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in China를 넘어
‘Made for China’를 비즈니스 하다.내가 군대에서 병역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여자동기한테서 연락이 왔다. 자기 3+1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때 나는 우리학교에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 지도 몰랐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전역 후에 교환학생을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광고홍보언론이라는 학문이 종합학문이다보니 이 수업을 4년 내내 듣는 다는 것이 왠지 어리석은 일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준비했었다. 내가 복학했을때 학교에 흑룡강대학교 교환학생들을 비롯해서 많은 중국 유학생이 있었다. 몇몇 중국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힘들어 하는 중국학생들을 도와줬었다. 운이 좋게 기숙사에서도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더욱 친해질 수 있었고 결국엔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버렸다.
갑작스럽게 바꾼 결정이라 중국어를 공부하지 못했다. 그냥 중국친구들한테 어깨넘어 배운 중국어가 다였다. 하얼빈공항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미안해, 괜찮아요, 천만해요 이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 일단 이 말은 알아야지 하고 같이 온 교환학생들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나의 중국 생활은 시작했다.
첫날 밤 2시 30분 만에 도착해서인지 아님 아직 중국인을 못 만나서인지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말을 못했기 때문에 행정부 선생님, 같이 온 교환학생들 등 많은 도움을 받아 수강신청을 했다. 원래 입문반을 가야 했는데 입문반에서 발음만 연습한다고 해서 그냥 초급반을 신청해버렸다.
드디어 첫 수업 시작 긴장반 설렘반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문제는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말하면 나는 한국학생들한테 무슨 말이냐고 묻고 그렇게 수업을 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학생들은 다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교수님이 반장을 뽑는데 내가 손들었다.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근데 다음날 정독교수님이 또 반장을 뽑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반장이라고 했더니 교수님이 하는 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얘 말 무시하고 반장 하고 싶은 사람 이틀 안으로 자기한테 말하라고” 그렇다 선생님은 내 실력이 없어서 나를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알고 보니 정독교수님이 담임이라 그게 진짜 반장이었다. 다들 나한테 미안해서인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엔 교수님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반장을 시켜주었다. 하하 내 승리인 것이다. 물론 나도 그 뒤로는 하루에 전자사전 베터리가 나갈 때까지 공부했다. 문제는 그래도 안들렸다는 거지만...어쨌든 첫 학기에 사람들과 굉장히 잘 놀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다른반들이 우리반 노는 걸 부러워 했으니까 크크크. 체육대회가 시작됐다. 근데 꼭 그런애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참가안한다는 소리를 하는 아이들 하지만 난 반장의 권한으로 한 사람이 최소한 한 종목은 해야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로 모두 참가시켰다. 막상 그렇게 하니 다들 좋아했다. 체육대회에서의 결과도 좋았다. 장기자랑대회도 마치고 그렇게 첫 학기가 갔다.
종강을 하고 나니 많은 학생들이 두 단계를 뛰어서 수업을 듣거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너무 재미있게 논 탓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떠나서 인지 방학 때 정말 외로웠다. 다행히 중간에 여자친구도 오고 후배도 찾아와 여행을 많이 했다. 틈틈이 학원도 다니고 짧은 방학이 지나 어느새 2학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2학기는 중급반을 들었다. 성적을 생각하자니 초급반을 듣고 싶었는데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 그냥 중급반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한바와 크게 다를바 없이 2학기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이제 중국생활에 적응한 탓도 있을 테고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그다지 중국어 공부가 재미있지 않았다. 그냥 중국어로 먹고 사는게 문제가 없으니 공부가 소홀해진 것이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게 여행을 통해서 인지 1학기가 끝날 때 까지 들리지 않았던 중국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는 재미없고 날씨는 따뜻해지고 그때부터 밖으로 많이 나돈거 같다. 주말마다 축구팀에서 축구하고 흑대농구대회에서 한국팀으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32강까지도 올라가봤다. 그렇게 2학기가 끝나갈 무렵 HSK시험을 쳤는데 4급이 나온거다. 아니 그래도 거의 1년을 있었는데 성적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있고 중국생활이 아쉬운것도 있고 해서 4개월을 연장해 학원에서 공부해 나름 만족스런 결과도 얻었다.
