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ARTMENT OF HISTORY
"WHY NOT CHANGE THE WORLD?
서양사개설을 강의하면서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의 발명을 설명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펴낸 "42행성서"(1455년)보다 훨씬 빠른 1377년에 이미 "직지"를 간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직지가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거의 예의없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약탈하면서 빼앗아갔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웠던 조선의 왕립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외규장각에 불교관계 서적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요.
그럼 직지가 프랑스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래의 내용은 청주 고인쇄박물관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 경위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직지」의 수집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되었으며,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되었다.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던 의궤를 당당히 돌려달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자랑스런 유산인 직지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프랑스로 반입되었기 때문에 반환을 요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면서 서양오랑캐(?)를 욕할 것만이 아니라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일찌감치 인식하지 못했던 슬픈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직지를 발굴해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밝혀냈던 고 박병선 박사에 관한 신문기사 하나를 링크해놓았으니 참조하길 바랍니다.
한국의 학자들과 프랑스 도서관 직원들의 질시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직지와 의궤의 발굴과 연구에 힘썼던 고인의 초인적인 노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https://www.womennews.co.kr/news/51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