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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WON UNIVERSITY
한국전 美참전용사의 아들, 아버지와 할아버지 발자취를 찾아 우리대학 방문 - 녹번리 전투에서 사망한 해밀턴 쇼 대위의 둘째아들 스티븐 로빈슨 쇼 부부, 한국 찾아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자신이 태어난 친구 나라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며 자원 참전, 같은 해 9월 서울 탈환작전 중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한 故 월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둘째 아들인 스티븐 로빈슨 쇼 씨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한국 방문길에 올라 목원대를 찾았다. 미국 오하이오주 법원 부장판사인 스티븐 쇼(Stephen R. Shaw)와 그의 부인 버지니아 쇼(Virginia K. Shaw)씨, 오랜 친구인 브래드 러쉬(Brad Roush) 변호사 내외 등 일행 4명은 3일(일) 오전 10시 우리대학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둘러본 뒤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해밀턴기념예배당’인 우리대학교회에서 김원배 총장 등 학교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예배를 가졌다.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의 한국인 제자인 이군호 목사는 설교를 통하여 2대에 걸친 이들 부자(父子)의 값진 희생과 숭고한 한국 사랑을 추모했다. 또한, 김원배 총장은 스티븐 쇼 판사 부부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김 총장은 감사패를 통해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얼 쇼와 아버지 해밀턴 쇼가 2대에 거쳐 이들이 보여준 학교와 한국 사랑을 치하했다. 1949년 출생인 스티븐 쇼는 어머니인 화니타(Juanita)를 따라 1956년 한국으로 와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하였다.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 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지난 5월 26일(토) 서울에 도착하여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참배하였으며, 아버지의 동상과 전사기념비가 있는 서울 은평구 평화공원, 자신이 다녔던 서울외국인학교, 진해 해군사관학교 등을 찾아 아버지와 지신의 어린 시절 발자취를 둘러봤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세운 ‘해밀턴기념예배당(현, 목원대학교회)’이 있는 우리대학교를 찾아 기념예배를 드리고,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戰死)한 아버지의 기념비를 그대로 재현한 ‘해밀턴 쇼 대위 전사기념비’를 둘러봤다.
또한,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조부모와 어머니를 따라 대전을 자주 방문했던 그는, 창립이사로 목원대학교 설립에 기여한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 목동의 구(舊) 목원대 자리를 둘러보고, 할머니(애들린 쇼. Adeline H. Shaw)와 어머니(화니타. Juanita)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전쟁미망인의 자립 터전인 ‘성화원(현, 중촌교회 자리)’과 이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치던 곳인 선화동 어린이놀이터 등을 찾았다. 오늘 학교를 찾은 스티븐 쇼의 3대에 걸친 우리대학과의 인연은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890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1921년 평양 광성보통학교 교사로 한국에 온 후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후 주한미군 민간 군목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육군에 군목제도를 도입하였다. 1954년 우리대학의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을 설립할 당시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였고, 목원대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의 교육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한국의 목회자 양성과 수련을 돕기 위하여 미국에서 모금한 헌금을 기초로 우리대학에 목자관을 건립하여 목자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전국의 교역자들을 위한 수양관 건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그의 아들인 해밀턴 쇼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7년 우리대학에 기념예배당을 세웠다. 1962년 40여년간의 선교활동과 봉사활동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67년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묻혔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n Hamilton Shaw 1922-1950)는 1922년 6월 평양에서 태어나 외국인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소 한국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이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해밀턴 쇼는 1944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1948년부터 진해의 해군사관학교에서 민간인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함정 운용술을 가르쳤다. 1948년 한국의 해안경비대 창설에도 기여하며 우리나라 국군의 태동에도 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러한 깊은 인연으로 해군의 주요행사 시 그의 유가족들을 초청하고 있다. 1950년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박사 학위 과정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미 2차 세계대전 후 군복무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친구의 나라가 전쟁 중에 있는데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해군에 입대, 한국 전쟁에 자원 참전하였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정보장교로 근무하며 맥아더 장군을 도와 인천 상륙작전 성공에 큰 공을 세운 그는 1950년 9월 서울 탈환작전에 투입되어 서울의 녹번동에서 인민군과의 전투 중 28세의 나이로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잠들어 있으며, 1956년 대한민국 정부는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는 은성훈장을 각각 그에게 추서하였다. 한편, 우리대학은 이들 부자의 2대에 걸친 지극한 한국과 학교사랑을 기리기 위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지난 2010년 6월 녹번리에 세워진 기념비와 똑같은 기념비를 ‘해밀턴기념예배당(현, 우리대학교회)’ 앞마당에 세우고 이들의 소중한 영혼을 추모하고 있다. 스티븐 쇼 씨는 인사말을 통하여 “한국과 목원대에 모든 것을 바치신 조부모님과 아버님의 희생정신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길 바란다” 면서 “이분들의 소망이나 나 자신의 소망은 모두 한국의 민주통일”이라고 말했다.
김원배 총장은 환영사에서 “쇼(Shaw) 일가가 우리나라와 우리대학에 보여준 숭고한 희생과 위대한 사랑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조국수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