1년 4개월 간의 중국생활에 어찌 이 일만 있었겠는가?! 중국친구들과의 만남도 많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물론 내가 중국어를 잘 못해서 오래 못간 친구들도 있고 내가 한국친구들이랑 많이 어울려 지내 그런것도 있을 것이다. 또 춘절에 중국친구 집에 가서 같이 춘절을 보낸 친구들도 있다. 그 친구들이 바로 목원대에서 만난 흑대교환학생들 그 친구들이랑은 지금도 연락을 하니 한국에서 잘 해준게 득이 된 거다.
치치하얼, 상해, 항주, 소주, 선양, 지린, 장춘, 베이징, 산동성 린이, 내몽고 등 많은 여행도 했다. 중국에서 같이 공부한 형이 상해에서 사업을 해서 수업 빼먹고 사업하는 거 보고 싶다고 따라가기도 하고 여자친구와 여행하고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을 뽑는다면 춘절에 중국친구네 방문했던 걸로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춘절때면 기차표는 미리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표 끊기가 쉽지 않은데 친구는 미리 표를 끊고 내가 놀러 가고 싶다고 늦게 말하는 바람에 따로 끊었어야 했다. 난 엄청 느린 완행을 타고 기차에서 이틀 밤을 잤다. 그것도 문쪽에서... 그때가 기차에서 처음 자게 된 여행이라 노하우도 없었고 그 겨울에 추위에 떨면서 잤다. 씻지도 못하겠고 혼자가서 짐 나두고 어디도 못 가겠고 하여튼 긴장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역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친구와 만나 집으로 향했다. 친구가 시골이라고 말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내가 어렸을적 보았던 전라도 시골보다 더 촌인 것이다. 화장실은 문이 없고 뜨거운 물은 커녕 펌프질을 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뿜어 나오는 그런 시골이었다. 춘절때 문에 붙이는 글(중국이름이 생각이 안나요)도 같이 붙이고 친구 친척어른들 찾아뵙는데 따라 다니고 폭죽도 터뜨리고 친구의 고향친구들과 술도 먹고 그때생각하면 어찌나 담배를 계속 주는지 나중에는 손에 그냥 들고 있었다. 그렇게 5일을 보내고 하얼빈으로 왔는데 이때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추억이 생겼다. 침대칸이 없어서 24시간을 앉아서 왔다. 근데 더 웃긴 건 기차 안에서의 일! 3명씩 마주보고 앉는 자리였는데 내가 통로쪽이었다. 내 옆은 중년의 남자 그 옆엔 회사원 그 둘의 앞엔 신장 위구르족 부부와 아기 내 앞엔 그냥 지식인(뭐라해야할지 모르겠음) 애기는 계속 울고 다들 시끄럽고 내가 너무 힘들어서 통로쪽으로 다리를 내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중년의 남자가 다리를 내 쪽으로 뻗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리를 원래대로 놓을 수 없었고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뒤 회사원이 내려서 내 다리가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그때 지식인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중국 어떠냐고?! 나는 그 전까지는 중국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근데 여행을 하면서 기분 나쁜일을 많이 겪어서 인지 그냥 느끼는 대로 다 말해버렸다. 너무 더럽다. 시끄럽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너무 크다 등등 좋지 않은 것들도 서슴없이 말했다. 그렇게 24시간을 잠깐도 눕지 못하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도착했을땐 얼마나 마음이 포근한지 5개월 밖에 안 살았는데도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힘든것도 즐거운 것도 모든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중국생활 하는 1년 4개월 동안 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심적으로 가장 편했을 때였다. 중국어도 중국어지만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 다양한 나이때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들이 하지 못한 인생경험을 했고 개인적으로는 잊지 못할 연애도 경험하였기에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이가 들면서 슬퍼지는 이유는 현실과 타협해 꿈을 잃어가는 자기를 볼때라고 하던데 지금도 중국뿐아니라 많은 나라에 가보고 싶은데 현재 경제상황과 27살 취업을 해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꿈을 잃어가는건 아닌지... 29살이 되기 전에는 많은 것을 도전해 보려합니다. 꿈을 잃지 마세요 꿈은 포기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외면하는 거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