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in China를 넘어
‘Made for China’를 비즈니스 하다.2007년 8월 29일 하얼빈은, 세상에 대해 편협한 생각을 갖고있던 나에게 성큼 다가와 삶의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삶의 풍요는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신적으로 한층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뜻이다.어떤 이들은 나에게 말한다. 우스갯소리로, "짱깨나라가서 잘 살고 왔어?", "고생했네.", "어이구 짱깨가더니 짱깨다되가지고 왔네.", "거기서 어떻게 1년 반 있다 올생각을 했냐?" 사람들은 은연중에 나에게 중국을 비하시켜 말하곤 했다. 그리고 "중국 또 안갈꺼지? 왜 그런데가서 사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다. 내 맘 속에 중국은 또 다른 나라가 아닌, 내 제2의 고향이라고 느낄만큼 친근한 나라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처음 접한 중국은 온몸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게 할만큼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얼빈을 들어가기 위한 대문인 공항은 그야말로 허름하기 짝이없고, 이게 공항인지, 어느 촌구석에 박혀있는 면사무소인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내리자마자 솔솔 풍겨오는 정체모르는 고약한 냄새... 인상은 저절로 찌푸러져 우리를 위해 마중나온 중국학과 선배님들과 흑룡강대학 사람에게 마져 좋지 않는 얼굴로 대면하게 했다. 학교로 가는 길 보이는 거라곤, 줄지어 있는 나무들과 그야말로 막장인 도로교통, 여기가 중국인지, 동유럽 국가인지 헷갈리게 할만큼 특히한 양식의 건축물들... 지금도 그 날만을 생각하면 눈 앞이 깜깜해진다. 어떻게 그런 곳을 좋아하게 됬는지도...
그리고 이튿날, 나에겐 또 한 번 경악할 일이 생겼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살림살이 장만을 위해 동대문 시장같은 "하시"를 가게 되었었다. 정말 땅이 커서인지..8차선이 기본인 하얼빈의 횡단보도는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신호는 절반을 채 건너기도 전에 빨간불로 깜빡거리고, 신호를 지켜서있는 사람이 바보취급을 당하는 풍경은 정말 자연히 욕나오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결국 당황한 나머지 건널 타이밍을 놓쳐 부랴부랴 따라가던 나와 친구는 한쪽에서는 대형버스, 한쪽에서는 승용차, 샌드위치가 될뻔했다.
그 외에도 따뜻하고 감사의 어조가 담긴 환영의 인사가 아니라 차갑고 사나운 건성건성인 말투, 서비스 정신이 철저히 결여된 사회, 웃는 얼굴로 인사해도 그냥 그런 무반응은 점차 나를 지치게 했고, 심지어 6개월동안 그들을 냉정하고 인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까지했다.
그리고 겨울방학 나에대한 중국의 인상을 바꿀 계기있었으니... 조교님의 방문이었다. 겸사겸사 해서 놀러오셨다. 친구들은 한국에 들어갔었고, 나는 고작 6개월만에 한국을 가면 그나마 악으로 버텨오던 중국생활에 치를 떨며 다시는 들어오기 싫을꺼 같았고, 가장 큰 이유는 그 1,2달 사이 그나마 배웠던 중국어를 잊게될까봐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결국 전적으로 가이드는 내 몫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조교님 소식을 듣고 학교수업때 보다더 열정적으로 일주일을 정말 방에만 콕 쳐박혀서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한채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책만 붙들고 있었다. 아마 그 때처럼 1년 반을 했었으면 HSK10급도 거뜬했을것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자 부담감은 실전에서는 자신감으로 변하였고, 되든안되는 우선 막 말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덤비게 되었다. 학교선생님들의 정확한 발음에 익숙해 있었던 터라 정말 실전에서는 어리버리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람이란게 원래 정이 있는 동물인지라, 그들도 내가 외국인임을 배려해 조금은 느리게, 정확한 어조로 신경써서 말해주었다. 칭찬도 잊지않고 꼬박꼬박. 학교에만 갖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배우는게 아니고 그저 순수히 말만 배웠던 나에겐 정말 큰 경험이었다. 학교 밖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그들과 교감하고, 그들의 삶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이해하면서 그들이 정이 없는 냉혈한이 아니고 겸손하고, 충분히 유머러스하며, 정도 많고, 세심한 사람들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학기 더 있어야 겠다고 결정했을 때 전년도 교환학생으로 왔었던 오빠 한분이 우리에게 충고아닌 충고를 해주셨다. "년 교환학생으로 처음 중국에 왔을땐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배워나가느라 그 시간이 정말 어떻게 갔을지 모를정도로 즐겁고 빠르게 갔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순간 이젠 모든게 너무 익숙해져 정말 생활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이정도면 배웠다고 생각하여 그 안에 멈춰버린다."고...그리고 그말은 현실이었다. 어느 덧 익숙해져 버린 그 곳에서의 삶은 이미 안락함에 젔어 하루하루 시간만 축내고 무기력한 생활로 빠져버렸다. 그리고 어느날 너무 심심한 나머지 난 시작했다. 작은 노점을... 무슨 자신에서 그런일을 벌렸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꿈도 못꿨을 일이다. 계절을 잘못 선택한 탓에 일찍 접어야 했지만, 국경절 전후로 열흘정도 노점을 꾸렸었다. 생각보다 장사는 대박. 우선 한국인 학생이 했다는데에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물건도 몇시간을 돌고 돌아 찾아헤매 겨우겨우 고른 물건들만 팔았다. 그 수가 적더라도... 그리고 그건 통했다. 단시간에 단골 손님도 생기고 갑자기 내 핸드폰은 한국친구들보다 중국사람들의 번호로 가득하게 되었다. 알고 지내던 중국 친구들도 가끔 찾아와 발벗고 도와 주었다. 겨울이 다가올 수록 몸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학교생활에 적잖은 타격을 주자 아쉬움을 안고 접었다. 그리고 몇일뒤... 작은 피자집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아르바이트 생을 구한다는 종이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호기심 반, 장난 반, 하교길 나는 친구들과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곤 "한국인은 안되요?"라고 물었다. 잠깐 어벙벙해진 그 때 사장님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연락해 줄테니 연락처를 남겨달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근 2개월 반?! 그곳에서의 아르바이트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나도 색달랐지만, 잊을 수 없지만 나로인해 그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뿌듯하다.
처음엔 음식이 맞지않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보고싶은 사람을 못보고, 그저 있기가 싫다고 생각할땐 한없이 그렇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려고 이해하려고 하고, 유학생활하는 그 동안 만큼은 내가 중국의 일원이라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닮아가려 조금만 노력한다면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인 것같다. 그리고 있는동안 한국에서 했던 익숙한 패턴으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쉽지 않은 선택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더 넓은 세상을 알기위해 간 유학이라면 중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럼 조금 더 유익한, 잊을 수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