(Was)', 즉 ’무엇임(Washeit)'이나 ‘그렇게 있음(Sosein)'의 내면적 근거나 원리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무엇에 의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론적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인간이 인간이게끔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때,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일의적(一義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움의 의미, 즉 인간의 본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차원적으로 접근하여 파악할 것이 요구된다. 인간에 관한 외형적 특징뿐 아니라 내면적 정신적 활동의 원리를 비롯하여 인간의 정태적(情態的)인 면과 동태적인 면 등을 종합하여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은 다른 사물에 대한 설명처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것은 개별적인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자유 안에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실은 모든 개별적 인간의 성장과 자기 실현, 활동에 해당된다. 또 역사 안에서 인류 생활의 형성과 변천과도 관련된다.
우리가 인간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절대적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출발점이란 없다. 그런데 인간 본질의 특성을 논의할 때 대개 학자들은 자기가 주장하는 인간의 특성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연히 착안한 어떤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전부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다원적(多元的)이다. 셸러는 “인간은 동물처럼 종(種)의 성질을 가지고 확고부동하게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면서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개방된 존재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본래부터 확정된 성격상의 특징이나 정신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삶은 미리 정해진 궤도에 따라 달리는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반쯤은 미완성된 채로 세상에 태어났다. 하나님이나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완성하도록 위임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과제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완성은 그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만든 어떤 관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과제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완성은 그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만든 어떤 과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의 동기를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다른 충동을 받고 행동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묻고 탐구하는 인간의 생각이 존속하는 한, 항상 새로운 깊이와 비밀을 밝혀주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헤르더(Herder, J. G. : 1744~1803)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아직 전혀 참다운 사람이 아니며, 참다운 사람은 아직 되어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역사적으로 전개해온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의미를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이 라고 할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특징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2. 육체와 영혼의 문제
인간의 본질과 본질 구조에 관한 물음을 던질 때, 정신사적으로 우리는 우선 ‘육체와 영혼’의 문제부터 시작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가졌다든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육체는 무엇을 뜻하고 영혼은 무엇을 뜻하며 육체와 영혼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이 어떻게 인간에게서 통합되는지, 또 이들은 스스로 인간이라는 유기체에서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지 등의 의문이 제기된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사에서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토대로 육체와 영혼을 서로 다른 별개의 실체라고 보면서 서로 대립적인 존재로 규정해왔다. 그리하여 육체와 영혼은 서로 분명히 구분될 뿐 아니라 분리도 가능하며 영혼이 육체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현상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사실은 영혼만 참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분리한 플라톤의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형상과 질료하는 개념으로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도 역시 인간의 형상인 영혼이 육체보다 더 우위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에 관해 플라톤의 이원론을 약간 수정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이를 극복하진 못하였다.
이러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육체에 관한 이원론의 전통이 그 이후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 근세의 많은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쳐 최근세까지 이런 분열된 인간상 내지 인간관이 서양정신사를 지배해왔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에 관한 한 영혼이 항상 육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양자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고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영혼에서 오는 정신적 요소는 항상 고상하고 가치가 있으며 육체와 물질적 요소는 모든 악과 죄악, 타락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에 따라 인간의 현실적 삶은 이중성을 띠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물질적 가치를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모순인 인간상을 길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철학과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체 또는 정신과 육체를 더 이상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육체와 영혼과 정신은 서로 별개로 독립하여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영혼이나 정신이 없는 육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이와 반대로 육체가 없는 영혼이나 정신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결합될 때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육체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의 정신은 육체를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정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육체적인 행위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이 극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혼은 모든 인간 존재의 선행 조건이며 내적 근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 그 자체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영혼은 인간 전체의 구성적 원리다. 영혼은 물질을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로 만들며 형상을 부여하여 본질을 구성하는 원리다. 영혼은 육체에 의한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사건 자체를 능가하고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행방되며 정신으로 자기 자신에 도달한다. 물질적 육체는 어디서든지 생명이 없는 물질이 아니며 살아 있는 육체다. 물질적 육체가 나에 의해 소유되고 살아 있게 되며 인고되게 될 때만 오로지 육체는 ‘나의’ 육체가 된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유 안에서 자기의 삶을 환경 안에서 형성하는 정신적 삶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육체적 삶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생물학적 생물인 ‘인간’은 정신적 성취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육체의 생명적 삶과 감각적 삶이 정신적 삶의 더 높은 영역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러한 조건 아래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정신적 존재로서만 생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은 육체를 살아 있게 하는 육체의 영혼이다.
그리고 나는 육체성의 매개체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 현존하고 세계는 나에게 현실이 된다. 나는 이러한 육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이 세상에서의 사물과 인간의 복잡다단한 작용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인간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 - 나와 너-는 육체성과 감각에 의해 매개된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 행위를 매개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육체의 외적 행위와 제스처를 통해 호의(好意) ‧ 믿음 ‧ 이해 ‧ 사랑 같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은 육체적 태도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육체란 행위의 작용 매개체일 뿐 아니라 정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육체의 작용은 영혼의 표현이고 영혼을 보게 해주는 것이다. 영혼에서 일어난 것은 그의 얼굴의 표정에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는 정신을 표현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적 영혼이 스스로 물질을 매개로 그 영혼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물질적 육체에서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살아 있는 육체의 실제(Wirklichkeit)는 영혼 자체가 육화된 실제다. 육체는 본질적으로 영혼의 육체이고, 영혼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이 육체의 영혼이다. 이 둘은 하나의 본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육체와 영혼과 정신은 서로 따로따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통합체로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다.
Ⅴ. 맺음말
이제 철학적 인간학에서 밝히고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이라고 할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볼 때 관점에 따라서 다소 중복되는 면이 있지만 다음과 같이 망라해서 고찰해볼 수 있다.
생물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특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동물에 비하여 육체적인 기관과 기능에서 비전문화된 상태로 태어난다. 이에 비해 동물은 육체적인 기관과 기능에서 인간보다 더욱 전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동물의 육체적인 기관과 기능은 자연이 주는 먹이를 그대로 생식할 수 있고 환경적인 조건에 꼭 알맞도록 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육체적인 기능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기 위하여 인간은 처음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야 하는 창조성이 주어졌다. 인간은 환경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창조한다. 이것이 이른바 인간의 세계며 문화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문화의 창조자다. 인간은 다른 한편으론 문화의 피조자다. 인간은 처음에는 문화의 창조자이지만 나중에는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인간은 의식하고 사육하는 이성적 존재다.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반성을 하고 자기 의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이에 따라 인간의 본성은 개별성이다. 인간은 질적으로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도록 되어 있다. 인간은 그의 사람됨을 그 나름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인간 사회는 그 자체가 문화 영역일 뿐 아니라 동시에 문화를 보존하며 전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은 문화 창조자로서는 개인적이지만 문화 피조자로서는 사회적이다. 동물들도 인간처럼 군거(群居) 생활을 하지만 무리를 떠나도 그 동물의 속성은 변하지 않으나 인간은 그 독특한 무리 속에서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지성적 존재며 이론화를 요구한다. 인간이 이론을 좋아한다는 것은 후천적인 어떤 필요에서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탐구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려고 한다. 인간은 오로지 그 자체를 알기 위하여 학문 연구에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내면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각자 자기의 고유한 내면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가 개방된 존재다. 셸러나 플레스너(Plessner, Helmuth), 겔렌(Gehlen) 등은 세계의 개방성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다. 인간은 물론 세계(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세계를 창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인간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탈중심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은 세계를 자기 중심적으로 보지만 인간은 사물을 자기 이해를 초월해서 개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플레스너는 이것을 탈중심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를 불편부당하게 탐구할 수 있고 자기 주변의 사물과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경건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근거한다. 우리는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이 탈중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이 역사적 전통적 존재 ‧ 유토피아적 존재 ‧ 희망하고 기도하는 존재 등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인간만이 수치를 느낀다든가 인간만이 울고 웃을 수 있다든가 또는 인간만이 물을 수 있고 인간만이 축제를 한다든가 하는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묻고 탐구하는 인간의 생각이 존속하는 한 항상 새로운 깊이와 비밀을 보여주며 항상 새로운 물음을 던질 것이다. 인간에 관한 물음은 휴식이 없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